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 애드키슨은 미식축구 선수로 활동하기 위해 캐나다로 건너갔다가 스튜 하트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됩니다.
프로레슬러로 데뷔한 잭 애드키슨은 나치 독일의 잔당이라는 설정에 '프리츠 폰 에릭'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합니다.
프리츠 폰 에릭은 손으로 상대의 얼굴을 움켜쥐는 '아이언 클로'를 선보여 '무쇠 손톱'이라는 별명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온 프리츠 폰 에릭은 가족들과 함께 캠핑카를 타고 전국을 다니며 각지의 프로레슬링 단체에서 경기를 뜁니다.
하지만 불과 여섯 살이었던 첫째가 감전 사고로 의식을 잃었는데 하필이면 물웅덩이로 떨어져 익사하는 비극이 벌어집니다.
아들을 떠나보낸 슬픔이 컸지만 프리츠 폰 에릭은 계속 전국을 돌며 프로레슬러로 활동합니다.
당시 프리츠 폰 에릭은 인기에 힘입어 NWA 내에서 세계 헤비급 챔피언 후보로 거론되곤 했습니다.
루 테즈, 빌리 왓슨, 팻 오코너 같은 NWA 세계 헤비급 챔피언들과도 여러 차례 맞붙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챔피언으로서 장기 경기를 뛸 역량이 되지 않는다고 평가받습니다.
결국 프리츠 폰 에릭은 은퇴하는 순간까지 단 한번도 NWA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 되지 못합니다.
프리츠 폰 에릭이 비록 NWA에서 세계 챔피언이 되지 못했지만 아예 세계 챔피언을 못 해본 건 아니었습니다.
프리츠 폰 에릭은 미네소타를 중심으로 오마하, 텍사스 등 각지로 세력을 넓히던 AWA에 출전합니다.
이때 프리츠 폰 에릭은 AWA의 제왕 번 가네를 꺾고 제9대 AWA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오릅니다.
또한 NWA 세계 헤비급 챔피언십에서 파생된 오마하 세계 헤비급 챔피언십 역시 손에 넣습니다.
두 타이틀을 동시에 거머쥔 프리츠 폰 에릭이었지만 오래지 않아 번 가네에게 도로 뺏깁니다.
한편 프리츠 폰 에릭은 텍사스에서는 NWA의 가망 단체인 Big Time Wrestling에 출전하고 있었습니다.
설립자였던 에드 맥레모어가 갑작스러운 심근경색으로 사망하자 프리츠 폰 에릭은 단체의 경영권을 손에 넣습니다.
프로모터가 된 프리츠 폰 에릭은 NWA 아메리카즈 헤비급 챔피언십을 신설해서 자기가 19번이나 챔피언에 오릅니다.
한편 일본 출장도 찾았는데 프리츠 폰 에릭이 선보였던 아이언 클로는 일본에서 인기가 많은 기술이었습니다.
한 번은 아들들을 데리고 히로시마 평화기념관을 찾아가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가르쳐줬다고 합니다.
선수로서 은퇴하고 프로모터로서의 업무에 집중한 프리츠 폰 에릭은 단체 이름을 WCCW로 바꿉니다.
WCCW에서는 패뷸러스 프리버즈, 크리스 애덤스, 압둘라 더 부처, 브루저 브로디 같은 스타들을 발굴합니다.
프로레슬러로 데뷔한 프리츠 폰 에릭의 아들들은 잘생긴 외모와 뛰어난 운동신경으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프리츠 폰 에릭은 자기가 현역 시절에 따지 못한 NWA 세계 헤비급 챔피언십을 아들에게 안겨주고 싶어 했습니다.
프리츠 폰 에릭이 NWA의 회장으로 선출되며 형제 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던 셋째가 세계 챔피언에 오를 예정이었습니다.
세계 챔피언이 될 예정이던 셋째는 아버지의 명령으로 아픈 몸을 이끌고 일본 출장에 나섰다가 머나먼 이국땅에서 객사합니다.
가장 아끼는 아들이자 선수였던 셋째를 떠나보낸 프리츠 폰 에릭은 다섯째와 막내를 밀어주며 큰 기대를 보입니다.
하지만 몸도 성치 않던 다섯째와 막내는 기대에 부응할 수 없다는 현실에 좌절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계속된 비극과 WWE의 성장에 프리츠 폰 에릭은 기울어져 가는 WCCW를 살리고자 테네시의 제리 제럿과 손잡습니다.
두 프로모터의 합작으로 USWA가 탄생하지만 이익으로 인해 다투다가 갈라섰고 프리츠 폰 에릭은 두번 다시 프로모터로 서지 못합니다.
사업까지 완전히 말아먹은 프리츠 폰 에릭은 아내와 이혼했고 넷째마저 떠나보냅니다.
모든 걸 잃은 뒤 뇌종양과 폐암으로 투병하던 프리츠 폰 에릭에게도 최후가 다가옵니다.
아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둘째가 찾아오자 같이 죽자며 총을 꺼내 들어 장전했다고 합니다.
병마 따위에 꺾이지 말라는 둘째의 격려에 총을 내린 프리츠 폰 에릭이지만 끝내 병마에 꺾입니다.
자신의 무쇠 손톱으로 부와 명예를 손에 넣은 프리츠 폰 에릭이었지만 초라한 말년을 보내다 68살의 나이로 눈을 감습니다.
오늘날 프리츠 폰 에릭은 위대한 프로모터로 칭송받으며 온갖 프로레슬링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립니다.
WCCW가 흥행하던 시절의 댈러스는 프리츠 폰 에릭의 왕국이었으며 레스토랑과 호텔 등 온갖 점포가 그의 명의로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칭송만 받은 건 아니었고 아들들과 선수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그리 좋은 프로모터는 아니었다고 평가받습니다.
특히 아들들처럼 사망한 선수들의 이름을 대진표에 올려 살아있는 것처럼 홍보한 일에 대해서는 비난이 쇄도합니다.
현재 폰 에릭 가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가 제작 중인데 여러 영화에 조연으로 등장한 홀트 매캘러니가 프리츠 폰 에릭을 연기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