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1481. [역경의 열매] 김상훈 윤정희 부부 (1-20) 강릉에서 가장 시끄럽지만 행복 넘치는 11남매
결혼 후 4번 유산 끝에 입양 시작 아이들에게 가족 울타리 제공… 주님 사랑으로 회복하도록 도와
대한민국 최다(最多) 입양부부인 김상훈 목사(오른쪽)와 윤정희 사모 가족이 설 연휴인 지난달 26일 강원도 강릉 경포대 바닷가에서 일렬로 서 있다. 엄마 윤 사모가 촬영하느라 빠졌고, 캐나다에 있는 큰 딸 하은이가 없어 11명만 보인다.
가슴으로 낳은 아이들 11명과 함께하고 있다. 아빠인 나와 아내를 합쳐 총 13명 가족이 경포호가 보이는 강원도 강릉중앙감리교회 사택에서 지낸다. 수시로 전국의 기독교 입양가정이 우리 집을 찾는다. 식구가 많아 가족을 소개하는 일도 한참이다. 두란노에서 지난해 출간한 ‘길 위의 학교’를 바탕 삼아 차례대로 가족을 소개한다.
나(60·김상훈 목사)는 아내 바보, 자녀 바보다. 대학 졸업 후엔 억대 연봉을 받는 토목기사로 일했다. 처음 하은 하선이 자매를 입양하고 하선이가 질병으로 죽음의 사선을 넘나들 때 주님께 헌신하겠다고 서원해 50대에 목사가 됐다. 목원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 2005년 대전에 ‘함께하는교회’를 개척해 4년간 섬겼으며 현재는 강릉중앙감리교회 파송 강릉 아산병원 원목으로 사역 중이다.
아내 윤정희(55) 사모는 결혼 전인 20대부터 중증 장애 아동들의 처녀 엄마로 살았다. 우주 최고의 멋진 남자 김 목사의 아내이며, 지구 최고로 아름다운 열한 명 아이들을 키우는 행복한 엄마라고 소개한다. 교계 학계 방송계 등에서 하나님 사랑을 알리는 데 최선을 다했으며 한국기독입양선교회를 창립해 섬기고 있다. ‘사랑은 여전히 사랑이어서’ ‘하나님 땡큐’ ‘하나님 알러뷰’ 등을 집필했다.
우리 부부는 1992년 결혼했다. 네 번의 유산을 겪은 뒤 2000년 하은(23) 하선(22) 자매를 시작으로 하민(18) 요한(17) 사랑(16) 햇살(16) 다니엘(16) 한결(15) 윤(14) 하나(10) 행복(8)까지 8남 3녀를 입양했다. 강릉에서 가장 시끄럽지만, 행복이 넘치는 천국 가정이라 생각한다. 상처와 아픔이 많았을 아이들에게 힘닿는 대로 가족의 울타리를 제공해 주님의 사랑으로 회복하도록 돕는다. 예수님을 신호등 삼아 이웃에게 받은 사랑을 나눌 줄 아는 삶을 살도록 함께하고 있다.
첫째 하은이는 캐나다에서 유아교육을 공부 중이다. 전 세계 소외된 아이들의 엄마가 되겠다며 아프리카 선교사의 꿈을 꾼다. 둘째 하선이는 우리 집 군기반장이다. 아산병원 간호사로 일하는데 아픈 이들의 엄마가 되고자 한다. 셋째 하민이는 두 언니의 든든한 조력자이자 남동생들의 선한 누나이기를 바란다. 선교사를 소망해 오는 3월 목원대 신학과에 입학한다.
세 누나 아래로는 전부 아들이다. 넷째 요한이는 과학자가 되고 싶어 하는 우리 집 장남이다. 다섯째 사랑이는 국가대표 사격선수가 꿈이다. 여섯째 햇살이는 소방관이 되려고 한다. 아빠처럼 이웃을 돕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해서 한국소방마이스터고등학교 1기로 입학했다. 일곱째 다니엘은 만능 스포츠맨이다. 여덟째 한결이는 집안의 귀염둥이다. 아홉째 윤이는 사랑이 형과 함께 사격 선수다. 자신을 통해 많은 아이가 입양되길 원한다며 입양 전도사를 꿈꾼다.
열 번째는 하나다. 누군가 “이름이 왜 하나야”라고 물으면, “그럼 이름이 두 개야”하고 반문한다. 열한 번째 막내는 행복이다. 축구 유니폼을 입고 골키퍼 장갑을 끼고 다니는 축구광이다.
하나님께선 우리 부부같이 부족한 사람을 아무 조건 없이 양자의 영으로 자녀 삼으시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놀라운 특권을 주셨다. 이 은혜를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입양이라는 걸 깨달으며 주님께 입양된 우리 부부는 20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자녀를 입양한 가정이 됐다.
* [역경의 열매] 김상훈 윤정희 부부 (1) 강릉에서 가장 시끄럽지만 행복 넘치는 11남매
* [역경의 열매] 김상훈 윤정희 부부 (2) "주님, 하선이 살려 주시면 목사 되겠습니다"
* [역경의 열매] 김상훈 윤정희 부부 (3) 우리 부부는 둘이 합쳐 신장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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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역경의 열매] 김상훈 윤정희 부부 (2) “주님, 하선이 살려 주시면 목사 되겠습니다”
기독인으로서 직업에 대한 회의 들 즈음 둘째 하선이 심하게 아파 사경 헤매게 돼
김상훈 목사가 2일 강원도 강릉아산병원에서 환우와 가족 및 간병사들과 함께하는 주일 예배를 인도하고 있다.
지금은 강릉아산병원에서 원목으로 섬기고 있지만 나 김상훈은 처음부터 목회자의 길을 걸은 사람이 아니다. 대학에서 토목을 전공한 전문 엔지니어 출신이다. 대학 졸업 후 작은 토목회사에서 일하며 회사와 함께 성장하는 삶을 살았고 몇 년 만에 현장을 책임지는 소장이 됐다. 충남 천안 요금소 확장 공사를 시작으로 충청도 쪽 도로 공사를 도맡았다. 현장 일이 하나 끝나면 인건비 자재비 회사 수수료를 제하고도 통장에 많은 현금이 남아 있었다.
외환위기 당시 많은 건설사가 줄줄이 도산했다. 나는 그런 회사에서 진행하던 다 무너져 가는 토목 현장에 들어가 일했는데, 신기하게도 부도가 난 현장이지만 사업이 무사히 마무리되는 기적을 연이어 경험했다.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현장도 내가 맡으면 적자가 흑자로 돌아서 아내에게 많은 돈을 가져다 줬다. 통장에 적지 않은 돈도 들어있고 집도 여러 채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아내는 주님께 십의 오조를 드리며 감사해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기독교인으로서 직업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일을 진행하다 보면 바르지 못한 결정이나 행동을 할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주님께 부끄러웠다. 수요일은 현장을 4시 정도에 마무리하고 수요예배를 드리기 위해 집으로 향했다. 금요철야예배도 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금요일도 현장을 일찍 정리했다. 어느 틈엔가 예배가 내 마음 안에 자리 잡기 시작했고, 교회 안에서 사는 삶이 딱 맞는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편안하고 즐거웠다.
그러던 중 일곱 살 된 둘째 하선이가 갑자기 심한 열로 입원하면서 모든 게 바뀌었다. 입양 후에도 자주 아프던 하선은 이때 폐쇄성 모세기관지염 진단을 받았다. 두 개의 폐 가운데 하나가 새까맣게 변했고, 나머지 폐의 반 이상도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열 살 이전에 이 병에 걸리면 사망 확률이 매우 높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다. 의료진은 가망이 없다며 기다려 보자는 이야기만 반복했다. 이 상태에서 뭘 더 기다리라는 건지 너무도 답답해하며 주님께 울면서 간절히 기도했다.
“주님, 하선이를 살려 주시면 목사가 되겠습니다. 토목 사업을 모두 던져 버리고 물질도 던져 버리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목회자의 길을 걷겠습니다.”
하선이는 나머지 폐로 건강하게 자라나 강릉아산병원 간호사로 일 하게 된다. 나는 서원 그대로 목원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가 됐다. 나이 50에 목사 안수를 받던 날 아내가 이렇게 말했다.
“쉰 살에 안수받으면서 누구나 다 살아가는 목사로 살지 마슈. 인생 한 번 사는 거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 같은 거 안 받아두 돼유. 우리가 존경 받을려고 목회자 가정으로 사는 거 아니니께. 다만 기독인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는 목회자 가정으로는 살지 맙시다.”
아내의 이 말이 어찌나 무섭던지 지금도 가슴 안에 담아 두며 살고 있다. 어쩌다 마음 편히 지내고 싶을 때도 아내가 어디선가 이 말을 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지 않으려고, 사랑하는 하나님 욕 먹이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더욱 열심히 살아왔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가슴으로 낳은 열한 명 아이들과 함께 걸어왔다. 든든한 아이들과 함께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 안에서 행복하게 살아온 길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상훈 윤정희 부부 (3) 우리 부부는 둘이 합쳐 신장 둘
한쪽 폐 쓰지 못하게 된 하선이 위해 딸 살려주시면 신장 내놓겠다 기도… 병 낫자 신장 한쪽씩 기증
대한민국 최다 입양부부인 김상훈 목사 윤정희 사모가 강원도 강릉 경포대 인근에서 나란히 걷고 있다.
아내(55·윤정희 사모)는 스무 살 철모르던 시절부터 아이들에게 청춘을 바치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이다. 처녀 시절부터 장애아동들을 위한 엄마로 살았다. 충남 공주 동곡요양원, 중증 장애인들을 위한 보호시설인 이곳에서 연애도 결혼도 아랑곳하지 않고 장애아동들을 씻기고 먹이고 가르치는 일에 매진했다.
