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소설가.
자연찬미가였던 그는 프로방스를 무대로 한 풍부하고 다양한 이미지의 작품으로 널리 칭송받았다. 어린시절을 산마을에서 보내고 여름이면 양치기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 그는 자연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거의 독학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 보병으로 참전했다가 베르됭 전투에서 살아남은 11명의 부대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뒤에 〈거대한 무리 Le grand troupeau〉(1931)에서 자신이 체험한 전쟁의 공포를 그렸다.
지방주의적인 색체가 짙은 3부작 소설 〈세계의 노래 Le Chant du monde〉(1934)에서는 현대문명에 대한 비탄의 목소리를 담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평화주의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좌익 레지스탕스 대원들에게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으나 A. 지드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겼다. 1954년에는 공쿠르 아카데미에 뽑혔다. 전쟁이 끝난 뒤 새로운 문체를 발전시켜 간결하고 힘차며 이야기 중심으로 좀더 낙관적인 말투를 지니게 되었다. 이 시기에 쓴 작품들로는 〈지붕 위의 경기병 Le Hussard sur le toit〉(1952)·〈미친 행복 Le Bonheur fou〉(1957) 등이 있다. 이후에 쓴 〈폭풍 속의 두 기병 Deux cavaliers de l'orage〉(1965)·〈북쪽 나라와 또다른 특징들 Ennemonde et autres caractères〉(1968)에서는 그의 고향 프로방스와 그곳 사람들을 서정적으로 그렸다. /브리태니커
1895 - 나치 포로수용소 유대인들을 구출한 스위스의 외교관 칼 루츠(Lutz, Carl) 출생
루츠 [Lutz, Carl, 1895.3.30~1975.2.12]
Carl Lutz (b. Walzenhausen, 30 March 1895; d. Berne,12 February 1975) was the Swiss Vice-Consul in Budapest, Hungary from 1942 until the end of World War II. He helped save the lives of tens of thousands of Jews from deportation to Nazi Extermination camps during the Holocaust. He was awarded the title of Righteous Among the Nations by Yad Vashem in 1965.
Lutz immigrated at the age of 18 to the United States, where he was to remain for more than 20 years. After working in Illinois and then studying at Central Wesleyan College in Warrenton, Missouri, Lutz went to work in 1920 at the Swiss Legation in Washington. He continued his education at George Washington University, where he received a bachelor’s degree in 1924. During his time in Washington, DC, Lutz lived in Dupont Circle. After serving as chancellor at the Swiss Consulates in Philadelphia and St. Louis from 1926 to 1934, Lutz’s more than 20-year sojourn in the United States ended with his assignment as vice-consul to the Swiss Consulate General in Jaffa, in what was then Palestine.
Appointed in 1942 as Swiss vice-consul in Budapest, Hungary, Lutz soon began cooperating with the Jewish Agency for Palestine, issuing Swiss safe-conduct documents enabling Jewish children to emigrate.
Once the Nazis took over Budapest in 1944 and began deporting Jews to the death camps, Lutz negotiated a special deal with the Hungarian government and the Nazis: he had permission to issue protective letters to 8,000 Hungarian Jews for emigration to Palestine.
Lutz then deliberately misinterpreted his permission for 8,000 as applying to families rather than individuals, and proceeded to issue tens of thousands of additional protective letters, all of them bearing a number between one and 8,000. He also set up some 76 safe houses around Budapest, declaring them annexes of the Swiss legation. Among the safe houses was the now well-known "Glass House" (Üvegház) at Vadász Street 29. About 3,000 Jews found refuge at the Glass House and in a neighboring building.
Together with other diplomats of neutral countries, such as Raoul Wallenberg, appointed at the Swedish embassy, Angelo Rotta, the Apostolic nuncio, Angel Sanz Briz, the Spanish Minister, later followed by Giorgio Perlasca, an Italian businessman working at the Spanish embassy, and Friedrich Born, the Swiss delegate of the International Committee of the Red Cross, Lutz worked relentlessly for many months to prevent the planned death of innocent people, dodging the action of their German and Hungarian counterparts. Thanks to his diplomatic skills he succeeded in persuading Hungarian and Nazi-German officials, among them Adolf Eichmann, to tolerate, at least in part, his formal protection of Hungarian Jews. The Swiss Minister, Maximilian Jaeger, supported him thoroughly until he was ordered to leave the Country by the Swiss government, as the Soviets approached. In the last weeks before the Red Army took the city, Lutz was greatly helped by Harald Feller, who took over responsibility of the Swiss legation after Jaeger's departure. Of note, Lutz's wife Trudi played a central supporting role during the whole period of her husband's activity in Budapest.
