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해피엔딩
선안영
어릴적 발등 위로 독사가 지나갔다
대낮의 능금 몇 알 붉은 빛 불이 들 때
얼음 든 칠흑을 봤다. 비명 없는 천둥으로
거두절미한 한 획으로 꾸역꾸역 배를 밀며
미문에 밑줄 긋듯, 옻칠에 피를 섞듯
긴 터널 허물을 둘러쓴 기차가 지나갔다
서녘들이, 그믐들이, 공보들이 지나갔다
흰 발목 휘감았던 독 오른 똬리를 풀듯
어둠이 칭칭 동여맨 아침 달을 놓아주듯
좋은 날
한 방울 젖을 찾듯 옛 주조장을 찾아간다
봄바람 불어와 누룩 섞인 꽃들 피고
술 없는, 외로운 봄날은 어둑어둑 소금 피고
만다라 뿌리 숨은 빈 들길 가는 동안
쏟아질 듯 기우뚱 탄식도 엎지르며
웃음의 모종을 사러 간다 물이 불로 번지도록
물 빠진 저수지 같은 물금 낮아 흐린 날들
구릉마다 산수유 꽃 취기 일어 피어오르고
낮달은 양은 술잔처럼 찌그러져 찾아온다
11월, 고요히 별똥별처럼
안영아, 안영아, 불러 대던 옛집을 찾아
닻줄 같은 탯줄에 나를 묶어 잠들어야지
꽃잠을 어루만지는 자장가가 들리는 집
낮은 짧고 밤은 길어 풋 열매 가득하여
가시를 피한 날은 더 가시가 되어서는
수많은 나를 업고서 무릎이 깨졌구나
혼자인 11월에는 잎새들아 떠나가지 마
아직 뛰어내리지 마 제발 글썽이지 마
아버지 늙은 복서처럼 울면서 달려온다
초록 구유
- 몽골 테를지
저 짐승은 혹독하게 굶주린 기억이 있어
터질 듯한 배때기로 한밤중 울고 있다
마중물 한 줌 물고서 녹슨 펌프 관이 울듯
울음 바퀴 구르며 불꽃 튀는 쇳소리
찬 샘물을 끌어와 가장 높이 올릴 듯이
목구멍 활활 숨을 태워 야크가 울고 있다
초록 구유 그 안에서 물고 뜯는 흉몽이여
두 개의 뿔 사이로 휘몰아친 눈보라여
육체가 가뭄 든 정신을 놓아주는 초원의 밤
흐르는 돌
바람에 내맡긴다는 거미의 첫 줄처럼
밤이면 살얼음 언 들판을 미끄러지며
흐르는 돌멩이 하나 광야에 놓여 있다
꺾일 듯한 가는 목으로 생계를 떠받쳤던
발목 손목 쑤시고 세상 길목 짓눌러
눈꺼풀 천근만근으로 내려앉아 녹는 밤
흘러가는 돌 속에 한 여인이 갇혀 있다
성에꽃 핀 창살 밖 미궁에서 달아나듯
칼날이 엎드려 숨은 칼등을 지나간다
서쪽으로 걷는 안식일
숯불 위를 걸어온 재 된 발을 놓고 갈까
눈알에 든 모래알들 무엇으로 씻어 내나
두어라. 가엾은 오늘은 울게 그냥 두어라
못 쓰게 된 거울이어서 녹이 슨 기도여서
숨구멍 환히 열린 석양을 바라보면
네모난 구멍에 누울 흙 잠이 떠오르고
램프와 종이와 펜, 푸른 잉크 밤을 건지러
뒤돌아선 (당)신에게 도르래를 매다는데
뒤집은 모래시계 속 허공이 너무 깊다
거꾸로 타는 불
가 본 적 한 번 없는 먼 곳만 그리웠다
구두를 벗으면 피가 나는 발뒤꿈치
짓눌린 발가락 열 개를 구근처럼 심고픈
'멀다'라는 말속에는 실뭉치가 풀린다
풀어진 실오라기 외길 따라 펄럭여서
나는 또 한숨이 만드는 웅덩이에 앉아 있다
몸 사막을 건너는 말 없는 여행자는
천수관음 손처럼 천 개의 발이 돋아
칠흑의 꼭짓점들이 흰 뿔을 세운다
북향의 방
1.
