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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신씨(高靈申氏)
신(申)씨
본관은 평산(平山), 고령(高靈), 아주(鵝州), 영해(寧海), 은풍(殷豊), 천안(天安), 이천(利川), 신천(信川), 곡성(谷城), 삭녕(朔寧), 창주(昌州) 등 10여 본이 전한다. 그 중 평산신씨가 약 70 % 이상, 고령신씨가 약 20 %를 차지한다. 조선시대에 총 302명의 문과 급제자, 11명의 상신, 5명의 대제학을 배출하였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6만 6202가구에 인구 38만 1873명으로 성별 순위는 258성 중 제13위, 85년도 조사에서는 인구 62만 950명으로 증가하여 전국 인구 구성비는 1.5 %로 274성 중에서 제12위였다
고령신씨
시조고려시대에 군기감검교(軍器監檢校)를 지낸 성용(成用)이다. 그의 6대손에서 암헌공파(巖軒公派:檣), 정언공파(正言公派:枰), 감찰공파(監察公派:梯)의 3파로 갈리는데, 이 중 암헌공파가 주축을 이룬다. 조선시대에 상신 3명, 대제학 3명 등 많은 문신을 배출하였다. 세종 때 공조참판을 지낸 유학자 장(檣)은 5형제를 두었는데, 특히 숙주(叔舟)가 뛰어났그, 그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숙주는 세종 때 훈민정음 창제에 공이 컸으며,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가담하여 정난공신(靖難功臣)에 오른 것을 비롯하여 세조 때 좌익공신(佐翼功臣), 예종 때 익대공신(翊戴功臣), 성종 때 좌리공신(佐理功臣) 등 잇달아 공신에 책록되었고, 대제학, 병조판서, 영의정을 역임하였으며, 당대의 대학자로서 저서를 많이 남겼다. 그의 아들 8형제가 모두 이름을 떨쳤고, 후손이 크게 번창하였다. 숙주의 아들대에서 봉례공파(奉禮公派:澍), 함길백파(咸吉伯派:), 황해백파(黃海伯派:澯), 고천군파(高川君派:瀞), 뇌헌공파(懶軒公派:浚), 강원백파(江原伯派:), 영성군파(靈城君派:泂), 호군공파(護軍公派:珌)로 분파되었다. 8형제 중 넷째 정은 성종 때 좌리공신, 다섯째 준은 중종반정의 공신, 맏이 주의 아들 종호(從濩)는 과거가 있은 이후 처음으로 진사시, 문과, 중시에 모두 장원급제하여 이름을 떨쳤다. 그의 아들 항(沆)은 성종의 부마, 아우 잠(潛)은 시(詩), 서(書), 화(畵)의 3절(絶)로 불리었다. 항의 손자 의(儀)는 중종의 부마, 종증손인 경식(景植)은 인조반정의 공신이다. 둘째 면의 아들 용개(用漑)는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영광(靈光)으로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으로 재기용되어 대제학,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다. 그의 현손 응구(應")는 인조반정 후 춘천부사(春川府使)를 지냈고, 응구의 손자 익상(翼相)은 갑술환국으로 소론이 집권한 뒤 공조판서, 우의정을 역임하였다. 일곱째 형의 아들 광한(光漢)은 을사사화 때 소윤(少尹)에 속하여 대윤(大尹)일파 제거에 공을 세워 영성부원군(靈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양관대제학에 좌찬성을 지내고 궤장(杖)을 하사받았다. 광한의 종증손인 관찰사 용(涌)과 대사헌 식(湜) 형제는 문한으로 유명하다. 숙주의 아우 말주(末舟)는 형과는 달리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으며, 그의 손자 공제(公濟)는 중종 때 이조판서를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공제의 4대손인 경준(景濬)은 고증학적 방법으로 지리학을 개척한 실학자이며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를 저술하여 한글에 대한 과학적 연구에 업적을 남겼다. 이 밖에 숙주의 10대손으로 의금부도사, 승지를 지내고 시, 서, 화의 3절로 불린 광수(光洙)가 있다. 근세인물로는 풍속화가로 유명한 윤복(潤福)과 사학자 채호(采浩), 그리고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홍식(洪植) 등이 있다.
