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연의>의 작자인 나관중은 위연의 얼굴을 잘 익은 대추와 같고, 눈은 낭성(朗星:밝은별)과 같은 인물이며, 후두부에 반골(反骨)이 돌출되어 있어 반역자의 관상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또한 손권의 입을 빌어 '용기는 충분하지만 심근이 바르지 않다. 공명이 죽은 후에는 반드시 화근이 될 것이다'라고 표현되어지는 인물이다.
위연은 유비를 따라 촉에 들어가 장비를 제치고 한중군태수에 임명되었다. 제갈량의 북정 때는 장안 급습(자오곡 계책)을 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제갈량이 죽은 뒤 부장관인 양의와 다투던 중 마대에게 살해당했다.
현대에 와서도 위연의 죽음이 억울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1. 위연의 Image
위연하면 우리가 흔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반골의 상'을 지녔다고 말을 한 '신이 내린 지혜의 소유자(누군가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 것임)' 공명 제갈량의 평가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우리는 위연이 승승장구하고 승리를 취하여 촉국을 강성하게 만들어 가는 것을 보면서 '언제 모반할까?'라고 그 속내를 들여다보고 싶은 눈으로 위연의 장면을 째려보며, 오호대장군이 죽고 더 이상 장수 될 만한 이가 없어서 제갈량이 위연을 쓸 때 '제갈량이니까 위연을 쓸 수 있다' '제갈량이 죽으면 위연이 모반할 거야'라고 나름대로 평가 - 하지만 제갈량의 '반골의 상'이라는 평가에 의한 것임 -를 내리고는 위연의 행적을 순수하게 뒤쫓아 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 모반을 할 것인가?'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서는 위연을 의심어린 눈길로 바라보는 것이다.
위연은 정말로 관상학적으로 '반골의 상'을 타고난 '어쩔 수 없이' '반역'을 할 수 밖에 없게 타고난 '무장'인가? 거기다 더하여 나관중까지. 나관중은 촉을 위한 마지막 충정으로 '수명을 연장하려는 기도'를 드리는 '제갈량'의 마지막 바람마저도 '위연'이 등장하여 '촛불'을 꺼버림으로 위연에게 '촉국의 반골'이미지를 각인시켰는가?
2. 서로 다른 공명과 문장
기본적으로 공명과 문장. 이 둘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인 셈이다. '받기만 해도 미운 사람'이 있는데 공명에게 있어서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위연이었던 셈이다. 왜 공명은 위연을 그토록 싫어하고 배척하였는가? 왜 능력은 인정하면서도 위연을 마지막에 가서까지도 그를 죽여야 했을까?
공명의 경우 '계산하고 계산하여' 모실 사람을 스스로 구한 경우이다. 즉, 함부로 나대지 않고 많은 계산을 하여 스스로 모실 주군인 '유비'를 고른 인물인 셈이다. 물론 유비에 출사하면서 '항우에게 출사한 범증의 고사를 더 이상 욕할 수 없게 되었다'라고 되뇌이면서 '유비'가 천하를 쟁취 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출사'하여 '충성'을 받친 것은 '유비' 이상의 '군주'자질을 갖춘 이가 공명 자신에게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공명은 스스로의 선택을 함에 있어서 가볍지 않게, 나대지 않으면서, 유교적 '忠'의 논리를 따르면서 법가적 '律'을 시행해 나아가는 스스로의 원칙을 지켜나아가는 인물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위연의 경우는 달랐다. 이 다르다는 표현은 '공명'과 다르다는 것이다. 대개 '무장'이라 불리우는 '병사'를 부리고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은 '세상을 보는 안목'을 애초에 기대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기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네들은 '義'라는 것을 위해 - 하지만 그 義라는 것 역시도 자신의 주관적 판단에 따른다 - 자신이 모실 주군을 모신다. 즉, 이러한 군신관계는 '끈끈한 인연'으로 이어져 '한번 주군으로 모시면 평생을 바친다'는 '무장' 특유의 '충절론'으로 이어져 나아간다. 바로 이러한 점이 '모사'가 '무장'보다 '변절자'가 많은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각설하고.
유비가 양양에 머무를 때 위연은 유비를 모시려고 하였다. 성문을 열어 유비를 받아들이려 하지만 유비는 외면하고 돌아가고, 그로인해 상황이 여의치 않자 위연은 '한현'에게 목숨을 의탁하게 된다. 그리고 유비와 한현이 싸울 때 황충을 죽이려 드는 한현을 죽이고 그 성을 유비에게 바친다. 그러하니 위연에게서도 조운과 같은 '유비'를 향한 일편단심이 있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아니, 위연은 조운과 같은 부류로 취급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장사의 지터가 그러한가? 장사를 획득하며 유비가 얻은 두 인물, 황충과 위연은 두 인물에게서 지탄을 받게 되는데, 바로 관우의 황충 배제론과 공명의 위연 반골론이다. 여기서는 후자를 살피도록 하자.
