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환상의 해안도로 라이딩
제주 월정리 해변, 모래위 바다물의 색상이 아름다운 곳
자전거로 전국 일주 여행의 첫 번째 실행을 제주도에서 시작했다. 제주도는 육지와 달리 아열대 기후라서 이국적 풍광이 많고, 화산으로 생성된 특별한 지형이라 경이로운 경관이 많다. 또한 관광객 유치를 위한 개발을 많이 하여 박물관의 종류가 매우 많고, 역사적인 관광명소, 음식점, 숙박업소 등의 위락시설이 많아 들러볼 곳이 많다. 또 4월에 야영을 하려면 따뜻한 곳이어야 하기 때문에 먼저 제주도에서 라이딩을 시작했다. 그 다음에 남해안, 동해안, 서해안, 내륙으로 코스를 나누어 차례대로 돌아볼 예정이다.
사전에 경험자들에게 자문을 받았더라면 수월하게 라이딩을 했을 텐데 주변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의욕과 용기만으로 길을 나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사전준비가 소홀하여 시행착오도 많았고, 필요 이상의 지출도 했다.
사전에 예상하지 못해 겪는 어려움을 그때그때 극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인생길에는 스승이 필요하고, 선수에게는 코치가 필요하며, 여행에는 가이드가 필요하다’는 걸 경험 속에서 절실히 깨달았다.
직장에서 퇴직하였기에 수입은 줄었지만 시간은 많다. 그래서 장기간의 여행을 최소의 경비로 하면서 운동까지 겸하고자 자전거 여행을 계획한 것이다. 불편한 점이 많았지만 각오했기 때문인지 잘 견딜 수 있었다.
황○○ 선생님이 퇴직한 후, 강원도 고성 통일 전망대에서 부산까지 부인과 함께 한 달을 걸었다는 말을 들었다. 퇴직하여 매우 뜻깊은 여행을 했구나 싶었다. 그런데 한 달 정도의 시간은 좀 길고 매우 힘들었을 것 같다. 걷는 것도 좋은 점이 있지만 속도가 느려 장거리를 이동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그런 어려움 때문이었는지, 황 선생님 내외가 캠핑카로 개조한 승합차를 타고 며칠 전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다.
퇴직하면 무제한의 시간을 즐길 수 있다. 방학이 아니면 여행하기 힘들었던 시간의 멍에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또 휴일에는 도로의 체증이 심하다. 특히 봄・가을의 관광 철과 휴일에는 명승지에 차가 밀려 이동이 어렵다. 또 관광 성수기에는 경비가 더 들고 사람이 많아 불편한 일이 많지만 평일에 여행을 하면 길이 막히지 않아 여유롭게 여행할 수가 있다.
전국 일주 자전거 여행을 준비하려니 갖추어야 할 게 참 많았다. 소형 텐트와 침낭, 취사구인 버너와 코펠, 여벌 옷과 신발, 세면도구와 필기구, 약과 음식, 지도와 일기장, 쌀과 반찬, 생필품을 모두 갖추어야 했다. 또 그 많은 물품을 자전거에 실을 수 있는 가방, 휴대폰 충전을 위한 보조 밧데리의 구입 등 여러 가지 준비물품이 필요했다.
전국을 어떤 방식으로 다닐 건가? 집에서 한번 출발하여 전국을 모두 다니고 돌아오는 것으로 계속 여행하기는 어렵다, 계절별로 옷도 갈아입어야 하고 병원도 한 달에 한 번은 가야 한다. 휴식도 필요하고 집안일도 해야 하기 때문에 한 달에 2주일만 여행하고 2주는 쉬면서 가사 처리, 여행에 대한 기록을 하기로 했다.
제주도, 전남과 경남의 남해안, 강원도와 경상남북도의 동해안, 경기도와 충남, 전라도의 서해안, 강원도에서 경남까지의 5개 코스로 나누었다.
첫 번째 목적지는 제주도였다. 제주 해안도로를 한 바퀴 돌고 명승지 관람, 특별한 사람들을 탐방하는 계획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단순히 달리는 것만이 아니라 관광명소를 관람하고, 또 자기 세계를 추구하는 사람을 탐방, 취재하기로 했다. 그야말로 다양한 여행의 멀티플레이였다.
제주도는 집에서 멀기 때문에 필요한 물품이 빠지지 않도록 생활도구들을 자동차에 충분히 싣고 갔다. 생할 필수품인 세면기구, 침구와 취사기구, 문구와 의류, 자전거 용품이나 약품, 심지어는 펜치와 철사, 호치케스까지 준비했다. 자동차를 제주도의 어느 한 곳에 주차해 놓고 자전거로 여행하다가 필요한 게 있으면 가지러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1. 라이딩의 출발, 자전거를 싣고 제주도로
수원 집에서 오후 5시에 자동차에 자전거와 짐을 싣고 목포를 향해 출발했다. 고창 고인돌휴게소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목포항 여객선 터미널에 도착한 것은 밤 9시 20분. 산타루치노 호에 자동차를 싣고 부두로 나와 밤바다를 보았다. 오른쪽 해안가의 집들을 보니 낮은 산 같은데 층층으로 빛나는 불빛이 밝은 별 무리 같다. 왼쪽 가장자리에는 잠자리가 날개를 편 것 같은 조명이 특별했다. 그 조명은 무엇일까?
목포항에서 바라본 항구 오른쪽
편의점에서 구한 커피 한 잔을 들고 부두로 와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배가 상당히 컸다. 아래에서부터 2, 3층은 자동차 주차장이었고 일반 객실은 3층, 4층과 5층은 특실이었다.
퇴직 후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혼자서 처음으로 나선 길. ‘계획대로 여행이 잘 될 수 있을까?’, 순조로운 여행을 할 수 있을지 기대와 설렘으로 긴장이 되었다. 10시에 승선하여 3층의 일반 객실로 들어가니 의자가 없고 넓은 방바닥이었다. 앉아 가는 게 아니라 누워 가는 자리였나 보다. 앉기가 불편하여 객실로 들어가지 않고 배 안을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객실에서 나오니 식당과 편의점, 주점, 인형 뽑기의 전자기기 등이 있는데 사람들이 많아 상당히 소란했다. 단체로 온 관광객 몇 사람이 큰 목소리로 농담을 하며, 웃고 떠들어 상당히 소란스러웠다.
거실 같은 공간의 가장자리에 의자가 몇 개 있을 뿐이었다. 4층은 특실로 방의 크기가 조금 작았는데 내부는 볼 수 없었다. 5층은 더 고급스러웠다. 실내로 들어가기 전의 거실 같은 곳에는 벤치가 몇 군데 있는데 사람들이 누워 있거나 앉아 있다. 가족이나 친구 등 두세 명의 일행이 대화하기에는 그 벤치가 일반 객실보다 한결 편할 것 같았다.
