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원한 삼두리 촌놈이다.
아니 섬놈이라 해야 더 옳을 듯 하다.
나는 향수가 물씬 느껴 질때마다 혼자만의 습관이 생겼다.
이곳 대련에 아름답고 깨끗한 동해공원 바닷가로
해가 진 저녁 무렵에 홀로 나아가
잔잔한 물가에서 조약돌을 모은다.
곱고 예쁜 돌 들로만........
수북하게 모아 두고서 하나씩 하나씩~
고향 친구들 은사님들......
보고 싶고 그리운 이들을 한분씩 떠 올리며
조약돌 마다에 이름을 새겨 넣고 있노라면....
피워물은 담배 연기 틈새로 얼굴들이 커다랗고
또렷하게 나타난다.
집에 돌아 오기 전에는
그분들이 살아 가고 계실 동남쪽 바다를 향하여
하나씩 하나씩 멀리 던져 넣고는 또 터벅 터벅 걸어 온다.
그러나 오늘은 축구중계 시청으로 말미암아
그냥 집에서 끝간데 없는 향수에 젖어 이국에서의 밤을 밝히고 있다.
좋아 진 세상 덕에 ADSL 망이 이곳 중국에도 설치 되어 있기에
편리하게 컴을 사용하고 언제든 메신저로 한국 등 각국에 나가 있는
친구들과 대화를 한다.
먹고 살기 힘들었던 60년대~
어릴적 아버지는 마을분들을 규합하여 삼장 상황봉 골짜기에
숲을 베어 숯을 구워내려 멀리 목포 여수 부산 등지로 판매하기 위하여
삼두리 선착장에 큰배에 선적하여 떠나 보내고는 했었다.
보름에 한번씩 당시에 비서격으로 아버지 업무를 거들던 동네 아저씨들은
한분 한분 일한 날짜를 적은 공책을 펴놓고 알이 커다란 옛날 주판을 튕기며
포대자루에 현금을 담아 놓고 품삯을 계산 해 주고
마을분들은 한줄로 길게 늘어서 보름동안 힘겹게 일한 값진 댓가를
받아 회색이 만면하여 귀가 하고는 했었다.
손님들이 항상 끊이지 않았던 통에 도와주시는 동네 아줌마 들과 함께
어머니께서는 늘 부엌에 파고 살다시피 했었다.
안방에서 부엌으로 통하는 작은 문이하나 있었다.
음식 준비에 요리 하시느라 바쁜 아줌마들께서 걸리적 거린다며
나를 안방에 들어가 있기를 권하며 군것질 할수 있는 정도의 먹거리를
안방으로 제공해 주셨는데~
고양이처럼 낼름 다 먹어 치우고는 ........
또 행여나 하고서~
맛있는 냄새에 이끌려 부엌문을 빼꼼히 열어 놓고
그 문을 타고 놀다가 맙소사~
내 체중을 주체하지 못하고 발라당 때구르르 굴러 떨어져
들어 간곳이 마침 부뚜막에 타다남은 장작불을 시뻘겋게 모아 두고서
생선을 구울려고 준비 해둔 위로 배게 삼아 벌렁 누워 버렸다.
당시에 뜨거운 숯덩이 들은 나의 뒤통수에 녹아내린 머리카락과 함께
한참을 붙어 있다가
나~죽는다고 울어 대는 꼬맹이의 비명소리에 놀라 경황중에 뒤늦게
구출에 나선 아줌마들 덕택에 뒤통수에 붙은 불덩이들은 바로 제거되긴
했지만 지금도 그 당시의 흉터가 박박 머리로 밀어 놓고 보면
몇 개가 남아 있다.
멀리 대도시에서 찾아 온 손님들께서는 언제나 막내 아들인 나의 몫으로
선물을 사왔다.
당시에는 상상하기 힘들던 나이론 쉐터 운동화 등을 받아서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내가 5살때에는 사업에 바쁜 아버지께서 또 군청에 명예이사? 격으로
간혹 읍내 군청에를 나가시고는 했었다.
무척 기쁜 마음으로 따라 나섰다.
읍내에 갈때마다 그토록 맛있는 짜장면을 꼭 사주시고는 했기 때문이다.
그날도 읍내에 도착하여 군청앞 오복상회에서 팽이를 몇 개나 사주셨다.
어린 시절에도 우리는 형들과 함께 앞뒷산에서 팽이를 직접 깍아서
가지고 놀았기에 공장에서 깨끗하게 만들어 파는 것이 정말 좋았기에
큰 자랑 거리가 아닐 수 없다.
아버지는 나를 군청 건물 안에 들어 가시면서 회의를 해야 하니까
들어오지 말고 회의실 밖에서 어디 가지 말고 있으라 하시고는 들어 가신다.
남자 여자 직원들이 근무 하는 넓은 사무실에 나를 두고서 더 깊숙한 회의실로
들어 가신다. 매정하게도....
어린 나에게는 이따금씩 말을 붙이는 군청 직원분들이 부담 스럽고
그 시간이 기다리기에 너무나 지루했다.
밖에 나오니 마당을 지나 정문 양쪽에 총을 들고서 출입자를 지키는
군인 아저씨들이 있었다.
나를 불러 세우고 아버지를 기다린다는 나에게 그들은 아마도 장난 말로
니네 아빠 진즉에 가셨다! 며 거듭 확인 하는 내게 분명 그랬다.
배신감으로 가득찬 나는 집에 가서 그 이유를 따져 묻고 싶었다.
뒤도 안 돌아 보고 서부 길로 버스를 타고 왔던 그 길을
갖은 통밥을 다 굴려 가며 걸어서 왔다.
걷고 또 걷고........
망성리를 지나 석장리쯤 지나오니 몇 명의 아이들이 길을 가로 막는다.
팽이를 빼앗으려고 한다.
결사 항전으로 빼앗기지 않고 시달림을 받다가 풀려난 나는
또 앞으로 앞으로 걸어 나간다.
급기야 정도리 구계등 앞 가게까지 당도 했다.
구멍가게 앞 평상에 앉아서 노닥 거리는 그 동네 누나들 셋이서
또 나를 붙잡는다.
얘야~ 너 누구니? 등등.......
사실대로 고했더니만 못가게 붙잡는다. 무지 염려 하면서~
자고 내일 가라고......
사실 날은 어두워 질텐데 어린 나는 배도 고프고 막막 해 오기 시작 했다.
그져 닭똥같은 눈물이 금방이라도 쏟아 질것만 같은데도 꾹~꾹~
눌러 참으면서 그 아가씨 누나 들이 건네 주는 아이스크림을
빨아 먹고 있을때였다.
바로 그때 멀리 읍내 쪽에서 찦차가 한대 손쌀 같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온다.
내 앞에 끽~ 하고 멈추면서 아버지와 동네 아저씨들이
함께 내려서 나를 번쩍 안고 차에 테운다.
심마니들이 산삼을 보고서 심봤다~ 를 외 치듯.......
아버지께서는 감계무량한 듯 연신 아가씨들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건넨다.
이리하야~ 나의 고귀한 막내 아들의 역사는 다음날도 이어 갈 수 있었으며
귀중한 팽이를 친구들과 함께 가지고 놀수가 있었다.
지금처럼 핸드폰만 있었다면 ....
그 고생은 안해도 되었을텐데~
1968년 어느날 김종필씨가 국무총리로 있을때
그 분이 완도를 오신단다.
어린 나는 원동에 공사 하던 완도대교가 완공되어 기념 축사를 하기 위하여
오시는 위대한 분 [국무총리 님] 본답시고
마을 친구들이랑 이십리 길을 걸어서 걸어서
원동까지 갔다가 국무총리 낮짝 한번 보고 돌아 온적이 있었다.
달도에 있는 이모님 댁을 다니러 가시는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몇 차례
갔었던 그 나룻배 길을 이제는 차를 타고 또 걸어서도 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그 다리가 완공되던 그날!
우리들은 다리를 걸어서 달도까지 갔다가
또 다시 걸어서 삼두리에 돌아 왔다.
