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장화홍련전 』 은 실화다
『 장화홍련전 』 은 『 콩쥐 팥쥐 』 처럼 어린 자매가 계모(새어머니/의붓어머니 – 옮긴이 잉걸. 아래 ‘옮긴이’)에게 시달림을 받는 내용의 고전 소설이다. 작자(作者. ‘저작자[著作者]’를 줄인 말. [책의] ‘지은이’라는 뜻이다 – 옮긴이)와 (쓰인 – 옮긴이) 연대는 알 수 없지만, 다른 판본만 30여 편에 이르는 조선(서기 1392년에 세워진 근세조선 – 옮긴이) 시대의 대표적인 베스트셀러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 장화홍련전 』 은 (서기 – 옮긴이) 17세기 평안도 철산에서 실제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다룬 소설이다. 당시는 우리나라의 가족 제도가 급격히 변하고 있던 시기였다. 어머니 쪽 가계와 아버지 쪽 가계를 다 같이 중요하게 여기던 양계(兩系)적 가족 제도에서, 아버지 쪽 가계만 일방적으로 중시하는 부계(父系)적 가족 제도로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시기에 장화, 홍련 자매는 어머니를 잃었다. 예전에는 이럴 때 장화, 홍련처럼 남겨진 아이들은 엄마 쪽 가족(식구 – 옮긴이), 그러니까 외삼촌이나 이모한테 가서 살았다. 그러나 남성 중심으로 가족 제도가 바뀌면서, 두 자매는 아빠인 배 좌수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서기 918년에 세워진 후기 고리[高麗] - 옮긴이) 때부터 내려오던 가계 계승 관습은 바뀌지 않았다. 그 전통 관습에 따르면 어머니의 유산은 피붙이인 장화, 홍련만 물려받을 수 있었다. 죽은 아내와 혈연이 아닌 남편인 배 좌수는 권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배 좌수는 재혼을 했고, 계모 허씨가 ‘장쇠’라는 아들을 데리고 들어와 장화, 홍련을 보살피게 되었다.
그런데 장화, 홍련 자매와 계모 허씨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자매가 죽은 친어머니의 재산을 고리로(‘내세우며’? 아니면, ‘들먹이며’? - 옮긴이) 계모와 장쇠에게 위세를 부렸던 것이다. 또 (그 자매의 – 옮긴이) 외삼촌도 가끔씩 찾아와서 누나 재산을 들먹이며 허씨 모자를 괴롭히곤 했다.
참다못한 허씨는 장쇠를 시켜 장화를 연못에 빠뜨려 죽였다. 그리고 홍련도 곧 언니의 뒤를 따랐다.
허씨는 처녀인 장화가 처신을 잘못해 임신하는 바람에 스스로 몸을 던져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영민한 철산 부사 ‘전동흘’은 엄정한 수사 끝에 진실을 밝혀냈다. 허씨가 죄 없는 장화를 죽인 다음, 쥐 껍질로 태아 모양을 만들어, 장화가 임신한 것처럼 꾸몄다는 걸 밝힌 것이다. 결국 허씨와 장쇠 역시 죽음을 면치 못했다.
만약 전통 관습대로 장화, 홍련이 엄마를 잃은 뒤 외가 친척과 함께 살았다면,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새로운 가부장적 관습이 정착해 배 좌수가 죽은 아내의 재산에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다면, 그 역시 끔찍한 비극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을 터다.
훗날 수군통제사로 부임하는 전동흘이 철산 부사를 지낸 때는 효종(조선 제 17대 왕, 재위기간 서기 1649 ~ 1659년) 때다. 당시는 병자호란(후금의 근세조선 침략전쟁 – 옮긴이)을 끝낸 조선이 전후 복구를 막 시작하던 시기다. 그러한 시기에 조선 사회 밑바닥의 가족제도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 조선 중기까지는 ‘장가들기’
고려 이래 16세기까지 이어지던 전통 가족 제도를 잘 보여 주는 사례가 율곡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서기 1504 ~ 1551년)’이다. 16세기 강원도 강릉의 양반가에서 태어난 그녀가 혼인할 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알고 있는 가부장적 혼인 제도와 가족 제도는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는 신사임당과 혼인한 뒤 그녀의 강릉 집에 ‘장가들어’ 함께 살았다. 한때 경기도 파주 율곡리에서 산 적도 있지만, 대체로 강릉에 머물렀다.
물론(勿論. 말할[論] 것도 없지만[勿] - 옮긴이) 이원수는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해야 했으므로, 강릉과 서울을 오가며 생활해야 했다. 신사임당이 아들인 이이를 낳은 곳도 강릉 친정의 별채인 오죽헌이었다.
