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가는 길, 말의 귀를 만났다.
말의 귀가 묻는다.
"어디 가냐?"
내가 답한다.
"서천 가오."
말의 귀가 또 묻는다.
"혼자 가냐?"
내가 또 답한다.
"그러게요. 그렇게 되었네요."
그렇다.
올해가 가기 전에 꼭 답사하기로 마음 먹은 서천.
나 홀로 간다.
예전 같았으면 기쁨에 겨워 울부짖으며 발광했을텐데,
오늘은 영 기분이 나질 않는다.
답사지기의 요즘살이가 너무 바쁜 것 같다.
무릇 사는 게 애처롭다.
평소 최재천 교수님을 좋아하던 마눌님,
최 교수님이 추천했다던 서천 국립생태원을 그렇게 가보고 싶어했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조수석 빈자리가 슬퍼보인다.
서천으로 간다는 것이 부여로 와버렸다.
출발 4시간 10분만에 계획과는 다른 곳에 도착했다.
내비아가씨가 아니라 내 욕심이 길을 잘못 안내했다.
답사에서는 첫 답사지의 선정이 중요하다.
그런데도 망할, 모든 동선이 다 엉켜버렸다.
부여, 보령, 서산, 태안, 홍성, 청양, 군산...
서천 주변은 여러 번씩 답사를 했다.
하지만 서천은 10년이 넘도록 답사를 하지 못했다.
지금과 같은 이유다.
순간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내 썰물처럼 사라졌다.
완전한 형태였다면 아주 깔끔한 석탑이었을 것이다.
특히 절수구의 표현이 정연하다.
파란하늘에 흰구름 뿌려놓은 가을 바람이 내 얼굴까지 살살 간지럽힌다.
만수산에도 가을이 왔다.
좋은 시절 또 한 번의 인연을 맺는다.
일주문을 지나 무량사 가는 길,
극락교를 건너자마자 좌측에 못보던 부도밭이 있다.
어라, 부도가 눈에 익다.
김시습 부도를 이곳으로 옮긴 것인가...
2017년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보관하던 김시습 사리를 무량사로 이운하였단다.
2020년 10월 무량사에서는 사리를 봉안하려고 새로운 김시습 부도를 건립하였던 것이고.
이로써 원래 김시습 부도는 새로운 김시습 부도에게 사리를 양보하고 사리 없는 부도가 되었다.
가을은 참 이쁘다.
숨어있던 온갖 유채색이 세상 밖으로 뛰쳐나온다.
주위 큰 나무들 땜시 당간지주가 아담하게 보인다.
만약 당간이 있었다면 큰 나무들과 어깨동무 했을까..
천왕문, 어둠과 빛의 경계에 섰다.
나는 이제 불국(佛國)으로 들어간다.
불국에는 네 명의 입국심사관이 있다.
나는 북방다문천왕에게 여권을 제시했다.
불국의 이미그레이션 얼굴 또한 딱딱하기 그지없다.
나는 안다.
세상 모든 이미그레이션의 얼굴 표정이 왜 그런지..
극락전, 어찌 극락이 따로 있겠나..
만약 극락이 있다면, 분명 푸른 가을하늘의 모습일거다.
사찰건축에서 이 자리를 참 좋아한다.
풍경 아래 바로 이 자리..
생긴대로 자연스런 덤벙주초.
결 따라 마음대로 갈라진 나무기둥.
쭈삣쭈삣 수없이 앞으로 삐져나오는 살미.
노인의 지팡이처럼 무거운 처마를 받치는 활주.
갈바람에 흔들린 풍경추가 내 가슴을 치면 바로 여기가 극락이다.
1633년 현진 스님의 작품이다.
5m가 넘는 대형부처님의 장중함이 법당 안에 흘러넘친다.
무량(無量),
시간, 공간, 마음, 생명...
유량한 것들이 무량한 척 부딪히며 사는 세상이다.
무량(無量) 앞에서 하나면 어떻고, 열이면 뭣하나..
