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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 혁명군 전적지 표지석
동학농민군과 항일의병의 격전지 금성산성
글 : 황호택 논설고문
아주경제 기사 입력일 : 2022-01-28
이항복 "난공불락 금성산성" 선조에 보고
담양은 읍성(邑城)이 없는 고을이다. 불과 8km 떨어진 곳에 철옹성 같은 금성산성이 버티고 있으니 읍성의 필요성을 못 느꼈을 것이다. 평시 산성에 곡식과 무기를 보관해 두었다가 적이 침입해오면 주민들은 성으로 들어가 농성전(籠城戰)을 벌이면 된다.
금성산성은 연대봉 시루봉 노적봉 철마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내성과 외성, 이중으로 성을 쌓았다. 연대봉(煙臺峯)이라는 이름은 과거에 봉수대가 있어서 생긴 이름 같다. 1895년 고종 때 제작된 금성진도(金城鎭圖)를 보면 동헌 승대장청(僧臺長廳) 장교청 화약고 등이 들어서 있다. 성안에는 민가와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가 10 여 채 보인다.
장성의 입암(笠巖)산성, 무주의 적성(赤城)산성, 담양의 금성(金城)산성은 호남의 3대산성이다. 금성산성에는 곡식 2만 석을 저장해 두는 대규모 군창(軍倉)이 있었다. 조정은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면 이 쌀을 진휼미(賑恤米)로 풀었다.
성밖으로는 험한 절벽이 이어져 적의 접근이 어렵다. 이래서 임진왜란 때는 의병의 거점이 되었다. 정유재란 때 왜군의 포로가 된 강항(姜沆·1567~1618)은 일본에서 적중견문록(敵中見聞錄)을 써 몰래 본국에 보냈다. 강항은 왜군들이 호남지방의 성들을 둘러보고 “이게 성이냐”고 비웃다가 담양의 금성산성을 보고 나서는 “조선사람들이 한사코 지켜냈더라면 우리들이 해낼 길이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통역을 통해 들었다고 적었다.
선조실록에도 금성산성을 난공불락(難攻不落)으로 평가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4도 체찰사로 남방을 순찰하고 온 이항복(李恒福·1556~1618)은 선조에게 “담양의 금성산성은 크고도 튼튼하여 평양성보다 낫습니다. 힘들이지 않고 지킬 수 있는 곳이 5분의 2라고 합니다”라고 보고한다.
우리나라는 중부 이남 지역에만 1200여 개의 산성 터가 남아 있어 산성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삼국시대부터 산성을 수축했다. 산성은 높은 성벽을 쌓는 대신에 산의 경사면이나 깎아지른 절벽을 이용해 공력이 적게 들면서도 적의 공격을 어렵게 만들었다. 외적이 산성을 공격하다 지치고 식량이 떨어져 퇴각할 때면 산성에서 내려가 적을 공격했다. 군인이 오래 주둔해야 하므로 성안에 우물이나 계곡의 물이 반드시 있어야 했다.
중국의 만리장성은 유목민족인 흉노와 몽고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산성이다. 조선은 남한산성에서 47일동안 청(淸)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왕실가족이 인질로 잡히고 식량이 떨어져가자 항복했다. 청은 조선이 제출하는 항복문서에 '청나라 군대가 물러가고 난 후 어떠한 경우라도 산성을 보수하거나 새로 쌓지 않는다'는 조항을 넣었다.
고려시대에 산성들이 많이 축조된 시기는 북방에서 몽고족이 침범하던 13세기 중엽. 몽고군의 주력부대가 고종 43년(1256년) 전라도 지역까지 내려와 장성의 입압산성을 공격한 것으로 보아 금성산성도 이때 이미 축조됐을 가능성이 높다.
금성산성은 문헌상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최초로 등장한다. 고려 우왕 6년(1380년) 왜구가 남원 공격을 준비할 때 금성산성에서 전마(戰馬)를 배불리 먹인 뒤에 북상하려고 한다는 첩보가 기록돼 있다. 우왕 때는 왜구의 노략질이 가장 잦았던 시기로 재위 14년 동안 378회나 왜구가 침입했다. 고려를 멸망시킨 것은 태조 이성계가 아니라 왜구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로부터 30년 뒤인 조선 태종 10 년(1410년) 전라 경상도에서 보수 또는 개축할 12개 산성 리스트에 금성산성이 들어가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금성산성의 위치 규모 시설에 대해 간략한 개요가 들어가 있다.