신경준(申景濬/1712~1781)
조선 후기의 문신, 실학자. 본관 고령(高靈). 자 순민(舜民). 호 여암(旅庵). 1754년(영조 30) 증광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을 거쳐 휘릉별검(徽陵別檢), 전적(典籍), 병조와 예조의 낭관(郞官), 정언(正言), 장령(掌令)을 지내고 62년 서산(瑞山)군수로 나갔다. 이어 장연(長淵)현감, 헌납(獻納), 사간(司諫), 종부시정(宗簿寺正)을 역임하였다. 70년 《문헌비고(文獻備考)》 편찬에서 <여지고(輿地考)>를 맡아 한 공으로 동부승지(同副承旨), 병조참지(兵曹參知)가 되어 《팔도지도(八道地圖)》와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를 완성하였다. 71년 북청(北靑)부사, 73년 좌승지(左承旨), 강계(江界)부사, 순천(順天)부사, 이듬해 제주(濟州)목사, 79년 치사(致仕)하고 고향 순창(淳昌)에 돌아갔다. 학문이 뛰어나고 지식이 해박하여 성률(聲律), 의복(醫卜), 법률, 기서(奇書)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였고, 실학을 바탕으로 한 고증학적 방법으로 한국의 지리학을 개척했다. 50년에는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를 지어 한글의 과학적 연구의 기틀을 다졌다. 저서에는 《여암집(旅庵集)》 《소사문답(素砂問答)》 《의표도(儀表圖)》 《강계지(疆界志)》 《산수경(山水經)》 《도로고(道路考)》 《산경표(山經表)》 《증정일본운(證正日本韻)》 《수차도설(水車圖說)》이 있다.
신공제(申公濟/1469~1536)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고령(高靈). 자 희인(希仁). 호 이계(伊溪). 시호 정민(貞敏). 1486년(성종 17) 진사를 거쳐 95년(연산군 1)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다. 1516년(중종 11) 창원(昌原)부사로서 선정을 베풀어 훌륭한 목민관(牧民官)으로 표창을 받았다. 22년 이조판서로 있을 때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28년 좌참찬, 호조판서 겸 세자좌부빈객을 거쳐 중추부 동지사를 지냈다. 서예에 뛰어나 특히 초서와 예서를 잘 썼으며 명나라 사신에게 선물할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서족(書簇)과 성종의 어필(御筆) 병풍을 감정(鑑定)하기도 하였다.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신광수(申光洙/1712~1775)
조선 후기의 문인. 본관 고령(高靈). 자 성연(聖淵). 호 석북(石北), 오악산인(五嶽山人). 음보(蔭補)로 참봉(參奉)에 등용되고, 1764년(영조 40)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로 탐라(耽羅)에 건너가서 그곳의 풍토, 지리, 해운 등 상황을 조사, 《부해록(浮海錄)》을 지었다. 그 후 연천(漣川)현감을 지냈으며, 72년 기로정시(耆老庭試)에 장원하여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에 오르고, 75년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효성은 지극하였으나 오랜 관직생활에도 노모(老母)를 모실 집이 없는 사실이 알려져 왕으로부터 집과 노비를 하사받았다. 서화, 특히 과시(科詩)에 능했고 그 중 《관산융마(關山戎馬)》는 대표작으로 널리 애송되었다. 문집에 《석북집(石北集)》이 있다.
신광한(申光漢/1484~155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고령(高靈). 자 한지(漢之), 시회(時晦). 호 기재(企齋), 낙봉(駱峰), 석선재(石仙齋), 청성동주(靑城洞主). 시호 문간(文簡). 문장에 능하고 필력이 뛰어나 1507년(중종 2) 사마시를 거쳐 3년 뒤 식년문과에 급제, 14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홍문관 전교(典校)가 되었다. 18년 신진사류(新進士類)로서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대사성(大司成)에 발탁되었으나 기묘사화에 연좌, 관직이 삭탈되었다. 19년 만에 다시 등용, 이조판서로 홍문관 제학(提學)을 겸임하였다. 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 때 우참찬(右參贊)으로 소윤(小尹)에 가담, 대윤(大尹)의 제거에 힘써 위사공신(衛社功臣)이 되고, 같은 해 우찬성(右贊成)으로 양관(兩館)의 대제학을 겸임, 영성(靈城)부원군에 봉해졌으며, 50년 좌찬성(左贊成)에 올랐다. 3년 뒤에 궤장을 하사받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저서에 《기재집(企齋集)》 《기재기이(企齋記異)》가 있다.
