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8/09 칠 석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2 - 북한 '김정은 우표' 첫 발행 “우상화 목적…‘김정은 배지’도 나올것” 북한이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모습이 담긴 기념우표를 사실상 처음으로 발행했다. (연합뉴스) /중앙일보 2012.08.09 16:30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9009407&ctg=1000
2011 - 구 서울역사 복합문화공간으로 9일 재개관 구 서울역사가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은 국가사적 284호인 구 서울역사를 1925년 준공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 복합문화공간 ‘문화역서울 284’로 9일 재개관한다. 르네상스 양식의 붉은 벽돌건물로 복원을 거친 옛 서울역사는 1층 중앙홀은 공연ㆍ전시ㆍ이벤트ㆍ·카페 등의 다목적 공간으로 활용된다. 일제 강점기 조선 최고의 양식당으로 유명했던 2층 그릴은 공연ㆍ전시ㆍ세미나ㆍ회의 등을 위한 다목적홀로, 2층 나머지 공간은 아카이브, 기획전시실, 사무공간으로 쓰게 된다.
2008 - 팔레스타인의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Darwish, Mahmoud) 사망 다르위시 [Darwish, Mahmoud, 1941.3.13~2008.8.9] ‘팔’저항시인 다르위시 사망 팔레스타인 저항 시인 마무드 다르위시가 9일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돼 6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고 외신들이 보도했다. 외신에 따르면 오랫동안 심장질환을 앓아온 다르위시는 이날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의 한 병원에서 수술받던 중 병세가 악화돼 숨졌다. /경향신문 2008-08-10 18:12:0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8101812055&code=100402
2006 - 미국의 물리학자 제임스 밴 앨런(Van Allen, James) 사망 밴 앨런 [Van Allen, James Alfred, 1914.9.7~2006.8.9] 美 우주탐사 개척자 제임스 밴 앨런 타계 미국의 우주탐사 개척자인 제임스 밴 앨런<사진>이 향년 91세로 타계했다.
2005 - '경천사지 10층석탑' 10년 만에 복원 우리나라 최초의 대리석 탑인 '경천사지 10층석탑'이 10년 간의 복원 공사를 마치고 오늘 국립중앙박물관 중앙전시관에서 옛 자태를 다시 드러냈다. 국보 86호 '경천사지 10층석탑(敬天寺址 十層石塔)'은 유일한 고려시대 다포형 목조탑 양식인데다 불화 도상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로 손꼽히는 탑이다. 1348년 고려 충목왕 때 만들어진 '경천사지 10층석탑'은 지난 1907년 일본의 궁내대신 다나카 미스야키[田中光顯]에 의해 일본으로 밀반출된 뒤 1918년 반환돼 경복궁에 보관돼 왔다. 하지만 풍화와 부식 등이 심해 지난 1995년 해체·보존돼 왔으며, 오늘 마침내 10년 간의 복원공사를 마치고 국립중앙박물관에 자리를 잡게 됐다. /KBS
2005 - 미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 14일만에 무사귀환 美 디스커버리호 지구에 ‘터치다운’…15일만에 무사귀환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가 9일 캘리포니아 주 에드워즈 공군기지 귀환에 성공했다.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508100112
1999 - 일본 ‘국기 및 국가에 관한 법률’ 가결 [어제의 오늘]1999년 일본 ‘국기 및 국가에 관한 법률’ 가결 ㆍ우익의 숙원, 군국주의 회귀 논란 촉발 히노마루와 기미가요가 각각 일본의 국기, 국가로 법적 지위를 얻은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히노마루와 기미가요는 1999년 8월9일 일본 참의원에서 ‘국기 및 국가에 관한 법률’이 가결되면서 국기와 국가로 규정됐다. 이전까지 이 둘은 일본인에게 심리적 차원에서만 국기·국가였을 뿐이다. 국기·국가법 입법 추진은 99년 초 히로시마의 한 고교 교장 자살사건으로 촉발됐다. 이 교장은 졸업식에서 히노마루의 게양과 기미가요 제창을 지시했지만 교사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자민당을 비롯한 우익세력은 기다렸다는 듯 국기·국가법 제정을 공론화했다. 그동안 물밑에서 추진돼오던 우익의 ‘숙원 사업’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는 당시 일본 사회의 우경화 흐름에 힘입은 것이기도 하다. 서영찬 기자 akirame@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0-08-08 22:12:5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008082212515&code=100100&s_code=ap005
1995 - 미국의 가수, 기타리스트 제리 가르시아(Garcia, Jerry) 사망 가르시아 [Garcia, Jerome John "Jerry".1942.8.1~1995.8.9] “내게 있어 삶의 유일한 위험요인이라면 기타연주 그 자체에 너무 깊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http://k.daum.net/qna/openknowledge/view.html?qid=3KNwL
1934년 6월, 벨기에의 4대 왕인 레오폴드 3세(Leopold Ⅲ)와 왕비 아스트리드(Astrid)의 둘째아들로 브뤼셀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1년만에 어머니를 여의었으며, 소년시절에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학교에 다니고 1950년 벨기에로 돌아왔다. 1959년 6월 이탈리아의 귀족 도나 파올라 루포 디 칼라브리아(Donna Paola Ruffo Di Calabria)와 결혼했으며, 1960년에 아들 필리페(Phillppe), 1962년에 딸 아스트리드(Astrid), 1963년에 아들 라우렌(Laurent)을 낳았다.
