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高麗] 추존황제 안종[安宗][고려 제 8 대 현종황제의 아버지]의 가계도
1. 휘 : 욱(郁)
2. 별칭 : 경주원군(慶州院君), 추존황제(追尊皇帝)
3. 시호 : 효목대왕(孝穆大王), 효의대왕(孝懿大王), 성덕(聖德)
4. 능호 : 건릉(乾陵) → 무릉(武陵)
5. 고려 제 5 대 경종황제의 제 4 황후 헌정황후 황보씨와 사통
6. 자녀(1남)
* 현종 순(顯宗 詢) : 고려 제 8 대 황제
안종(安宗)은 고려의 황족이자 추존황제으로, 성은 왕(王), 이름은 욱(郁), 본관은 개성(開城).
태조와 제 5 황후 신성황후 김씨의 아들이다. 신성황후 김씨는 신라 경순왕의 사촌누이로, 935년 11월 신라가 고려에 항복 의사를 표하며 시집보낸 여성이다. 따라서 왕욱은 936년에서 태조가 사망하는 943년 사이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981년 경종이 사망하면서 경종의 제 4 황후인 헌정황후 황보씨(獻貞皇后 皇甫氏)는 궁에서 나와 살았다. 이때 그 이웃에 왕욱이 살았는데, 두 사람은 자주 왕래하다보니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결국 정을 통해 헌정황후는 왕욱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당시 이 일은 주변사람들이 모두 쉬쉬하여 조정에서는 모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왕욱의 노비가 왕욱의 집에 일부러 불을 질러 이 일에 대해 위문차 왕욱의 집에 왔던 성종(成宗)에게 이 일을 보고하였다. 성종에게 모든 일이 알려진 직후 헌정황후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다가 갑자기 산고를 느껴 아이를 낳고는 곧바로 죽었고, 왕욱은 사수현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때 태어난 아이가 훗날 고려 제 8 대 현종황제(顯宗)이다. 헌정황후와 왕순은 모두 태조의 손녀, 손자이니, 그들은 모자지간이면서 사촌남매간이 되는 셈이다.
후일 왕순은 성종의 명에 의해 보모에게 맡겨졌다. 어느날 성종의 명으로 왕순이 궁에 들어와 성종과 대면하게 되는데, 이때 왕순이 성종의 무릎 위로 기어올라오며 '아비, 아비' 라고 불렀다. 이때 성종은 눈물을 흘리며 왕순을 아버지 왕욱에게 보냈다. 왕욱은 사망하는 996년까지 귀양지에서 아들 왕순과 함께 살았고, 왕순은 왕욱이 사망한 이듬해인 997년에 개경으로 돌아와 왕위에 오르기까지 파란만장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는 헌정황후와의 사이에서 1남을 얻었다. 훗날 아들 순이 황위에 올라 왕욱의 묘호를 안종(安宗)이라 하고, 시호를 효목대왕(孝穆大王)이라 하여 태묘에 합사했다. 훗날 여러 시호가 가상되고 고쳐져 안종헌경효의대왕(安宗憲景孝懿大王)이라 하였다. 능은 무릉이다.
- 황후[皇后] -
[ 제 1 황후] 헌정황후 황보씨[獻貞王后 皇甫氏] → 고려 추존황제 대종의 딸 [족내혼]
1. 아버지 : 대종 욱
2. 어머니 : 선의황후 유씨
3. 별칭 : 공주(公主), 황후(皇后), 효숙황태후(孝肅皇太后)
4. 시호 : 혜순(惠順), 인혜(仁惠), 선용(宣容), 명간(明簡)
5. 경종황제의 제 3 황후 헌애황후의 여동생/제 6 대 성종황제의 누이
6. 능호 : 원릉(元陵)
7. 자녀(1남) : 안종 욱(安宗 郁)과 사통
* 현종 순(顯宗 詢) : 제 8 대 황제
헌정황후(獻貞皇后)는 고려의 제 5 대 경종황제(景宗)의 제 4 황후(皇后)이다. 본관은 황주(黃州), 성은 황보(皇甫). 태조황제의 7남인 대종(戴宗)과 선의황후 유씨(宣義皇后 柳氏)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그녀의 혼외자인 대량원군 순(大良元君 詢)은 후일, 고려 제 8 대 현종황제(顯宗)가 되었다. 그녀는 태조황제와 제 4 황후 신정황후 황보씨의 아들 대종(戴宗)의 딸로, 제 6 대 성종황제(成宗)와 천추태후(千秋太后)의 친동생이다. 969년 아버지 대종(戴宗)을 잃고 수년 뒤에는 어머니 선의황후 유씨(宣義皇后 柳氏)까지 여의어 할머니 신정황후의 손에 길러졌다.
호족을 견제하려던 광종의 근친혼 정책에 따라 언니인 헌애황후(獻哀皇后)에 이어 경종황제의 황후가 되었으나, 경종이 죽자 왕륜사(王輪寺) 남쪽에 있는 사저로 나가 살았다.
