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8/13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Cinderella Stamps Commemorate Fiftieth Anniversary of the Berlin Wall By Lou Novacheck, BLOGCRITICS.ORG Published 09:30 p.m., Thursday, August 4, 2011 2011 - 베를린 장벽 설치 50주년 베를린 장벽 설치 50주년 냉전 최전선서 철거뒤엔 ‘양극화 상징’ 동서냉전의 상징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지 13일로 50주년을 맞았다. 베를린 장벽은 1989년 붕괴되며 독일 통일과 사회주의권 붕괴의 봇물이 됐으나, 그 전 28년 동안 동서냉전의 최전선으로 존재했다. 베를린시는 이날 장벽이 세워졌던 베르나우어가에서 기념식 등 여러 행사를 열었다. 클라우스 보베라이트 베를린 시장은 “베를린은 이날을 최근 역사에서 가장 슬픈 날로 기억하고 있다”며 “장벽은 역사가 됐으나, 우리는 이를 잊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기념식에 참석한 크리스티안 불프 독일 대통령은 “장벽은 이를 만든 사람들의 공포의 표현이었다”며 “이 장벽이 상징하던 당시의 세계상황은 많은 사람들에게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자유는 정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떤 장벽도 결국 자유의 의지 앞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날 정오에는 장벽을 넘다가 숨진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묵념도 베를린시 전역에서 거행됐다. 장벽을 넘어 서베를린으로 오려다 숨진 이들은 1961년 8월24일 구엔테 리트핀을 시작으로 1989년 2월6일 크리스 구에프로이까지 적어도 136명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수는 아직 논란중이다. 희생자 가족단체들은 700명이 넘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베를린 장벽은 1961년 8월13일 동독 당국에 의해 철조망으로 처음 만들어진 뒤 나중에 160㎞ 장벽으로 진화됐다. 탈출자들을 막으려는 300개의 감시탑도 세워졌고, 일부 지역에서는 지뢰도 심어졌다. 동독 당국은 장벽을 ‘반파시스트방어 성벽’이라고 부르며, 파시스트 서방을 막기 위한 장벽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장벽은 이제 철거돼 일부 지역에서 역사적 기념물로만 남아있으나, 부유한 서쪽과 가난한 동쪽을 가르는 상징으로 여전히 남아있기도 하다고 <비비시>(BBC)는 전했다. 동독 교사 출신으로 여전히 동베를린에 살고 있는 브리기타 하인리히는 통일 이후에도 “내가 지금까지 사귄 서독 사람들의 이름을 한 사람도 댈 수 없다. 정말로 그들과 사귈 수 없다”며 통일 이후 상황에 아직도 적응할 수 없음을 고백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한겨레 20110814 20:32
2009 - 순수 국내기술 쇄빙선 '아라온' 첫 출항 한진重 건조..연구능력 세계 최고 수준 한진중공업이 순수 국산기술로 건조한 극지전용 쇄빙선 '아라온'호가 첫 출항에 나섰다. 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8/13/2009081301943.html
- 제27회 국제원예학대회 개최기념 (2006.8.11. 발행)
2006 - 제27회 국제원예학대회(IHC 2006) 개최 <지상중계> '2006 서울국제원예전시회'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2006 서울국제원예전시회’가 지난 15~18일 4일간 서울 삼성동 코엑스(COEX) 1층 태평양홀에서 개최됐다. https://aflnews.co.kr/aflnews/news/news_contents.asp?news_code=2006082101108&c_code=0103
2005 - 박지성, 프리미어리그 개막전 선발 출장 영국 프로축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박지성이 프리미어리그 개막전에 선발로 출장해 데뷔전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2004 - 제28회 아테네 올림픽대회 개막 [올림픽]사상최대 28회 아테네올림픽 개막 시드니 대회이어 남북선수단 공동입장 제28회 하계올림픽경기대회가 현지시간 13일 오후 8시 45분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개막됐다. 머니투데이 김용범 기자 /머니투데이 2004.08.14 04:38 http://news.mt.co.kr/mtview.php?no=2004081404380419708&type=1
