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치명적인 소리
세계는 치명적인 사운드로 술렁이고 있다. 반항, 증오, 죽음, 관능과 외설이 노래의 가사로부터, 귀청이 찢어질 것 같은 앰프로부터 소리지르고 있다. 이러한 뒤틀리고 비꼬인 예술이 하늘의 분위기를 호흡하며 평화와 사랑, 기쁨이 주관해야 할 교회 음악에 슬며시 들어오고 있는 것은 그 배후에 악의 세력이 활동하고 있기 때문임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잠시만! 거룩한 교회의 아치를 메아리치고 들려오는 저 소리는 무엇인가?
영적인 갈증을 채울 만한 무언가를 찾고 있는 젊은이들은 현대 크리스챤 뮤직(CCM)의 귀에 거슬리는 소음을 즐긴다. 성경 가사는 재즈와 블루스의 매혹적인 세련미와 불협화음 사이에 끼어 있다.
세상의 최첨단을 달리는 유행보다는 언제나 한 발 늦게, 그러나 서서히 이 소음들이 교회의 예배 형식에 도입되고 있다.
요즘의 많은 크리스챤 음악들은 곡에 붙인 가사의 뜻은 좋을지 모르나 그 스타일에 있어 세상의 댄스 뮤직들과 별반 차이가 없어 영적으로 분간하기 힘들다. 음악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영향을 끼치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음악을 사용하는데 있어 어떤 특별한 표준을 갖고 계시는가?
과학의 증거
음악은 개인의 취향의 문제일 뿐, 도의를 따질 성격의 것이 아니라고들 생각한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음악을 연구한 결과는 음악이 단순히 개성의 표현이며 개인의 취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답하기에는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노래의 가사는 우선 제쳐두고서라도 음악은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능력을 행사하고 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믿고 싶지는 않겠지만 실제로 음악은 우리에게 정신적으로 뿐만 아니라 신체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음악에 적응하는 존재들로서 우리의 몸과 감정의 깊숙한 곳으로부터 음악에 반응한다. 음악은 우리 자신들의 일부이기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는 채 무의식적으로 음악에 반응하는 것이다.
과학은 무의식과 음악 사이의 관계에 대해 몇몇 흥미로운 사실을 밝혀냈다. 음악은 지성이나 의지(전두엽과 소뇌)를 통해서가 아니라 감정(탈라무스)을 통해서 두뇌로 들어온다. 실제로 음악은 이성을 비켜 지나간다. 음악이 지성적인 면으로는 감상되어질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일 먼저 감정에 의해서 인식되어진다는 뜻이다. 일단 자극이 탈라무스에 전해지면 뇌는 자동적으로 침범당한다.
다른 연구 결과는 리듬과 하모니를 통해 음악은 모든 신체 기능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사실 음악을 듣는 사람은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음악은 심장 박동수, 호흡, 그리고 다른 반사 운동들에 작용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신체의 작용들은 무의식 중에 일어난다.
다양한 종류의 음악들은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과학자들은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템포, 리듬, 하모니를 사용하였다. 리듬이 강하게 가미된 음악들, 가령 댄스나 행진곡들은 감각 운동 반응을 일으켜 운동 능력을 자극한다. 흥미롭게도 행진곡과 댄스는 각각 다른 종류의 신체의 움직임을 자극한다. 그리하여 음악은 신체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우리에게 영향을 준다.
한 연구자는 당김음으로 이루어진 댄스 음악이 청취자나 연주자 둘 다에게 (외관상)가벼운 최면을 거는 효과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쇼핑하러 가서 매장에서 틀어주는 “띄우는 음악”(기분을 전환하고 약간의 최면 효과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움)을 듣고 나면 경험할 수 있다. 소비자가 쇼핑을 하는 동안에는 기분이 좋지만 몇 시간 뒤에 매장 밖을 나서면 어지럼증과 함께 정신적으로 완전히 소모된 기분을 느낀다. 상점의 매니저들이 잘 아는대로 “띄우는 음악”은 쇼핑객들이 구매를 하지 않고자 하는 억제력을 떨어뜨리고 충동 구매욕을 증가시킨다. 이러한 음악은 알코올이나 마리화나를 아주 가볍게 사용하고 난 것과 비슷한 효과를 가지고 있다.
음악의 기준
당신은 성경에서 어떤 음악을 들어야 하는지 알려주는 목록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삶의 사소한 부분들까지 일일이 두 돌비에 써 놓지는 않으셨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몇몇 것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무관심하시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고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음악을 선택함에 있어 성경이 어떤 기준을 제시하고 있는지 알아보자.
우리가 영적으로 분별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순결하고 거룩한 것에 머물러야 한다고 성경은 말한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이것들을 생각하라”빌4:8. 더 나아가 우리의 신체는 궁극적으로 악이나 선 둘 중 하나의 세력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인데 그러므로 성경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고 훈계하고 있다. 몸과 마음 둘 다 순결함과 거룩함을 위해 보존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영적 식별력을 방해할 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신체 영역 안으로 들어와서는 안된다.
만일 우리가 음악이 갖고 있는 윤리적인 능력을 이해한다면 로마서 12장 1절의 말씀을 언제나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회심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음악과 사단이 고안해 낸 것들을 잘 분별할 수 없다. 사람이 그의 마음에 “새롭게 함”(롬12:2)으로 변화를 받지 않는다면 음악에 관련된 문제 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도 별반 중요하지 않거나 사소한 일로 보일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영적으로 밝은 지성의 통제 아래 있어야 한다. 댄스 음악의 리듬 패턴은 듣는 사람의 마음의 긴장을 줄이고 쉽게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상태를 조성하여 통제 불능이 되게 한다. 우리의 마음이 약해지면 우리는 사단의 능력에 쉽게 굴복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롬6:16. 오직 두 가지 선택 밖에 없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마6:24.
