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가르마 타듯 명쾌하고
넓고 밝음이 강과 하천을
구분하는 것과 같아 주목”
직지사 모운 진언으로부터
화엄강석 물려받을 정도로
화엄학에 탁월, 대중들 몰려
통도사 등 여러 곳서 강석
설송 함월 호암 연담 비롯한
기라성 같은 제자 다수 배출
벽송사 머물려 사찰도 중창
‘선교겸수’ 중심 도량 만들어
석가모니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목련존자는 신통제일이다. 존자는 신통력을 방편삼아 외도들의 해코지로부터
교단을 보호했다. 당연히 외도들은 목련에게 앙심을 품고 존자를 죽이기 위해 모의했다.
목련은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세 번째는 외도들이 산위에서 던진 돌에 맞아 입적했다.
목련은 신통력으로 죽음을 피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업보로 받아들였다.
불교사에 수행자들이 타의로 입적하거나 곤란을 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대승열반경>의 한역자 담무참(曇無讖, 5세기)은 북량(北凉)의 저거몽손 황제에게 죽임을 당했다.
담무참은 <열반경>의 다른 판본을 구하기 위해 북량을 떠났는데,
황제는 그가 다른 나라로 입국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그를 살해한 것이다.
또 명나라 때의 감산 덕청(山德, 1546~1623)은 평생 두 번의 유배를 겪었다.
덕청과 절친이었던 자백 진가(紫柏眞可, 1543~1603)는 덕청을 옹호했다가 미움을 사게 된데다
황제에게 상소문을 올린 것이 화근이 돼 감옥에 갇혔다. 결국 스님은 고문 후유증으로 입적했다.
또한 간화선을 제창한 대혜 종고(大慧宗苑, 1089~1163)는 16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우리나라 선사들 중에도 고난받은 이들이 많다.
고려 말기 조정에서 나옹 혜근(1320~1376)에게 위압감을 느낀 조정이 그에게 밀양 영원사로 떠나라는
왕명을 내려 유배 가던 도중, 신륵사에서 열반했다.
명종 때의 허응 보우(虛應普雨, 1509~1565)는 제주도 유배지에서 장살당해 입적했다.
목련존자의 말씀대로 “스님들의 업보려니…” 하고 받아들이려니 권력자에 괘씸한 생각이 든다.
조선시대에도 억울하게 입적한 선사가 있다. 선사이자 화엄강사인 환성 지안(喚惺志安, 1664~1729)이다.
선교겸수…침식 잊고 경전연구
환성 지안은 임제종의 선지(禪旨)를 굳건히 주장한 선사로서, 편양파 월담 설제(月潭雪齊, 1632~1704)의 제자이다.
한편 조선후기 화엄과 선(禪)의 일치를 주장한 환성파(喚惺派)의 시조로서 대흥사 13대 종사(宗師) 가운데
6대 선지식이다. 지안은 성이 정(鄭) 씨, 호는 환성(喚惺), 자가 삼낙(三諾)이다.
지안이 대흥사에 머물 때, 부처님께 공양올렸는데 공중에서
스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세 번이나 들려 지안이 세 번 답했다.
이로 인해 자를 ‘삼락’이라 하고 법호를 ‘환성’이라 불렀다.
지안은 춘천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용모가 단정했으며, 15세 때 미지산 용문사로 출가해
상봉 정원(霜峰淨原, 1627~1709)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스님의 골상은 맑고 엄하며(淸嚴), 목소리는 낭랑하고, 말은 간단명료하며, 얼굴빛이 화락하다는 기록이 전한다.
17세 때 금강산에 들어가 화엄학의 대가인 풍담 의심의 직계인 월담 설제에게 법을 받았다.
지안은 법을 받은 이후 침식을 잊고 경전을 연구했다.
이후 지안은 춘천 청평사에서 선(禪)과 교(敎)를 겸비해 수행하다가 크게 깨달음을 얻는다.
1690년 27세 되던 해에 지안은 부휴계 모운 진언(慕雲震言, 벽암각성의 제자)이 직지사에서 법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갔다. 모운은 지안을 보고, 기뻐하며 대중에게 그를 소개하기를,
“나의 사자좌를 이을 사람이 나타났으니, 그에게 법을 들으라”고 하고는 다른 산으로 잠시 옮겨갔다.
이에 지안은 화엄학 강의를 했는데, 이때 모인 대중이 400여명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지안의 강연은 “머리 가르마 타듯 명쾌하고, 넓고 밝음이 강과 하천을 구분하는 것과 같아서
대중들이 활연히 개오하게 되니, 종풍이 크게 드날리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지안의 법문이 조금 다른 점이 있어 의심을 품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던 중 지안이 전라도 낙안 징광사(澄光寺)에 머물고 있을 때, 경전의 여러 주석서가 실린 빈 배가 안착했는데,
주석서들과 지안의 설법을 대조해보고, 지안의 혜안에 모든 이들이 탄복했다고 한다.
이후 지안은 포대 하나를 걸머지고 여러 지역을 행각하였다.
이렇게 행각하는 와중 지리산에 머물 때, 어떤 도인이 나타나 다른 곳으로 옮겨가라며 성화를 부렸다.