His engagement allowed the lives of tens of thousands of people to be saved. However, similarly to Paul Grüninger, his achievements were not recognized until 1958, when he was "rehabilitated" in Switzerland, after having been accused of having exceeded his authority. In 1963 a street was named after Lutz in Haifa, Israel, and since 1991 a memorial wall at the entrance to the old Budapest ghetto remembers him.
In 1964, Lutz became the first Swiss national named “Righteous Among the Nations” by Yad Vashem, the Jewish people’s memorial to the Holocaust.
Lutz died in Bern, Switzerland, in 1975.
http://en.wikipedia.org/wiki/Carl_Lutz
- IL 76 Transport - IL 86 Jet liner
1894 - 러시아의 항공기 설계사 세르게이 일류신(Ilyushin, Sergey) 출생
일류신 [Ilyushin, Sergey Vladimirovich, 1894.3.30~1977.2.9]
하급 병사로 시작하여 공군 중장(中將)에까지 진급하였다. 조종사 근무를 거쳐 공과학교(工科學校)에 입학, 항공공학을 공부했다. 소형기를 몇 종 제작한 뒤, 제2차 세계대전 중 공격기 IL2형을 설계하여 인정을 받아 소련 항공공업의 중진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붙인 설계국을 주재하였다.
그가 설계한 항공기는 다종다양하여, 군용기에서는 IL10 공격기, IL28 폭격기, 민간기로는 IL12와 IL14(모두 피스톤식), IL18(터보프롭식), IL62(터보팬식) 등 수송기가 있는데, 모두 소련 공군 및 아에로플로트(국영 민간항공회사)의 주력으로 중용된 바 있다. /네이버
1892 - 폴란드의 수학자 스테판 바나흐(Banach, Stefan) 출생
바나흐 [Banach, Stefan, 1892.3.30~1945.8.31]
폴란드의 수학자.
근대 함수해석학의 기초를 세웠고 위상 벡터 공간론 발전에 기여했다. 1919년부터 르보프공과대학 수학강사였던 그는 1922년 르보프대학 강사를 거쳐 1927년 정교수가 되었다. 그는 직교급수(直交級數) 이론에 기여했고 측도론과 적분론을 혁신했는데 가장 중요한 기여는 함수해석학에 있다. 발표된 업적 가운데 〈선형연산론 Théorie des opérations linéaires〉(1932)이 가장 중요하다. 그와 그의 공동연구자들은 기존에 발전된 함수해석학의 개념과 정리들을 종합하여 포괄적 체계로 만들었다. 여기서 그는 바나흐 공간으로 알려진 노름 선형공간(normed linear space) 개념을 도입했다. 그는 또 이 분야의 몇몇 기본 정리들을 증명했고, 이론의 응용을 통해서 그뒤 몇 십 년 간 함수해석학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다. /브리태니커
1880 - 아일랜드의 극작가 숀 오케이시(O'Casey, Sean) 출생
오케이시 [O'Casey, Sean, 1880.3.30~1964.9.18]
더블린의 빈민가 출생. 소년시절부터 육체노동자로 일하여 노동운동에 투신하거나 반영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1923년 독립운동을 배경으로 한 서민의 생활을 그린 《암살자의 그림자 The Shadow of a Gunman》가 애비 극장에서 상연됨으로써 장래가 촉망되는 극작가로 인정을 받았다. 이어 《주노와 공작 Juno and the Paycock》(1924) 《쟁기와 별 The Plough and the Star》(1926)로 아일랜드의 대표작가가 되었다.