산타루치노 호의 옆 모습
객실로 돌아와 누우려고 하니 구석 쪽에는 거의 사람이 있어 한 사람 옆에 누웠다. 옆에 누워있는 50세 전후의 남자와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직장에 휴가를 내고 혼자서 제주도 여행을 가는데 제주도를 이틀 구경한 후에 또 설악산으로 갔다가 하루 더 구경하고 직장에 복귀할 거라 했다.
누워서 잠을 청해보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옆 사람도 잠이 안 오는지 밖에 나갔다가 한 시간 이상 지난 뒤 돌아왔다. 어디에 있다 왔느냐고 물으니 맥주를 마시고 왔다고 했다.
바닥에 난방 장치가 안 됐는지 따뜻하지 않았고 실내 온도가 낮아 서늘했다. 일부 승객은 이불을 덮고 있는데 아마도 자신이 가져온 것 같았다. 자정을 넘겨 설풋 잠이 들었는데 눈을 뜨니 새벽 4시가 조금 넘었다.
차량을 가지고 온 분은 차에 승차하라는 방송이 나와 5시 20분에 차가 있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차를 찾지 못하고 헤매다가 겨우 찾았다. 2층에 주차한 걸 모르고 1층에서 찾느라 애를 먹은 것이다.
2. 환상의 해안 자전거도로로 라이딩 시작
늘씬하게 자란 워싱턴야자나무가 이국적인 이호태우해수욕장 주차장에 자동차를 주차하고 자전거를 꺼내 라이딩을 준비했다. 소나무가 있는 바닷가 언덕으로 올라가 해수욕장을 살폈다. 앞으로는 넓은 바다와 모래밭, 오른쪽에는 화장실이 있고 소나무 밭이 있다. 그곳이 야영장이라는데 야영객은 없다. 왼쪽으로는 현사포구로 방파제가 해수욕장의 파도를 막고 있다.
해안 길에 자전거길 표시의 청색선이 그어져 있다. 자동차와 자전거도 갈 수 있고, 올레길도 함께 있다. 차와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이다. 바다와 해수욕장을 보며 달릴 수 있어 시야가 좋다. 어제는 비가 내리고 흐린 날씨였는데 오늘은 맑게 개어 기분 좋게 라이딩을 시작했다.
바닷가로 10분쯤 달리니 검은 바위 바닥에 일렁이는 파도가 하얀 물거품이라서 빛깔이 선명했다. 지대가 조금 높은 언덕에 오르니 정자가 있다. 정자로 다가가니 몇 사람이 반기며 유인물을 주었다. 종교 단체의 홍보물이었다. 내 자전거의 가방을 보고 무엇을 실었는지, 어디까지 갈 건지 물었다.
구엄 포구가 나왔다. 돌염전이란 표지판이 있다. 평평한 바위에 바닷물을 말려 소금을 만드는 염전이다. 서너 평이나 될까, 저 조그만 바닥에서 소금은 얼마나 생산이 될까.
산자락을 달리다 보니 백년초 선인장이 넓은 밭에 무성하게 자라 있다. 백년초 잎 끝에는 대추 같은 열매가 빨갛게 달려있다. 가시가 험상궂은 그 선인장에 혈액순환을 도와주는 성분이 있단다. 백년초를 먹으면 가래, 기침, 천식에 효능이 있어 백년을 살 수 있어 백년초라 했단다. 길가에 가공 공장도 있다. 약용으로 가공하여 판매하는가 보다. 백년초 밭 맞은편 산기슭엔 선인사라는 절이 있다.
조금 더 가니 바닷가에 해거름전망대와 카페가 나왔다. 2층 건물에 전망대와 카페가 있고 놀이터, 농구장, 축구장 등 휴게 시설이 잘 조성된 공원이었다. 잠시 쉬어가려고 자전거를 기우려 세웠다. 자전거에 30kg 정도의 짐을 실어 받침대가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휘어졌다. 나사를 풀어 받침대를 빼서 굽은 곳을 펴 다시 끼웠으나 금세 다시 휘어졌다.
정오가 되어 세면대 가까운 곳에서 라면을 끓여 햇반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길가의 좁은 화단에 풍엽국 꽃이 노랗게 피어있다. 제주도에 와서 많이 본 꽃이다.
한가한 시골길을 달려가는데 큰 밭에서 양파 수확이 한창이다. 수십 명의 아낙들이 양파를 뽑아 트럭에 실었다. 대규모였다.
제주의 서쪽, 서귀포 대정읍 상모리. 제주의 서쪽에서에서 남쪽으로 돌아가는 오르막을 힘겹게 오르니 아래에 노란 유채꽃이 활짝 피어있다. 제주의 사진에서 흔히 본 유채꽃이 활짝 피었다. 산 아래 멀리 푸른 바다가 있고, 오른쪽은 송악산이다. 많은 사람들이 길가에 차를 대고 유채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촬영했다. 유채꽃은 제주도에서 봄을 대표할 만한 경치의 하나인데 이곳이 바로 그랬다. 정말 아름다운 봄의 향연이다.
송악산 산자락에 핀 유채꽃
유채꽃 밭 옆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기에 영문도 모르고 무작정 자전거를 끌고 따라갔다. 산길을 1 km 쯤 올라가 왼쪽 산마루에 서니 바다가 잘 보였다. 오른쪽에는 깎아지른 벼랑이 보였다. 바다를 마주한 절벽 바위가 부안의 채석강을 연상하게 했다.
제주도 여행 중인 황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돈내코의 원앙폭포에 있는데 그곳에서 오늘 캠핑을 할 거란다. 앞으로 두 시간만 달려가면 만날 수 있겠다. 그곳으로 달려가겠다고 말하고 서둘러 자전거의 페달을 밟았다.
중문관광단지 교차로에서 좌회전하여 여미지 식물원을 지나 믿거나말거나 옆까지 갔는데 해안 자전거길 표시인 청색 선이 보이지 않았다. 몇 사람에게 자전거 길을 물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자전거 네비를 켰으나 방향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해는 기울어가고 바닷바람은 싸늘한데 전화가 걸려 왔다. 고등학교 동창이 고교 졸업 이후 처음으로 전화를 했는데 여유 있게 통화할 겨를이 없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돈내코에 가서 황 선생님을 만나고 싶었다.
바다 쪽으로 조금 달리다 보니 자전거 길 표시인 청색선을 만났다. 그러나 날이 어두워졌고 시간은 밤 7시가 되었다. 국제컨벤션센터, 아프리카박물관, 히든호텔, 약천사 입구를 지나 제주유스호스텔이 나와 숙박 요금을 알아보니 6만원이었다.
