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효 아키텍트-85] 건축, 모두의 미래를 짓다
매일경제 2021.05.14
[효효 아키텍트-85] "누군가가 나타나기 이전에 존재했고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남는 공간, 즉 그가 살던 집과 마을, 그가 바라보던 신전, 이웃과 함께 지낸 아고라 등이 그를 기억해 준다." 【2부 | 건축 뒤에 숨은 사회를 발견하다 : 139~140쪽】
불현듯 눈물이 쏟아진다. 어머니는 집에 가고 싶어했다. 아버지와 필자의 연년생 남동생이 있는 그 집이다. 6년여 뇌경색과 알츠하이머로 투병하며 정신이 들 때 하신 말씀이다. 어머니는 지난달 끝내 그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건축학자·건축교육자이며 건축가인 김광현이 언급한 '집'은 하우스(house)이다. 어머니가 말씀한 집은 홈(home)이다.
"'홈리스(homeless)'란 말은 물리적인 집(house)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이는 가족과 함께 사는 작은 사회로서의 집(home)이 없음을 뜻한다. '집'이란 물리적인 공간만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온전한 삶이란 사회적 관계 위에 안정된 공간이 있을 때 비로소 실현된다." 【2부 | 건축 뒤에 숨은 사회를 발견하다 : 105쪽】 하우스에 홀로 덩그러니 앉아 물밀 듯이 밀려오는 슬픔을 견디는 것은 힘들다. 가급적 하우스를 자주 나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슬픔을 잊는 방법이다.
"죽음의 불안을 없애고 거룩한 곳으로 옮겨가기 위해서는 의례를 치러야 하는데, 의례에는 일정한 시간과 장소가 뒤따른다. 의례용 공간은 그 자체로 사회적이다. 건축 공간은 인간이 활동을 펼치는 곳이어서, 건축사가 스피로 코스토프(Spiro Kostof·1936~1991)는 인간이 짓는 모든 건축물을 의례(ritual)와 배경(setting)이라는 관점에서 넓게 파악했다. 의례란 말은 종교적인 색채를 강하게 풍기지만, 실상 공동주택의 주거 방식도, 학교 건축에서의 교육 활동도, 국회의사당에서의 의정 활동도 모두 의례다." 【2부 | 건축 뒤에 숨은 사회를 발견하다 : 105~106 쪽】
4월의 신록이 찬연한 그날, 필자가 표현한 그대로 '어린 시절 바라본 것처럼 장정들이 꽃상여를 멘 채 저수지를 돌아 나가며 수면에 비친 행렬의 일렁거림이 큰 애도(哀悼)로 표현되는 공간'을 지났다. 지난 2월 소개한 <효효 아키텍트-73회> 김태만 건축가의 작품, 원지동 서울 추모공원 그 공간을 손녀가 앞에 든 영정을 따라 단출하기만 한 가족들이 지났다. 김태만은 김광현의 제자이기도 하다. 물리적인 집이라는 뜻의 하우스는 주거의 질과 비례하지는 않는다. 김광현은 정권의 운명을 좌우하는 부동산 정책의 본질을 말한다.
" 저명 건축가일수록 아름답고 고고한 건축은 결코 '더러운' 부동산 일 수 없다고, 주택은 '사는(買)' 것이 아니라 '사는(住)' 것이어야 한다고 강변한다. 고매한 가르침이긴 하나 일 단 사야(買) 살(住) 것 아닌가? … 이렇게 '사는(住)' 집을 강조하려며 주택 정책을 주거 정책으로 일찍 바꾸었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여전히 어떻게 사는지에는 관심없이 주택 수량, 위치, 가격만 따지는 주택 정책이 있고, 어떤 집과 지역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주거 정책이 없다. 그런데도 '사는(買)' 집을 사는(住) 집으로 만드는 방법은 제시하지 않으면서 집을 투기 대상으로 삼지 말라고 한다." 【3부 | 건축을 소비한다는 것 : 232 쪽】
"사람은 어디에 있든 돌아와 머물고자 집을 짓지, 떠나려고 짓지는 않는다. 이런 집을 주택(住宅·house)이라 한다. 그러나 생활의 본거지라 하면 집 안만 말하는 게 아니다. 주택을 포함해 더 넓은 장소에서 영위하는 생활을 주거(住居)라 한다. 거주(居住·dwelling)는 주택과 주거를 근간으로 한 총체적인 삶을 말한다. 주거보다 훨씬 넓은 인간의 생활 전체에 관한 개념이다." 【1부 | 건축은 불순한 학문이다 : 83 쪽】
김광현의 근작 '건축, 모두의 미래를 짓다'는 이렇게 필자에게 피부로 와 닿았다. 이 책은 크게 네 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건축을 마냥 좋고, 아름다운 것으로만 바라보는 시선에 반론을 제기하며 건축이 지닌 본래의 성질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한다. 저자는 건축에는 생각 이상으로 사회에 대한 지식과 시선이 다양하게 연결되어 있고, 모든 학문과 관계하고 있는 건축이야말로 불순한 학문이라고 거침없이 말하며 건축을 고상하게만 바라보고 해석하는 태도를 지양할 것을 강조한다.