1992 - 황영조,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 우승 1992년 8월 9일 온 국민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날아온 낭보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올림픽 피날레를 장식한 마라톤에서 황영조(22)가 금메달을 목에 건 것이다. 1936년 전 손기정이 일장기를 달고 베를린올림픽을 제패한 바로 그날이었다. TV를 본 국민들은 황영조가 몬주익 언덕에서 일본의 모리시타를 따돌리는 장면에서 특히 흥분했다. 이를 악물고 오르막길을 달리는 황영조를 보며 덩달아 주먹을 불끈 쥐었다 . 메인스타디움 트랙을 돌며 관중에게 두 손을 번쩍 들며 환호하던 그는 2시간13분23초의 기록으로 결승선을 통과하자마자 쓰러졌다. 관중석에서 그 현장을 지켜본 손기정 옹은 눈물을 글썽이며 `위대한 후배`와 감격의 포옹을 했다. 풀코스 도전 4번째 쾌거를 이룬 황영조는 명륜고 재학 때 정봉수 코오롱 감독의 눈에 들어 `대기`로 자랐다. 1991년 유니버시아드에서 우승하고 1992년 한국선수론 처음 2시간8분대에 진입, 한국 마라톤의 대들보로 꼽혔다. 그는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을 획득, 명예와 부를 한꺼번에 누렸다. 그의 고향인 강원도 삼척시 초곡리에는 당시 감격을 고스란히 담은 `황영조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조선
쇼스타코비치 [Shostakovich, Dmitri Dmitrievich, 1906.9.25~1975.8.9] 페테르부르크 출생. 여러서부터 페테르부르크음악원 출신의 피아니스트인 어머니에게 피아노의 기초를 배우고, 11세 때 글랴세르의 음악학교에 들어가 정규의 작곡공부를 시작하였다. 러시아혁명 후인 1919년에는 페트로그라드음악원에 입학, L.니콜라이에프에게 피아노를, M.시타인베르크와 A.K.글라주노프에게 작곡을 배우고 25년에 졸업하였다. 졸업작품인 《제1교향곡》은 소련뿐 아니라 세계 악단에 그의 이름을 떨치게 하였다. 당시 페테르부르크에는 유럽의 새로운 경향의 음악, 즉 I.F.스트라빈스키의 원시주의, A.베르크의 표현주의 작품들이 한창 연주되었으므로, 그도 그들의 작품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의 작품에 《제2교향곡》(27) 《제3교향곡》(29), 그리고 《피아노·트럼펫과 오케스트라의 협주곡》(33) 《피아노전주곡집》, N.V.고골리에 의한 오페라 《코》(30), 발레 《황금시대》(30) 등이 있다. 한편 이 무렵부터 예술에서 이른바 사회주의 리얼리즘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그가 34년에 발표한 《므첸스크의 맥베스부인》이 공산당의 예술운동에 역행한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 창작에 대한 이러한 간섭은 당연히 문제가 되었으나, 그는 이 비판을 견디어 내고 작풍을 전환하여 37년의 《제5교향곡》으로 명예를 회복하고, 40년 《피아노5중주곡》으로 제1회 스탈린상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페테르부르크에서 방공감시원으로 종군하였고, 1942년 《제7교향곡》으로 다시 스탈린상을 받았다. 그러나 대전 후인 1945년에 발표한 《제9교향곡》은 그 경묘한 내용과 신고전적 작풍 때문에 “타락한 유럽 부르주아지의 형식주의에의 추종”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즉 ‘지다노프 비판’이다. 그러나 49년의 오라토리오 《숲의 노래》와 51년의 합창모음곡 《10의 시(詩)》로 인기를 회복하고 또다시 스탈린상을 받았다. 그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이기도 하여 1927년 쇼팽 국제콩쿠르에서 2위를 차지하였다. 1937∼1941년에는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1943∼1948년에는 모스크바음악원의 작곡교수를 지냈다. 작품에 15곡의 교향곡 외에 현악4중주곡을 비롯, 기악곡·오페라·오라토리오·발레음악·영화음악 등 많은 걸작을 남겼다. /네이버
포드 미국 대통령 취임
1974 - 닉슨 대통령 사임 워터게이트 사건(Watergate scandal)은 1972년부터 1975년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지칭하는 말로서, 미국의 닉슨 행정부가 베트남전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던 민주당을 저지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권력 남용에서 시작하였다. 그 이름은 당시 민주당 선거운동 지휘 본부(Democratic National Committee Headquaters)가 있었던 워싱턴 D.C.의 워터게이트 호텔에서 유래한다. 닉슨은 각종 정치적 난관에도 불구하고 2년간 대통령 직에 머물러 있었으나 1974년 8월, "스모킹 건"(smoking gun; '확증'을 의미함)이라 불리는 테이프가 공개됨에 따라 그의 마지막 측근들도 그를 떠나게 되었다. 그는 미 하원 사법위원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된지 4일 뒤인 1974년 8월 9일, 대통령직을 사퇴하였다. 이로서 그는 미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임기 중 사퇴한 대통령이 되었다. /위키백과
[닉슨 대통령 탄핵-사임 일지] 1974.07.27 - 하원 법사위,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침입사건 조사방해 관련탄핵결의안 1항 채택 1974.07.29 - 하원 법사위, 닉슨 대통령의 권력 오용 및 취임선서 위반 관련탄핵결의안 2항 채택 1974.07.30 - 하원 법사위, 닉슨 대통령의 하원 소환명령 거부 관련 탄핵결의안 3항 채택 1974.08.09 - 닉슨 대통령 사임 1974.09.08 - 제럴드 포드 대통령, 닉선 전 대통령 사면