민박을 알아보려 조금 더 달리다 보니 강정동 로터리 부근의 한식당이 나왔다. 저녁을 먹으러 들어갔다. 밥을 주문하고 황 선생님께 오늘은 돈내코에 못 갈 것 같다고 전화를 했다. 날은 어둡고 서귀포도 오지 못했다. 돈내코까지 가야 하고 돈내코에서 원앙폭포 주차장을 찾아가야 하는데 아무래도 찾아가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음식점에서 식사를 마치고 서귀포 방향으로 조금 더 달리니 ‘서부민박’ 집이 나왔다. 들어가 방값을 물어보니 4만원이었다. 1층에 자전거를 놓고 2층 방에 무거운 가방을 들고 들어갔다. 몸을 씻고 짐을 정리한 후 일기를 쓰다 졸려서 자리에 누웠다.
3. 강정마을과 비비스 리조트의 소나무 분재
서부민박에서 아침을 지어먹고 짐을 챙겨 나오니 아침 9시였다.
민박집에서 300 m 남짓 달리니 강정사거리였고, 거기서 우측 해안가로 제주해군기지가 보였다. 기지 앞의 사거리에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깃발이 많이 걸려 있다. 해군기지 정문 앞에서 시위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아, 여기가 매스컴에 많이 보도되었던 강정마을이다. 자전거 길을 벗어나 정문 입구로 갔다. 한 사람이 정문 앞 인도에 앉아서 깃발을 흔들며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시위를 했다.
켄싱턴리조트를 지나니 약근천, 다리 옆으로 개천을 따라 산으로 들어가는 오솔길이 나왔다. 사람 한두 명이 나란히 걸어가면 좋을 것 같은 호젓한 산길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안으로 들어가다 언덕 밑에 주차하고 걸어 올라갔다. 켄싱턴리조트의 야외 수영장이 나왔다. 수영장 주변으로는 키 큰 종려나무와 카나리아야자나무 등 아열대 수종의 나무들이 많았고 깨끗하게 보이는 마치 동남아의 어느 휴양지에 온 것 같은 이국적 풍광이었다.
이곳은 제주올레길 7코스의 길목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목재로 지은 식당이 있고 그 아래의 기둥 문에 ‘올레 베이스 캠프’ 라고 씌어 있다. 바다와 범섬을 조망할 수 있는 운치 있는 곳이다. 조그만 정자와 벤치를 여러 개 만들어 놓아 휴식하기 좋은 곳이다.
그 정자에서 남쪽 바다가 보이는데 아쉽게도 T자 모양의 긴 방파제가 수평선을 가리고 있다. 강정항과 해군기지의 파도를 막기 위한 방파제이지만 시야까지 막고 있다. 바닷가로 내려가니 강정천의 물이 바다로 떨어지는 벼랑이 나왔다. 올레길 6코스의 쇠소깍과 비슷한 바위 벼랑이다. 벼랑 안으로 바닷물이 출렁거리며 골 안으로 파도가 밀려왔다. 아늑한 정경이다.
주변을 돌아보고 나오는데 망원 카메라로 혼자서 사진을 촬영하던 사람이 가까이 왔다. “무슨 사진을 촬영하십니까?” 하고 물으니, “강정천요.” 라고 대답했다. 그는 2년 전에 제주도 올레길을 걷다가 이곳이 좋아 지금까지 이곳에서 혼자 살면서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해주었다. 제주도는 건천(물이 마른 내)이 대부분인데 이 강정천은 서귀포에 흘러내리는 물의 60 %에 해당될 만큼 많은 양의 물이 흐르는 곳이다. 바로 이 옆에 흐르는 악근천도 물이 잘 흐르는 강정천의 일부다.
연중 물이 흐르는 이 개천과 강정마을의 아름다운 풍광을 지키고자 해군기지를 만드는 것에 반대하는 투쟁에 참여했다. 그래서 지금은 해군기지가 만들어져 반대하더라도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겠지만 그 이후의 변화에 대한 자료를 모아보기 위해 이 마을에 방을 얻어 혼자 살면서 사진과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직장도 없이, 그런 일을 계속하는 그에 대해 취재를 하고 싶다니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며 인터뷰를 사양했다.
강정마을에 해군기지를 건설하게 된 과정에도 문제가 있다고 했다. 2002년에는 화순항에 해군 전략 기지를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그 후, 화순항에 7천억 원의 예산으로 해군 부두를 만들었다. 위미항도 해군 기지의 후보지로 검토를 했는데 지형적으로 어려움이 많은 강정마을로 갑자기 결정한 배경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래서 농어민들의 생활터전의 훼손과 자연 환경의 파괴, 동북아 군비 경쟁의 거점이 되는 것에 반대한단다. 여러 단체와 주민들의 반대 시위는 물론 공사 차량을 막아 공사가 예정보다 1년 이상 지체되었다가 2016년 2월에야 해군기지가 들어섰고 민군복합형 항구를 만들게 되었다.
일본은 독도를, 중국은 이어도를 노리고 해군력을 강화하고 있어 우리도 그에 대응할 해군력을 강화하여 일본과 중국을 견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해군 기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해의 평택과 목포, 동해의 동해시, 남해의 진해, 부산에도 해군기지가 있고, 제주의 화순항에도 해군 전용부두를 건설 중이므로 굳이 강정마을에 해군 기지를 만들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강정항에 해군기지가 들어서면 안 되는 이유를 입증할 사진을 촬영한다는 것이다.
강정포구는 바람이 드센 지형이라 해군기지나 항구로서는 적절한 지역이 아니라고 했다. 또 이렇게 중요한 하천은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곳에 방파제를 만들고 군사 기지를 두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40세 정도였는데 이곳에 여행을 왔다가 이 강정마을에 군사 기지가 들어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수시로 이 지역을 관찰하며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위미항이 제주 해군기지 후보지로 대상으로 검토 되었는데 왜 강정마을로 결정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해군기지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일본과 중국의 군사력 견제를 하기 위해 국토방위에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제주 해안에서 중국이나 일본과 대치하게 되면 육지에서 이곳까지 오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불리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무현 정권 때부터 이 기지를 만들고자 했는데 당시의 야당과 환경운동단체, 마을 주민들이 기지 건설을 못하도록 저항하여 상당 기간 공사를 진척시키지 못한 것이다. 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사람과 단체의 저지로 엄청난 경비와 시간을 소모했다.
그래도 해군기지는 들어섰다. 국가 시책을 추진할 때 많은 주민과 반대파들의 저지로 시간과 경비를 허비하는 일들이 많다. 국가의 시책을 저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사진가에게 인터뷰에 응해 준 것에 대해 감사 인사를 한 후 켄싱턴리조트 수영장에서 악근천의 상류로 나와 악근교를 건너 해안길을 달렸다.
조금 달려가니 야자나무가 멋지게 자란 더비비스 리조트가 나왔다. 잠시 쉬며 리조트 현관 쪽의 홀에 들어가니 범섬이 보이고 건물 아래의 정원에 소나무 분재가 200여 점이 잘 정리되어 있다. 퇴직 후 해보고 싶은 일이 소나무 분재라서 내려가 분재를 살펴보고 사진을 촬영했다.
