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보존과 복원에 제일 큰 장애는 누구일까요
대통사지 당간지주 가까이서
고가 3미터 30, 폭이 1미터 80이 되는
석불이 발견되어 군청으로 옮겼다는 기사가
매일신보 1930년 7월 28일자에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몇몇분들과 대화를 나눠보니
다들 처음 듣는 이야기라며 그런 사실이 있으면
석불 발견 자리에 복지관을 짓고 있는 일은
바로 잡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주를 이룹니다
출가한 사문으로써 이러한 일에
너무 지나치게 관여하는것 아니냐
하는 생각을 가지신 분들도 계실것이지만
대강의 전후 사정은 이러합니다
지난해 고도보존 아카데미라는 이름으로
공주시가 주관하고 공주대학이 중심이 되는
역사와 관련한 공부를 하였던적이 있습니다
이 강좌는 앞으로 공주가 백제의 고도요
조선의 감영이 있던 문화유산을 잘 살려서
공주를 과거의 역사문화를 잘 유지하면서
미래지향적인 도시로 탈바꿈하게 하는데 있어서
시민들에 대한 역사 교육이 필요하다는 관점에서
시행되기 시작한것으로 압니다
그렇게 시작한 공주역사에 대한 공부는
처음에는 낮은 수준이었지만 조금씩 배움이 커졌고
결국은 공산성과 무령왕릉등을 중심으로 하는 권역과
제민천을 거슬러 올라 충청감영과 대통사를 복원하고
동헌까지 만들겠다는 야심찬 내용을 들을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공주가 잠시 지나는 도시가 아니라
역사적인 관광 문화와 숙박등을 통해서
지역 이익의 창출과 역사교육을 도모하고
나아가서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를 하여
오래도록 빛나는 명품도시를 만들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조금 앞선 시기에
공주에 참고할 불교 기록이 없다는 말을 듣고
'신문으로 본 근대 공주불교'라는 책자를 만들어 상정하였고
이를 연계하여 공주에 있는 폐사지 순례코스를 정리하여
관광안내 책자를 만들어 보려는 꿈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위의 석불 발굴 기사는 이미 그 책이 실린 내용이었습니다
또 고도육성법과 관련하여 애초의 약속대로는 아니지만
국회에서 약간의 경비가 책정되었다는 말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와같은 고도 공주를 만들고자
주민 교육의 주체가 되고 이끌고 있는
공주시와 공주대학교가 두어가지 점에서
간과하고 넘어가는 점이 있다고 보여지는것이 문제입니다
이미 말한것처럼 공주시는 대통사지 금당터로
일제시대 가루베지온이 지적한 자리에
복지시설로 3층 큰크리트건물을 짓고 있는것이 하나요
또 하나는 공주사대부고 강당이 몇달뒤에는 헐리게 되면
그 자리에 강당이 다시 지어질 계획이란 사실입니다
일전에 누군가와 이야기할때 고도보존법상
충청감영을 봉황산 아래 복원하겠다고 하면
사대부고가 옮겨가야 할것인데 어디가 가능하겠는가
하고 물으니 그분은 한마디로 말하기를
옥룡동 문화대학 자리로 가면 된다는 대답이 나옵니다
나는 어딘가 부지를 마련하고
건물을 새로 지어야 하지 않겠나
그러자면 여간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가 생길것이다
하는 의문을 갖고 물은 것이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설령 문화대학 자리가 아니라도
어딘가 좋은 자리를 물색해놓고 준비해야하겠지만
그것은 다음 기회에 이야기하기로 하더라도
앞으로 충청감영을 복원하기로 마음먹는다면
분명 충청감영을 복원할 자리에 건물을 해체하고
새로운 현대식 건물을 짓겠다고 하는 생각은
그동안 공주대학교가 중심이 되어 진행해 온
고도보존 아카데미나 향토문화회의 방향과는
입장이 정면으로 배치되는 상황인 것입니다
어차피 이전을 해야만 충청감영이 복원가능함을 전제로라면
조금은 낡아서 불편하더라도 헐기 이전에 보완해 지내면서
건물 아래 대지를 원형으로 보존해 두는것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그동안 내가 살던 봉황동 236번지 원효사포교원에서는
사택을 지으려 할때 터파기 공사에서 석물들이 나온중에
대소인원하마비가 출토되기도 하였고
유치원에서 사대부고 강당쪽으로 건물들이 신축될때도
