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은자의 제주바다를 건넌 예술가들-18]
언제 누가 그렸나…제주 미술사 과제
제주 내왓당 무신도
지붕있는 신당에 모셔진 신의 초상, 제주만의 특색 담겨
북방채색화 느낌…화승(火僧)이나 중국 유배인 작품 추측
복식 등에 집단 무(巫)의식 반영·뱀의 형상 등장 등 ‘매력’
내왓당 무신도의 제작 연대
부처나 보살을 그린 그림을 불화(佛畵)라고 한다. 무신(巫神)을 그린 그림을 무신도(巫神圖)라 칭하는데 무화(巫畵) 속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유교의 종교탄압은 신당을 파괴하고 무당을 농민에 귀속시켰다. 신당의 파괴는 무신도의 파괴와 같았다. 돌과 나무로 만든 무신상(巫神像)은 야외에서도 견딜 수 있지만, 종이와 비단에 그려진 무신도는 지붕이 있는 신당 없이는 보존할 방법이 있을 리 만무했다. 불교의 탱화가 오늘날까지 보물급 문화재로 전해 올 수 있었던 것은 사찰(寺刹)이 깊은 산속에 있었고 그 곳에 이슬과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전당(殿堂)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교의 계회도(契會圖)나 진찬도(進饌圖), 영정(影幀), 의궤도(儀軌圖) 등은 좌목이나 화제(畵題)가 있고 제작자의 낙관(落款)이 있기 때문에 제작 연대와 참석자, 초상화 주인, 제작자를 훤히 알 수가 있다. 불화(佛畵) 또한 시주자(施主者)와 금어(金魚, 畵僧), 제작연대를 명백히 알 수 있지만 유독 무신도만은 신명(神名)을 빼고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내왓당 무신도가 거론되는 기록은 「세조실록(世祖實錄)」이다. 「세조실록」에 의하면 제주 내왓당신 화상(川外堂神畵像)은 이미 세조 12년 (1466) 이전에 그려져 내왓당에 모시고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1702년 제주목사 이형상에 의해 신당과 무구(巫具), 무복(巫服), 신상, 무신도 등 일체가 불태워지면서 이 무신도의 존재가 궁금해진다. 현재 이 내왓당 무신도의 제작 연대에 대해서는 두 가지 가설이 있다. 민속학자 현용준은 1466년 이전에 그려진 무신도가 전해오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고, 미술평론가 김유정은 1702년에 이형상의 무교 탄압 시 불타버린 것을 1703년에 다시 그려진 것이 현재의 무신도라고 주장한다. 아무튼 내왓당 무신도의 제작 시기가 15세기 인지, 아니면 18세기에 제작된 것인지는 앞으로 풀어야 할 미술사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염원이 만들어낸 신(神)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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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선면 하천리 본향당. 아카마츠 지죠(赤松智城)와 아키바 다카시(秋葉 隆), 1938년
일제 강점기 일본 민족학자 아카마츠 지죠(赤松智城·1889~1960)와 아키바 다카시(秋葉 隆·1888~1954)가 찍은 1938년의 사진 가운데 신당의 모습이 몇 장 전해온다. 그 중에 흥미로운 사진이 한 장 있다. 수건을 쓴 예펜심방(女巫)이 초가집을 배경으로 서 있는 사진이다. 사진의 장소는 제주도 표선면 하천리 본향당이다. 하늘이 보이고 돌담으로만 둘러진 지금의 본향당과는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주사람들은 1702년의 유교를 대변했던 제주목사 이형상의 무교 탄압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제주의 절간 5곳과 신당 129곳을 불사르고 무구(巫具)와 신의(神衣), 불상(佛像)을 훼철하고, 여염집에 있는 신단(神壇)을 파괴하여 무당 수백 명을 농사일에 전념토록 한 사건이다. 물론 이 시기를 전후하여 전국적으로 무교 탄압이 행해졌다.
제주에 현재 남아있는 무신도는 내왓당 무신도 10신위이다. 내왓당 무신도는 국가지정중요민속자료 제240호로 제주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원래 열두 폭으로 그려졌으나 두 폭이 소실되어 10폭 만이 전해온다. 내왓당은 제주시 용담동 한내(漢川) 가에 있었던 신당으로 이 무신도가 모셔져 있었다. 민속학자 현용준에 의하면 당시 내왓당 메인 심방은 고임생이었다. 고임생은 1882년 고종 때 내왓당이 훼철되자 자신의 집으로 이 무신도를 옮겨 보관했다. 그 후 고임생 심방이 죽자 그의 처가 제주시 산지천 위쪽, 속칭 남수각 인근 굴속에 이 무신도와 무구를 옮겨놓고 살았다. 그녀가 죽은 뒤 그의 딸이 어머니를 장사 지내고 무신도와 무구는 굴 천장 위 바위틈에 놓아두었는데 이것을 1963년에 제주대학교박물관으로 옮겨와 보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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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석위, 38x62cm, 지본 진채, 제주대학교박물관소장
내왓당 10신위의 신명은 제석위(帝釋位·제석천왕마누라), 본궁위(本宮位·본궁전), 원망위(怨望位·어모라 원망님), 수령위(水靈位·수랑상태자마누라), 천자위(天子位·천자마누라), 감찰위(監察位·새금상 감찰지방관 한집마누라), 상사위(相思位·상대왕), 중전위(中殿位·중전대부인), 상군위(上軍位·정절상군농), 홍아위(紅兒位·지홍이 아기씨)이다. 구송(口誦)된 당본풀이에는 내외불도마누라라는 신명(神名)이 보이나 이 신명의 그림은 전해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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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아위, 38x62cm, 지본 진채, 제주대학교박물관소장
진채화(眞彩畵)로 그려진 제주 내왓당 무신도의 특징을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먼저 복식의 특징이다. 무신도의 복식은 제석위와 홍아위를 빼고 8신위가 왕족이나 양반 관료의 복장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에서 억압받고 있는 민중들의 집단 무의식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양반 관료가 되고 싶은 민중들의 염원이 만들어 낸 신의 모습이라는 점이다.