배고픈줄도 모르고........
엊그제 찾아 본 완도군외중학교 동문 카페에 올린
박헌씨의 사진 제공으로 인하여
정겨운 사진들을 보고서 몽땅 내 컴으로 복사를 해 두고서
보고 또 보고...........
절반은 고향에 간 듯 하여 너무나도 좋다! 감사 드린다.
다시 또 북경에 있는 친구에게 보내주면서
소개 했더니만 역시 좋아라 한다.
언젠가는 손님으로부터 아버지께서 동백나무 분재가 심어진 화분을 선물 받았는데
그 꽃이 피기전에 딱딱하고 둥굴게 맺힌 꽃망울을 전부 다 따내어
마당에서 구슬치기를 하다가 아버지께서 대노 하시어
나의 뒷 머리카락을 통째로 잡아 끄신 바람에
머리통에 불이 난 듯 아팟다.
혼이 난 후 열받아서 한참 동안 마당 구석에서 삐져 있던 나를
아버지께서 다정 하게 다시 부르신다.
손님하고 앉아 계시면서......
방에 들어 가니 아버지께서 재떨이를 비어 오라신다.
그러나 분명 [재떨이 좀 버리고 와라~] 그러셨다.
그 의미를 왜 모를까 만은
나는 그만 마당 구석에 재떨이 통째로 내다 버리고는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데
마냥 기다리던 아버지께서 금방이라도 재가 떨어질 듯한
담배를 들고서 왜 재떨이 안 가져 오는가? 라고 물으시기에
버리라고 해서 버렸어요!!
당시에 가정에서 밀주(막걸리)를 담그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어
산발적으로 군청에서 술조사가 나왔다.
마치 암행어사처럼 당당하게 집집마다 담아서 감추어 둔 술독을
찾으려고..........혈안이 되어 뒤지고는 했었는데
마을분들은 술조사가 뜬 날이면 온통 [1급 비상사태] 로 돌변했다.
법원에서 발부한 수색 영장 같은 말도 모르던 시절 이었기에~
술이 많이 소요되는 시점을 맞추어서 가정마다 누룩을 쪄서
막걸리를 담구어 마셨기 때문이다.
원동리에 있는 양조장 술을 실은 화물차가 하루 한차례씩 동네
주막집들에게 배달 하고 돌아 가고는 했었는데....
애주가들은 모두 가 배달 시간을 잘 알고 있었다.
매일 오전 11:00 경에는 어김없이 오기 때문이었다.
집집마다 우리는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서 주막집에 가서 한되씩 사서
담아 가지고 온다.
정거장에 있는 가게에게 사올때에는 오는 길 밑 논가에 위치한
작은 마을 공동 우물이 있었다.
달작지근한 막걸리는 입에 그 맛을 붙이면 계속 마시게 구미가 당긴다.
홀짝 홀짝 마시다 보면 금새 줄어 들어 들통 날것이 뻔한지라
반드시 그 우물가에서 셈물로 적정량을 다시 체워서 갖다 드리면
마시던 손님들은 어째~ 오늘은 맛이 좀 싱거운 듯 하네~ 하시면서
전혀 눈치 못체고서 마신다.
정말로 10살도 못되어 몰래 마시던 그때 막걸리 맛은
참~ 맛있었는데......
이곳 중국에는 막걸리를 찾아 볼수 없어서 아쉽다.
아버지를 향한 나의 전무후무한 반항적 행동 이었다.
이후 내가 14세 되던 때에 49세의 짧은 연세로
심장 마미 인 듯 거짓말처럼 돌아 가셨기 때문이다.
형들도 모두 마을의 사랑방으로 놀러 나간 밤에
나와 얘기 하시고 멀쩡하신 아버지께서~
14세 어린 나만이 임종 순간을 지켜 본 셈이다.
구멍가게에 완도읍내의 '신진사'라고 하는 제과도매업 회사차가
날마다 과자상자를 듬뿍 싣고 구멍가게 마다에 보급하고 돌아간다.
비탈진 신작로 언덕을 느리게 오를때면 숨어있던 우리 개구쟁이들은
날쌔게 따라 붙어 과자를 바닷가 언덕배기로 박스째 던져 놓고 뛰어
내린 후에 승냥이 떼처럼 나눠 먹기 바쁘다.
붙잡히는 날에는 맞아 뒈질 각오로 말이다.
그런데 역시 완도읍내에 '신미당'이라고 하는 아이스케잌 만드는
얼음과자 집도 있었지만 그 차는 냉동차여서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고
군침만 흘려야 했기에 날마다 파란통을 어깨에 메고서 동네에 나타나
아이스케~잌 아이스 케~잌 하고 외치는 소리는 당시에 내 귀에는
아이스 깨~끼 라고 들렸고 돈이 있을리 만무한 우리는 빈병을 찾아 들고
바꿔 먹고는 했는데 어찌나 그 맛이 좋았는지 지금도 군침이 돈다.
김 양식을 하던 겨울 철이 오면
개도 천원짜리 한 장씩 물고 다닌다는 말이 있었지만
막상 김생산이 종료되는 이른 봄이 되면 곧 바로
대부분의 각 가정들이 곤란해 지고는 했었다.
겉보리라도 생산되는 때까지는 어려움을 버티어야 했기에
이자가 비싼 조건에도 빌려 쓰기도 하였다가 이듬해 또 김을 생산해서
되 갚고는 했는데....
이 과정에서 예상되는 폭리를 취하는 고리 대금 업자들의 배만 불리게
해 준 일이 다반사 였다.
내용인즉~
돈을 얼마 빌리고 나서 김으로 갚는 조건이다.
겨울이 되어서 김을 생산하면 일본으로 수출 나가는 수출품중 특등품으로
되 갚는데 미리 그 김값을 형편없는 낮은 예상 가격으로 정하여 돈을 빌린다.
그러나 이윽고 김이 생산되어 그때의 값은 너무나도 차이가 커서
돈놀이를 하는 이들은 많이 벌게 되어 있었다.
뻔히 알면서도 아쉬운 나머지 그 돈을 빌려쓰고
갚느라고 진땀을 빼고는 했었다.
그러다가 또 돈 없으면 또 빌려야 했고........
당시에 삼두리 강변에 있던 마을 창고 앞마당 마을회관 등에서
일본으로 수출하기 위하여 완성 포장된 김 상자를 다시 열어 일일이
검품을 하여 특등, 1등, 2등, 3등, 그리고 등외 품으로 구분하여
큼직한 도장을 찍어 전표를 끊어 주었다.
당시에 [군외면 어업협동조합]. 어협직원이 기세가 등등했다.
김 값을 메기는 검사의 권위와 세도가 보통이 아니었으니
오늘날 올림픽 축구의 주심을 맡은 이가 한번 휘슬을 불면 끝나는 것처럼
그들은 햇빝에 김을 요리 저리 비추어 보기도 하고
10장씩 접어 그걸 또 열개씩 가지런히 포개어 100장이 되도록 하여 흰종이띠로
예쁘게 잘 묶여진 것을 김 한톳이라 불렀는데~
흰장갑을 낀 손으로 빠르게 펼쳐 안밖의 품질을 훑어보는 그 검사 기술은
가히 신기에 달했고 어린 나의 눈에는 경이롭기 까지 했다.
리어커에 김상자를 싣고서 마을분들은 줄지어 늘어 서 대기 하다가
모두들 인산 인해를 이루어 이웃집들의 김 검사 결과를 나타내는
전표를 서로 돌려 보고 자기집의 등급을 미리 점쳐 보다가
예상외로 등급이 낮게 책정이라도 되면 금새 울상이 되고
항의조로 변할 수밖에 없기에
어떤분은 희희낙락 어떤분은 울상이고 각양 각색이었다.
이곳 대련에 거주하고 있는 약 3만여명에 달하는 한국인들을 겨냥 하여
각종 한국식품 파는 슈퍼나 일부 시장에 가면
중국산 김과 함께 한국에서 건너 온 김을 함께 팔고 있어
쉽게 구매 할수가 있다.
