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국의 사람 이름이나 땅 이름을 나타내는) 한자 바로 뒤에 붙는, [ ]안의 글자 : 한국식 한자 발음
▣ 무궁화는 왜 ‘야마구치의 꽃’인가
무궁화가 현 일본 지배 세력(다시 말해, 메이지 유신 이후 지금까지 왜국을 다스리는 무리 – 옮긴이 잉걸. 아래 ‘옮긴이’)의 본고장인 야마구치 현, 즉 ‘야마구치 막부(참고로, 현대 왜국의 정부를 부르는 또 다른 말로는 “자민[自民] 막부”가 있다. [왜국의 여당인] “자민당이 세운 막부”라는 뜻이다. 겉으로는 “민주주의 국가”의 정부인 척하나, 실상은 무사정권인 막부와 다를 바 없는 체제인 왜국 정부의 현실을 비꼬는 말이다. 왜국 국회는 겉으로만 다당제일 뿐, 실권은 모두 자민당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 옮긴이)의 꽃’이자 일본의 꽃이란 증거는 차고도 넘친다. (이제 – 옮긴이) 그 사실들을 톺아보자.
야마구치 현 ‘하기’시의 ‘가와시마(川島[천도])’, 옛 지명 ‘아사히(旭[욱. “아침 해/돋는 해 욱” - 옮긴이])’ 촌에서 하급 사무라이의 아들로 태어난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메이지유신 성립 이후 일본 육군의 실력자로 자리를 굳혀갔다.
1869년(메이지 유신이 성공한 지 한 해가 흐른 해이자, 유구[琉球] 번[藩]이 해체되어 멸망하기 열 해 전이었던 해 – 옮긴이) 3월에는 일본의 변방 ‘하기의 촌놈(야마가타 – 옮긴이)’이 유럽에 가서 프로이센(훗날 ‘도이칠란트 제 2 제국’이 되는, 도이칠란트 북부에 있던 왕국 – 옮긴이)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를 만나 군국주의와 팽창주의를 배우기도 했다(유럽이 나치에는 펄펄 뛰면서, 근대 왜국의 폭력이나 전쟁범죄는 나 몰라라 하는 까닭을 알 만하지 않은가? 실제로, 서기 17세기부터 2차 대전이 터지기 전까지는 서양 여러 나라는 친일에 바탕을 둔 외교/군사정책을 유지했다 - 옮긴이).
그의 고향 ‘하기’의 남쪽에는 무궁화 군락지가 있다. 하기에 속한 ‘가와카미 손(川上村[천상촌]. 이 부락 역시 “가와카미 무라”가 아니라 “가와카미 손”이라고 발음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이토의 고향인 “다부세”도 그렇고, 왜 야마구치 현에서는 마을이 “무라”가 아닌 “손”이나 “존”등으로 불릴까. 이는 우리 발음 “촌”이 그렇게 이어져왔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드러냄과 동시에, 그렇게 불리는 마을은 한반도[코리아(Corea) 반도 – 옮긴이] 도래인, 혹은 임진왜란[6년 전쟁 – 옮긴이] 이후 납치된 조선인들의 집단 거주지였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 지은이의 주석)’ ‘아부(阿武[아무])’강 양쪽 언덕 일대와 ‘헤이케야마(平家山[평가산])’에는 자생적인 무궁화 군락지가 생성돼 있어, 1928년(‘쇼와 3년’ - 지은이의 주석) 1월 18일 (근대 왜국 정부가 정한 – 옮긴이) 국가 지정 천연기념물이 되었다. 별 모양의 분홍색 꽃잎에, 중앙(가운데 – 옮긴이)이 붉은 무궁화 품종 ‘헤이케야마’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무궁화는 중국(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남중국인 화중 지방이나 화남 지방 – 옮긴이)에서 (왜 열도로 – 옮긴이) 전래되어 나라시대에 야마구치 현과 와카야마 현(和歌山県[화가산 현])[전자는 혼슈 섬 서쪽 끝이고, 후자는 혼슈 섬 중부다 – 옮긴이]에서 먼저 자리를 잡았다. 따라서 하기에 무궁화 군락지가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1870년 8월 유럽 연수에서 돌아와 국방차관보에 임명된 야마가타는 고향에 만발해 있던 무궁화에 착안해서 16줄 욱일기를 제작했고, (그로부터 네 해 뒤인 – 옮긴이) 1874년 1월 (욱일기를 – 옮긴이) ‘일본제국 통합 육군기’로 공식 사용하도록 했다.