담양 도호부의 북쪽에 있다. 둘레가 1803보(步‧걸음). 시내가 두 곳이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않는다. 샘이 12곳 있다. 그 가운데 다섯은 겨울이나 여름에 마르지 않는다. 군창(軍倉)이 있다. 역(驛)이 하나 있고 이름은 덕기(德基). 자기와 도기를 굽는 곳이 1 개씩 있다.
등산로를 따라 보국문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금성산성 별장(別將)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있다. 관아 앞에 있는 영세불망비와 달리 바위에 새긴 비석이다. 옛날 군인들이 보초를 서던 자리라고 한다. 종9품(從九品) 무관 벼슬에 영세불망비는 아무래도 분수에 넘치는 것 같다. 평시 산성에는 그보다 더 높은 사람이 없으니 제대 말년에 담양부사나 창평현감 흉내를 내봤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김덕령 장군이 금성산성에서 바위를 훌훌 타고 넘는다는 흥미로운 기사가 실려 있다. 선조는 포상에서 공을 엄격하게 따지라는 지시를 하고는 이항복에게 “김덕령을 어떻게 보는가”하고 물었다. 이항복이 “그의 외모를 보니 연소한 선비였으나 용력(勇力)이 남보다 뛰어나므로 무인들도 역시 복종하고 있다”고 아뢰었다. 선조가 이어 “글을 잘하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이항복은 “글을 약간은 안다”면서 “담양의 금성산성에 불끈 솟은 바위가 있는데 사람이 도저히 올라갈 수 있는 곳이 아닌데도 김덕령은 그 바위를 매우 가볍고 민첩하게 걸어서 넘어갔다. 그 고을 사람 20여 명이 목격한 것이라고 한다”고 답변했다.
김덕령 장군, 불끈 솟은 바위 가볍게 타고 넘어
왜군과 용맹하게 싸우던 김 장군은 1596년 역모죄에 연루된 혐의로 한양에 붙잡혀가 거친 조사를 받다 후유증으로 옥사했다. 1661년(현종 2)에야 신원(伸寃)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1668년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금성산성은 임진왜란 때도 의병이 활동한 거점이었고 1894년 동학혁명 때도 맹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향토사학자 이해섭 씨의 역저(力著) 《금성산성》은 동학군이 금성산성으로 들어가 관군과 싸우다 진압되는 과정에서 페성(廢城)이 됐다고 기술한다. 금성산성은 그 후 한 세기 동안 폐허로 있다가 1995년 공사를 시작해 보국문 충용문과 북문을 복원했다. 전체 성곽 길이는 7.3km로 외성이 6.5km, 내성이 859m.
금성산성 보국문에 걸려 있는 '보수 현판문'에는 ‘1894년 12월 녹두장군 전봉준이 3개월 동안 금성산성에서 은둔하면서 흩어져 있던 동학농민군을 모아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 내용이 인터넷 블로그나 책의 기행문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고 있지만 뒷받침할만한 근거가 부족하다는 논란이 있다. 금성산성 등산로에 있는 '동학농민혁명군 전적지' 표석에도 '전봉준 장군은 금성산성 전투를 지휘하다가 옛 전우를 찾아 식량 지원을 요청했으나 전북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에서 친구의 밀고로 관군에게 체포됐다'고 씌어 있다. 그러나 담양군과 이웃한 전북 순창군이 피노리에 세운 '전봉준 장군 피체(被逮) 유적비'에는 '전 장군이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정읍 입암산성에서 백양사로 거처를 옮기고 다시 김개남 장군을 만나기 위해 피노리에 피신중 체포됐다'고 기록돼 있다.
전 장군이 일본 영사와 대한제국 법무아문의 공동 조사를 받을 때 작성된 '전봉준공초(供草)'에는 전 장군이 체포되기 직전의 동선(動線)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전봉준 공초에 따르면 동학농민군은 1894년 10월 23일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고 일본군과 관군에 밀려 내려오다가 11월 25일 원평 전투, 11월 27일 태인 전투를 벌였다. 태인 전투를 마지막으로 동학농민군은 황급하게 쫓기는 처지가 됐다. 동학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이병규 박사는 “1894년 말 전봉준 장군이 패주(敗走)하는 동선에서 3개월 동안 금성산성에 은둔했거나 며칠이라도 가 있었던 기록조차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전 장군은 11월 27일 태인 전투에서 패하고, 28일에는 입암 대흥리 동학접주 차치구의 집에서 잤다. 29일에는 입암산성에 찾아가 친분이 있던 별장 이종록의 호의로 식사를 하고 하룻밤을 묵었다. 30일 관군이 온다는 소식이 들려와 입압산성을 나와 백양사 청류암에서 유숙했다. 입암산성 군졸이 와서 관군이 입암산성에서 수색하고 있다고 알려줘 백양사를 황급히 빠져나갔다. 이때 타던 말도 버리고 심복 세 명만 대동했다. 12월 1일 순창 장터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고 나서 2일 체포됐다.
