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3/29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루스벨트
- 2010 벤쿠버 동계올림픽 빙상 세계제패
2009 - 김연아, 꿈의 200점 돌파…세계선수권 첫 우승 ‘4분의 황홀경’ 긴 여운…사뿐히 ‘피겨여왕’ 즉위 기술마다 가산점…사상 첫 ‘꿈의 200점’ 돌파 한마리 학처럼 얼음판을 팔짝 뛰어올라 허공을 갈랐다. 때로는 나비처럼 빙판 위에서 팔랑거리다가, 어느새 열정적인 붉은 장미가 돼 꽃망울을 터뜨렸다. 김연아(19·고려대)의 환상적인 4분간의 몸놀림에 온 세계가 빠져들었다. 관중들은 모두 일어나 ‘피겨 여왕’에게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김연아가 29일(한국시각)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세계피겨선수권대회 여자 싱글경기에서 최고의 기량과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로 얼음판을 지배했다. 전날 쇼트프로그램에서 역대 최고기록인 76.12점으로 우승한 김연아는 이날 프리스케이팅에서 마지막 조에 속해 아사다 마오(일본)와 조에니 로셰트(캐나다)에 이어 네번째로 출전했다. 빨간색 드레스를 입고 ‘세헤라자데’의 선율에 맞춰 연기를 선보인 김연아는 첫 번째 과제인 트리플 플립-트리플 토루프 콤비네이션 점프(기본점 9.50점)에서 0.4점의 가산점을 챙겼다. 이어 이나바우어에 이은 더블 악셀도 안전하게 착지했고, 트리플 러츠-더블 토루프-더블 루프 콤비네이션 점프(기본점 8.8점)에서도 1.0점의 가산점을 얻었다. 사상 최초의 200점 돌파가 예감되는 순간이었다. 김연아는 트리플 살코우에서 도약이 좋지 않아 0.24점밖에 얻지 못했다. 이어 플라잉 콤비네이션 스핀의 도입부를 놓쳐 점수를 더 보태지 못했다. 그러나 두번의 실수도 대세에는 지장이 없었다. 2003년 11월 미국의 사샤 코헨(197.35점)과 2005년 이리나 슬러츠카야(러시아·198.65점), 이듬해 12월 아사다 마오(일본·199.52점)가 200점에 근접했지만, 김연아는 200점을 훌쩍 넘어 207.71점을 기록했다. 국제심판인 이지희 대한빙상경기연맹 피겨 부회장은 “신 채점방식이 도입되고 나서 그동안 아무도 깨지 못했던 심리적인 한계선을 김연아가 넘어섰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외신 반응도 뜨거웠다. <에이피>(AP) 통신은 김연아를 ‘퀸 연아’로 부르며, “마치 얼음 위를 나는 것처럼 보였다”고 극찬했다. <아에프페>(AFP) 통신 역시 “김연아가 세계선수권대회 역사를 새로 썼다. 밴쿠버 겨울올림픽의 강력한 우승 후보가 됐다”고 평가했다. 미국 <엔비시>는“경쟁 대회라고 하기보다는 (김연아의 정상) 즉위식에 가까웠다”고 극찬했다. <엘에이 타임스>도 인터넷판에서 “토요일 밤 스테이플스센터에 다른 선수들에게는 희망이 없어 보였다. 김연아가 경기를 끝냈을 때 귀가 찢어질 정도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김연아는 경기 뒤 공식 인터뷰에서 “이번 시즌을 준비하면서 우승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전혀 긴장하지 않고 연습처럼 경기를 치렀다”며 소감을 담담히 밝혔다. 한편, 조에니 로셰트(총점 191.29점)와 안도 미키(일본·190.38점)가 나란히 2, 3위를 차지했다. 한국의 김나영은 총점 131.50점으로 17위에 올라 김연아와 함께 밴쿠버 겨울올림픽과 내년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하게 됐다. 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한겨레 2009-03-29 오후 07:29:05 http://www.hani.co.kr/arti/sports/sports_general/346834.html
2007 - 로버트 카파 사진전시회 개막 (3.29~5.26) <전시정보> http://www.newswire.co.kr/newsRead.php?no=237390&lmv=A01
2007 - 3000년전 쌀창고 충남 서천서 발견 “당대 농경방식·생활상 짐작 가능한 획기적 유적” 국내에서 가장 이른 3000여년전의 쌀(볍씨) 창고가 처음 발견됐다. 땅에 판 저장 구덩이 속에 한가마 이상 되는 낟알이 가득 들어찬 얼개의 곡물 저장고가 확인된 것이다. 이 쌀창고는 충청 매장문화재연구원이 지난 2월부터 충남 서천군 화금리의 장항선 노반개량공사터 땅 속의 유적들을 긴급 발굴하는 중 드러났다. 유적은 기원전 7~8세기의 전형적 유적 형태인 사각형 모양 주거지와 저장용 수혈(구덩이)로 이뤄져 있다. 탄화된 쌀(볍씨)은 바닥에 판 원형 구덩이(수혈 저장공) 안에서 무더기로 나왔다. 한가마 이상 되는 벼 알곡이 검게 탄화한 상태로 들어있었다. 학계는 이 창고 구덩이를 국내 청동기시대 주거 생활유적의 기준이 되는 기원전 6~7세기께 부여 송국리 유형보다 조금 앞서는 단계의 유적으로 보고 있다. 연구원쪽의 이호형 학예관은 “국내는 물론 외국에서도 이런 저장용 창고유적에서 대량의 탄화미가 발견된 선례는 들어보지 못했다”며 “당대 농경 방식이나 생활양상을 짐작할 수 있는 매우 획기적인 자료”라고 말했다. 학계는 정밀 분석 결과를 주시하고 있다. 박순발 충남대 교수는 “중국 하모도 유적 등 세계적인 쌀 생산 유적지 등의 사례를 돌아봐도 저장고에 쌀이 가득 들어있는 상태로 발견된 선례는 아는 바 없다”며 “좀더 상세한 조사가 필요하지만, 창고에 가득찬 탄화미 알곡은 일단 종자용 곡물일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얕은 구덩이에 탄화미를 채우고 그 위에 짚더미 같은 것으로 벽을 세워 간이 뒤주 저장고를 만드는 식으로 쌀을 저장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고 말했다. 탄화미가 쌀겨를 벗긴 쌀인지, 재배를 위한 종자인지는 다소 검토가 필요하다. 이호형 학예관은 “고대인 뿐 아니라 조선시대까지 순수하게 쌀만 먹는 경우는 거의 없고 잡곡을 섞어 먹었다”며 “저장공의 탄화미가 대부분 쌀로 구성된 것으로 보아 아마도 논에 뿌리기 위한 종자용 볍씨일 가능성이 더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어떻게 이들 탄화미가 저장되었고 오랜 세월 온전하게 보존되었는지도 수수께끼다. 한창균 원장은 “미국 분석기관에 정확한 탄소연대측정을 의뢰했다. 구체적 데이터가 나오는대로 유적의 형성 및 보존경위 등을 탐구해 당대 생활상을 규명하는 작업을 본격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탄화미는 국내 곳곳의 선사시대 지층과 원삼국, 삼국시대 주거지, 생활 유적 등에서 간간이 나오고 있다. 충북 청원 소로리 등에서 나온 1만2천년전의 탄화미 볍씨는 현재 세계 최고의 인공 재배 작물인지를 놓고 국제학계에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공주/노형석 기자 /한겨레 2007-03-29 오전 11:13:23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199509.html