모두 잘 알고 있듯, 욱일기는 일본의 침략 전쟁 당시 사용된 전범기(戰犯旗 : ‘전쟁 범죄자들의 깃발’을 줄인 말 – 옮긴이)다(옳은 말이다. 한국인인 나는 국제연합[UN] 관리 앞에서도, <알자지라> 기자를 비롯한 외신 기자들 앞에서도, 타이[Thai]나 나이지리아나 바라트나 브라질 같은 친일 국가의 시민/국민들 앞에서도, 그리고 『 일본경제신문 』 이나 『 마이니치 신문 』 이나 『 산케이 신문 』 같은 왜국 언론사의 기자들 앞에서도 이 사실을 큰 목소리로 강조할 것이다 – 옮긴이). 그 깃발 아래 얼마나 많은무고한 인명이 살상되었는지 헤아릴 수조차 없다. (그 – 옮긴이) 깃발에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 사람들의 – 옮긴이) 피눈물이 배어 있고, (그들의 – 옮긴이) 원성이 통곡이 되어 흐른다. 그런 끔찍한 깃발의 원형이 바로 무궁화다. 그런데 그런 무궁화를 우리는 마치 국화(國花. 나라꽃 – 옮긴이)처럼 칭송하고 있다. (이것은 – 옮긴이) 너무나 소름 끼치는 일이다.
일본의 국교 신도(神道)에서는 ‘무한’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대신 – 옮긴이) ‘무궁’이라는 단어(낱말 – 옮긴이)를 사용한다(쓴다 – 옮긴이). ‘천양무궁’이 신도의 최고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御神[천조대어신]. 태양을 신격화한 신으로, [왜국 – 옮긴이] ’황실[왕실 – 옮긴이]의 조상신의 일종‘으로 일컬어진다. 아마테라스는 일본 역대 천황[왜왕 – 옮긴이]에게 삼종신기인 구슬, 칼, 거울을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 지은이의 주석)’의 제1 신칙(神飭. 신[神]으로서의 가르침[飭]? - 옮긴이)이기에 그렇다. (지금도 – 옮긴이) 야마구치 주민들은 아마테라스(천조[天照] - 옮긴이)가 ‘천양무궁의 신칙을 내린 하늘’을 야마구치 현 부근(의 하늘 – 옮긴이)으로 여긴다.
1882년 야마가타는 ‘황군(皇軍. “황제[皇]의 군대[軍]”라는 뜻. 여기서는 서기 1945년까지 있었던 근대 왜군[倭軍]을 일컫는 말로 쓰였다 – 옮긴이)’의 복무규율을 규정한 <군인칙유(軍人勅諭. 임금이 군인에게 몸소 이른 말을 적은 포고문 – 옮긴이)>를 선포하고, 총리로 재직할 때인 1890년에는 군국주의적 교육관을 규정한 ‘교육칙어’를 반포했다.
이 315자로 된 <교육칙어>의 핵심어는 ‘천황 영토의 무궁한 확장’인 ‘천양무궁’이다.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일본 본토인은 물론(勿論. ‘말할[論] 것도 없고[勿]’ - 옮긴이), (한국을 비롯한 – 옮긴이) 모든 식민지와 통치(사실은 지배 – 옮긴이) 지역(근대 왜국이 2차 대전 때 침략/점령한 중화민국의 땅들과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의 지역들 – 옮긴이)의 신민들까지도 이 교육칙어를 암송하면서 ‘천양무궁’을 외쳐야 했다.