먼 곳으로부터,
무량사 극락전(보물),
무량사 오층석탑(보물),
무량사 석등(보물)
무량사 전등지주(2566년 보물 지정 예정)
혹시 2566년의 의미를 아실까..
부도밭이란 말이 정겹다.
승탑원, 승탑전보다 고승의 가르침이 더 잘 가꿔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TV설치가 잘 됐다고 고맙다고 하신다.
나는 너무 늦어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며칠 전 어머니 댁을 갔다가 TV가 깜빡이는 걸 알았다.
TV가 13년이나 되었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알았다.
불효자식도 이런 불효자식이 없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통곡하실 일이다.
"여보, 어머니댁에 보일러 놓아드려야겠어요."
어느 보일러CF의 찰진 멘트를 허투루 들었다.
여기에 계시던 사리를 새로운 김시습 부도에게 넘겼다.
여기에 봉안하지 못할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던 것일까..
부산에서 출발할 때 내비의 목적지는 서천이었다.
휴게소에서 쉬는 틈에 내 욕심이 뱀처럼 꿈틀거렸고,
그렇게 나의 목적지는 다른 곳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 욕심의 중심에 성주사지가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왜 갑자기 성주사지에 가고 싶었는지는 나도 모른다.
오육년 전의 기억보다 이삼십년 전의 무뎌진 기억의 편린을 찾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이 주변지역 탑에는 문비를 표현한 석탑이 많다.
열 수 없는 문이 풀 수 없는 자물쇠로 잠겨있다.
나는 어느 생에 자물쇠를 풀고 문을 활짝 열 수 있을까..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금강경의 유명한 구절이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무슨 화두처럼 계속 들고 있다.
낭혜화상 무염과 더불어 최치원이 생각난다.
최치원의 사산비문 중 하나.
최치원과 나는 아주 인연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인터넷도 없던 대학시절, 최치원의 토황소격문 해석에 친구들과 땀을 삘삘 흘렸었다.
지금은 땅 속 귀신들도 황소 너를 죽이려고 논의했다는 내용 정도만 간신히 기억의 끈을 붙들고 있을 뿐이지만.
또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이 해운 최치원의 자를 딴 해운대구이다.ㅎ
1694년 조성된 제화갈라보살로 추정한단다.
상호와 두 손만 느낌이 달라서 스님을 찾아 여쭈었다.
이 분이 맞으시단다.
돌아와서 다시 봬도 첫 느낌은 달라지지 않는다.
원래도 없던 안목이 더 없어지는 느낌이다.
1869년에 화승 영식이 조성한 산신도다.
영식필 산신도는 백운사본, 장곡사본, 두 점이 있다
호랑이를 반려동물로 키우는 산신의 포스가 대단하다.
요즘은 작은호랑이(반려묘)를 곁에 두는 젊은 여산신이 많은 세상이다.
상륜부가 특이하다.
나름의 해석은 있지만, 듣는 이 없는 노래는 다음으로 미룬다.
나무 속의 부처가 세상에 나투시면 목불
바위 속의 부처가 세상에 나투시면 석불, 마애불
불 속의 부처가 세상에 나투시면 철불, 금동불
조만간 우리는 메타버스 속의 홀로그램불을 볼 것이다.
'보령 금강암 석불좌상 연구'라는 논문이 있다.
우리 카페 흔들리는 별 님께서 쓰신 논문이다.
흔별 님께서는 얼마 전에 '붓끝에서 보살은 태어나고'라는 책도 내셨다.
금강암과 석불의 조성사실을 기록한 비석의 일부이다.
금강암은 1412년 무학대사의 제자 영암스님이 태종의 후비 권씨의 원당으로 건립하였단다.
노란 쌀밭에 바람이 분다.
가을의 어깨에 기대어 한참을 멍때린다.
문득 켄로치 감독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아일랜드 독립운동을 그린 영화인데, 아마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을 것이다.
참, 생각이란 놈은 밑도 끝도 없이 꼬리를 문다.