1980 - 김영삼 신민당 총재 정계은퇴 발표 박태근 동아닷컴 기자 ptk@donga.com /동아사이언스TV 2010-08-13 09:18:14 http://etv.donga.com/view.php?code=&idxno= 201008130035590&category=002013&page=1
1965 - 월남파병안 국회 통과 1964년 8월 4일 이른바 월맹 통킹만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은 이를 이유로 월맹에 보복을 선언하고 대월남전을 본격적으로 확대했다. 미국은 이보다 훨씬 전인 7월초에 한국에 대해서 월남전에 참여해 줄 것을 요구했다. 1965년 1월초부터 한·미·월 세나라가 한국군을 월남에 증파하는 문제를 협의한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1월 8일 국무회의는 공병과 수송부대, 자체방위병력 등 2천명을 월남에 증파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6월 키 월남수상이 정일권 국무총리에게 1만5천명 규모의 한국전투부대를 월남에 파병해 주도록 요청했으며 한국정부는 7월 2일 해병1개 연대와 육군2개 연대를 월남에 파견하는 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키로 결정했다. 이런 정부의 결정에 야당과 학생들은 반대 데모를 벌였고, 민중당 국회의원들은 7월 16일 일괄사퇴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투부대 파월동의안은 8월 13일 야당의원이 불참한 가운데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파월육군전투부대(맹호부대)와 파월해병대(청룡부대)는 9월 25일부터 월남전선에 투입됐으며 정부는 10월 12일 서울 여의도에서 30만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대대적인 파월장병 환송식을 거행했다. /조선
1961년 8월13일, 막 잠에서 깬 서베를린 시민들은 눈앞에 펼쳐진 낯선 광경에 경악을 금치못했다. 밤새 동ㆍ서 베를린을 잇는 13개 도로와 80개 통로에 철조망이 쳐있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입구마다 탱크와 장갑차가 배치돼 통행을 가로막고 있었다. 철조망 길이는 45km. 곧 150km로 늘어난 철책에는 전류가 흘렀고 콘크리트와 붉은 벽돌로 된 높이 2mㆍ폭 2m의 장벽은 동족간의 이동을 금지시켰다. 1949년 동독정권 수립이래 매년 20만명, 1961년까지 이미 250만명이 경계를 넘은 상황에서 동독정부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특히 전문직과 숙련노동자의 탈출이 심각해 자칫하면 고급 두뇌의 공백으로 동독의 기술ㆍ산업기반이 붕괴될 판이었다. 베를린을 자유도시로 하자는 소련측의 제안을 서방측이 거부하자 1961년 6월 흐루시초프는 "베를린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핵무기 사용도 불사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긴장은 고조됐고 이로인해 서베를린으로의 탈출러시가 가속화됐다. 7월 한 달동안만 3만명이 고향을 등졌다. 베를린 장벽은 1989년 11월 장벽이 붕괴될 때까지 28년간 동서대립의 상징이었고 독일인들을 갈라놓은 `벽(壁)`이었다. /조선
1911년 차드호를 포함한 프랑스 식민지가 프랑스령(領) 콩고로 확정되었고 이듬해에는 프랑스령 적도(赤道)기니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어 1916년에는 차드와 분리, ‘우방기샤리’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중앙(中央) 콩고’와는 별개의 통치단위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민족해방운동이 고조됨에 따라 1958년 프랑스공동체 소속 자치공화국이 되어 국명(國名)을 ‘중앙아프리카공화국’으로 정하였다. 해방운동 지도자이며 흑(黑)아프리카사회진보당(MESAN) 당수였던 자치정부 수상 바르텔레미 보강다가 1959년 4월 비행기 사고로 죽자, 다비드 다코(David Dacko)가 뒤를 이었으며 그는 1960년 8월 13일 독립과 함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1965년 12월 장 베델 보카사가 이끄는 쿠데타가 성공하여 장 베델 보카사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이듬해인 1966년 장 베델 보카사는 헌법을 폐지하고 국회를 해산함으로써 독재체제의 강화를 꾀하였다. /네이버
미국에 이어 소련도 1949년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게 되자 미국은 이론적으로는 제작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진 핵융합무기인 수소폭탄의 개발에 착수하였다. 1952년 액체수소(중수소 또는 삼중수소)를 이용한 습식(濕式) 수소폭탄이 완성되어 11월 1일 서태평양상의 에니위톡(Eniwetok)에서 실험에 성공했으며, 소련에서는 1953년 수소화리튬을 이용한 건성수소폭탄(리튬폭탄)을 완성함으로써 수소폭탄이 실용화되었다.