장인 장모님 영향이 큰 것 같다. 장인은 직업군인이셨는데 “나라가 너희를 위해 무언가 해주길 바라지 말고, 너희들이 나라를 위해 무언가를 하는 사람이 돼라”고 밥 먹을 때마다 말씀하셨다. 장모는 한발 더 나아가 “내가 배부르면 배고픈 사람의 심정을 알지 못한다”며 “나만 배부르게 사는 삶을 살지 말라”고 하셨다. 아내는 이게 밥상머리 교육이란 걸 나중에 성장해서 알았다고 했다.
장인 장모의 영향으로 아내는 중학생 시절부터 ‘늘사랑아동센터’에 가서 아이들을 돌보았다. 결국 이 아동센터에서 우리 가족의 운명을 결정하는 많은 일이 일어났다. 센터가 8남 3녀까지 가족이 확대되는 데 1등 공신 역할을 했다.
나는 아내가 동곡요양원에 아예 눌러살면서 제대로 걷지도 달리지도 못해 기어 다니는 아이들을 돌볼 때 처음 만났다. 1991년 겨울이었다. 건설회사 현장소장으로 일할 때인데 여직원의 소개로 한 번 만나고 그다음엔 시설까지 찾아갔다. 아내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정말 여기까지 오셨네요. 고마워요”라고 말했다. 나는 “한번 오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냄새쥬”하고 물었다. 아내는 아이들 곁에 있느라 느끼지 못했는데, 침 냄새였다. 입을 다물지 못하는 아이들이 흘린 침이 바닥까지 흘러서 시설 전체에 그 냄새가 뱄던 것이다.
우리는 92년 결혼했다. 이후 네 번의 유산이란 아픔이 있었다. 2000년 아동센터를 통해 세 살짜리 꼬맹이 하은이와 18개월 된 하선이 자매를 만났다. 가족이란 뜨거운 기쁨을 선물 받아 너무도 행복했다. 하선이는 입양 때부터 기침이 잦았는데 병명을 찾지 못하다가 2004년 서울대병원을 통해서야 폐쇄성 모세기관지염이란 걸 알게 됐다. 한쪽 폐를 쓰지 못하게 된 아이가 가녀린 팔뚝에 링거를 꽂고 “엄마 아빠, 이제 안 아파”하고 말하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그때 아내는 병원 비상구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울면서 기도했다.
“제발 제 딸 하선이 좀 살려주세요. 제발 좀 살려 주세요. 차라리 저를 데려가세요. 그 어린애한테 어쩌면 이토록 가혹하십니까. 차라리 제가 대신 고통받을게요. 제 딸 하선이만 살려 주시면 제 신장이라도 내놓겠습니다. 신장병으로 죽어가는 환자에게 제 신장을 드릴게요. 제발 제 딸 좀 살려 주세요.”
기도는 응답받았다. 하선이는 조금씩 건강해져 깜찍한 초등학생이 됐고 3학년 운동회 때는 80m 달리기에서 6명 중 5등을 했다. 온 가족이 5등 한 하선이를 붙잡고 엉엉 울었다. 숨이 차 잘 걷지도 못하던 꼬맹이가 이젠 간호사가 돼 아픈 사람들을 도우려 한다.
아내는 서원대로 2007년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를 통해 연결된 부산의 생면부지 환자에게 신장을 기증했다. 왼쪽 옆구리 30㎝를 개복하고 열세 번째 갈비뼈를 잘라 한쪽 신장을 나눴다. 이미 네 명의 아이들을 입양한 후였다. 아내가 이러니 나도 가만있을 수 없었다. 2009년 수술실로 향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 부부는 둘이 합쳐 신장 둘이 됐다.
***[역경의 열매] 김상훈 윤정희 부부 (4) “엄마, 나도 아프니까 이제 잘해 줘”
많이 보듬어 주지 못한 첫째 딸 하은이… 눈 수술 받고 깨어나자 엄마 사랑 갈구
윤정희 사모(왼쪽)의 어깨에 기댄 11남매의 맏이 김하은씨.
2000년 5월 하은(23) 하선(22) 두 자매가 우리 부부의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왔다. 아내(윤정희 사모)가 어린 시절부터 장모님과 함께 봉사를 다니던 ‘늘사랑아동센터’ 원장님이 전화를 걸어왔다. “너무너무 예쁜 애가 있어요.”
아내가 어렸을 때부터 뵀던 원장님이니 유산을 겪은 우리 부부의 아픔과 전후 사정을 잘 아시리라 믿었다. 그런데 원장님은 머뭇거리더니 한마디를 덧붙이셨다. “예쁘긴 한데… 몸이 조금 아파요.”
아내는 달라질 게 없다고 했다. 처녀 시절 장애아동들과 함께 살겠다고 결심까지 했던 사람이니까. 함께 아동센터로 향했다. 첫눈에 우리 딸을 알아보았다.
구석에 앉아 있는 조그만 아이. 세 살짜리 꼬맹이 하은이였다. 아동센터에 온 지 반년이 지났는데 처음 며칠은 잘 놀더니 그 뒤론 밥 먹고 화장실 갈 때만 빼고 그렇게 앉아만 있다고 했다. 무표정한 하은이를 보니 마음이 아팠다.
하은이 동생 하선이도 만나고 싶었다. 18개월 된 하선이는 폐렴에 걸려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몸무게 8.8㎏… 너무도 작은 하선이가 병실에 누워 있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이자 선물인 하은이와 하선이를 만났다.
처음 나는 건강한 아이를 입양하고 싶었다. 지금은 열한 명이지만, 당시엔 두 명을 한꺼번에 데려오는 것도 부담이었다. 하지만 아내의 의지는 확고했다. 한 번에 두 아이의 아빠가 되고 나서는 따듯하고 좋은 아빠가 되려고 노력했다. 공사현장 일을 하면서 아이들 간호에 매진하기 위해 집도 현장 근처로 이사했다.
원장님 말씀대로 두 아이는 몸이 좋지 않았다. 하선이는 폐 질환으로 날씨가 조금만 흐리면 감기에 걸려 수시로 병원에 드나들어야 했다. 하은이는 비교적 건강했지만, 정밀 검사를 받아보니 눈동자 초점을 잘 맞추지 못하는 ‘간헐성 외사시’였다. 2003년 하은이는 눈 수술을 받았다. 전신마취에서 깨어난 하은이가 울면서 엄마를 찾았다. “엄마 엄마, 나도 아프니까 이제 잘해 줘.”
맏딸이어서 둘째보단 잘 버티겠거니 생각해 보듬어 주지 못한 날들이 생각났다. 아내는 당차지 못하다고 괜스레 아이를 나무라고 입에 물고 있던 손가락을 빼며 성질을 냈던 게 죄스럽다고 울었다. 키가 자라고 지혜가 자라며 하은이는 너무도 속 깊은 딸이 돼줬다. 엄마와 아빠를 묵묵히 안아주고 기다려줬다.
하은이는 중학교 때 미국 뉴저지 하나님의학교(NJUCA)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해 3년간 미국에서 공부했다. 지금은 캐나다에서 유아교육을 공부한다. 전문 선교사가 꿈이다. 집에서도 엄마 아빠를 도와 동생들을 보살피는 천사표 딸이다. 책 읽기와 글쓰기를 참 좋아한다. 얼마 전에는 엄마에게 이런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내왔다.
“엄마 엄마. 엄마가 바로 ‘왜’ 하고 말할 거 같애. 요즘 엄마 참 힘들지. 남동생들 맨날 사고에 하선이도 아프고 나도 없는데 엄마가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아프고 기도가 너무 나와. 요즘은 기도를 많이 하고 있어. 기도할 때마다 주님이 주는 감동이 있어. 조금만 더 견디라는 거야. 엄마. 힘들어도 조금만 견뎌. 우리가 크고 있어. 나도 실습 잘하고 있고, 하선이도 건강이 나아지잖아. 캐나다에서 자리 잡으면 엄마는 꼭 나한테 와. 이제부터는 내가 엄마한테 다 해줄게. 엄마 조금만 참고 견뎌. 알았지. 난 엄마밖에 없어. 엄마는 나의 슈퍼히어로, 울트라 짱짱짱이야. 엄마 사랑해. 영원한 엄마의 큰딸 하은이가.”
***[역경의 열매] 김상훈 윤정희 부부 (5) 엄마 기도 흉내 내는 하선이… 온가족 웃다가 울다가
병약한 하선이 치료비 위해 아파트도 팔아… 이젠 간호사돼 동생들 책임지겠다며 큰소리
열한 남매의 둘째 김하선씨(왼쪽)와 엄마 윤정희 사모.
둘째 하선(22)이 덕분에 우리 부부는 목회자 가정이 되고 신장도 기증했다. 하선이는 폐쇄성 모세기관지염이란 질병으로 한쪽 폐가 못쓰게 됐는데도 소생했다. 치료엔 오랜 시간과 비용이 들었다. 현금이 부족해 건설사 현장소장 시절 보유한 31평 아파트를 팔았다.
하선이가 서서히 회복한 후 국가에서 만 18세 이하 입양 아동들에게 의료보험 1종을 부여해 병원비를 면제해 주는 제도가 생겼다. ‘미리 좀 만들어 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내는 달랐다. 아파트 한 채 값으로 하선이의 목숨을 살린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며 환하게 웃기까지 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임을 깨달았다.
하선이는 언니 하은(23)이와 함께 검정고시로 고교 과정을 이수하고 1등급 성적을 받아 대학 간호학과를 졸업했으며 이제 강릉 아산병원 출근을 앞두고 있다. 글 쓰는 게 취미인 언니 하은이는 동생 하선이를 이렇게 표현했다.