당당한 모습이다.
비신은 새로 세워서 글씨가 없다.
귀부와 이수의 조형미만으로도 보통 고승이 아닐 것이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한 눈에 봐도 이수에 용이 많다.
그냥 있을 수 없지, 어디 한 번 용을 찾아볼까나..
네 면을 돌고 돌고 또 돌았다.
여덟 용은 쉽게 찾았고 한 용은 쉽지 않았다.
모두 아홉 용이다.
구룡이니, 청자구룡정병과 구룡욕불이 생각난다.
도자기를 공부하면서 간절히 보고 싶었던 작품이 있었다.
10년 전 첫 인연 때의 그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개인적으로 세계 최고 도자기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드디어 서천에 왔다.
오늘 안으로 무조건 서천에 입성하기로 다짐했었다.
이번에 서천 답사 못하면 나는 사람도 아니라는 각오로.
나는 성북리 오층석탑을 처음 본다.
나는 다만 비인 오층석탑을 서너번 보았을 뿐이다.
내 마음도 모르고 땅거미가 점점 사방으로 퍼진다.
야속한 땅거미조차 금방 사라지고 어둠이 짙어졌다.
어둠 속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 탑과 한참을 마주한다.
긴 이별, 짧은 만남, 희미한 손짓으로 또 이별을 알린다.
대숲을 좋아한다.
오죽하면 카카오 아이디가 대숲일까..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 소리까지, 완벽한 아침이다.
멧돼지의 놀이터인가, 땅이 울퉁불퉁하다.
고요한 아침, 나와 석탑 위로 안개가 조용히 내린다.
문비의 형태가 특이하다.
아침해는 안개이불 사이로 덜깬 얼굴을 내비치고,
황금들녘은 안개이불 깊게 덮고 잠투정을 부린다.
인적이 드문 옛님을 찾을때면 거미줄을 많이 발견한다.
이 놈들이 친 것인가..
몇 번의 아침을 맞이했고,
몇 명의 인연을 만났을까..
텅 빈 속을 다 보여줄 수 있다는 건,
욕심도 없고 허세도 없기 때문이겠지..
탑 꼭대기에서 무얼 하시는걸까..
탑 속에만 계시는 게 갑갑하셨던 걸까..
잠시 어지러운 속세 구경을 하시려는 걸까..
차도 사람도 모두 없어진 적멸의 아침.
잠시 뒤 세상은 또다시 셀 수 없는 번뇌로 가득하겠지..
어쩌면 나는 번뇌를 벗어나려 길을 떠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살펴보니, 소소한 재미가 많은 석탑이다.
빙빙 돌았고 아래위를 몇 번 훑었는지 모른다.
사마귀 어르신, 아침운동 중이시다.
운동하면 역시 뭐니뭐니해도 꺼꾸리지.
태봉산 아래, 작은 마을이 있다.
그 마을 한 켠에 선조대왕 태실비가 자리한다.
태봉산 정상의 선조대왕 태실지에는 귀부 파편도 있다는데, 바쁨을 핑계로 찾아보지 않았다.
선조대왕 태실비는 두 기가 있다.
여기와 부여 오덕사 경내.
이곳 태실비는 선조 3년(1570년)에 세워진 태실가봉비(태주가 왕이 되는 경우 태실을 격에 맞춰 단장)이다.
희미하지만 '주상전하태실'이라 새겨져 있다.
멀지 않은 곳에 오덕사라는 사찰이 있다.
이곳에 또다른 선조대왕 태실비가 있다.
태실비 앞면에 '선조대왕태실'이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선조라는 묘호로 볼 때, 최소한 선조가 승하한 뒤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태실비는 최초 태실비의 글씨가 마멸이 심해서 영조 23년(1747년) 개건한 비이다.
현재 고양 서삼릉 내에는 조선 왕조의 태실 54기가 모셔져 있다.
원래 태실은 전국 각지의 길지를 택해 조성되었으나, 1929년 일제가 강제로 이안한 것이다.
