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천박씨 역대인물
시조(始祖) 대광공(大匡公) (1) 휘,영규(諱,英規)생몰년 미상. 후백제의 장군으로 휘(諱)는 영규(英規). 본관은 순천(順天). 견훤(甄萱)의 사위이다. 견훤을 좇아 후백제 건설과 발전에 공훈을 세웠으며 뒤에 고려삼한통합익찬공신(高麗三韓統合翊贊功臣)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이 되었다.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 제신편(諸臣編)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어 있다. 「박영규(朴英規)는 승주인(昇州人)이니 견훤(甄萱)의 딸을 아내로 삼았다. 견훤의 장군이 되었다가 신검(神劒)이 반역함에 견훤이 와서 투항하니 박영규(朴英規)가 비밀히 그 아내에게 말하기를 “대왕(大王)이 40여 년 동안 근로(勤勞)하여 공업(功業)이 이루어지려 하는데 하루아침에 가인(家人)의 화로 땅을 잃고 고려에 투항하였으니 대개 정녀(貞女)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은 법이오. 만약 우리 임금을 버리고 적자(賊子)를 섬긴다면 무슨 낯으로 천하의 의사(義士)를 보겠소. 하물며 듣건대 고려 왕공(王公)은 인후(仁厚)하고 근검(勤儉)하여 민심을 얻으니 아마도 하늘의 계시(啓示)한 바로 반드시 삼한의 주인이 될 것이오. 어찌 치서(致書)하여 우리 임금을 위안하고 겸하여 왕공(王公)에게 은근(慇懃)함을 표하여 장래의 복을 도모하지 않으리요.” 라고 하니 그 아내가 말하기를 “당신의 말씀이 곧 나의 뜻입니다.” 라고 하였다. 태조 19년 2월에 박영규가 드디어 사람을 보내어 귀관(歸款)하고 또한 말하기를, “만약 의병을 일으키면 청컨대 내응하여 왕사(王師)를 맞이하겠습니다.”고 하였다. 태조가 크게 기뻐하여 그 사인(使人)에게 후하게 하사하여 돌려보내고 박영규에게 답하기를,“만약에 그대의 혜택을 입어 도로가 막히지 않으면 먼저 장군을 배알(拜謁)하고 승당(昇堂)하여 부인(夫人)을 배(拜)하고 형으로 섬기며 자(姉)로 높여 반듯이 끝내 후히 보답할 것이니 천지 귀신이 다 이 말을 들으리라"고 하였다. 9월에 태조가 신검을 토벌하여 백제를 멸하고 박영규에게 말하기를, “견훤이 나라를 잃고 멀리 왔어도 그 신자(臣子) 한 사람 위자(慰藉)하는 자가 없었는데 홀로 경의 부부만은 천리에 음신(音信)을 전하여 성의를 표하고 겸하여 과인에게 귀관(歸款)하니 그 의리는 잊지 못할 것이오.” 하여 좌승(佐丞)을 하사하고 전(田) 1,000경(頃)을 하사하였으며 역마(驛馬) 35필로 가인(家人)을 영치(迎致)하고 그 두 아들에게 벼슬을 내렸다. 박영규는 뒤에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다.」 배위는 완산(完山) 견(甄)씨이며 2남 3녀를 두었으며 2남은 부전(不傳)되고 공의 세 딸은 고려태조 왕건의 부인인 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과 고려 제3대왕인 정종의 비인 문공왕후(文恭王后)와 문성왕후(文成王后)이다.
정승공(政丞公) 중흥조(中興祖) (2) 휘,난봉(諱,蘭鳳) 생졸년(生卒年)은 미상.휘(諱)는 난봉(蘭鳳)이며 득관조(휘,영규)와 공(公)과의 사이에 8,9대가 실전(失傳)된 것으로 추정된다.고려말(高麗末) 충열왕조(忠烈王朝)에서 대장군(大將軍)을 지냈으며 정승(政丞)에 이르렀고 평양군(平陽君)에 봉군(封君)되였다.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서는 공이 사후(死後)에 인제산신(麟蹄山神)이 되었다고 한다.을유보.니성보(乙酉譜.尼城譜)에서는 정승공의 배위는 문화유씨(文化柳氏) 라고 하였으나 문화유씨의 족보(族譜)나 구보(舊譜)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묘소(墓所)는 순천(順天)에 있고 그곳에 난산재(鸞山齋)가 있다.
1세조(世祖) 대제학공(大提學公) (3) 휘,숙정(諱,淑貞)생졸년 미상(未詳). 중흥조(中興祖)이후 3~4대가 실전 된 것으로 추정되며 공의 대(代)부터서 계대(系代)가 밝혀져 순천박씨(順天朴氏) 1세조(世祖)로 받들어 오고 있으며 종지현손(宗支玄孫)을 파조(派祖)로 하여 19파(派)로 번성(繁盛)하였다.공은 고려(高麗)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내셨으며 호(號)는 죽계(竹溪) 휘는 숙정(淑貞)이다. 공은 풍채(風采)와 위용(偉容)이 뛰어나 당세(當世)의 석학(碩學)인 익제 이제현(李齊賢) 근제 안축(安軸)선생과 종유(從遊)하였다고 고려사(高麗史)에서 전(傳)하고 있다. 충숙왕(忠肅王)1년 1314년 경상도제찰사(慶尙道提察使)를 역임하였으며 국자감(國子監)의 좨주(祭主)로 천임되어 유생(儒生)들을 훈도(訓導)하다 관동존무사(關東存撫使)로 나가서 1326년에 관동지방의 산수가 아름답고 경치 좋은 곳에 누대(樓臺)를 지었는데 고성의 사선정(四仙亭) 강릉의 경호정(鏡湖亭) 울진의 취운루(翠雲樓)를 창건(創建)하였다는 내용이 이익재(李益齋) 안축(安軸) 이가정(李稼亭)의 기문(記文)과 정곤수(鄭崐壽)의 행장(行狀)에 있다. 그 후 다시 경서(經書)를 강론(講論)하는 추부학사(秋部學士)로 천임(遷任)되었다.묘(墓)는 실전(失傳)되었으며 배위는 여흥민씨(驪興閔氏)로 5남을 두었으니 차례로 휘.원룡(元龍) 휘,원호(元虎) 휘,원구(元龜) 휘,원린(元麟) 휘,원상(元象)이다.