2004 - 아일랜드 `금연법` 공포, 술집 등 공공장소서 금연 위반시 벌금 최고 440만원 아일랜드의 흡연자들이 2004년 3월 29일부터 술집에서조차 담배를 피울 수 없게 됐다. 술집을 포함한 모든 공공장소에서 흡연을 전면 금지하는 내용의, 세계에서 가장 가혹한 금연법이 시행됐기 때문이다. 위반자는 최고 3000유로(약 442만5000원)까지 벌금을 물어야 한다. 아일랜드의 버티 아헌(Ahern) 총리는 금연법으로 간접 흡연의 폐해가 크게 줄어들 것이라며, “미래 세대는 담배 연기가 자욱한 실내에서 일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새 금연법은 유흥업소에서 고객이 담배를 피울 경우 업주가 벌금을 물도록 규정했다. 수도 더블린에서 술집을 운영하는 올리버 휴스(Hughes)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가면 대마초도 피울 수 있는데 더블린에서는 담배조차 피울 수 없다니, 유럽 관광객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한 흡연자 단체는 술집과 호텔들이 대량 폐업하고, 이로 인해 6만5000여명의 신규 실업자가 생겨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부 비판론자들은 아일랜드인 특유의 느긋한 생활습관을 짓밟고 미국의 청교도적 가치를 수입하는 것이라며 ‘금연 제국주의론’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2003년 여론조사에서 아일랜드 성인 남녀 대부분은 이번 조치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
2003 - ‘제주 4ㆍ3사건’ 정부 보고서 55년 만에 채택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채택 의의 해방공간에서 발생한 현대사 최대의 비극적 사건인 제주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성격을 규정하는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29일 채택돼 4.3문제 해결에 일대 전기가 마련됐다. 이날 정부 중앙청사에서 열린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에서 심의, 의결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지난 2000년 1월12일 제주4.3특별법이 공포된 이래 정부 차원의 첫 종합보고서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특히 정부가 사건 발생 55년만에 4.3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이 사건의 성격을 정의함으로써 역사적 진상 규명과 제주도민 명예회복에 거보를 내디뎠다는 점에서 제주도내 4.3관련 단체와 유가족 등이 환영하고 나섰다. 4.3중앙위는 이날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기획단(단장 박원순 변호사)이 수집, 분석한 진상조사 보고서를 수정,의결했다. 이날 채택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심의과정에서 보수 우익단체와 4.3관련 단체가 큰 의견 차이를 드러내면서 갈등을 표출했고, 4.3중앙위 위원간에도 견해차가 커 제때 의결되지 못하고 한동안 표류하다 가까스로 채택됐다. 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이날 협의 결과 총 577쪽에 이르던 보고서 내용중 수정한 사안이 30여건에 이르고 100쪽 가량이 수정된데서도 그동안 진통이 알마나 컸는가를 엿볼 수 있다. 보고서는 제주 4.3사건을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연계된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가 있었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하게 주민들이 희생된 사건으로 정의했다. 발발 원인에 대해선 복합적 요인이 작용했다면서 지난 47년 3.1절 발포사건을 계기로 제주사회에 긴장상황이 조성됐고 남로당 제주도당이 이런 긴장상황을 5.10단독선거 반대 투쟁에 접목시켜 지서 등을 습격한 것이 4.3무장봉기의 시발이라고 분석했다. 제주4.3사건은 또 미군정기에 시작된 사건으로 한국현대사에서 인명피해가 컸던 비극적 사건이라면서 남로당 제주도당을 중심으로 한 무장대가 선거관리요원과 경찰가족 등 민간인까지 살해한 점은 과오라고 지적했다. 특히 김달삼 등 무장대 지도부가 지난 48년 8월 해주대회에 참석, 인민민주주의정권 수립을 지지함으로써 유혈사태를 가속화시키는 계기를 제공했다고 밝혔다. 또한 지난 48년 11월부터 9연대에 의해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강경 진압작전은 비극적 사태를 초래했다면서 강경 진압작전으로 중산간마을의 95% 이상이 불타없어졌고 많은 인명이 희생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9연대에 이어 제주도에 들어온 2연대도 공개적인 재판절차를 거치지 않고 즉결처분했고, '북촌 사건'의 경우 남녀 노소 가리지 않고 한마을 주민 400명 가량을 총살한 것으로 돼있다. 보고서는 4.3특별법에 의해 희생자로 신고된 수가 1만4천28명이지만 이 숫자를4.3사건 전체 희생자로 판단할 수는 없다면서 각종 자료와 인구 변동 통계 등을 감안할때 4.3사건 인명 피해 규모를 2만5천∼3만명으로 추정했다. 또한 연좌제 문제에 대해서도 죄의 유무에 관계없이 4.3사건때 군.