嶺南學脈 (21) 梅溪 曺偉
대의와 명분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고 성장한 영남 사림은 金宗直과 문인(門人) 曺偉 兪好仁 鄭汝昌 金馹孫 등이 대거 진출하는 세조 성종대에 이르면 훈구 세력 일색인 중앙정계에 신풍을 일으켰다. 그 것은 훈구 대신들에게 둘러 쌓인 성종이 金宗直과 그의 소장 문인들의 뛰어난 문장과 학문을 높이 평가하고 이들을 중용 한데서 비롯됐다. 여기에는 申叔舟姜希孟 등 영남출신 원로들의 적극적인 후원이 컸던 것도 사실이다.
영남사림의 대표격인 金宗直은 지방수령과 시강관, 도승지 등을 역임하면서 쌓은 업적으로 당대 조정을 대표하는 학자로 명성이 높았다. 金宗直의 이 같은 위치는 그의 문인들이 대거 중앙에 진출하는 발판이 됐다. 훈구파들은 자연히 金宗直을 경상도선비당으로 몰아붙이던 중 연산군 즉위와 함께 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구실로 무오사화를 일으켜 사림40여명을 제거했다.
무오사화의 도화선은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인 曺偉와 사관인 金馹孫이 성종실록을 편찬하면서 조의제문을 실록에 그대로 수록 한 데 있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영남사림에 대한 훈구파의 뿌리깊은 질시와 불안이 짙게 깔려있었다.
무오사화로 曺偉 兪好仁 表沿沫 金宏弼 鄭汝昌 등 영남사림이 대거 숙청됨으로써 사림은 잠시 제동이 걸린다.
그러나 이사화중에서 도학의 학통은 趙光祖로 이어져 사림이 기호지방까지 확산된다.
한편 曺偉를 비롯한 영남사림의 문장활동은 유배지에서도 활발하여 후일 국문학사상 한 장르를 연 유배가사가 이때 이루어졌다.
본관이 昌寧이고 호가 梅溪인 曺偉는 단종2년(1504), 경북 金陵郡鳳山面 仁義洞에서 태어났다. 曺偉의 아명은 五龍인데 서제(庶弟)曺伸과 함께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나 일곱 살에 시를 지을 줄 알았다. 그러나 曺偉의 학문은 金宗直과의 만남에서부터 시작된다.
그가 열살 때 누나가 金宗直에게 출가하자 그는 자연스럽게 金宗直의 문인이 됐다.
자형 金宗直에게서 예기와 문장을 배운 曺偉는 18세 때 생원진사에 3장(三場)장원급제 했다. 21세 때 문과급제 하면서 관계에 진출했다. 승문원정자 예문관검열을 거쳐 23세 때 성종의 명으로, 갓 생긴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하는 영광을 누렸다. 이때 曺偉는 楊熙止, 兪好仁 權健, 蔡壽 등과 장의사(藏義寺)에서 글을 읽었는데 曺偉가 제일 나이가 적었다.
그의 뒤를 이어 金馹孫· 姜渾 등 문우들이 속속 호당에 들어와 마치 세종 때 집현전 학사들이 사가독서 하는 것과 방불했다.
曺偉의 벼슬은 누진되어 25세에 홍문관교리와 박사가 되어 任士洪을 탄핵했고 이듬해엔 경차관(敬差官)으로 평안도 三峯島의 난민을 수습했다. 또 金渾과 함께 일본통신사 李亨元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건너가 그곳에서 시문(詩文)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 무렵 조정에서는 세종 때 착수했던 중국 만당(晩唐)의 시성 杜甫의 시를 언해(諺解)하는데 심혈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성종은 이 작업의 최고 책임자로 명문장이며 국문에 조예가 깊은 曺偉를 임명했다.
성종이 두시언해를 국가적 사업으로 종결 지으려 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유교입국을 내걸고 개국한 조선은 착착 그 기반이 다져졌으나, 세조의 왕위찬탈은 건국이념인 유학의 핵심인 정통사상과 대의명분을 뿌리 채 흔들어 놓았다.
이점을 염려한 성종은 우국충절의 내용이 풍부한 杜甫의 시를 백성들에게 널리 알림으로써 민심을 국왕과 국가에 돌리려고 했다.
원래 杜甫의 시는 세종 때 永川사람 柳允謙이 찬주분류두시(纂註分流杜詩)란 이름으로 주석해 놓은 것이 있었다. 柳允謙은 두시의 대가이자 父인 柳方善의 가학을 이어 두시에 능통했는데 이때 曺偉의소개로 두시언해 작업에 참가했다.
성종12년, 曺偉가 28세 때 柳允謙 義砧 등과 함께 완성한 두시언해는 曺偉가 서문을 쓰고, 활자(을해자)로 인쇄됐다.