모두가 영국 식민정책에 대항하는 실제적인 독립운동을 배경으로 소시민의 생활을 그린 것이고, 비극을 기조로 하면서도 조소적인 작가의 눈을 느낄 수 있다. 그 후에는 상징적 극작 《은배(銀盃) The Silver Tassie》(1928) 《문 안에서 Within the Gate》(1934), 사회문제를 다룬 《홍진(紅塵) Purple Dust》(1940) 《주교 환영의 화톳불 The Bishop’s Bonfire》(1955)이 있는데, 그의 작품은 아일랜드 서민의 방언을 살린 데에 특색이 있다. 자서전과 《극장 시론》(1939∼1954)이 있다. /네이버
1867 - 미국-러시아 알래스카 매매 조약 체결
[역사 속의 인물] 노다지땅 알래스카 사들인 윌리엄 슈어드
알래스카는 미국이 '푼돈'으로 사들인 노다지땅이다. 미국 본토의 5분의 1크기나 되는 알래스카를 미국은 러시아로부터 720만 달러에 넘겨받았다. ㎢당 5달러도 안 되는 헐값이었다. 사실 미국은 얼떨결에 이 땅을 샀다. 러시아와 전신망을 연결하기 위한 협상차 미국 국무장관 윌리엄 H. 슈어드가 러시아에 갔다가 이 얼음땅을 사게 된 것이다. 당시 흉년으로 고통받던 러시아는 밀을 살 돈이 급했고, 1867년 오늘 미국과 알래스카 매매 조약을 체결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 앤드류 존슨은 슈어드에게 이 일을 맡기면서 의회 몰래 계약을 추진했다. 의회 승인 사안이었지만 소문 나면 값이 오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미국 의회는 알래스카를 산 것을 놓고 '슈어드의 바보짓'(Seward's Folly)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나 알래스카의 진가가 드러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천대 받던 알래스카는 기회의 땅, 천혜의 자원보고로 재발견됐고 1959년 당당히 미국의 49번째 주로 편입됐다. 'Seward's Folly'란 말도 당대에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나 훗날 높게 재평가된다는 의미를 지닌 관용어가 됐다.
김해용 편집부국장 /매일신문 2012년 03월 30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21734&yy=2012
- First Crossword Puzzle, 1913
1858 - 미국 뉴욕의 레첸도르퍼가 최초로 지우개가 달린 연필의 특허를 받음
지우개(eraser)
잉크, 연필 또는 분필 자국을 지우는 데 사용하는 고무 또는 다른 물질.
오늘날의 지우개는 보통 고무로 접착된 식물성 기름, 고운 속돌가루, 황을 혼합해 만든다. 혼합물은 고무가공기계로 가공·압출하여 가황처리한다. 1752년에 프랑스 학사원은 회보 〈프로시딩스 Proceedings〉에서 흑연 자국을 지우는 데 남아메리카의 어떤 나무들에서 생산되는 식물성 수지인 탄성고무를 사용할 것을 권했다. 1770년에 영국인 화학자 조지프 프리스틀리는 탄성고무에 고무(rubber)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흔적을 지우는(rub out) 데 탄성고무를 사용한 때문이었다. 1858년 3월 30일 미국 뉴욕 시의 조지프 레첸도르퍼가 최초로 지우개가 달린 연필에 대한 특허를 받았다. /브리태니커
1856 - 크림전쟁 종결
1856년 3월 30일 파리에서 프랑스·영국·사르데냐피에몬테·투르크 연합군과 러시아가 크림 전쟁을 종결짓는 파리 조약에 조인했다. 서유럽 열강들은 러시아로부터 오스만 투르크를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크림 전쟁에 참가했기 때문에 러시아와 투르크의 문제에 관해 각별한 관심을 나타냈다. 이 조약에 서명한 국가들은 투르크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보장했다. 이 조약으로 러시아는 도나우 강 어귀의 베사라비아를 몰다비아에 양보했으며, 몰다비아는 왈라키아와 마찬가지로 투르크에 종속된 자치국으로 인정받았다.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는 나중에 루마니아로 통합되었다. 흑해는 각국의 함대와 가까워 중립 영해가 되었으며, 도나우 강은 모든 국가의 선박에 개방되었다. /브리태니커
파리 조약은 1856년 크림 전쟁의 후속 조처물로 이뤄진 조약으로서 러시아 제국, 오스만 제국, 사르데냐 왕국, 프랑스, 영국이 체결한 조약이다. 1856년 3월 30일에 체결되었으며 조약을 통해 흑해 일대의 영역이 중립지역으로 선포되었고 모든 군 관련 함선의 항해가 중지되었다. 군무장이 불가하게 되면서 인근의 투르크 영토가 중립국으로서의 지위를 상당 부분 얻게 됨과 동시에 러시아는 크림 반도에서의 영향력을 잃게 된다.