“이효리를 닮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얼굴이 예쁘지만, 여간해서는 집안일을 돕지 않는 ‘왕뺀질이’. 동생들 데려오자고 부추겨 놓고는 정작 돌보는 일은 내게 미룬다. 하지만 어디서나 당당하고 대찬,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동생이다. 어릴 적에 아주 아파서 엄마 아빠 마음을 아프게 했는데, 이제 정말 씩씩하고 건강해졌다. 간호사가 돼 동생들을 지원해 주고 엄마 아빠의 노후를 책임지겠다고 큰소리 빵빵 치고 있다.”
우리 가족은 2011년 강원도 강릉으로 이사 왔다. 내가 먼저 강릉중앙감리교회 파송 강릉아산병원 원목으로 오게 됐고 아내가 대전의 공부방을 돌보고 난 후 합류했다. 아이들이 건강해지면서 감사한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어 주변을 둘러봤다. 아내는 독거 어르신 열 분에게 반찬을 만들어 배달하는 일을 하고 싶어 했다. 이주여성까지 포함해 추석을 맞아 전과 송편을 전달하고 싶었는데 수중에 돈이 없었다. 이사 와서 교회에서 받은 첫 사례금은 첫 열매로 드리고, 그다음 달 사례금은 병원교회 장애우에게 드리고 나니 우리 집 재정은 늘 바닥이었다. 아내는 50만원만 있으면 좋겠다고 엎드려 기도했다. 이때 하선이가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내가 이런 말 안 하려 했는데….”
“안 하려 했으면 하지마. 엄마 지금 정신없이 기도하잖아.”
“엄마, 유치원생도 엄마처럼 기도 안 해. 아빠 들어봐.”
하선이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무릎 사이에 박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엄마가 한 기도를 그대로 읊조렸다.
“아부지, 50만원만 줘. 아부지, 아부지, 이번에 50만원만 주면 내가 앞으로 돈 달라고 안할게. 아부지, 50만원.”
온 가족이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아내는 간절함으로 기도했는데, 하선이가 흉내 내니 코미디도 그런 코미디가 없었다.
“엄마, 여기 50만원이야. 이걸로 해. 하은 언니는 미국으로 공부하러 가기 전에 가진 걸 전부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위해 기부했는데, 나는 좀 아까워서 언니랑 같이 못 했어. 그런데 엄마를 보면서 이 돈을 독거 어르신 반찬 나르는 데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엄마가 그렇게 하고 싶으면 이 돈으로 해.”
주님은 우리 가족을 당신 품에 안고 계셨다. 웃음에 이어 이번엔 온 가족이 눈물을 흘렸다. 독거 어르신 반찬 나눔은 지금도 이어가고 있다.
***[역경의 열매] 김상훈 윤정희 부부 (6) 만능 스포츠우먼 하민이 “언니처럼 선교사 될래요”
구순구개열로 두 번 수술 받은 셋째… 꾸준한 언어치료와 수영으로 자신감 얻어
가족이란 울타리는 이렇게 또 확장되고 있다. 장성철 김수현 부부와 함께한 김하민양(오른쪽).
셋째 하민(18)이도 ‘늘사랑아동센터’에서 왔다. 2006년 아내(윤정희 사모)와 하은 하선 등 세 모녀가 앞장서 센터를 방문한 뒤 네 살짜리 작고 귀여운 하민이를 데려왔다. 하민이는 구순구개열을 갖고 태어나 두 번의 수술을 받은 아이였다.
아내는 하민이를 위해 충남대병원 언어치료실을 주 2회씩 데리고 다녔다. 언어치료는 의료보험이 안 돼 재정적으로 어려웠다. 폐쇄성 모세기관지염을 앓던 둘째 하선이로 인해 힘들었던 순간과 많은 병원비가 들었던 게 생각나 하민이를 장애아동으로 등록하고 정부의 보조를 받고 싶었던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아내는 하나님이 지극히 정상인 아이를 우리 가정에 보내셨다는 믿음으로 장애아동 신청을 하지 않았다. “하민아, 주님의 뜻을 믿어봐. 넌 발음이 조금 정확하지 않은 거야. 분명 정상으로 돌아올 거야. 하선이를 살려주신 하나님께서 하민이도 정상으로 자라게 하실 거야.” 아내는 하민이와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며 기도하곤 했다.
부모가 아이를 믿고 아이와 함께하며 사랑할 때 아이도 변화된다는 걸 알게 됐다. 우리집의 11명 아이들이 그 증거다. 꾸준히 언어치료를 받으며 하민이는 자연스럽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얼굴의 아픔으로 사람들 바라보기를 꺼려하고 친구들에게 다가가기 어려워하는 하민이를 위해 아내는 수영을 가르쳤는데, 이게 신의 한 수였다.
수영을 하면서 하민이는 자신감도 생기고 시합에 나가 상도 받았다. 중학교에선 운동을 카누로 바꿔 중3 전국대회에서 동메달도 받았다. 운동으로 고교까지 진학할 줄 알았는데 하민이는 갑자기 하은 언니처럼 선교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이로 인해 집안이 또 한 번 뒤집어 졌지만 결국 우리 부부는 하민이의 꿈을 응원하기로 했다.
하민이는 선교사가 되는 데 필수인 영어를 익히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고, 검정고시를 거쳐 지난해 목원대 신학과에 수시로 합격해 다음 달 입학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하민이는 경기도 용인 은혜샘물교회 장성철 목사님과 김수현 사모님 가정에서 지낸다. 은혜샘물교회는 선교 사역에 특화된 교회이고 김 사모는 특수교육학 박사여서 어린이 선교사역을 꿈꾸는 하민이에게 전문적 도움을 주고 계시다.
아내는 2018년 한국기독입양선교회를 창립했다. 인터넷 카페에서 시작했는데, 우리는 모두 주님의 입양 자녀이기에 가정과 부모 없이 자라는 아이들에게 최대한 가정을 선물하자는 취지에 공감한 전국 200여 부부들이 모인다. 김 사모는 이곳에서 아내를 만나 아내를 엄마로 부르고 아내도 김 사모를 큰딸로 삼았다. 김 사모 아이들은 또 아내를 할머니로 부른다. 아내는 “벌써 할머니가 됐다”고 흥분한다.
장성철 목사와 김수현 사모 부부는 선교사를 꿈꾸는 하민이가 대학에 다니는 동안 전문적 도움을 주기로 했다. 이렇게 가족이란 울타리를 확장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 지면을 빌어 하민이를 또 다른 딸로 품고 가족의 울타리를 확장해 준 부부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역경의 열매] 김상훈 윤정희 부부 (7) “아들과 목욕탕 가고 싶다”는 말에 아내는 곧장…
아동센터 찾아 세 살 사내아이 데려와… 걷는 게 힘겨웠던 사랑이 비장애인으로 키우려 온가족 힘 모아
하은 하선이가 빠지고 나머지 11명 가족이 자전거를 탔다. 각자 이름이 티셔츠 위에 새겨져 있다.
우리 집 넷째는 요한(17)이지만, 다섯째 사랑(16)이가 먼저 왔다. 셋째 하민(18)이가 언어치료를 받으며 안정을 찾을 즈음인 2007년 내가 별생각 없이 한마디 했다. “아들과 목욕탕 한번 가보고 싶네유.”
이 말에 아내는 바로 다음 날 늘사랑아동센터에 갔고 하민이보다 더 작고 여린 세 살짜리 남자아이를 품에 안고 왔다. 너무 작고 왜소한 아이였다. 우리는 사랑을 많이 받고 또 받은 사랑을 많이 나누어 주라는 의미로 이름을 사랑이라 지었다.
사랑이는 보조 신발을 신고 왔다. 안짱다리로 태어나 12개월 전에 큰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다. 발목에 수술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걷는 게 부자연스러워 기어 다녔고 걷는 훈련을 계속해야 했다. 아내는 기도하며 ‘사랑이 역시 지극히 정상’이란 응답을 받았다. 우리는 사랑이를 비장애인으로 키우자고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목욕탕에 갈 때면 꼭 사랑이와 함께 갔다.
하민이의 언어장애를 통해 우리 가족이 하민이를 ‘나와 너’가 아닌 ‘우리’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사랑이의 장애는 ‘아이의 아픔’이 아닌 ‘우리의 아픔’이었다. 온 가족이 함께 극복하고 이겨 나가라는 의미로 다가왔다. 안짱다리 때문에 제대로 걷지 못하다 보니 사랑이의 발목은 부러질 것처럼 가늘었다. 걸을 수 있도록 꾸준히 운동을 시켜주고 따뜻한 물로 계속 마사지해줘야 했다.
승강기가 없는 4층에 살다 보니 사랑이에게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절반도 못 올라가 금세 지쳐서는 안아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아내는 “사랑아, 혼자 걸어. 할 수 있어”라고 독려했는데 사랑이는 “어무, 힘드어… 안아져…”라며 안아달라고 했다. 아내는 독하게 마음을 먹고 절대로 안아주지 말라고 가족들에게 일렀다.
온 가족이 사랑이와 걷는 연습을 했다. 세 누나의 응원과 격려와 사랑과 지지가 큰 힘이 됐다. 사랑이는 보조 신발을 벗고 아내와 함께 초등학교 운동장을 꾸준히 걸었다. 나중에는 우리 부부 품으로 뛰어올 수 있을 정도가 됐다. 폐가 아프던 하선이가 달리기를 할 때처럼, 사랑이가 걸어가는 것만 봐도 행복했다.