2세조(世祖) 시랑공(侍郞公) (4) 휘,원룡(諱,元龍) 2세(世)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휘는 원룡(元龍)이며 대제학 휘,숙정(淑貞)의 아들로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때출생하여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재주가 뛰어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일찍이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과 근재(謹齋) 안축(安軸)에게 글을 배워 벼슬이 검교이부시랑(檢校吏部侍郞)을 역임(歷任)하였으나 청렴결백(淸廉潔白)한 성품(性稟)으로 벼슬을 버리고 영동(永同) 천마산 계곡으로 은거(隱居)하다가 이곳에서 졸(卒)하였다.배위는 영산김씨(永山金氏)이며 1남 휘 천상(天祥)을 두었다.
3세조(世祖) 시중공(侍中公) (5) 휘,천상(諱,天祥)생졸(生卒)년 미상(未詳).휘는 천상(天祥)이고 검교이부시랑(檢校吏部侍郞) 휘, 원룡(元龍)의 아들로 고려공민왕(高麗恭愍王) 때 무과에 등제(登第)하고 벼슬이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에 오르고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에 봉군(封君)되었다. 고려사(高麗史)와 조선태조실록(朝鮮太祖實錄)을 상고하면 고려말(高麗末) 공양왕(恭讓王) 때에 조선(朝鮮)을 건국(建國)하려는 신흥세력(新興勢力)들이 국병(國柄)을 휘어잡고 역성혁명(易姓革命)을 도모(圖謀)하던 격변기(激變期)에 그들의 동조(同調)를 거부(拒否)한 원신(元臣)들을 제거(除去)하기 위하여 무고(誣告)한 이.초(彛.初)의 옥사(獄事)사건에 연루(連累) 되어 아들 정후공 휘 가흥(可興)과 함께 투옥(投獄)되었으나 포은(圃隱) 정선생(鄭先生)이 적극변호(積極辯護)하여 참화(慘禍)를 모면(謀免)하고 또 거짓 영흥군(永興君) 왕환(王環)의 진위사건(眞僞事件)에 참여(參與)하여 이를 부인(否認)하다가 왕실무고죄로 죄좌(罪坐)되어 헌사(憲司)에서 극형에 처할 것을 청(請)했는데 시중 이성계(李成桂)와 이림(李琳)등 이적극개입(積極介入)하여 시중공(侍中公)은 석방되고 아들 정후공(靖厚公)은 먼 곳으로 유배(流配)를 당하였다.조선건국후(朝鮮建國後) 태조(太祖)가 벼슬을 내렸으나 나가시지 않으시고 경상도(慶尙道) 가야산죽백동하(伽倻山竹栢洞下)에 은거(隱居)하고 있는 셋째아들 휘 가권(可權)에게 한 때 의탁(依託)하고 있던 중 태조6년 1397년 헌사에서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이지(李至)에게 가산몰수(家産沒收)를 명하였으나 이지가 가산몰수를 사실대로 집행하지 않아 죄를 얻었으나 이듬해 이태조(李太祖)가 시중공을 사면(赦免)하였다. 장남 휘 가흥(可興), 차남 휘 가실(可實), 3남 휘 가권(可權)을 두시었다.
4세조(世祖) 정후공(靖厚公) (6) 휘,가흥(諱,可興)생년(고려 충목 3)1347~ 졸년(세종 9년)1427년. 고려 후기의 문신이며 본관은 순천(順天).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 휘,천상(天祥)의 아들이며, 부인은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정을보(鄭乙輔)의 딸이다.우왕 때 밀직부사를 지냈으나 1388년(우왕 14) 이인임(李仁任)이 숙청당하여 경산부(京山府)에 유배되자 그에 연루되어 순천으로 귀양갔다.공양왕 때 중낭장 이초(李初)와 윤이(尹#이23)가 명나라에 있으면서 명나라의 힘을 빌려 시중 이성계(李成桂)를 제거하려고 모의하였다. 당시 사신으로 명나라에 머무르고 있던 순안군방(順安君昉)과 동지밀직사 조반(趙#반21)이 돌아와 그 사실을 임금께 알렸으므로, 1390년(공양왕 2) 이색(李穡)․우현보(禹玄寶) 등 수십명이 하옥되는 이초(#이23初)의 옥사가 일어났다. 이때 연루된 김종연(金宗#행07)을 숨겨주는 등, 이성계 제거에 협력하다가 붙잡혀 유배당하였다.조선(朝鮮)이 건국(建國)되고 나서 태종(太宗)의 지우(知遇)를 받아 평양군(平陽君)에 봉군 되고 검교의정부우찬성(檢校議政府右贊成)에 제수 되고 이어서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 개성유후사(開城留后司)의 유후(留后)를 하였으며 세종대왕(世宗大王)은 공을 검교의정부우의정(檢校議政府右議政)에 높이었으나 치사(致仕)하였다.세종9년 1427년에 고종명(考終命)하시니 향수(享壽) 81세였다.조정(朝廷)은 철조(輟朝)하고 세종대왕(世宗大王)은 예장(禮葬)을 명하고 치제문(致祭文) 에 지조(志操)를 지킨 누대(累代)의 원로(元老)로써 백성이 우러러본다고 애도(哀悼)하였다. 공께서는 태종(太宗)과 세종(世宗) 양조(兩朝)에 걸쳐 추중(推重)받은 원로(元老)이다. 배위(配位)는 진주정씨(晋州鄭氏)로 자녀는 1남 6녀를 두셨으며 아들은 휘 석명(錫命)이고 태종(太宗)때 내명부최고작호(內命婦最高爵號)인 진한국부인(辰韓國夫人)을 추증(追增)받았다. 계배위(系配位)는 광주정씨(光州鄭氏)이며 아들은 휘 순명(順命)를 두었다.
