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진 모세 신부
<설>
(2023. 1. 22.)(루카 12,35-40)
<복>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 6,24-26).”
주님께서 지켜 주시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뵙는 것, 또는 주님과 함께 사는 것 자체가 ‘은혜’이고 ‘평화’입니다.
새해를 맞이해서 서로 복을 빌어 주는 인사를 하는데, 안 믿는 사람들은 부와 건강 등을
복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신앙인들에게 가장 큰 복은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믿음으로 아무 걱정 없이 평화를 누리면서 사는 것이
‘신앙인의 복’입니다.
“그래도 살다 보면 여러 가지 걱정거리들이 생긴다. 걱정 없이 사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인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 4,4-7).”
여기서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는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항상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에 신앙인들은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걱정거리들이 생기고, 걱정거리들 때문에 걱정하게 되는 일이 많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인생이 원래 그런 것이긴 하지만, 신앙인들은 걱정 때문에 숨이 막히는 일을(루카 8,14)
피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비결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신앙인들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그리고 유일한 무기입니다.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 라는 말은,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힘을 가진
하느님의 평화라는 뜻인데, 하느님의 평화를 받으면 모든 걱정을 초월할 수 있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우리는 기도하면서(기도하는 동안) 하느님의 평화를 체험하게 되고,
그 평화 덕분에 걱정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걱정거리 자체가 없어지지는 않더라도, 그 평화는 걱정거리들에 맞설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우리에게 줍니다. (그것을 실제로 체험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신앙인들이 누리는 복이 됩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야고 4,14-15).”
이 말을 겉으로만 보면, 인간은 허무하게 사라지는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로 보이지만,
그것은 아니고, 인간은 하느님 덕분에 허무를 극복하고 영원으로 나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라는 말은, ‘내일’이라는 시간은 인간의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간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우리 입장에서 볼 때 ‘내일 일’은 정해져 있지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일’은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셔야만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내일 일’은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우리 인생과 운명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내일 일’이 이미 정해져 있어서 인간이 아무리 애를 써도 ‘내일 일’을 바꿀 수 없다면, ‘오늘 일’도 무의미해집니다.
선행과 사랑 실천으로 공로를 쌓는 것도 무의미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이유도 없게 됩니다.
(죄를 지어도 책임이 없게 됩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하지만, ‘내일 일’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또 그것을 오늘 우리가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열심히 사는 것이고, 착하고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죄를 안 지으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줄기 연기’는 허무하게 사라지는 존재를 상징합니다.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지 않으면, 인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
같은 존재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면, 인간은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잘난 체 하고 허세를 부리는 자들은 그 교만 때문에 허무하게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겸손은 감사로, 감사는 기쁨으로, 기쁨은 평화로 이어집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을 바라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길입니다(요한 14,6).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그대로 걸어가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도리어’ 라는 말은 ‘그러므로’로 바꾸는 것이 적절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은 뜻으로는 “주님께서 허락하시면”입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40).”
이 말씀은 ‘재림’에 관한 말씀이지만,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복’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을 잘 받으려면, 잘 받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복도, 은총도, 받을 준비를 잘하고 있는 사람이 받게 됩니다.
평소에 신앙인답게 살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그 준비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출처] 설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
첫댓글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