1891년 야마가타는 총리(수상 – 옮긴이)직을 그만두고 추밀원 의장, 육군대신 등을 맡으며 ‘천양무궁 군국주의’ 실행의 큰 그림을 그렸다. 1894년(이 해에 제2차 동학군[軍]이 근세조선의 관군과 근대 왜군에게 죽임을 당한다 – 옮긴이)이 되면 청일전쟁을 도발, 56세의 야마가타는 (근대 왜군의 – 옮긴이) 육군 총사령관이 되어 평양 전투를 직접 지휘해 대승을 거두었다.
청일전쟁 개전(開戰. ‘전쟁[戰]을 엶[開]’ → 전쟁을 시작함 : 옮긴이) 즈음, 일본 전역에서는 ‘천양무궁’ 구호와 함께 ‘천양무궁’의 상징인 무궁화 관련 문학예술 활동이 폭증했다. 대표적인 예가 ‘마사오카 시키’의 하이쿠(한자로는 ‘배구[俳句]’. 일본 고유의 시. 다른 시와는 달리 딱 한 줄로 끝난다 – 옮긴이)다. ‘하이쿠를 한 단계 도약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마사오카 시키는 청일전쟁 당시 종군기자로 활약하면서 35세의 짧은 나이로 요절했는데도, 무궁화를 주제로 한 하이쿠만 48수나 발표했다.
그중(그 가운데 – 옮긴이) 두 수는 사람의 키보다 높은 ‘무궁화 비석(木槿塚[목근총])’에 새겨져 숭배를 받고 있다. 그 하나가 일본 ‘에히메 현(愛媛県[애원 현])’ 마쓰야마 시(松山 市[송산 시]) 구마노다이(久万ノ台[구만노태])에 세워져 있다.
이 비석에 새겨져 있는 하이쿠의 내용은
‘무궁화 피어 있는 집의 베틀소리(花木槿家ある限リ機の音)’
다.
그가 청일전쟁에 참여해 지은 것으로 1894년 10월에 쓴 하이쿠의 하나는 이렇다.
‘고지대와 아침 해가 이러하다. 무궁화 울타리(山の手や朝日さしたる木槿 垣.)’
‘무궁화 울타리(木槿垣[목근원])’는 무엇인가. 바로 일본의 꽃 무궁화가 피어나는 지역인 ‘근역(槿域)’이다. 그런 근역이 산(순수한 배달말이자, 옛 배달말로는 ‘뫼’ 또는 ‘염’ - 옮긴이)의 높은 곳이나 아침 해처럼 높이 올라 있다는 찬양가인 것이다.
무궁화가 ‘민족(배달민족 – 옮긴이)의 꽃’이라면서, 우리나라(한국 – 옮긴이)에서는 그 흔한 시도 볼 수 없고, 더구나 무궁화 관련 시비(詩碑. 시[詩]를 새긴 비석[碑] - 옮긴이)는 눈 씻고 볼려야 볼 수도 없다. 진정 우리 꽃이었다면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야마가타는 청일전쟁의 승전 전리품으로 대만을 (새 식민지로 – 옮긴이) 획득함(얻음 – 옮긴이)과 동시에(대만은 서기 1895년부터 서기 1945년까지 왜국의 식민지로서 근대 왜국의 지배를 받았다. 한국보다 열다섯 해 먼저 식민지가 되었고, 그만큼 더 오래 지배받은 것이다 – 옮긴이), 조선(근세조선 – 옮긴이)의 통치권(지배권 – 옮긴이)을 획득하고(얻고 – 옮긴이) 조선의 체제를 일본식으로 바꾸는 이른바 ‘갑오경장(1895년[서기 1894년의 착오로 보인다 – 옮긴이] 제2차 동학농민운동[동학혁명 – 옮긴이]이 일어나고, 청이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자[보내자 – 옮긴이], 일본도 텐진조약을 구실로 조선에 군대를 파병한다[보낸다 – 옮긴이]. 조선 조성과 동학농민군[동학군 – 옮긴이]은 청과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전주화약을 맺고 ’교정청‘이라는 개혁 기구를 신설해 개혁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를 맛본 ‘박규수[朴珪壽. 서기 1807 ~ 1877년]’ 등의 개화파들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위세를 업고 추진한 일본식 개혁 때문에 실패한다. 이를 ‘갑오개혁’이라고 하며, ‘갑오경장’이라고도 부른다. 내각의 변화에 따라 1894년에서 1895년까지 제1차에서 제3차까지 개혁이 이어졌다. - 지은이의 주석)’을 주도했다.