4세조(世祖) 문민공(文愍公) (7) 휘,중림(諱,仲林) ?~1456(세조 2).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순천. 호는 한석당(閑碩堂). 목사(牧使) 안생(安生)의 아들이며, 사육신의 한 사람인 팽년(彭年)의 아버지이다.1417년(태종 17) 생원에, 1423년(세종 5) 식년문과에 장원, 1427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 해 집현전수찬(集賢殿修撰), 1428년 시강원보덕(侍講院輔德)이 되었으며, 그 뒤 사간․승지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1442년 전라도관찰사, 1451년(문종 1) 경기도관찰사 등 외직으로 나갔다가 1452년(단종 즉위년)에 내직으로 돌아와 공조참판이 되었다. 그해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문전대제학(修文殿大提學)이 되었다. 그의 청렴하고 강직한 성격이 널리 알려져 당시의 정승인 황보 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정분(鄭芬) 등의 추천으로 대사헌이 되었다.이듬해인 1453년 예문관대제학․공조판서 겸 집현전제학을 거쳐 형조판서가 되었다. 대사헌과 형조판서로 있을 때에는 국법을 집행하는 데 엄정하기로 이름이 높았다.1455년(세조 1) 세조가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아 차지하자 크게 통분하여 벼슬을 내어놓겠다는 뜻을 밝히고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이에 세조는 그에게 이조판서를 주어 회유하였으나 끝내 사양하였다. 세조는 노하여 그를 한직인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세조 찬위(簒位)에 크게 통한을 품어오던 그는 아들 팽년과 그의 가르침을 받았던 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 등 집현전학사들이 중심이 되어 은밀히 추진되던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하였으나, 김질(金#질18)의 밀고로 실패로 돌아갔고 그도 사육신과 함께 잡혀 그달 8일에 모두 군기감(軍器監) 앞길에서 능지처사(凌遲處死)당하고 그의 아들 인년(引年)․기년(耆年)․대년(大年) 등도 모두 처형되었다.그뒤 1739년(영조 15)에 신원(伸寃)되어 옛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1784년(정조 8)에 예조판서 엄숙(嚴璹)의 상소에 따라 벼슬을 높여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었다.1791년 단종충신으로 뽑혀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에 등재되었다. 장릉(莊陵:단종의 능) 충신단(忠臣壇) 정단(正壇)에 배향되고, 공주 동학사 숙모전(肅慕殿)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5세조(世祖) 문숙공 (文肅公) (8) 휘,석명(諱,錫命)1370(공민왕 19)~1406(태종 6).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순천. 호는 이헌(頤軒). 밀직부사를 지낸 가흥(可興)의 아들이다.1385년(우왕 11)문과에 급제하여 1390년(공양왕 2) 우부대언(右副代言)․병조판서를 지냈다.1392년(태조 즉위년)조선이 건국되자, 귀의군(歸義君) 왕우(王瑀:공양왕의 아우)의 사위였던 관계로 7년간 은거하였다.1399년(정종 1)고려의 구신 들이 등용되자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로 기용되고 안주목사를 거쳐 이듬해 도승지가 되었다. 정종이 태종에게 선위하자 그 교서를 가져가서 태종을 옹립하였다.1401년(태종1)좌명공신 3등이 되고 평양군(平陽君)에 봉해진 뒤, 지신사(知申事)를 거쳐 1405년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이듬해 함경도선위사․전라도 도체찰사 등을 역임하였다.젊었을 때 정종과 같이 이불을 덮고 자는데 꿈에 누런 용이 옆에 있으므로 돌아다보니 태종이었다. 그때부터 기이하게 여겨 서로 친구로 더욱 두텁게 지냈다.태종이 임금이 되면서 태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지의정부사․판육조사(判六曹事)에 올랐다. 평소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깊었는데, 특히 태종에게 황희(黃喜)를 승지로 천거한 것이 유명하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배위는 개성왕(開城王)씨이고 묘(墓)는 장단(長湍)에 있으며 아드님은 휘 거비(去非) 휘 거완(去頑) 휘 거소(去疎) 3남을 두었다.
5세조(世祖) 충정공(忠正公) (9) 휘,팽년(諱,彭年)1417(태종 17)~1456(세조 2).조선 초기의 문신. 단종 복위운동 때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순천. 자는 인수(仁叟), 호는 취금헌(醉琴軒). 회덕(懷德) 출신. 안생(安生)의 손자이며, 중림(仲林)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김익생(金益生)의 딸이다.1434년(세종 16)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로 급제, 1438년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1447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다시 급제하였다.1453년(단종 1) 우승지를 거쳐 이듬해는 형조참판이 되었다.그뒤 1455년(세조 1)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다음해에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다. 세종 때 신숙주(申叔舟)․최항(崔恒)․유성원(柳誠源)․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 등 당대의 유망한 젊은 학자들과 집현전의 관원이 되었다. 이들 학사들은 모두 그 시대의 이름 높은 선비들이었으나 그 가운데서도 경술(經術)과 문장․필법이 뛰어나 집대성(集大成)이라는 칭호를 받았다.1455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울분을 참지 못하여 경회루(慶會樓) 연못에 뛰어들어 자살하려 하였으나 함께 후일을 도모하자는 성삼문(成三問)의 만류로 단념하였는데, 이때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단종복위운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충청도관찰사로 나가 있는 동안 세조에게 올리는 일체의 문서에는 신(臣)이라는 글자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이듬해 내직인 형조참판으로 다시 들어온 뒤 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兪應孚)․김질(金#질18) 등과 함께 은밀히 단종복위운동을 추진하였다. 