嶺南學脈 (22) 孫昭 孫仲暾
고려말엽에서 조선조 초기를 전후하여 영남지방이 성리학을 먼저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지방이 타 지방에 비교하여 인재와 물산뿐 아니라 유교적인 미풍양속을 가장 많이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영남지방 중에서도 善山 安東 慶州 尙州 晋州 星州 金海 密陽 永川 昌寧 등은 학문을 높이 숭상하는 곳으로 잘 알려졌다.
이때만해도 성리학의 수용범위는 극히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학문적인 전수관계는 가학(家學)이 기초가 되었고 여기에 혈연적인 관계와 지연적인 유대 등이 가미된 정도였다.
따라서 특정지역에 대학자가 배출되면 바로 그 지역의 문풍이 크게 진작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경주지방은 신라 천 년의 고도로서 또 고려조에 항거하지 않고 거국귀부(擧國歸附)한데서 명문귀족의 문풍이 풍부한 토양 위에서 孫昭?孫仲暾 부자의 출현으로 신유학 즉 성리학풍이 수용보급 되어갔다.
慶州 月城지역 성리학을 주도하고 발전시킨 孫昭 仲暾 부자의 본관은 慶州다.
세종15년(1438)靑松에서 태어난 孫昭는 처향을 따라 月城군 江東面 良洞으로 옮겨왔다.
훈민정음 제작에도 참여했던 孫士晟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사림파 영수였던 金宗直과 초시?대과급제 동기였다.
이때부터 孫昭는 金宗直과 30여년 동안 학문과 도덕을 논하며 교의를 두텁게 쌓았다.
그의 둘째 아들 仲暾이 金宗直의 문하생이 된 것도 이 인연 덕분이었다.
중앙 정계에 진출한 孫昭는 密陽 태생의 金宗直과 尙州 출신의 洪貴達과 함께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사류였다.
그때 세조는 나라의 학문을 천문 풍수 법률 의학 음양 사학 시학 등 7개 부문으로 분류하고 젊은 문신가운데 재질이 뛰어난 사람을 뽑아 전념케 하였다.
孫昭는 의학부문에, 金宗直은 사학 부문에, 洪貴達은 음양부문에 배속되었다.
왕위찬탈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 세조는 모든 학문을 골고루 발전시켜 부국강병을 꾀한 반면 시문에 능하고 통경명사(通經明史)한 金宗直 같은 신진사류는 시사(詩史)부문을 제외한 다른 부문은 잡학이므로 선비가 배울 바가 못 된다고 비판, 실용적인 학문이 이 땅에 정착될 기회를 늦춘 아쉬운 감이 있다.
아무튼 孫昭는 청환(靑宦)직을 역임하던 중 李施愛 난이 일어나자 朴仲善의 종사관으로 참전하여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봉해지는 영광을 누렸다.
그는 슬하에 아들 다섯 딸 둘을 두었는데 이중 둘째 仲暾이 가장 뛰어났다.
어머니 柳씨 부인은 이글거리는 태양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仲暾을 낳았다고 한다.
이때가 세조9년(1463) 태생지는 月城군 江東면 良동이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仲暾이 태어난 書百堂의 머릿방을 혈식군자(血食君子=서원에 배향될 수 있는 대학자나 대현) 3명을 낳을 수 있는 명당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孫仲暾의 탄생 후 28년 만에 그의 생질 동방5현의 한 사람인 李彦迪이 이곳에서 태어난 후 아직 성현군자가 배출되지 않았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仲暾은 조부이래의 가학을 전수 받은 위에 金宗直의 소학을 중심한 성리학의 실천지학(實踐之學)을 쌓았다.
27세의 대과급제로 중앙무대에 진출한 그는 공사간의 모든 일을 공명 정대하게 처리하는 솜씨를 발휘 하였다.
후세 사류들은 그를 가리켜「도량은 강과 바다같이 넓고 고절한 인품은 높은 산같이 우뚝하며 학문은 깊고 정교하다」고 평했다.
학덕이 높고 탁월한 경륜을 편 그는 국가 봉직 자로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존경 받을 수 있는 청백리였다.
尙州 목사 시절에는 그의 선정에 감읍한 주민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지어 그를 추앙했다.
이런 예는 조선왕조 5백 년사에서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가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나라는 그에게 경절(景節)이란 시호를 내렸다.
경절의 경은 의리로써 세상을 바로 잡았다는 뜻이고 절은 스스로 물욕을 이기고 청렴 결백의 사표가 됐다는 의미다.
그의 깨끗하고 기개 높은 사상은 왕에게 올린 오조소(五條疏)에서 엿볼 수 있다.
오조소 내용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강학편=군주는 오로지 배움에 힘써야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다.
▲혈민편=군주와 그 신하는 항상 백성을 사랑하고 아껴야 나라가 부강해진다.
▲숭검편=왕실과 고관대작은 물론 서민에 이르기까지 허례허식을 버리고 근검절약의 풍습을 진작시켜야 한다.
▲용인편=국가가 사람을 쓸 때 어질고 총명한 사람을 가려야 국가의 기강이 바로 선다.
▲사습편=국가의 직무를 담당하고 있는 선비들이 풍류나 즐기고 무사안일주의에 빠지는 폐습을 경계할 것을 지적하고 있다.
치평대도를 밝힌 그의 상소문은 오늘날에도 귀감이 될 수 있는 내용들이다.
연산군 시절의 사화 등 정치적 시련 속에서도 유교적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한 孫仲暾은 영남학맥에 끼친 영향이 크다.
仲暾은 일찍 아버지를 잃은 그의 생질 李彦迪을 양육하고 가르쳐 그가 대현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제공한 점이다.
仲暾은 평소 자질이 걸출한 李彦迪을 친동생 이상으로 사랑하여 임지로 데리고 다니면서 수학케 하였다.
李彦迪 역시 외삼촌 仲暾을 친 부형같이 따르면서 기초학문을 그에게 받았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이들 두 사람의 관계는 외삼촌과 생질이란 혈연적인 유대를 뛰어넘어 서로 아끼고 존경하는 마음이 극진해졌다.
그 예로 仲暾이 이조판서 재직 때 彦迪은 교서 벼슬을 하고 있었다.
이때 한림원 사람들이 仲暾에게 「李공이 대감의 생질인줄 알았더라면 李공을 일찍 승진후보로 추천했을 텐데…」하며 아쉬워했다.
이 말을 들은 仲暾은 「나의 생질은 뜻이 높고 인격이 고결하기 때문에 내덕에 벼슬이 높아졌다고 하면 그는 당장 그 관직을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고 답하였다.
한편 李彦迪은 仲暾을 추모한 제문에서「외삼촌의 넓고 크고 강직한 성품은 이미 타고난 것이어서 덕이 완성되고 행적이 높아 별 노력을 하지 않고도 스스로 남의 모범이 됐다. 내가 조금이라도 의(義)를 안다면 모두 외삼촌이 주신 것일진대…」라고 기술했다.
개인적으론 따뜻한 혈연의 정이 두터우나 공적인 입장에서는 각자의 깨끗한 선비 도를 철저히 실천한 이들의 관계는 권력과 황금만능의 풍조가 물씬한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많은 교훈을 시사하고 있다.
慶州孫氏 일명 月城孫氏의 직계 손은 月城?慶州 일원에 1천여호, 전국에 2천여호다.
孫仲暾의 18대 종손 東滿씨(59?농업)가 조상의 생가인 유서 깊은 書百堂을 지키고 있다.
▲참고문헌=국역판 중종실록?국역판 연산군일기?嶺南사림파형성?한국인명대사전.
<呂源淵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