그 곳을 떠난 며칠 뒤에 그 절이 화재가 발생해 사찰이 불타버렸다.
또 한 번은 지안이 금강산 정양사(正陽寺)에 머물던 중 큰비가 쏟아져 절을 떠났다.
도중에 한 부잣집에서 유숙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지안은 그 집을 떠나 작은 오두막집에 머물렀다.
그런데 그날 홍수로 인해 정양사와 부잣집이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1725년 62세에 선사가 김제 금산사에서 화엄대법회를 열 때, 그곳에 모인 대중이 1400여 명이었다.
선사가 불자(拂子)를 들고 대중에게 법을 설하면, 대중이 모두 기뻐하며 미증유의 깨달음을 얻었다.
지안의 이런 법석이 거듭되자, 조정이나 고을 관리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1729년 66세, 지안이 법석을 열어 사람이 많이 모였던 차, 무고를 받아 호남의 옥사에 갇혔다.
얼마 후 무고함이 밝혀졌으나 선사를 곱지 않게 보던 반대파에 의해 다시 제주도로 유배당했다.
선사는 도착한지 8일 만에 병을 얻어 입적했다.
입적할 무렵, “산이 사흘을 울고, 바닷물이 넘쳐 오른다(山鳴三日 海水騰沸)”는 임종게를 남겼다.
법랍 51년, 세납 66세이다. 선사가 유배를 당해 문도들과 제자들이 비를 세우지 못하다가
100년이 지나 선사의 억울함이 밝혀져 해남 대흥사에 비가 세워졌다.
비문을 지은 이조판서 홍계희(1703~1771)는 비문 끝에
“훌륭한 대도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유배 보내 입적케 한 일은 조선의 비극임을 극렬히 통탄한다”고 했다.
지안은 평소에 ‘오래 살아서 단월의 시주밥만 축내고, 죽어서도 여러 사람에게 번잡함을 줄 터이니,
여기서 죽는 것보다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소리 소문 없이 죽고 싶다’고 했는데, 결국 유배되어 열반했다.
지안의 법맥은 휴정-언기-풍담의심-설제-지안-체정-연담ㆍ상언 등이다.
저서로는 <선문오종강요(禪門五宗綱要)> 1권과 <환성시집> 1권이 있다.
해남 대흥사에 모셔진 부도. |
지안의 불교사적 의의
첫째, 지안이 강석을 펼친 사찰만 해도 수곳이다.
△직지사에서 모운 진언으로부터 화엄법회 강석을 물려받을 정도로 화엄학에 뛰어났다.
△금산사 화엄법회에서는 1400여 명이 운집할 정도였다.
△통도사에서도 강론을 펼친 바가 있는데, 지안의 문중에서 20세기 초까지 통도사 주지 소임자가 배출됐다.
△조계종 종정을 역임한 서옹(1912~2003)스님의 증언과 각종 비문을 통해서 볼 때,
백양사는 지안이 ‘운문강원’이란 이름으로 강원을 설립하였다고 한다.
이후 지안의 손제자인 연담 유일(蓮潭有一, 1720~1799)이 17년간 강설하며 교학을 크게 진흥시켰다.
둘째, 지안은 조선의 서산 휴정 다음, 선교일치에 뛰어난 면모를 드러냈다.
스님의 교학 강의에 있어서는 요지가 현묘하고, 혹 전에 듣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의문이 없도록 풀어주어
강석에 매우 뛰어났다. 한편 지안은 임제종의 선지를 철저히 주장한 선사로서 화엄사상과 선을 함께
공부하는 종풍을 남겼고, 강을 해도 선강(禪講)을 했다.
그 예가 40세의 지안이 벽송사에 머물며 사찰을 크게 중창해 선방과 강원을 동시에 갖춘 선교겸수의
중심도량을 만들었다. 이후 200여 년간 벽송산문의 중흥 시대를 열었다.
셋째, 지안은 자신도 훌륭하지만, 기라성 같은 뛰어난 제자를 많이 배출했다.
설송 연초(雪松演初)는 수제자로 통도사에 주석하며 선풍을 떨쳤다.
함월 해원(涵月海源, 1691~1770) 호암 체정(虎巖體淨, 1687~1748)은 스승 안과 함께 대흥사에 비가 모셔져 있다.
지안의 손제자 연담 유일은 조선 후기 최고 강사로서 인정받았다.
대흥사 13대 종사 가운데 체정은 아홉 번째, 해원은 열한 번째 종사이며, 연담은 열두 번째 종사이다.
특히 손제자 연담은 평생 교학을 공부하며 <서장사기>, <도서사기>, <선요사기>, <절요사기>, <금강하목>,
<기신사족>1권, <원각경사기>, <제경회요>, <화엄현담사기> 등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화엄현담사기>는 오늘날까지 <화엄경> 이해의 지침서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불교신문3491호/2019년6월1일자]
정운스님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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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거룩하시고 慈悲하신 부처님 온 누리에 慈悲光明이 비춰지시길 誓願합니다. 감사합니다.
成佛하십시요.
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