그해 6월 1일 세조가 상왕인 단종을 모시고 명나라 사신들을 위한 만찬회를 창덕궁(昌德宮)에서 열기로 하자 이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즉, 왕의 호위역인 운검(雲劍)으로 성승(成勝)․유응부․박정(朴#쟁03)을 세워 일제히 세조와 그 추종자들을 처치하고 그 자리에서 단종을 복위하기로 하였다.그러나 그날 아침 세조는 연회장소인 전내가 좁다는 이유로 갑자기 운검들의 시위를 폐지하였다. 이에 유응부 등은 거사를 그대로 밀고 나가려고 하였으나 대부분은 훗날을 기약하며 거사일을 미루자고 하여 뒷날 관가(觀稼:곡식 씨를 뿌릴 때 왕이 친히 관람하면서 위로하는 권농의식) 때로 다시 정하였다.이렇게 되자 함께 모의하였던 김질이 세조에게 밀고하였으므로 성삼문 등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혹독한 국문을 받았다. 이에 그는 이미 성삼문이 잡혀가 모의사실이 드러났음을 알고 떳떳하게 시인하였다.그러나 세조는 그의 재주를 사랑하여 자신에게 귀부하여 모의사실을 숨기기만 하면 살려줄 것이라고 은밀히 유시하였다.그런데도 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지라 웃음만 지었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세조를 가리켜 나으리〔進賜〕라 하고 상감(上監:왕을 높여 부르는 말)이라 부르지 않았다.세조가 노하여 그대가 나에게 이미신이라고 칭하였는데도 지금 와서 비록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하자, 그는 나는 상왕(上王:단종)의 신하이지 나으리의 신하는 아니므로 충청감사로 있을 때에 한번도 신자를 쓴 일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세조는 그가 충청감사로 있을 때 올린 장계를 실제로 살펴보고 과연 신자가 하나도 없자 더욱 노기를 띠어 심한 고문을 가하면서 함께 모의한 자들을 대라고 하였다. 그는 서슴없이 성삼문․하위지․유성원․이개․김문기(金文起)․성승․박정․유응부․권자신(權自愼)․송석동(宋石同)․윤영손(尹令孫)․이휘(李徽)와 자신의 아비 중림이라 대답하였다. 그는 심한 고문으로 그달 7일에 옥중에서 죽었으며, 다음날에는 다른 모의자들도 능지처사(凌遲處死) 당하였다. 그의 아버지도 능지처사되고, 동생 대년(大年)과 아들 헌(憲)․순(珣)․분(奮)이 모두 처형되어 삼대가 참화를 입었다.이와 함께 그의 어머니․처․제수(弟嫂) 등도 대역부도(大逆不道)의 가족이라 하여 공신들의 노비로 끌려갔다. 이 단종 복위운동이 있을 때 나이가 어렸던 남효온(南孝溫)이 성장한 뒤에 이 사건의 많은 피화자 중 충절과 인품이 뛰어난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여섯 사람을 골라 그 행적을 소상히 적어 후세에 남기니, 이것이 《추강집 秋江集》의 사육신전(死六臣傳)이다.그뒤 사육신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꼽혀왔으며, 그들의 신원(伸寃)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노력해오다가 마침내 1691년(숙종 17)에 이르러 이들의 관작이 회복되게 되었다.그뒤 1758년(영조 34)에 다시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를 받아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1791년(정조 15) 단종에 대한 충신들의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에 올랐다.삼대가 화를 입은 멸문(滅門)으로 그에 대한 자세한 행장이나 문집(文集) 등이 오늘날 전하지 않고 있다. 다만 《추강집》의 사육신전이나 다른 서에 간헐적인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과 문종의 깊은 총애를 받았을 뿐 아니라, 경술과 문장․필법에 뛰어난 존재로 집대성이라는 칭호를 받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경국제세(經國濟世)의 명문(名文)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되나 이와 같은 문집이 전하지 않고 있음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단종이 왕위를 잃게 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대의를 위하여 눈앞에 기약된 영화와 세조의 회유책을 감연히 거절하고 죽음과 멸문의 길을 서슴없이 걸어왔으니, 이와 같은 높은 절의는 오늘날까지 온 국민의 숭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시호는 충정(忠正), 묘는 서울 노량진 사육신묘역에 있다. 그의 묘에는 그저 박씨지묘(朴氏之墓)라고 새겨진 표석(表石)이 새겨져 있다. 그 이유에 대하여 허적(許積)은 성삼문 등 육신이 죽은 뒤에 한 의사(義士)가 그들의 시신(屍身)을 거둬 이곳 강남(노량진) 기슭에 묻었으며, 그 무덤 앞에 돌을 세우되 감히 이름을 쓰지 못하고 그저 아무개 성의 묘라고만 새겨놓았다.라고 설명하고 있다.문장과 필법이 뛰어났는데, 특히 필법에 뛰어나 남북조시대의 종유(鍾繇)와 왕희지(王羲之)에 버금간다 하였다. 이 묘역은 1978년 사육신공원으로 단장되었으며, 장릉(莊陵)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다. 또한 영월 창절사(彰節祠) 등 여러 곳에 제향되었다.
5세조(世祖) 교리공(校理公) (10) 휘 인년(諱 引年)?~1456(세조 2).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순천.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 중림(仲林)의 아들이다.1451년(문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정과로 급제, 우정언(右正言)․지평(持平)을 거쳐 1456년(세조 2) 집현전교리(集賢殿校理)가 되었는데, 성삼문(成三問) 등 6신의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하였다 하여 차열형(車裂刑)으로 처형당하였다.이때 아버지와 팽년(彭年) 형과 그리고 기년(耆年).대년(大年)․영년(永年) 아우들과 함께 6부자가 모두 처형당하였다.
5세조(世祖) 수찬공(修撰公) (11) 휘,기년(諱,耆年)?~1456(세조 2).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송수(松叟), 호는 동재(東齋). 이조판서 중림(仲林)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익생(金益生)의 딸이다. 참판 팽년(彭年)의 아우이다.1451년(문종 1)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수찬에 이르렀으나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1456년(세조 2)아버지와 여러 형제들과 함께 대역죄로 처형되었다.
5세조(世祖) 박사공(博士公) (12) 휘,대년(諱,大年)?~1456(세조 2).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교수(喬#수04).판서 중림(仲林)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익생(金益生)의 딸 이다. 참판 팽년(彭年)의 아우이다. 1456년(세조 2)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자가 되었다. 여러 형제들과 같이 단종복위운동을 도모하다가, 1456년 대역죄로 처형되었다.
