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으로 끝난 이들의 사랑 이야기는 양귀비가 죽고 50여 년이 지난 서기 806년, 유명한 시인 백거이(백낙천)에 의하여 ‘장한가(長恨歌)’라는 대서사시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당태종이 양귀비의 무릎을 베고 누워 하늘의 별을 쳐다보면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백거이가 이렇게 노래하였다.
七月七日長生殿(칠월칠일장생전) 7월 7일 장생전에서
夜半無人和語時(야반무인화어시) 깊은 밤 사람들 모르게 한 맹세
在天願作比翼鳥(재천원작비익조), 하늘에선 비익조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재지원위연리지) 땅에선 연리지가 되자고 간곡히하신 말씀...
天長地久有時盡(천장지구유시진), 하늘과 땅은 차라리 끝간데가 있을지라도,
此恨綿綿無絶期(차한면면무절기) 님을 사모하는 이 마음의 한은 끝이 없으리이다.....
중국의 전설에 비익조는 눈도 날개도 한쪽만 있는 새다. 암수가 합치지 않으면 날 수 없는 신화 속의 새이다. 연리지는 물론 두 나무의 가지가 합쳐 하나가 되어야 만들어지는 나무이다. 이후 수많은 중국인들의 사랑 이야기에 연리지는 단골손님이 된다.
우리 역사 속에도 일찌감치 연리가 등장한다. 남녀의 사랑에 한정시키지 않고 상서로운 조짐으로 받아들이기까지 했다. 때로는 선비들의 우정을 나타내기도 했다. 서민들 사이에선 이 나무에 빌면 부부 사이가 좋아진다는 믿음이 유행했다.
또 연리지에 올라가 기도를 하면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속 연인이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고 했다. 바로 그 연인에게 상사병이 옮겨가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 내물왕 7년(362) 4월에 시조 묘의 나무가 연리되었으며, 고구려 양원왕 2년(546) 2월에 서울의 배나무가 연리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고려사」에도 광종 24년(973) 2월에 서울 덕서리에서 연리지가 났으며, 성종 6년(987)에 충주에서도 연리지가 생겨났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처럼 연리지의 출현을 일일이 역사책에 기록할 만큼 희귀하고 경사스러운 길조로 생각한 것이다.
고려 중기 이규보의 시문집인 「동국이상국집」의 고율시(古律詩)에 “그대 비록 후배라 함께 공부 안 했으나/연리지 나무처럼 한집안 형제 같네…”, “난새는 짝 잃으면 못 떠나고 방황하네/ 초목 중엔 연리지가 의좋기로 소문나니/ 꽃 마음은 한가지나 꽃답기는 다르도다/ 부부가 없다면 짝이 어찌 될 것이며/ 형제 또한 없다면 기러기가 어이 줄서 가랴…” 하며 친구 사이의 우정과 혈육의 정을 연리지에 비유했다.
또 김시습의 「금오신화」에도 “연리지 가지 끝엔 붉은 꽃/ 서러워라 내 인생 나무만도 못하구나/ 박명한 이 청춘 눈물만 고이네”라고 하여 저승에서 나누게 되는 사랑의 서러움을 연리지와 비유하고 있다.
첫댓글 부모가 자식사랑하는 많큼 자식도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슴 찡하네요...
사람이 만들어도 저렇게 되기 힘들텐데 참으로 신기하네요...나무들이...~~~~~~
그러찌예...우린 그냥 지나쳤는데...사진으로 보니 색다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