고려사, 고려사절요에는 그가 꿈에 곡령(鵠嶺)에 올라 소변을 하니 나라 안에 흘러넘쳐 모두 은(銀) 바다가 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헌정황후가 무속인을 찾아가 꿈해몽을 하자 무속인은 아들을 낳으면 일국(一國)의 황제가 될 것이라고 점하였다. 그러나 헌정황후는 내가 이미 과부(寡婦)인데 어찌 아들을 낳겠는가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한다. 이 때 대종의 이복형제이자 황후 자신의 삼촌인 경주원군 왕욱(慶州院君 王郁)의 집이 왕륜사 남쪽에 있었으므로 왕욱과 자주 만나다가 정을 통해 임신까지 하게 되는데, 유교적 윤리를 중시하고 국가 통치의 이념으로 숭상하던 성종은 이 소식을 접하자 왕욱을 유배보냈다. 헌정황후는 이후 해산을 하여 아들 대량원군 순(大良元君 詢)을 낳지만, 곧 산고로 사망하고 만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그녀가 안종(安宗)의 집에 드나드는 것을 목격한 신하들은 그녀가 임신하여 달이 차도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992년 7월 안종(安宗)의 집에 귀족의 사주를 받은 안종의 가인이 섶을 뜰에 쌓고 불을 질렀다. 불이 바야흐로 크게 붙어서 집을 태우게 되자 백관들이 구하려 달려갔고, 성종(成宗)도 역시 빨리 가서 위문하다가 사실을 목격하게 되었다. 성종의 추궁을 받은 가인(家人)이 드디어 사실을 고하였고 이에 안종(安宗)을 경상남도 사천군(泗川郡) 사수현(泗水縣)으로 유배하였다. 이때 황후가 울며 곧 집으로 돌아오다가 문(門)에 이르러 태동(胎動)이 있어 문 앞에 있는 버드나무가지를 부여잡고 아들을 낳고는 죽었다고 한다.
1009년, 대량원군이 황제가 되자 효숙황태후(孝肅皇太后)로 봉해지고 원릉(元陵)의 능호를 받았다. 시호는 맨 처음 혜순(惠順)으로 올려졌고 후일 인혜(仁惠), 선용(宣容), 명간(明簡) 등이 추가되었다.
남편인 경종(景宗)과는 외사촌지간이 된다. 그녀의 아버지 대종(戴宗)과 경종황제의 모후인 대목황후 황보씨(大穆皇后 皇甫氏)가 친남매사이이기 때문이다.
- 자녀 -
[ 적 1 남] 제 8 대 현종 순[顯宗 詢]
무릉[武陵] - 고려 [高麗] 추존황제 안종[安宗][고려 제 8 대 현종황제의 아버지]의 능
성종 임진 11년(992)
가을 7월 초하루 임진일에 종실 욱(郁)을 사수현(泗水縣-경남 사천)에 귀양 보냈다.
성종 임진 11년(992)
욱은 태조의 여덟째 아들이다. 그 집이 경종(景宗)의 비(妃) 황보씨(皇甫氏)의 사제(私第)와 서로 가까웠다. 경종이 훙하자, 비가 사제에 나와 거처하였는데, 일찍이 곡령(鵠嶺)에 올라가 오줌을 누니 나라 안에 넘쳐 흘러 모두 은빛 바다를 이루는 꿈을 꾸고는 점을 쳐 보니, “아들을 낳으니, 그가 한 나라의 왕이 될 것이다." 하므로 비가, “내가 이미 과부가 되었는데, 어찌 아들을 낳을 수 있으랴." 하였었다. 후에 욱이 마침내 비와 관계하여 아기를 배었으나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니, 마침내 비는 대종(戴宗 성종의 아버지 욱(旭)을 추존한 묘호)의 딸이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비가 욱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집안 사람들이 뜰에 섶을 쌓고 불을 질렀다. 불길이 한창 맹렬할 때 왕이 빨리 가서 물어 보도록 하여 그 까닭을 알아 보니, 욱이 난륜(亂倫)의 죄를 범했다 하므로 그를 귀양보내었다. 비는 자기집으로 돌아와 겨우 문에 이르자마자 산기(産氣)가 있어, 문앞의 버드나무 가지를 휘어잡고 아이를 낳고는 죽었다. 왕이 보모(保姆)를 가려서 그 아이를 길렀는데, 아이가 2살이 되었을 때 왕이 불러 보니 보모가 아이를 안고 들어왔다. 아이가 왕을 쳐다보고, '아버지' 하고 부르며 무릎 위에 올라와서 옷깃을 움켜잡고 또다시, '아버지' 하고 부르자, 왕이 불쌍히 여겨 눈물을 흘리면서, “아이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구나." 하고, 이에 사수현(泗水縣)으로 보내어 욱에게 돌려 주니, 이 아이가 곧 순(詢 현종(顯宗))이다.