문숙공파 (文肅公派) 6세조(世祖) 평원군(平原君) (13) 휘,거소(諱,疎) 생년(生年)과 졸년(卒年)는 실전(失傳). 휘는 거소(去疎)이며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휘,석명(錫命)의 아들로 조선(朝鮮) 문종(文宗)때 문신(文臣), 부지돈령부사(副知敦寧府事)를 역임하고 좌익원종공신(左翼原從功臣)에 책록되고 평원군(平原君)에 봉군(封君)되었다. 배(配)는 청송심씨(靑松沈氏)이며 소현왕후(昭憲王后)의 동생이므로 세종대왕(世宗大王)과 동서(同壻)간이다. 생졸년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상고하면 1405-1451년으로 향년(享年) 45~6세쯤 되시지 않았나 생각된다. 실록(實錄)에는1451년 7월 공의 배위(配位)이신 심씨(沈氏) 작고(作故)시에 호조에서 쌀 콩을 합하여 40석을 부조(扶助)하였다는 기록(記錄)이 있다.아들은 4남이며 장남 휘 중선(仲善), 2남 휘 숙선(叔善), 3남 휘 계선(季善), 4남 휘 승선(承善)이다. 묘(墓)는 실전(失傳) 되었으며 양주 도곡 도산에 신단비(神壇碑)가있다.
문숙공파(文肅公派)7세조(世祖) 소양공(昭襄公) (14) 휘,중선(諱,仲善)1435(세종 17)~1481(성종 12).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순천. 자는 자숙(子淑).부지돈녕부사(副知敦寧府事) 거소(去疎)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청송심씨로 영의정 온(溫)의 딸이며 세종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동생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스스로 스승을 찾아 공부하였고, 특히 무예에 뛰어났다.음보(蔭補)로 충순위(忠順衛)에 들어갔다가 부호군(副護軍)으로 선전관(宣傳官)을 겸하였고, 1460년(세조 6) 7월 무과에 장원하여 훈련원부사(訓鍊院副使)가 되었다.이어훈련원지사(訓鍊院知事)․예빈시소윤(禮賓寺少尹)․부지통례문사(副知通禮門事)․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를 역임하고곧 지병조사(知兵曹事)가 되었다.1463년 병조참의를 거쳐 1466년에 병조참판이 되어 오위(五衛)의 부총관(副摠官)을 겸하였다. 1467년 5월 이시애(李施愛)가 난을 일으키자 구성군 준(龜城君浚) 휘하의 평로장군(平虜將軍)으로서 황해도의 관군을 이끌고 문천(文川)으로 들어가 정토에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책록되고 평양군(平陽君)에 봉해졌으며 병조판서에 승진되었다. 이듬해 9월 평안중도절도사(平安中道節度使)로 나갔다가 이듬해 호조판서에 임명되고 선성군(宣城君)에 봉해졌다.1468년 10월 남이(南怡)의 옥사(獄事)에 공을 세워 정난익대공신(靖難翊戴功臣) 3등에 책록되고 병조판서에 재임되어 서정(西征)에 관한 계획을 수립하기도 하였다.이듬해 7월 다시 평양군으로 봉해지고 10월 전라도 포도주장(捕盜主將)이 되어 당시 창궐하던 도둑 떼의 소탕에 공을 세웠다.1471년 3월 성종 즉위에 공을 세워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에 책록 되었으며 4월 영안북도절도사(永安北道節度使)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양하였다.1476년 3월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윤2월 경기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가 들어와서 도총관이 되었다.1477년 10월 문신들이 그를 무과(武科) 출신이라고 반대하는데도 이조판서에 발탁되었으며, 이듬해 3월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소양(昭襄)이다.
문숙공파(文肅公派)7세조(世祖) 돈녕공(敦寧公) (15) 휘,숙선(諱,叔善)생년미상~1515년, 휘는 숙선(叔善)이고 부지돈령부사(副知敦寧府事) 휘 거소(去疎)의 아들이다. 가정대부(嘉靖大夫)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이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의하면 1460년 무과에 급제(及第)하셨다. 세조9년 1464년에 1자급(資級)을 올려 받으시고 세조10년 1469년 자급을 넘어 봉정대부(奉正大夫)에 올라 바로 통정대부(通政大夫)와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이르렀다.그 후 공의 조카 충열공(忠烈公) 휘 원종(元宗)이 중종반정(中宗反正)을 일으켜 권세성만(權勢盛滿)함을 보고 중종(中宗)2년 1507년 겨울에 나주(羅州)로 낙남(落南)하였다.공의 생년(生年)은 실전(失傳)되었는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상고(詳考)하면 세종(世宗)21년~23년 1439년~1441년쯤으로 추측되며 향수(享壽)75~76세로보이며 중종(中宗)10년 1515년 3월에 작고하였다. 배위는 거창신씨(居昌愼氏)이다.아드님은 5남을 두었는데 차례로 승평군(昇平君) 휘 이온(而溫), 참의공(參議公) 휘 이량(而良), 생원공(生員公) 휘 이공(而恭), 양평공(襄平公) 휘 이검(而儉), 현감공(縣監公) 휘 이양(而讓) 이다.
문숙공파(文肅公派)8세조(世) 충렬공(忠烈公) (16) 휘,원종(諱,元宗)1467(세조 13)~1510(중종 5).조선 초기의 무신. 반정공신(反正功臣). 자는 백윤(伯胤). 적개좌리공신(敵愾佐理功臣) 중선(仲善)의 아들이다.공신가문에서 태어나 음보(蔭補)로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1486년(성종 17)무과에 급제하면서 성종의 특별한 관심을 받았다.1492년 승정원동부승지로 발탁되자 사헌부에서는 연소하고 무과출신인 사람에게 동반의 3품직을 제수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이의를 제기, 서경(署經)을 보류하자, 성종은 다시 공조참의로 발령하였다. 이에 대하여 사헌부가 또다시 반대하자 병조참지로 임명하였다.그뒤 연산군의 특명으로 동부승지․우부승지․우승지․좌승지를 역임하면서, 재정의 긴축문제 등 시무책(時務策)을 건의하여 실현되기도 하였으나, 점차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1500년(연산군 6)에 평안도병마절도사로 좌천되었다가, 곧 동지중추부사․한성부우윤을 역임하고, 1502년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졌다.이어 강원도관찰사․동지의금부사를 역임하고 1506년 경기관찰사로 나갔다가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삭직되었다. 마침내 1506년 성희안(成希顔)․유순정(柳順汀) 등과 함께 반정(反正)을 모의하여 연산군을 폐하고 중종을 옹립하였다.그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1등으로 우의정이 되고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으로 진봉(進奉)되었다. 좌의정을 거쳐 1507년 이과(李顆)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정난공신(定難功臣)1등이 되고, 이듬해에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대간들의 탄핵이 과하다고 하여 이를 견제하였으며, 이우증(李友曾)․조윤손(曺潤孫)․이순(李珣) 등을 천거하여 임용시키기도 하였다.1509년 왜적이 제주도 공마선(貢馬船)을 약탈하자, 이를 문책하고자 대마도(對馬島)에 경차관(敬差官)을 파견하자고 건의하였으며, 전라도 조선(漕船)40여척이 파선, 침몰하자 해운을 폐기하고 육운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같은해에 영의정에 올랐고 이듬해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봉해졌다.무신출신이었지만 문장을 즐겼고 서화를 좋아하여 수집에 힘썼다. 중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무열(武烈)이며 그 후에 충열(忠烈)로 개시(改諡)되었다.