신규식(申圭植/1879.1.13~1922)
항일 독립운동가. 본관 고령(高靈). 자 공집(公執). 호는 예관(觀), 일민(一民) 등. 청주(淸州) 출생. 관립 한어학교(漢語學校)와 육군무관학교를 나와 육군 부위(副尉)로 진급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죽음으로 항거하려고 음독했다가 실패, 오른쪽 눈만 실명하였다. 그래서 예관이라는 호를 썼다고 한다.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대한협회에 가입하여 활약하며,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활동하다가 국권피탈의 소식에 분개, 다시 음독자살을 기도했으나 대종교 종사(宗師) 나철(羅喆)에 의해 구조되었다. 11년 중국으로 망명, 쑨원[孫文]의 신해혁명(辛亥革命)에 가담하였다. 중국 국민당 요인들과 한, 중 연합단체인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 결성하고, 15년 박은식(朴殷植)과 대동보국단(大同輔國團)을 조직, 잡지 《진단(震檀)》을 발간하였다. 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의정원(議政院) 부의장에 선출, 법무총장을 거쳐 21년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이 되었다. 이 해 광둥[廣東]의 신생 중화민국 정부에 대사로 부임,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고 중국의 북벌서사식(北伐誓詞式)에도 참가하였다. 22년 임시정부 안에 내분이 생기자 조국의 장래를 근심한 나머지 25일간 단식을 계속하다 목숨을 끊었다. 저서에 《한국혼(韓國魂)》 《아목루(兒目淚)》가 있다. 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신근(申?1694~176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고령(高靈). 자 이원(而遠). 호 퇴수재(退修齋). 1717년(숙종 43) 식년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 44년(영조 20) 강진현감(康津縣監)으로 있을 때 서자(庶子)를 그곳 부호의 딸과 혼인시켜 물의를 빚었다. 51년 지평(持平)이 된 뒤 정언(正言), 장령(掌令) 등을 역임한 뒤 승지에 이르렀다. 저서에 《의례유설(疑禮類說)》이 있다.
신담(申湛/1519~159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고령(高靈). 자 중경(仲卿). 호 어성(漁城). 1552년(명종 7) 식년문과에 급제, 63년 정언(正言), 지평(持平), 전적(典籍) 등을 거쳐 65년 장령(掌令)이 되었다. 69년(선조 2) 부수찬(副修撰)을 거쳐 다시 장령이 되고 71년 군자감정(軍資監正)으로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77년 충청도관찰사를 지내다가 한때 파직되었고, 82년 경주부윤으로 복관되어 송사(訟事)를 잘 처결하였다. 91년 홍문관 제학(提學)에서 예조참판으로 승진, 이듬해 임진왜란 때는 전주부윤이 되어 의병 1,000여 명을 모아 왜적의 진격을 막았다.
신말주(申末舟/1439~?)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고령(高靈). 자 자집(子楫). 호 귀래정(歸來亭). 1454년(단종 2) 생원으로 증광문과에 급제하였다. 이듬해 단종을 축출하고 세조가 즉위하자, 권지정자(權知正字)가 되어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한때 순창(淳昌)에 내려가 은거하다가 59년(세조 5) 우헌납(右獻納)이 되었다. 64년 집의(執義)를 지내고, 66년 대사간, 76년(성종 7) 전주부윤을 거쳐 진주목사, 창원도호부사,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고, 87년 다시 대사간이 되고 이듬해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와 전라도수군절도사를 지냈는데, 무술에 능하였으며 순창의 화산서원(花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신백우(申伯雨/1887~1959)
독립운동가. 본관 고령(高靈). 호 경부(耕夫). 충북 청원(淸原) 출생. 1907년 신민회(新民會), 경성청년학우회(京城靑年學友會) 등에 가입, 독립의지를 불태우다가 11년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듬해 봉천에서 대동청년단에 가입, 활동하다가 18년 귀국하여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다. 3, 1운동에 참가한 후 다시 만주로 건너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참모가 되었으며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서 군사학을 연구하였다. 20년 귀국하여 노동공제회(勞動共濟會)에 가입하고, 공제잡지(共濟雜誌)의 주간(主幹) 일을 맡아보는 한편, 22년에는 윤덕병(尹德炳), 이수영(李遂榮), 이승복(李承馥), 한기병(韓基秉) 등과 비밀결사인 ????화요회(火曜會)????를 조직, 23년 무산자동맹(無産者同盟), 서울청년회, 노동총동맹 등의 간부로 활약하였다. 6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신선부(申善溥/?~?)