전 장군이 체포된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가 금성산성과 가깝고, 담양 장성 광주 순창 등지에서 싸우던 동학농민군의 간절한 신앙이 금성산성의 녹두장군 전설을 만들어낸 것 같다. 전봉준 장군이 체포된 후에도 동학군은 전국 도처에서 관군 일본군 민보군(民堡軍‧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지방 양반층과 향리층이 결성한 민간 군대 조직)과 싸우다 소멸돼 갔다.
그로부터 13년 뒤 기삼연(奇參衍·1851~1908) 의병장이 이끌던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가 일본군과 마지막 일전을 치른 곳도 금성산성이다. 금성산성에는 호남창의회맹소의 전투지인 현충시설임을 알리는 국가보훈처의 표지판이 서 있다.
호남창의회맹소는 1907년 10월 30일 전라남도 장성의 수연산(隨緣山) 석수암(石水庵)에서 의병장 기삼연을 중심으로 4∼5개 의병부대가 연합하여 결성한 부대다. 1908∼1909년 호남지역의 의병항쟁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다.
회맹소가 기세를 떨치는 지역에서는 조세를 거둘 수 없을 지경이었다. 1908년 기삼연 의병장이 이끄는 부대가 담양읍을 공격해 일제 침략기구인 우편소와 세무서, 군아 등을 점령해 각종 기물을 파괴했다. 그러고 나서 혹한을 피하고 설을 지내기 위해 천험(天險)의 요새인 금성산성으로 들어갔다. 이날 밤 날이 춥고 비가 쏟아져서 군사들의 의복이 젖어 얼고 굶주렸다. 미처 성을 지킬 준비도 하기 전에 뒤쫓아온 일본군의 탄환이 비 오듯 쏟아졌다. 회맹소 의병은 일본군경의 기습을 받아 6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기 의병장은 본진을 해산하면서 정월 보름 이후에 다시 모이기로 맹세하고 순창 구수동 친척 집에 잠적했다. 그런데 불시에 일본군이 20여 명이 이 집을 기습했다. 음력 설날이었다.
“내가 여기 있으니 주인은 해치지 말라." 기 의병장은 이렇게 말하고 걸어서 나와 광주읍 경찰서로 끌려갔다. 의병장을 탈옥시키려는 의병들이 뒤쫓아오는 데 불안해진 일본군은 기 의병장을 광주천변에서 총살했다. 회맹소의 마지막 전쟁터였던 금성산성은 기 의병장과 의병들의 항일 정신이 서려 있는 곳이다.
산성 안에는 보국사(輔國寺)라는 큰 절이 있었다. 기록에 따라서는 금성사(金城寺)라고도 한다. 창건연대는 알 수 없고 금성산성의 수호사찰의 기능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쟁 때 불탔다. 보국사 터에는 폐사지에서 많이 발견되는 당간지주가 있다. 폐사터에 남아 있는 장대석(長臺石) 석축과 계단, 우물터 등은 금성산성의 피어린 역사를 말해주는 듯하다.
<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
후원=담양군(군수 최형식) 뉴파워프리즈마(회장 최대규)
참고문헌
1.《민족문화대백과사전(강항, 산성, 호남창의회맹소)》 한국학중앙연구원
2.<선조실록>《조선왕조실록》
3.이이화 《이이화의 동학농혁명사2》 교유당, 2020
4.이해섭 《금성산성》 담양향토문화연구회, 2000
5.《전봉준공초》 이이화 번역
6.홍명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일조각,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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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치 동굴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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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치’를 소재로 영화를 만들어 큰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다. 1640년대에도 ‘전우치전’이라는 소설이 크게 유행하였는데, 이 소설은 전우치라는 조선 중종때의 실제 인물을 소설로 한 것이다. 그는 도술에 능하고 귀신을 잘 부렸으나 백성들을 현혹시킨다고 하여 잡혀 죽은 전설적인 인물이다.