의주목사공파(義州牧使公派)10세조(世祖) 의민공(毅愍公) (17) 휘,이현(諱,而絢)1544(중종 39)~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여수(汝粹). 가권(可權)의 후손이며, 참봉 대영(大榮)의 아들이다.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김면(金沔)의 막하에서 동지들을 모아 고향에서 진을 치고 호남의 고경명(高敬命) 등과 연계, 성주의 가천(伽川) 등지에서 많은 왜적을 무찌르고 전사하였다.뒤에 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의민(毅愍)이다. 성주 덕봉사(德峰祠)에 제향되었다.
의주목사공파(義州牧使公派)(18) 휘,이문(諱,而文) 10세(世)1544(중종 39)~1598(선조 31).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순천. 자는 백빈(伯彬), 호는 남계(藍溪).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 양좌(良佐)의 아들이다.정구(鄭逑)와 교유하였으며, 1568년(선조 1) 사마시에 합격한 뒤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그뒤 효행으로 천거되어 경릉참봉(敬陵參奉)이 되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창의사 김성일(金誠一)에 종사하였다.1629년(인조 7)에 좌승지를 증직 받았다.
의주목사공파(義州牧使公派)10세조(世祖) 용담공(龍潭公) (19) 휘,이장(諱,而章) 1547(명종 2)~1622(광해군 1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순천. 자는 숙빈(叔彬), 호는 용담(龍潭)․도천(道川). 승지 양좌(良佐)의 아들이다.어려서 가학(家學)을 수업하고, 23세에 조식(曺植)을 찾아 덕산(德山)에 갔으며, 1572년(선조 5) 향시(鄕試)에, 이듬해 회시(會試)에 합격하였다.1574년 노수신(盧守愼)을 찾아가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한때 영숭전참봉(永崇殿參奉)으로 나아갔으나 곧 사직하고 돌아와 학문에 몰두하였다.1586년 별시문과에 갑과로 합격하여 승문원정자․홍문관수찬․교리 등을 지내고 1591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임진왜란 때 김성일(金誠一)의 주청으로 종사관이 되어 크게 활약하였다.1593년 10월 사헌부지평․지제교․정언을 지내고 다음해 이조좌랑, 이어서 세자시강원사서를 겸직하였다.1595년 이조정랑․부응교를 거쳐 1599년 사간․집의에 있을 때에 홍여순(洪汝諄)을 탄핵하였다.1601년 성균관전적․상의원정을 지내고 이듬해 집의․홍문관직제학 겸 시강원보덕․동부승지․참찬관을 역임하였다. 이 당시 유영경(柳永慶)파인 소북(小北)으로 반대세력을 비방, 탄핵하였다.1603년 동지정사(冬至正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고, 대사헌․이조참판․부제학을 지냈다.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인홍(鄭仁弘)을 논계하였다.이듬해 대사간이 되고, 이어 동지춘추관사․대사성을 거쳐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1615년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는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가 삭직되었다.그 뒤 성주로 내려가 저술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경상도 초계(草溪)에서 죽었다. 문장에 능하였으며, 특히 시에 이름이 있었다.저술로는 《용담집》․《정서절요 程書節要》․《육경여해 六經#여31海》가 있다. 성주의 청천서원(晴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의주목사공파(義州牧使公派)11세조(世祖) 충장공(忠壯公) (20) 휘,영서(諱,永緖)?~1624(인조 2).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순천(順天). 이현(而絢)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 1620년(광해군 12)옥구현감을 거쳐 창성부사(昌城府使)를 역임하였다.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남이흥(南以興)․정충신(鄭忠信) 등과 함께 반란군의 뒤를 따라 황해도 황주의 신교(新橋)에 이르러 이들과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이에 관군의 선봉장이었던 그는 단신으로 말을 몰아 적중에 돌입하여 이괄을 잡으려 하였으나 오히려 말이 넘어져 포로가 되었다. 그는 이괄을 보고 조정이 너를 부원군에 봉하고 부원수를 시켰는데 무엇이 부족하여 배반하였느냐.고 꾸짖었다.이괄과 한명련(韓明璉)이 그의 용기를 아껴 백방으로 회유하였으나 굴하지 않다가 살해되었다.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충정공파(忠正公派)11세조(世祖) (21) 휘,종우(諱,宗祐)1587(선조 20)~1654(효종 5).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군석(君錫), 호는 도곡(陶谷) 또는 하빈조수(河濱釣#수04). 달성출신.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 충윤(忠胤)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광주이씨(廣州李氏)로 첨정(僉正) 광복(光復)의 딸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이다.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이 포위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싸움에 참여하려고 하였으나 90세 된 양친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자, 오랑캐를 물리칠 열가지 대책을 감사 심연(沈演)에게 진술하였다. 1637년(인조 15) 인조가 굴복했다는 소문을 듣고 북향통곡하고, 평생 동안 지어 모은 초고(草稿)를 태워버렸다. 자칭 숭정처사(崇禎處士)라 하고 종신토록 세상에 나아가지 않았다. 달성10현(達城十賢) 중의 한 사람이며 문음(文蔭)으로 부사과(副司果)가 되었고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다.저서로는 《도곡문집》 3권과 편저인 《병자록 丙子錄》 1책이 있다.