1972 - 문교부, '국기에 대한 맹세' 교육 실시 문교부는 1972년 8월 9일 국기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국기에 대한 맹세’를 제정했다. 1968년 3월 충청남도 교육위원회가 처음 작성해 보급하기 시작한 것을 문교부가 전국적으로 확대 시행한 것이었다. 이후 학교의 모든 행사에서 학생과 교직원들은 ‘국기에 대한 맹세’를 암송했다. 2007년 5월, 행정자치부는 기존의 맹세문 문안이 시대와 맞지 않는다는 점과 문법에 어긋난 점을 지적하고 ‘국기에 대한 맹세’ 수정안을 확정해 2007년 7월 27일 공포 시행했다. 임광희 동아닷컴 기자 oasis@donga.com /동아닷컴TV 2010-08-05 17:52:56 http://etv.donga.com/view.php?code=&idxno= 201008050035398&category=002013&page=1
[책갈피 속의 오늘]1972년 ‘국기에 대한 맹세’ 전국 시행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60809/8338141/1
- 10th Natl. Day, 1975.8.9. 1965 - 싱가포르,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 (발췌)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일본제국 군대가 말레이시아를 침공하여 싱가포르를 점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6일간 영국군은 치열한 방어를 하였으나, 1942년 2월 15일 항복을 한다. 일본은 싱가포르를 쇼난(昭南)으로 개명하고 1945년 9월 12일 일본이 항복한 후 영국군이 탈환할 때까지 지배했다. 1959년에 리콴유(Lee Kuan Yew) 수상과 유소프 빈 이샥(Yusof bin Ishak)에 의해 자치주가 되었으며, 1962년에는 말레이시아에 합병되었다. 그러나 2년 후 말레이시아와의 이념적인 차이로 독립하게 되고, 1965년 8월 9일 독립국가로서 새로운 국가를 시작하였다. 유소프 빈 이샥이 초대 대통령으로 리콴유가 초대 수상으로 계속 집권하였다. 새로운 국가로서 싱가포르는 당면한 실업과 자급자족의 문제가 심각했다. 그러나 1959년부터 1990년까지 이콴유 수상의 장기 집권 기간 동안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루어 홍콩에 버금가는 경제력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관 주도의 경제 사회정책의 집행은 공산주의보다 더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90년에 고촉통(Goh Chok Tong)이 수상직을 승계하였으며, 2004년에는 리콴유 전수상(현재 국가자문)의 큰아들인 리셴룽(Lee Hsien Loong)이 3대 수상으로 집권하고 있다. /위키백과
1963 - 미국의 가수, 영화배우 휘트니 휴스턴(Houston, Whitney) 출생 휴스턴 [Houston, Whitney Elizabeth, 1963.8.9~ ] 휘트니 휴스턴 휘트니 엘리자베스 휴스턴(영어: Whitney Elizabeth Houston, 1963년 8월 9일 ~ 2012년 2월 11일)은 미국의 알앤비/팝 가수이고, 배우, 전직 패션 모델이다. 휘트니는 2010년까지 총 415번의 수상를 받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상을 받은 여성 아티스트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올랐다.(수상 리스트: 에미 상 2회, 그래미 상 6회, 빌보드 뮤직 어워드 16회,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22회 등). 또한 휴스턴은 세계의 베스트 셀러 음악가로 세계적으로 1억7천 만 장의 싱글과 음반 판매고를 올리고있다. 휘트니는 어머니인 씨시 휴스턴을 비롯해 사촌인 디온 워윅, 그리고 대모인 아레사 프랭클린 등의 유명한 소울 가수들을 어려서부터 봐 오면서 자랐고, 11살의 나이에 뉴저지 교회의 청소년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클럽에서 어머니 씨씨 휴스턴을 도와 노래를 부르고 있던 와중에 아리스타 레코드사의 수장인 클라이브 데이비스에게 발탁되어 전문 가수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휘트니는 지금까지 총 여섯 장의 정규 음반과 세 장의 사운드트랙 음반을 발매했는데, 이 음반 모두 다이아몬드, 멀티 플래티넘, 플래티넘, 골드 인증을 받았다. 휴스턴은 1985년 첫 데뷔 음반 Whitney Houston을 발매했고, 이는 솔로 여가수 데뷔 음반으로는 가장 많이 팔린 음반으로 기록되었다. 휘트니의 두 번째 정규 음반 Whitney(1987)는 빌보드 200 차트 1위 데뷔를 했는데, 이는 여자 가수로서는 최초로 1위 데뷔를 한 음반이였다. 휘트니의 크로스오버화된 음반들은 차트에서 큰 성공을 거뒀고, MTV에서도 눈에 띄게 인기를 얻었으며, "How Will I Know"를 통해 많은 상을 거머쥔다. 휘트니의 성공에 따라 이후 많은 흑인 여자 가수들이 등장한다. 휘트니는 1992년 영화 《보디가드》를 통해 배우로도 활동했다. 영화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은 1994년 열린 그래미 상에서 올해의 앨범상을 수상받는다. 앨범의 리드 싱글이였던 "I Will Always Love You"는 여자 가수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싱글로 남았다. 생애
헤세 [Hesse, Hermann, 1877.7.2~1962.8.9] 독일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헤르만 헤세가 1962년 8월 9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오로지 자기 실현의 길만을 걸어왔다.