잠든 사랑이의 다리를 붙잡고 눈물을 흘리며 반복했던 기도 역시 들어주셨다. 발목 강화를 위해 쇼트트랙을 시작했는데 강원도 쇼트트랙 초등학생 대표선수까지 지냈다. 지금은 사격으로 종목을 바꿔 국가대표가 되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다. 다섯째 아들 사랑이를 두고 큰 누나 하은(23)이는 이렇게 소개한다.
“2004년생. 애교 작렬 눈웃음의 일인자 ‘마빡이’. 날마다 눈웃음을 보이며 애교를 부리니 예뻐하지 않을 수 없는 ‘내 새끼’다. 다리가 조금 불편해서 처음에는 보조 신발을 신었는데 이제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가족과 함께 자전거 여행도 한다. 몸의 아픔을 이겨낸 인간 승리가 내 동생 사랑이다. 사랑아, 사랑해. 이겨 줘서 고마워.”
***[역경의 열매] 김상훈 윤정희 부부 (8) 공부 거부했던 요한이… 이젠 성적 우수 장학금 받아
성격 까칠해 파양된 아이 넷째로 입양… 6개월쯤 지나자 조금씩 마음의 문 열어
세 딸을 빼고 여덟 아들이 우리 부부와 함께했다. 식구가 많아 가족 전체 사진을 찍기가 쉽지 않다.
우리 집 장남은 넷째 요한(17)이다. 사랑(16)이가 점점 가족으로 적응하며 걷기 연습을 이어갈 즈음이던 2008년 아내가 늘사랑아동센터 소장님께 전화했다. 사정으로 당분간 입양이 어렵다던 아이가 혹시 다른 가정으로 갔는지 물었다.
“아직 입양되지 않았어요. 친부모가 베트남에서 근로자로 오신 분들인데 병원에 아이를 낳고 사라졌어요. 아시다시피 아토피도 심하고, 퇴행성 발달장애에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구부러지지 않아 치료도 받고 있어요. 성격도 까칠하고 예민해서 다른 가정에 갔다가 다시 센터로 왔어요.”
아내는 전화로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럼 우리 집으로 보내주세요”라고 말했다. 벌써 3녀 2남, “그 많은 아이 다 감당할 수 있겠어요”라는 소장님 말에 아내는 “그럼요. 할 수 있어요. 하은이 하선이도 잘 도와주고, 하은빠(하은 아빠)가 워낙 아이들에게 헌신적이라 전 힘든 줄도 몰라요”라고 답했다. 요한이는 그렇게 우리 품에 안겼다.
처음부터 참 힘들었다. 자녀 키우는 게 쉽다는 말씀을 하는 분들이 부러울 정도로 요한이는 정말 힘든 아이였다. 초등학교 입학 전 한글은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글자를 가르쳐 주려 했지만, 요한이는 우리 부부의 기대를 저버리고 공부하는 걸 거부했다. 책상 아래 들어가면 종일 나오지 않는 요한이를 보며 아내는 요한이를 따라 책상 아래로 내려갔다. 책상 아래에서 함께 책을 읽고 간식을 먹었다.
요한이는 생각보다 아토피가 심했다. 아내는 치료를 위해 요한이가 먹는 밥은 황토물을 받아 따로 짓고, 가족 모두가 라면이나 과자류를 일절 입에 대지 않았다. 동생들을 지극 정성으로 돌보던 하은이마저 “과자와 음료수도 안 되면 도대체 뭘 먹냐”고 호소했다. 그런데도 동생 요한이를 위해 모두 인스턴트 간식을 끊었다. 플라스틱이 좋지 않다고 해서 요한이가 먹는 그릇은 사기그릇으로 교체했고 옷도 몸에 좋은 순면만 입혔다.
6개월 정도 지나니 요한이가 조금씩 우리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가끔 눈도 마주치고 웃기도 했다. 요한이가 웃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해 함께 웃었다. 우리 아이들 중에 요한이가 마음을 여는 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주님은 역시 반전을 예비하셨다.
한글도 모른 채 초등학교에 입학한 요한이는 나와 함께 홈스쿨을 하며 수학과 과학에 두드러진 재능을 보이는 아이로 거듭났다. 이제 고등학생인데 지난해에는 학교에서 성적 우수 장학금도 받았다. 큰 누나 하은이는 동생을 이렇게 표현한다.
“잘 생긴 만큼 성격도 까칠한 ‘꽃미남’. 아토피 때문에 많이 울고 한글도 몰라 책도 읽지 못하던 내 동생 요한이가 나의 유학 시절 동안 대대적 변신을 했다. 글도 잘 읽고 공부도 잘해 지금은 수재가 됐다.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알 수 없지만, 하여튼 일어났다. 뭐, 우리 집에서는 일상이라 다들 놀라지도 않는다.”
***[역경의 열매] 김상훈 윤정희 부부 (9) “입양이라는 말 없어질 때까지 우리가 다 입양해요”
동생 욕심 많은 둘째 하선이 제안에 하은이까지 가세… 여섯째 햇살이 입양
지난해 청와대가 주최한 국민추천포상 수여식에서 김상훈 목사와 문재인 대통령, 김햇살군(왼쪽부터)이 함께했다.
3녀 2남, 저출산 시대에 아이들과 함께 시내를 다니면 다들 흘깃흘깃 쳐다봤다. 그런데도 우리 부부는 아이들이 하나둘 늘어날수록 어깨가 펴지고 더 당당해졌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또 다른 계획을 내미셨다. 이번에도 동생 욕심이 많은 둘째 하선이를 통해서였다. 2008년 하선이가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나는 우리가 아이들을 더 많이 입양했으면 좋겠어.”
“하선아, 지금도 우리는 가족이 많아. 왜 그런 생각이 들었어?”
“입양이라는 말이 없어질 때까지 우리가 다 입양하면 좋겠어.”
우리 부부는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에서 올라와 눈물이 났다. 어른들의 잘못으로 낯선 가정에 가야 하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마음이 아프다. 하선이는 어른들을 탓하거나 사회를 비난하지 않고, 우리 가정이 대안이 되자고 했다.
물론 가슴으론 이해가 됐지만, 머리로는 여러 핑계가 떠올랐다. 하민이 언어치료에 요한이는 아토피로 아직 갈 길이 멀고 사랑이도 학교 가기 전 다시 안짱다리 수술을 해야 하고…. 이번에는 하은이가 하선이에게 설득당해 이렇게 말했다. “엄마 아빠, 하선이가 동생을 한 명 데리고 오면 입양 아이가 한 명 줄어드는 거래. 우리가 행복하게 지내는 걸 생각하면 어서 동생을 데려와서 우리 가족으로 같이 살아야 한다고 했어.”
고민은 끝났고 행동할 때였다. 부모로서 해준 게 하나도 없는데, 사랑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아이들이 이토록 건강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눈물 나게 고마웠다. 그해 12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늘사랑아동센터에서 여섯째 햇살(16)이가 왔다. 눈이 부시도록 푸르른 하나님의 크리스마스 선물이어서 이름을 햇살로 했다.
햇살이 역시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밤마다 오줌을 싸는 덕에 새벽 두 시에 불을 환하게 밝히는 집이 됐다. 빨래한 이불이 마르지 않아 방석을 깔고 잠을 자는 날도 있었지만, 기쁨이 가득했다.
발육이 늦은 건지 발음이 늦은 건지 알 수 없었으나, 요한이 사랑이 햇살이 모두 언어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미 언어치료를 받던 하민이와 함께 아내는 주 2회 치료실을 다녔다. 그런데도 아내는 힘들다거나 어렵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주님이 주신 무언의 약속 말씀을 믿고 기다렸다.
지난해 2월 청와대에서 초청장이 배송됐다. 입양을 통해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며 정부에서 포상을 하고 싶다고 했다. 우리 부부는 여러 차례 고사했으나 아이들에게 추억을 남겨주기 위해 결국 나와 햇살이가 대표로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부부가 아닌 우리 가족 전체가 받는 상이라 생각해서 받아들였다. 아내는 아이들을 돌봐야 하기도 해서 불참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나와 함께 참석한 햇살이에게 별도의 선물을 준비해 손수 건네주셨다. 햇살이와 우리 집 아이들의 꿈을 응원한다는 친필 메모도 담겨 있었다. 감사한 일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상훈 윤정희 부부 (10) “나도 데려가면 안되나요”… 묻던 아이 눈에 밟혀
우여곡절 끝 3년 여만에 데려온 다니엘… ADHD 증후군 치료 위해 운동 가르쳐
여덟 아들이 2018년 여름 강원도 강릉중앙감리교회 사택 뒷마당에서 물총놀이를 했다. 왼쪽부터 윤, 요한, 사랑, 다니엘, 햇살, 한결, 하나, 행복.
일곱째는 다니엘(16)이다. 다니엘은 여섯째 햇살(16)이를 데리러 2008년 늘사랑아동센터로 갔을 때 “나도 데려가면 안 되나요”라고 물으며 아내의 다리를 붙잡은 아이다. 당시 서류상 입양이 안 된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속을 끓였는데, 3년여가 지난 뒤 부모가 친권을 포기해 2011년 우리 가족이 될 수 있었다.
“사랑하는 우리 아들, 엄마가 더 일찍 오지 못해 미안해. 내 아들.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진심으로 기뻐했고 강릉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또 집에 돌아와서도 한동안 다니엘의 손을 꼭 잡고 다녔다. 눈이 작아 누나들이 ‘외계인’이라 불렀는데도 다니엘은 “엄마 찾아 가족 찾아 지구로 날아왔어”라고 대꾸하며 환하게 웃었다.
우리 집 아이들 모두 그렇지만, 다니엘도 연장아로 우리 집에 왔다. 생후 8개월이 넘으면 연장아라 부른다.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 8개월까지 성격 형성이 이뤄진다고 보는데 이때 이후로는 양부모들이 입양을 꺼리는 게 현실이다.