왜 공명은 조운과 같은 유비를 향한 '일편단심' 민들레인 '위연'을 '반골'이라 하는가? 뭐, 공명이 얼마나 '관상학'을 공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위연에게 '반골상'이 있는지 없는지 한눈에 파악하고 볼 정도의 인물은 아니었으리라 본다. 그런데 공명은 위연을 보자마자 '죽여야 합니다'고 말한다. 왜? '죽여야'만 했을까? 그리고 그렇게 말한 의도는 무엇인가?
3. 위연을 죽이기 위한 공명의 얄팍한 술수
공명은 위연을 죽여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첫째. 주군을 죽인 점
둘째. 그 땅을 바친 점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죽여야 한단다. 하지만 '군주가 군주답지 못할 때 신하된 이는 그 군주를 폐위할 수 있다'라는 맹자의 '역성혁명'론에 비추어 보면 그리 큰 문제가 될 것도 아니거니와 난세에 '가히 있을 만한 일'이 아닌가? 게다가 '위연'이라는 인물로 인하여 큰 무리없이 '장사성'을 차지한 유비 패거리로서는 '위연'이 더없이 고마운 존재여야 한다.
만약 한발 더 물러서서 첫째 조건을 용서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 이유만으로 위연을 내치거나 죽일 수는 있지만, 공명이 내건 두 번째 조건은 그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참으로 어이없는 조건, 관우의 조조 항복론 3가지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우스운 조건이었다. 즉, 한가지 이유만으로 위연을 죽이기 그러하니 - 게다가 그 이유는 난세에 욕을 먹을 수는 있을지언정 목숨을 내놓아야할 잘못은 아니다. 게다가 투항한 항장이 아닌가 - 땅을 바친 것까지도 '죽'어야할 대상에 포함시킨다. 하지만 이는 공명의 음해에 불과하다.
장송과 법정은 '위연'과 같은 첫째의 잘못을 범하지는 않았지만 실질적으로 두 번째의 행위는 하지 않았는가? 만에 하나 장송이 살았다면 장송 역시도 법정과 같은 대우를 받고 촉에서 떵떵거리며 살았을 것은 두말할 이유도 없다. 즉, 장송과 법정, 맹달류의 인간은 '주군'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죽인'것과 진배없으며, '익주'라는 땅을 바친 것은 '위연'과 하등의 다를 바가 없는 셈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 공명은 '법정'과 '맹달'은 우대하여 써주고 - 맹달의 경우 배반했다가 다시 돌아온다 하자 그를 받아들이려 하였다. 이는 상황이 그렇다 하더라도 그때의 상황과 위연의 상황과 비교해 보았을 때 이해할 수 없는 처사이다 - '위연'의 경우는 그 '땅을 바친 공적'이 '죄'가 되어 죽음의 잘못이 되어버린 것이다. 만약 바친 땅인 '익주'와 '장사성'의 땅크기가 문제라면 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 설마 공명이 그렇게까지 치사할까?
4. 왜 싫은가?
그럼 왜 싫어했는가? 같은 유비를 향한 '일편단심 민들레'인 조운은 사랑하면서, 위연은 싫어하였고, 위연과 크게 다를바 없는 법정, 맹달은 크게 써주고 배신까지 용서하지만 위연에게 있어서 그것은 죽을 죄가 된다. 왜 이토록 싫어했을까? '배신' 단순한 '배신'때문이었을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위연이 '반골상'이라는 이유로 '촉'을 상대로 '반국가주의적 행동'을 보여준 적이 있는가? 그것은 없다. 죽을 때 '반란'이라 명했지만 '위연'은 촉 내에서 발생되어진 '문 - 양의로 대표되는 - '과 '무 - 위연으로 대표되는 - '의 두 파벌다툼의 희생자에 불과한 셈이다. 다만 '촉'국의 위대한 '승상'이신 '공명'님의 '반골상'이라는 발언으로 인하여 '위연'은 언제나 '촉'나라의 수구 기득권 세력인 유비 패거리들로부터 '배척'의 대상이 되어왔었고 언제나 그의 발언은 '무시'되어왔다.
즉, 위연은 촉국의 다른 장수들처럼 자신의 발언으로 무엇을 해본적도 없는 단지 시키면 시키는 대로나 하는 '꼭둑각시 인형 무장'에 불과했던 것이다. 위연을 촉나라의 '꼭둑각시'로 만든 것은 다를바 없이 공명이다. 그래도 위연은 그 '불만'을 안으로 삭이면서 '언젠가는 알아주겠지'하는 인내하는 심정으로 그러한 '배척'과 '무시'를 견뎌왔던 셈이다. 실질적으로 진정으로 '반골상'을 지니고 있던 이라면 촉을 야반도주하여 오나 위로 갔을 것이나, 위연은 그러하지 않았다. 낙인찍인 '반골'이라는 평가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인물인 셈이다.