- 廣島被爆 - 長崎被爆
1945 - 미국,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원폭 투하 [유레카] 리틀 보이와 팻맨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과 독일 사이에는 총성 없는 또하나의 전쟁이 있었다. 핵무기 개발 경쟁이다. 처음엔 독일이 앞섰다. 1938년 독일의 물리학자 오토 한과 프리츠 슈트라스만이 중성자를 이용해 우라늄 235를 연쇄 핵분열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단순히 물질 구조를 연구하던 핵물리학이 거대한 핵에너지 개발 이론과 기술을 제공하게 된 것이다. 전쟁이 터지면서 독일·영국·미국 등 강대국들에서는 본격적인 핵무기 개발전이 시작됐다. 미국 물리학은 독일보다 뒤졌다. 개발에서 앞선 것은 경제력 덕분이었다. 천연우라늄 속에 극히 조금씩 들어있는 우라늄 235를 뽑아 농축하는 과정에서는 천문학적 돈과 시설이 필요했다. 인종 탄압을 피해 유럽에서 건너온 과학자들의 합류도 핵무기 개발에 가속도를 붙였다. 이탈리아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가 대표적인 경우다. 유대인인 아인슈타인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핵무기 개발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미국 핵무기 개발의 총책임자 로버트 오펜하이머 역시 독일계 유대인이었다. 맨해튼 프로젝트로 불린 미국의 핵무기 개발 계획은 종전을 앞두고 1945년에 열매를 맺는다. 7월에 미국 로스앨러모스 인근 사막에서 최초의 핵실험이 있었다. 이어 8월6일 아침 8시15분 히로시마[廣島] 상공에 우라늄 235로 제조한 원자폭탄 ‘리틀보이’가 투하됐다. 리틀보이는 히로시마 상공 580미터 지점에서 폭발했고, 일순간에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14만명이 숨졌다. 8월 9일 나카사키[長崎]에 또 한 발의 원자탄이 떨어졌다. 플루토늄 239를 이용해 만든 원자폭탄 ‘팻맨’이었다. 7만여명이 숨졌다. 히로시마에 이어 나카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지 9일로 꼭 62년이 됐다. 냉전이 끝나 핵무기 경쟁은 많이 줄었다. 그러나 아직도 지구상에는 2만7천여기의 핵탄두가 남아있다. 정남기 논설위원 /한겨레[유레카] 2007-08-08 오후 05:29:32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227711.html
1942 - 독일의 철학자, 수녀 에디트 슈타인(Stein, Edith) 사망 슈타인 [Stein, Edith, 1891.10.12~1942.8.9] 독일 철학자·수녀. 수녀명은 십자가의 테레사 베네딕타. 브로츨라프 출생. 정통 유대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1904년 신앙을 포기하고 무신론자가 되었다. 괴팅겐대학교에서 E. 후설에게 현상학을 배웠으며 후설이 프라이부르크대학교를 옮길 때 조교로 따라가 1916년 그곳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1년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 전기 《천주 자비의 글》에 감동을 받고 1922년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1922∼1932년 슈파이어에 있는 도미니쿠스 수도회 부설 여학교 교사를 지냈으며 1934년 쾰른의 카르멜 수녀회에 입회하여 수녀가 되었다. 1942년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아우슈비츠의 강제 수용소로 옮겨져 가스실에서 언니 로사와 함께 죽었다. 1987년 5월 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복자로 시복(諡福)되었다. 저서로 T. 아퀴나스와 후설의 철학사상을 종합한 《유한한 존재와 무한한 존재》, 십자가의 성 요한에 관한 현상학적 연구 논문 《십자가의 성 요한의 생애와 신학》 등이 있다. /야후 백과
나운규 [羅雲奎, 1902.11.22(10.17)~1937.8.9] 1937년 8월 9일 오전 1시25분, 춘사 나운규가 짧은 생을 마감하고 전설 속으로 사라졌다. 일생이 영화였고 영화가 일생이었던 35년이었다. 10대 후반에 고향인 함북 회령을 떠나 중국 간도와 시베리아 일대를 떠돌며 독립운동을 하다 1년6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나운규의 삶은 모두 영화에 바쳐졌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조선키네마에서 단역배우로 출연한 것이 영화 인생의 첫 출발이었다. 재능을 인정한 조선키네마가 나운규에게 기회를 줘 제작된 영화가 한국 영화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이 된 `아리랑`이었다. 감독·각본에 출연까지 한 사실상의 원맨쇼였다. 1926년 10월 1일 단성사에서 영화가 개봉되자 `조선 영화계의 자랑거리`라는 찬사와 함께 나운규는 명성과 인기를 한꺼번에 거머쥔다. 24세 때였다. 자신감이 생긴 나운규는 이듬해 `나운규 프로덕션`을 설립, 본격적으로 영화 제작에 나섰으나 첫 작품만 성공했을 뿐 `사랑을 찾아서` `벙어리 삼룡` 등 작품마다 실패를 거듭하면서 파탄의 길을 걷는다. 1936년 마지막 작품 `오몽녀`를 찍어 극찬을 받았으나 자신은 폐결핵 악화로 피를 토하고 있었다. 나운규는 분명 한국 영화사의 전설적인 존재였지만 아직까지도 그의 삶과 예술에 대한 기초 연구가 부족해 여러 이설이 제기되고 있다. /조선
[어제의 오늘]1936년 손기정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 ㆍ망국의 눈물 삼키며, 속으로 부른 아리랑 1936년 8월9일 베를린 올림픽스타디움. 관중석을 가득 메운 독일인들은 게르만의 후예 누군가가 가장 먼저 스타디움 안으로 들어설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광적인 나치즘에 사로잡힌 이들로서는 당연한 바람이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8082108075&code=100100