건물의 기초가 되는 석물들이 다수 나온것을 본적이 있으며
사대부고 기숙사를 지을때도 나온 석물들이 운동장 한켠에
쌓아두고 있었던것을 본적이 있는 나로서는
이곳이 옛감영시대의 부속건물들이 존치해 있었음을
알게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대부고와 좌측으로 봉황동 큰샘거리를 연결하고
우측으로 공주 법원 자리를 축으로 하는 지점과
부고 앞 대통사지와 의료원을 연결하는 티자 형태의 대지는
고도복원의 입장에서는 아주 중요한 자리라 생각되는 것입니다
먹고 사는게 어렵고 힘들 시절에는
역사와 문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사치였지만
이제는 의식주의 빈곤으로부터 어느정도는 벗어나고 보니
문화라는 것이 하나의 역사적인 사실로만 그치지 않고
관광 자원으로서 그 지역의 이익을 창출하는 좋은 소재로
사용되고 있음은 익히 모든 이들이 알고있는 사실입니다
결국 대통사지 금당(대웅전) 자리에 복지관을 짓고 있는 시와
학교 강당을 헐고 새로 짓겠다는 공주대학교가
백제의 고도 복원에 제일 앞장서야 할 책임을 방기하고 있으니
이것이 계속 진행되기로 한다면 앞으로 공주 시민을 상대로 하는
고도보존 강좌가 무슨 필요가 있으며 역사문화유적의 발굴이
지역에 무슨 도움이 될것인지 알수가 없습니다
엊그제 중학동에 사시는 윤여헌교수님을 찾아뵙고
대통사지 신축건물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석불이 발견되었었다는 신문기사를 뵈드리니
한권 책을 꺼내 보여주시는데 일제시대 가루베지온이
대통사지로 추정되는 지점을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상세하게 설명해 놓은 책자입니다
문화도시라 하면서 문화를 없애는 일에 대하여
안타까워 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 내용을 복사하여
일본어로 된것을 우리말로 옮겨서 여러분들이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며 책을 빌려 나온적이 있습니다
또 말씀중에 공주에 '남산'이라는 용어가 나오는
삼국사기 동성왕 조문을 찾아 직접 눈으로 확인하면서
우리가 모르니까 어렵지 알면 쉽다고 하는 원칙을
재확인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함께 찾아본 삼국사기 동성왕조문에는
정월에는 서울(웅진)의 늙은 여자가 여우로 변해 사라지는가
하면 범 두 마리가 남산에서 싸우는 장면이 목격됐고
3월에는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쳤으며
5월부터 가을까지는 가뭄이 계속됐다고 하고 있다 라고 나옵니다
(*南穴사지(寺址)는 공주(公州)시 錦鶴동
남산(南山)(표고 260m)의 서쪽 계곡에 위치한 절터로
『新增東國與地勝覽』과 『公山誌』등에 기록돼 전해와
백제(百濟)시대 4穴址의 하나로 주목돼온 곳으로
忠淸南道지정 기념물 제35호로 지정 보호해온 곳이다.)
고도보존과 복원에 제일 큰 장애는 누구일까요
공주 시민일까요 아니면 관공서와 학자들일까요
이제는 공주 시민들도 깨어나고 있습니다
누구에 의해서 깨어나고 있을까요
바로 공주시와 공주대학교에 의해서입니다
그런데 백제의 왕도이자 고도보존을 위해
제일 앞장서서 고군분투하는 공주시와 공주대학교가
실제적인 사실에 있어서는 오히려 역행하고 있으니
이것이 나의 잘못된 관점과 견해라면
눈을 바로 뜨게해줄 설명과 해명이 필요하다 여겨집니다
크리스마스 날에는 방문해온 보살님들과 이야기하다가
공주고지도에 나오는 우성면 영천사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확인하게 할만한 실마리와 단서가 되는것을 찾아냈으니
며칠 안으로 카메라를 들고 한번 찾아나서려 합니다
(좌상단에 마곡사 아래로 우정면과 신정면 사이 영천사가 보입니다)
1800년대 고지도에 나올만한 영천사라면 역사적인 가치나
불교적인 입장에서 귀히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 모두가 부처님 덕분입니다 나무석가모니불 ()()()
-원효사 심우실에서-
(글. 사진↓해월스님 ↑李海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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