(이후 근세조선은 – 옮긴이) 일본식(근대 왜국식 – 옮긴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체제로 전환됨과 동시에 수많은 일본식 한자어들이 쓰나미(지진해일. 한국인은 이 말[지진해일]을 왜어[倭語]인 ‘쓰나미’ 대신 쓸 권리와 의무가 있다 – 옮긴이)처럼 한반도에 밀려 들어왔다.
이런 야마가타의 후계자는 바로 ‘가쓰라 다로’와 ‘데라우치 마사다케’다. 이들 모두 야마구치 출신이다.
일본(왜국[倭國] - 옮긴이) 역대 63명 총리 중 을사늑약, 경술국치(대한제국의 멸망을 일컫는 ‘망국[亡國]’. 경술년인 서기 1910년에 일어난 일이라서 이렇게 부른다 – 옮긴이) 등 우리나라에 가장 몹쓸 짓을 많이 한 가쓰라 다로는 1848년(에도시대 말기 – 옮긴이) 하기 시내 ‘히야코(平安古[평안고])’에서 하급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쓰라의 출생지는 야마가타의 출생지 바로 옆 동네다. 직선거리 1㎞도 채 안 되는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다.
가쓰라는 1868년 열 살 연상의 동향 선배 야마가타의 평생 심복이 되어 메이지유신 출발에 공헌했다. 1894년 청일전쟁 때 야마가타는 가쓰라를 제3 사단장으로서 랴오닝(요녕성. 요동반도와 요서지방과 요하[遼河]가 있는 곳 – 옮긴이) 반도 침략을 맡겼으며, 청일전쟁 승전으로 획득한 ‘전리품’ 대만을 통치(지배 – 옮긴이)하는 제2대 대만 총독으로 파견했다. 1901년 야마가타는 가쓰라를 11대 총리로 만들어 그에게 조선(대한제국 – 옮긴이)을 대만에 이어 (근대 왜국의 – 옮긴이) 두 번째 식민지(사실은 근대 왜국의 첫 번째 식민지는 유구[琉球] 번[藩]과 - 흔히 ‘북해도[北海道]’로 불리는 - 아이누 모시리였고, 두 번째 식민지가 대만이었으며, 세 번째 식민지는 요동반도의 대련[‘다롄’]시와 ‘카라프토’로 불린 사할린 섬 남부였고, 네 번째 식민지가 대한제국이었다 – 옮긴이)로 만드는 과업을 부여했다.