[세계 각국의 최초 핵실험] 1945.08.06. - 히로시마에 " 1945.08.09. - 2006.10.09. - 북한 핵실험 실시
웰스 [Wells, H(erbert) G(eorge), 1866.9.21~1946.8.13] 작가 허버트 조지 웰스 사망 영국의 소설가 겸 문명비평가인 허버트 조지 웰스가 1946년 8월 13일 향년 80세로 사망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대학을 마친 웰스는 교사생활을 잠시 거쳐 문필활동에만 전념, 일생동안 100여권의 책을 저술했다.
1936 - 조선중앙일보 '일장기 말소' 사진 게재 일장기 말소 사건 (카멜레온과 하이에나 / 강준만) /이정환닷컴 2001/12/26(수)
1926 - 쿠바의 혁명가, 정치가 피델 카스트로(Castro, Fidel) 출생 카스트로 [Castro (Ruz), Fidel (Alejandro), 1926.8.13~ ] 쿠바 동쪽 끝 올긴(Holguin) 주의 한 소도시에서 출생. 1945년 말 아바나대학교(University of Havana) 법학과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 변호사가 되었다. 대학 재학 때부터 정치활동을 하였으며, 1947년 도미니카공화국의 독재자 라파엘 트루히요(Rafael Trujillo)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침공에 합류하였다.
1914 - 중국의 조선족 작곡가 정율성(鄭律成) 출생 정율성 [鄭律成, 1914.8.13~1976.12.7] 정율성은 누구 1937년 중국 최고의 음악인 반열에 올라 13억 중국인의 가슴마다 아로새겨진 ‘중국인민해방군가’의 작곡가 정율성. 중국 인구 6억 이상은 중국의 위대한 혁명가로 그를 기억하고 있고, 중국 인구 10억 이상은 그가 작곡한 노래를 최소 한 곡 이상 부를 줄 안다. http://inews.gwangju.go.kr/Source/articleshow.php?Domain=gwangju&No=5812
정율성[ 鄭律成 ] 1918∼1976. 독립운동가, 음악가. 아명(兒名)은 정부은. 별명은 유대진(劉大振). 광주 출신. 숭일학교와 전주 신흥중학교를 다녔다. 첫째형 정남근과 둘째형 정인제, 셋째형 정의은 등이 모두 독립운동가로 활약하였다. 1933년 봄 셋째형 정의은(조선공산당 당원), 누나 정봉과 함께 중국 남경(南京)으로 건너가 의열단의 조선혁명간부학교 제2기(1933.9∼1934.4.)로 졸업하였다. 그 뒤 민족혁명당 당무를 보는 한편 남경과 상해를 오가며 음악공부를 하였다. 항일구국운동이 한창이던 1936년 남경에서 오월문예사(五月文藝社)에 가담하여 활동하는 한편, 상해에서 김성숙·박건웅 등이 건립한 조선민족해방동맹(朝鮮民族解放同盟)에 가담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후 남경을 떠나 1937년 10월 중국공산당의 본부가 있는 연안(延安)에 도착하였다. 연안에서 섬북공학(陝北公學)에 다니고, 1938년 5월부터는 노신예술학원(魯迅藝術學院) 음악학부에서 수학하였다. 그후 항일군정대학 정치부 선전과에서 활동했으며, 1939년 1월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 해 12월부터 노신예술학원 음악학부에 배치되어 음악을 가르쳤다. 연안에서 작곡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연안송가 延安頌歌〉와 〈팔로군행진곡 八路軍行進曲〉(이후 中國人民解放軍 군가로 바뀌어 불렸다.) 등이 있다. 음악을 작곡하는 한편 1941년 7월부터 화북조선청년연합회 섬감녕분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陝甘寧分會), 이듬해 12월부터 태행산(太行山)의 화북조선혁명청년학교(華北朝鮮革命靑年學校) 등에 소속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44년 4월 다시 연안으로 돌아온 뒤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 후 북한으로 귀국, 해주에서 황해도 도당위원회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때 음악전문학교를 창설하고 음악 인재를 양성하였다. 1947년 평양으로 들어와 조선인민군 구락부의 부장을 지냈고, 인민군협주단을 창단하여 단장이 되었다. 이 후 〈3.1행진곡〉, 〈조선해방행진곡〉, 〈조선인민군행진곡〉, 〈두만강〉 등을 작곡하였다. 1950년 9월 중국으로 갔다가 같은 해 12월, 중국인민지원군의 한 사람으로 귀국하여 전선 위문활동을 전개하였다. 1951년 4월 중국으로 가 1976년 12월 사망할 때까지 작곡가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마카리오스 3세 [Makarios III, 1913.8.13~1977.8.3] 본명은 모스코스(Mikhail Khristodolou Mouskos). 