리조트의 사무원에게 누가 이렇게 가꾸어 놓았는지 물으니 사장님이란다. 한번 뵐 수 있느냐고 물었다. 사장님께 연락해 주었다. 잠시 기다려 정원으로 가서 만났다. 중절모자를 썼는데 반백의 콧수염으로 중후해 보이는 송○○ 사장님이었다.
소나무 분재만 200여 점을 리조트에 가꾸어 놓으신 송 O O 사장님(리조트 정원에서)
소나무 분재를 기르는 재미로 10여 년 몰두하여 지금의 작품들을 가지게 되었다 했다. 수시로 돌을 사고 소나무 묘목을 길러 돌에 붙이고 전정, 물주기를 하느라 좋아하는 술도 끊었다. 한 때는 골프에 빠졌고, 딸까지 골프를 가르쳤다. 딸이 국가 대표급으로 성장했다. 그 딸은 지금 골프 해설가로 활동 중이며 서울에서 골프 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소나무 분재를 만드느라 시간과 정열을 많이 바쳤다. 한두 개 선물을 하거나 기중한 일은 있지만 하나도 판매하지 않았다. 제주 해안도로 일주 후 다시 들러 일을 배우고 싶다니 들리라고 하셨다.
서귀포로 나왔다. 외돌개에서 보았을 때 하얀 난간의 디자인이 특이해 가보고 싶었던 다리, 새연교가 나왔다. 주차장 한쪽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그 동경하던 다리를 건너 새섬으로 갔다. 건너면서 많은 사진을 촬영했다. 새섬으로 건너가 산길을 1 km 쯤 걸어갔다. 별다른 경관이 나오지 않아 나왔다.
자전거를 끌고 천지연폭포가 있는 곳으로 가, 주차장에 자전거를 두고 안으로 들어갔다. 개울을 건너는 다리를 넘어 들어가니 아열대성 나무들이 우람하게 자라있다. 나무 이름을 적은 푯말이 있어 이름을 알 수 있어 좋았다.
40년 전에 와 보았던 천지연폭포, 폭포는 그때의 모습으로 그대로인데 폭포 주변의 나무들이 무성해지고 조경이 잘 되어 있는 점이 달랐다. 담팔수, 참식나무, 생달나무, 후박나무, 까마귀쪽나무, 돈나무, 먼나무, 녹나무, 천선과나무 등, 여러 종류의 나무 밑에 수목 이름표를 달아놓았다.
천지연폭포를 나와 조금 달려가니 정방폭포가 나왔다. 폭포 가까이 가려고 계단으로 내려가는데 길게 휘늘어진 소나무 가지가 매우 특별했다. 계단에서 보니 벼랑에서 바다로 떨어지는 폭포의 물줄기가 장관이다.
폭포로 거의 다가갔는데 전 근무교의 교감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폭포 앞 바위에 앉아 전화를 받았다. 성과급 평가 자료를 제출해야 한다고 증빙서류 제출에 대한 말씀을 하셨다. 아들에게 전화하여 서류를 보내도록 했다. 전화로 일을 처리하느라 30분이 걸렸다. 전화로 해결이 되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에 돌아가 서류를 제출해야 할 상황이었다.
폭포에서 나오는데 기념품 판매 진열대에 주먹 만한 부석이 보였다. 발뒷굽의 각질을 벗기는데 매우 쓰기 좋은 돌이다. 돌에 작은 구멍이 촘촘 뚫려 있어 물에 넣어도 뜨는 가벼운 돌이다. 20년 전에 하나 사서 지금까지 아주 유용하게 썼는데 하도 오래 써 이제 손가락 세 개 크기로 줄어 쓰기가 불편해졌다. 2,000원을 주고 한 개를 샀다. 세 개는 5천원이다. 나오다가 다시 돌아가서 3천원을 더 주고 세 개를 샀다. 친구에게 선물로 주면 좋을 것 같았다.
폭포에서 나오니 바로 제주 해안 자전거 길이었다.
오늘은 동창이 소개해준 표선면 세화리의 김 선생님을 찾아가야 한다. 그분은 대학에서 건축과를 전공하였는데, 취미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데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교회 성가대의 지휘를 하셨던 분이다. 직장생활 중 건강이 극도로 좋지 않아 직장을 그만두고 제주도에 내려와서 다행히 건강을 회복했단다. 그리하여 조그만 펜션을 운영하며 사는 분이다. 가면서 몇 차례 전화를 하고 네비로 찾아갔다. ‘번길’을 ‘번지’로 치는 바람에 엉뚱한 곳으로 갔다. 전화로 다시 확인하여 찾아갔다. 미안하게도 약 30분 정도를 김 선생님이 길목에 나와 밖에서 기다리신 것 같다.
방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나가려고 식당에 전화를 하니 영업이 끝났다 한다. 할 수 없이 햇반을 데우고 라면을 끓여 저녁을 먹었다. 소주 두 병을 비우며 대화를 나누고서 김 선생님은 기타를 들었다.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조용하게 부르셨다. 부드럽고 여린 목소리로 거듭 몇 곡을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셨다. 노래와 연주 실력이 매우 놀라운 수준이었다. 혼자 감상하기에 과분한 노래 실력이었다. 혼자 듣기 과분하여 동영상을 촬영, 소개해 준 동창에게 스마트폰으로 보냈다. 대학 다니며 윤형주와 함께 무대에서 노래를 부른 적도 있었다는데 충분히 그럴만한 실력이었다.
사모님은 전통무용을 전공하여 서귀포에서 공연을 하느라 집에는 가끔 들린다고 했다. 혼자서 지내는 시간이 많고 잠도 혼자 자는 날이 많단다. 자정 무렵 선생님은 자신의 방으로 건너 가셨다. 몸을 씻고 피곤한 몸을 누이니 금세 달콤한 잠으로 빠져 들었다.
4. 김영갑 갤러리와 섭지코지를 지나
아침을 지어먹고 짐을 챙긴 후 김 선생님께 작별 인사를 했다. 따뜻이 맞아주시어 하룻밤을 잘 지냈는데 선물하나 사오지 못해 방값 대신 드린다며 작은 봉투를 드렸다. 사양하셨지만 간곡히 말씀드리고 주머니에 넣어드렸다.
표선 해변으로 나와 잠시 쉬었다. 부천에서 왔다는 분은 직원들과 여행을 오기 위해 사전 답사를 오셨다고 했다. 제주 해변은 모래가 있으면 모두 해수욕장이 되었다.
다음으로 김영갑 갤러리를 목적지로 정하고 달렸다. 갤러리에 거의 다 왔기에 조그만 가게에서 우유와 빵을 사서 간식으로 먹었다. 50대의 여자와 20대의 딸이 함께 오더니 맥주를 마셨다. 고사리를 꺾고 오는 길이란다. 맥주 값이 고사리 값보다 비싸겠다고 농담을 하니, 아니란다. 10 kg이나 땄기 때문에 훨씬 더 벌었다고 했다. 예전에 먹어보니 제주 고사리는 줄기가 통통하고 연하여 맛이 좋았다.