이런 역사적 아픔이 내 발걸음을 태실지나 태실비에 자주 닿게 한다.
부여 오덕사, 언젠가 꼭 와보고 싶었던 절집이다.
너무 늦게 인연 지었지만 그 인연에 감사한다.
부여 오덕사는 괘불탱을 봉안하고 있다.
길이 약 9m, 폭 약 6m로 1768년(영조 44년)에 조성되었다.
석가, 약사,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한 군도 형식이다.
사실 나는 이런 도상적 특징에는 큰 관심이 없다.
양산 통도사 성보박물관에서는 6개월마다 괘불탱을 교체하여 전시하고 논문자료집을 발간한다.
또한 그 즈음마다 불교미술사학회 학술대회를 연다.
2013년 통도사에서 부여 오덕사 괘불탱을 전시한 적이 있다.
그런데 약간의 문제가 발생했었다.
괘불탱 논문을 작성해줄 연구자를 찾을 수가 없었단다.
오덕사 괘불탱을 그린 화승이 우리나라 불화승 화맥에 거의 등장하지 않았고, 오덕사의 사적기나 관련기록이 거의 없었던 것이 전문연구자들의 고사 이유였단다.
흘러흘러 불상이 주전공인 나의 스승님에게까지 원고 청탁이 들어왔다.
스승님은 이런저런 사정을 들으시고 쾌히 승낙하셨다.
평소 불화 공부도 꾸준히 하셨고, 이미 일본 대덕사 소장 고려 수월관음도를 분석한 '수월관음의 탄생'이란 책도 발간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통도사 괘불탱 논문은 30페이지를 넘지 않는다.
스승님은 주변 이야기 없이 오직 작품 하나로 60페이지를 넘게 쓰셨고, 그 또한 시간에 쫓겨 모두 다루지 못했다고 지금도 아쉬워하신다.
나의 불화 공부의 바이블은 이 논문과 수월관음의 탄생이다.
神이 만든 데칼코마니에 눈길이 저절로 머문다.
목은 이색을 모신 서원이다.
사진 오른쪽 하단에 하마비가 보인다.
나는 100미터 전 하마장에 파킹하고 하마했다.
중국 만리장성과 일본 동대사에서도 한글 낙서를 본 나이건만, 여전히 절로 눈쌀이 찌푸려진다.
500년 느티나무 두 그루가 금강역사처럼 굳건히 사찰을 수호하고 있다.
1619년 수연 스님이 조각한 작품이다.
세 분 모두 강건한 느낌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사진촬영금지라는 안내판이 못처럼 가슴에 박힌다.
어느 절집에선가 이런 문구를 본 적이 있다.
우리 부처님 이쁘게 찍어서 많이 알려주세요~
한산 이씨 시조묘역 바로 옆에 계신다.
1층 탑신 남면에, 991년(고려 성종) 한산 지방의 호족이 나라를 위해 조탑했다는 기록이 있단다.
육안으로 잘 보이지도 않고, 보여도 읽을 수도 없는 까막눈이지만 그래도 살펴본다.
답사 계획은 여기까지다.
이제 그 유명한 한산소곡주만 사가지고 귀가하면 된다.
하지만 뭔가 못내 아쉽다.
그곳에 가본 지도 몇 년 되었지 싶다.
내비를 찍어보니 25분 거리다.
그런데 정확히 집하고 반대방향이다.
내가 그럼 그렇지, 결국 여기로 오고 말았다.
마음 변하기 전에 급히 오다가 한산소곡주를 사지 못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휴람샘, 혜문샘은 한산소곡주를 맛보시려다 말았다.
소나무 일산을 쓰고 계신 이 분을 간절히 보고 싶었다.
올해 5월 작은 아들 입대 때 뵌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의 잔영이 남아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원통보전 정면 문 앞에 아기고무신이 놓여 있다.
따뜻한 어느 날에는 이쁜 꽃들이 피었을 것이다.