키프로스 서부 파푼스 출생. 아테네대학과 미국의 보스턴대학교에서 신학부를 졸업하고, 1948년 키티온의 주교가 되어 키프로스로 돌아와 1950년 대주교가 되었다. 정치에도 관여하여 키프로스의 그리스 귀속을 목표로 한 에노시스운동의 지도자로서, 이 섬의 그리스계 사람들로부터 ‘민족의 아버지’로 추앙받았다. 1956년 영국군에 체포되어 세이셸섬으로 추방당하였으나, 이듬해 석방되고 1959년 키프로스 독립협정에 조인하였다. 1960년 키프로스 공화국의 독립과 동시에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1968년과 1973년에도 취임하여 3회나 역임하였다. 1974년 7월 쿠데타로 국외로 피신하였다가, 그 직후 터키군의 침입으로 쿠데타가 실패하자 귀국, 1977년 병사하였다. /네이버
1912 - 프랑스의 작곡가 쥘 마스네(Massenet, Jules) 사망 마스네 [Massenet, Jules-Emile-Frédéric, 1842.5.12~1912.8.13] 프랑스의 작곡가. 리옹 근처 몽토 출생. 1851년 파리음악원에 입학, 피아노 ·작곡 등을 수학하고 1863년 로마대상을 받았다. 이탈리아에 유학한 후 오페라 창작에 전념했으며, 《라올의 왕》(1877)으로 명성을 얻었는데, 이 작품에는 친구인 비제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그 후 《마농》(1881) 《베르테르》(1892) 《타이스》(1894) 《노트르담의 곡예사》(1902) 등을 발표하여 작곡가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굳혔다. 오페라 이외에 관현악곡 ·가곡 ·부수음악 ·피아노곡 ·종교음악 등도 있으며 그의 음악은 모두 섬세하고 감각적이며 인상적이다. 또 파리음악원의 교수로서 샤르팡티에, F.슈미트 등을 길러냈다. /네이버
- England, 10 Pounds (Banknote) 나이팅게일 [Nightingale, Florence, 1820.5.12~1910.8.13] [어제의 오늘]1910년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 타계 ㆍ간호사를 ‘천사’로 부르는 이유 “간호란 질병을 간호하는 것이 아니고 병든 사람을 간호하는 것이다.” 육체와 정신, 감정이 일체를 이루는 간호를 주장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정신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이 된 지금까지도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나이팅게일은 영국의 간호사이자 작가이며 통계학자였다. 플로렌스라는 이름은 이탈리아 북부 도시 피렌체의 영어 지명인데, 피렌체를 여행 중이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붙여졌다. 나이팅게일은 여성도 배워야 한다는 사고를 갖고 있던 아버지 덕분에 어릴 때부터 가정교사에게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 지리학 등을 배웠다. 그는 1849년 이집트 여행 도중 알렉산드리아 병원을 참관하고 낡은 간호체계의 실상을 목격한 뒤 간호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특히 인도주의자인 부모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가난한 이웃에 관심이 많던 나이팅게일은 전쟁의 참상에 대한 기사를 신문에서 읽고 군 의료체계 개선의 필요성을 깨닫게 됐다. 권재현 기자 jaynews@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0-08-12 21:57:5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008122157515&code=100100&s_code=ap005