경 토벌대에 의해 살해됐다는 이유만으로 희생자의 가족들은 연자좌제에 의해 감시당하고 사회활동을 제약받았다고 기록했다. 보고서는 이어 이번 조사가 다각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4.3사건의 전체 모습을 드러냈다고 볼 수 없다며 경찰 등 주요 기관의 관련 문서 폐기와 군 지휘관의 증언거부, 미국 비밀문서 입수 실패 등은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회고했다. 다만 정부는 불행한 사건을 기억하고 교훈으로 삼아 다시는 이런 비극이 재발하지 않도록 힘써야한다면서 특히 국가공권력에 의해 피해를 본 희생자와 유족을 위로하고 적절한 명예회복 조치를 기대한다고 보고했다. 이날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채택으로 4.3의 진상이 상당 부분 드러났고 성격또한 정의됐다. 특히 4.3중앙위는 무고하게 희생된 수많은 희생자에 대한 명예 회복과 추모사업을 적극 추진키로 결의해 4.3문제 해결 전망을 밝게 했다. 또한 4.3중앙위는 4.3진상조사보고서기획단이 건의한 '제주4.3사건 피해자에 대한 정부 사과' 등 7개항의 대정부 건의안도 채택하고, 보고서에서 규명된 내용에 따라 정부가 제주도민 및 4.3사건 피해자에게 사과할 것과 추모일 지정 위령, 추모공원인 4.3평화공원 조성 지원, 4.3사건 유족에 대한 생계비 지원을 건의했다. 보고서는 사건의 배경, 전개과정, 피해상황을 종합적으로 다뤘고 4.3특별법의 입법취지에 맞게 국가 공권력에 의한 주민 희생 등 인권 침해에 역점을 둬 작성됐으며 역사적 전환기에 일어났던 아픈 상처를 용서와 화해의 차원에서 치유함으로써 인권 신장의 기반을 마련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제주/연합뉴스 이기승기자) /한겨레 2003.03.29(토) 15:44 http://www.hani.co.kr/section-003000000/2003/03/003000000200303291544403.html
2003 - 이탈리아의 의사 카를로 우르바니(Urbani, Carlo) 사망 우르바니 [Urbani, Carlo, 1956.10.19~2003.3.29] (참고) ‘첫 사스 희생자’ 치료뒤 숨진 우르바니 박사 목숨을 희생해가면서까지 사스(중증급성호흡기질환)의 위험성을 경고해 세계의 주목을 끈 이탈리아 출신 의사 고(故) 카를로 우르바니 박사가 베트남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베트남 정부는 최근 우르바니 박사에게 ‘우호장’(Medal of Friendship)과 ‘인민건강훈장’(Medal for People's Health)을 수여하고 고인의 업적을 기렸다. 유가족을 대신해 훈장을 받은 파스칼 부르든 세계보건기구(WHO) 아시아태평양지역 전염병 책임자는 수상소감을 통해 “"이런 영예로운 상을 받게 돼 슬픔을 억누를 수 없다”며 “이 훈장을 우르바니 박사 유가족들에게 꼭 전달해 그들이 이를 가보로 보관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세계보건기구 소속으로 기생충 분야의 전문가인 우르바니 박사는 변형폐렴 증세를 보여 하노이의 프랑스 병원에 입원한 중국계 미국인 사업가 조니 첸에 대해 병원 쪽이 지난 2월28일 조언을 구했을 때 맨 먼저 병원에 달려갔다. 첸은 홍콩으로 후송된 뒤 사망해 사스의 첫 희생자로 기록됐다. 환자의 증세가 심상치 않은데다 자칫 자신에게도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우르바니 박사는 환자 곁에서 10일 동안 머물며 진전 상황을 유심히 관찰하는 등 의사로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병원과 정부에 사태의 심각성을 설명한 뒤 전염을 방지하기 위해 환자격리 등 특단의 대책을 마련하도록 요청하는 한편 세계보건기구 질병 전문가들을 베트남으로 불러들여 특별대책반을 구성하도록 권고해 결국 정부의 동의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세계보건기 지역전문가회의 참석차 지난 3월11일 타이 방콕에 도착하자마자 이상증세를 보여 병원에 입원한 뒤 18일만에 46세의 일기로 운명을 달리했다. 훈장수여식에서 짠 티 쩡 치엔 베트남 보건장관은 “비록 베트남에서는 사스가 억제됐지만 우르바니 박사와 프랑스 병원 소속 의료진 5명 등 모두 6명의 값비싼 희생을 치러야 했다”면서 특히 “우르바니 박사가 보여준 숭고한 인류애와 헌신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연합 /한겨레 2003.05.11(일) 22:19 http://www.hani.co.kr/section-009000000/2003/05/009000000200305112219131.html
- 2002광주비엔날레 기념 (2002.3.29. 발행)
2002 - 2002광주비엔날레 개막 (3.29~6.29) 제4회 2002광주비엔날레가 "PAUSE"를 주제로 3월 29일부터 6월 29일까지 93일 동안 펼쳐진다.
2001 - 인천국제공항 개항 여객기 281편, 화물기 58편 등 모두 339편의 항공편 이·착륙이 이상없이 이뤄졌다. 인천공항을 통해 입·출국한 승객은 4만3000여명에 이르렀다. 공항 관계자들은 시험가동 기간 중 잦은 고장을 일으켰던 수하물 처리시스템(BHS)과 항공권 발권 업무가 정상적으로 이뤄지자 안도의 한숨과 함께 환성을 지르기도 했다. 종일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조마조마해하던 공항측은 "일단 첫날은 순항했다"며 안도했다. 수치로 본 인천공항은 단군 이래 최대의 공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각종 진기록들로 가득차 있다. 부지면적 1700만평은 여의도의 18배 크기이며, 45만장의 설계도면을 쌓으면 15층 건물 높이에 이른다. 연건평 15만평 크기의 여객터미널은 여의도 63빌딩의 3.1배이며, 축구장 60개 크기이다. 또 바닥면적 기준으로 국내 최대의 건축물이자 단일 공항 건축물로는 세계 최대다. 관제탑은 세계에서 3번째로 높은 100.4m로 지진이 일어날 경우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복합 내진장치가 설치돼 있다.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의 영종대교는 2층 왕복 6차선 도로, 1층에 철도와 4차선 도로가 함께 붙어 있는 세계에서 유일한 교량이다. /조선