소설의 줄거리는 영화의 줄거리와는 다르다. 소설 ‘전우치전’의 내용은 이렇다. 왜적의 노략질과 흉년으로 백성들이 참혹하게 살아가는 상황에서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전우치가 탐관오리를 괴롭히고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데 신통력을 발휘한다는 내용이다. 이 소설에는 백성들의 어려운 생활을 고발하는 등 사회 의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전우치전(田禹治傳)
요약 : 작자·연대 미상의 고전소설.
내용
1책. 국문본. 이본으로는 ‘뎐운치젼’으로 되어 있는 서울대학교 도서관 일사문고(一簑文庫) 소장 필사본(43장)·경판본 1(17장)·경판본 2(22장), ‘뎐우치젼’으로 되어 있는 1914년 신문관(新文館) 발행 활자본(62면), 단국대학교 율곡도서관 나손문고(舊 金東旭 소장본) 소장 필사본(31장)이 있다.
이들을 비교해 보면 세 가지 계통으로 되어 있다. 일사문고본·경판 17장본·경판 22장본이 같은 계통으로, 경판본 둘은 일사문고본의 축약에 해당한다. 신문관본은 후대에 출간되었으나 선행본이 있었으리라고 짐작되고, 오히려 일사문고 계통보다 고형으로 보인다. 김동욱본은 다음의 간단한 줄거리에서 드러나듯 위의 두 계열과는 전혀 다른 계통이다.
전우치는 실제 인물이었으며, 중종 때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문헌에 전하는 내용을 종합하면, 도술을 익히고 시를 잘 지었으며 나라에 반역을 꾀했다가 수명을 다 누리지 못하고 죽었다. 문헌에 전하는 전설에서는 전우치가 도술을 부렸다는 것과 함께 죽은 뒤에 다시 나타났다는 것을 기본적인 내용으로 삼고 있다.
「전우치전」은 이러한 전설을 토대로 이루어진 것인데, 전설과는 달리 전우치가 나라에 반역죄를 지어 잡아죽이려고 했으나 도술로 탈출했다 한다. 특히, 일사문고본 계통에서는 전우치가 도술을 익히게 된 경위를 보태고 있고, 김동욱본은 「전우치전」과 「홍길동전」을 합쳐 놓은 것 같다.
신문관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송도에 사는 전우치라는 사람은 신기한 도술을 얻었으나 재주를 숨기고 살았는데, 빈민의 처참한 처지를 보고 참을 수 없어서 천상 선관으로 가장, 임금에게 나타나 옥황상제의 명령이니 황금 들보를 만들어 바치라고 하였다.
그것을 팔아서 곡식을 장만해 빈민에게 나누어 주고 그 뜻을 널리 알렸다. 나라에서 잡아갔으나 쉽게 탈출하고,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횡포한 무리를 징벌하고 억울하거나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주었다.
그러다가 자수를 하고 무관 말직을 얻어 도둑의 반란을 평정하는 공을 세웠으나, 역적의 혐의를 받자 다시 도망쳤다. 도술로 세상을 희롱하며 다니던 끝에 친한 벗을 위해 절부(節婦)를 훼절시키려다가 강림 도령에게 제지를 당하고, 서화담(徐花潭)에게 굴복해 서화담과 함께 산중에 들어가 도를 닦게 되었다.
일사문고본에는 전우치가 천상 선동으로 속계에 내려왔는데, 어려서 여우 입 속에 들어 있는 구슬을 먹고, 다시 구미호에게서 천서(天書)를 빼앗아 도술을 익히게 되었다고 하는 내용이 서두에 더 있다. 그 밖의 내용은 대체로 같은데, 도술이 기이하다는 데 관심을 갖게 한다.
김동욱본에서는 전생에 손오공이었던 전우치가 강릉 지방 관노의 아들로 태어나 자기 가문의 지위를 높이는 한편, 중국에 가서 활인동 도적의 두목이 되어 중국 천자가 조선을 업신여길 수 없도록 하고, 마침내 연나라 임금이 된다.
의의와 평가
「전우치전」은 실제 인물의 내력이 전설을 거쳐 소설화된 좋은 예다.
조선 왕조의 지배 질서에 반역하는 영웅의 모습을 그려서 주목된다. 전우치가 천상 선관으로 가장해 임금으로 하여금 황금 들보를 바치도록 하는 대목은, 어느 이본에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사건으로 왕조의 권위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 도술은 사회적인 규제와 규범을 쉽사리 어기며 가치를 역전시키는 방법이다.
