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무덤까지 지고 갈 의리
김태산과의 숨바꼭질은 한여름의 지리한 장미처럼, 어떻게 보면 곧 끝날 듯하
면서도 좀처럼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 숨바꼭질을 지휘하고 있는 양은 자신조
차도 왜 이런 속절없는 싸움을 해야 하는것인지, 가끔은 회의에 빠져들기도 했
다. 그가 그러할 진대 아우들의 심정은 오죽했을 것인가. 생각다 못한 양은은 영
신을 조용히 불러앉혔다.
"영신아, 요즘 애들 눈치가 좀 어떤 것 같으냐?"
"무슨 말씀이신지... ..."
"김태산이를 쫓는 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 같으냔 말이다."
"글쎄요... ... 아무래도 다들 힘들어하는 것 같긴 합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를
싸움인데다가, 이제 날이 푹푹 찌기까지 하니까요."
양은은 역시 생각했던 대로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아무래도 뭔가 기분 전환이 있어야 할거야."
잠시 이것 저것을 생각해 보던 그는 두 눈을 반짝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어디 바닷가로 해수욕이라도 며칠 다녀오자."
"해수욕요?"
영신은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기분 전환이 필요하다는 양은의 생각
에는 그역시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었지만, 식구들이 모두 이런 저런사건으로 경
찰에 쫓기는 신세라 가뜩이나 운신의 폭이 좁아져 있는 마당에 해수욕이라니.
더욱이 백형도와 김상욱이 대구 수성호텔 살인사건으로 전국에 지명 수배되어
있는 상태가 아닌가.
"형님, 해수욕이라도 다녀오면 생기가 돌긴 하겠지만, 형도 형님과 상욱형님
이... ..."
"아, 걔네들은 모두 이해할거다."
그 두 사람은 그대로 두고 다른사람들끼리만 다녀오자는 것이었다. 좀찜찜해
하고 있는 영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 지 그는 모처럼 밝은 얼굴을 했다.
"가서 다들 떠날 채비를 해서 모이라고 해라. 형도, 상욱인 빼고... ..."
"알겠습니다. 형님."
영신이 양은 앞에서 물러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두들 짐을 꾸려 거실에 모여
들었다. 모처럼 여행 계획에, 그동안의 지리한 싸움에 지쳐있떤 그들의 얼굴에서
는 한결같이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일행에서 제외된 형도와 상욱은 방에 틀어
박힌 채 얼굴한번 내밀지 않았다.
"가서 형도, 상욱이 데려와라."
양은은 영신에게 다시 지시했다. 두사람은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려 애쓰며 양
은의 앞에 나란히 섰다.
"너희들이 이번만 이해해라. 나라고 한 식구인 너희들을 두고 가고 싶겠냐?
대를 위해 소가 흐생한다 생각하고 집에서라도 아무 생각없이 며칠 푹 쉬고 있
어라. 괜히 쓰잘데 없이 나다니지 말고."
"알겠습니다. 형님. 저희들 걱정은 마시고, 이왕 다녀오시는 거 즐겁게 지내다
오십시오. 집은 저희가 지킬테니까요."
"그래, 그렇게 이해해 주니 고맙다. 그럼 이제 다들 출발하자."
목적지는 강릉 경포대 해수욕장이었다. 들뜬 얼굴로 집을 나서는 동료들을 배
웅하는 형도와 상욱은 꼭 일년 전의 이무렵을 떠올리고 있었다.
*
그때도 양은은 해수욕을 다녀오기로 하고 아우들을 불러모았다. 목적지는 인
천 을왕리였다. 아우들의 우람한 덩치가 곧 거실을 가득 메웠으나 백형도와 김
상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형도, 상욱인 도대체 어딜 간 거야?"
양은이 짜증스런 목소리로 다그쳐 물었지만 아무도 그들의 행방을 알지 못했
다. 아우들이 모두 꿀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대답을 못하자 양은은 더욱 화가 솟
구쳤다.
"한 집에 살면서 서로 오딜 갔는지도 모른단 말야? 그리고 이 자식들은 말도
없이 어디 가서 쳐박혀 있는 거야?"
한 동안 짜증을 내던 양은은 그 두 사람 때문에 모처럼의 여행 기분을 망쳐서
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일단 걔네들은 놔 두고 그냥 출발하자. 메모나 한 장 남겨 둬라."
아우 하나가 그의 지시대로 간단한 메모를 적어 가정부에게 건네 주자, 그들
은 곧 예정대로 목적지인 인천으로 출발했다.