성종 병신 15년(996)
가을 7월 을사일에 왕욱(王郁)이 사수현(泗水縣)에서 죽었다. 욱은 문장을 잘하고 또 풍수(風水)에 정통하였다. 일찍이 아들 순(詢)에게 은밀히 금 한 주머니를 주면서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금을 술사(術師)에게 주어 현(縣)의 성황당(城隍堂) 귀룡동(歸龍洞)에 장사지내고, 장사지낼 때 반드시 시체를 엎어 묻게 하라." 하였다. 순이 그 말과 같이 하여 장사지낼 때 엎어 묻기를 청하니, 술사가 말하기를, "어찌 그리 바쁘게 서두르는가." 하였다.
* 어찌 그리 바쁘게 서두르는가 : 욱(郁)의 묘자리가 풍수설로 보아서 임금이 날 자리인데, 시체를 엎어서 묻으면 빨리 날 것이라는 말이다.
현종 즉위년(1009년)
황고(皇考) 욱(郁)을 효목대왕(孝穆大王)으로 추존하고, 묘호(廟號)는 안종(安宗)이라 하며, 비(妣) 황보씨(皇甫氏)는 효숙왕태후(孝肅王太后)로 추존하였다.
현종 경술 원년(1010)
갑오일에 왕이 자기 죽은 부모의 시호를 추증하였다.
현종 정사 8년(1017)
을축일에 왕이 자기 부모의 시호를 더 붙이었다.
현종 무오 9년(1018)
무신일에 대자은(大慈恩) 현화사(玄化寺)를 창건하여 왕이 죽은 부모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출처 : 고려사[高麗史]
○ 안종(安宗) 왕욱(王郁)은 집이 왕륜사(王輪寺)의 남쪽에 있어 경종비(景宗妃) 황보씨(皇甫氏)의 사제(私第)와 가까왔다. 경종(景宗)이 훙(薨)하매 비(妃)가 그 사제(私第)에 나가 살더니 왕욱(王郁)이 드디어 범하여 임신하게 되었다. 일이 발각되매 성종(成宗)이 왕욱(王郁)을 사수현(泗水縣)에 유배시키고 말하기를,
"숙부(叔父)가 대의(大義)를 범하였으므로 유배시키니 삼가하여 초심(焦心)하지 말라."
하고 내시 알자(內侍謁者)인 고현(高玄)에게 명하여 압송하였다. 고현(高玄)이 돌아오매 왕욱(王郁)이 시(詩)를 증(贈)하여 말하기를,
"그대와 더불어 같은 날 서울을 떠나왔는데 그대는 이미 먼저 돌아가고 나만 돌아가지 못하는구나! 나그네가 우리에서 스스로 자물쇠를 채운 것 같이 됨을 한탄하고 정자(亭子)를 여의매 도리어 말[馬]이 나는 것 같음을 부러워 하노라! 제성(帝城)의 봄빛은 혼(魂)만이 꿈에 왕래하고 해국(海國)의 풍광(風光)에 눈물이 옷에 차도다. 성주(聖主)의 한 말씀은 응당 고치지 않을 것이니 어찌 끝내 고기잡이 갯가에서 늙게 하리요."
라고 하였다. 처음 왕욱(王郁)을 유배하던 날에 황보씨(皇甫氏)는 몸을 풀고 죽었다. 성종(成宗)이 부모(傅姆)를 택하여 그 아이를 기르는데 아이가 두 살이 되매 모(姆)가 항상 가르치기를,
"아비."
라고 하였다. 어느날 성종(成宗)이 불러 보려하므로 모(姆)가 안고 들어가니 아이가 성종(成宗)을 우러러 보면서 아비라고 부르고 무릎 위에 나아가 옷깃을 만지면서 또 두 번이나 아비를 불렀다. 성종(成宗)이 불쌍히 여겨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이 아이가 깊이 아비를 생각하는구나!"
라 하고 드디어 사수현(泗水縣)에 보내어 왕욱(王郁)에게 돌아가게 하니 이가 현종(顯宗)이 되었다. 왕욱(王郁)은 문사(文辭)를 잘하고 또 지리(地理)에 정통하여 일찍이 비밀히 금(金) 1낭(囊)을 현종(顯宗)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내가 죽거던 이 금(金)을 술사(術士)에게 주고 나를 우리 현(縣) 성황당(城隍堂) 남쪽 귀룡동(歸龍洞)에 장사하되 반드시 엎어 묻게 하라."
고 하였다. 성종(成宗) 15년에 왕욱(王郁)이 폄소(貶所)에서 졸하니 현종(顯宗)이 그 말과 같이하여 장사하러 할 때 엎어 묻기를 청하니 술사(術師)가 말하기를,
"어찌 그리 바쁘게 하리요?"
하더니 이듬해 2월에 현종(顯宗)이 서울로 돌아왔다. <현종이> 즉위함에 미쳐 효목 대왕(孝穆大王)이라 추존(推尊)하고 묘호(廟號)를 안종(安宗)이라 하였다. 8년 4월에 건릉(乾陵)에 이장(移葬)하고 5월에 헌경(憲景)이라는 시호(諡號)를 더하였으며, 12년에 효목(孝穆)을 고쳐 효의(孝懿)라 하였다. 18년에 성덕(聖德)을 더하고 뒤에 무릉(武陵)이라 칭하였다.
출처 : 고려사 종실 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