교리공파(校理公派)12세조(世祖) (22) 휘,춘무(諱,春茂)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義兵將). 본관은 순천(順天). 호는 화천당(花遷堂).찰방(察訪)을 거쳐, 1592년(선조 25)임진왜란 때 창의사(倡義使)가 되어 의병을 일으키고 조헌(趙憲)과 함께 호서지방을 지키는 데 큰 활약을 하였다. 침구술(鍼灸術)이 뛰어나 의관(醫官)으로도 활약하였으며, 뒤에는 지방관으로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임천군수(林川郡守)․인천부사(仁川府使)를 역임하고, 이듬해는 부평부사(富平府使) 등을 지낸 바 있어 관계(官階)가 가선(嘉善)까지 이르렀다.참찬(參贊)에 추증되고, 시호는 민양(愍襄)이다.저서로는 《화천당집 花遷堂集》이 있다.
교리공파(校理公派)13세조(世祖) (23) 휘,동명(諱,東命)?~1636(인조 14).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시응(時應), 호는 매은당(梅隱堂). 춘무(春茂)의 아들이다.1592년(선조 25)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가 충청도에서 조헌(趙憲)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적을 공격하였는데, 아버지를 따라 참전하여 언제나 선봉으로 나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전란이 평정된 뒤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태안군수․제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扈從)하였으며, 청나라 군사의 공격을 받아 형세가 위급해지자 위험을 무릅쓰고 분전하다가 장렬하게 죽었다.나라에서 충용(忠勇)을 가상히 여겨 고향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게 하고, 공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문숙공파(文肅公派)13세조(世祖) 검암공(黔巖公) (24)휘,치도(諱,致道) 1642(인조 20)~1697(숙종 23)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순천. 자는 학계(學季), 호는 검암(黔巖).광주(光州)출신 진사 충정(忠挺)의 아들이다.1668년(현종 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1680년(숙종 6) 지평에 이어 정언이 되어 절도정배(絶島定配)와 추록훈(追錄勳)을 신중히 처리하도록 상소하였다.이듬해 도당록(都堂錄)에 오르고, 1682년 북평사(北評事)․부수찬․지평, 1683년 장령․부교리․헌납․집의를 차례로 역임하였다.1684년 이후 오랫동안 승지를 지냈으며, 한때 목사를 지낸 바 있다. 문장에 능하고 학행이 뛰어났으며, 민정중(閔鼎重)․김수항(金壽恒) 등과 깊이 사귀었다.
문숙공파(文肅公派) 14세조(世祖) (25)휘,상현(諱,尙玄) 1629(인조 7)~1693(숙종 19).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경초(景初), 호는 우헌(寓軒). 수림(遂林)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봉산이씨(鳳山李氏)로 부민(傅敏)의 딸이다.경전에 널리 통하였으며 특히 《대학》에 밝았다. 주희(朱熹)의 학문을 근본으로 삼고, 산수(山水)사이의 고요함에 만족하였다. 명나라를 숭배하는 사상이 철저하여 병자․정묘호란이 끝난 뒤 책력(冊曆)속의 청나라 연호를 모두 지워버렸다고 한다.1667년(현종 8)배를 타고 망명해온 명나라의 유민들을 조정에서 체포하여 청나라로 돌려보내자, 이를 개탄하는 시를 짓고 당세에의 뜻을 끊어버렸다.그뒤 《태극도설 太極圖說》․《통서 通書》․《황극경세 皇極經世》․《역학계몽 易學啓蒙》 등의 성리서를 깊이 연구하여 《음양소장도 陰陽消長圖》를 저술하였다.정이(程#이96)․주희(朱熹)․이황(李滉)․이이(李珥)를 높이 받들었으나,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만은 이황의 설을 버리고 이이의 설을 따랐으며, 예학은 김장생(金長生)을 따랐다.뒤에 장령(掌令)에 추증되었다.저서로는 《우헌집》이 있다. 〈趙駿河〉
문숙공파(文肅公派)15세조(世祖) 안촌공(安村公) (26) 휘,광후(諱,光後)생졸년1637(인조 15)~1678(숙종 4)공의 휘는 광후(光後)이고 자는 사술(士述)이며 호는 안촌(安村)이다. 여러 가지 문헌자료(文獻資料)를 종합하여 볼 때 공은 어려서부터 학문(學文)에 정진(精進)하여 학식(學識)이 높고 밝아 호남 선비들의 사표가 되었다 한다. 약관의 나이에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총본산(總本山)인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동춘(東春) 송준길(宋浚吉)의 문정(門庭)에 첫 길을 터서 조선중엽이후 침체(沈滯)했던 호남학계(湖南學界)에 선풍적(旋風的)인 학풍(學風)을 또다시 일으키게 하였고 또 성리학(性理學)에 대가(大家)를 이루고 1666년 30세 때에는 생원진사(生員進士)가 되였으며 우암 송시열선생(宋時烈先生)과의 많은 종유(從遊)를 하였으며 특히 숙종(肅宗)3년 1677년에는 유배(流配)중인 우암선생을 적소(適所)까지 찾아가서 순천박씨(順天朴氏) 최초 족보(族譜) 계사보(癸巳譜)의 서문을 청하고 다음해인 1678년 42세 장년(壯年)의 나이로 갑자기 별세(別世)하였다.그 후 적소(適所)에 있는 우암 선생이 1680년 8월 족보 서문과 안촌공(安村公)의 추도사를 보냈는데 추도사에는 공의 학문절의(學問節義)를 칭찬하며 은산철벽(銀山鐵壁)이라고 하며 호남에서 이런 인물을 잃어다 며 통탄해 맞이하지 않았다고 한다.그리고 우암 송시열 선생은 족보서문에서 안촌공(安村公)이 편집한 족보를 보니 진한국부인(辰韓國夫人) 묘지명(墓地銘)과 문숙공(文肅公), 충정공(忠正公), 소양공(昭襄公),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등 모두가 갖추어져 기록되어 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 이때에 순천박씨(順天朴氏)의 최초(最初)의 족보(族譜)가 완성(完成)되 것으로 보인다.그 뒤 36년 후 1713년에 그 자료로 안촌공(安村公)의 삼종제(三從弟)인 손재공(遜齋公)이 순천박씨(順天朴氏) 최초(最初)의 족보(族譜)인 계사보(癸巳譜)를 발간하였다.배위는 남양홍씨(南陽洪氏)이고 아들 소은공(素隱公) 휘 중회(重繪)는 후사(後嗣)를 두지 못하고 일찍 작고(作故)하여 족질(族姪) 휘 중집(重集)으로 대(代)를 이었다.