2부에서는 한나 아렌트의 철학을 바탕으로 '사회'의 속성을 파헤치며 사회 질서가 공간에 어떻게 반영되어 왔는지, 사회의 권력과 제도는 건축에 어떤 영향을 미쳐왔는지를 추적해간다. 3부에서는 건축물이 공산품처럼 대량생산되어 세계를 균질하게 만들기 시작한 공업화 사회의 건축, 그리고 소비재로서 계급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건축을 면밀히 들여다본다. 마지막 4부에서는 루이스 칸의 건축 사상과 함께 건축이 존재하는 이유는 '모든 이의 기쁨'이라는 깨달음을 전하며, 건축 뒤에 숨은 사회를 벗고 우리 사회의 근원적 희망을 드러내는 건축을 모두 함께 찾아 나설 것을 제시한다.
건물이 아름답다는 말은 없다. 모두 함께하는 기쁨을 말할 뿐이다. 이런 공동의 기쁨은 건축에만 있다. 회화나 조각은 방에 둔다고 매일 보지 않는다. 건축이 주는 큰 기쁨은 대단한 명작 건축물에서 얻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창가, 등불 아래 식탁, 동네 뒷산, 저마다의 작은 세계에서 나타난다. 건축물은 전혀 움직이지 않지만, 공동의 기쁨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그래서 시민의 일상생활에는 건축이 주는 기쁨이 매일 반복되어야 한다. 그뿐인가? 문화나 세대가 다르고 언제 지었는지도 모르는 건축물일지라도 사람들은 건축물에서 공통의 가치를 깨닫는다. 아름다움은 시대나 지역 또는 취향에 따라 바뀌지만, 건축이 주는 기쁨은 지역과 문화를 넘어 변함없이 공통적이고 근본적이다. 【4부 | 건축이 모두의 기쁨이 되려면 : 285쪽】
건축이 존재하는 원천은 '모든 이의 기쁨'에 있다. 아렌트의 말대로 '모든 이의 기쁨'은 자기 의지로 공적인 장소, 모두가 경험하는 집에 나타나는 것이지, 아름답고 화려한 공간에 매료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건축을 통해 지역 사회 사람들이 의지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지혜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도 값진 기쁨을 오래 간직하기 위해서다. 그러려면 건축 뒤에 숨은 사회를 벗고 우리 사회의 근원적 희망을 드러내는 건축으로 '세계'라는 공간을 찾아 나서야 한다. 이것이 아렌트가 말하는 건축의 물화일 것이다. 【나오는 글 | 모두의 미래를 짓기 위하여 : 331쪽】
모든 절차를 마친 뒤 대학 장례식장 인근, 1970년대 후반 흔적이 겨우 남은 가족들의 체취가 물씬한 골목 선술 집에서 비혼의 환갑에 접어든 동생과 한잔 했다. 어머니의 삶과 함께 그 골목 또한 생존을 위한 투쟁을 마친 듯했다.
"누군가가 나타나기 이전에 존재했고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남는 공간, 즉 그가 살던 집과 마을, 그가 바라보던 신전, 이웃과 함께 지낸 아고라 등이 그를 기억해 준다."
[프리랜서 효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