김영갑 갤러리에 도착하여 자전거를 주차장에 놓고 들어갔다. 정문에 “김영갑갤러리두모악”이란 글이 녹슨 철판에 씌어 있다. 폐교한 삼달분교에 만든 사진 갤러리다. 조그만 분교 자리이지만 조경을 잘 해 놓아 학교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니 김영갑의 사진들이 게시되어 있다. 제주를 소재와 배경으로 한 풍경화 같은 사진들이다.
제주의 풍광을 서정성 짙은 사진으로 표현하여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그의 발달된 감각이 잡은 예술적 사진들이다. 감동은 그렇게 조용히 충격처럼 오는 것일까? 사진이나 그림에 전문성이 없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함이 안타까웠다.
그의 사진을 보고 시인 이생진은 이렇게 썼다.
“나는 시로 사진을 찍지 못했지만 그대는 사진으로 시를 찍고 있었던 거야.”
그렇다. 김영갑은 사진으로 시를 썼다. 정말 시 같은 사진이다. 그의 사진을 보면 깊은 관조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 같다. 놀랍다. 사진으로도 그렇게 감동을 준다는 건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그의 재능이 바탕이 되었겠지만 그가 생애를 바친 작품이기 때문일 것이다. 제주도의 한라산과 여러 오름에서 제주의 자연을 일관되게 촬영하다 자신의 생을 바쳤다. 예술인은 그렇게 살아야 작품이 되고 감동을 주는 것일까?
감동을 안고 바닷가를 달리는데 해녀의 집이 나왔다. 바다로 나가기 전에 해녀들이 옷을 갈아입고 물질할 도구인 두렁박 여러 개가 벽에 나란히 걸려있다.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이곳에서 라면을 끓이고 햇반을 말아 점심을 해결했다.
섭지코지로 달려갔다. 주차장 옆 언덕에 서서 경치를 보고 사진을 촬영했다. 전에도 다녀온 곳이라서 등대가 있는 곳까지 가지 않고 발길을 돌렸다.
성산포로 가다가 어제 쇠소깍에서 만났던 초등학생 3명과 인솔하는 아버지를 만났다. 그들에게 반가운 인사를 하고 함께 달려가 인증센터에서 도장을 찍었다. 마음 같아선 성산포에 들어가 음식물을 좀 사고 성산일출봉 관리사무소 부근에 서 쉬려고 했으나 초등학생들과 함께 달리며 이야길 나누다 보니 성산포 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조금 더 달려 시흥리 성산포조가비박물관에 들어갔다. 여러 종류의 조가비를 진열해 놓았다. 크고 예쁜 조가비는 자연적으로 생겼다기보다는 누군가 솜씨 좋은 사람이 인공으로 만든 것 같은 보석이나 보물 같다. 여러 모양의 조가비를 보고 사이사이에 놓은 여러 모양의 수석, 광물도 전시해 놓았는데 기이하고 아름다워 좋은 볼거리였다.
산호처럼 하얀 아라고나이트, 거미고동, 헬멧고동, 가시참굴, 아프리카 고동, 대추고동 등 다양한 고동들, 방해석 녹주석 등, 다양한 돌들이 있었다. 박물관을 잘 들어왔다 싶었다. 박물관에서 나와 달리는데 또 그 초등학생들이 조가비박물관에 들어왔다.
달려가다 보니 바닷물이 넘나드는 거친 바위에서 사람들이 우뭇가사리를 채취하고 있었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녀 학생들도 바다에서 뭔가를 잡고 있었다. 자전거가 한쪽에 많이 눕혀져 있다. 단체로 온 학생들의 것이었다.
종달리해변을 지나 종달고망난돌쉼터에서 잠시 내렸다. ‘종달리불턱’ 이라는 표지판도 있다. 오줌도 싸고 바다를 조망하며 잠시 쉬고 싶었다. 화장실은 없지만 몸을 가리기 좋은 바위 골짜기가 있다. 해녀들이 옷을 갈아입고 간단히 용변도 볼 수 있겠다. 시야를 가리기 좋은 곳이어서 불턱이 되었을 것이다. 불턱이란 해녀들이 바다로 들어가기 위해 준비하는 곳이라는 설명이 표지판에 씌어 있다. 길과 바다가 가깝고 조용히 쉴만한 곳이어서 해녀들의 쉼터가 되었을 것이다.
해녀박물관이 있는 곳까지 왔다. 해가 기울었다. 잠자리를 해결하기 위해 길가에 써 놓은 민박집에 전화를 해보았다. 5만원이라 했다. 무거운데도 불구하고 텐트와 침구를 자전거에 싣고 왔는데 하루라도 텐트를 쳐야 가져온 보람이 있겠다 싶어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 보았다. 구좌읍 상도리의 작은 동산 위에 정자가 있다. 정자 옆에 텐트를 쳤다. 며칠 전 농장의 하우스 바닥에 텐트를 쳤더니 새벽에 바닥이 몹시 차가웠다. 그래서 마트에 가서 음식물을 사고 박스를 몇 개 얻어 왔다. 박스를 텐트 아래에 깔았다. 바닥 차가움을 면했다.
그리고 저녁밥을 지어 먹었다. 커피도 한잔 끓여 마시고 소주를 한 병 들고 해녀박물관 옆 바닷가로 나갔다. 어둠은 이미 깊어졌고 파도 소리가 크다. 바닷가 길 가장자리에 차량이 빠지지 않도록 세운 낮은 담장에 70세쯤의 남자가 앉아 있다. 그 옆에 앉아 인사를 했다. 부천에서 친구들과 왔는데 친구들은 민박집에서 놀고 자신을 밤바다를 보러 왔다는 것이다. 술을 한 잔 권하니 술을 먹지 않는단다. 술을 먹지 않는 사람과 나누는 대화는 별 재미가 없다. 더구나 밤바람이 차가워 잠시 후에 작별 인사를 하고 텐트로 돌아왔다.
동산 아래의 카페에서 여자 세 명이 맥주인지 차인지, 분위기 있게 마시며 담소하고 있다. 좋아 보였다.
5. 해녀박물관과 외국 여인과의 만남
아침을 먹고 짐을 챙겨 8시에 출발, 해녀박물관 앞으로 왔다. 광장의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고 세수를 했다. 잠시 기다렸다가 9시에 해녀박물관에 들어갔다. 해녀들의 물질, 도구, 생할 등을 보았다. 어렸을 때, 해녀들의 삶을 아름답게 여기도록 교육을 받았기 때문인지 낭만적으로 보며 동경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나이 많은 할머니들이 물질을 하고 있다. 많은 해녀들이 혼자 살며 고단한 세월을 살아왔다는 것이다.