조선 중기의 서화가. 본관 고령(高靈). 자 천여(天如). 일찍이 진사를 지냈으며 시, 서, 화에 모두 능하여 조선 개국 이래 으뜸이라는 말을 들었다. 또 손오(孫吳)의 병서(兵書)에 통달하였으며 기형의기(璣衡儀器), 보시종(報時鐘), 전진기계(戰陣機械), 주차(舟車), 수차(水車) 등의 기구를 고제(古制)에 의하여 창안하였다.
신설(申渫/156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고령(高靈). 자 계수(季脩). 호 하은(霞隱). 초명 용(涌). 1591년(선조 24) 식년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검열(檢閱)이 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96년 저작(著作), 수찬(修撰)을 거쳐 승지(承旨), 대사간 등을 역임하고, 관찰사에 이르렀으며, 청주(淸州) 봉계서원(鳳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의례고람(儀禮考覽)》 《상례통재(喪禮通載)》 《오복통고(五服通考)》 등이 있다.
신속(申?1600~166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고령(高靈). 자 호중(浩中). 호 이지당(二知堂). 1624년(인조 2) 진사가 되어 대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여 천거로 별제(別提)가 되었다. 그 뒤 호조의 낭관(郞官) 등을 지내고 44년 영주(榮州) 군수로 정시(庭試)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 필선(弼善)을 거쳐 장령(掌令)이 되어 승지 등 요직의 물 망에 올랐으나 51년(효종 2) 김자점(金自點)이역모죄로 처형되자, 양주(楊州)목사를 거쳐 공주(公州), 청주(淸州) 목사 등 외직(外職)으로만 전전하다 치사하였다. 편서(編書)에 《농가집성(農家集成)》이 있다.
신숙(申/1658~171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고령(高靈). 자 호여(浩如). 호 삼외당(三畏堂).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위되자 충격을 받아 과거에 응시하기를 단념하였다가, 94년 갑술옥사로 인현왕후가 복위된 후 출사(出仕), 1700년 동몽(童蒙)교관을 거쳐 순안(順安)현령, 배천(白川)군수, 11년 황주(黃州)목사 등을 역임하다 중풍으로 치사하였다.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신식(申湜/1551~162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고령(高靈). 자 숙지(叔止). 호 용졸재(用拙齋), 임곡(臨谷). 숙주(叔舟)의 5대손. 1576년(선조 9) 별시문과에 급제, 지평, 헌납을 거쳐 90년 집의(執義)로 있었는데 정여립(鄭汝立)의 일파라는 탄핵을 받아 곤양(昆陽)에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혐의가 풀려 집의에 복관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도 안무어사(按撫御史)가 되었다. 전란이 끝난 99년 공조참판, 1608년(광해군 즉위) 충청도관찰사를 지낸 후 부제학을 거쳐 중추부지사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학식이 높고 예악(禮樂)에도 밝았다. 청주의 쌍천서원(雙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의례고증(疑禮攷證)》 《가례언해(家禮諺解)》 등이 있다.
신용개(申用漑/1463~1519)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고령(高靈). 자 개지(漑之). 호 이요정(二樂亭), 송계(松溪), 수옹(睡翁). 시호 문경(文景).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로 1488년(성종 19) 문과에 급제, 권지승문원(權知承文院) 부정자(副正字)가 되고 홍문관 정자, 수찬, 교리를 역임, 92년 사가독서하였다. 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투옥되었다가 곧 풀려나와 직제학(直提學), 도승지 등에 기용되었으나 강직한 성품으로 연산군의 비위를 거슬러 1504년 갑자사화 때 영광(靈光)에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등용된 뒤 형조참판, 대제학, 우참찬, 대사헌을 거쳐 각조의 판서, 우찬성을 지내고 우의정을 거쳐 18년 좌의정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이요정집》이 있고, 편서로 《속동문선》 《속삼강행실도》가 있다.