연장아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우리 집 아이들은 모두 가족이 되기까지 통과의례 같은 통증을 겪었다. 일종의 성장통이다. 다니엘도 사랑이나 요한이처럼 주의력결핍 과다행동장애(ADHD) 증상이 있다고 해서 6개월 정도 약을 복용했다. 이후 정서적 안정을 위해 운동으로 쇼트트랙을 했다. 다섯째 사랑이와 함께 빙판을 누볐다.
다니엘은 운동 신경이 발달해서 그런지 정말 뛰어났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쇼트트랙 강원도 대표 선수로 활약했고, 5학년 때는 강원도 대회 1000m 부문에서 신기록을 경신했다. 운동의 천재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구기 종목에서도 실력을 발휘해 초등학교 농구 선수와 배드민턴 선수로도 활약했다.
다니엘이 중학교에 입학해서는 쇼트트랙 연계가 안 돼 이전부터 원하던 축구로 전향했다. 한 달 만에 실력을 인정받아 공격수로 활약하며 재미있게 운동을 했다. 그런데 축구선수로 키우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걸 알게 됐다. 가난한 목회자 가정에서 아이들 수가 많다 보니 다니엘에게만 몰아서 지원할 수는 없었다. 아내는 다니엘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다니엘은 운동선수가 아닌 체육선생님이 되고 싶어 하니 돈이 좀 적게 드는 운동을 하자고, 축구로 고등학교까지 뒷바라지해줄 형편이 안 된다고 이야기하며 아내는 무척이나 마음 아파했다.
반면 다니엘은 쿨하게 받아들였다. 중학교 2학년 2학기에 곧바로 육상 경보 종목으로 전공을 변경했고 지난해에는 전국대회에서 1위를 해 금메달을 목에 걸고 집에 왔다. 그렇게 하고 싶은 축구 선수가 되도록 지원해주질 못했는데도 금메달을 목에 걸고 들어온 다니엘을 보며 우리 부부는 정말 미안하고 고마워 참 많이 울었다. 다니엘은 현재 고교 육상부에 스카우트돼 전지 훈련차 집을 떠나 있다.
***[역경의 열매] 김상훈 윤정희 부부 (11) 아내의 끈질긴 노력에… 마음 열고 다가온 한결이
요한이처럼 어린나이에 파양 겪은 아이 아픔과 분노로 자신 만의 세계에 갇혀
지난해 3월 백두산에 오른 가족들. 왼쪽부터 하민, 윤정희 사모, 한결, 햇살, 요한, 사랑.
여덟째는 한결(15)이다. 2013년 만 8세에 우리 집에 왔다.
넷째 요한이를 키우면서 우리 부부는 마음속으로 다짐한 게 하나 있었다. 어린 나이에 파양된 아이만큼은 신중하게 생각하자는 것이었다. 애착 형성도 안 되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나오지도 않기 일쑤인 아이를 이젠 더 돌볼 여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입양기관 선생님이 아내에게 어렵게 말씀하셨다.
“저… 우리 기관에 다섯 살에 입양됐다가 일곱 살에 파양돼 온 아이가 있어요. 이제 초등학교 2학년인데 아직 한글도 모르고 숫자도 모르고 말도 잘 안 듣고…. 부모님이 사랑으로 잘 양육하면 진짜 좋아질 것 같은데, 요한이를 보니 이 아이가 생각나서요. 어머니가 입양하시면 안 되나요.”
이번에도 아내는 ‘어렵겠네요’란 말 대신 “우리가 키우지요”라고 답했다. 이어 “우리를 믿고 아이를 보내주시니 저희가 더 감사해요”라고 말했다.
한결이는 우리집에 오는 날부터 힘들었다.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어찌나 떼를 쓰는지 한결이 담당 남자 선생님이 안고 집으로 들어오셨다. 다시 가겠다고 우는 한결이를 보자 요한이의 지난날 모습이 생각났다.
한결이 역시 말썽을 부리거나 화가 나면 책상 아래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아내는 요한이 때처럼 책상 아래로 같이 기어들어 갔다. 책상 아래에서 한결이에게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읽어줬다.
“한결아, 어린 왕자는 여우를 만나잖아.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길들인다는 것’이 무엇이며 길들이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또한 길들이는 것에 대한 책임이 무엇인지 알려 주잖아. 그리고 세상을 잘 보려면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봐야 한다는 걸 알려 주잖아. 엄마가 하고 싶은 말을 여우가 다 하고 있네.”
한결이와 아내는 책상 아래에 한참을 있다가 나중엔 서로 안고 눈물을 흘렸다. 아내가 내민 손을 한결이가 덥석 잡으며 결국 책상 밑에서 나왔다. 한결이는 “부침개가 먹고 싶다”고 했다. 아내는 김치를 썰고 부침가루를 개며 기쁜 맘으로 부침개를 만들었다.
모든 게 순탄치만은 않았다. 나머지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한결이도 마음의 아픔과 분노가 남아있어 학교에서 말썽을 부리곤 했다. 그럴 때면 아내가 달려가 학교 선생님께 무릎까지 꿇으며 용서를 빌었다. 형들을 따라 쇼트트랙 등 운동을 시켰는데 한결이는 어렵게 어렵게 따라왔다. 그저 말썽만 부리지 말라며 한결이 손을 잡고 바닷가를 거닐고 소나무 숲을 달리며 자전거 여행을 하곤 했다. 요한이 때보다 더 간절히 한결이가 주님 안에서 치유되길 바라며 기도했다.
한결이는 나와 홈스쿨을 하며 말씀 안에서 안정적으로 지내고 있다. 마음의 여유를 찾아가는 한결이를 보며 사랑의 힘을 깨닫고 있다. 절대 변할 것 같지 않던 아이들이 변해가는 모습을 통해 우리 부부는 오직 주님께 매달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역경의 열매] 김상훈 윤정희 부부 (12) 변기에 수 없이 연습해도 바지에 ‘큰 일’ 보는 하나
다섯 살이 넘도록 대변 못가리다 믿고 기다려주자 변기에 보기 시작, 이젠 암기력 왕
김상훈 목사 가족이 지난해 9월 강원도 강릉 바닷가에서 각자 이름이 쓰인 티셔츠를 입고 포즈를 취했다.
아홉째 윤(14) 이야기를 해야 하지만, 윤은 우리 집에 가장 늦게 온 아이여서 마지막에 소개하고 싶다. 이번 순서는 열 번째 하나(10)이다. 2014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우리에게 왔다. 우리 가족 전체가 하나 돼 더욱 주님만을 높이자는 의미에서 이름을 하나로 했다.
하나는 강릉의 입양기관에서 왔다. 기관 선생님은 만 4세인 하나가 아직 대변을 화장실에서 해결하지 못한다고 했다. 어디선가 냄새가 난다 싶으면 하나였다. 화장실 변기에 수도 없이 앉히며 연습을 시켰는데도 돌아서면 다시 바지에 큰 실례를 했다. 겨울이 지나 봄이 됐는데도 바지에 큰 볼일을 보는 게 계속됐다. 아내가 소리쳤다.
“이눔의 시키, 한 번만 더 싸면 엄마가 가만 안 둔다.”
하루에 한 번씩 큰일을 치르다 보니 화가 날만도 했다. 매일 아이의 옷을 벗기고 아이를 씻기는데 마침 내가 들어가자 아내가 한마디 더 했다.
“아니 이눔은 왜 꼭 나하고 있을 때만 똥을 싸냐고. 하은 아빠 있을 때 싸면 내가 이런 고생을 안 하잖아.”
“허허허. 하나가 아빠를 도와주네. 하은 엄마, 햇살이 오줌 못 가려 허구헌 날 이불 빨래한 거 생각 안 나남유. 적어도 하나는 이불에는 안 싸잖아유. 옷만 빨면 되니 얼매나 좋아유.”
아내도 듣고 보니 맞는 말이라고 했다. 햇살이가 밤마다 이불에 실례를 해 온 가족이 방석을 깔고 자기도 했으니까. 우리 아이들은 그렇게 힘든 시기를 거치며 가족이 돼 갔다. 그에 비하면 하나는 고작 대변뿐이었다. 아내가 하나에게 다시 말했다.
“아이고, 하나야. 엄마가 정말 미안해. 우리 하나 바지에 똥 싸는 게 편한 거였는데, 엄마가 그걸 모르고 정말 미안해. 나중에 변기에 싸는 게 익숙해지면 그때 거기다 싸. 이불에 안 싸는 게 얼마나 다행인데 엄마가 그걸 몰랐네. 우리 하나, 미안.”
하나와 아내가 서로 계면쩍게 웃었다. 며칠 뒤부터 하나는 언제 바지에 실례를 했는지 모를 정도로 변기에서 정확하게 일을 치르기 시작했다. ‘그렇구나. 아이들은 그냥 인정하고 기다려주면 되는 거구나.’ 다시 한번 우리 부부는 깨달음을 얻었다.
아내를 처음 만난 날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게 하나 있다. 아이들을 정말 좋아한다는 것이다. 아내의 주변엔 늘 아이들이 있었고 나는 그런 아내가 좋았다. 아이들과 환하게 웃고 있는 아내를 보면서 ‘이 사람과는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아내는 아이들을 입양하면서도 아이들만 바라봤다. 아이들의 아픔에 크게 상관하지도, 신경 쓰지도 않았다. 주님이 허락하신 아이들이라면서 기뻐했다.
하나는 초등학생인데 외우기 어려운 긴 문장의 영어도 금방 외우고 성경 구절도 세 번만 읽으면 다 외울 정도로 암기력이 뛰어나다. 큰누나 하은이는 “아무래도 요한이의 뒤를 잇는 천재가 될 것 같다”고 말한다.