문숙공파(文肅公派)15세조(世祖) (27) 휘,광일(諱,光一)1655(효종 6)~1723(경종3).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사원(士元), 호는 손재(遜齋). 사헌부장령 상현(尙玄)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장택고씨(長澤高氏)로 부민(傅敏)의 딸이다.1701년(숙종 27)천거로 내시교관(內侍敎官)․시강원자의(侍講院咨議)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권상하(權尙夏)․정호(鄭澔) 등과 교유하며 학문연구에 힘썼다. 진천사(眞泉祠)․남강사(南康祠)에 봉향되었다.저서로 《손재문집》이 있고, 〈근사록차기 近思錄箚記〉․〈우암선생어록 尤庵先生語錄〉․〈나소변무록 羅疏辨誣錄〉․〈진호문답 晉湖問答〉․〈만덕수창록 晩德錄〉 등이 있다. 시호(諡號)는 문숙(文肅)이다.
교리공파(校理公派)16세조(世祖) (28) 휘,민웅(諱,敏雄) 1674(현종 15)~1732(영조 8)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사호(士豪), 호는 서호산인(西湖山人). 부사(府使) 원진(元震)의 손자이며, 청주에서 살았다.도량과 재간이 뛰어나고 활쏘기와 말 타기에 능하여 소년 때부터 이름이 났다. 뒤에 장신(將臣) 장붕익(張鵬翼)과 이봉상(李鳳祥)이 각각 국사(國士)로서 조정에 천거하였다.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 등이 반란을 일으켜 청주를 함락하면서 충청병사(忠淸兵使)이봉상과 영장(營將) 남연년(南延年)을 죽였다.이때 마침 서울에 있다가 반란의 소식을 듣고는 급히 고향에 돌아와 군사 수백인을 모집, 반적(叛賊)의 토벌에 나서 대신들의 추천으로 충청병마우후 겸 창의사(忠淸兵馬虞候兼倡義使)로 임명되어 신천영(申天永) 등 20여인의 목을 베어 조정에 올려보냈다.이어 이인좌와 사전에 치밀한 모반계획을 세운 바 있는 정희량(鄭希亮)이 경상도의 안음(安陰:지금의 安義)․거창․합천 등지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다시 상주영장 겸 영남창의사(尙州營將兼嶺南倡義使)에 임명되어 반란군을 진압하고 곧 인수(印綬)를 풀고 돌아왔다가 조정의 명령이 없이 임지를 무단 이탈하였다는 죄목으로 고향에 잠시 유배되었다.그 뒤 해미현감(海美縣監)을 거쳐 창성부사(昌城府使)가 되고, 1732년 강계부사에 임명되어 창성에서 죽었다.
충정공파(忠正公派)17세조(世祖) (30) 휘,광석(諱,光錫)1764(영조 40)~1845(헌종 11).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중익(仲翼), 호는 노포(老圃). 대구출생.증이조참판 성수(聖洙)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부림홍씨(缶林洪氏)로 필구(必龜)의 딸이다.1795년(정조 19)문과에 병과로 급제, 1805년 성균관전적에 임명되었고, 이어 사헌부감찰을 거쳐 1809년 남포현감(藍浦縣監)으로 나갔으며, 그 뒤 부교리․동부승지․호조참의 등을 역임하고 안변부사가 되었다.그뒤 한성부우윤을 비롯하여 부총관동지의금부경연특진관(副摠管同知義禁府經筵特進官) 등을 역임하였다. 남포현감으로 있을 때 선세(船稅)가 과중하여 백성들이 곤경에 빠져 있음을 알고 조정에 건의하여 이를 시정하도록 하였으며, 안변부사로 있을 때도 송사(訟事)를 공정하게 처리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1819년 채제공(蔡濟恭)의 신원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82세로 죽자 왕이 사제문(賜祭文)을 내렸다.저서로는 《노포문집》 3권이 있다.
충정공파(忠正公派)18세조(世祖) (29) 휘,기정(諱,基正)1748(영조 24)~? 조선 후기의 문신.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일여(一如). 사육신 팽년(彭年)의 후손으로, 광주(光冑)의 아들이다.음보(蔭補)로 현감을 지내다가, 1784년(정조 8)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그뒤 부교리․영월부사(寧越府使)․승지․대사간 등을 역임하고, 1799년(정조 23)병조참판에 이르렀다.같은해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의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어 황해도관찰사로 나아가 태조가 말달리기를 하던 곡산(谷山)의 치마도(馳馬道)옛터를 고증하여 많은 칭송을 듣기도 하였으나, 칙수미(勅需米:중국 칙사를 대접하기 위하여 사신이 지나는 驛路에 두는 쌀)의 관리를 소홀히 하였다는 탄핵을 받아 전직 감사들과 함께 파직되었다.한편, 1796년 왕명으로 이의준(李義駿)․이서구(李書九) 등과 함께 《장릉지 莊陵志》를 교정하여 《장릉사보 莊陵史補》를 편찬하였다.그는 정조로부터 사육신의 후예라는 총애를 받아 영월부사와 참판 등에 특별히 제수받는 영광을 누렸으며, 글씨에도 조예가 깊어 장릉영천비(莊陵靈泉碑)․관풍헌중수기(觀風軒重修記)․육신사기(六臣祠記) 등이 전한다. ※ 參考文獻: 디지털한국학. 順天朴氏實錄. 順天朴氏敦寧公世譜. 其他歷史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