신통하게도 이곳까지 건너와 팔리고 있는 [완도김]이라고 선명하게 쓰여
있는 것을 보고 무척 반가웠다.
나는 기회 있을때마다 김을 생전에 먹어 보지도 않은 이곳 친구들이나
한국식 식당에 들릴때마다 애용 하라고 권하기도 한다.
김 한장 속에는 계란 두개분의 영양소가 들어 있노라면서~
위로는 현재 대방동에서 살고 계신 누나 1분 밑으로
내리 아들만 4형제중에 나는 막내 아들이었으니
군외남국민학교에 들어가면
나는 7살에 초등학교를 입학하여 다른 또래 친구들에 비하여
키도 작아 항상 반에서 2번정도 했다.
그런데 언제나 수학공부도 잘하고 키가 크고 주먹도 큰
이상우와 또 그들 사촌 형제간인 이상동
4학년때 갈문리에서 이사를 와서 상우네 앞집에 살던 미남 정광운.
강변 신작로 길위에 살았던 양광섭.
정거장에 살던 박현제.
윗동네에서 살다가 정거장으로 새집을 지어 이사왔던 박헌.
교장선생님의 아들이었던 동갑이면서도 1년 후배인 박행문.
우리들은 정말 눈만뜨면 다시 만나고 잠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근질 근질 하여
상우네 집 방에 모여서 하루종일 파고 살았고
전년도 빳빳한 미술 교과서등을 뜯어내 접어 팔이 아프도록
딱지치기를 하고, 구술치기와 요까라고 부르던 크고 작은 막대기
두개를 가지고서 구멍을 파서 기대놓고 자치기를 하면서
날아온 새끼 자치기 막대를 이마에 맞기도 하고......
야구처럼 공수를 교대해 가며 놀았던 자치기는 참 즐거웠다.
어른들 몰래 우리들끼리서 초등학교 5학년때
영전리 앞에 있는 연출이라는 무인도에까지
노를 저어가서 놀다가 비를 만나고 물에 빠진 생쥐꼴로
돌아 올때는 하늘의 구름들 동향이 수상 쩍더니만
아니나 다를까 풍랑이 일기 시작 하는데
초등학교 5학년이던 우리들 강변 친구들 5명의 무인도 탐험 결사대는
기진 맥진 죽는 줄 알았었다가
그래도 살아라~ 하는 팔자인지 용케 살아 올수 있었다.
그 이름도 거룩한 박행문 박세왕 정광운 이상우 이상동....
아마도 지금쯤 집대문하고 맞붙어 있는 방파제를
바로 옆방처럼 드나들며 홑이불 하나 들고서
여름밤 침실로 이용하는 김형관이를 비롯한
모기 피한 방파제 투숙 객들이 있으련만.......
술마시고 방파제 잠다가 바닷물로 굴러 떨어진 아무게 처럼
안전사고 나지 않도록 해야 할텐데~
여름밤 방파제에 누워 하늘을 가르는 유성을 찾기도 하고
낮에 입수한 정보를 근거로 침투조를 편성한 다음에
팥죽쑤어 남은 량을 장독대에 올려 놓은 것 쌔비쳐 오는 작전 개시~
통째로 가져다가(훔쳐다가) 얌전하게 합동 식사 한 후에
빈 그릇만 다시 올려 놓는 얌체 노릇도 참 고소 했는데~
우리는 늘상 상우네 집에서 모인 다음에
그날 그날 일정을 모의하여 마당 남쪽 담장을 훌쩍넘어가
초등학교 화장실을 돌아서 운동장으로 나아 가고는 했다.
학교 바로 뒤에 살던 이상동이네 집은 학교 관사로 사용 한다며
초등학교 2학년 되던 해에 학교 바로 서쪽으로 이사를 했다.
어차피 그 집이 선생님들이 사시던 관사였지만
서로 맞바꾸었던 것이다.
밤이면 후레쉬를 들고서 학교 처마 밑을 더듬어 참새를 잡았고.
낮이면 회초리 하나씩 들고서 논두렁을 휘저으며
개구리와 꽃뱀등도 잡고,
달밤이면 학교 운동장에 나가 형들 누나들 그리고 친구들과 함꼐
강강수월래도 하고
대보름날 밤 횟불을 들고서 논두렁을 태우고
학교 뒷뜰 양어장에 팔뚝만한 금붕어를 종일토록 감상하기도 하고
학교 일을 보시던 소사 아저씨를 따라서 나무를 관리 하기도 하고
바닷가 바위들을 밟고 지나 갱천물 백사장에 도착하여
온종일 수영하고 나서 소금기에 찌들은 몸을
다시 또 삼장부터 흘러 내린 냇물 하류에 가거나
동네 돈두렁 사이에 있던 작는 농업용 우물로 가서
몸을 행구는 바다물로 육지 민물로 번갈아 가며
여름이면 온통 물속에 파고 살다시피 하느라 아프리카
흑인들 처럼 우리 도무들 여름내내 시켜멓게 그을린 얼굴에
눈동자만 초롱 초롱 했었다.
바닷물 속에서 물장구를 치면서도
구구단을 외우고
1969년 12월 5일날 부터 전국민에게 선포 되어
각종 행사때마다 읊조리게 했던
[국민교육헌장]을 달달달~ 외우기도 했다.
우리는 오늘날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테어 났다.........
바닷속 갯뻘에서 케낸 진질뿌리를 잘근 잘근 씹으면서~
알몸 뚱이로 바닷물 빠진 갯뻘을 뒹굴며
꼬막과 바지락을 케고 낙지를 잡기도 했다.
앞산에 뗏밤 나무를 훒거나 산딸기 멍나무 줄기를 더듬어
잘 익은 멍을 따고 칡뿌리를 쳐내고 중노동 하여 맛갈진 칡을 케어
몆날을 두고서 먹기도 하고.....
흔한 냉감을 따 먹고 정금이 검게 익어갈 때면 주둥이가
시커멓게 한움큼 따 먹고 운 좋게 산딸기와 밤나무를 발견하면
정신없이 가시에 찔려가며 모조리 뱃속으로 가져갔다.
들판에 심어 둔 콩깍지와 고구마를 뽑아다가
냇가에 떠내려온 양철 바케스 찌그러진 것 위에 올려 놓고
불을 피워 구워 먹는 것으로 군것질을 자급 자족 했었다.
삼두리 동네라고 불렀던 본 마을의 입구를 아랫춤이라 불렀고
그곳에 외지에서 이사오신 분께서 맛나게 붕어빵을 구워서
우리들의 입맛을 돋구웠다.
바로 위 친형의 주동으로 우리집 쌀독을 퍼담아서
그 집으로 가져가 붕어빵을 배터지게 먹고 형으로 부터
너 엄니에게 일러 바치는 날에는 주~거~따!! 하고
함구령을 받기도 했다.
김발에 잘못 붙은 진녹색 매생이는 볶아먹든 끓여 먹든
어찌해도 감칠 맛이 났었고 지금도 그 맛이 그립다.
30여년이 훌쩍 지난 옛날 초등학교 시절에도
당시에 학교자체의 교내식당 점심이 있었다.
자랑스러운 군외남국민학교 뿐이 아니라
아마도 전국이 그러했을 것이다.
미국에서 원조 받은 밀가루와 강냉이 분유가루를
나누어 주기도 하였고
학부모님들을 당번제로 돌아가며
학교에 가서 큼직한 가마솥으로 밀죽을 끓여서
점심때면 빈 도시락과 소금만을 들고서 줄지어 선 우리들에게
배식 해 주기도 했다.
이따금씩 마을분들의 신고?가 접수되면 우리는 석유통 등을
준비하여 땅벌 집도 소탕하는 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여름이면 학교 남쪽 운동장가에 있는 플라타나스 나무 그늘이
참으로 시원하여 어른들께서도 모시 옷을 입고 부채를 부치며
그늘에 모여 장기를 두고는 했다.