현재 루마니아의 영토인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지방은 오스만 제국에 복속되어 있었으나 독립 헌법을 제정하고 국회를 여는 등의 자치권 인정을 원해왔다. 파리 조약을 근거로 몰다비아 지역의 사람들이 지역 통합을 누리게 되었으며 남쪽 베사라비아를 양도받게 된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 출신의 핀란드 공작에 소유되어 있던 발트해의 올란드 제도에서의 군무장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는 영국과 프랑스의 치밀한 계산에서 나온 것으로 제도 일대가 러시아의 군기지로 사용되는 데 반발하여 정해진 조항이었다.
파리 조약, 즉 파리에서 공표된 평화란 러시아의 실패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 러시아는 도나우 강의 하구 일대에 소유하던 자국 영토를 포기한다.
* 오스만 제국에 기독교를 보호하려던 러시아의 강제 요청을 철회한다.
* 러시아는 세르비아를 비롯한 루마니아 일대 지방에 더이상의 간섭을 하지 않는다.
* 조약체결 이후 러시아의 헌법 조항 개정을 요구한다. /위키백과
- 'Self-portrait' - 'Self-portrait'
- Sunflowers' &nbs; - 'Iris'
- 'Church at Auvers-on-Oise' - 'Le Meridienne' d'Apres Millet
- 'The Weaver at the Room' - 'Spring Sowing'
1853 -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Gogh, Vincent van) 출생
고흐 [Gogh, Vincent (Willem) van, 1853.3.30~1890.7.29]
[어제의 오늘]1853년 화가 빈센트 반 고흐 출생
ㆍ‘스스로 귓불 잘랐던 사건’ 유명
세계적으로 이름난 화가들은 많지만 아마 한국에서 그만큼 유명한 화가는 드물 것이다. 프랑스 남부의 태양처럼 강렬한 색감의 그림과 말년의 기이한 행적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인상파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1853년 3월30일 네덜란드의 그루트 준데르트에서 태어났다.
고흐에 얽힌 가장 유명한 일화는 역시 스스로 귓불을 잘랐던 사건일 터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남들보다 예민하고 소심해 주변 사람과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젊은 시절 고흐는 서점 점원과 미술품 판매상 등을 전전했으나 미술에서 행복을 찾기로 결심하고 20대 후반 벨기에로 가 미술을 공부했다. 초기 작품 중 걸작으로 꼽히는 <감자 먹는 사람들>(1885)이 이때 발표됐다.
그가 본격적으로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한 것은 1886년 프랑스 파리로 이주하면서부터다. 그는 그곳에서 피사로와 모네, 고갱 등을 만났고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 어둡던 그림의 톤은 점차 밝아졌고 붓 터치도 여느 인상파 화가들처럼 짧고 간결해졌다. 그러나 예민한 성격 탓에 화가들과의 교류는 원만하지 못했다. 동료들과 그림에 관해 밤샘 토론을 자주 하다 건강도 악화됐다. 결국 파리 생활을 접고 햇볕이 온종일 내리쬐는 프랑스 남부의 아를로 이사했다. 해바라기 그림이나 노란 밀밭이 소용돌이치는 아름다운 작품들이 이곳에서 탄생했다.
고흐는 시골 생활의 외로움을 달래고자 친구 고갱을 아를의 화실로 불러 함께 지냈지만 그 결말은 좋지 못했다. 1888년 말 큰 다툼 끝에 고갱은 아를을 떠났고 고흐는 자신의 귓불을 잘랐다. 1890년 파리 근교 오베르 쉬르 와즈로 옮겨 의사의 진료를 받으며 요양에 들어갔지만, 결국 이사 두 달 후인 7월27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7세였다.
그는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900여점이나 되는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정작 유명해진 것은 사후였다. 생전에는 단 한 점의 그림밖에 팔지 못했다. 부(富)도 우정도 누리지 못한, 불운했던 예술가는 가장 절친했던 형제이자 친구인 테오와 함께 오베르 쉬르 와즈에 묻혀 있다.