1919 - 이탈리아의 작곡가 루지에로 레온카발로(Leoncavallo, Ruggiero) 사망 레온카발로 [Leoncavallo, Ruggiero, 1858.4.23(3.8)~1919.8.9] 이탈리아 작곡가. 나폴리 출생. 판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18세에 나폴리음악원을 졸업했다. 오페라 작곡가를 지망하여 볼로냐대학에서 문학을 청강하면서 A. 비니의 비극 《차터톤(Chatterton, 1896)》의 오페라화를 시도했으나, 공연 직전 흥행사의 도피로 빚만 짊어졌다. 그 뒤 연주가로 여러 나라를 다녔고, 바그너로부터 격려를 받자 그를 본받아 대본 저작에 뜻을 품고 이탈리아 문예부흥기의 사실에 바탕을 둔 3부작 《황혼》에 몰두, 그 제1부 《메디치가(家)》를 완성했다.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Cavalleria Lusticana, 1890)》의 대성공에 자극을 받아 그와 같은 경향의 베리즈모 오페라 《팔리아치(Pagliacci)》를 작곡하여 1892년 5월 밀라노에서 공연, 결정적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잇따라 공연한 앞의 두 작품은 실패로 끝났고, 그 후 푸치니와 같은 제재를 다룬 《라 보엠(La Bohème, 1897)》과 《자자(Zazà, 1897)》 등이 인정받았을 정도였다. 출세작이며 대표작인 《팔리아치》는 극중극(劇中劇)을 이용하여 연극의 희극과 현실에 있는 비극을 교묘하게 대조시킨 점, 가슴을 울리는 노래나 탁월한 관현악 효과 등 무대구성이나 극적 효과에서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야후 백과
1914 - 핀란드의 동화작가, 화가, 삽화가 토베 얀손(Jansson, Tove) 출생 얀손 [Jansson, Tove Marika, 1914.8.9~2001.6.27] 핀란드의 미술가·작가·삽화가. 스웨덴어로 씌어진 아동도서가 있다. 그녀는 이야기 속에서 '무민트롤스'(Moomintrolls)라는 환상적인 자급자족의 세계를 창조해냈는데, 이 책들은 20개 국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으로 널리 읽혀왔으며, 특히 유럽의 북부와 중부에서 인기가 있었다. 1953~60년 런던의 〈이브닝 뉴스 Evening News〉지에 그녀의 연속만화인 〈무민 Moomin〉이 실렸다. 그녀의 무민 세계는 개성적인 등장인물들과 다채로운 구성, 세련된 유머로 칭찬을 받았다. 1952년 가장 훌륭한 아동도서에 주는 스톡홀름상을 받았고, 1953년 셀마 라게를뢰프 훈장을 받았으며, 1966년 안데르센 국제훈장을 받는 등 많은 훈장을 받았다. 첫 작품 〈무민 골짜기에 나타난 혜성 Mumintrollet och Kometen〉(영어판은 〈Comet in Moominland〉로 출간됨)은 1946년에 출간되었다. 무민 세계를 다룬 다른 많은 책들과 함께 자서전 〈조각가의 딸 Bildhuggarens dotter〉(1968, 영어판은 〈Sculptor's Daughter〉로 1969년 출간됨)과 단편소설, 희곡, 성인용 소설 등을 썼다. /브리태니커
1914 - 영국의 축구 선수, 감독 조 머서(Mercer, Joe) 출생 머서 [Mercer, Joseph 'Joe', 1914.8.9~1990.8.9] Joseph Mercer, (born Aug. 9, 1914, Ellesmere Port, Cheshire, Eng.—died Aug. 9, 1990, Manchester), distinguished British football (soccer) player (1931–54) and manager. Mercer overcame spindly legs and bad knees to become an outstanding left-half with Everton (1931–46), the champions of England’s Football League in 1939. That year he was selected to play for England, and, while in the army, he continued to represent his country in wartime international competition. After World War II he returned to Everton, but his persistent knee problems prompted the team to sell his contract to Arsenal. He altered his aggressive style to play defensive wing-half and led ... (100 of 215 words) /Written by The Editors of Encyclopædia Britannica http://global.britannica.com/EBchecked/topic/375677/Joseph-Mercer
조 머서(Joe Mercer) 풋볼리그 컵 우승, 퍼스트 디비전 우승(현재 EPL), 세컨드 디비전 우승, FA컵 채리티 실드 우승, FA컵 우승, 유로피언 위너스 컵 우승, FA컵 준우승 이처럼 그가 시티 감독으로 있으면서 이루어낸 업적은 실로 대단하다. 더욱 놀라운 점은 팀 창단이래 오늘날까지 세운 우승 기록 중 1/3을 그가 만들었다는 거다. 위의 사진에서 그의 머리를 보면 우승을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는 알츠하이머로 고생하다가 1990년 자신의 생일날 생을 마감했다. 우리는 그를 시티 역사상 최고의 감독으로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맨체스터시티]맨시티 역대 감독 베스트5
1911 - 미국의 천체물리학자 윌리엄 파울러 (Fowler, William) 출생 파울러 [Fowler, William Alfred, 1911.8.9~1995.3.14] 미국 천체물리학자.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서 출생.