제주 해안 길을 달리다 보면 ‘해녀의 집’이란 식당이 눈에 많이 띈다. 해녀가 직접 잡기 때문에 싱싱한 자연산 해물을 저렴하게 먹을 것 같아 들어가고 싶다. 그러나 그 식당엔 해녀가 보이지 않았다. 음식을 만들고 써빙하는 아주머니가 있을 뿐이다.
박물관에서 나와 구좌읍 평대리 해안 길을 달렸다. 바닷가 방파제 옆에서 혼자 셀카로 촬영하는 아가씨가 보였다. 달려가는 내 모습을 촬영하고 싶어,
“아가씨 동영상으로 나를 촬영해 주세요.”
하고 부탁했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가니
“항국 싸람 아니오.”
라고 대답했다. 얼굴은 우리나라 사람 같은데 발음은 내국인이 아니다. 그래서 일본인인가 여기고 그냥 지나쳤다. 가다가 생각하니 이 사람과 휴대폰의 번역 어플로 대화를 해보고 싶었다. 그런 경험은 없지만 이런 기회에 문명의 도구를 써 보자 생각하고 되돌아갔다.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다. 필리핀 사람, ‘다나’라 했다. 휴대폰의 번역 프로그램을 켜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필리핀인이지만 영어로 하겠다 하여 영어와 우리말로 대화를 나누었다. 혼자 여행 중이며 여기에 버스로 왔고 한국에 회사 일로 세 번째 왔다고 했다. 잠시 후 아침 겸 점심을 먹을 거라 하여 함께 식당으로 갔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 ‘돌문어 덮밥’이 유명한 벵디 식당이었다. 어떻게 이 식당을 알았느냐고 다나에게 물으니 인터넷을 보고 알았단다. 문어가 많지 않아 두 사람 중 한 사람만 주문을 받는다 하여 나는 다른 음식을 주문하여 내가 계산을 했다. 음식이 나와 함께 식사를 하며 대화를 했다. 나의 명함을 주고, 인터넷으로 내 이름을 검색하여 휴대폰을 보여 주니 나를 신뢰하는 것 같았다. 휴대폰을 건네 가며 대화하는 걸 주변 사람들이 눈여겨 보았다.
식사를 마치니 다나가 커피를 산다고 했다. 함께 옆에 있는 카페마니에 가 커피를 마셨다. 다나는 회계학을 전공하여 회사에 다니는데 일본,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다닌다고 했다. 한국에 몇 차례 왔다는 것이다. 한국의 어떤 점이 좋으냐고 물었더니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고 했다. 얼굴이 매우 밝고 외국인이란 느낌이 들지 않을 만큼 우리나라 사람과 비슷했다. 그리고 대화의 수준이 높았다.
카페 마니아에서 커피 한 잔
다나는 모레 서울로 갈 것이며 며칠 후에 필리핀으로 돌아간다 했다. 나이는 36세, 미혼이란다. 왜 결혼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남자 친구는 있지만 독신을 지향한다고 했다.
내일은 한라산 등산을 혼자 할 거라 했다. 왜 혼자 여기에 왔고 산에도 왜 혼자 가느냐고 물으니 다른 친구들은 등산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나는 오늘 제주 해안 자전거 일주를 마치게 된다. 그래서 내일 한라산 등산을 함께 하기로 했다.
한라산 등반은 성판악으로 올라가 관음사 방향으로 내려오는 게 수월한 코스인데 다나는 관음사로 올라가 성판악으로 내려오겠다고 했다. 그 이유는 관음사로 올라가는 게 더 경관이 좋다는 것이다. 힘들 거라니 한라산을 한 번 올라가 보았다는 것이다.
카페 주인에게 사진 촬영을 부탁하니 다나는 환한 얼굴로 포즈를 취해 주었다. 다나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나는 라이딩을 계속했다. 여행 중 낯선 사람과의 만남도 즐거운 일이고 색다른 체험이다. 더구나 이국인(異國人)이고 미혼의 젊은 여성이며 내일은 즐거운 하이킹이 계획되어 있다. 자전거의 페달을 힘차게 밟을 수 있었다. 오늘 제주시로 들어가 출발했던 이호태우 해안까지 가서 제주 해안 일주의 라이딩을 마치려면 속도를 내야 했다.
조금 달려가니 백사장이 하얗고 바닷물이 연미색으로 깨끗해 보이는 해변이 나왔다. 월정리 해수욕장이었다. 태국 파파야에 가서 본 바닷물 색과 비슷했다. 아! 우리나라에도 이런 빛깔의 바다가 있구나 싶었다. 햇빛이 맑아 바닷물색이 더욱 아름다웠다. 잠시 서서 바다를 보는데 옆에 아가씨들이 있어 사진 촬영을 의뢰했더니 중국여자였다.
조금 더 달려 행원리 해변에 이르니 매우 아름다운 바닷물빛이 펼쳐졌다. 그 빛깔 좋은 바다에서 보트를 타는 사람들도 보였다. 키가 큰 풍력발전기가 바다에도 있고 옆에도 서 있는데 그 모습도 경이롭다. 와! 하고 감탄사가 나오는 절경이었다. 앞서 가던 40세 전후의 미녀 셋이 차를 세우고 사진을 촬영했다. 의상이 화려하여 정말 멋진 여성들이었는데 너무나 아름다운 바다풍경에 그녀들 얼굴이 활짝 피었다. 나도 자전거에서 내려 바다를 보다가 그 여성들에게 사진 촬영을 의뢰했다.
다음으로는 김녕해수욕장이 나왔다. 오른쪽 낮은 산이 바다를 막아주었고 그 아래에는 캐라반이 여러개 있었다. 해수욕장은 조그만 했지만 모래와 바닷물빛이 아름다웠다. 여기에서 둘이 타는 자전거로 온 60대 부부를 만났다. 부천에서 왔다는데 어제 서귀포에서 자고 오늘은 제주시까지 달려가 목포로 배를 타고 돌아갈 거라 했다. 대단한 주력이다. 내가 평소 동경하던 라이딩이다. 나도 아내와 저렇게 라이딩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아내는 힘이 들어 그런 여행 안 한다 하여 함께 동행하지 못한 것이다.
둘이 자전거 하나로 여행하는 걸 독일 프리드베르그에서도 보았다. 30대 유럽인이었는데 외국 여행을 남녀가 둘이서 자전거 한 대에 짐을 싣고 다녔다. 둘이 타는 자전거는 기어가 단순하여 속도가 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대화하며 가는 데는 정말 좋다. 자전거를 따로따로 타고 가면 대화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달리는 속도가 달라 일체감이 없다. 둘이 타는 자전거는 함께 페달을 밟기 때문에 힘을 합쳐 노를 젓는 것과 같다. 힘이 덜 들고 앞뒤에 앉아 함께 가기 때문에 얼마든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부천에서 온 부부는 그렇게 라이딩한 경험이 많은 것 같았다. 내 앞을 신나게 달려 앞서 나갔다. 다시 함덕 해수욕장에서 만났는데 내가 도착하자 그들은 떠나가고 있었다.