1907 - 영국의 건축가 바실 스펜스(Spence, Basil) 출생 스펜스 [Spence, Basil Urwin, 1907.8.13~1976.11.19] 영국의 건축가. 제2차 세계대전 때 공습을 받아 파괴되었던 코번트리 대성당을 대신해 새로운 코번트리 대성당을 건립한 사람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런던대학교와 에든버러대학교의 건축학교에서 공부했으며 에드윈 러티언스 경의 건축설계사무실에서 뉴델리 총독관저 설계에 참여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커다란 전원주택들을 설계했으며 1951년에는 새 코번트리 대성당(1962 완공) 설계공모에 당선되었다. 장식이 풍부한 이 기념비적 건물은 폭격으로 파괴된 14세기 성당의 잔해들을 훌륭히 통합하고 있다. 그는 〈코번트리의 불사조 Phoenix at Coventry〉(1962)라는 책에서 이 계획안을 설명했다. 서식스대학교 설계(첫번째 중정 1962~63)와 아름다운 다운랜드의 환경에서 보여주듯이, 건물과 조경 간의 관계에 뛰어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1960년에 기사작위를 받았으며 1961~68년에는 왕립미술원 건축교수로 있었다. 또한 로마에 있는 영국 대사관(1971 완공)과 몬트리올에서 열린 '엑스포 67'의 영국관을 설계했다. 저서 〈옛 도시들 속의 새로운 건물들 New Buildings in Old Cities〉이 1973년 출판되었다. /브리태니커
히치콕 [Hitchcock, Alfred, 1899.8.13~1980.4.29] 히치콕은 '스릴러' 영화를 다수 발표해 명성을 얻은 영국 태생의 미국 영화감독이다. 세인트 이그나티우스 칼리지와 런던대학교에서 공학을 전공했다. 1925년 첫 작품인 <쾌락의 정원 The Pleasure Garden>을 감독했고, 1926년 <하숙생 The Lodger>을 감독하면서 서스펜스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1929년에는 영국 최초로 성공을 거둔 발성영화 <공갈 Blackmail>을 만들었다. 이후 서스펜스 영화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작품들을 연이어 발표해 인기를 얻었다. 1939년 할리우드로 진출하여 만든 첫 작품 <레베카 Rebecca>(1940)로 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이후 30년 동안 1년에 1편 정도의 작품을 감독했으며 1948년부터는 제작도 겸했다. 그는 살인사건과 스파이 활동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인간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해 위협·공포 등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데 능했다. 여기에 카메라의 구도와 움직임, 정교한 편집, 효과적인 사운드트랙 등 기술적인 효과를 사용함으로써 서스펜스 영화의 재미를 더했다. 1979년 미국영화협회(American Film Institute)로부터 공로상을 수상했으며, 1980년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았다. /브리태니커
"만약 내가 신데렐라를 찍는다면 관객들은 곧바로 신데렐라의 마차 안에 시체가 있으리라고 예상할 것이다. "
- 앨프레드 히치콕
1898 - 스페인, 미국에 마닐라 할양 1898년 8월 13일 필리핀 마닐라가 미국에 할양되었다. 1895년 2월 쿠바인들이 스페인의 식민통치에 항거해 일으킨 독립투쟁에 미국이 개입하면서 벌어진 미국-스페인 전쟁은 1898년 4월 스페인과 미국이 서로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면서 시작되었다. 미해군 아시아 함대 사령관으로는 조지 듀이 준장이 임명되었다. 5월 1일 미해군 소함대는 마닐라 만으로 진입해 그곳에 정박 중이던 스페인 함대를 공격했다. 이날 아침의 전투는 사소한 포격이 수차례 오간 뒤 미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전투 결과 미국측의 피해는 수병 7명의 부상에 그쳤지만 스페인군 사상자는 381명에 이르렀다. 마닐라 점령에 이어 미군은 7월 3일 쿠바의 산티아고에 정박해 있던 파스쿠알 세르베라 제독 휘하의 스페인 카리브 함대까지 격파했고, 이로써 전쟁은 사실상 끝을 맺었다. 1898년 12월 10일 파리 조약 체결로 스페인은 쿠바에 대한 모든 권리주장을 포기했으며, 괌·푸에르토리코를 미국측에 양도하고 필리핀 통치권도 2,000만 달러에 미국측에 넘겨주었다. 미국은 이 전쟁의 승리로 광범위한 해외식민지를 보유한 강대국이 되었으며 국제정치 무대의 새로운 중추로 떠올랐다. /브리태니커
1888 - 영국의 전기공학자 존 베어드(Baird, John) 출생 베어드 [Baird, John Logie, 1888.8.13~1946.6.14] 영국의 텔레비전 발명가·전기공학자. 스코틀랜드 헬렌스버그 출생. 목사의 아들로 공업전문학교를 거쳐 글래스고대학교를 졸업하였다. 병약한 탓으로 전기 기술자직을 그만두고, 1922년부터 텔레비전의 발명에 몰두, 1926년 최초로 공개시험에 성공하였다. 그가 창설한 베어드 텔레비전 개발회사에 의하여 1929년에 처음으로 BBC 방송이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하였다.