그들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개인적인 볼일이 있어 잠깐 밖에 나갔다 돌
아온 형도와 상욱은 집이 텅 비어 있지 눈이 휘둥그래져서 가정부를 찾았다.
"집에 뭔 일 있었소?"
"일은... 다들 놀러갔어요."
"놀러갔다고라?"
가정부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형도의 손에 꼬깃꼬깃 접
힌 쪽지를 건네 주었다. 그것을 단숨에 훑어 내려간 그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
어나왔다.
"씨팔, 세월 좋고만."
"뭐라고 써 있는디 그려?"
궁금해 못 견디겠다는 듯, 그의 손에서 쪽지를 낚아채 그것을 일어 보던 상욱
도 역시 욕지거리를 뱉어 냈다.
"좆겉이 .... ... 잠시 나갔다 왔는디, 그 새를 못 참고 우릴 쏙 빼놓고 갔단 말
여?"
가뜩이나 폭폭 찌는 날씨가 가만히 앉아 있어도 짜증을 나게 하는 판에, 두
사람은 천장이라도 뚫고 나갈 듯 부아가 치밀어 씩씩거렸다. 잠시 후 백형도가
그러고 있을 수 만은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씨팔거, 우리도 우리끼리 놀러 가자고."
"그러지 뭐, 근디 워디로 간다?"
"대구에 내려 가자고, 상연 형님께 며칠 신세 좀 지지 뭐."
대구에는 그들의 작은 집격인 동성로 식구들이 있었고, 오상연은 그들의 우두
머리였다. 상욱은 반색을 하며 맞장구쳤다.
"그려, 고거이 좋겠고만."
그 길로 대구에 내려간 그들은 오상연을 비롯한 동성로 식구들의 따뜻한 환대
속에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른채 며칠을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다 보
니 두 사람은 그 쪽 식구들에게 은근히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냥 대
접만 받기보다는 뭔가 보답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하고는 형도는 상연에게 물었
다.
"형님, 요즘 뭐 골치 아픈 일은 없으십니까?"
"골치 아픈 일이 와 없겠노? 요즘 경순이 그놈아 새끼 땀에 속이카나?"
그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경순은 원래 그들과 한솥밥을 먹던 식구였다. 그런데
얼마 전 부터 상연에게 반기를 들고 뛰쳐나가 '향촌동파'라는 세력을 새로 구축
하면서 사사건건 제 친정식구들과 대립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형님. 그럼 우리가 내려온 길에 그 새끼를 좀 혼내 주고 가겠습니다."
"니 참말이가?"
"그럼요, 형님. 그 동안 너무 잘 해 주셔서 죄송한 마음이 들었는데 잘 됐습니
다."
형도와 상욱을 바라보는 상연의 시선에는 두 사람에 대한 기대가 듬뿍 담겨
있었다. 그는 자기 쪽 사람인 강동철을 두 사람에게 붙여 주며 말했다.
"이번 일만 잘 처리해 주모, 내 이신세를 평생 잊지 않을 기구마."
형도와 상욱은 동철과 함께 즉시 경순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나섰다. 아무래도
서울보다는 바닥이 좁은 탓인지 그에 대한 정보는 쉽게 손에 들어왔다. 그가 서
른 명 남짓한 제 패거리들을 대동하고 수성호텔의 풀장에서 수영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세 사람은 미리 준비한 칼과 야구방망이로 무장하여 수성호텔로 달려
갔다. 과연 그 정보대로, 경순은 제 패거리들에 둘러싸여 마치 왕처럼 거들먹거
리며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세사람은 서로 눈빛을 주고 받은 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야구 방망이를
휘둘러대며 패거리의 한 가운데로 돌진해 들어갔다. 뜻하지 않은 기습에 당황한
경순의 호위병들은 힘한번 써보지도 못한 채 야구방망이 앞에서 푹푹 쓰러졌고,
세 사람의 불청객이 목표물에 다가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건방진 새끼, 니가 감히 상연 형님을 배신하고 오야붕 행세를 해?"
"죽어라, 이자식아!"