1999 - 미국 뉴욕증권거래소 다우존스 사상 처음으로 1만포인트 기록
역사속의 오늘-맥도날드 한국 1호점 개장 세계 121개 국에 2만 9천여 개의 매장, 1955년 미국의 일리노이즈에 있는 디 플레인스라는 곳에서 시작된 ‘맥도날드 신화’의 현주소이다. 코카콜라와 함께 미국을 상징했던 문화적 아이콘 맥도날드는 세계로 확산일로를 걸었다. 우리나라에 맥도날드가 상륙한 것은 1988년 3월 29일의 일이었다. 서울 압구정동에 개장한 한국 1호점. 미국을 위한 끊임없는 동경, 한국에서 맥도날드는 성장 일로를 걸었다. 1992년에는 부산 해운대에 맥드라이브 제1호 매장이 생겼다. 1996년에는 대구에도 진출했다. 1999년에는 연간 매출액이 1천억 원을 넘어섰다. 1년 뒤인 2000년에는 2천억 원으로 뛰었다. 200호점도 개장했다. 2001년에는 드디어 300호점이 생겼다.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는 법, 승승장구하던 국내 맥도날드에게도 위기가 왔다. 반미 심리는 그저 일부에 불과했다. M 골드아치 왕국의 쇠퇴를 몰고 온 것은 참살이(웰빙) 심리와 패밀리 레스토랑의 급증이라는 변수였다. 메뉴와 재료, 마케팅의 현지화 전략으로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았던 맥도날드는 이제 생존을 위해 치열한 마케팅 경쟁을 벌이고 있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매일신문 2006년 03월 28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13327&yy=2006
1974 - 진시황릉 병마용갱 첫 발견 진시황릉 첫 발견 1974년 3월 29일 양쯔파(楊志發)라는 농부가 가뭄에 신음하는 대지 위로 곡괭이를 내려찍었다. 곡괭이는 흙으로 빚은 사람 머리와 부딪치며 책에만 전해오던 진시황릉(秦始皇陵) 발굴의 서곡이 됐다. 황릉을 지키던 흙인형, `병마용(兵馬傭)` 6000여명이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병마용갱의 발견 3월29일.4m쯤 파들어가자 땅속에서 진흙을 구워 만든 사람 인형 조각이 나왔다. http://www.dol.pe.kr/civilization/asia/byungma/mausolem_1.htm
1973 - 닉슨 미대통령, 베트남전쟁 종결을 선언 최후까지 남아있던 90명의 미군을 태운 C141 수송기가 1973년 3월 29일 오후 5시30분 남베트남 사이공으로부터 일본 요코다 기지로 향했다. 최대 54만을 기록했던 베트남주둔 미군병사가 모두 철수한 것이다. 투입 전비만해도 1380억달러, 사망자수만해도 4만6천명에 달한 미국의 베트남개입은 이로써 막을 내렸다. 북베트남은 `베트남인민의 승리`라는 짧은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대사관, 영사관등의 민간인을 포함한 3500명의 미국인이 남베트남에 남아있자 해방전선측은 위장한 군사요원이라고 비난했다. 닉슨대통령은 이날 TV방송을 통해 전쟁종결을 선언했다. /조선
1970 - 미국의 저널리스트 안나 루이스 스트롱(Strong, Anna Louise) 사망 스트롱 [Strong, Anna Louise, 1885.11.24~1970.3.29] [역사 속의 인물] 미국 사회주의자 안나 루이즈 스트롱 안나 루이즈 스트롱은 열정적인 사회주의자이자 저널리스트로 살았다. 20세기 초반 미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관심을 가지면서 사회주의자가 돼 30대 중반 이후에는 주로 소련과 중국에 머물렀고 미국을 오가며 사회주의 사회의 삶과 사회를 알리는 데 힘썼다. 그녀는 활발한 저술 활동으로 많은 책을 썼으며 미국의 사회주의 확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1885년 네브래스카 주 태생인 스트롱은 시카고 대학 졸업 후 아동 복지와 노동 운동에 힘쓰다 1921년, 기아 사태 지원을 위해 방문한 소련 사회를 보며 사회주의에 경도됐다.1932년에는 같은 길을 걷던 조엘 쇼빈과 결혼, 10년 후 쇼빈이 사망할 때까지 동지적 부부애를 보이며 짧지만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냈다. 스탈린, 몰로토프는 물론 수많은 노동자들과 인터뷰를 가졌고 중국의 저우언라이, 마오쩌둥 등과 친교를 맺었다. 1950년대 후반 중국의 대약진 운동 등을 현장에서 지켜봤다. 그녀는 소련과 중국 사회의 문제점에 대한 서방의 '거짓말'을 논박하는 등 끝까지 사회주의를 저버리지 않았다. 1970년 오늘, 베이징에서 85세의 나이에 삶을 마감한 그녀에 대해 소련의 스파이였다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김지석(논설위원) /매일신문 2011년 03월 29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14794&yy=2011
1967 - 프랑스 핵잠수함 진수 역사속 오늘[1967년 3월 29일] 프랑스 핵잠수함 진수 프랑스의 자존심을 건 첫 번째 핵잠수함 르두타불 (Redoutable)호! /YTN 2011-03-29 화 http://www.ytn.co.kr/article/article_view.php?key= 201103282039091815&s_mcd=0422&s_hcd=
1959 - 이승만 대통령 생일잔치 역사속 오늘[1959년 3월 29일] 이승만 대통령 생일잔치 1950년대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잔치는 국경일 같은 규모로 거창하게 치러졌다. /YTN 2011-03-29 화 http://www.ytn.co.kr/article/article_view.php?key= 201103282038389337&s_mcd=0422&s_hcd=
1958 - 미국의 비행기 조종사 클라이드 팡본(Pangborn, Clyde) 사망 팡본 [Pangborn, Clyde Edward, 1895.10.28~1958.3.29] Clyde Edward Pangborn (October 28, 1895 – March 29, 1958) also known as "Upside-Down Pangborn" was an American aviator who performed aerial stunts during the 1920s. Along with his co-pilot, Hugh Herndon, Jr., Pangborn was the first person to fly non-stop across the Pacific Ocean. ...