1903년 4월 21일, 교토의 ‘헤이안’ 신궁에서 난젠지(南禪寺[남선사])로 가는 거리에 있는 야마가타의 별장 ‘무린안(無隣庵[무린암])’에 네 명의 거물이 모였다. 이토, 야마가타, 가쓰라,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小村 壽太郞[소촌 수태랑]. 서기 1855 ~ 1911년)’였다. 무린안 양관(洋館. 서양식 집/양옥 – 옮긴이) 2층에서 이 넷은 만주(제하[諸夏]식 이름은 ‘동북[東北]’. 제하가 ‘길림성’으로 부르는 간도와, 요령성과, 흑룡강성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 옮긴이)는 러시아(로[Ro]시야 – 옮긴이)가, 조선(대한제국 – 옮긴이)은 일본이 차지하는 방향으로 추진하되, 여의치 않을 경우 러시아와의 전쟁도 불사한다는 로드맵(Road map. 기업/나라/국제사회에서 어떤 일을 꾀하거나 밀고 나갈 때 쓰는 말이며, 앞으로의 계획이나 전략이 담긴 ‘구상도’/‘청사진’을 일컫는 말이다 – 옮긴이)을 작성했다. 당시만 해도 (근대 왜국이 – 옮긴이) 만주까지 점령할 계획은 아니었다.
이때 작성된(만들어진 – 옮긴이) ‘무린안의 로드맵(청사진 – 옮긴이)’에 따라, 가쓰라는 이토가 길러낸 윤치호를 움직여 1904년 8월 22일 제1차 한일협약(갑진늑약 – 지은이의 주석)을 체결, 대한제국의 정책 결정권을 박탈했다. 외교, 재정, 군사, 교육 등 대한제국의 모든 분야 정책을 일제가 파견한(보낸 – 옮긴이) 고문관의 재가(裁可. 안건을 결재하고 허가함 – 옮긴이)를 받게끔 만든 이 협약으로 대한제국은 이날 사실상 사망했다.
가쓰라는 러일전쟁 승리 직후인 1905년 7월 29일, 미국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미국 전쟁부 장관(원문에는 “대통령”으로 나오지만, 내가 직접 조사한 결과, 태프트는 서기 1905년에는 미국 전쟁부의 ‘장관’이었지, “대통령”은 아니었다. 태프트는 서기 1909년에야 미국 제27대 대통령이 되었고, 서기 1913년에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대통령”을 ‘전쟁부 장관’으로 고쳤다. 부디 지은이인 조용준 선생과 독자 여러분이 이런 나의 행동을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참고로, 태프트는 서기 1901년부터 서기 1903년까지는 미국의 식민지가 된 필리핀에서 미국 필리핀 총독으로 일하기도 했다. - 옮긴이)과 ‘한국(대한제국 – 옮긴이)은 일본이, 필리핀은 미국이 (식민지로 – 옮긴이) 차지한다.’는 ‘가쓰라 – 태프트 밀약’을 맺었다.
이어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 체결해 대한제국의 외교권마저 박탈, (대한제국을 – 옮긴이)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이미 사망 상태의 대한제국에 한 번 더 사망 선고를 내린 것이다.
가쓰라 2차 내각(서기 1908년 7월 ~ 1911년 8월 : 지은이의 주석) 시절, 가쓰라는 두 번째 한국 조선 통감 자리에 고향 야마구치의 후배 소네 아라스케를 앉혔다. 소네가 읊은 ‘부상(무궁화 나라 일본 – 지은이의 주석)과 근역(무궁화 지역 한국 – 지은이의 주석)을 어찌 다르다 논하리오.’라는 시는 1909년 7월 5일 저녁 고종이 베푼 통감 취임식 축하연 자리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자리에서 천하의 매국노 이완용(李完用, 서기 1858~1926년)은 “두 땅(대한제국과 근대 왜국 – 옮긴이)이 하나가 되니, 천하가 봄이로다(兩地一家天下春).”라고 소네에게 화답했다. 조선(대한제국 – 옮긴이)이 야마구치 막부(메이지 유신 이후의 근대 왜국 정부 – 옮긴이)에 무릎을 꿇은, 정말로 치욕적인 역사(순수한 배달말로는 ‘갈마’ - 옮긴이)의 한 장면이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날인 1909년 7월 6일, 가쓰라 내각은 한국 병탄 방침을 확정했다(‘대한제국을 무너뜨린 뒤 식민지로 만들기로 했다.’는 말을 써야 한다 – 옮긴이).