온종일 우렁차게 매미가 울고 뙤약볕에도 아랑곳 않고
우리들은 또래별 동네별로 편을 나누어 매일 같이 축구를 했다.
미간지 세네미 소라데미 웃동네 강변 팀 등으로 나누어서~
그런데 축구 할때면 모두가 심판이라도 되는 듯
걸핏하면 규칙을 따지고 경기는 맥이 자꾸 끊기기 일쑤였으나
다소 불만 스러워도 나이 많고 주먹이 쎈 형이 있는 팀이
언제나 유리 했으며 결국은 따지다가도 복종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삼두리에도 오늘날 김병지 이운재 김동광으로 이어지는 골키퍼 계보가 있듯
박경봉 박삼순 강인섭 등으로 이어지는 골키퍼 계보가 있었고
이들은 모두 뛰어난 방어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언제나 마을 대항 축구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 냈었다.
나 역시 특출한 실력은 없지만 지구력이 좋았다.
중학교 시절에는 삼두리 선창에서 방파제를 왕래 하던 실력이 인정 받아서 인지
학교 대표 수영 선수로 발탁되어 완도 읍내 대회에 나가 2등도 한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완도군 대표 수영선수는 곧 전라남도 선수로 우대 받던 때 였다.
광주에 있는 체육고등학교로 발탁 될 시점에서 역시 육상을 하며 한때 날리던
셋째형이 극구 반대 하여 그만 두었다.
키도 조금한 녀석이 수영은 무슨 얼어 죽을 수영 이라고~ 하면서....
군외남초등학교 운동회가 열리는 날에는 의례껏 일반 성인들이 참가하는
마라톤 대회가 매번 있었는데 고등학교 시절에 축구대회가 있어서
연 사흘 동안 뛰고 나서 발등에 상처가 생긴때 하필 초등학교 운동회가 열였다.
어느날 갑자기 아무런 계획도 없이 운동회 한다기에 불쑥 들린 나~
교련복에 농구화 차림새로 오른 발등을 붕대로 감고 절퍽 거리며 걷다가
불현듯 참가를 해서 뛰었다.
왜 그리도 미련하게 무모한 짓을 햇었는지?
그 마라톤을 완주하고 나서 한동안을 덧 난 상처 때문에 고생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온 마을 주민들이 응원하는 가운데에 중도에 포기 할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김형관이는 사진기를 들고서 운동장을 수십바퀴 도는 나를 찍어 주기도 했다.
마라톤에 쟁쟁한 마을 형들이 참가 했는데 얄밉게도 예상을 깨고서
나는 우승을 하여 부상으로 주었던 솥단지를 받았다.
내 인생에서 마라톤대회에 나가서 1등을 한것이다.
중학교를 늦게 들어 간 턱에 동생들과 다니던 중학교때는 제법
골목 대장 노릇을 하며 다녀서 인지라
축구 배구 테니스 등의 운동에 취미를 붙여 학교대항 무슨 무슨 대회가
교육청 주최로 열릴때마다 뽑혀서 묻어 가고는 했었다.
군외중학교 운동회때에 빨리 달리기 운동장 돌기 자전거 대회에 참가
앞서가던 1등 2등이 모두 걸려 넘어진 통에 3등으로 가던 내가 운 좋게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중학교 때에는 일명 박세왕 배 마을대항 축구대회를 주최 하기도 했다.
왜 그리도 축구 경기에 몰두 했었는지?
그 열의로 공부를 했었더라면?
하교하여 학교가 있던 원동에서 삼두리까지 돌아 오는 버스 비가
20원이었는데 그냥 줄지어 걸어 오다가 그 돈들을 걸고서
갈문리 우슬재 숲 가운데에 있는 잔디밭에서 축구 경기를 하여
군것질을 했었다.
배 고픈 것들도 참고서~
어둑 어둑 컴컴 해진 시간에 땀에 젖은 교복을 입고서
배는 고프고 축 늘어진 책가방 끈을 메고서
무섭다는 공동 묘지를 지나서 올때에는 서로가 일부러 말을 붙여 가며
식은 땀까지 흘려가며 공동묘지를 벗어나 마을 쪽으로 들어서면
그때야 안도의 숨을 쉰다.
공동묘지를 통과 하는 황토 밭길을 지날 때 유난히도 길을 뒤덮을 만큼
우거진 소나무 숲은 정말 으시시 했었고 누군가 머리 뒤통수를 잡아 끄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었다.
이렇듯 갈고 닦은 축구 실력은 나중에 일명 청해제라고 불리던
완도군민의 날(8월8일)에
군외면 축구선수 한명으로 뽑히는 영광까지 있었다.
삼두리 촌놈이 무지 출세 한 기분이 들었었다.
지금도 TV 출연하는 불목리 출신 김창숙씨가 군민의 날 전야제
노래자랑 행세에 출연하여 신기한 듯 보기도 했다.
예~ 예~ 예~ 예~..................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그 날밤 김창숙씨가 고향에 와서 불렀던 노래가 생각이 난다.
당시의 축구공이라 해 봤자~
어쩌다가 생긴 고무공은 이내 금새 터지고.....
차라리 짚을 뭉쳐 만들어 새끼줄로 꽁꽁 동여 맨 공을
검정 고무신에 신딸미를 하고 노는 것이 속이 편했다.
간혹 명절때를 앞두거나 할때에는 마을 어른들이 의논하여
돼지를 잡아서 집집마다 부위별로 나누어서 각 가정으로 돌려졌다.
그러면 마을분들을 위하여 기꺼이 희생당한 돼지 값은
집집마다 일정하게 골고루 거두어 지불되어 진다.
고기를 희망하는 가정들의 숫자만큼이나 부위별로 정교하게 나누는데
이때 우리 꼬맹이들은 돌아 가실 운명으로 낙점된 돼지가
우리안에서 붙들려 나올때부터 졸졸 따라 다니다가
칼을 들고서 고기를 나누는 분으로부터 옛다~ 하고 던져 주는
돼지 오줌통을 차지 하는 기쁨!
바로 그 기쁨을 만끽 하고져 행여나 기다리다가
그걸 받아 들고서 밀짚대를 꼽아 넣고서 힘차게 입바람을 불어 넣고
입구를 끈으로 잡아 묶으면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자연 축구&배구공이
탄생 된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여 밟기라도 하는 날에는 금새 뻥~ 하고 터져 버리고
좋은 공~ 기쁨 끝! 이 되어 버린다.
우리 마을 삼두리 강변에는 대리산이라 불리는 아담한 산이 있어
정거장 쪽 길을 통해 그곳에 오르면 놀기 마땅한 널찍한 산소들이 있어
자주 찾아 놀았다.
야구공을 대신하여 솔방울 따서 약식 야구 놀이를 하기도 했다.
간혹 이곳 중국에 있는 명산들을 들리게 되면....
(사실은 무지 좋지만서도~)
좋기는 뭐~ 대리산 만도 못하구만~
상황봉 만도 못하구나! 라고 중얼 거리노라면
옆에 있던 동행 한 이는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나!
하는 눈치로 물어 온다.
대리산이 어디고 상황봉은 어디 있나요?
그 산들이 그리 멋진가요?
금강산이 좋다는 말은 들어 아는데........
김을 말리는데 필요한 발장을 치기 위하여
멀리 제주도에서 사들여온 띠를 곱게 잘라서
한줄 한줄 일일이 밤새워 가며 엮는 작업은 동네 사람들 모두 해야만 하는
매년마다 아주 필수적으로 중대한 가을내내 작업이었다.
어찌보면 이는 사람 죽이는 고된 작업 이었으며
동네 청춘남여들의 밤시간을 모두 빼았아 갔다.
요즘은 일명 나이론 김발이 생산되지만 예전에는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고 새끼줄을 꼬아서 토방위에 걸어둔
대발을 치는 시설에서 하루 온종일 발을 엮어서 김생산에 사용했다.
김을 건조시키기 위하여....
초겨울이 되면 짚을 준비하고 짚과 씨름하느라 온통 마을이 분주 하다.