1931년 10월 4일 - 클라이드 팡본과 휴 헌던, 단발단엽기 미스 비돌로 일본 아오모리 현의 사비시로에서 미국 서해안의 웨낫치까지의 북태평양황단비행에 성공(미국) /항공발달연대표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eetw12&logNo= 100110502331&viewDate=¤tPage=1&listtype=0
아오모리 스토리-미사와 항공과학박물관 박물관 앞엔 길쭉하게 뻗은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요, 기념비의 주인공은 1931년 10월 4일 미사와를 출발해 미국 서해안의 웨낫치까지 인류 최초로 태평양 무착륙 횡단 비행에 성공한 미스 비들호와 조종사 클라이드 팡본, 휴 헌던입니다. 기념비의 높이는 19.31m로 횡단 비행에 성공한 연도에 맞췄다고 하네요. 미사와 항공과학박물관은 아오모리가 일본의 항공 과학과 얼마나 많은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있는 곳으로, 야와 테마 파크, 실내 전시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2003년에 개관을 했습니다. 奇星 /Design Republic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ksstudio&logNo= 30102566733&redirect=Dlog&widgetTypeCall=true
1957 - 프랑스 영화배우 크리스토퍼 램버트(Lambert, Christopher) 출생 램버트 [Lambert, Christopher, 1957.3.29~ ] 크리스토퍼 램버트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가족은 그가 겨우 두 살 때 미국을 떠났다. 그의 아버지가 스위스 주재 UN 대사였기 때문에 램버트는 제네바의 기숙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2세 때 학교 연극에 출연했다가 감동을 느낀 그는 배우가 되고 싶어졌다. 그러나 연기는 불확실한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부모를 안심시키기 위해 런던의 증권거래소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섯 달 뒤 그 일을 그만두고 연기를 공부하러 파리 국립 드라마예술학교에 들어갔다.
- 김유정과 실레마을 김유정문학촌 (춘천 허선구 님 자료제공)
1937 - 한국의 소설가 김유정(金裕貞) 사망 김유정 [金裕貞, 1908.1.11~1937.3.29] 늑막염과 폐결핵으로 가난과 병마에 시달려 온 소설가 김유정이 1937년 2월 29일 29세를 일기로 요절했다. 그는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나 휘문고보를 거쳐 연희전문 문과를 중퇴, 한때는 일확천금을 꿈꾸며 금광에 몰두하기도 했다. 1935년 소설 `소낙비`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같은 해 소설 `노다지`가 조선중앙일보에 각각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데뷔했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불과 2년 동안의 작가생활을 통해 30편에 가까운 작품을 남길 만큼 그의 문학적 정열은 남달리 왕성했다. 데뷔작인 `소낙비`를 비롯 그의 작품은 주로 우직하고 가난한 농민이나 무식한 사람들을 통해 수많은 토속어와 직설적인 비속어, 갖가지 비유와 풍부한 어휘 등 특유의 문체를 선보였다. 대부분 농촌을 무대로 한 것인데 `금 따는 콩밭`은 노다지를 찾으려고 콩밭을 파헤치는 인간의 어리석은 욕망을 그렸고, `봄봄`은 머슴인 데릴사위와 장인 사이의 희극적인 갈등을 소박하면서도 유머러스한 필치로 그린 그의 대표적인 농촌소설이다. 이외에 `동백꽃` `따라지` 등 30여 편의 단편과 1편의 장편, 그리고 1편의 번역소설을 남겼다. /조선
1937 - 폴란드의 작곡가 카롤 시마노프스키(Szymanowski, Karol) 사망 시마노프스키 [Szymanowski, Karol Maciej, 1882.10.6~1937.3.29] 폴란드의 작곡가. 우크라이나 출생. 어려서부터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하고, 19세 때 바르샤바에서 Z.노스코프스키에게 사사하였다. 1906∼1908년 독일에 유학한 후 유럽 각지에서 활약하고, 1926년 바르샤바음악원장에 취임하였으나 1936년 폐결핵으로 쓰러져 스위스의 로잔에서 요양하다가 죽었다. 그의 음악은 쇼팽, R.슈트라우스, A.N.스크랴빈 등의 영향을 받은 피아노작품에서 시작되었으며, 프랑스의 인상주의 수법을 도입하고 만년에는 폴란드의 민족성에 뿌리박은 새롭고 독자적인 작풍을 확립하였다. 주요작품으로 오페라 《하기트 Hagith》(1913) 《로제왕 Le Roi Roger》(1924), 발레곡 《하르나시 Harnasie》(1926), 오라토리오 《스타바트 마테르 Stabat Mater》 등이 있다. /네이버
1912 - 영국의 남극 탐험가 스코트(Scott, Robert Falcon) 동사 스코트 [Scott, Robert Falcon, 1868.6.6~1912.3.29] 탐험가 스코트 남극서 동사 한번도 인간의 발길을 허용하지 않은 곳, 그 남극점을 향한 인간의 처절한 도전이 시작된 것은 20세기 초였다. 20세기 최고 명승부로 꼽히는 이 치열한 경쟁에 아문센(Amundsen, Roald, 1872~1928)과 스코트(Scott, Robert Falcon, 1868~1912)라는 걸출한 두 탐험가가 달려들었다. 출발은 영국의 스코트가 빨랐다. 1910년 6월 1일 영국을 출항한 스코트는 탐험선 ‘테라 노바’의 뱃머리를 남극으로 돌렸다. 1904년에 남위 82도 17분에서 발길을 되돌린 적이 있어 스코트로서는 이번 탐험이 두 번째였다. 그의 조국 영국도 첫 북극점 정복을 미국에 빼앗겼던 터였다. 스코트가 호주의 멜버른항에 도착했을 때 한 전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프람호가 남극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아문센. ” 노르웨이의 아문센이 ‘프람호’를 이끌고 2개월 늦게 탐험경쟁에 뛰어든 것이다. 아문센 역시 남극탐험은 두 번째. 대서양에서 북극해를 거쳐 태평양에 이르는 북서항로 항해를 최초로 성공했던 베테랑 탐험가 아문센의 돌연한 등장은 스코트에게는 충격이었고 위협이었다. 탐험의 성패와 생사까지 갈라놓은 것은 스코트의 준비소홀과 아문센의 치밀성이었다. 1911년 10월 20일, 기지를 출발한 아문센의 탐험대 5명이 남극점을 향해 썰매를 몰았다. 52마리의 썰매견이 썰매 4대를 끌었다. 12월 14일, 마침내 관측기 바늘이 90도에서 멈춰섰다. 인류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한 것이다. 아문센보다 13일 늦게 출발한 스코트는 중도에 판단착오로 설매를 끄는 말들과 개들을 돌려보내고 사람 넷이서 썰매 하나씩을 끌었다. 1912년 1월 18일, 마침내 스코트도 남극점에 도달했지만 그곳에는 이미 노르웨이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귀로에 있었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1명은 미쳐 죽었고 동상에 걸린 1명은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했다. 스코트를 포함한 세 사람은 기지를 18km 남겨두고 부둥켜안은 채 죽음을 맞았다. 1912년 3월 29일이었다. /조선