1879 - 영국의 작곡가 존 아이얼런드(Ireland, John) 출생 아이얼런드 [Ireland, John Nicholson, 1879.8.13~1962.6.12] 영국의 작곡가. 가곡과 표제가 붙은 관현악 작품으로 유명하다. 런던의 왕립 음악 칼리지에서 공부했으며 나중에 그곳에서 작곡을 가르쳤다. 아서 매천의 작품에 나타나는 신비주의와 환상에 깊이 매료된 아이얼런드는 그 영향을 받은 〈망각된 제전 The Forgotten Rite〉(1913) 등의 작품을 작곡했다. 셰익스피어, A.E.하우스먼, R.브루크 등의 시에 곡을 붙인 그의 가곡들은 미묘한 분위기 묘사로 유명하다. 그밖의 작품으로는 〈런던 서곡 A London Overture〉, 피아노 모음곡 〈사르니아 Sarnia〉(1940~41), 1곡의 피아노 협주곡, 피아노를 위한 〈런던 소품들 London Pieces〉(1917~20) 등이 있다. /브리태니커
1872 - 독일의 화학자 리하르트 빌슈테터(Willstätter, Richard) 출생 빌슈테터 [Willstätter, Richard, 1872.8.13~1942.8.3] 카를스루에에서 출생하였다. 뮌헨대학교에서 A.바이어의 지도를 받았다. 1902년에 모교의 교수가 되었으며, 취리히대학교와 베를린대학교를 거쳐 1916년 다시 뮌헨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그 동안 카이저빌헬름연구소의 유기화학부장을 겸임하였다(1912∼1916). 생명현상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천연성 유기화합물, 예를 들면 코카인·트로핀·아트로핀 등의 알칼로이드류, 꽃의 색소 안토시안, 그리고 엽록소·혈색소 등을 연구하였다. 특히 엽록소를 정제·결정화하여 구조를 연구하고, 엽록소에 의한 광합성 작용의 연구를 확립함으로써, 1915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하였다.
리프크네히트 [Liebknecht, Karl, 1871.8.13~1919.1.15] 라이프치히 출생. 법학박사가 된 뒤 변호사가 되었다. 사회주의청년운동의 좌파를 이끌고, 1907년 청년인터내셔널의 간부를 지냈다. 독일사회민주당 극좌익에 서서 총파업과 대중행동에 의하여 독일의 민주화를 강행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에는 반대입장을 취하였으며, 1914년 12월 당의 결의를 어기고 군사예산(軍事豫算)에 대하여 반대투표를 하였다. 그 뒤에도 반전(反戰)운동을 계속하였기 때문에 당의원단(黨議員團)에서 제명되었고, 또 작업병(作業兵)으로 소집되어 고역을 치렀다. 제국주의 전쟁을 내란과 사회혁명으로 끝내야 한다고 주장하며,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비합법적 스파르타쿠스단(團)을 조직하여 1916년 5월 1일 베를린에 1만 명의 반전시위대를 조직하였다가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독일혁명가의 대표로서 국제적으로도 유명해졌으나 독일혁명 직전에 석방되었고, 독일혁명에 임해서는 “모든 권력을 노병평의회(勞兵評議會:레테)로”라고 주장하였다. 독일공산당을 결성하고 1919년 1월 혁명파의 쿠데타에 참가하였다가 학살당하였다. 저서 《군국주의와 반군국주의》(1906)는 반전(反戰)주의의 바이블이라고 일컬어졌다. /네이버
1869 - 프랑스의 건축가, 도시계획가 토니 가르니에(Garnier, Tony) 출생 가르니에 [Garnier, Tony, 1869.8.13~1948.1.19] 리옹에서 태어났다. 파리의 국립미술학교에서 공부한 후 1899년 로마대상을 받고 로마에 유학하였다. 이 무렵부터 근대적인 공업도시의 연구에 착수하여 그 성과를 《공업 도시: Une cit 그는 이 책에서 건축재료로서의 콘크리트의 가능성을 정확하게 예측하여 이의 실제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였으며, 20세기의 도시가 지녀야 할 공간적 특색을 보여주었다. 작품으로는 《리옹 공업도시계획》(1899), 《리옹시 도살장》(1913), 《리옹시 경기장》(1916), 《리옹 공업 중심지의 집합주택》(1924) 등이 있다. /네이버
- 'Self-portraits' - 'On the Barricades' - 'Liberty Leading the People' - 'Greece in Missolonghi'
- 'Jacob Wrestling with the Angel', detail - 'A Jaguar Attacking a Rider'
- 'The Capture of Constantinople' - 'The Capture of Constantinople', detail