가쓰라는 아베 신조를 제외하고는 일본 역대 총리 63명 중 최장수 재임 기간 2,886일 동안 군비 확장과 대외 세력 확대(‘왜국의 영역 확대’라는 말을 써야 하는 건 아닌지 – 옮긴이)에만 열중했다. 무궁화의 나라 일본답게 한국을 ‘무궁화 지역(근역 – 지은이의 주석)’으로 변조하여 한국 병탄(점령/식민지화 – 옮긴이)을 완수하고 ‘내선일체’의 사전 정지(整地. [건축물을 만드는 공사를 하기 전에, 그 터가 되는] 땅바닥을 반반하게 고름 – 옮긴이) 작업을 전개하였다.
데라우치 마사타케도 하기 시와 야마구치 시의 경계를 이루는 야마구치 – 아사히 선(山口-旭 線[산구 – 욱 선]) 62번 지방도가 지나는 산골에서 태어났다. 데라우치는 야마가타가 창립한 육군에 소위로 임관한 뒤, 야마가타 군벌의 추천으로 고속 승진했다. (그는 – 옮긴이) 1882년 프랑스 주재무관이 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거쳐 1898년 일본 육군교육 총감을 지냈다.
(그리고 – 옮긴이) 1900년대 초에는 남만주(‘만주’의 남쪽. 근대 왜국은 간도와 요령성을 이렇게 물렀다 – 옮긴이)철도 설립위원장을 맡았다. 1902년 3월 육군대신이 되었으며, 러일전쟁에 승전한 공로로 자작이 되고, 육군 대장까지 올랐다. 1910년 5월에는 제3대 조선통감부 통감으로 부임하여 한일합방(대한제국 멸망/구한국 식민지화 – 옮긴이)을 성사시키고 조선총독부 초대 총독이 되었다.
이후 (그는 – 옮긴이) 1911년까지 육군대신과 조선총독을 겸하여 조선(점령당한 대한제국/구한국 – 옮긴이)과 일본을 오갔다.
데라우치는 헌병(憲兵. 군기 확립/군사 경찰 업무를 수행하는 군인 – 옮긴이)이 경찰 역할을 겸임하는 ‘헌병 경찰 제도’를 창시해 조선의 치안을 유지하는 무단정치를 펼쳤다(데라우치는 대한제국 유민들에게 “조선인[한국인]은 <일본[근대 왜국]>의 통치[지배]를 받아들이거나, [그게 싫다면] [왜국 군인과 순사와 헌병의] 칼을 받아라!”하고 윽박지른 인간이기도 하다 – 옮긴이).
1916년 데라우치는 18대 총리대신에 취임과 동시에 육군 원수로 승진했다.
데라우치 역시 야마가타와 가쓰라를 이어 강력한 군국주의와 팽창주의 대외 정책을 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도이칠란트. 정확히는 ‘도이칠란트 제2 제국’ - 옮긴이)이 조차하고 있던 산둥반도(산동반도 – 옮긴이)와 독일의 식민지였던 태평양 섬들(오세아니아에 속하는 미크로네시아의 섬들 – 옮긴이)을 점령했다(도이칠란트와 근대 왜국이 손을 잡고 함께 싸운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이지, 그보다 스물 한 해 전에 일어난 유럽의 제1차 세계대전은 아니다. 1차대전 때나 서기 1920년대에는 근대 왜국이 도이칠란트의 적이었던 프랑스/영국/미국과 친하게 지냈다 – 옮긴이).