1896 - 스위스의 심리학자 장 피아제(Piaget, Jean) 출생 피아제 [Piaget, Jean, 1896.8.9~1980.9.16] 스위스 심리학자. 뇌샤텔 출생. 뇌샤텔대학에서 연체동물학을 전공하였으나 어린이의 인지발달연구에 관심을 가져 제네바 루소연구소에서 이 분야에 몰두, 독자적인 이론을 구축하였다. 어린이의 사고가 자기중심적이라는 사실을 밝혀 전세계 심리학자들의 주목을 끌었고, 인간의 인지발달단계를 감각운동적 지능 단계·표상적 사고의 단계·구체적 조작 단계·형식적 조작 단계로 구분하였다. 그의 연구는 3기로 구분된다. 초기(1920년대) 연구는 어린이의 언어판단과 추리·세계관·인간관계·도덕판단 등의 연구로 대표되며, 이 연구의 계기는 어린이 특유의 사고인 자기중심성 개념이었다. 중기(30·40년대) 연구는 유아·아동에 있어 인식의 기본적 개념인 수·양·시간·공간·속도·확률 등의 발달과정을 해명한 것으로, 어떤 고차원 인식도 그 기원은 유아의 감각운동적 활동에 있으며 그것이 이론화되고 동시에 내면화되면서 일정한 순서를 단계적으로 더듬어 발달해 간다고 밝혔다. 후기(50년대 이후) 연구는 발생적 인식론의 구축이었다. 발생적 인식론이란 과학적 인식의 발생과 진화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인식의 개체발생에 관한 발달심리학적 연구와 인식의 계통발생에 관한 과학사상사적 연구와의 협력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한 그는 1956년 제네바대학에 발생적 인식론 국제센터를 창설하여 학술적 입장에서 인식론상의 여러 문제를 이론적 검토와 실험적 분석으로 해명하였다. 그의 독자적인 입장은 현대 심리학과 교육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주요 저서로 《아동의 도덕적 판단(1932)》 《지능 심리학(1947)》 《발생적 인식론 서설(1950, 3권)》 등이 있다. /야후 백과
1880 - 스페인의 작가 페레스 데 아얄라(Pérez de Ayala, Ramón) 출생 페레스 데 아얄라 [Pérez de Ayala, Ramón, 1880.8.9~1962.8.5] 스페인의 소설가·시인·평론가. 철학적 풍자와 관념소설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오비에도대학교에서 법학을, 마드리드대학교에서 철학과 문학을 공부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정기간행물 〈프렌사 La prensa〉의 특파원으로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남아메리카·미국 등지를 취재했다. 그는 영국 주재 스페인 대사를 지냈으며(1931~36), 스페인 내란(1936~39) 때는 자원해서 남아메리카로 망명했다. 1928년 스페인 학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소로(小路)의 평화 La paz del sendero〉(1903)라는 시집에 이어 사춘기 청소년이 성에 눈뜨는 이야기를 그린 〈정상에서의 어둠 Tinieblas en las cumbres〉(1907), 그가 예수회 학교에서 보냈던 불행한 학창시절을 통렬히 풍자한 〈AMDG〉(1910, '하느님께 영광을'[Ad Majorem Dei Gloriam]이라는 예수회 학교의 표어), 〈여우의 발 La pata de la raposa〉(1912), 마드리드에서 보낸 유랑생활과 문학적 삶을 그린 〈말과 무용수 Troteras y danzaderas〉(1913) 등 자전적 요소가 강한 4권의 연작소설을 발표했다. 뛰어난 작품으로 여겨지는 후기 소설들은 등장인물에 대한 성격묘사와 소설기법에서 작가의 문학적 완성을 보여준다. 〈벨라르미노와 아폴로니오 Belarmino y Apolonio〉(1921)는 신앙과 불신 사이의 갈등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꿀과 담즙의 달 Luna de miel, luna de hiel〉(1923)과 속편 〈우르바노와 시모나의 노동자들 Los trabajos de Urbano y Simona〉(1923)은 이상주의적 순진함과 성숙한 낭만적 사랑의 리얼리티 사이의 대조를 다루고 있다. 〈호랑이 후안 Tigre Juan〉(1926)과 속편 〈각하의 돌팔이 의사 El curandero de su honra〉(1926)에서 작가는 보편적인 성격의 인물을 지속적으로 창조했으며, 유쾌하면서도 잔뜩 비꼬는 유머 감각을 자연스럽게 표현했다. 시·단편소설·평론도 썼다. /브리태니커
모턴 [Morton, William (Thomas Green), 1819.8.9~1868.7.15] 미국의 치과의사. 1846년에 사상 처음으로 수술시 에테르 마취를 성공적으로 공개해 보였다. 세계 의료계가 수술시 마취를 받아들이게 한 데 공헌한 것으로 평가된다. 1844년 보스턴에서 치과병원을 개원했다. 보스턴의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에서 일하던 1845년 1월에 한때 함께 일했던 치과의사 호레이스 웰스는 아산화질소 가스로 통증을 없애는 효과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모턴은 더 믿을 만한 물질을 발견하기로 결심하고 한때 그를 가르쳤으며 진통에 대해 함께 연구했던 보스턴의 화학자 찰스 잭슨에게 자문을 구했다. 두 사람은 에테르의 사용에 대해 검토했으며 그는 1846년 9월 30일 이를 뽑는 데 처음으로 그것을 사용했다. 10월 16일 2년 전 웰스가 실패했던 바로 그 수술장에서 종양 수술을 받는 환자에게 에테르를 흡입하게 함으로써 공개적으로 에테르의 효과를 증명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는 에테르 마취 사용에 대한 독점권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에테르 사용에 대한 공이 웰스와 조지아 시골지방 의사인 크로퍼드 롱에게 있다고 인정하고 있었으나, 그는 발견에 있어서의 우선권을 주장한 잭슨과 값비싼 싸움을 하면서 남은 생애를 보냈다. /브리태니커
"모턴이 사상 처음 에테르 마취를 실시했다는 건 이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처음 또는 두번째와 같이 숫자를 표시할 때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며, 기자들이 기사 쓸 때도 가장 많은 오류를 저지르는 부분이 이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 예병일 박사님 의견
1776 -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아메데오 아보가드로(Avogadro, Amedeo) 출생 아보가드로 [Avogadro, Amedeo, 1776.8.9~1856.7.9]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토리노 출생. 아버지가 성직자였으며, 대학에서는 철학과 법학을 배우고, 교회법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처음에는 법률가로 일했으나, 1800년경부터 수학과 물리학에 깊은 관심을 가져 과학자로 전환하였다. 1803년 형제 공동으로 전기학에 관한 최초의 과학논문을 발표하였고, 1809년 베르첼리대학 물리학 교수로 취임했다. 1811년 아보가드로의 가설을 발표했다. 1820년 토리노대학에서 이탈리아 최초의 수리물리학 강의가 개설되자 교수에 임명되었다. 통계 ·기상 ·도량형 등 다방면의 연구에 종사하고, 1848년 공교육최고회의 의원이 되었다. 그리스, 라틴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아보가드로의 과학논문 내용은 전기, 액체의 열팽창, 모세관현상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단위입자의 상대적 질량 및 이들의 결합비를 결정하는 하나의 방법>(1811)이다. 이 논문에서 기체밀도의 비에서 기체물질의 분자량을 결정하는 방법과 그 근거가 되는 가설이 제창되었다.