댄스 음악은 마음의 통제력을 빼앗고 선택의 자유를 없앤다. 가사가 종교적이라면 주님을 위해서 “최면”에 걸리는 것도 괜찮지 않느냐고 반문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 경험의 어느 각도에서 보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인간의 선택력을 제거하지 않으신다. 의지를 강요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전적으로 배치되는 일이다. 무아지경에 빠져 의지력이 약화되거나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사단 숭배의 한 부분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복음성가들은 나이트 클럽이나 디스코텍에서 흘러나오는 댄스 음악의 리듬 패턴을 바탕으로 작곡되어졌다. 이러한 형태의 음악은 육체적인 정욕에 호소하기 위하여 사단에 의해 고안된 것이다. 그는 정욕과 관능을 그려내기 위하여 댄스 음악을 만들어냈다. 댄스 음악에 맞춰 춤추고 있는 사람의 몸의 움직임을 관찰해 보라. 눈길은 자연히 몸통, 특별히 엉덩이에 가게 된다. 댄스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것은 그 리듬(당김음, 강 약 중간 약 대신에 약 강 중간 강으로 된 것)과 연관된 것으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러한 몸의 움직임은 대단히 관능적이다. 그에 반해 군악대의 움직임을 보라. 여기서는 몸통 대신 사지로 눈길이 쏠린다. 팔과 다리의 움직임은 행진곡의 리듬에 반응하는 것으로서 자연스러운 것이다. 음악의 리듬의 패턴은 움직임의 종류를 지시한다.
관능적인 세속 음악들을 만드는 작사가들과 프로듀서들은 이 리듬 패턴의 원칙을 잘 알고 있으며 자신들의 음악에 이러한 이론을 적용시키고 있음을 스스럼 없이 인정한다. 롤링 스톤의 리더 믹 재거는 “당신은 아드레날린이 온 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성욕을 일으킨다.”고 말하였다. 더 도어즈의 모리스는 “우리를 관능적인 정치가로 생각해 달라”고 말하였다.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발린은 “우리는 엔터테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하였다. 만일 이러한 음악가들이 자신들의 음악의 목적은 관능과 정욕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단지 여기에다 크리스챤 가사를 집어넣는다고 해서 그것이 거룩하고 성스러운, 그리고 교회의 예배에 맞는 음악이 되겠는가? 복음의 개념들을 그려내기 위해 댄스 리듬을 가미하는 것은 속된 것과 거룩한 것을 한데 섞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두 가지를 구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단연코 금하신 일이다. (겔22:26; 레10:8~11을 보라).
복음 댄스 음악은 크리스찬 가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기만적이다. 음악의 윤리는 가사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다. 가사 자체는 음악을 그리스도인 경험에 알맞게 순결한 것으로 만들어 주지 않는다. 댄스 음악 자체는 연주하는 이나 듣는 이에게 있어 영성에 반대되고 영적 성장을 방해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 음악의 가사와 음악의 스타일은 바늘과 실 같은 관계이다. 그리하여 성, 마약, 반항, 그 외의 메시지들이 록이나 댄스 음악의 형태로 듣는 이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온다. 거룩하고 순결한 크리스천 가사를 그 반대의 것 -관능, 불순함 등- 을 그려내기 위해 만들어진 음악과 섞는 것은 전혀 맞지 않는 일이다. 이것은 영적인 형태의 간음이다.
우리가 선택한 음악들을 통해 교회에서, 가정에서 치명적인 소음이 무의식적으로 우리를 침식시키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최고의 표준까지 도달하라는 그리스도 예수의 부르심을 받고 있다. 그분에 대한 믿음과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고 열렬한 기도와 부지런한 성경연구로서 그분께서는 우리를 영적으로 고무시키고 그분과 우리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음악으로 우리를 이끄실 것이다.
우리의 음악이 지옥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이 되게 하자. 우리의 음악이 관능과 정욕 대신 하늘이 귀하게 보시는 순결, 거룩, 의를 반영하는 영적인 노래(골3:16; 엡5:19)가 되게 하자.
아이에게 배우세요!
그 어린아이는 당신보다 훨씬 위대합니다.
당신이 가르치는 그 아이가 당신을 가르칩니다.
당신은 그더러 예수와 같이 되라고 가르치지만 당신은 그가 이미 당신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당신은 그의 잘못을 올바로 가르친다고 하지만 가르치는 쪽은 당신이 아니라 마음이 훨씬 더 깨끗하고 자유로운 그 아이입니다.
당신은 그더러 하나님을 믿으라고 가르치지만, 그보다 믿음이 부족한 사람은 당신입니다.
그는 단순한 믿음으로 즉시 믿으나 당신은 당신 나름대로의 의심과 이유를 찾아냅니다.
당신은 그더러 용서하라고 가르치지만, 그는 당신이 가르칠 때 이미 용서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그가 용서했을 때에는 언제나 용서한 상대방의 잘못을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당신은 어떻습니까? 원한을 오래 품고 빚진 자를 잊지 못합니다.
당신은 그에게 사랑을 가르치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외칩니다.
“얘야, 내가 선생이 아니라 네가 선생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가르치는 그에게서 배우십시오.
그를 닮으십시오.
천국에 가려면 “어린아이와 같”아야 한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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