- 'Moulay Abd-er-Rahman' - 'Moroccan Saddling Steed'
- 'Scene from the Massacre' - 'Lion and Tiger'
- France, 100 Francs (Banknote)
들라크루아 [Delacroix, Eugène, 1798.4.26~1863.8.13] 샤랑트현(縣) 생 모리스에서 출생하였다. 명문가 외교관의 아들로 명석하며 정열적인 상상력을 타고났다. 16세에 고전파 화가인 P.N.게랭에게 그림을 배웠고, 1816년 관립미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때부터 루브르미술관에 다니면서 P.P.루벤스, P.베로네세 등의 그림을 모사하였고, T.제리코의 작품에 매료되어 현실묘사에도 노력하였다. 1819년 제리코가 발표한 《메두사호(號)의 뗏목 Raft of the Meduse》은 그에게 낭만주의를 수립하는 결정적인 감격과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1822년 최초의 낭만주의 회화인 《단테의 작은 배》를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엿볼 수 있는 극적인 표현은 다비드풍(風)의 고전주의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계속하여 1824년에는 그리스의 독립전쟁에서 취재한 《키오스섬의 학살》을 발표하여 '회화의 학살'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하였지만, 힘찬 율동과 격정적 표현은 그의 낭만주의를 더욱 확립시켰다. 더욱이 이때 살롱의 똑같은 방안에 진열된 영국의 J.컨스터블의 풍경화의 밝은 색조에서 자극을 받고, 자기의 작품을 밝게 새로 칠하여 한층 더 강렬한 효과를 나타냈다. 작품으로는 이상에서 말한 대표작 이외에 초상화, 성서에서 제재를 택한 것, 말이나 사자 등의 동물을 그린 것도 많다. 더욱이 문학적·음악적인 정서도 풍부하여 셰익스피어, 바이런, 괴테 등의 작품을 일찍부터 가까이하였고, 음악가 F.리스트와 당시의 여성문학가이던 G.상드와도 친하였다. 이와 같은 풍부한 재능과 환경은, 그에게 회화작품 외에도 오늘날 미술사상(美術史上) 귀중한 문헌으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는 뛰어난 예술론이나 일기 등을 집필하게 하였다. 그의 예술형성에 전술(前述)한 화가 이외에도 16세기 베네치아파 화가인 미켈란젤로나 고야도 영향을 주었으며, 한편으로 그 자신의 영향은 그 후의 낭만주의 회화를 물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E.드가와 A.르누아르에게 직접 연결되는 점도 많다. 후반기에는 교회와 파리의 공공건축물을 위한 대벽화 장식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국회 하원의 《국왕의 방》(1833), 국회 하원도서관(1844), 국회 상원도서관(1845∼1847), 파리시청의 《평화의 방》(1849∼1853, 소실), 루브르궁전의 《아폴로의 방》(1849) 등을 잇달아 그렸고 만년에는 동판화와 석판화 제작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는데, 흑백의 대조가 강조되고 한층 더 환상적으로 표현하는 기교로써 《파우스트 석판화집》(1827) 《햄릿 석판화집》(1843) 등의 걸작을 남겼다. /네이버
1860 - 미국 개척기의 명사수 애니 오클리(Oakley, Annie) 출생 오클리 [Oakley, Annie, 1860.8.13~1926.11.3] (참고) [역사 속의 인물] 美 여자 명사수 애니 오클리 서부시대의 카우보이 문화를 간직한 미국 역사에서 여자 명사수 애니 오클리(본명 피비 앤 모제스)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키가 150cm밖에 되지 않았던 그녀는 총잡이가 아니라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성행한 '버펄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 쇼단' 등에서 사격 솜씨로 이름을 날렸다. 당시 대중문화의 스타였던 그녀는 여성도 총으로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해 총기 소지를 합법화하는 미국 특유의 전통을 대변했다. 미국 오하이오주의 시골 오두막집에서 태어난 애니 오클리(1860~1926)는 7살 때 아버지가 죽자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어머니를 도와야 했다. 