자전거 네비로 가다보니 원당봉 옆으로 가는 산길을 가게 되었다. 올레길이었나 본데 오르막 삼거리 한쪽에 무인 판매대인 아이스박스가 있다. 물건 값이 씌어 있는데 삼다수 500원, 맥주 1,500원, 음료수 1,000원이다.
산길의 좁은 길을 벗어나 제주시로 들어가게 되었다. 마음이 바빠졌다. 퇴직연수 동기님을 이호태우에서 6시에 만나 저녁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속도를 내서 달렸다. 드디어 제주시에 입성, 제주시내 길을 달려 제주박물관 옆으로 오르막을 오르다가 기어 변속이 안 돼 넘어졌다. 오르막에서 저속 기아로 변속이 안 되면 중심을 잃고 넘어지게 된다. 넘어지면 오르막이라 바로 자전거에 오를 수도 없다. 또 시내 길로 접어들면 사거리에서 자주 자전거길 표시의 청색 선이 없어진다. 그러면 매우 당황하게 된다.
제주시로 들어와 탑동광장에 들어왔다. 라마다호텔 앞까지 파도를 막는 방파제가 담장처럼 길게 있고 그 밝은 미색 벽에 그림을 그려 참 산뜻하다. 길도 높고 넓게 만들어 놓아 달리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공사 중인 탑동로를 지나 오르막으로 힘겹게 올라갔다. 공사 중이라 복잡한 동한두기길을 지나 오르막을 오른 후 용담공원 앞을 지나 가까스로 용두암에 왔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용두암에는 가보고 싶었다. 1975년에 수학여행으로 와 보았는데 지금은 용두암의 머리 부분이 떨어졌다는데 어떻게 변했는지 보고 싶었다.
용두암 부근에 건물과 상점이 무수히 많이 생겼다. 용두암으로 내려가는 길이 매우 혼잡했다. 많은 관광객들이 있어 자전거를 끌고 가야 했다. 머리가 떨어져 나가 이제는 용의 머리로 보이지 않았다. 수천 년 들고 있던 머리가 떨어져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되었다. 아쉬운 일이다. 사람과 차들이 많이 다니고 집을 짓고 길을 내니 그 진동을 용암으로 만들어진 바위가 얼마나 견디겠는가. 수천 년, 수백 년 잘 버티던 자연 경관들이 사람들의 왕래와 개발로 견디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도두봉 옆길을 지나 사거리에서 또 자전거 길을 잃었다. 6시까지 가기로 약속했으나 길을 잃어 헤매느라 기다리는 동기님께 먼저 식당으로 가라고 했다. 시내 길에서 좌회전으로 오르막을 힘겹게 올라갔다. 사람들에게 자전거 길을 몇 차례 물었지만 아는 이를 만나지 못해 이정표를 보고 갔다. 자동차 길 옆으로 이호태우 해수욕장을 어렵게 찾아갔다.
내 자동차의 유리창에 먼지가 조금 앉아 있지만 잘 있었다. 다행이다. 반가웠다. 서둘러 자전거 앞바퀴를 빼 놓고, 자동차의 짐을 정리한 후 옷을 갈아입었다. 출발하다 보니 자전거 앞바퀴를 싣지 않았다. ‘아차!’ 하고 차를 세우고 바퀴를 얼른 차에 싣고 동기님이 기다리는 말고기 전문 식당으로 달려갔다.
식당에서 말고기 요리의 여러 가지를 맛보고 술도 한잔 기분 좋게 했다. 식후에는 자동차 대리기사를 불러 찜질방으로 가서 몸을 씻었다.
6. 이국(異國) 여인과 한라산 트레킹을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욕탕으로 들어가 몸을 씻고 5시 30분에 제주버스터미널로 나갔다. 터미널에 주차하기 어렵기 때문에 종합경기장에 주차하고 걸어서 터미널로 갔다. 6시다. 매점에서 등산 중에 먹을 간식을 샀다. 구운 계란과 우유, 빵 쵸코렛 등을 사서 기다렸다. 과연 외국 여성인 다나가 약속대로 올까? 초조하게 기다렸다. 약속 시간 6시 30분. 터미널의 출입구가 두 곳이 있어 어느 쪽으로 올지 올라 이쪽저쪽으로 왔다갔다 했다. 6시 35분이 지날 즈음에 다나가 밝은 얼굴로 나타났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외국인을 다음날 다시 만나 함께 트레킹을 한다니 참 재미있는 일이었다. 다나에게 나를 따라오라 하고 종합경기장으로 걸어갔다. 거기서 내 차에 함께 탔다. 네비에 관음사로 목적지를 입력하고 주행을 시작했다. 날씨가 매우 맑았다. 꿈인가 싶었다. 네비를 보고 관음사에 도착했다. 관음사에 도착하면 식당이 있거나 김밥을 살 수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그저 절 하나만 있고 넓은 주차장이 있을 뿐이었다.
아침을 먹고 가기 위해 차에서 버너를 꺼내어 물을 끓였다. 다나는 다이어트를 위해 아침을 먹지 않는다 했다. 하지만 혼자만 먹기 미안스러워 권하자 사발면을 조금 덜어 달라고 했다. 그릇에 덜어 주고 나는 햇반을 국물에 말아 먹었다.
관음사 앞에 커다란 게시판에 지도가 있어 그곳으로 갔는데 등산로 표시가 없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으니 등산로는 여기가 아니고 좀 더 차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차를 타고 다시 2 km쯤 가니 관음사 주차장이 나왔고 등산로가 있었다. 다나가 바로 여기라며 길을 안다며 앞장섰다. 아까 라면을 끓여 먹은 곳이 관음사는 맞으나 관음사 등산로가 아니었던 것이다.
핸드폰을 손에 들고 번역기로 주고받는 대화. 불편하지만 재미가 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외국인과 이렇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니 신기하기 때문이다. 다나는 그렇게 대화하는 것에 익숙해 있는데 나는 처음 이용해 본거라서 불편하긴 하지만 재미가 있다.
산을 오르는데 평상이 있다. 40세 전후의 남자 세 명이 앉아 있다. 나와 다나가 휴대폰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니 눈여겨보았다. 어제 제주 해안길에서 만난 필리핀 여자라니 눈을 휘둥그레 뜬다. 외국인 같은 모습이 보이지 않고 우리나라 사람 같기 때문이다.
오르막을 오를 때 나는 힘이 드는데 다나는 사뿐사뿐 잘 걸었다. 젊기도 하지만 등산에 익숙한 것 같았다. 내가 제주 한 바퀴 라이딩을 하여 힘이 드니 한라산을 오르지 못하걸랑 다나에게 혼자서 가라고 했다. 그러자 다나는 나에게 앞서라며 뒤에서 따라왔다. 앞서 가니 훨씬 힘이 덜 들었다. 다나가 그 원리를 알고서 나에게 길을 양보했나 보다. 젊은 나이에도 생각이 깊은 여자다.