최희진 기자 daisy@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0-03-29 17:51:18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003291751185&code=100100&s_code=ap005
1844 -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폴 베를렌(Verlaine, Paul) 출생
베를렌 [Verlaine, Paul-Marie, 1844.3.30~1896.1.8]
로렌주(州) 메스 출생. 아버지는 공병 대위였고 어머니는 농업과 양조업을 겸영하는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는 외아들이었으므로 양친의 사랑을 독차지, 유년시절을 행복하게 보냈다. 7세 때에 군직에서 물러난 아버지를 따라 일가가 파리로 이사하였다. 대학 입학자격 시험에 합격한 그는 파리대학에 입학하여 법학부에서 공부하였으나 중퇴하고, 20세에 보험회사에서 일하다가 파리시청의 서기로 근무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21세에 아버지를 잃고, 이듬해 시지(詩誌) 《현대 고답시집(高踏詩集)》 제5분책에 7편의 시를 발표하였으며, 이어 외사촌누이 엘리자의 출자로 처녀시집 《토성인의 노래 Les Poemes Saturniens》(1866)를 출판하여 시인으로서의 제1보를 크게 내디뎠다. 제2시집 《화려한 향연 Les fetes galantes》(1869)에서는 18세기 루이왕조시대의 화려한 로코코 예술의 세계에서 취재하여, 근대의 우수와 권태를 노래하였다.
이 무렵 한 친구의 사촌 여동생인 16세의 마틸드 모테와 약혼이 성립되었는데, 이 청순무구(淸純無垢)한 약혼녀에 대한 사모의 정을 섬세한 감수성으로 천진난만하게 노래한 시편을 정리한 것이 제3시집 《좋은 노래 La Bonne Chanson》(1870)이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침울한 분위기에 휩싸인 파리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나, 얼마 안 되어 프랑스 국방군에 입대하였다. 1871년에 파리코뮌의 봉기를 지원하였으므로, 그 진압 후에 밀고당할까 두려워 시청을 퇴직하고 말았다. 이 무렵부터 주사(酒邪)가 심해졌으며, 또 북프랑스에서 불러 온 젊은 시인 랭보와 동거를 하여 부부생활에 불화를 초래하였다. 랭보와 함께 벨기에를 방랑하다가 런던으로 건너갔으나, 1873년 7월 브뤼셀에서 술에 취해 랭보와 논쟁을 벌인 끝에 권총을 발사하여 그의 왼손에 상처를 입혔기 때문에 2년을 교도소에서 보내게 되었다.
복역 중에 친구의 노력으로 제4시집인 《말없는 연가(戀歌) Romances sans Paroles》(1874)가 출판되었고, 아내와 이혼하였다. 출소 후로는 가톨릭교도로서 평온한 전원생활로 보냈으며, 감동적인 비애감을 불어넣은 경건한 제5시집 《예지(叡智) Sagesse》(1881)를 내놓았다. 한때 프랑스의 어느 시골의 사립중학교에서 교사가 되었으나 제자인 한 미소년과 동성애에 빠진 데에다 주사가 되살아나 마침내 면직을 당하고, 그 이후로는 추문과 빈궁의 비참한 만년을 보낸 끝에, 1896년 1월 데카르트가(街)의 어느 낡은 집방에서, 동거생활하고 있던 창녀가 지켜보는 가운데 52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생전에 간행한 시집은 위의 5권을 포함, 20권에 이르며 시편은 840편이나 된다. 1894년에 그는 시왕(詩王)으로 선출되고, 세기말을 대표하는 대시인으로 숭앙되었다.