5. 이해할 수 없는 위연 혐오증
하지만 그러한 위연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다. 공명은 죽으면서도 끝까지 위연을 배척했다. 그리고 그를 죽음으로 모는 시나리오를 작성한다. 국방력에 있어서 '위연' 다음가는 인재는 없었다. 강유나 마대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위연'정도의 '관록'을 지닌 '산전수전'을 다 겪은 유능한 장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명은 그를 배제시킨다. 위연의 평생 촉을 향한 노력은 그렇게 버림받았다. 누구나 분노하기 마련이고, 그렇게 분노한 위연을 '마대'가 살살 꼬드긴다. 그리고 유선에게 정당한 보상을 요구하기 위해 성도로 가다가 '문'으로 대표되는 '양의'와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정당한 보상은 커녕 어이없는 '죽음'을 그것도 자신을 꼬드긴 '마대'에게 죽게된다.
실질적인 잘못은 '공명'에게, 그리고 단지 화를 내고 그에 대해서 분개하는 위연을 '행동'하게끔 꼬드긴 공명의 쫄따구 '마대'에게 있다. 왜 이것이 위연의 독단적인 혼자만의 행보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것저것 다 따져보아도 '공명'의 위연 반골론은 아무리 헤짚고 뒤집어 보아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단지 '싫으니까 싫어'라는 이유와 진배 없다. 이러한 면을 보면 '공명도 인간이다'라는 인간적인 정서감을 느끼게 해서 '반공명'인 나그네가 '중도 공명'으로 돌아설 수도 있겠지만 인간을 대함에 있어서 일관적으로 통용되는 원칙이 A에게서는 통용되는데 B에게서는 통용이 되지 않을 때 그것은 '인간다움'이 아니라 시정잡배가 저자 거리에서 단지 어깨를 부딪혔다는 이유로 폭력을 휘두르는 것과 다를바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촉의 승상이라는 이가, 그것도 법가적 지배질서로 익주를 평정시킨 사람이 부하를 거느림에 일관적 질서없이 자신의 제멋대로의 관점으로 대한다면 이는 부하들로부터 '절대적 신뢰'는 받지 못하는 것이다. 공명의 이러한 무원칙적인 인간관계론은 '위연'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마속'을 가정에 배치하는가 하면, '읍참마속'이라는 이유를 들어 부하를 내치는 등의 어떠한 일관성 없는 '감상적' 부하관리와 그 톱니의 아귀가 맞아 돌아간다.
여기서 퀴즈 하나. 공명이 인간관계를 관리함에 주로 쓴 작전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바로 인간의 감정적 감상을 자극하는 '격분계'였다.
6. 뱀다리
한마디만 덧붙여 보자. 위연에게서 공명은 혹 또다른 '공명'을 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즉, 패거리 집단에 이질성을 지닌 공명의 등장으로 인하여 '주군'의 사랑을 받으면서 '패거리'로부터 배척당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을 다독이는 모습은 곧 '일편단심' 유비를 좇아서 유비 패거리에 들어온 '이질성'의 무장 위연의 '일편단심'에 반해서 유비의 사랑을 받아 '공명'과 같이 패거리의 배척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면 '위연'은 문의 '공명'에 버금가는 빼어난 '무'의 대표자가 되었을 것이고, 이는 곧 '촉'에 있어서 절대적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권력주의자' 공명과 더불어 쌍두 체제를 구축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공명에게있어서 하늘아래 두 개의 태양이 존재하는 셈이었고, 공명은 위연을 그런 이유로 배척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유비'에게 위연은 반골상이다라고 인식시키고 유비로 하여금 위연을 믿지 못하게 만든 고단수 수법이 아니었을까?
첫댓글 오!! 솔직한 제생각으로도 맞습니다 왜 제갈량이 위연을 싫어할까? 그건 제갈량이 이유없이 싫어한다고는 말못하겠습니다 뭔가가 있었겠죠 마지막 뱀다리에 저는 올인하겠습니다
조조전에서는 위연이 공명을 싫어해요, "공명도 싫고 너도(마속) 싫다."고 말하는데요.
공명이 자신을 싫어하는데 무턱대고 좋아할 수 있나요? 남녀관계도 아니고, 마속은 그런 공명이 아끼던 놈인데 보기 싫었던거죠.
웃기는 것은 위연이 철투구를 쓰고 있어 뒤통수가 보이질 않는데. 제갈양이 '위연의 뒤통수에는 반골의 기질이 있어'라고 말한것이죠 - -;;
ㅋㅋㅋㅋ
프로게이머 강민님 팬?^^;
굿ㅋㅋㅋㅋ 저도갠적으로위연이좋아영
설득력있는 글! 그리고보니 위연이 인간적으로 볼때 불쌍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