그러나 전우치가 빈천한 사람들을 옹호하며 사회 개조를 요구했는가 하는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도술을 장난으로 여기며 자기만족을 하는 데 그치는 일면이 작품에 나타나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연동사 자연석실 노천법당에 있는
연동사지 지장보살입상(좌)과 연동사지 삼층석탑(우)
[ 연동사는
2014년에 입적한 원행 스님이
일구어낸 절이다.]
연동사를 명품 절로 살려낸 원행 스님
글 : 황호택 논설고문
아주경제 기사 입력일 : 2022-01-31
절간의 곡차를 훔쳐먹는 살쾡이
《세종실록 지리지》 담양도호부 편에는 고려시대에 세워진 담양 연동사가 등장한다. 고려 문종 때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낸 이영간(李靈幹)이 어려서 금성(金城) 산성으로 오르는 중턱에 있는 연동사(煙洞寺)에서 공부를 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절의 중이 술을 담가서 거의 익을 때쯤 되면 누가 감쪽같이 훔쳐 마셨다. 중이 이영간을 의심하여 두세 번 종아리를 때렸다. 이영간이 몰래 엿보니 늙은 살쾡이가 와서 훔쳐 마셨다. 이영간이 잡아서 죽이려 하자 살쾡이가 살려 달라고 애원하면서 "네가 만일 나를 놓아주면 평생 유용하게 쓰일 신기한 술법(術法) 책을 주겠다" 하였다. 때마침 청의 동자(靑衣童子)가 나타나 한 권의 책을 던져주므로 이영간이 그 살쾡이를 놓아주었다. 그리하여 그 책을 간직하여 두었는데 나중에 장성하여 벼슬을 하매 이영간이 하는 모든 일이 보통과 달랐다.
청의동자가 던져준 책은 비결서(祕訣書)였던 모양이다. 문종(文宗‧재위 1046~1083)이 개성 박연폭포에 거동했다가 갑자기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쳐 놀란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때 이영간이 칙서를 못에 던져 용을 혼내 주었다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 기록으로 봐서 연동사는 고려시대 11세기 이전으로 역사가 거슬러 올라가는 절이다. 연동사에서 동굴법당을 지나 경사가 가파른 길을 계속 올라가면 금성산성 보국문(輔國門)이 나온다.
금성산성에서 의병과 왜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정유재란(1597) 이후 400년 동안 연동사는 폐허로 남아 있었다. 산죽(山竹)과 잡초가 무성하던 절터에 1990년대 초에 20대 후반의 젊은 승려가 찾아왔다. 그는 절터 위쪽의 동굴(지금의 동굴법당)에서 생식을 하면서 수도를 시작했다. ‘금성산성 화산암군’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된 연동사 절터에는 동굴이 여러 개 있다. 밑이 움푹 파인 거대한 암벽 앞 평평한 곳에 지장보살이 반쯤 묻혀 있었다. 노천법당 주변에도 무너진 석탑의 부재(部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는 동굴 수도를 하면서 연동사 복원을 평생 과업으로 삼아야 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지장보살을 땅에서 파내 바로 세웠다.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3층 석탑의 부재를 모았다. 담양군의 지원을 받아 없어진 부재는 새로 깎아 끼웠다. 1996년 완전히 복구한 연동사 3층 석탑(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00호)은 담양읍 5층석탑(보물 제506호), 곡성 가곡리 5층석탑(보물 제1322호)의 백제계 석탑 양식을 이어받은 고려 후기의 작품.
지장보살은 지옥의 고통을 받으며 괴로워하는 중생 모두가 성불하기 전에는 자신도 결코 성불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 보살이다. 고려시대 후기에 지옥에서 중생을 구제하는 지장 신앙이 유행했다. 이 석불도 고려시대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젊은 스님은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 화암마을이 고향이었다. 그와 가까웠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출가(出家) 전에 수원에서 장가를 들어 아들을 낳았다. 담양 용화사의 수진 스님은 가정을 떠나 출가하겠다며 찾아온 이 젊은이의 머리를 깎아주고 법명을 원행(圓行‧1964~2014)이라고 지어주었다. 용화사 수진 스님한테 수계(受戒)한 승려들은 ‘행(行)’ 자를 돌림으로 쓴다.
수진 스님은 지금은 폐허가 됐지만 지장보살상이 남아 있고 경관이 좋은 연동사를 살려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래서 쑥대밭 같은 폐사터에 젊은 스님 몇 명을 들여보냈지만 중도에 모두 포기하고 나왔다. 그는 원행에게 “금성산성 밑에 폐사터가 있는데 오래된 석불상도 있다. 백일기도를 하고 절을 개척해 보려는가” 라고 물었다. 원행이 선선히 수진 스님의 말을 따랐다.