그녀는 9살 때부터 총으로 짐승을 사냥, 식당에 팔거나 사격 내기로 돈을 벌어 15살 때 어머니의 빚을 모두 갚았다. 그 무렵 10년 연상인 프란시스 버틀러와의 사격 내기에서 이겼고 자신에 반한 버틀러와 7년 후 결혼했다. 그녀는 26살 때인 1885년 오늘, '버펄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 쇼단'에 고용된 이후 남편과 함께 평생 사격 쇼를 펼치며 살았다. 그녀의 명성은 유럽에도 알려져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독일의 빌헬름 2세 앞에서 정교한 사격 솜씨를 뽐내기도 했다. 김지석 논설위원 /매일신문 2012년 04월 24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27482&yy=2012
1826 - 프랑스의 의학자, 청진법의 창시자 르네 라에네크(Laënnec, René) 사망 라에네크 [Laënnec, René, 1781.2.17~1826.8.13] 브르타뉴의 캥페르 출생. 14세 때 낭트에서 개업하고 있던 숙부 기욤 라에네크의 집에서 지내며 의학의 기초를 배웠다. 1801년 파리에 나와 샤리테 병원학교에 들어가서 나폴레옹의 주치의였던 코르비자르에게 사사하여 정식으로 의학을 수학하였다. 1806년 보종병원의 의사가 되어 병리해부학에 관심을 가지고 그 분야의 문제에 관한 몇 가지 논문을 발표하였다. 1816년 어린이의 놀이에서 힌트를 얻어 비대한 여성을 진찰할 때 종이를 말아서 관 모양으로 하여 가슴에 대고 청음하였다가 청진기를 발명하였다. 그 후 3년 동안 환자를 청진하여 여러 가지 음(音)을 기록하고 죽은 후의 병형(病型)과 대조하여 이러한 음이 어떠한 병에서 나오는가를 알아냈다. 그의 방법과 발견은 《간접 청진법에 대하여 De l’auscu1tation m
1818 - 미국의 여성참정권운동의 선구자 루시 스톤(Stone, Lucy) 출생 스톤 [Stone, Lucy, 1818.8.13~1893.10.18] 미국 여성참정권운동의 지도자. 오벌린대학 졸업 후 노예제 폐지 및 여성의 권리에 관한 강연활동을 하였고, 1850년 매사추세츠주 우스터에서 여성의 권리를 위한 최초의 전국대회를 열었다. 남북전쟁 후 E.C. 스탠턴 등과 전술적·사상적 차이로 대립하여 온건파를 중심으로 69년 미국여성참정권협회를 조직하였다. 그녀가 편집한 협회기관지 《여성저널》은 그 시야가 중산계급여성의 권리문제에 한정된 경향이 있었지만, 1917년까지 계속 간행되어 여성참정권 지지의 확대에 공헌하였다. /야후백과
1802 - 오스트리아의 시인 니콜라우스 레나우(Lenau, Nikolaus) 출생 레나우 [Lenau, Nikolaus, 1802.8.13~1850.8.22] 본명 Nikolaus Franz Niembsch Elder von Strehlenau. 헝가리 출생. 부친에게 슬라브-독일계의 혈통을, 그리고 모친에게는 마자르인의 혈통을 받았다. 그의 서정시가 이국적인 느낌을 풍기는 것은 출생지의 풍토와 혈통에 그 원천이 있을지도 모른다. 시 이외에는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했으며, 여러 번 불행한 연애를 경험하였다. 그 때문인지 그의 시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대체로 영혼 깊숙한 곳에서 스며나오는 듯한 우수이며, 이 때문에 그를 ‘세계고(世界苦)의 시인’이라 불렀다. 만년에 정신이상으로 빈 정신병원에서 죽었다. 장편 서사시에도 손을 댔으나, 그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음악을 사랑하고 자연과 교감하는 서정시인이었다. 《시집 Gedichte》(1832), 《시전집 Gesammelte Gedichte》(2권, 1844) 등이 있다. /네이버
1553 - 스페인 신학자 세르베투스 체포 세르베투스 [Servetus, Michael, 1511?~1553.10.27] [책갈피 속의 오늘]1553년 개신교 첫 ‘종교적 살인’ 모든 스페인 사람의 내면에는 돈키호테의 면모가 감춰져 있다고 한다. 끊임없는 모험과 도전정신, 천재적 번뜩임과 기묘한 과대망상, 그러면서 모든 사람에게 맞서 독단적 싸움을 벌이다 어느 순간 경박한 사기꾼으로 전락하고 마는 라만차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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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