(그와 4명의 동행자는 귀로에 악천후로 조난, 식량부족과 동상으로 전원 비명의 최후를 마쳤다. 그의 유해와 일기(마지막 일자는 3월 29일) 등은 1912년 11월 12일 발견되었다. /네이버)
1897 - 경인선 기공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 경인선이 1897년 3월 29일부터 공사에 들어가 1899년 9월 18일 개통됐다. 개통당시 철로 길이는 노량진-제물포간을 잇는 33.2km였다. 우리나라가 철도부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889년 주미대리공사였던 이하영이 귀국하면서 철도 모형을 가져오면서였다. 조정은 처음 민족자본에 의한 자발적인 철도건설을 시도했으나 자금난 등으로 결실을 맺지 못하고 1896년 미국인 모스에게 경인철도의 부설권을 넘겨주었다. 모스는 공사중 자금조달에 실패,1898년 12월 일본에 철도부설권을 양도했다. 개통당시의 경인철도는 증기기관차 4대, 객차 6량, 화차 28량 이었고 1일 2왕복 주행시간 1시간 30분이었다. 경인선의 개통은 근대적 교통기관의 도입과 함께 일본의 제국주의가 본격적으로 침투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일본은 인천과 노량진간의 개통에 이어 노량진과 서울역 공사를 서둘러 1900년 7월 8일에 전구간을 개통시켰다. 경인철도를 처음 주행한 기관차는 미국 브룩스사에서 만든 탱크기관차였다. /조선
1895 - 독일의 소설가, 수필가 에른스트 윙거(Junger, Ernst) 출생 윙거 [Junger, Ernst, 1895.3.29~1998.2.17] 하이델베르크 출생. 하노버대학 ·라이프치히대학 ·나폴리대학을 다녔다.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하였으며, 전 후에는 사회주의 그룹과 어울렸다. 니체의 유미주의와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고 전쟁체험과 융합시켜서 영웅주의적인 사상과 즉물적인 문체를 창조하였다. 《철(鐵)의 폭풍 속에서 In Stahlgewittern》(1920) 《내적 체험으로서의 전투 Der Kampf als inneres Erlebnis》(1922) 《대리석 절벽 위에서 Auf den Marmorklippen》(1939) 등 나치스 정체를 비난하는 작품을 발표하여 화제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파리에 체재하면서, 유럽의 낡은 계급질서의 병폐를 보고는 횡행하는 폭력에 맞서 평화와 자유를 역설하였다. 전후에는 그리스도교에 접근하여 《Strahlungen》(1949) 《평화 Der Friede》(1948) 《헬리오폴리스 Heliopolis》(1949) 등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네이버
1892 - 로마 가톨릭교 추기경 요셉 민첸티(Mindszenty, Jozsef) 출생 민첸티 [Mindszenty, Jozsef Cardinal , 1892.3.29~1975.5.6] 본명은 Jozsef Pehm. 20세기의 반세기가 넘는 기간을 헝가리 파시즘과 공산주의에 대해 바타협적인 투쟁을 전개한 상징적인 인물이다. 1915년 사제서품을 받을 때부터 정치적 활동을 많이 한 민첸티는 1919, 1944년에 전체주의 정부의 적으로 2번이나 체포되었다. 1944년 베즈프렘의 주교로 축성(祝聖)되었고 1945년에 헝가리의 수석주교 및 에스테르곰의 대주교로 임명되었으며, 1946년에 추기경이 되었다. 헝가리의 로마 가톨릭 학교들을 세속화하라는 정부의 요구를 거절해 1948년에 체포되었고, 1949년에 반역죄로 종신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56년 봉기 때 석방되었으나 공산주의 정권이 다시 권력을 장악하자 부다페스트의 미국 대사관에 망명을 요청했다. 헝가리를 떠나라는 바티칸의 부탁을 거절했으나 1971년 미국 대통령 리처드 M. 닉슨의 간청을 받고 마음이 약해졌다. 바티칸의 손님으로 있으면서, 그리고 1971년 이후에는 빈에서, 헝가리 체제와 타협하려는 교황의 노력을 비판했다. 1974년 대주교직과 수석대주교직에서 물러나 같은 해에 〈회고록 Memoirs〉을 출판했다. /브리태니커
- 'The Circus' - 'Le Noeud Noir'
- '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 Jatte' - 'The Gardner, detail'
1891 - 프랑스의 신인상주의 화가 조르주 쇠라(Seurat, Georges) 사망 쇠라 [Seurat, Georges-Pierre, 1859.12.2~1891.3.29] 신인상주의미술을 대표하는 프랑스의 화가. 파리 출생. 1878년 파리의 관립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앵그르의 제자 H.레만의 지도를 받다가, 다음해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브레스트의 해안에서 병역을 마쳤다. 파리로 돌아와서는 고전 작품을 연구하고 소묘에 힘을 쏟는 한편, 셔브뢸, 헬름홀츠 등의 색채학과 광학이론을 연구하여, 1881년경 들라크루아의 작품의 색채대비와 보색관계를 해명한 글을 발표하여 세인의 관심을 모았다. 이러한 이론을 창작에 적용하여 점묘(點描)화법에 의한 최초의 대작 《아스니에르에서의 물놀이 Une Baignade, Asnières》(1883∼1884)를 완성하였는데, 이 작품은 1884년 살롱에 출품하여 낙선하였으나 앙데팡당전(展)에 출품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일을 인연으로 평생 화우(畵友) P.시냐크와 사귀게 되었다. 1885년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를 제작하여 다음해에 열린 인상파 최후의 전람회에 발표하였다. 이것은 전작(前作)의 수법을 한층 더 발전시켜 순수색의 분할과 그것의 색채대비에 의하여 신인상주의의 확립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이 밖에 《포즈를 취한 여인들 Les Poseuses》(1888) 《기묘한 춤 Le Chahut》(1889∼1890) 《화장하는 여인》(1890) 등의 작품이 있다. 모두 인상파의 색채원리를 과학적으로 체계화하고 인상파가 무시한 화면의 조형질서를 다시 구축한 점에서 매우 의의가 있으며, P.세잔과 더불어 20세기 회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전염성 후두염으로 32세의 젊은 나이에 파리에서 요절하였다. /네이버