1757 - 영국의 토목공학자 토머스 텔퍼드(Telford, Thomas) 출생 텔퍼드 [Telford, Thomas, 1757.8.9~1834.9.2] 스코틀랜드의 토목공학자. 그의 최고 업적은 웨일스의 메나이 다리 공사(1819~26)를 한 것이다. 그는 처음에 벽돌공으로 일했고, 후에 독학하여 건축가가 되었다. 1786년에 슈롭셔 공공사업의 측량기사가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3개의 경간을 세웠는데, 몬트퍼드·빌드워스·뷰들리(주철로 만든 다리로는 2번째임)에 놓은 것이다. 1793년에 텔퍼드는 엘즈미어운하회사의 중개인이면서 기사가 되었다. 이 운하에 웨일스의 세이리오그 강 유역과 디 강 유역을 통과하게 해주는 2개의 대송수관을 만들 때 그는 석조물로 고정시킨 주철판의 흠통을 처음으로 이용했다. 이것으로 그는 온 나라에 이름을 떨쳤다. 1803년 정부에 고용되어 스코틀랜드 하일랜드 개발을 도운 그는 칼레도니아 운하 건설을 비롯하여 애버딘·던디, 그리고 그밖의 항만 건설과 여러 다리를 포함하여 1,450㎞가 넘는 도로건설의 책임을 맡았다. 이어서 체스터와 슈루즈버리에서 홀리헤드에 이르는 도로를 개량하는 과정에서 웨일스에 있는 콘위 강과 메나이 해협에 유명한 2개의 현수교를 놓았다. 텔퍼드는 이어 철도의 경쟁 위협에 맞서 운하를 개량하고 건설했는데 이 일에는 울버햄프턴에서 낸트위치에 이르는 운하 건설과 트렌트 머지 운하 옆, 스태퍼드셔 헤어캐슬에 터널 공사도 포함되었다. 그밖에 스웨덴의 예타 운하, 런던의 세인트캐서린 부두, 스코틀랜드 저지 지방의 도로, 툭스베리와 글로스터에 있는 세번 강 다리 등을 건설했다. 텔퍼드는 토목공학자협회(1818 창립)의 초대 회장이었다. /브리태니커
1601 - 16세기 루마니아의 영웅 미하이(Mihai Viteazul) 암살 미하이 [Mihai Viteazul(Michael the Brave), 1558~1601.8.9] [역사 속의 인물] 16세기 루마니아의 영웅 미하이 16세기 후반 루마니아 남부인 왈라치아와 북서부인 트란실바니아, 몰다비아를 아우르는 지역을 처음으로 지배했다. 통치 기간은 6개월 정도로 짧았지만 정복자였던 그는 오늘날에도 루마니아의 국가적 영웅으로 통한다. 당시 그가 지배한 지역은 현재의 루마니아와 몰도바 공화국으로 구분된다. 1558년, 왈라치아의 유력 집안인 파스트라쿠 가문에서 태어난 미하이는 36세 때인 1593년에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협상, 왈라치아의 지배자로 떠오른다. 그러나 곧 그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따돌리고 다음 해에 교황 클레멘스 8세가 주도한 유럽의 기독교 동맹에 합류, 다뉴브강 인근 지역들을 차례로 공략해 승승장구한다. 1599년에는 트란실바니아를 점령하고 수개월 후 몰다비아의 지배권도 확립했다. 이후 점령지 귀족들의 반발에 부딪힌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루돌프 2세에게 지원을 요청, 지오르지오 바스타 장군의 도움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트란실바니아 통제를 원한 바스타 장군은 은밀한 지시를 내려 1601년 오늘, 44세의 그를 암살했다. 그는 끊임없이 이어진 전투에서 승리를 거듭해 '용감한 미하이'(미카엘 더 브레이브)로 불렸다. 김지석 논설위원 /매일신문 2011년 08월 09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4025&yy=2011
1173 - 이탈리아의 피사에 종탑 건설이 시작되다 피사의 사탑(이탈리아어 : Torre di Pisa)은 이탈리아 서부 토스카나 주의 피사에 있는 피사 대성당의 종루이며 관광 명소이다. 기울어진 탑으로 유명하다. 1173년 8월 9일 착공 시에는 수직이었으나, 13세기에 들어 기울어짐이 발견되었다. 탑의 높이는 지상으로부터 55m, 계단은 297개로 이루어졌으며, 무게는 14,453t이다. 지반에 가해지는 평균 응력은 50.7tf/㎡이란 계산 결과가 나왔다. 현재의 기울기의 각도는 약 5.5도이고 기울기의 진행은 여러 차례의 보수공사로 멈추었다. 역사 공사기간은 제1차가 1173년~1178년, 제2차가 1272년~1278년, 제3차가 1360년~1372년으로 공사기간 간격이 매우 긴 것이 특징이다. 특히 제1차 공사 후 탑이 기울기 시작하여 제2차 공사에서는 기울어진 각도에 맞춰 수정을 가한 뒤 건설을 재개했으나 기울기를 멈추지 못했고, 제3차 공사를 맞이하게 되었다. 원래의 건설 계획상에는 현재와 것과 큰 차이가 없는 높은 종루가 세워질 예정이었다. 그래도 피사의 사탑이란 이름으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지반 침하의 사례로서 현재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게 되었다. 이 기울기의 원인은 지반 토질이 불균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탑의 남쪽이 크게 내려가게 되었는데, 이것은 남쪽의 토질이 상대적으로 부드러워 시간이 지나면서 기울기가 시작되었고, 이것으로 인해 회전각운동량이 증가하여 더욱더 지반에 대한 부담이 커지게 되어, 침하가 진행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 것이다. 1935년 지하수가 지반을 부드럽게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약품을 주입하고 지하수의 침입을 막는 응급처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현장의 지반은 예민비(끊어지는 데 필요한 힘의 감소 비율)가 매우 높아 교란에 의해 강도가 현저히 낮아져 침하는 더욱더 진행되게 되었다. 1960년대 현지의 지하수 수요가 많아지면서 지하 수위가 낮아지자, 그에 비례해 경사의 진행도 빨라져 위기를 맞게 되어 1964년 2월 27일 이탈리아 정부는 피사의 사탑 붕괴를 막기 위해 세계에 지원을 요청했다. 1990년 1월 7일 안전상의 문제로 공개는 금지되고, 경사각을 수정하기 위해 재공사가 진행되었다. 