신유(申濡/1610~166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고령(高靈). 자 군택(君澤). 호 죽당(竹堂), 이옹(泥翁). 1630년(인조 8) 진사가 되고 36년 별시문과에 장원, 정언(正言), 지평(持平)을 거쳐 이조정랑이 되고, 43년 통신사(通信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그 후 동부승지(同副承旨), 우승지(右承旨), 도승지(都承旨)를 지내고 부제학을 거쳐 65년(현종 6) 예조참판이 되었고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따라 선양[瀋陽]에 다녀왔다. 글씨를 잘 썼으며 저서에 《죽당집(竹堂集)》이 있다.
신윤복(申潤福/1758~?)
조선 후기의 풍속화가. 본관 고령(高靈). 자 입부(笠父). 호 혜원(蕙園). 김홍도(金弘道), 김득신(金得臣)과 더불어 조선 3대 풍속화가로 지칭된다. 그는 풍속화뿐 아니라 남종화풍(南宗畵風)의 산수(山水)와 영모(翎毛) 등에도 뛰어났다. 속화(俗畵)를 즐겨 그려 도화서(圖畵署)에서 쫓겨난 것으로 전해지며, 그의 부친 신한평(申漢枰)과 조부는 화원이었으나 그가 화원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전해진 작품에 남긴 간기(干紀)로 해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처네를 쓴 여인》에 있는 1829년이 가장 하한인 바 대체로 19세기 초에 활동한 것으로 짐작된다. 화원이었는지의 여부는 불분명해도 직업화가로, 당시 수요에 따른 많은 풍속화를 그렸을 것으로 보인다. 대표작으로는 국보 제135호로 지정한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이 전한다. 모두 30여 점으로 이루어진 이 화첩은 간송미술관 소장품으로 국내뿐 아니라 해외 전시를 통해 외국에도 잘 알려진 그림이다. 사회 각층을 망라한 김홍도의 풍속화와 달리 도회지의 한량과 기녀 등 남녀 사이의 은은한 정을 잘 나타낸 그림들로 동시대의 애정과 풍류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외에도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탄금(彈琴)》 등 6점으로 된 화첩 또한 명품(名品)이다. 아울러 초상기법으로 그린 《미인도(美人圖)》는 조선 여인의 아름다움을 잘 드러낸 걸작으로 손꼽힌다. 별쇄화보 62~63면
신익상(申翼相/1634~169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고령(高靈). 자 숙필(叔弼). 호 성재(醒齋). 시호 정간(貞簡). 1662년(현종 3) 정시문과에 급제한 뒤 사관(史官)으로 오랫동안 근무하면서 직필로 사실(史實)을 기록하였다. 72년 홍문록에 올랐으며, 숙종 즉위 후 한때 당쟁을 피하여 아산(牙山)에 은거하였다가 80년(숙종 6) 도승지에 오르고, 대사헌을 지냈다. 84년 평안도관찰사 재임 때 영변의 철옹외성(鐵甕外城)을 수축할 것을 주장하였다. 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인현왕후(仁顯王后) 폐위의 부당함을 극간하고 사직하였다. 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소론(少論)이 득세하자 공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우의정에 올랐다. 문장과 시율(詩律)에 뛰어났으며, 전서(篆書)에 능하여 양주(楊州)의 <지중추이형갈(知中樞李絅碣)><제용정신양비(濟用正申J碑)> 등의 글씨를 남겼고, 저서에 《성재집(醒齋集)》이 있다.
신잠(申潛/1491~1554)
조선 중기의 문인, 문신. 본관 고령(高靈). 자 원량(元亮). 호 영천자(靈川子), 아차산인(峨嵯山人). 1519년 현량과(賢良科)에 급제, 검열(檢閱)로 있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파직, 21년 신사무옥(辛巳誣獄)으로 장흥(長興)에 17년 동안 유배되었다. 43년(중종 38) 등용,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 태인현감(泰仁縣監), 간성군수(杆城郡守) 등을 역임하고 53년(명종 8)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지냈다.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부모처럼 받들었다. 시, 서, 화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하였다. 저서에 《영천집(靈川集)》, 그림에 《설중기려도(雪中騎驢圖)》 등이 있다.
신장(申檣/1382~1433)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 본관 고령(高靈). 자 제부(濟夫). 호 암헌(巖軒). 참의(參議) 포시(包翅)의 아들이며, 신숙주의 아버지이다. 1402년(태종 2) 문과에 급제, 직제학(直提學), 좌보덕(左輔德), 부제학(副題學)을 차례로 거쳤다. 32년(세종 14) 공조참판(工曹參判)이 되어 《남산지곡(南山之曲)》을 지었다. 오랫동안 대제학(大提學)으로 있었으며, 유학(儒學)에 조예가 깊었다. 서예에도 능하여 초서(草書)와 예서(隸書)를 잘 썼다.