데라우치는 조선 총독 재임 기간 중 내밀히 헌병들과 총독부(조선총독부 – 옮긴이) 관헌을 시켜 조선 마을 어귀에다 무궁화를 이식했다. 앞서도 말했지만 “티격태격 싸우며 무궁화를 심는 것이 조선인의 의무다.”라는 그의 망언은 야마구치의 꽃 무궁화에 대한 변태적 집착의 발현(發現. 숨겨져 있던 것이 드러남 – 옮긴이)이다.
대한제국이 망하고 데라우치 초대 총독이 무단정치를 행하는 이듬해 1911년 5월 일제 내각 문부성(文部省. 한국으로 치면 교육부 – 옮긴이)은 『 음악 』 교과서 맨 앞장에 ‘히노마루의 기’라는 동요를 실었다.
흰 바탕에 빨강 히노마루가 물들인다
아아 갓 만든 일본의 깃발은
‘히노마루의 기’ 가사(노랫말 – 옮긴이)처럼 당시 일본의 국기 히노마루(일장기 – 옮긴이)는 ‘갓 만든’ 것이었다. 히노마루의 기는 1872년(‘메이지 5년’ - 지은이의 주석)에 비로소 일본 국기로 공식 사용하기 시작했다. 반면, 무궁화 품종으로서의 히노마루는 꽃무늬가 ‘해를 실은 배(日の丸[일노환])’와 같다고 해서 12세기 가마쿠라시대부터 불린 이름이다.
예나 지금이나 일본의 모든 동식물과 제품의 품종에 ‘히노마루’가 붙은 건 무궁화가 유일하다. 즉 ‘히노마루 기(일장기 – 옮긴이)’는 히노마루 무궁화를 평면에 펼쳐 국기로 형상화한 것이다.
따라서 자국을 사랑하는 일본인이라면 자국의 국기 히노마루 기를 낳은 어머니라 할 수 있는 무궁화를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더 나아가 그 무궁화를 해외에 널리 이식, 무궁 확산하고 싶지 않겠는가? 게다가 그것이 야마구치의 꽃이기도 한데 이토, 야마가토, 가쓰라, 데라우치의 바톤을 이어받은, 다나카 기이치, 기시 노부스케, 사토 에이사쿠로 이어지는 야마구치 실력자들이 이를(그러니까 무궁화를 심고 가꾸는 일을 – 옮긴이) 왜 가만히 두었겠는가.
앞에서 언급한 다나카 기이치는 기시 노부스케가 총애한 후배로, 그의 고향 역시 야마구치다. (그는 – 옮긴이) 앞서 나온 하기의 무궁화 군락지 가와카미 촌에서 1864년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7년 제26대 총리대신으로 등극한 다나카는 ‘내실에 충실한 수렴정책’에서 ‘천황 영토의 확장’을 노리는 천양무궁의 공격적 팽창으로 정책을 전환했다(바꾸었다 – 옮긴이).
1927년 7월 25일, 다나카는 세계 지배 전략이 담긴 ‘다나카 상주문(田中上奏文)’을 히로히토 일왕에 바쳤다. 다나카 상주문은 일본이 중국(제하[諸夏]. 당시에는 ‘중화민국’ - 옮긴이) 전역을 정복하려면 만주와 몽골을 장악해야만 하고, 중국의 괴뢰정권을 어떻게 만들고 그것을 관리할 것인가에 대한 구상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1928년 1월 18일, 다나카는 자신의 고향 하기 시 남동쪽 가와카미 촌 아부강 상류의 얕은 여울에서 중류의 약 4㎞ 양안 일대와 ‘헤이케야마’의 석회 절벽에 자생하는 무궁화 군락을 국가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
그리고 자신이 친신(親信. 가까이 여겨[親] 신임[信]함 – 옮긴이)하는 사람인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 義則[백천 의칙]. 서기 1869 ~ 1932년)’ 육군대신으로 하여금 산둥반도 침략을 단행하게 했다.
시라카와는 ‘천양무궁’을 외치며 수많은 중국(중화민국 – 옮긴이) 양민을 학살하는 와중에 포탄 껍질로 만든 꽃병에 ‘천양무궁’을 새기기까지 했다.