형도와 상욱은 공포에 질려 이미 반주검이 되어 있는 경순의 몸둥아리를 보리
타작하듯 야구방망이로 마구 내리쳤다. 경순은 도살당하는 짐승처럼 처절한 비
명 소리를 길게 내지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리저리 떼굴떼굴 구르는 그에게
동철이 재빨리 다사겄다. 그의 손에 들려진 날카로운 그 무엇이 뙤약볕을 서늘
하게 되비쳐 내며 길게 포물선을 그었다. 순간 경순의 가슴팍에서는 검붉은 피
가 분수처럼 솟아 올랐고, 다시 바닥으로 흘러내린 피로 물이 시뻘겋게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손을 멈추려 하지 않는 동철의 손이 몇 개의 포물선을
더 그려 내자. 파르르 떨어대던 경순의 사지는 그 떨림마저 멈춘채 축 늘어졌다.
양은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인천의 해수욕장에서 본 대문짝만한 신문 기
사를 통해서였다. 그는 아직 대구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신의 아우들과 부랴부랴
전화 연락을 시도했다.
"죄송합니다. 형님."
"죄송한 건 나중 문제고, 어떻게든 당장 서울로 올라와라."
양은은 그들과 제 3한강교 위에서 합류하기로 약속을 해두고, 시간에 맞추어
서울로 향했다. 양은이 차를 몰고 제3한강교로 들어서자 다리 위에서 불안하게
서성이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그들의 곁으로 차를 멈춰 세우며 경적
을 다급하게 울리자, 그들은 재빨리 차에 올라탔다.
두사람은 차에 오르자마자 잔뜩 풀죽은 목소리로 죄송하다는 말만 수도 없이
되풀이 했다. 양은도 마음 같아서는 그들을 실컷 두들겨 패주기라도 하고 싶었
다. 하지만, 그들을 나무랄 수만은 없었따. 그들이 전혀 엉뚱한 일로 사고를 친
게 아니라 한 식구와 다름없이 지내는 동성로 식구들을 위한 일이었으며, 더욱
이 배신자를 처단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서 설상
가상으로 혹이 하나 더 붙었다는 안타까움을 떨쳐 낼 수 없었을 따름이었다.
"당분간 꼼짝 말고 집에 처박혀 있어."
"알겠습니다. 형님."
그들은 몸둘 바를 몰라하며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백주에 벌어진 살인극. 언
론들마다 대서 특필했으니 경찰에서도 눈에 불을 켜고 범인을 찾아 나서고 있을
게 뻔한 일이었다. 게다가 경찰에서는 이미 범인의 신원을 파악하고 있는 상태
였으니, 양은의 말대로 꼼짝말고 집에 쳐박혀 있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강동철은 사건이 일어난 지 한두달 뒤 경찰의 수사망이 점점 압축해 들어오자
모든 현의를 자신이 뒤집어 쓴 채 자수르 하여 재판에서 20년의 징역을 선고받
았으며, 아직 검거되지 않은 공범인 백형도와 김상욱에 대하여는 현상금까지 붙
은 채 전국에 지명 수배가 내려져 있었던 것이다.
*
경포대에서 며칠의 휴가를 끝내고 서울로 돌아오자 마자, 양은의 식구들은 신
사동 사거리 리버사이드호텔 근처에 3층짜리 단독 주택을 얻어 서둘러 이사를
끝냈다. 잠실의 집은 아파트여서 남의 눈이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았을 뿐 아니
라, 어쩌면 경찰의 안테나에 잡히기 시작했을는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식구들이 모두 한데 모여 운동도 하며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편이
활동하기에 훨씬 유리하리라는 판단도 있었다. 그렇게 해야만 항상 적절한 긴장
감을 유지하여 불의의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이삿짐 정리가 대충 끝나자, 양은은 식구들을 모두 한자리에 불러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했다.
"그 동안 우리가 태산이 그 자식을 잡으러 다니느라고 너무 많은 기력을 소모
했다. 무슨 일을 하든 체력이 우선이다. 앞으로 한 집에 모여 살며 체력 단련에
힘쓰도록 하자."
양은의 말대로, 그들은 그 날 바로 운동 용구점에 나가 갖가지 운동 기구를
사들였다. 여러 가지 운동 기구를 집의 옥상에 배치하고나니, 영략없이 무슨 헬
스클럽 같아 보였다.
아우들은 체력 단련에 힘쓰게 하는 한편, 양은은 기상 시간까지도 아침 여섯
시로 정하여 이를 엄격히 지키도록 했고, 술을 일절 이벵 대지 못하게 했다. 평
소 긴장이 잔뜩 쌓인 상태에서 술을 마시게 되면 사고가 나기 십상이었다. 게다
가 술에 취해 정신이 흐트러진 가운데서는 언제 누구에게 당할지 알 수 없는 일
이었다.