그 시절 남녀가 결혼해서 여자 집에서 함께 산 것은 비단 이원수와 신사임당만이 아니었다. 우리 조상의 혼인 풍습과 가족 제도에 관한 자료는 아쉽게도 고려 시대 이후 것만 남아 있다( 이 말은 사실과 다르다. 제하[諸夏]의 사서가 고구리[高句麗]의 데릴사위제나 옥저의 민며느리 제도나 예[‘동예’]의 혼인 제도를 다루기 때문이다. 그리고 『 삼국사기 』 와 『 삼국유사 』 에도 고구리/백제/전기가야/중기신라/후기신라의 혼인 풍습을 조금이나마 다루기 때문이다 – 옮긴이 ).
고려의 혼인 풍습은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이다. 이는 남자가 여자 집에 들어가 사는 ‘장가들기’ 방식을 뜻한다. 단지 혼인해서 사는 곳뿐 아니라 부부 관계, 가족 관계, 친척 관계, 상속 문제 등 혼인과 관련된 모든 분야가 조선 후기 이후와 달랐다.
혼인해서 낳은 아이들이 남편의 성(姓 : 성씨 – 옮긴이)을 따르는 것은 조선 후기 이후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고려 시대의 아이들에게는 외가와 친가가 따로 없었다. 엄마의 아버지나 아빠의 아버지나 똑같은 ‘할아버지’였다. 『 족보 』 에도 부계/모계의 조상과 후손이 똑같이 기록되었다. 조선 후기 이후에는 아버지 쪽 조상만이 아이들의 조상으로 여겨졌지만, 고려부터 조선 중기까지는 부모 양쪽의 조상이 똑같은 ‘내 조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부모(어버이 – 옮긴이)의 재산도 아들과 딸이 차별 없이 물려받았고, 제사도 아들과 딸이 돌아가며 지냈다.
조선 후기에는 여자가 한 번 결혼하면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도 죽을 때까지 시댁 며느리로 사는 것이 미덕이었지만, 고려 시대만 해도 여자의 재혼은 흠이 아니었다.
만약 부부가 이혼하면, 아이들은 엄마 쪽 식구들과 함께 살았다. 장화, 홍련처럼 엄마가 아빠보다 먼저 죽어도 엄마 쪽 형제나 가족이 아이들을 돌보았다. 아이들이 태어나서 자란 곳이 엄마 쪽 집이니 그럴 수밖에!
이것이 ‘장가들기’와 연관된 조선 중기까지의 전통 혼인과 가족 관계의 모습이다.
그런데 17세기가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그러한 변화를 예고하는 움직임이 신사임당과 이이의 집안에서 있었다. 이원수가 서울(당시 이름은 ‘한양’/‘한성’ - 옮긴이)에 있는 자기 집의 가계(家計. 집안의 살림살이 – 옮긴이)를 물려받게 되어, 신사임당에게 그곳에 가서 살자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시어머니 홍씨가 연로해 시댁(시집 – 옮긴이)의 가사를 돌보기 힘들었기 때문에, 신사임당은 남편의 요청을 거부하기 어려웠다.
본래 아버지의 부탁으로 친정의 가계를 물려받기로 되어 있던 신사임당은 그 중책(重責. 무거운[重] 직책[責] – 옮긴이)을 넷째 동생에게 맡기고 대관령을 넘었다.
이처럼 신사임당이 서른여덟 살의 나이로 시집살이를 시작한 것은, 조선 사회의 가족 제도가 ‘장가들기’에서 ‘시집가기’로 변동하는 역사적 전환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 조선 후기부터는 ‘시집가기’
서울 시댁으로 간 신사임당은 남편에 대해서는 엄격한 내조자로, 시댁에 대해서는 훌륭한 관리자로 정성을 다했다. 조선 시대 최고의 여성 화가로 알려진 신사임당의 그림은 그 당시 명문가에 흩어진 채 오늘날(서기 2017년 현재 – 옮긴이)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다. 그것은 신사임당이 남편의 사회생활을 돕기 위해 명망가(명성과 인망이 높은 사람들 – 옮긴이)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그림을 선물했기 때문이다.
신사임당의 아들인 이이도 혼인한 뒤 처가에서 살다가 한 해가 지나서야, 부인을 그곳에 남겨 둔 채 강릉으로 가서 외할머니를 뵈었다. 아버지의 삶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이는 성리학자(다른 이름은 ‘주자학자’ - 옮긴이)였다. 성리학은 고대 중국(제하[諸夏] - 옮긴이)의 종법(宗法. 한 겨레붙이[일족] 사이에 정한 규약 – 옮긴이)에 기초해 철저한 부계 가족을 강조하는 학문이었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중국 송(宋)나라[정확히는, 남송(南宋) - 옮긴이]의 유학자 ‘주희(서기 1130 ~ 1200년. 존칭 “주자[朱子]” - 옮긴이)’에 따르면, 기(氣)라는 것은 남자에서 남자로 이어진다. 따라서 가계도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져야 하며, 가족은 아버지를 중심으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이에 따라 중국(실제로는 진짜 제하 왕조인 ‘한족[漢族]’ 왕조와 나중에 제하 갈마['역사']에 접붙여진 한화[漢化]한 이민족의 왕조 – 옮긴이)은 오래전부터 ‘친영(親迎)’이라는 혼인 제도를 이어 오고 있었다. 이것은 남자가 신부의 집에 가서 직접 여자를 맞아들인다는 뜻으로, 남녀가 혼인하면 여자가 남자 집에 들어가 사는 ‘시집가기’ 제도를 말한다.