둘째, 내왓당 무신도에는 여성신은 4명, 남성신은 6명으로 남성신이 많다. 타 지역은 남무(男巫)에 비해 여무(女巫)가 많은 대신 제주도는 예펜심방(女巫)에 비해 나이 심방(男巫)이 많고 큰 심방도 남무가 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던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셋째, 내왓당 무신도에는 남녀신 8명이 부채를 들고 있다. 제주의 심방들이 부채를 무구로 사용하지 않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제주에는 부채가 매우 귀했다. 부채가 귀한 변방이라는 것, 부채가 고위 양반 관료들의 전용이라는 사실은 제주의 심방들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현실에서는 부채를 사용할 수 없었고, 단지 부채를 그림으로 그려 신의 위엄을 표현했던 것이다.
넷째, 뱀의 형상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미술평론가 김유정은 이를 내왓당 무신도의 가장 매력있는 부분이라고 한다. 특히 상사위(相思位)인 경우 두 마리 뱀이 다리에서 몸에 감기면서 가슴으로 연결되었다고 한다. 천자위, 홍아위의 머리에 나타나는 뱀의 형상은 뱀을 신앙하는 제주의 풍토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다섯째, 부분적으로 금박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금은 벽사(辟邪)를 상징하는데 남신은 부채와 모자에, 여신인 경우 부채와 가슴에 사각형의 작은 금박(金箔)을 붙였다. 이는 악귀를 물리치려는 염력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주만의 특징 담아내
유추해보건대 조선시대 진채를 그릴 수 있는 능력은 민간화공에게는 없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제주의 회화식 지도, 문자도를 그린 것을 보면 그것들은 담채화 기법으로 그려졌고, 필력 또한 내왓당 무신도와는 크게 다르다. 따라서 진채와 금박을 다룰 줄 아는 화공(畵工)은 불화(佛畵)를 그리는 화승(畵僧)이었으므로 내왓당 무신도는 이 화승에 의해 그려졌을 가능성이 크다. 금박 기법은 금니(金尼)에 부처님이나 보살의 일대기를 그렸던 화승들이 아니면 다루기가 어려웠다.
또 하나 고려조나 조선조에 제주에 유배 온 중국의 왕족이나 수행원들, 혹은 타 지역 학선과 같은 스님이 그렸을 가능성이 있다. 몽고인들에게 항복한 운남의 왕족들이 가락지나 식기 등, 금·은 제품을 유배 올 때 가져왔기 때문에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제주에는 금·은기가 있었다. 이들 유배인 가운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이가 있어 제주의 무신도를 그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제주 내왓당 무신도에 북방 채색화의 느낌이 배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타 지역의 무신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선묘(線描), 손 표현의 독보적인 창의성, 얼굴 형태, 복식, 의복에 채도(彩度)를 달리하며 무늬를 그려 넣는 기법, 부분 금박 기법 등 진채를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타 지역 무신도와는 격이 다르고 풍기는 분위기 또한 예사롭지가 않다. 또한 10신위 모두 단독 신의 초상화라는 점 또한 이색적이며, 북방 고대 회화(古代 畵畵)의 고졸미와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 다시 말해 주대종소(主大從小)의 정면성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은 제주 무신도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제주대학교박물관 특별연구원, 이중섭미술관 큐레이터 - 2009년 11월 02일 <제민일보 >
첫댓글 좋은자료감사 잘읽었습니다.
그래도 읽어주는 茶咸이 있기에...
언제나 감사하고 있다네.
이런 연재물을 올려보는 건 역사기록물이 빈곤하고
겉으로 드러난 인걸이 배고픈 고장이 제주라 생각해서
나름 공부한답시고 올려보고 있다네...^^
인도 혹은 발리처럼 제주의 무당들이 얼마나훌륭한 관광 혹은 무형의 문화임을 깨닫고 인식 했을쯤에는 이미 많은것을 잃어버린때일겁니다만,어쩔수없겠지요 그렇게 제주는 살아갈거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