뜻은 좋았으나, 모든 것이 양은의 뜻대로만 착착맞아떨어진 것은 물론 아니였
다. 한 식구로 지내 오면서도 특별한 일이 있는 경우를 뻬놓고는 그럭저럭 자유
분방한 생활을 누려 왔떤 아우들은 양은이 갑자기 고삐를 바짝 틀어 쥐자 불만
을 토로하는 일이 차츰 잦아지며, 분위기가 점차 뒤숭숭해져 가고 있었다. 그러
던 차에 대구 수성호텔 사건의 공범인 백형도와 김상욱이 집을 떠나자, 그동안
밖으로 나타내지 못하고 있던 식구들의 불만은 마치 기름을 뒤집어쓴 것처럼 활
활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형도와 상욱이 양은과의 결별을 택한 것은, 표면상으로는 양은에게 자신들의
신변 문제로 더 이상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였지만, 양은의 독선과
보이지 않는 냉대에 불만이 쌓여 왔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었다.
"어이 영신이, 잠깐 얘기 좀 하세."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떤 영신의 방으로 들어선 것은 종섭과 수혁이었다.
잔뜩 굳어 있는 그들의 얼굴은 뭔지는 몰라도 심각한 이야기를 꺼내려는 것임을
짐작할 수있게 해주고 있었다. 멀쩡한 허우대에 어울리지 않게 한숨을 길게 내
쉰 종섭은 느릿느릿 입술을 움직였다.
"아무케도 이대로는 더 버틸 수가 없을 거 같고만."
"아니,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것도 아니고 고기이 뭔 소리요?"
영신이 양미간을 찌푸리며 그렇게 묻자, 종섭대신 수혁이 그의 말을 받았다.
"모든 걸 자기 허고 잡은 대로만 허려고 들지 않는가 말이여."
"... ..."
수혁의 화살이 양은에게로 향하고 있는 것임은 두말 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
다. 영신은 수혁의 뭐에 뭐라 대꾸를 해야 좋을지 몰라 잠시 망설이던 끝에 힘
주어 말했다.
"아니 그럼, 하늘에 태양도 하나이드끼 양은 형님이 이끄는 대로 우리가 따라
가야지, 제각각 사공노릇을 하려고 들믄 쓰겄소?"
그러나 종섭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우린 이미 떠나기로 결정했네. 영신이 자네도 한 번 잘 생각혀보는 게 좋을
거여. 지금 이사 양은 형님이 자넬 애지중지허지만 사정이 언제 뒤바뀔지 모른
다 이 말이여, 내말은... ..."
"아니, 시방 먼 야그들을 혀쌌는 거여?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그려서
양은 형님을 배신허겄다는 거여, 뭐이여?"
영신이 소리를 버럭 내지르자 수혁은 종섭을 원망스러운 듯 바라보았다. 것
보라고, 영신이는 틀림없이 이루코 나올 거라고 나가 야그혀지 않았는가... ... 그
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잘 생각혀 보라니께. 그려도, 나가 영신이 자네랑 찬밥 더운밥 같이 먹은 사
이니께 허는 소리여."
그러나 영신은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의 등 뒤에서 문이 거칠게 닫히
고, 발자국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영신은 벽에 등을 기댄채 눈을 감았다. 그
로서는 양은이 모든 걸 자기 하고 싶은 대로만 한다는 수혁의 비난이 전혀이해
가 되지 않았다. 적어도 그에게는, 양은은 독선적이기는커녕 모든 일을 그냥 믿
고 맡겨 버려 오히려 부담을 느낄 정도였다. 이번에는, 지금이야 양은이 그를 애
지중지 하지만 언제 사정이 변할지 알 수 없다는 종섭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그러나 그것 역시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고, 기껏해야 영신에 대한 양은의 각별
한 배려를 시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며칠사이에 식구들은 하나씩 또는 여럿이서 집을 떠나, 결국 양은의
곁에는 영신 하나만이 달랑 남게 되었다. 양은은 속으로야 배신감에 치를 떨었
겠지만, 겉으로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그런 태연함은 차라리 모두 죽여 버
리겠다며 길길이 날뛰는 것보다 훨씬 더 영신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그는 자기
혼자서라도, 몸이 가루가 되는 한이 있어도 양은의 곁을 지키겠노라고 굳게 마
음먹었다.