추수가 끝난 삼두리에서 들판 논에서 생산되는 짚은 턱없이 모자라기
때문에 멀리 해남 현산면 등지에서 큰 트럭을 동원하여 짚을 사서 실어 온다.
나도 어릴때 짚을 실으러 아버지를 따라 해남 등지에 다녀 본 적이 있다.
5일장이 열리는 원동장터에 까지 가려면 20여리를 걸어 가야만 하는데도
궂이 만류하는 어머니를 따라가 맛있는 엿을 먹기도 하고
어떤날은 운좋게도 약장사들이 펼치는 굿판을 구경 하기도 했던 기쁨처럼~
돌아 올때는 짚을 가득 실은 트럭 앞에 타고서 눈깔사탕이라 불리던
오다마를 빨고 붕어빵을 먹으면서 신나게 오는 기쁨이 있기에
나는 늘 따라 가겠다고 졸라서 그렇게 했다.
이들의 짚들은 크게 두군데에 쓰였다.
마을분들이 돌아가며 품앗이로 마당에 앉아서 온종일 나람을 엮어서
초가지붕을 갈이하여 겨울날 준비들을 하고
또 더 많은 나람을 엮어서 김을 건조 시킬 건장을 만들어야 했다.
약 2.2m 높이로 짚으로 된 담장을 만드는 셈이다.
새벽 잠을 떨꿔 일어나 하루 일을 시작하는 김생산 과정은 참으로
복잡 했고 온 집안 식솔들을 바쁘게 만들었다.
남여 노소가 다 필요했던 지라~
바다의 김발에서 뜯어 온 김 망테기를 큰 돌맹이와 틀을 이용하여
바닷물기를 완전히 짜내어 툇마루 등지에 털어 놓았다가
밤 늦도록 김과 파래가 섞인 것을 조금씩 가져다가 밥상위에 올려 놓고
통하나에는 파래를 담고 또 하나에는 김을 담는 식으로 분리 작업을 해야만 했다.
졸리니? 하고 물은 가족들에게
아니! 하면서도 허벅지 살을 꼬집어 가면서~
그토록 애써 온 가족이 참여하여 일을 하는데 비 한다면
결과적으로 손익계산을 따지고 보면 웃기는 결과 였다.
번번히 중고등 학생을 둔 가정마다에서 수업료를 내야 하는데
자꾸 미루어 져서 이제는 서무과에 불려 다녀야 하므로
수업료 없이는 학교 안가겠다며 우는 애들이 집집 마다 태반 이었으니
말이다.
이튿날 새벽같이 일어나 다시 기계에 한움큼씩 넣고서 국수처럼 잘게 썰은 다음에
바닷물로 민물로 번갈아 가며 씻어서 한 댓박씩 기술좋게 발장에 쏟아 부으면
한 장의 물에 젖은 김의 형태로 만들어 진다.
적절하게 모아진 물에 젖은 김발장을 들어다가 날카롭게 깍은 대나무 핀을
양끝에 꼽아서 건장에 고정하여 태양열에 말리는 것이다.
날씨 좋은 날에는 너무 빨리 말라서 김 등판에 금이 갈라지는 통에는
마음들이 바빠진다.
집에서 날라온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지켜 서있다가 마른 김을 추려 가며 거두어 벗겨내고 나면
수북하게 발장 무더기가 만들어 지는데 바로 이 발장을 또 내일 사용 할 수
있도록 가지런히 추려서 김가루가 뭍어 있지 않도록 비벼 털어서 쌓는 일이다.
바로 이 발장 추수리는 일이 집집마다 꼬맹이들 역할로 돌아 갔으니
이걸 일찍 끝낸 집 친구들은 멀리 보이는 학교 운동장에서 벌써 모여
축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왁자지껄 하고 공차는 소리가 들린다.
마음은 벌써 운동장에 가 있는데...... 할일은 아직도 멀었다.
때로는 아침에 건장에 널어 둔 김이 마를동안 잠시 축구를 하기도 하였다.
학교 운동장 서쪽에 바다가를 사이에 두고
남쪽에 성환이네 집 그 뒤에는 상동이네 집
그리고 그 뒤에는 형관이네 집이 있는데
뻑~ 하면 공이나 신발이 날아가 형관이네 집 장독에 걸치거나
상동이네 행랑체 담벼락 사이로 날아 가기 일쑤였는데
형관이네 툇마루 밑은 공을 보관하는 장소가 되기도 했는데
어느날은 형관이네 개가 물어 뜯어 못 쓰게 만든적도 있었다.
자상하여 늘 우리 편을 들어 주던 나보다 두 살 위의 앵자 누나 밑으로
쌍둥이 같은 의좋은 아들 둘이 있는데 김형관 김형곤 형제 였다.
학교 근처에 살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아뭍튼 이들 두 형제는
특출나게 축구를 잘 하는 솜씨가 있었기에
우리 들 중에는 늘 자기편에 형관이 형곤이 형제를 끼워 넣을려고 했다.
물론 삼두리에는 이 밖에도 강인배 박용국 박길준
이덕수 김철수 등 모두 들 축구를 참 잘 했었다.
학교 수업 시간이 끝나서 갈길이 먼 당인리 친구들이 집에 돌아 가겠다는 걸
주먹 다짐으로 궂이 붙잡아서 허리춤에 책보따리를 붙잡아 메고
보따리 안에든 필통에 연필소리~
도시락에 젓가락 부딪히는 등이 소리가 요란하게 나도록 뛰어가는 당인리
동무들은 멀리서 야~ 니네들 빨리 오지 못해 하고 협박하는 삼두리 형들에게
재수없게 걸린 날에는 어두어 질때까지 꼼짝 못하고 함께 공을 차고 가야만 했다.
모자란 선수를 메우기 위한 방법으로 걸핏하면 당인리 친구들이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보고싶은 당인리 정남익 차영 허종원 허종이 최병철 등의 친구들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왜 그랬는지?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미안할 일이다.
학교 옆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당인리 친구들이 걸핏하면 삼두리 친구들에게
차별 대우를 받아야만 했었다.
우리들은 겨울이면 초등학교 복도에 물 청소 대신
양초를 칠해 놓고 마른 걸레로 문질러 댔다.
또 그 걸레를 타고서 마치 스키놀이를 즐기듯 하기도 하고
미끄러운 복도 바닥에서 동료들과 번갈아 말을 태워 주기도 했다.
메일 같이 신나게 놀기를 좋아 하던 우리네 모두들은
이따금씩 성적 통신표를 받아 들고 학부모님 도장을 받아 오라는 선생님
지시를 가장 두려워 했다.
또한 전교 학생들이 운동장에 줄지어 서서
공부잘하여 우수상 착하다고 모범상 등 학기가 끝날때 마다
친구들 상을 받을때 박수나 치는 우리들 모습이 가장 부끄럽고
부럽기도 하고, 시험 보려고 시험지를 받아 들고서
답안지에 엉터리 답을 긁적 거리고 있을때만 잠시
나도 공부좀 열심히 해야 할 필요가 있구나! 라고
느끼다가도 이내 작심삼일...........도래미 타불이고
눈만 뜨면 놀기에 여념이 없었다.
김을 양식 하기 위해서는 물좋은 자리를 해마다 마을회관에서 어촌계장을 선출하고
제비 뽑기를 하여 바다의 구간을 정하기도 하였는데
언젠가는 당인리와 삼두리 간에 바다 경계선을 놓고서 바다에서 실제
전쟁을 치르기도 했었다.
마을의 모든 전투 능력을 총 동원하여 망치 낫 삽 곡괭이등 모든 무기가
될만한 것들을
총동원하고 마을의 힘께나 쓴 다는 이는 모두 나서서
배 한척에 몇 명씩 나누어 타고서 당인리와 삼두리의 바다 경계쯤 될만한
작은 여~ 와 큰 여~ 부근에서 양쪽 마을 배들이 만나서 서로 물고 뜯는 싸움으로
결판을 내자고 약속 하고는 실제로 그렇게 했었고 바다 위에서 온종일 전쟁을 하여
많이 들 다쳐서 병원에 실려 가기도 하고
원동 지서에서 경찰과 군 어협 배들도 출동을 했지만 별 무효과 였다.