다나 역시 관음사에서 오르기가 성판악에서 오르는 것보다 더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관음사로 오르는 것에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관음사로 오르는 게 좋은 경관을 보기가 좋다.
평일이라 등산객이 많지 않아 조용해서 좋지만 다나가 무섭지 않을까 해서 나와 둘이 가는 게 무섭지 않느냐고 물었다. 무섭지 않다고 했다. 다나에게 인터넷으로 나를 검색해 준 것이 유효했을 것이다. 거기다 내가 준 명함에 사진도 있으니 신뢰감을 가진 것 같았다.
삼각봉대피소에서 잠시 쉬었다. 아까 평상에서 만났던 남자들도 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과자를 주었다. 나도 답례로 오징어와 과자를 주었다. 김밥을 사오지 못했다고 했더니 하나가 남는다고 김밥도 주었다.
등산길에 혼자가 아니어서 좋았다. 나의 사진을 촬영해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은 셀카봉으로 스스로 촬영하고 내게 사진촬영을 의뢰하지 않았다.
용진물(샘)을 지나 용진각과 현수교를 건너면서 왕관바위를 배경으로 사진을 촬영했다. 영실 쪽 능선과 벼랑이 매끈하다. 그 능선을 보고 개미허리라 했을까? 용진각대피소 자리 가장자리에도 한라산 조릿대가 있다. 특이하게도 이파리 가장자리가 하얗다. 가파른 길을 올라 정상이 가까워지자 죽은 구상나무들이 많다. 아깝다. 수십년 자란 나무들이 왜 죽었을까.
한라산 등산로에 선 다나
드디어 정상, 표지석 앞에 섰다. 정상에 오르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상에 올랐다. 이번 여행에 영실을 가보려 했지만 백록담에 올 계획은 없었다. 정상까지 온 것은 다나 덕택이다. 다나에게 감사의 표시로 악수를 청했더니 뜻밖에도 고개를 가로 저으며 “NO!" 했다. 스킨 쉽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정상의 표지석 앞에서 촬영하려고 길게 줄을 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 아래에서 촬영을 하고 점심을 먹기 위해 정상 아래의 데크 바닥에 앉았다. 잠시 후 한 커플이 옆에 앉았다. 그 여자는 부산 MBC 방송국의 리포터라는데 화장을 곱게 했다. 얼굴의 피부가 참 곱다. 같이 온 남자는 친구들과 함께 왔는데 이 여자 분이 혼자 걷기에 말동무하며 왔다고 음식을 함께 먹었다.
김밥과 사과를 꺼냈다. 다나는 바나나 두 쪽을 꺼내 먹었다. 김밥을 먹으라니 다이어트 한다며 먹지 않았다. 아침도 거의 먹지 않았는데 정말 배고프지 않을까?
잠시 후 성판악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이제는 내가 다나보다 더 잘 갈 수 있다고 말했다. 내려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오늘 저녁에 식사를 함께 할 수 있느냐고 물으니 다른 약속이 있다고 했다. 내일은 서울로 간다니 이제 하산하면 이별이구나 생각하니 아쉬웠다. 진달래 대피소 가까이 오니 확성기 소리가 들렸다. 휴게실에 가까이 왔다니 나에게도 필요한 곳이라고 표현했다.
성판악에 내려와 10분쯤 기다려 제주시외버스터미널에 가는 버스에 탔다. 다나는 자리가 있어서 앉고 나는 그 옆에 섰다. 버스 기사에게 관음사로 가려면 어디서 내려야 하느냐고 물으니 산천단에서 하차하여 버스를 갈아타라 했다. 다나는 그대로 터미널까지 가면 된다. 다나는 나에게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를 알려주었다. 어여쁜 다나를 소재로 시를 쓰고 싶었다. 시를 쓰면 영어로 번역하여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산천단이 다음 정류장일 때 다나에게 “good bye" 인사하니, 그녀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한라산에서 악수를 안 한다기에 인사말만 하려 했는데 버스에서는 먼저 손을 내밀다니…. 정말 분별력이 있는 여자다,
관음사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야영장 요금 3,000원을 지불하고 주차장의 차를 야영장 가까이 옮겼다. 텐트를 꺼내어 자리를 골라 텐트를 쳤다.
저녁을 먹고 텐트 안에서 일기를 썼다.
햇살이 투명하던 평대리 바닷가.
셀카 하던 여인에게, “나도 한 컷 찍어주세요”
“한국사람 아니어요.”, 한국말을 모른다며 한국말로 대답했다.
페달을 밟고 가다가 돌아가, “훼어 두유 컴 프럼?”, “필리핀”
휴대폰 번역 어플을 켜고, “혼자 왔나요?”, “yes", ”why?"
“친구들은 다른 곳으로 갔어요.”
복숭아꽃처럼 화사하게 웃는 풋풋한 여인 DANNA
돌문어밥을 시켜 먹는 동안 그녀를 알게 되었다.
금융 회사 일로 아시아를 누빈다는 회계사
밥을 샀더니 그녀는 커피를 샀다.
내일 한라산을 함께 가자고 약속했다.
제주터미널에서 만나 한라산을 오르는 동안 그녀의 미소와 매너에 넋을 잃었다.
돌길, 돌계단도 사뿐사뿐 오르는 발길을 보며 젊으면 저렇게 나비처럼 오르는 걸
몸이 무거워 겨우 따르자 그녀가 나를 앞세우고
휴대폰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이었다.
드디어 백록담 정상! 그녀 덕택에 정상에 섰다.
그대 때문에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다고 악수를 청하자
"NO", 고개를 흔들었다.
다나는 점심으로 바나나 두 쪽만 먹었다. 다이어트 중이라고.
진달래 대피소, 속밭 대피소를 내려와 버스를 탔다.
그녀는 계속 제주시로 가고, 나는 관음사로 가려 산천단에서
“good bye" 인사하자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백록담에서 거절하던 악수를 먼저 청했다.
관음사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오를 때는 함께였는데 하산하여 혼자서 돌아왔다.
추억 하나만 남았다. 내가 귀신에게 홀렸었나보다.
필리핀 여인 DANNA에게
자려고 누웠더니 무릎이 아팠다. 자전거로 나흘 꼬박 제주도를 한 바퀴 돌았으니 하루라도 쉬어야 하련만 바로 그 다음날 한라산에 올랐으니 무리한 거였다. 이국 여인에게 홀려 내가 잠시 정신을 잃은 것이다. 옛날 처녀 귀신에 홀렸다는 말을 들었는데 내가 깜박 홀렸던 거다. 참 바보다.
첫댓글 제주에서 한 달을 보냈기에 공감되는 곳이 많네요. 힘찬 폐달에 부러울 뿐입니다.
자전거 라이딩 여행기만 여기에 올렸습니다. 탐방기는 완성되는 대로 다시 올리려고요.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