지상보다 한 뼘 반쯤 낮고 습한 뒤안길
추운 곳을 향해 뻗은 가지의 끝물 같은
간신히 처마를 이어 앉힌
반쪽 날개 시인의 방
2.
천 갈래 외로움은 만 갈래 집을 찾아
뒤 쪽문만 할 일 없이 열었다가 닫았다가
돌쩌귀 삐거덕거리며
속마음이 우는 방
3.
둥글고 연하기만 한 수국 같은 무릎 꿇고
속창아리 없이 시름없이 시를 쓰고 엮느라
벌 받듯 눈꺼풀을 열어
불을 끈 적 없는 방
벌교 참꼬막
땅과 바다 그 중심 밖 끝자락을 구르며
짠 뻘만 뒤집어 쓴 골이 깊은 얼굴들
시커먼 생욕을 씻어내며 이승을 씻어내며
저녁이 달을 굴려 아침에 당도하듯
서로 엉켜 구르면서 바닥에서 씻길수록
흰 이를 환히 드러낸 고향 바다가 보인다
가장 높은 등고선 혹한을 넘어서야
뻘의 설움, 뻘의 오기, 그 오달진 맛이 난다
사람의 애간장이 녹아 잘 달여진 피 맛 같은
모녀의 모월 모일
여덟 개의 불어터진 어미 개의 젖통마다
살이 오른 새끼들은 악착으로 매달려
어미를 노란 물감 짜듯 쥐어짜서 삼킨다
젖배 곯은 니를 저리 후북이 멕였어야 했는디
목이 세서 울어 싸도 점방에서 일만 했니라
엄마는 봄볕의 어미 말로 내게 수유하시고
조팝나무 긴 울타리 꽃가지들 흔들린다
엄마야, 저리 어여쁜 아홉 꼬리나 주시지
세상을 꼬리쳐 후릴 꼬리 하나 없는 봄날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몰라도
허공의 그물코 팽팽하다 뜯어졌다
지느러미 흔들며
물고기 흘러가고
쇠 종은
풍경 추를 잃고
서녘이
돋아났다
모녀의 모월 모일 3
젖이 돌듯 수북수북 산수유꽃 피어오른다
꽃그늘 건너 건너 불 번지듯 환해져서
긴 겨울 단잠 깨우듯 풀모가지를 세운다
수술 몇 번 하고 나서 시냥고냥 앓는 내게
흑염소 한 마리를 푹푹 고아 먹이시며
탕약도 그믐달같이 기울여 먹이신다
바닥까지 긁어모은 가난한 조 몇 줌같이
따닥따닥 모여 핀 초유初乳빛 나무 아래
어미의 두 자루 가슴이 납작하게 텅 비었다
절색絶色
절벽을 뛰어내리려는 뒷덜미를 잡는다
가지 끝에 매달린 저녁의 한 잎사귀
붙들린 곧 사그라질 붉음, 꺼질 듯 파닥인다
바닥에 엎질러진 마지막 화주火酒 한 잔
아궁이에서 갓 꺼낸 잉걸불처럼 붉은 혀
완경의 제 몸 열어서 바람으로 다시 설 때
오래된 얼굴을 막장 갱 속에 벗어 두고
노 젖고 출렁이다 가라앉는 물살 따라
일몰의 일엽편주는 숨을 태워 흘러간다
- 선안영 시인의 시조집 『저리 어여쁜 아홉 꼬리나 주시지』 (2021. 문학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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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안영 시인의 시조집 『저리 어여쁜 아홉 꼬리나 주시지』
안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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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3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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