처음엔 침하한 쪽과 반대인 북쪽에 저울추나 종을 달아 균형을 맞추려고 했으나 근복적인 해결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 후 재공사 공법에는 세계 각국의 건설회사들로부터 여러 가지 제안이 나왔으나, 최종적으로 북쪽의 지반을 깎는 공법이 채용되었다. 그 외에도 약품을 주입해 지반을 개량하는 안도 있었으나, 침투성이 낮은 점토층에 주입은 어렵고, 강제적으로 주입하면 교란이 발생해 위쪽에서 이야기한 예민비의 문제를 피할 수 없었다. 2001년 6월 16일 10년간에 이르는 작업이 종료되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피사의 사탑에 얽힌 일화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물체가 자유 낙하하는 시간은 낙하는 물체의 질량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법칙을 입증하기 위해 피사의 사탑 꼭대기에서 크고 작은 두 종류의 물체를 동시에 떨어뜨려 양쪽이 동시에 땅에 닿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일화는 갈릴레오의 제자였던 비비아니(Viviani)가 지어낸 것으로 실제로는 피사의 사탑에서 실험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위키백과
117 - 제13대 로마제국 황제 트라야누스(Trajanus, Marcus Ulipius) 사망 트라야누스 [Trajanus, Marcus Ulipius, 53.9.18~117.8.9] 로마의 속주 출신으로 최초의 황제가 된 트라야누스 로마 황제가 파르티아 원정을 모두 완수하지 못한 채 병에 걸려 로마로 귀국하던 중 117년 8월 9일 오늘날의 터키 가지파샤에서 눈을 감았다. 64세 생일을 한달 남짓 앞두고 20년간에 걸친 치세를 끝낸 것이다. 그는 눈을 감기 직전에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 황제로 지명했다. 간소한 화장이 끝난 뒤 원정에 동행했던 아내가 유골을 안고 로마로 돌아왔다. 대망을 가슴에 품고 동방 원정길에 나선지 4년여의 세월이 지나서였다. 귀국한 황제를 로마 시민은 장례식이 아니라 개선식으로 그를 맞이했다. 죽은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개선식은 869년의 로마 역사상 처음이었다. 53년 에스파냐 남부 이탈리카에서 태어난 트라야누스 황제는 군단장인 아버지를 따라 유대땅과 시리아 등지에서 군인으로 활약한 후 이른바 엘리트 코스인 회계감사관과 원로원, 법무관, 집정관을 역임했다. 92년에는 라인강 상류를 지키는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에 취임해 고지 게르마니아 속주 총독도 겸했다. 단명으로 끝난 전임 황제 네르바에 의해 후임 황제로 임명된 트라야누스는 선정으로 이른바 로마 5현제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도나우강 북쪽에 있던 다키아와의 2차에 걸친 전쟁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으며, 오늘날에도 기술을 인정하는 석조 다리 '트라야누스 다리'를 건설했다. 많은 공공사업도 추진해 로마를 한층 더 발전시킨 현제였다. 특히 그가 사망하기 전에 파르티아 왕국을 점령함으로 로마의 국경선은 로마 건국이래 최초로 걸프만에까지 확대됐다. /조선
- Julius Caesar (BC100~BC44) BC 48년 8월 9일(로마력, 율리우스력으로는 6월 6일) 파르살루스(지금의 그리스 파르살라) 전투에서 카이사르의 군대가 폼페이우스의 군대를 무찔렀다. 카이사르는 이에 앞서 디라키움(지금의 알바니아 두러스)에서 폼페이우스에게 패해 후퇴했다. 잠시 물러섰던 양측 군대는 파르살루스 근처에서 다시 마주쳤다. 이때 카이사르의 병력이 약 2만 2,000명, 폼페이우스의 병력이 약 4만 5,000명으로 폼페이우스가 2배 넘게 우세한 상황이었다. 폼페이우스는 먼저 공격을 시도해 카이사르 군대의 오른쪽 진영을 치고 들어왔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이를 미리 예상하고 진영의 오른쪽 배후에 약 2,000명의 정예병력을 배치하는 작전을 썼으며, 정예부대로 하여금 창을 던지지 말고 손에 쥔 채 찌르면서 돌격하도록 지시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병력 배치와 공격법에 당황한 폼페이우스의 기병대는 퇴각했다. 카이사르는 여세를 몰아 따로 확보해둔 3번째 부대에 공격 명령을 내려 폼페이우스의 군대를 무찔렀고, 폼페이우스는 라리사로 달아났다. 전투는 카이사르의 완승으로 사상자가 250명도 채 되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전쟁터에 널린 폼페이우스 군대의 전사자들을 돌아보며 이렇게 외쳤다. "그들은 이렇게 되기를 원했노라."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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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