***[역경의 열매] 김상훈 윤정희 부부 (13) 생후 8개월 때 우리 품으로 온 막내 행복이
타 종교 기관 통한 입양에 망설이다 “그게 바로 전도”란 하선이 말에 결심
김상훈 윤정희 부부의 열한 번째 막내, 행복이가 지난해 9월 자전거 거치대를 설치한 차량 뒤편에 올라 장난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
우리 집 열한 번째 막내는 행복(8)이다. 생후 8개월 때 왔다. 아내는 꼭 한 번은 아기를 키워보고 싶어했다. 밤에 자려고 누우면 신생아가 응애응애 우는 소리가 들려 눈이 번쩍 떠진다고 했을 정도다. 강원도 불교단체에서 지원하는 입양기관을 통해 아기를 데려오려니 고민스러웠다. 그때 둘째 하선이가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우리는 예전에 대전의 예수님 믿는 곳에서 왔잖아.” “그렇지.” “그럼 전도를 한 건 아니잖아. 이제 불교가 종교인 곳에서 아이들을 데려오면 그게 전도잖아. 안 그래, 엄마.” “하선이 말이 맞네. 역시 넌 날 닮아 똑똑해.” “내가 왜 엄마를 닮아? 난 날 닮았지. 흐흐흐. 그래서 난 김하선이야.”
우리 가족은 꿈에도 그리던 8개월 아기 행복이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이번에야말로 얼굴이 하얗고 예쁜 아기를 데려오자고 했는데, 이번에도 선택권 없이 입양기관 원장님이 데리고 나온 아기를 안고 와야 했다. 눈이 작고 눈동자가 새카맣고 피부도 까무잡잡한 아이. 아토피도 있던 행복이는 목사인 나를 닮았다고 했다. 행복이를 품에 안고 내가 말했다.
“허허허. 얘 봐유. 얼마나 이쁜지. 다니엘처럼 눈망울이 새까매잖유. 그리고 까만 건 우리 집 내력이에유. 우리 애들 다 까맣잖아유. 행복아. 내가 아빠야. 여긴 엄마, 자 엄마한테 가 봐.”
행복이는 낮에는 내 품에서 잘 지냈는데 밤엔 유독 잘 깨고 많이 울었다. ‘내일은 괜찮겠지, 내일은 괜찮을 거야’하는 말을 1년 넘게 하면서 기다렸다. 우유도 많이 먹지 않고 옆에 사람이 꼭 있어야 하고 밤에는 끝도 없이 울었지만, 역시 엄마 아빠 품이 그리워서 그랬던 것 같다. 엄마에게 꼭 붙어 떨어지지 않고 지내며 건강하게 자라났다.
이제 초등학생이 된 행복이는 또래보다 운동 신경이 발달했다. 야구 축구 탁구 배드민턴 등 형들처럼 운동을 따라 하게 됐다. 특히 자전거를 참 잘 탄다. 경포호 한 바퀴를 지치지도 않고 돈다. 소나무 숲길을 따라 형들과 함께 안목항까지도 다녀왔다. 기분 좋게 완주하는 행복이를 보면서 조금씩 욕심이 생겼다. 이번엔 주문진까지 가보자며 형들과 함께 출발했다. 어린 행복이가 형들과 자전거 순서를 맞춰 타고 가는 걸 바라보면서, 전에 아내가 한 말이 생각났다.
“우리 아이들의 엄마로 살아가는 이 순간이 행복해.”
이번에는 내가 그 말을 하게 됐다.
“하나님, 열한 남매의 아빠로 살아가게 해 주신 이 순간이 행복이고 감사입니다. 성장하는 아들들을 보면서 제가 늙어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성숙하게 익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아이들은 자기 삶에 교사이고 스승이라고 했나 봅니다. 저 역시 아내와 같은 고백을 하게 됩니다. 아이들은 제 인생의 교사이고 스승임을, 제 인생의 동반자임을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역경의 열매] 김상훈 윤정희 부부 (14) “입양이 이렇게 좋은 줄 몰랐어… 우리 집이 너무 좋아”
혼내는 엄마가 있어서 행복하다는 은성이, 아빠 엄마 이름 한자씩 따 김윤으로 개명
김상훈 윤정희 부부 가족이 2018년 윤이의 입양을 계기로 강릉중앙감리교회에서 가족사진을 찍었다. 큰누나 하은이만 캐나다에 있어 빠졌다.
윤(16)은 초등학교 6학년이던 2018년 우리 집에 마지막으로 왔다. 원래 이름은 은성이다. ‘예순 살 넘은 아빠를 좋아해 줄까’하는 걱정은 뒤로하고 아들의 등을 한 대 때리며 “우리 아들”이라고 말하고 품에 안았다.
큰 아이를 가슴에 품으며 무조건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이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겠다고 말은 했지만, 마음은 그러지를 못했다. 늘 “싫다”고 말하는 은성이에게 아내는 소리를 지르고 화도 냈다. 좋은 거는 뭐가 있냐고 짜증을 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큰 소리를 낼 때 은성이가 웃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내가 넌지시 물었다.
“은성아, 너는 엄마가 화가 나서 말하는데 웃고 싶냐. 그러면 엄마가 더 화가 날 것 같은데.” “아빠, 나는 엄마가 나한테 소리 지를 때가 좋아.” “그게 무슨 소리야.” “아빠, 그런 엄마가 있어서 진짜 좋은 거야.”
아내에게 이 말을 전하자 아내는 주저앉아 회개했다. 아내는 “이런 나도 엄마라고, 엄마가 있어서 좋다고 말하는 은성이에게 너무 미안해”라며 한참 울었다. 우리 부부는 이번에도 은성이의 겉모습만 봤던 것이다.
은성이는 원래 쓰던 이름을 그대로 쓰겠다고 했다. 어느 날 주민등록등본을 보던 은성이는 열 명의 누나 형 동생들이 전부 한글 이름인데 본인만 한자인 걸 알게 됐다. 이때부터 이름을 바꾸고 싶다고 했다. 가급적 한 글자 이름으로 쿨하게. 우리는 ‘하나’가 있으니 ‘영’은 어떠냐, ‘단’ ‘본’ ‘진’은 어떠냐 하며 여러 이름을 이야기했다. 결론은 은성이가 냈다.
“엄마, 아빠. 이건 어때. 윤, 김윤. 엄마 윤정희, 아빠 김상훈, 한 글자씩 해서 김윤이야.”
그렇게 윤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제 정말 우리 아들이 된 것 같아 좋았다. 사격 선수를 꿈꾸는 윤은 사랑이형과 함께 운동을 한다. 초등학교 졸업식 날 투덕투덕 장난치던 윤이가 연필로 꾹꾹 눌러 쓴 편지를 펼쳤다.
“엄마, 아빠. 내가 김윤이 되면서 그냥 편지 써보는 거야. 우리 집에 오고부터 입양이라는 말이 이렇게 좋은 말인 줄 처음 알았어. 그래서 난 우리 집에 입양 온 게 진짜 좋아. 처음에는 불편한 게 많았는데, 지금은 절대 불편한 게 없어. 초등학교 졸업하면서 더욱 느낌이 와. 누나들도 착하고 형들도 잘해주고 동생들도 귀여워. 엄마, 아빠가 가장 좋아. 엄마, 그냥 다 좋아. 아빠, 난 아빠가 정말 좋아. 그래서 난 우리 집이 좋아. 입양이 이렇게 좋은 거를 알았어. 내가 잘할게. 변하고 있으니까 기다려 줘. 엄마 아빠 고마워. 엄마 아빠의 멋지고 잘생긴 김윤이가. 2019/1/11/금.”
윤의 글을 보면서 주님께서 우리가 한 가족이 된 것을 기뻐하시고 지켜주고 계신다는 확신이 들었다. 자녀는 부모의 능력이나 힘, 물질로 키울 수 없음을, 오직 주님의 말씀과 기도와 순종으로 양육됨을 알게 됐다.
***[역경의 열매] 김상훈 윤정희 부부 (15) 우리집은 ‘3無 가정’… 전래놀이가 일상이 된 아이들
스마트폰·게임·TV 자제시키고 큐티 함께하며 말씀으로 양육… 한글도 성경 암송으로 가르쳐
김상훈 목사(오른쪽) 가족이 지난달 설 연휴 당시 강원도 강릉 경포대를 찾아 수평선을 향해 손짓하고 있다.
열한 명 자녀들을 한 명씩 소개하다 보니 시리즈 중반이 훌쩍 넘어버렸다. 이제부터는 열한 자녀를 키우며 우리 부부가 얻게 된 작은 깨달음을 하나씩 나누고 싶다. 우리 집은 아이들이 하고 싶은 걸 하도록 하는 게 교육 방침이다.
막내 행복이가 일곱 살이 됐을 때 유치원을 다니고 싶어 하지 않아 보내지 않았다. 그저 건강하게 뛰어노는 게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한글을 배우기보다 축구를 먼저 하게 했고, 숫자를 익히기보다 자전거를 먼저 타게 했다. 그림 그리는 대신 자연을 눈으로 익히게 하려고 들로 산으로 바다로 놀러 다녔다.
우리 아이 중에는 학교 성적이 최하위권인 경우도 있다.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다. 성적표가 우편으로 오는데 이들은 너무나 당당하게 말한다. 그래도 꼴등은 아니라고. 그러면 아내는 그런다. 꼴등 아닌 것에 감사하며 축복한다고. 그런 아내 덕분에 우리 아이들은 공부 성적 등수를 행복의 잣대로 여기지 않는다. 오직 말씀을 통해 지혜를 얻는 것이야말로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임을 아이들 스스로 알아간다.