이번 답사길 무량사에서도 법당 정면 문으로 벌컥 출입하는 사람을 보았다.
출입금지라는 칼보다 아기고무신 꽃으로 가르침을 주려는 이쁜 마음을 가진 이는 누구일까..
내가 왜 산을 오르고 있는거지..
갑자기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온다.
나는 분명 대조사를 끝으로 집으로 향했어야 하는데..
올라가는 길, 내려오는 사람은 죄다 커플이다.
노재학 불교사진 전문작가의 사진이다.
노재학 작가는 '한국 산사의 단청세계' , '한국의 단청' 등을 저술했고, 불교신문 등에도 글을 연재하셨다.
서울, 부산, 통도사 등에서 작품전도 많이 하셨고..
나와는 같은 스승님 아래에서 배웠던 도반이다.
노재학 작가가 십년 전쯤 단톡방에 올린 이 사진이 아직도 내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죄다 커플이다.
예전 서동요라는 드라마가 있었나보다.
서동과 선화공주가 여기서 데이트를 했다나 어쨌다나..
이제는 산에서도 내려가고 집으로도 내려가야 한다.
또다시 집과는 반대방향으로 올라왔다.
이러다 서울까지 가는 건 아니겠지..
진짜 여기가 마지막이다.
답사지에서 처음으로 사람을 만났다(사진 오른쪽)
석탑을 보시면서 무언가를 계속 메모하신다.
탑을 한 바퀴 빙 둘러보고 오니 말씀을 건네신다.
답사객이라고 인사 드리니 본인도 답사객이라신다.
15년 전부터 석탑만 순례하고 계시단다.
특히 장하리 탑을 좋아하셔서 가끔 여기를 찾으신단다.
그 분께서도 여기에서 사람을 만나기는 처음이라신다.
우리 카페를 소개해 드리고 좋은 석탑 자료를 많이 참고하시라고 안내해 드렸다.
따로 성함을 여쭈어보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다시 만날 인연 같았기 때문이다.
귀가하는 길, 다시 말의 귀를 만났다.
말의 귀가 묻는다.
"행복하냐?"
내가 답한다.
"말해 무엇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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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0. 15. ~ 16.
길 떠나는 답사객, 무애
첫댓글 서천 좋은곳 많이 다니셨네요 부여 서천 보령 볼곳 너무 많아요 😂
다녀도 다녀도 끝이 없는 것이 답사길인 것 같습니다.
김박사님도 최근 경주 밖 나들이가 잦으신 것 같던데요..
우와..답사길이 선~~하게 보입니다. 감성이 세상에 가득하네요..조만간 같이 한 번 갑시다.
노마드 님께서도 얼마 전에 이 지역 답사를 다녀 오셨죠?
덕분에 사전 예습하고 갔습니다. 고맙습니다.
미답처임니다
잘 보았습니다
저도 한번 도전 하겠습니다
뵈어도 뵈어도 끝이 없는 화수분 같은 것이 옛님인 것 같습니다.
챤스님께서도 어느 좋은 날, 좋은 인연 지으시기 바랍니다.
그 동네는 일년에 한두번씩 가는데도 빠진 곳이 있네요ㅜㅜ
덕분에 수월하게 리뷰합니다
오덕사 괘불 논문은 절판되어 구할 수가 없더만요
답사객들은 일부러 한둘은 흘리고 오잖아요.
다음에 또 찾을 이유 만드려고..ㅎ
오덕사 괘불탱 내용 보완하고, 다른 몇 작품 더 분석해서 괘불탱 책을 내시려는 계획은 있으시더라구요.
원체 관심분야가 많으신 분이라 출간을 기약할 수 없다는 게 아쉽지만...
마음이 편안해 지는
수채화 같은 답사기
잘봤습니다
저도
혼자
훌쩍
떠나고 싶네요~
마애 님께서도 수채화 같은 풍경에 풍덩 빠져보셔야죠.
계획하고 떠나지 말고, 떠나고 계획하고 걱정하시죠~ㅎ
환상적입니다.