그의 시풍(詩風)은 낭만파나 고답파(高踏派)의 외면적이고 비개성적인 시로부터 탈피하여 무엇보다도 음악을 중시하고, 다채로운 기교를 구사하여 유원(幽遠)한 운율과 깊은 음영(陰影)과 망막(茫漠)한 비애의 정감으로 충만되어 있다. 이 밖에 랭보, 말라르메 등 근대시의 귀재(鬼才)들을 소개한 평론집 《저주받은 시인들 Les poetes maudits》(1884), 회상기 《나의 감옥 Mes prisons》(1893) 《참회록 Confessions》(1895) 등의 저서도 유명하다. /네이버
- Argentina, 20 Pesos (Banknote)
1793 - 아르헨티나의 독재자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Rosas, Juan Manuel de) 출생
로사스 [Rosas, Juan Manuel de, 1793.3.30~1877.3.14]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생. 유복한 군인 집안에서 태어나 청년시절을 목장에서 보냈다. 가우초(카우보이)로 이루어진 의용군을 조직하여 변두리의 인디언들과 싸워 세력을 확장, 1829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주(州)지사가 되었다. 임기를 마친 후 목장으로 돌아갔으나 1834년 다시 주지사가 되자 독재자로서 권력을 장악하고 공포정치를 실시하여 많은 망명자와 희생자를 냈다. 우루과이를 정복하려고 1839년부터 9년간에 걸쳐서 몬테비데오를 포위하였으나, 영국 ·프랑스의 간섭을 받아 실패하였다. 1852년 2월 심복이었던 장군 우르퀴자가 이끄는 우루과이-브라질연합군에 패하여 영국으로 망명하였다가, 가난에 못 견디어 죽었다. /네이버
1754 - 프랑스의 열기구 비행가 필라트르 드 로지에(Pilâtre de Rozier, Jean-François) 출생
필라트르 드 로지에 [Pilâtre de Rozier, Jean-François, 1754.3.30~1785.6.15]
Jean-François Pilâtre de Rozier (30 March 1754 – 15 June 1785) was a French chemistry and physics teacher, and one of the first pioneers of aviation. He and the Marquis d'Arlandes made the first manned free balloon flight on 21 November 1783, in a Montgolfier balloon. He died when his balloon crashed near Wimereux in the Pas-de-Calais during an attempt to fly across the English Channel. He and his companion, Pierre Romain, became the first known fatalities in an air crash.
http://en.wikipedia.org/wiki/Jean-Fran%C3%A7ois_Pil%C3%A2tre_de_Rozier
최초의 유인 열기구 비행
1783년 11월 21일 기구를 이용한 최초의 유인비행이 행해졌다. 필라트르 드 로지에(Pilatre de Rozier, Jean Francois, 1754~1785)와 아를랑데 후작(Marquis d'Arlandes, 1742~1809)이 몽골피에 기구로 파리를 횡단한 것이다. 이들은 양모와 짚을 태워 23분 동안 약 9㎞를 비행했다. 그해 12월 물리학자인 J. A. C. 샤를(Charles, Jacques Alexandre, 1746~1823)과 니콜라 루이 로베르는 수소를 넣은 기구로 2시간 동안 비행했다. 유인비행에 앞서, 1709년경 브라질의 바르톨로미 로렌소 데 구스망에 의해 최초로 기구의 실험이 있었고 프랑스 앙노네(Annonay)의 조제프 몽골피에(Montgolfier, Joseph Michel, 1740~1810)와 에티엔 몽골피에(Montgolfier, Jacques Etienne, 1745~1799) 형제는 1783년 6월 4일 무인기구로 2.4㎞ 이상 비행한 뒤 9월 19일 더 큰 기구에 양·닭·오리 등을 태워 띄운 바 있었다. 기구는 군대에서도 많이 사용되었는데, 나폴레옹은 전투에서 관측용 기구를 썼으며 미국 남북전쟁과 제1, 2차 세계대전 때도 기구가 이용되었다. 과학계에서는 1911~12년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인 V. F. 헤스가 우주선(宇宙線)을 증명하기 위해 기구를 5,000m 상공까지 올려보내는 대담한 실험을 했다. 1931년 5월 스위스의 물리학자이며 교육자인 오귀스트 피카르는 기구에 여압실을 설치해 세계 최고의 고도비행기록을 세웠다. 기구는 스포츠용으로 인기가 있었다. /브리태니커
- 'Trancisco de Goya' by Lopez - 'Self-portrait, detail'
- 'La Maja Desnuda' and 'La Maja Vestida'
- 'Fantasy of Flight' - 'Fantasy of Flight'
- 'El Cid Killing a Bull' - 'The Love Letter'
- 'Gen. Don Antonio Ricardos' - 'Boys with a Mastiff'
- 'Dairy Maid of Bordeaux' - 'The 3rd of May'
1746 - 에스파냐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Goya, Francisco) 출생
고야 [Goya (y Lucientes), Francisco Jose de, 1746.3.30~1828.4.16]
[책갈피 속의 오늘]1746년 스페인 화가 고야 출생
벌거벗은 여성이 침대에 누워있다. 남자를 갈망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뻔뻔스럽고 무례할 정도로 도발적인 눈빛.
남성들은 그 눈빛에 가슴이 서늘해진다. 모른 척 시선을 돌리려 해도 슬금슬금 다시 눈이 간다.
1800년대 초반 프란시스코 고야의 ‘나체의 마하’가 발표되자 스페인은 발칵 뒤집혔다. 나체화가 금지됐던 시기에 치모(恥毛)까지 그려 놓았으니….