그는 1932년 4월 29일(양력 4월 29일은 – 비록 서기 1992년에 일어난 일이기는 하지만 – 미국에서 LA 폭동이 일어나 수많은 한국 시민과 한국계 미국인들의 가게가 서아프리카계 미국인들과 라틴계 미국인들에게 공격/약탈당하기 시작한 날이기도 하다 : 옮긴이)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그는 백범 선생이 단장인 한인애국단 단원이기도 했다 – 옮긴이)의 폭탄을 맞아 치명상을 입어 한 달 동안 앓다가 죽었다. 그의 마지막 한마디는 “천양무궁 천황폐하 만세.”였다.
시라카와는 지금 다른 1급 전범들과 함께 도쿄의 야스쿠니 신사에 배향(配享. 종묘에 공신의 신주[神主. 죽은 사람의 위패]를 모심 – 옮긴이)돼 있다.
앞에서 보았듯, 62명 일본 역대 총리 중 초대 이토 히로부미부터 현직(이 글은 아직 아베 총리가 살아있던 때인 서기 2020년에 쓰였다 – 옮긴이) 아베 신조까지 8명의 총리가 무궁화 자생지 야마구치 출신으로 총 재임 기간이 2020년 9월 기준으로 약 44년에 달한다. 이 중 7년 이상 장기 집권한 악성 군국주의자들이 이토, 가쓰라, 사토 에이사쿠, 아베 신조다.
이들에게 무궁화는 ‘일본의 꽃’인 동시에 메이지유신 이후 지금까지 150년 이상(이제는 온 쉰 다섯 해[155년] - 옮긴이) 지속되고 있는 ‘야마구치 막부의 꽃’이다.
박정희는 이런 무궁화를 왜 찬양하고 ‘우리 꽃’으로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었나. 무궁화가 바로 그가 ‘정신적 지주’로 떠받드는 기시 노부스케의 고향, 그의 종일(從日. 왜국[日]을 [종처럼] 따름[從]. 이완용 같은 자들의 성향/말/행동을 평가할 때에는 ‘왜국과 친하다.’는 뜻인 ‘친일’이 아니라 이 말을 쓰는 편이 더 정확하다고 한다 – 옮긴이) 정신의 원형 ‘야마구치의 꽃’이기 때문이다(참고로 다카키 마사오는 “우리는 <일본(왜국)> 국수주의자들의 기백과 행동을 본받아야 한다.”는 말도 서슴없이 한 사람이었다. 이건 종일파나 왜국 우익이 할 말이지, 대한제국 신민의 후손이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 옮긴이).
이렇게 박정희(다카키 마사오 – 옮긴이)와 박근혜(다카키 근혜 – 옮긴이)에 의해 ‘데즈카 미사(手塚 美佐[수총 미좌]. 서기 1934년 ~ )’의 다음과 같은 하이쿠처럼 우리나라에는 무궁화 꽃, (그러니까 – 옮긴이) 일장기(의 어머니인 꽃 – 옮긴이)가 피어났다.
참 화창한 날에 일장기로구나
하얀 무궁화
よく晴れて日の丸といふ白木槿
― 조용준, 『 한일 공동정부 』, 497 ~ 537쪽
― 『 한일공동정부 』( 작은 제목 「 메이지 후예들의 야욕 」. ‘조용준’ 지음, ‘(주)퍼시픽 도도’ 펴냄, 서기 2020년 )에서
― 단기 4356년 음력 11월 7일에, “이제 왜국이 사랑하는 꽃이자, 가짜 나라꽃인 무궁화를 한국에서 몰아내고, 대신 개나리나 진달래를 한국의 – 나아가 앞으로 코리아[Corea] 반도와 간도에서 세워질 새로운 통일국가의 – 새로운 나라꽃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평범한 한국인 잉걸이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