광교 뚝방 길에서
광교 뚝방 길을 오르려면 일 백 육 칠 개의 계단을 밟게 된다.
하나 둘 헤아리며 오르지만 언제는 백 여섯이고 어느 때는 백 일곱이다.
세며 걷는다는 게 어디쯤에선가 겹친 때문이겠지만, 이것도 나이가 들어 총기를 놓친 탓이겠다.
그러나 개의치 않을 심사다. 까짓것 백 일곱이면 어떻고 여섯이면 대수랴.
또 백 여덟이면 어떠랴 싶은 거다. 그래, 백 여덟이면 외려 좋았을 성 싶기는 하다.
백팔 번뇌라니까 번뇌 하나하나를 밟고 밟으며 오르는 심사라도 가져질 테니 말이다.
눈, 코, 귀, 입, 몸, 맘에서 느끼는 苦(고), 樂(락), 不苦不樂(불고불락)을
과거나 현재, 미래에 貪(탐)했거나 不貪(불탐)하는 것 모두가 우리 인간의 번뇌라는데
어찌 완벽하게 벗어 내고, 딛고 지날 수 있을까만, 한 두 개쯤 번뇌에 묻히고 건너뛰었다 한들
어떠랴 싶기도 한 것이다. 그래 그것도 괜찮다. 번뇌의 그 한 두 개 빠진것 그거 되려 좋다.
모든 것이 아귀가 딱딱 들어 맞는 것이 똑 좋은 것만도 아닐 성 싶다. 매사 착착 들어맞는 것보다야
한 귀탱이 어그러지고, 어느 부분 차지 않고 모자라는 곳이 있어, 그곳을 잇대려하고 채우려 할 때
오히려 우리들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것은 아닐까싶다면, 이게 더 억지스런 생각일까?
새벽잠을 잃어서였을 게다. 다섯 시 쯤 이면 일어나 앉아 신문을 펼친다.
큰 활자를 먼저 훑어보고 만화 만평에 쓴 웃음을 보태며 한참을 뒤척이고 있으면,
내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볼멘소리를 하며 내자가 나온다. 더러는 TV가 저 혼자 지글 거리기도 하고,
어느 땐 신문지는 쥔 채 코를 박고 기도하듯 엎드려 졸기도 한다. 그럴 때면 기세 좋게 한소리가 들린다.
더러는 혀를 끌끌 차면서 내 궁상떠는 모습을 보고 쟁그럽게 하는 詰難(힐난)이다.
그러나 이 야단이 화를 낸다거나 성을 내는 것이 아님을 나는 금시 안다.
관심이고 걱정이며 배려임을 읽고 듣는 것이다. 행여나 병이라도 나면 어쩔까?
탈이 생기면 어떡하나 하는 배려 차원임을 보는 것이다.
여섯 시가 조금 넘으면 으레 水原(수원) 川(천) 길을 따라 광교산 뚝방 길을 걷는 것이
우리부부의 일과다. 시간은 대략 한 시간 이십여 분 남짓 소요되지만 이제는 꽤 이력이 붙어서
시간이 많이 단축되기도 했다. 걸음걸이로는 대략 칠 팔 천 보 남짓한 거리다.
원래 천성적으로 바지런한 성격이 못되어서 걷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배가 나왔다는
-내 생각과는 다른 아내의 편견이지만-것을 가리켜 만병의 근원이라고 근심과 걱정으로 매어 놓고
몰아세우듯 나를 끌어낸 것은 아내다. 만병의 근원이라는 데야 별도리가 없다.
개 끌리듯 이끌려가면서도 불만도 토하지 못하고 따라 걷게 되니 자연 발걸음이 무거울 밖에.
신발 끌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리는지 신발 끈다고 잔소리요, 보폭이 짧다고 또 군소리다.
속에서야 에이에이 하지만 내색도 못하고 걷는 걸음이 팔자걸음이었던가 보다.
노인네 걸음걸이 같다고 또 잔소리다.
언젠가 부터는 아예 도보 여행 멤버로 가입시켜놓고 또 몰아대었는데,
그럭저럭 2년차의 연륜이 얹어졌다. 그것이 제법 걷는 맛을 느끼게 했던가.
다리에 근력도 생기고 힘이 불고 탄력이 생겼음을 느낀다. 보폭이 넓어 졌고 신발 끄는 버릇도 없어졌다.
꽤나 재미도 느끼는가 싶은 걸 보면 인간은 역시 환경 적응능력이 뛰어난 존재임을 다시 보는 것이다.
신 새벽 대문을 나서서 보부도 당당하게 걸음을 옮겨 水邊(수변) 길에 이르면,
으레 뛰고 걷는 이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들 모두가 동무다. 대화는 없어도
눈인사를 나누는 벗들이라 여겨져 반갑다. 동녘 하늘에 홀로 빛나는 曉星(효성)이 반갑고,
기웃하게 걸린 초승달의 모습이 또 반갑다.
발끝에 채는 돌덩이 하나, 귓전에 와 닿는 물소리 바람소리가 정겹고,
뚝방 길 계단을 올라 길게 숨 고르며 바라보는, 아직은 未明(미명)에 묻힌 광교 산의 모습이 곱고
저수지 아래로 깊숙이 어리 비추이는 山影(산영)이 다시 정겹다.
광교 저수지의 뚝방 길은 내 하루의 시작점이다. 어제를 돌아보는 공간이며 오늘을 여는 사색의 터다.
신 새벽 찬바람을 가슴 열어젖혀 맞으며 오늘을 恭賀(공하)하게 되는 시간이 넘쳐나는 곳이어서
더욱 사랑스러워 지는 것이다.
첫댓글 도보의 미학!!!
바로~이거다입니다^^
하루 시작할 계획을 저수지 뚝방에 서서 살살 지펴지는 물안개로 포장하면
신선해진달까 새로워진달까 의욕같은 것이 생기더라구요.
뚱이 잘 있지요? 많이 춥네요.웅크린 어깨 펴고 갈 길 찾아 봐야지요.
도보의 맛을 알게하기까지는~
참으로 긴세월...걸렸더랍니다.~^^/
106계단을 쉼 없이 오른뒤 토하듯 내 뿜어 내는 그 입김이 아직은 동트기전....검푸른 하늘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흩어질때 살아있음을 알게됩니다.
청실님~
지금은 일천육백 계단도
거뜬이 올라가실듯~
놀라보게 몸이 변하셨지요!!! 홧^^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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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길님 올 핸 더 좋은 길로 이끌어 주실길 기대할께요.
건강하시고 빠른 시간내 뵙기를 바랄께요.
이른새벽부터여행도보나설때는
나에게투정도 걷다보면길이란것이
나를정화시키고때론 다양성있는
길에매료되어 울먹일때도 길사랑
중독성이무섭네요 홍실님에잔소리가
귀엽지않으세요ㅎㅎ 좋은길에서뵈어요
안녕하세요 호수님 . 오랜만에 들어와서 인사를 못했네요.
많이 너무 많이 추우니까 꼼짝하기 싫어서 게으름만 피우고 있네요.
날 풀리면 고운 길에서 뵐께요.
이른 아침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보기 좋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