신준(申浚/1444~1509)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고령(高靈). 자 언시(彦施). 호 나헌(懶軒). 시호 소안(昭安). 1464년(세조 10) 무장현감(茂長縣監)이 되고, 70년(성종 1) 별시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병조참지(兵曹參知)를 거쳐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었다. 80년 이조참판을 거쳐 고양군(高陽君)에 봉해졌다. 이조, 공조 판서,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대사헌(大司憲)을 지내고 95년(연산군 1) 공조, 형조 판서가 되어 지경연사를 겸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의 공으로 고양부원군에 봉하여졌다.
신채호(申采浩/1880~1936)
항일독립운동가, 사학자, 언론인. 본관 고령(高靈). 필명 금협산인(錦頰山人), 무애생(無涯生). 호 단재(丹齋), 일편단생(一片丹生), 단생(丹生). 대전 출생. 1897년 신기선(申箕善)의 추천으로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그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皇城新聞)》에 논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주필로 활약하였으며, 내외의 민족 영웅전과 역사 논문을 발표하여 민족의식 앙양에 힘썼다. 1907년 신민회(新民會)와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 등에 가입, 참가하고, 이듬해 순 한글 《가정잡지》를 편집, 발행하였다. 또한 《대한협회보(大韓協會報)》 또는 《기호흥학회보(畿湖興學會報)》 등에 논설을 발표하고 1909년 일진회(一進會) 성토에 앞장섰다. 10년 4월 신민회 동지들과 협의 후 중국 칭다오[靑島]로 망명, 그곳에서 안창호(安昌浩), 이갑(李甲) 등과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권업신문(勸業新聞)》에서 활동하다가, 14년 이 신문이 강제 폐간되자 그 해 남북 만주와 백두산 등 한국 민족의 고대 활동무대를 답사하였다. 15년 상하이[上海]로 가서 신한청년회(新韓靑年會) 조직에 참가하고, 박달학원(博達學院)의 설립 운영에도 힘썼다. 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가, 의정원(議政院) 의원, 전원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나, 한성임정(漢城臨政) 정통론과 이승만 배척운동을 내세워 공직을 사퇴하고 주간지 《신대한(新大韓)》을 창간하여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과 맞서기도 하였다. 그 후 비밀결사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단장, 신대한청년동맹(新大韓靑年同盟) 부단주(副團主) 등에 피선되었다. 23년 민중의 폭력혁명으로 독립의 쟁취를 부르짖고 임시정부 창조파(創造派)의 주동역할을 하다가 다시 베이징[北京]으로 쫓겨가 다물단(多勿團)을 조직 지도했으며, 중국과 본국의 신문에 논설과 역사논문을 발표하였다. 25년경부터 무정부주의를 신봉하기 시작, 27년 신간회(新幹會) 발기인, 무정부주의 동방동맹(東方同盟)에 가입, 28년 잡지 《탈환》을 발간하고 동지들과 합의하여 외국환을 입수, 자금 조달차 타이완으로 가던 중 지룽항[基隆港]에서 피체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旅順] 감옥에서 복역 중 36년 옥사했다. 적과 타협없이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동안 ????독립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 이와 같은 견해가 곧 그의 역사연구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고조선(古朝鮮)과 묘청(妙淸)의 난(亂) 등에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고 ????역사라는 것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라는 명제를 내걸어 민족사관을 수립, 한국 근대사학(近代史學)의 기초를 확립했다. 저서에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艸)》 《조선사론(朝鮮史論)》 《이탈리아 건국삼걸전(建國三傑傳)》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 《이순신전(李舜臣傳)》 《동국거걸(東國巨傑)》 《최도통전(崔都統傳)》 등이 있다.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신혼(申混/1624~1656)
조선 중기의 문신, 화가. 본관 고령(高靈). 자 원택(元澤). 호 초암(初庵, 草庵). 1644년(인조 2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50년(효종 1) 봉교(奉敎), 이어 정언(正言), 수찬(修撰)을 역임한 뒤 54년 안주 교수(安州敎授)가 되었다. 문명(文名)이 높았고 그림에도 뛰어났다. 문집에 《초암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