우리 집은 3무(無) 가정이다. 대학을 가기 전까지 스마트폰을 아이들 손에 쥐여주지 않는다. 아이들끼리 컴퓨터 게임을 하지 않게 한다. TV 보는 걸 자제시킨다. 세 가지를 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과연 지켜질까, 나 또한 염려됐다. 그렇지만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니, 아이들과 함께 3무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세 가지를 하지 않으니 무엇보다 저녁식사를 하고 난 뒤에 할 일이 없다. 그걸 알고 아내는 사라져가는 전래놀이를 소환했다. 공기놀이를 못 하는 아이들 손에 다섯 알 공깃돌을 쥐여 주고 한 달 뒤 시합을 해서 우승자에게 선물을 주겠다고 공약했다. 장기 다이아몬드게임 줄넘기 딱지치기 고무줄놀이 땅따먹기 팽이치기까지 알고 있는 모든 놀이를 들고 나왔다. 한때 오목도 유행했다. 2018년에는 다니엘이 오목 왕으로 등극했는데, 지난해엔 한결이가 오목 왕이 됐다.
우리 가족도 처음부터 이렇게 산 것은 아니다. 내가 건설사 현장소장으로 일하고 아내는 주말 사역 전도사이던 시절, 우리 부부는 하은 하선 자매를 키우기 위해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월요일 발레, 화요일 레고, 수요일 뮤지컬, 목요일 색종이 접기, 금요일 아이클레이, 토요일 특강 등을 수강하러 다닌 적도 있다.
하지만 하선이의 폐 질환을 계기로 내가 신학교에 들어가 목회자의 길을 걷고 아내가 저소득층 아이들 공부방으로 사역을 함께하면서 모든 게 바뀌었다. 아이들과 매일 아침 큐티를 함께하며 말씀을 중심에 두고 양육한다. 아이들 한글을 가르칠 때도 성경 말씀으로 가르쳤다. 장난감이 따로 있지 않으니 아이들은 성경 암송을 놀이 삼아 한다. 성경 암송을 서로 하겠다고 나서는 아이들을 보며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을 절감하고 있다.
***[역경의 열매] 김상훈 윤정희 부부 (16) 사랑의 매 든 엄마에게 반발 ‘가출 소동’
올곧게 키우겠다는 생각에 매 들게 돼… 기도하는 가운데 성경에서의 체벌은 매가 아님을 깨달아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는 넷째 요한이부터 아홉째 윤이까지 순서대로 여섯 아들이 지난해 9월 강원도 강릉 바닷가에서 바위 위에 올라서 있다.
열한 명 자녀를 키우기가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좌충우돌 시행착오도 있었다. 체벌 문제도 그중 하나였다.
아내는 아이들을 바르고 올곧게 교육하려는 방법의 하나로 마지막엔 매를 들었다. 어린 시절 경험 그대로, 아이를 사랑하면 훈육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성경 안에서도 체벌을 언급했으니 아내는 성경대로 자녀들을 가르치는 거라고 위안 삼았다.
한두 명도 아니고 워낙 많은 아이를 키우다 보니 아내는 거의 매일같이 오늘은 이 아이 내일은 저 아이를 혼내야 했다. 그러던 중 사고가 났다. 아내는 스스로 ‘예쁘지 않은 이런 모습의 엄마를 아이들이 좋아해 줄까’할 정도로 생각했다는데, 그날 바로 여덟째 한결이가 집을 나갔다. 지난해 가을이었다.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아이를 찾아 사방을 돌아다녔다. 아내는 스스로 뭘 잘못했는지 자문하며 주님께 울며 기도했다. 그때 마음 안에 울림이 들렸다고 했다.
‘자녀를 양육하면서 체벌이란 성경의 단어는 매를 들고 때리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 말씀을 성경으로 깨달을 때까지 가르치고 또 가르치라는 뜻이다. 그걸 몰랐구나.’
아내는 가슴을 치며 부끄러워했다. 한결이를 만나면 한결이가 사고치고 말썽부린 걸 성경 안에서 잘 이야기해 줬어야 했는데, 때려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한결이는 이튿날이 돼서도 돌아오지 않았다. 밥은 먹고 다니는지, 잠은 잘 잤는지, 혹시 나쁜 생각을 하는 건 아닌지… 온 가족이 염려하고 아파하며 결국 경찰에 신고해서 아이를 찾았다. 알고 보니 한결이는 이틀 동안 교회 안에서 아주 편안하게 지내고 있었다. 교회 사택에 사는 우리는 코앞에 한결이를 두고 엉뚱한 곳을 찾아다녔던 것이다.
웃음도 나고 안도도 되면서 다시 재회한 한결이를 두고 아내는 “넌 내 아들이야”라고 말했다. 한결이는 “잘못했어요. 다시는 말썽 안 부릴게요”라고 말했고, 아내는 “미안하다. 엄마가 감정이 힘들어도 우리 대화로 해결하자”고 말하며 한결이를 안았다.
둘째 하선이도 동생들 편에서 아내에게 이렇게 말해 줬다. “엄마, 나도 가출은 안 했지만 10대 때 힘들었어. 스무 살이 되고 나서는 그때 왜 그랬을까 하고 후회가 되더라고. 지금은 엄마 옆에서 엄마 껌딱지가 돼 있지만 말이야. 동생들도 지금은 자기들이 뭘 잘못하는지 전혀 몰라. 나이가 좀 들면 잘못했다고 다들 엄마 품으로 들어올 거야. 참는 김에 좀 더 참아.”
말썽부리던 아이들은 점차 변하고 있다. 아내는 여전히 아침에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서는 아이들을 한 명씩 안아주며 사랑한다고 말한다. 줄을 서서 엄마의 포옹과 사랑한다는 말을 듣기 위해 모여드는 아이들을 보며 우리 부부는 아침마다 주님께 고백한다.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아이들 표정이 달라지고 있고 무엇보다 매 순간 긍정적으로 변해있는 우리 가족이 되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역경의 열매] 김상훈 윤정희 부부 (17) 세상에서 일등이 아닌 늘 최선 다하는 11남매
해마다 성경퀴즈대회 참가하는 아이들… 말씀 안에 세상의 지혜 다 있음 알게 돼
김상훈 목사(왼쪽)가 2018년 여름 자녀들과 함께 자택에서 매일 아침 진행하는 큐티를 통해 말씀을 나누고 있다.
열한 명 우리 아이들을 아는 분들은 한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아이들이 참 밝고 착해요.” 그러면 우리 부부는 대답한다. “우리가 키운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아이들 가정교육으로, 아이들 인성 문제로, 아이들 미래로 염려하는 부모님들께 우리 부부는 과감하게 이야기한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서만 살라고.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기를 바란다면 세상의 지식을 바라는 학원으로 보낼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암송하도록 교육해 달라고. 답은 성경 안에 있다고.
우리 아이들은 해마다 감리교단에서 여는 성경퀴즈대회에 참가한다. 매년 1등은 요한이 몫이다. 요한이는 성경을 알아갈수록 공부가 재밌다는 걸 깨닫게 됐다. 성경 안에 세상의 지혜가 다 들어있다는 걸 알면서부터 아이들이 학교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일등을 하는 아이로 교육하는 게 아니라, 늘 최선을 다하는 아이로 성장시키는 데 목적이 있음을 열한 명 아이를 키우며 알게 됐다.
우리 가족은 특히 신약성경 야고보서 말씀을 좋아한다. 야고보서 1장에서 5장까지 달마다 반복해서 읽고 쓰도록 한 적도 있다. 기독교는 행함의 믿음, 말씀 안에서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이라는 걸 아이들에게 강조하고 싶었다. 야고보서를 구절구절 통째로 외우기를 반복한 결과 아이들의 대화가 조금씩 달라졌다.
과일이나 과자가 있으면 서로 더 먹겠다고, 햇살이가 더 먹으니 나눠 달라고 말하던 아이들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는 말씀을 농담처럼 외우며 양보하기 시작했다.
아내는 열한 명 아이들과 부대끼다 보니 소리를 지르거나 급한 성격을 참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때 하선이가 엄마 옆에서 야고보서를 암송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 1:19~20)
멍해진 표정으로 하선이를 바라보던 아내도 지지 않고 말씀으로 대답했다.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행하게 버려둔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잠 29:15)
그랬더니 하선이가 또 대꾸했다. 우리 가족은 모녀의 성경 배틀을 숨죽여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1~2)
아내가 잠시 하선이를 바라보더니 소리 질러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성경 배틀은 딸의 승리로 끝났다. 동생들은 밤늦도록 이부자리에 누워 성경 배틀에서 엄마를 이긴 하선이 누나의 인용 말씀을 한 구절 한 구절 또다시 암송하면서 즐거워했다.
***[역경의 열매] 김상훈 윤정희 부부 (18) “집도 핵교유~” 중학교 입학 전 1년간 아빠와 홈스쿨
사춘기 접어들자 “왜”라고 질문 공세… 함께 공부하며 성경 속 이야기 등 진솔한 대화 나눠
캐나다에 유학중인 첫째 하은이(오른쪽 세 번째)가 2018년 10월 새 가족이 된 아홉째 윤이(왼쪽 네 번째)를 보러 일시 귀국해 강릉 전통시장에서 동생들과 어묵을 먹고 있다.
열한 명 아이들 가운데 아들들이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우리 부부는 고민에 빠졌다. 저학년 때는 대화만 해도 이해하고 받아들이던 아이들이 고학년에 올라가면서는 ‘왜’라고 질문하기 시작했다. “왜 우리 집만 아이들이 핸드폰 없어야 해” “왜 우리 집은 텔레비전을 안 보는데” “왜 우리는 컴퓨터를 안 하는 거야” “왜 우리는 게임을 하면 안 되는데”….