슬쩍 화두만 던져놓고 풀어내지 않은 게 열은 넘는 것 같은데 하나하나 풀어주세요~~
정연당부도 상륜부 비롯하여~~
늘 과찬의 말씀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하는 말은 우리 카페에서는 히메님만 조금 알아들으실 거에요.
제가 아직 내공을 더 쌓아야 이해가능한 설명이 될 것 같습니다.
사진도 정말 좋고
멋져요!
신이 주신 축복같은 밥상에 숟가락만ㅎ, 젓가락도ㅋ
無碍!
백운사 2014년
@선과
@선과
비록 아주 느린 한 걸음씩이지만 법명에 다가가는 느낌이 좋습니다.
@선과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었네요.
하체를 보니 개금한 것 같지는 않았는데, 상호와 손은 완전히 화장을 하셨군요.
조화롭지 못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무애(無碍)님 필명만큼이나 막힘이나 거침이 없는 글... 오늘도 감탄하며 보았습니다.
아이구, 하늘사랑님, 부끄럽습니다.
예전에는 문화유산만 봤다면, 이제는 조금씩 인생과 자연이 보이나 봅니다.
작가하셔도 될 것 같아요~ 글과 사진에 내공이 녹아들어 아침 출근길도 멈추고 단숨에 읽었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 재미있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도 답사기를 쓰면서 그 여운에 행복합니다.
근데, 드렁큰푸우 님은 요즘 답사 안다니시남? 아직 육아?
@무애 아이가 아직 어려서 육아하느라 답사는 ㅠㅠ
그리고 주말마다 언어치료와 상담이 있어서요. 요즘은 중박과 불박 가는게 삶의 낙이네요 ㅎㅎ
좋은 글, 좋은 사진... 참으로 멋진 답사기입니다.
함께 하지 못한 것이 아쉬울 정도로.... 잘 보았습니다. ^^
좋게 읽어주져서 감사합니다.
조금 천천히 다니니 못봤던 것들을 비로소 봅니다.
예전 미친듯이 전투답사를 할 때보다 답사길이 훨씬 행복해졌습니다.
사진도 좋은데... 글이 너무 좋아서... 읽고 또 읽고... 이런 글들로 책 하나 내어주시면 1호 독자가 될 터인데...
너무너무 좋아요!!
또 써주세요~~~^^
어라, 부끄럽게시리 아란두 님까지 왜 이러실까..
글은 오히려 그대가 맛깔나게 잘 쓰시면서~
가끔 아주 가끔 답사의 여운을 끝까지 즐기고 싶을 때 써볼게요~
말귀와 나누는 문답이 이래 좋은데,
쇠귀와 나누는 문답은 어떨까?
소의 귀는 좀 거시기할 수 있습니다.
우이독경이라..
백운암에 승탑군이 있었네요. 늘 빠뜨리는곳이 있어요.
오랜만에 옛 논문을 떠올리게 합니다. 보령 금강암 주지스님은 잘 계시던가요?
불상 조성 비편이 보령문화원 수장고에 있었는데 사찰로 옮겨왔나 봅니다.
잊었던 답사 감성이 몽실몽실 피어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비편은 최근에 옮겨온 것이군요.
연구자들의 수고 덕분에 늘 편안히 공부하게 됩니다.
고맙습니다.
한동안 답사길에 따라나서지 못하게된건 친구가 동행하지 못하게 되면서부터 인데 그로인해 옛님카페도 좀 뜸했었답니다
일년도 넘은 오늘에야 무애님이 우리동네 다녀가신걸 알았다는. . . .
어쨋거나 나모르게 다녀가신건 무효인건 아시죠?
아니그래도 소헌님 지역이라 잘 지내시나 싶었었습니다.
부산에서는 충남 서쪽으로 가기가 쉽지 않아 한번 가면 여러날을 답사하는데 앞전에는 가벼이 다녔네요.
담에는 사전신고 꼭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