1869 - 미국의 형질인류학자 허들리치카(Hrdlicka, Ales) 출생 허들리치카(흐들리카) [Hrdlicka, Ales, 1869.3.29~1943.9.5(4.5)] 미국의 형질인류학자. 네안데르탈인 연구와 아메리카 인디언의 아시아 이주에 관한 연구로 가장 유명하다. 보헤미아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원래 의사였으나 1896년 인류학을 공부하기 위해 L. P. 마누브리에와 함께 파리로 떠났다. 같은 해에 미국으로 돌아가서 뉴욕 병리학연구소의 인류학부에 참여했다. 1899년 미국자연사박물관이 후원하는 탐사활동의 형질인류학 책임자를 맡았고, 7년 동안 스미스소니언 연구소의 형질인류학 전시관 부관장으로 있다가 1910년 관장이 되었다. 그는 여러 구석기 유적지 외에도 피테칸트로푸스(Pithecanthropus)가 발견된 유적지에 대한 대대적인 탐사여행을 통해 책임자로서의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의 선구적인 업적으로는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Homo neanderthalensis) 연구를 들 수 있다. 1927년 그는 〈인류의 네안데르탈인 단계 The Neanderthal Phase of Man〉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그 속에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는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로부터 진화했으며, 모든 인류는 공통 조상에서 유래했음을 증명하려고 했다. 그는 이후의 작업에서 인류는 구대륙에서만 진화했다고 주장했다. 1927년 그는 알래스카와 베링 해협을 탐사하여 아메리카 인디언이 베링 해협을 건너 아시아에서 이주했다는 이론을 전개했다. 그는 프라하에 자신의 이름을 딴 허들리치카 인류박물관이 건립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그의 저술은 대부분 여러 과학전문지에 기고한 논문들로 이루어져 있다. /브리태니커
우리민족의 기원 스미소니안 연구소의 알레스 흐들리카(Ales Hrdlicka) 박사에 의하면, “한국인은 신체적으로 백인의 특정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한국인들 사이에는 3가지 구분이 가능한 인종적 특질이 있다. 한 부류는 중국에 가장 인접한 지역에 살면서, 중국인과 비슷한 모습이다. 또 하나, 키가 작고 단단하고 피부색깔이 짙은 부류는 시베리아 토착민과 유사한 모습이다. 세 번째 부류는 한국민의 대부분을 점유하는데, 키가 더 크고 옅은 피부를 가졌다. 이 부류의 젊은 사람들은 뺨의 색깔이 홍조를 띠는데, 이는 몽고족에서 보기 드문 현상이다. 남성의 일부는 두부의 형상이 유럽의 고산족과 흡사하다. 이러한 백인과의 유사점은 한국인들의 조상 중에서 아시아계 백인의 계통이 숨어 있음을 시사한다. 한국인이 어디에서 기원했는지는 안개 속의 미스터리이다. 그들은 선사시대에 인도 북부로부터 현재의 반도로 이주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이나 중국인들의 역사에 의하면, 원래부터 거기에 있었다.”(<부도지> 474~475쪽 윤치원) 위 글은 신라 때 사람 박재상이 쓴 <부도지>를 다양한 학문을 동원하여 해석을 시도한 윤치원씨가 윌리암 R 콜린스가 쓴 고대인(Ancient Man)에서 번역하여 소개한 글입니다. 윌리암 콜린스는 그가 쓴 글에서 한국인을 구성하는 종족으로 3가지 부류의 종족이 있음을 말했습니다. 첫째는 중국인과 같은 모습의 인종, 둘째는 바이칼호 근처에 살고 있는 브리아트와 같은 인종, 세 번째로 유럽의 고산족과 같은 인종의 세 종류 인종의 혼혈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 것입니다. http://ask.nate.com/qna/view.html?n=4459792
1867 - 미국의 야구 선수 사이 영(Young, Cy) 출생 영 [Young, Denton True "Cy", 1867.3.29~1955.11.4] 덴튼 트루 사이 영(영어: Denton True Cy Young, 1867년 3월 29일 ~ 1955년 11월 4일)은 1890년부터 1911년까지 다섯 개의 미국 메이저 리그 야구 팀에서 활약했던 선수이다. 그는 메이저리그 통산 22년의 프로 생활 기간 동안 수많은 기록을 수립했으며, 그 중 몇몇은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사이 영은 511승을 올렸는데 이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많은 승수이며 2위 월터 존슨과는 94승 차이가 난다. 메이저리그에 끼친 사이 영의 영향력을 기리는 의미에서, 메이저리그는 미국 프로야구 양대 리그에서 가장 효과적인 투구를 선보인 투수 1명씩을 뽑아 사이 영 상을 수여하고 있다. 1939년 사이 영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는 프로로 뛰는 동안 다섯 시즌 동안 30승 이상을 올렸고, 열 시즌에 걸쳐 20승 이상을 올렸다. '근대 야구'에서 처음으로 나온 퍼펙트 게임을 포함하여 세 번의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승수 외에도 사이 영은 최다 이닝 투구(7,355이닝), 최다 선발출장(815경기), 최다 완투(749경기), 최다 완봉승(76회) 기록 보유자이다. 그러나 그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많은 패배(316패)를 기록, 푸드 갤빈과 함께 300패 이상을 기록한 역대 유이한 기록 보유자이기도 하다. 사이 영의 사후(死後) 44년이 흐른 1999년 스포팅 뉴스 논설위원들은 사이 영을 '위대한 야구 선수 100인' 중 14위로 꼽았다. 같은 해 야구 팬들은 사이 영을 메이저리그 20세기 최고 선수팀 일원으로 지명했다. 어린 시절 /위키백과
1826 - 독일의 사회주의자 빌헬름 리프크네히트(Liebknecht, Wilhelm) 출생 리프크네히트 [Liebknecht, Wilhelm, 1826.3.29~1900.8.7] 명문가 출신으로 1848년 3월혁명 때 혁명운동을 하였고, 혁명에 실패한 뒤에도 스위스 ·프랑스에서 혁명파의 잔당을 모아 활동을 계속하였기 때문에 프랑스에서 추방되어 런던으로 옮겨가, 거기서 13년간이나 망명생활을 하였다. 그 동안 마르크스의 지도를 받았으며, 1861년 사면(赦免)받아 독일로 돌아가자 노동자 베벨과 결탁하여 민주주의적 노동자조직을 사회주의적 조직으로 발전시켜 라살파(派)의 운동과 대항하면서 1869년 사회민주노동당을 결성하고, 프로이센-프랑스전쟁(보불전쟁)에 대해서는 반대하다가 투옥되었다.