동네 아낙네와 우리 꼬마들은 바다가 잘 내려다 보이는 뒷산 중턱까지 올라가서
응원을 하기도 했다.
남북대화까지 하고 있는 요즘에 와서 생각 하면 도무지 이해가 안될
전설같은 일이지만......
그런 이후에 한동안 당인리 학생들은 등교 하기 위하여 삼두리 앞산까지 왔다가도
신변의 위협 때문에 학교에 까지는 못 들어오고 그냥 앞산에서 죽치다가 돌아 가기도 했다.
마을의 인구 숫자가 훨씬 못 미치는 당인리는 경제적으로 삼두리에 비하여 매우
열악 한 편이었다.
그러나 1970년 즈음하여 어느날 갑자기 미역과 전복양식이라는 걸 시작하더니만
급기야 삼두리가 경제적으로 당인리에 추월 당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당시에 초가지붕을 걷어 내고 함석이나 스레트 지붕으로 바꾸고 마을 길을
시멘트로 포장하는 등 당인리는 급속도로 돈 냄새를 풍기기 시작 했고
어떤이는 한해 미역 양식으로 돈 모아 읍내에 여관을 차렸다는 등의
소문도 자자 했다.
반면에 삼두리는 김양식 외에는 뾰쪽한 달리 대책이 없었으며
그나마 해마다 김 양식하는 바다의 영양가가 빠져 나가는 듯 했다.
그렇더라도 삼두리 역시 180여 호가 달하는 집집마다
열심히 노력해서 마을의 외관상으로도 눈부신 발전을 거듭 했다.
리어커 두 대를 맞대어 연결하여 마치 기관차처럼 그걸 타기를 좋아했던 나는
바다에 나가서 김을 뜯어와 싣고 가기 위하여 선착장에 줄지어 세워 둔 리어커들을
주인들이 비운 틈 동안은 우리들 차지였으니 마음껏 가지고 놀았다.
어느날에는 선착장 가는 길목이 비좁고 위험 천만인데도
커브를 돌리기에는 구조상 리어커 두 대를 맞닿아 붙이면 부적절 하다.
어느날 나는 이렇게 만든 리어커 기관차에 탄 체로 방향을 틀지 못하여
가속도가 붙은체로 그만 낭떨어지 바닷가로 곤두박질 쳐서
한마디로 꼴이 말이 아닌적이 있었다.
지금이야 물론 윗동네에서 강변길로 내려 오던 그 좁고 위험 한 길을 말끔히 펴고
선착장 주위의 길들도 넓어 졌다.
우리들은 이렇게 자랐났다.
윗동네로 한동안 이사를 가서 살다가 나중에 다시 강변 선착장 부근으로 이사를 왔던
우리 집은 방파제가 마주 보이는 선착장 가는 길 위 언덕에 자리 잡은 집이었다.
마당에는 아름드리 모꼬실(?) 나무가 있었고
집 뒤에는 큰 밤나무 세구루와 그 뒤로는 대 밭 숲이 있었다.
그러나 큰 비가 오거나 집뒤 언덕위에 신작로가 있어 시간마다 지나 다니는
버스등이 떨어지지 않을까 늘 염려 되었다.
집 모퉁이를 돌아 공동묘지가 있는 갈문리 방향으로 있는 땅을 굴앞이라 불렀다.
중학교에 다니는 당인리 학생들은 그 먼길을 새벽부터 집을 나서
책가방을 울러 메고 열심히 걸어서 다니기도 했는데
바로 우리 집 밑 길을 통과하여 다녔다.
나 역시 집뒤 언덕 사이로 뚫인 개구멍 같은 오솔길을 따라서
당인리 쪽에서 오는 버스가 앞산에 보이는 순간에 뛰어 올라가
잽싸게 손을 들어 발 디딜틈 없이 손님을 태운 만원버스를 멈추어 타고나면
안도의 한숨과 가뿐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그러나 너무나 학생들이 많아서 7:30차가 세워 주지 않고 그냥 지나 치는 날이면
어김없이 8:30 차를 이용하여 등교를 하여 지각을 한다.
우리 집 소유로 있던 집 옆의 동백나무 숲은 매년 초봄이면 동백을 따서
마당에 널어 두었다가 그 알들이 벌어지면 어머니께서는 용계리 까지
머리에 이고가서 동백 기름을 짜서 돌아왔다.
동네 아주머니들께서는 이 동백기를을 조금씩 얻어가서 두고 두고 머릿결을
빛내는데 이용했다.
나는 집에 토끼장을 만들어 열댓마리 씩을 키웠으며 매일 같이 토끼풀을 뜯어다가
먹이는 것이 나의 일과 중에 하나 였다.
집뒤에 밤나무가 있어 가을이면 밤을 따먹는 것은 좋으나
본래 밤나무 밑에는 항상 지네가 득실 거린다!
나는 지네와 뱀을 무척이나 싫어 했다.
그런데 동네 형들은 닭 뼈따뀌를 항아리에 담아서 밤나무 밑에 뭍어 두고서
몇일 후에 꺼내면 징그러운 지네가 바글바글 하게 들어 있는데
우리 동네 김정민이 형은
이 지네들을 발만 떼어 낸체로 김치에 말아서 꼴까닥 한입에 틀어 넣고서
먹기도 했고, 작은 가스명수 병에 석유와 함께 담아 처마 끝에 메달아 두었다가
상처에 바르기도 하는 가정 필수품으로도 쓰였다.
따라서 깨끗이 쓸어둔 마당에 곧잘 출몰하는 시커먼 지네를 쪼아 먹는 것은
역시 닭이 었으니 그들은 상극이라 하여 우리 집은 항상 닭을 많이 키웠다.
그리고 우리네 강변 마을 집집마다 오리떼를 많이씩 키웠다.
아침이면 바다로 몰아내고 오리들은 바다에서 온종일 놀다가
저녁이면 영특하게도 집을 찾아 돌아 오고는 했는데 나는
다 들어 간 다음에 오리장 문을 걸어 잠그는 역할이 었는데
어느날 '삯'이라는 괘 들짐승이 출몰하여 오리 때와 닭들을 몽땅
죽여 놓고 물어 가고 난장판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또한 누렁이 개 한마리를 키웠는데 그 개는 정말로 나에게 충성을 다 했었고
나도 그 개를 진정 사랑 했었다.
어느날 앞산에 일 보러 가기 위하여 낫을 아주 정성 스럽게 갈아서
손에 들고서 자연스레 흔들며 앞산을 향해 가다가
혓바닥을 내밀고 나를 따라 나선 개가 그만 그 낫에 혀가 짤리고 말았다.
피를 많이도 흘리던 개는 시름 시름 앓다가 죽어서 어린 나는 너무나 슬퍼서
많이 애도 하여 땅을 파고 묻어 주었는데,
나중에 들으니 동네 형들이 그 개를 다시 파다가 드셔 버렸다고 한다.
나의 시조이신 신라 박혁거세 왕으로부터 72세 손이며
규정공 할아버지로부터는 36세 손이 되는 나의 본관은 밀양이며
규정공파이다.
우리 마을은 박씨 자작일촌 마을인지라
대문 밖에 나서면 모두가 친척들인 셈이다.
예의범절에 어긋나는 날이면 이내 온 동네에 어른 들로부터 낙인이 찍히게
되어 행동에 세심한 주의가 요망되는 마을인 셈이다.
우리 마을은 6대조 할아버지 까지는 집안에서 제사를 모시다가
그 이후에 해당되는 후손들은 그 조상을 산소에 나가서 시제를 모시는 형태로
전환 하게 된다.
따라서 7대조 8대조 할아버지 산소는 앞산 어디 뒷산 어디 따져 가며
어릴때 부터 시제 모시러 따라 나설때 보면 거의 모든 온 동네분들이
가까운 친척들인 셈이다.