“법정에 출두해 음란한 그림을 어떤 목적으로 그렸는지 답변하시오.”
감춰뒀던 본능이 까발려지는 건 그토록 두려운 일이었을까. 1815년 종교재판소는 급기야 고야를 법정에 세운다. 엄숙주의가 사회를 무겁게 짓누르던 시기였다.
고야는 1746년 3월 30일 스페인 북동부 사라고사의 벽촌에서 태어났다. 14세에 처음 붓을 잡았지만 왕립 미술아카데미 선발 시험에서 두 번이나 떨어졌다. 태생은 비천했고 그림 실력 역시 천재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결혼을 통해 상류층에 끈이 닿았고 궁정화가로 순탄한 삶을 살았다. 출세지향적이고 현실주의적인 사람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그랬다.
왕가의 초상화를 주로 그리던 그의 화폭에 어느 순간 변화가 찾아왔다. 도제(徒弟)가 아니라 자신의 그림을 그리게 되면서였다.
여전히 인물화였지만 팔다리가 잘리거나 총에 맞아 피가 흥건한 사람이 등장했다. 어딘지 모르게 음울하고 다시 떠올리기조차 싫은 기괴한 이미지가 가득했다.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 프린시페 피오 언덕의 총살’ 같은 그림은 한국에선 한동안 금기시될 정도로 메시지가 강했다.
신고전주의에 대한 반기(反旗), 궁정과 교회가 아닌 현실을 그리려는 저항적 사고의 산물…. 그의 그림에 대해 후세는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문화비평가 이반 나겔은 (고야의 그림에서) “옷 벗겨짐은 인간성 상실과 존엄성의 손상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고야는 법정에서 “왜 마하를 그렸느냐”는 질문에 끝내 답하지 않았다. 대신 똑같은 포즈로 ‘옷을 입은 마하’를 그려 내놓았다. 그의 일생을 관통한 것은 엄숙함에 대한 야유와 비판이었으나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홍석민 기자 smhong@donga.com /동아닷컴 2005-03-29 18:58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50329/81743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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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5 - 스페인 출생의 철학자, 신학자, 의학자 모세스 마이모니데스(Maimonides, Moses) 출생
마이모니데스 [Maimonides, Moses, 1135.3.30~1204.12.13]
원명 모세스 벤 마이문(Moses ben Maimum). 아랍명 아부 임란 무사 이븐 마이문 이븐 우바이드 알라(AbūχImran Mūsā ibn Maymūn Ibn χubayd Allāh). 에스파냐 코르도바 출생. 이븐 루슈드와 함께 칭송되는 유럽 중세의 최대 학자이다. 무와히드 왕조의 그리스도교 ·유대교의 박해 때문에 일가(一家)는 모두 각지로 방랑하였고, 끝으로 후스타트(카이로의 한 지구)에 정주하여(1165) 생계를 위해 의업(醫業)에 종사하였으며, 후에 살라프알딘과 그 아들 말리쿨이지즈의 시의(侍醫)가 되었다. 카이로의 유대교단을 주재하였고, 그곳에서 세상을 떠나 팔레스티나의 디벨리아스에 묻혔다. 그의 저작은 일부를 빼면 모두 아라비아어로 씌었다.
철학에서는 《방황하는 자들을 위한 안내서》가 유명하다. 이것은 이슬람교단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유대신학을 조정하고자 한 것으로서, 유대교의 보수적인 정통파와 신비주의자에게는 배척을 받았으나, 일반인으로부터는 열광적인 찬사를 받았다. 의학 분야에서는 《의학 원리의 서(書)》(1187∼1190)를 썼는데 갈레누스의 모든 저작을 인용하여 주석, 비판하였다. 또한 l198년경에 쓴 《보건론(保健論)》도 널리 애독되었다. 또 해독약(解毒藥) ·천식(喘息) ·치질 ·성교(性交) 등에 관한 논문도 썼다. 천문학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전원(周轉圓)과 편심원(偏心圓)의 이론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반(反)하는 것이라 하여 배척하였다. 그가 헤브라이어로 쓴 《율법재설(律法再說)》은 모세와 율법교사들의 모든 율법을 처음으로 완전분리하여 성문화한 서적이다. 그의 사상은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J.에크하르트, 니콜라우스 쿠사누스 등에 영향을 끼쳤다.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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