영신이 즉시 착수한 일은 순천, 광주, 대전 등지의 아우들을 서울로 불러 올리
는 것이었다. 경석, 수복, 상진, 동진, 태룡, 진태,... ... 아우들은 영신의 부름을 받
고는 속속 서울로 입성했다. 그는 아우들을 한데 모아 놓고 결연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모든 것을 보여 준다는 것을 신조로 삼아 왔던 그가
이렇게 말을 늘어 놓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아우님들에게 옛날 일본의 한 무사의 얘기를 하려고 한다. 그 무사는 칼
쓰는 솜씨가 그야말로 신기에 가까웠다. 그가 칼을 한 번 휘들를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의 목덜미가 추풍 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그의 오야붕은 지나치게 예리
한 그의 칼솜씨를 늘 걱정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그는 뜻하지 않은 일에 휩쓸려
무고한 사람을 배개 됐다. 그일이 벌어지자 그의 오야붕은 그를 크게 꾸짖은 뒤
그의 칼집에 종이로 봉인을 하여, 자기 허락 없이는 절대 칼을 휘두르지 못하게
했다. 그 후 그는 혼자 기릉ㄹ 가다가 수십명의 적들과 마주치게 되어 외로운
싸움을 치르게 되었다. 숫적으로는 절대적인 열세였지만, 만일 그가 칼을 휘두르
기만 했다면 그들은 아마 상대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허락없이
칼집에서 칼을 빼지 말라는 요야붕의 지시를 거역할수 없어 칼집째로 휘두르며
적과 맞서 싸우다가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다."
영신은 잠시 말을 끊고는 아우들을 한 번 둘러보고 나서 질문을 던졌다.
"이 형이 이 얘기를 왜 꺼내는지 알겄냐?"
"... ..."
모두들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침묵은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서
가 아니라 그의 말에 너무도 벅찬 감동을 느끼고 있었던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윗사람을 섬기는 도리는 이래야 하는 것이다. 한 번 오야붕으로 모시기로 했
기에 죽음 앞에서도 그와의 약속을 깨고 살아남기보다는, 약속을 지키고 죽어
가는 쪽을 택한 그 무사의 정신... ...
이렇듯 사나이의 의리는 무덤까지 지고 가야 하는 것이다. 이런 굳은 의리로 양
은 형님을 모실 사람은 남고, 여기에 추호의 주저나 망설임이 있는 사람은 굳이
잡지 않을테니 돌아가도록해라."
"저희는 모두 형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제서야 아우들은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영신은 그들의 얼굴을 한
사람씩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혹시 분위기 때문에 원치 않은 선택을 하는 아우
가 한사람이라도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서였다. 그러다 다행히 그들의 얼굴마다
에는 가슴 속으로부터 우러나온 어떤 결의가 번득였다.
"고맙다. 오늘의 이맹세를 무덤에서까지 잊지 않도록 하자."
그런 비장한 각오로 한데 뭉친 영신과 아우들은 떠나간 식구들을 손톱만큼도
아쉬워할 것이 없는 세력을 형성하여 양은을 보필해 나갔다.
집 떠나니 고생이었는지, 양은의 곁을 떠났던 수혁, 종섭이 떠나간지 얼마 되
지도 않아 다시 돌아왔다. 영신이 그들을 거들떠보기라도 했을 리는 만무했다.
양은더러 저 하고 싶은 대로 한다고 비난했던 자들이, 떠날때는 언제고 금세 다
시 돌아오다니, 영신으로써는 그들의 얼굴을 대하기만 해도 욕지기가 치밀어 오
르는 것만 같았다. 더욱이 이미 그들 없이도 충분히 생활을 꾸려 나갈 발판을
마련해 놓지 않았던가.
그러나 뜻밖에도, 두 무릎을 꿇고 백배 사죄하는 그들을 양은은 두말 없이 다
시 받아들였다.
"그 동안 서로 간에 불필요한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
고 하지 않았더냐? 앞으로 더 굳세게 뭉쳐 보자."
말로써 그친 게 아니라, 그는 자신이 지분을 가지고 있는 백남호텔에 창세를
영업부장으로, 종섭을 연예부장으로 앉히기까지 했다. 다만, 수혁은 경찰의 집요
한 추적을 받고 있던 터여서 일을 맡기지 못했다.
양은이나 그들은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곧 태연해졌다. 영신도 그 스
스로 '무덤에까지 지고 갈 의리'를 맹세한 양은의 뜻이 그러했기에 그들과 다시
자연스레 어울리려고 애를 쓰기는 했지만 그의 마음속까지 그들을 다시 받아들
일 수는 없었다. '돌아온 탕자들'역시 그런 영신의 속내를 모를 리 없었고, 그들
사이의 골은 알게 모르게 더욱 깊어만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