조선은 성리학을 지도 이념으로 삼아 세워진 나라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이러한 친영을 권장하고, 왕실이 앞장서서 모범을 보였다. 하지만 오래도록 내려온 관습을 바꾸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이이조차도 기존의 관습에 따라서 자라고 혼인했던 것이다.
그러나 성리학자인 이이는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가족 제도의 ‘변혁’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부모의 유산을 분배하는 집안 회의에서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은 것이다.
‘그전까지는 부모가 돌아가시면 형제자매가 유산을 똑같이 나누고 제사도 돌아가면서 지냈는데, 이렇게 하면 너무 번거롭다. 그러니 장남(맏아들 – 옮긴이)인 맏형이 제사를 주관하도록 하고, 그것이 부담되지 않도록 다른 형제자매가 자신들에게 돌아올 유산을 조금씩 덜어 장남에게 주자.’
라는 내용이었다.
이이뿐 아니라 수많은 성리학자들이 신념을 가지고 이러한 변화를 추구했으며, 혼인 방식도 ‘남귀여가혼’에서 ‘친영’으로 바꾸어 나갔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 오늘날 우리가 전통 풍습으로 알고 있는 ‘가부장적’ 부계 가족이 나타난 것이다.
17세기로 접어들면서 맏아들이 제사를 주관하는 것은 물론이고(말할 것도 없고 – 옮긴이), 딸에게 돌아가는 상속분을 줄이는 일도 늘어났다.
딸과 혼인한 사위가 장인/장모의 제사를 받들 수는 있지만, 그들이 낳은 자식까지 외갓집 조상의 제사를 모시기는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결혼 방식이 ‘시집가기’로 상당히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다 보니 족보에 기록되는 가족 구성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 조선 중기까지는 족보에 아들과 딸이 모두 실렸다. 딸이 혼인한 뒤에는 사위도 싣고, 그들 사이에 낳은 자식과 후손도 빠짐없이 실었다.
그러나 17세기부터는 서서히 딸의 후손에 대한 기록이 빠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3대까지만 싣다가, 나중에는 딸과 사위마저도 족보에서 빼기 시작했다. ‘출가외인(出嫁外人. 시집간 딸은 친정과는 남이나 마찬가지라는 뜻 – 옮긴이)’이라는 말은 여기에서 나왔고, 여자는 혼인만 하면 친정 족보에서 빠져 남편 족보로 옮겨 가야 했다.
이처럼 딸에 대한 차별이 커져 가는 와중에도, 아들 형제들은 비교적 고르게 재산을 상속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17세기까지의 일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맏아들에게 유산이 몰리도록 바뀌어 갔다.
(원래는 – 옮긴이) 이이가 제사를 합리적으로 지내기 위해 제안했던 방식이 점차 보편화되면서, 중국 고대의 종법 질서에 따른 가부장적 가족 관계가 굳어져 갔던 것이다.
이렇게 ‘장가들기’식 혼인 제도가 완전히 ‘시집가기’식 혼인 제도로 바뀐 뒤로 신사임당처럼 당당한 여성은 나오기 힘들어졌다.
남편을 잃은 여인에게 친정아버지가 재혼을 권유하자 연못에 몸을 던져 죽었다든가, 첫날밤도 치르지 못한 채 남편을 잃고는 죽을 때까지 청상과부로 살았다든가 하는 ‘열녀’들의 이야기가 수도 없이 만들어졌다.
가족 제도 (변화 – 옮긴이)의 과도기였던 17세기 조선에서는 장화, 홍련의 죽음과 비슷한 가족 간의 다툼이 많이 일어났다.
그런데 요즘(서기 21세기 전기 – 옮긴이)은 17세기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과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가끔 혈연 사이에 벌어지는 불상사가 신문 지면을 장식하곤 한다.
부모에게 학대받는 아이들은 차라리 자신을 아껴 주는 타인과 가족을 이루는 게 훨씬 더 나을 것이다. 또 점점 늘어나는 1인 가구는 연대에 기초한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필요로 한다. ‘부부와 (친자식인 – 옮긴이) 자녀’로 구성된 전통적인 가족 개념 자체가 바뀌고 있는 셈이다.
그러한 변화는 가족이 어떻게 달라지든, 그 바탕에는 사회적 연대와 사랑이 깔려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 아닐까?
- ‘강응천(서기 2017년 현재 <출판 기획 “문사철[文史哲]” 대표>)’의 글
- 『 고교독서평설 』 지 제 310호( 서기 2017년 양력 1월호 )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