수없이 질문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아내와 나는 기도하며 주님의 지혜를 구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지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아이들은 세상 문화를 더 즐거워하고 재미있어했다. 주일에 교회 가서 예배드리면 월요일까지는 교회에서 배운 노래를 부르다가 화요일부터는 친구들이 부르는 랩이나 아이돌 히트곡을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 부부는 “부르지 마라” “세상을 따라 하면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 “안 된다” “하지 마라”는 말이 많아질수록 아이들은 반항하려 했다. 그러다 내가 아내에게 말했다.
“난 우리 아이들이 중학교에 올라가기 전에 1년 정도는 가정과 교회 안에서만 자랐으면 좋겠네유. 그래서 부분적으로 6학년은 홈스쿨을 했으면 좋겠구먼유.”
아내는 “그럼 하은 아빠가 아이들 델꾸 다니며 공부도 하고 운동도 시키고 해야 하는데 할 수 있겠남유”라고 되물었다. 나는 “괜찮아유. 마누래가 도시락 싸는 게 힘들지만 않다면 중학교 올라가기 전에 아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싶구먼유”라고 답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집 독특한 교육 방식인 홈스쿨이 시작됐다. 1년 정도 내가 사역하는 강릉아산병원 원목실에서 함께 공부하며 성경 인물에 관해 이야기도 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아이들이 배워야 할 지식은 인터넷 강의나 여러 학습지를 통해서도 익힐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가정 안에서 형제자매와 함께하며 배우는 교육이었다. 이때부터 내가 아이들에게 하는 말이 생겼다. “집도 핵교유~.”
집안일 역시 아이들 특징에 맞게 역할을 분담했다. 한결이는 무얼 시켜도 벌떡 일어나 아내의 심부름을 잘한다. 윤이도 한결이를 도와 쓰레기 버리는 일을 참 잘한다. 다니엘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해 선물 받은 음식이 있으면 교회 사택의 다른 목회자 가정에 배달하는 일을 시킨다. 그러면 쏜살같이 다녀온다. 동생들과도 몸으로 잘 놀아준다.
햇살이는 아이들 노는 모습을 보는 걸 좋아해 동생들 다칠까 봐 주변을 돌봐주는 일을 자처한다. 사랑이와 요한이는 참 꼼꼼해서 청소에 특기를 보인다. 열 번째 하나는 신발 정리를 잘하고, 막내 행복이는 양말 짝 맞춰 놓는 일을 잘한다.
우리 집은 엄마 일을 돕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함께 사는 가족이니까 서로 역할을 분담한다고 생각한다. 누나들 대신 아들들에게 청소를 맡긴다. 나중에 며느리들에게 “남편을 잘 가르쳐 줘 고마워요”란 말을 듣는 게 아내의 바람이다.
***[역경의 열매] 김상훈 윤정희 부부 (19) 우리 집은 ‘한 달 살이 가족’… 통장 잔액 모두 이웃 돕기
매년 겨울 되면 연탄 배달 봉사 등 아이들과 함께 어려운 이웃 도와… 아내는 인세 기부로 나눔 실천해
김상훈 목사(뒷줄 왼쪽) 가족이 지난해 2월 강원도 강릉에서 연탄 봉사를 하며 하트를 만들어 보이고 있다.
소외된 어르신 가정엔 지금도 연탄보일러를 때는 집이 많다. 7년 전 아이들과 처음으로 연탄을 배달하던 날부터 우리 가족은 지금까지 겨울만 되면 쉬지 않고 연탄을 배달한다. 인원수가 많은 우리는 연탄은행으로부터 봉사자가 급히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으면 아이들과 총출동한다. “강릉연탄은행 홍보대사는 우리 집이여”를 외치며 아이들이 연탄을 거뜬히 나를 때, ‘언제 이렇게 자라서 어른 몫까지 감당하나’ 속으로 되뇐다. 그저 흐뭇하고 행복하다.
연탄을 배달하는 날은 늘 아이들과 외식을 한다. 칼국수나 자장면처럼 소박한 메뉴가 주종이지만 아이들이 참 좋아한다. 한결이가 “우와~ 오늘은 칼국수 먹는 날”이라고 신이 나서 소리치자, 아내는 “너는 연탄을 배달하는 게 좋은 거니, 아님 칼국수를 먹어서 좋은 거니”하고 물었다. 한결이가 “엄마, 나는 아직 어린인가 봐. 먹는 게 더 좋아”라고 하자, 다니엘은 “연탄을 배달하니 칼국수를 먹는 거야. 그러니 연탄 배달이 좋은 거지”라고 정리한다. 다시 한결이가 “아냐 다니엘 형. 나는 칼국수가 더 좋아”라고 말하자, 하선이가 결론을 냈다. “그럴 때는 둘 다 좋다고 하는 거야.”
아내는 내가 50대에 목사 안수를 받을 때 하나님께 약속했다. 통장의 잔액을 다음 달로 이월시키지 않겠다고 말이다. 우리 집은 한 달 살이 가족이라고 선포한 것이다. 조금이라도 잔액이 남으면 어려운 이웃을 돕는 쪽으로 흘려보낸다.
이 때문에 홀로 사는 어르신 추석 음식 나눔도 재정이 모자라 하선이의 50만원으로 시작해야 했다. 평생 모아온 용돈을 내놓은 아이의 마음을 기억하면서 지금은 가족 지정 나눔으로 바꿔 매주 정기적으로 반찬을 만들어 어르신들께 배달한다.
아내 윤정희 사모는 가슴으로 낳은 아이들이 커가는 과정을 계속해서 글로 써왔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느끼는 행복과 주님이 주시는 사랑에 대한 깨달음을 엮은 이야기들인데 이 역시 세상을 향해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싶은 마음으로 이어졌다. ‘하나님 땡큐’(규장, 2012)의 인세는 어려운 목회자 가정의 자녀 학자금으로 전액 후원했다. ‘하나님 알러뷰’(규장, 2014)는 션 정혜영 부부가 앞장선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 건립 캠페인에 전액 기부했다. 이번 기고의 근간이 된 ‘사랑은 여전히 사랑이어서’(두란노, 2016)와 ‘길 위의 학교’(두란노, 2019)의 인세 역시 각각 CGN TV 전파 선교비와 입양 자녀들을 위한 행사 후원금으로 기부했다.
고인 물은 썩는다고 한다. 하나님은 무엇이든 순환해서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원하신다. 그래서 봉사와 나눔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가진 자들이 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일상이 돼야 함을 알게 됐다. 내가 아이들과 홈스쿨을 하며 “집도 핵교유~”하고 외쳤다면, 아내와 아이들은 행동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눔도 핵교유~”
***[역경의 열매] 김상훈 윤정희 부부 (20·끝) 입양은 영혼 구원… 모든 기독인 동역자 됐으면
조건 없는 주님 사랑 보답하려 입양… 처음 하은·하선 품으며 무한한 행복
가슴으로 열한 남매를 낳은 대한민국 최다 입양부부 김상훈 목사와 윤정희 사모가 지난해 3월 강원도 강릉 오죽헌에서 나란히 벤치에 앉아있다.
안녕하세요. 마지막 편을 맞이해 행복한 엄마가 인사드립니다. 저는 우주에서 가장 멋진 김상훈 목사랑 지구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천국의 아이들 열한 명과 알콩달콩 사는 행복한 엄마 윤정희입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행복했냐고 물어보시면 그건 절대 아니라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우리 부부는 결혼 후 3년에 걸쳐 네 번의 유산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다 20년 전 기적적으로 친자매인 하은이와 하선이를 만나 가슴으로 품으면서 행복이 따라왔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알아갈수록 주님께서는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죠.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나님은 저같이 부족한 사람을 아무 조건 없이 양자의 영으로 자녀로 삼으시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해 주셨어요. 이 은혜를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입양이란 걸 깨달았어요. 이후 20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자녀를 입양한 가정이 됐습니다.
조건 없이 받은 주님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보답하고 싶은 마음으로 열한 명 자녀를 품었습니다. 품을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길… 또 한 명을 품을 수 있다면…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다면…’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때마다 제 곁에서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 돼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제 아이들이었어요.
아이들과 날마다 행복하냐고요.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어렵고 힘들 때도 가끔 있지요. 그렇지만 날마다 행복하려고 아이들과 함께 노력하며 지난 시간을 걸어왔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셨기에 가능했지요. 절대 짧지 않은 20년이었습니다.
부부가 직장을 다녀 둘 다 너무 바빠서 어떻게 양육할지 모르겠다는 분들께 저희는 이렇게 말해요. 아침에 학교 갈 때 모든 아이를 안아주며 사랑한다고 말하자고. 밤에 잠들 때 아이들의 이야기를 짧게라도 들어주고 “우리 아이 멋지다”라고 칭찬해 주자고. 아무리 바빠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아이들과 손잡고 여행을 하자고.
정말 갈 데가 없다면 제가 사는 강릉으로 오세요. 경포 해변이 있고, 호수와 소나무에 커피 향이 물씬 풍기는 강릉, 무엇보다 천국의 아이들이 사는 동네로요.
윤이가 우리 가족 품에 안기면서 인터넷 카페를 하나 만들었어요. “입양이라는 단어가 없어질 때까지 엄마 아빠가 아이들을 다 입양해”라고 했던 하선이의 말을 기억하면서요. 이 모임이 가정과 부모 없이 자라는 아이들에게 가정을 선물하기 위한 한국기독입양선교회로 발돋움했어요.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임을 고백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가족임을 선포했어요.
입양은 영혼의 구원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 입양된 사실을 깨닫고 주님의 귀한 아이들을 입양하는 동역자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 고백하며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주여, 우리 가족을 오직 주님의 도구로 사용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