증조 할아버지는 [노]
할아버니는 [규]
아버지는 [종]
우리는 [순]
아들들은 [상]
이렇듯 이름자에 끼워 넣으라고 권장하는 돌림자를 미리 정해 두고서
이 원칙을 지켜 나가고 있는데
종가집이 아닌 경우에는 크게 중시하지 않고 이름을 짖기도 하여
웃동네 살던 큰댁 사촌 형들은
박도순
박민순
박한순
박남순 4형제 였고
아랫춤에 살던 작은댁은
박태영
박승순 등의 2형제 이름들이 있지만
아버지가 삼형제 중에 중간 인지라
박세창
박세구
박세옥
박세왕 으로 우리 4형제의 이름을 지으셨다.
군에 가기전 얼마 동안에, 군외면 농촌지도소를 중심으로
면내 각 마을마다 젊은 청년들을 상대로 농수산 정보를 보급하고
단합심을 키워 주는 등 하였기에 한동안 관심을 보이며 참가를 하기도 했고
마을에서 젊은 또래들끼리 정도리 구계등이나 솔섬으로 배를 타고
소풍을 가기도 했었다.
이무렵 군 입대전의 젊은 또래들이 마을에 비교적 많이 남아 있었고
완도 수산고를 나와 원양어선을 타다가 돌아 온 미간지 박태만이와
양성렬이 등이 있었다.
본래가 건강한 신체와 밝고 쾌활한 성격의 미남들인 이들은
외국의 멋진 항구들을 두루 구경할 기회를 가진 이후에 돌아 온지라
이야기 거리도 많았다.
고향 친구들에게는 신선한 충격 이었기에
짬이 날때마다 외국 소식을 듣기도 햇었다.
세네미 미간지를 오가며 동네 젊은 청년들은 밤새워 놀기도 하고
무릎 아프게 밤새도록 고스톱 놀다가 배고프면
걸판하게 라면을 끓여서 먹기도 했었다.
경기도 가평군 하면 현리에 주둔하고 있는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은
일명 맹호부태로 월남파병을 선두로 다녀왔고 강제구 소령으로
유명한 부대이며 내가 육군병장으로 근무 했던 악명 높은 곳이다.
수기사~ 제1여단 기보대대 본부중대 지원소대.....
4.2인치 박격포 사수........
웅변대회 참가 하는 것을 많이 했던 나는 손수 원고를 작성하여
한 몇일 수고 하여 포상휴가를 나오기도 하고 그랬다.
어느날은 사단내에서 내 고장 자랑 발표대회 격으로 웅변대회가 열려
유격훈련 기간동안 훈련도 면제 받고
역시 사단 1등을 차지 하고 휴가를 다녀왔다.
순전히 내 고향 [완도]가 자랑 거리가 많아서 덕을 본 셈이다.
입대 하기 전에 우리 고향 집에서 친구들이 놀러와서 밤새 술을 마시고
놀았다. 이름하야 박세왕 군입대 환송식이었다.
그때는 한번 군에 가면 최소 반년이 지나야만 첫 휴가를 나올수 있었다.
의정부 101보충대를 거쳐서 맹호부태로 배치된 나는
고등학교때 총학생회장(연대장)을 지낸 바 있는 놈들 손들어 보라!
나중에 조사하면 다 알수 있으니 손 안들면 죽는다!는 말에
그만 기가 꺽여서........
군대 입대 하기전에 절대로 그런것 물어도 손들지 말라는 군대 먼저 갔던
친구들이 당부를 했지만 서도 나는 손을 들 수밖에 없었고....
이렇게 손들은 맹호37기 중에서 약 20여명 된 이들은
강당으로 불리어 갔고 갑작스런 미스터 맹호 37기 뽑기 대회 비슷하게 하다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 혼자만 남고 나머지는 다 돌려 보내더니
그 순간부터 특별 관리를 했다.
헐렁한 군복을 몸에 맞도록 줄여서 입히고 이발을 시켜 주는 등
하더니 이후부터는 점호시간마다 각 내무반으로 따라 다니며
맹호 37기를 대표하여 대신 혼나는 사람이 된 듯 싶었다.
그러나 6주간의 훈련이 끝나면 모범용사로 뽑혀서 1주일간의 짜릿한 휴가를
보내 주는데 훈련받은 각 과목별 점수를 메기는 절차가 있었고
그간 고생 했다는 이유로 당연하게 뽑혀서 휴가를 나와 고향 집을 들어서니
주무시는 밤 시간이 되어 창밖에서 어머니를 부르는 막내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서 방문을 나오신 어머니와 형들은 이내 화부터 내신다.
물어 볼 것도 없이~
군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탈영나온 것이 자명 한지라~
다짜고짜 문적 박대부터 하고 본다.
뒤 늦게 가방에서 꺼내어 사단장 표창장을 보이며 포상 휴가를 나왔노라~
말씀 드리고 나서 즐기는 몇일 간의 짜릿한 휴가는 정말 좋았었는데.......
2월 19일 입대한 나는 훈련 마치고 휴가시 호남선 기차 안에서 본 내 손등은 마치
거지손과도 같았다.
트고 갈라지고 피가 나고 때가 끼고.......
그런데 바로 박영두 박창남 이상우 이상동 등의 친구들이 휴가 온 나를 기념하여
흑염소를 잡아 주시겠다고 한다.
마을 뒷산에 올라가면 흔해 빠졌다면서~
물론 임자가 있을 터!
우리는 그리하여 밤중에 흑염소 서리에 나서게 되었다.
별 죄의식 없이........
바위틈에 움크리고 있는 염소 한 마리를 손 쉽게 붙잡아 메고서
목 밭을 지나 굴앞 바닷가에 내려가 능숙한 솜씨로 칼질을 잘 하는
박영두(별명:폿두) 지휘하에 우리는 대충 다듬고 손질하여
이상우 집으로 잠입을 해서 고아 먹었다.
그러나 이튿날 쇼~가 벌어 졌다.
윗동네 아랫춤에 살던 박종인 아저씨네 염소 였단다.
어찌 아셨는지 생 난리가 난것이다.
줄줄이 붙들려 가서 그 아저씨 집 거실에 무릎을 굻고서
손이 발되게 싹싹 빌었다.
다음날에 또 우리는 밤 배를 타고서 바다 가운데로 나아가서
삼두리와 바다를 사이로 마주 보는 해남 영전리 친구들에게
전화로 약속을 하고서 각각 남여 친구들 후배 총동원하여 바다 가운데에서 만났다.
김 양식 할때 쓰이는 양쪽 마을 배들이 약 10여 척이 출동 한 셈이다.
막걸리를 통째로 싣고서........
어른들 안계신 조용한 바다에 술과 여자 그리고 녹음기까지 있으니...
한창 유행하던 디스코와 노래는 생으로 만들면 다 준비된 셈이다.
[난 정말 몰랐었네~ 시골길~ 아파트~ 돌아와요 부산항에~ 허공~...]
천지분간 모르는 달밤의 축제는 절정에 달하였으니
이제 남은 것은 남여 지간에 즉흥적 짝을 지어
놀다가 서로들 눈이 맞은 파트너 끼리 달밤 로맨스를 즐기고 싶어 하는 것!
남여 모두들 100% 찬성으로
인적이 드물 수밖에 없는 삼두리 공동묘지 바닷가로
배를 옮겨 바닷가에서 또 놀기로 했다.
우리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짝짝이 갈라져서
오손 도손 묘지 옆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어떤 이는 진도가 빨라서 제법 아가씨 내숭떠는 소리 하며
엿 듣고 엿 보고 싶은 충동이 일만한 장면들이 사방에서 벌어진 것이다.
남여 모두 술한잔씩 들 들어 갔으니 더욱 분위기는 무르 익었다.
바로 이때였다.
가장 친한 친구 중에 한명이서 헐레벌떡 뒤어와서 내게 말하는 내용인즉,
자기 파트너 아가씨가 갑자기 애무 도중에 죽었다는 것이다.
청천벽력이 따로 있으랴~
분위기 깨지는 것은 당연하고......