사헌부지평 사강원문학을 역임한 曺偉는 31세 때 부모봉양을 이유로 외직을 자청해 고향부근인 咸陽군수가 됐다. 조선 초 이래 유학자들에 의해 널리 숭상된 이 같은 위친걸군(爲親乞郡)은 金叔滋 金宗直을 거쳐 문인 兪好仁 曺偉 鄭汝昌 등이 실천에 옮겨 성리학윤리를 실천하고 지방교육을 일으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들이 역임한 咸陽 善山 陜川 義城 高靈 등지를 중심으로 문풍이 크게 진작됐다. 영남이 명실상부한 인재의 부고(府庫)로 불리게 된 것도 이때부터 비롯된 것이다.
소학 대학의 실천윤리를 중시하는 영남사학의 학통을 이은 金宗直이 성리학과 사장을 겸비했던 만큼 그의 문인들은 대체로 도학과 문장의 두 계보로 나눌 수 있다.
金宏弼鄭汝昌이 도학에 치중하여 만년에는 시작(詩作)에서 손을 떼다시피 한 반면, 曺偉, 兪好仁 金馹孫 등은 문장과 경사(經史)에 뛰어났다. 특히 曺偉는 시로(詩老)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문장이 뛰어나 20대에 성종 제일의 총신이 됐다.
金宗直이 성종23년에 죽자 曺偉는 성종의 명으로 金宗直의 문집을 편찬하면서 조의제문을 첫머리에 실었는데 이것이 후일 柳子光 李克墩에게 역신(逆臣)으로 몰리는 단서가 됐다.
연산군 4년에 庶弟 曺伸과 함께 중국에 성절사로 갔다가 오던 曺偉는 遼東에서 무오사화의 비보와 함께 압록강을 건너는 즉시 자신을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진 것을 알았다.
일행은 놀라 어쩔 줄 모르는데 그는 태연히 갈 길을 재촉했다.
마침 요동에 점을 잘 치는 추원결(鄒源潔)이란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曺伸이 찾아갔다. 추원결은 「천 층의 물결 속에서 몸을 뛰쳐나와 모름지기 바위 밑에서 세 밤을 자겠다」하는 시를 써 주었다.
일행이 눈물을 흘리며 압록강을 건너니 뜻밖에도 李克均의 극간으로 曺偉의 사형이 취소되고 義州로 귀양가게 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추원결이「천층 물결 속에서 뛰쳐나온다」고 한 것은 바로 압록강을 건너서도 살겠다는 뜻이었으나, 아래 구절은 무슨 뜻인지 몰랐다. 뒷날, 曺偉가 順天에서 죽은 후 갑자사화가 일어나 무덤 앞 바위 밑에서 부관참시(剖棺斬屍) 돼 3일간 시체를 늘어놓자 사람들은 추원결의 점괘가 딱 들어 맞은 데 놀랐다고 한다.
義州로 귀양간 曺偉는 몇 평 안 되는 귀양지에 해바라기 수십 그루를 심고 띠 풀로 엮은 작은 정자를 지어 규정(葵亭)이란 이름을 지었다. 이것은 죽은 성종에 대한 사모의 정을 해를 그리는 해바라기로 나타낸 것이었다.
순천으로 다시 귀양간 曺偉는 玉川가에 임청대(臨淸臺)라는 단을 쌓고는 같이 귀양 온 문우 金宏弼과 함께 학문을 토론하고 시를 짓기도 했다. 이 무렵 그는「천상백옥경(白玉京)의 십이루 어듸메오/ 오색운 깊은 곳의 자청전(紫淸殿)이 가려시니/ 천문(天門)구만리를 꿈이라도 갈동말동/ 차라리 싀어지여(죽어서) 억만 번 변화하여/ 남산 늦은 봄의 두견의 넋이 되어…」라는 만분가(萬憤歌)를 지어 누구에게도 하소연 할길 없는 비분을 천상의 옥황(성종)에게 호소하기도 했다. 그가 지은 이 만분가는 국문학사상 유배가사의 효시로서 높이 평가 받고 있는 것이다.
현재 曺偉의 고향인 金泉市· 金陵郡은 曺偉를 기리는 뜻에서 梅溪 백일장을 梅溪 曺偉의 태생지인 鳳山면 仁義동 숲에서 열고 있다.
직계 손으로는 15대 종손인 明煥씨(69·농업)가 있으며, 후손들은 鳳山面에 1백50호, 昌寧에 2백호 등 2만여 호가 있다.
▲참고문헌=燕山君日記, 大東野乘, 燃藜室記述.
▲도움말=慶北大 文暻鉉 교수(韓國史), 金泉文化院李긍규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