1816 - 덴마크의 교육자 크리스텐 콜(Kold, Cristen Mikkelsen) 출생 콜 [Kold, Cristen(Kristen) Mikkelsen,1816.3.29~1870.4.6] 덴마크의 국민고등학교 운동에 앞장선 교육자. 콜은 제화공의 아들로 태어나 교사교육을 받았으나 자신이 형식적인 교육형태에 적응하지 못함을 알고 1851년에 리스링게에 기숙학교를 세워 학생들과 함께 소박하게 생활하면서 주로 말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지적인 교육보다는 도덕 발달을 강조했다. 근대 덴마크의 많은 지도자들이 그의 국민고등학교와 그의 학교를 모델로 하여 세워진 학교를 다녔다. 이후 전세계적으로 국민고등학교를 받아들인 학교가 생겨났고 콜의 개인적인 교육관을 반영하게 되었다. /브리태니커
1794 - 프랑스의 철학자, 혁명가 니콜라 드 콩도르세(Condorcet, Nicolas de) 사망 콩도르세 [Condorcet, Nicolas de, 1743.9.17~1794.3.29] 1794년 3월 29일 프랑스 철학자 콩도르세가 의문의 사체로 발견되었다. 피로로 인해 죽었는지 독약에 의해 죽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장 르 롱 달랑베르와 함께 <백과전서 Encyclopedie> 편찬에 적극 참여한 계몽주의 철학자였다. 프랑스 혁명 중에는 지롱드당을 대표해 새로운 헌법 초안을 만들었지만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급진적인 정치집단 자코뱅당에 의해 거부되었다. 또한 루이 16세 사형과 지롱드 당원 체포에 반대하는 등 독자적인 행동으로 법률 보호를 박탈당하기도 했다. 은둔 중에 체포되어 부르그라렌으로 압송되었지만 2일 후 의문의 사체로 발견되었다. 은둔하는 동안 집필한 <인간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관 Esquisse d'un tableau historique des progres de l'esprit humain>(1795)은 오귀스트 콩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브리태니커
- 'Coronation of King Gustav III', by Carl Gustaf Pilo - King Gustav lll's Museum of Antiquities, Stockholm Palace
- Sweden, 50 Kronor (1990, Banknote)
1792 - 스웨덴의 국왕 구스타브 3세(Gustav III) 사망 구스타프 3세 [Gustav III, 1746.1.24~1792.3.29] [역사속의 인물] ‘위기타개’ 뛰어난 레오폴트 2세 리더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위기타개 능력이다. 18세기 중반 합스부르크왕가는 독일을 포함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등을 통치하고 있었다. 레오폴트 2세는 1747년 이러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걸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3남으로 태어나 본래 성직자로 양육될 작정이었으나 강요된 신학교육이 체질에 맞지 않아 결국 교회를 싫어하는 성격으로 자라났다. 하지만 왕족의 좋은 유전자를 이어받아 통치능력은 탁월했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대공시절 메디치 가문이 조성한 산업과 개인자유에 대한 규제를 철폐하고 세금제도를 바꿔 토스카나 공국을 풍요롭게 만들었으나 교황과는 마찰을 빚기도 했다. 1790년 형 요제프 2세가 사망한 후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됐다. 당시 유럽 왕가정치는 매우 복잡한 구도 속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서쪽 프랑스 대혁명의 물결을 잘 막아냈고 동쪽 러시아와 프러시아의 비협조적 태도를 영국과의 동맹과 오스만 제국과의 정전협약 등 능란한 외교수단을 발휘해 제국을 평화적으로 통치하는 데 많은 신경을 썼다. 그러던 중 프랑스가 라인강 서안 독일군주의 권리에 도전하면서 전쟁을 선포할 기미를 보이자 이에 대한 대책에 골몰하던 중 1792년 오늘 44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의 죽음에 많은 의문이 따르지만 역사라는 무대는 늘 그렇듯 필연보다 우연의 변수가 더 잦다. 우문기기자 /매일신문 2011년 03월 01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9745&yy=2011
1790 - 미국의 제10대 대통령 존 타일러(Tyler, John) 출생 타일러 [Tyler, John, 1790.3.29~1862.1.18] [역사 속의 인물] 제10대 미국 대통령 존 타일러 미국의 열 번째 대통령 존 타일러(1790~1862)는 전임인 해리슨 대통령이 임기 중에 사망함으로써 중도에 대통령직을 승계한 최초의 대통령이다. 또한 대통령이었음에도 야당은 물론 여당으로부터도 외면을 받은 첫 대통령이었다. 그가 임명한 각료와 대법관 등 9명이 의회 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하는 수모를 겪었으며 재임 중 탄핵안이 발의되기도 했다. 대통령이 된 타일러는 1842년 아내가 병사하자 2년 뒤 백악관에서 30살이나 적은 당시 24세의 신부 줄리아 가드너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는 어린 신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초호화 결혼식을 열었는데 이게 많은 국민들의 비웃음을 샀고, 임기 막판까지 잡음에 시달렸다. 하지만 부부 금슬은 좋았다고 한다. 타일러는 전처에게서 8명, 가드너에게서 7명 등 총 15명의 자녀를 둬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자식이 많았다. 그의 유일하다시피 한 업적은 텍사스 합병. 텍사스 주민들이 1836년 멕시코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미합중국 가입을 청원하자 1844년 임기 막판에 합병을 승인했다. 1790년 오늘은 그가 태어난 날이다. 최정암 편집부국장 /매일신문 2014.03.29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14734&yy=2014
- 'Child with Cherries' - 'Janet Grizel'
1745 - 영국의 초상화가, 작가 존 러셀(Russell, John) 출생 러셀 [Russell, John, 1745.3.29~1806.4.20] 영국의 파스텔 화가, 아마추어 천문학자, 문학가. 화려한 색채의 분필로 그린 초상화는 18세기 영국에서 높이 평가받았다. 10여 년 동안 그의 작품은 조슈아 레이놀즈 경의 작품과 맞먹는 값으로 팔렸다. 복음주의 감리교도인 그는 초상화를 그리는 동안 모델에게 설교를 했다. 호전적인 그의 종교관은 일부 사람들에게 적개심을 불러일으켰지만, 조지 3세의 전속 화가로 계속 일을 했으며, 문학과 그림에 대해 미학적이고 기술적인 논문도 썼다. 50년 동안 자신의 종교적 실천을 일기에 기록했고, 20년간 망원경으로 달을 관찰하며 동판화로 제작해 달의 지도를 그렸다.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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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