속속 낌새를 차리고 모여든 남자 친구들까지 의논이 모아지기를
모두들 사람을 죽인 살인자로 몰려 있는 셈이고 한배를 탄 살인자 운명!!
박세왕이 너도 군대 복귀 하지 말고
우리랑 함께 제주도로 도망을 가서 숨어 살자!
그럼 각자 집으로 스며 들어 몰래 비상금을 최대한 많이 준비(훔쳐서)하여
다시 모처에서 만나서 탈출을 하자!
이때 완도읍에 제주도에 가는 배가 취항 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터라~
한편 가슴 조이며 추이를 지키고 있던 여자 친구들끼리도
어찌 할줄을 모르고 당황해 하는데, 한 여자 친구가 해결의 열쇠를 내 놓았다.
본래 저 친구는 비밀? 스런 병이 있는데
주물러 주면 약 반시간 후에 살아 날수 있을거라고.........
이름하야 간질병...
당시로서는 결코 웃을 수 만은 없는 헤프닝 이었다.
우리마을 정면 바다에는 연출이라는 섬이 있고 이 섬의 소재지는
해남 북평 영전리에 속한다.
해양전투경찰 소대와 밤하늘과 바다를 더듬는
성능 좋은 대형 해드라이트가 있다.
우리는 배에 소주댓병을 서너개 싣고서 종종 놀러가서
전경들과 어울러져 지하 벙커내무반에서 즐펀하게
함꼐 어우러져 놀기도 했었다.
언젠가 모처럼 고향에를 들렸다가
몰라보게 총각과 처녀가 되 되어 버린 이들을 못 알아 보고서
일일이 한사람 한사람 만날 때 마다
누구 누구 아들 딸들이 저렇듯 장성 했노라~ 하며
알려 주는 친구들 덕에 낮을 알아 볼수 가 있었다.
아장 아장 하며 걷던 유치원생 쯤 되었을때 보았던 이들이
벌써 군대를 마치고 결혼을 하고.........
먼저 알아 본 이들은 안녕하세요! 나 누구 아들 누구 동생 아무게 입니다.
그래야만 알아 볼수 있으니.......
또 너무나도 한창 활동 하실법한 동네 형님들께서
유명을 달리 하시고 세상을 뜨셨다는 소식을 접하고서
참으로 안타깝고 유수와 같은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다.
아주 이따금씩 찾아 가는 고향에 가서
어느분 어느분이 세상을 뜨셨다는 소식을 들을때가 가장 가슴 아프다..
나의 소중한 추억을 함께 간직하고 나를 사랑해 주셨던 분들이
이제는 영영 만나 볼수 없게 되었기에~
평소에 자주 찾아 뵙지 못하여 끝없는 송구 스러움이 밀려 오고는 한다.
마을에 젊은이가 없어서 장례를 치르는데 필요한 노동력도 부족 하다고 한다.
나라도 있었다면 그 분들 가시는 마지막 길에 한줌 흙이라도 함께 날랐을걸~
이웃집에 살면서
내가 그들의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이뻐하고 귀여워 하고 그랬던 이들...
내 기억에는 항상 귀여운 유치원이나 초등학생 정도인데
박정주 박현체 등이 장성하여 있어 매우 당혹 스럽기 까지 했다.
서울 양평동 해테제과에 근무하고 있을 당시에
어느 날! [삼촌 나~ 삼두리 박현체 입니다.]
라고 찾아와 어른이 다 되어 버린 낮설은 그를 보고
반갑기도 하고 징그럽기도 하고.......
핸섬하게 성장한 박정주 그 녀석 역시 언젠가 부천에서
만나 보고 놀랠 수밖에 없었다.
나이는 나 혼자만 먹은게 아니었구나~ 라고 ...
나는 고향이 좋다.
언제나 자랑 스럽다.
다시 태어나 고향을 정하라고 한다 해도 나는
내 고향 완도 삼두리를 택할 것이다.
반백이 되어 갈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옛 친구들과
다 함께 모여서
군외남국민학교 아니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편을 갈라서
축구도 하고 싶고 갱천물 백사장에서 수영도 하고 싶다.
나에게는 천금 보다도 소중한 어릴적 추억이 있기에
오늘도 항상 뿌듯하기만 하다.
구라파를 평정했던 나폴레옹 역시도 프랑스의 남부에
완도만한 작은 섬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기 기상을 키웠다고 한다.
라폴레옹은 황야의 사자라는 뜻을 가진 [라빠이네온]이라 한다.
내 고향에서 나고 자란 후예들 역시
서울의 어떤 집 아들 딸들 보다도 소중한 유산을 이어 받았다고
나는 생각 한다.
요즘에는 무릇 애갖은 엄마들이 태교부터 시킨답시고 난리들이다.
고운 심성 착한 심성을 가지라고 그런 듯 하다.
좋은 음악을 감상하고 좋은 생각만을 하면서~
하지만 우리네 완도 후예들은 천예의 축복을 받고 순수 그 자체 속에서
살고 있으니 부산 떨며 주말 농장 어쩌고 찾는 이들에 비하면
별도로 피서를 갈 필요도 없이 일상속에서
자애로운 가슴과 웅대한 이상을 키우면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마지막 장면에서
[내일의 태양은 내일 또 다시 떠오른다!]는 비비안느 여주인공의 말처럼~
영원히 살 것처럼 내일을 꿈꾸고,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자!
옛 추억에 잠겨 컴 앞에 앉은 체 밤을 지새우는 동안에
어느새 새 아침이 밝아 화창한 햇살이 비추고 있다.
오늘은 향수와 함께~
대한민국 對 말리전에 가까스로 기적적인 동점을 이루어
56년만에 8강 행을 성사키킨 허정무 號의 올림픽 축구의 짜릿한 맛을
길게 누리고 싶다.
2004년 8월 18일 중국 대련에서 박세왕
첫댓글 2004년도에.....그 속에서 놀던때가 그립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지금은 ㅎ
책은 은제 나와요,,ㅎㅎ
나 죽기 3년전에 그런데 그때가 언제쯤인지 나도 몰라요
기다려봐요 좀 ㅎ
잘봤습니다..
읽느라고 눈 아퍼요..
오빠!? 요즘 얘기나해요 ㅎㅎㅎ 잘 봤구요 소설이네요. 잘난 삼두리 아저씨 ㅋㅋㅋㅋㅋ
진정 작가입니다. 책을펴내서북에있는 정일이도 읽고 싶다고 하니까 보내주어야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애틋함과 지난시절 향수가 묻어나는 정말 인간미가 느껴지는 글입니다.
헷소리 읽어주셔서 징하게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세상에서 제일긴글간네요?기네스북에 도전하자고요 ㅎㅎㅎ
지금은 없어졌지만 겨울 남선리 모개 잔둥에 과자 배달차 미끄러워 못올라갈때 껌이며 과자를 털었던 기억이나구요.
우리형은 차를쫐아가다가 갑자기 서는바람에 앞 잇빨도 부러졌지요 당시엿장시 쌍철이는 지금어디에살고있는지.....
상철씨가 아니고 쌍용이다고 알고 있습니다.
닉네임 그리움님 누군지 징하게 궁금합니다. 혹 남선리 분이요?
맛네여 쌍용이가 ㅋㅋㅋ. 혹시 그양반 지금 어디 산다요.광주 선배님 생각안나요 다리뚝 밑에서 고무신 으로붕어잡고 그랬는디 우리동기들 영리에 겁나게 많아요.남선리 모개잔둥에서 살다가 중2때 부산으로 이사 같지요.명옥이 은주 경영이 행난이 태환이등 동깁니다.울동네 친구는 승렬이혼자 면에서 군외면을 지가 지킨다나 어쩐다나
대단하다.이런것 몇게만 더 만들면 장편소설12권짜리.연애담 쫌 더넣고 싸움기술 더넣고 주인공 더 만들고 3.4권쯤에 내이야기 넣으면 대박.감수는 내몫
고향 옛날 추억거리 애기만 나오면 전부가 내야그 같아서 안그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