원행은 조선시대의 도사로 알려진 전우치(田禹治)가 살았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굴을 조금 더 파내고 그 속에서 수도를 했다. 잡초가 많은 절터의 여름은 모기가 많고, 산 속의 겨울은 너무 추웠다.
젊은 스님은 주변의 지형을 최대한 살려 절을 가꾸었다. 폐허만 남은 절터에 극락보전 노천법당 동굴법당을 만들고 아름다운 정원처럼 가꾸었다. 암반 위에 고려시대의 돌 부처와 석탑을 모셔 놓고 법회를 하는 명물 노천법당이 한 스님의 힘으로 만들어졌다. 부처님이 초기에 설법을 했던 곳도 법당이 아니라 노천이었다.
金城山煙洞寺(금성산 연동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일주문과 극락보전, 노천법당은 일직선상에 있다. 극락보전 불상 뒤로는 대형 통유리를 설치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니 실내를 밝게 하기 위한 창이다. 이 유리를 통해 300m 뒤 노천법당에서 부처님의 뒷모습을 볼 수 있고, 극락보전에서도 삼층석탑이 보인다. 연동사에는 지금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태양열 발전을 해 전기가 늘 모자란다.
원행 스님은 찰진 논흙을 가져다가 516명의 나한상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아라한은 범어 아라하트(arahat)의 음역으로 보통 줄여 ‘나한’이라고 한다. 16 나한은 부처의 경지에 오른 제자들이고, 500 나한은 역시 부처의 경지에 오른 수행자를 지칭한다. 원행은 나한상을 250 점 가량 만들어놓았는데 똑같이 생긴 나한이 한 점도 없다. 그러나 나한상만 만들고 미처 굽지 않은 상태에서 원행이 2014년 젊은 나이에 홀연히 세상을 떴다.
원행은 달마도를 기막히게 쳤다. 추성고을(주류회사) 양대수 대표는 원행이 달마도 치는 모습을 몇 번 구경한 적이 있는데 앉은 자리에서 붓을 몇 번 휘두르면 그림이 완성됐다고 말했다. 연동사 극락보전에 그의 달마도 작품이 두 점 걸려 있다. 원행은 달마도를 선물로 주기를 좋아했다. 그의 달마도는 연동사 신자라면 죄다 한 점씩 갖고 있을 정도.
극락보전 외벽에는 그가 그린 6점의 탱화가 남아 있다. 그중 한 점은 생전의 그의 모습을 닮아 자화상(自畵像) 같다. 극락보전 뒷벽의 탱화는 시작만 해놓고 중단했다. .
양 대표는 “원행이 천수경을 독경(讀經)하는 소리는 먼 곳까지 낭랑하게 들렸다. 목소리가 장중하고 개성이 강해 신도들은 멀리서 듣고도 '원행이 독경을 하고 있구만'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처음에는 한문 독경을 하고 나중에는 우리말 독경을 했다. 연동사 신도회장을 했던 고부정 씨(57)는 원행의 천수경 독경 CD를 필자에게 들려줬다. 클래식 음악을 듣는 느낌이 들었다. 고 씨는 원행의 그림과 글씨도 수작(秀作)을 여러 점 갖고 있었다.
“나와 원행스님은 갑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스님이 8년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중이 되기 위해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입니다. 그를 따르는 신도들이 경상도에서도 연동사를 많이 찾아왔는데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늦은 봄부터 여름까지는 절터에 난 잡초를 깎는 것이 원행의 일과였다. 풀을 깎다가 툭 쏘는 기분이 들어 말벌에 쏘인 것으로 알았는데 증세가 악화돼 병원에 가니 쓰쓰가무시병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진드기의 유충이 피부에 붙어 피를 빨아먹어 궤양이 생기는 질병이다. 원행은 그렇게 쉰의 나이에 부처님 곁으로 갔다.
“잡초가 며칠만 놔두어도 무성해졌어요. 원행 스님은 봄부터 초여름까지는 쉬지 않고 풀을 깎으셨죠.” 스님을 따르던 보살의 이야기다.
대웅전과 요사채가 있는 맞은편 산비탈에는 키가 크고 몸피가 가장 굵은 맹종죽 숲이 길게 뻗어 있다. 담양군이 조성한 대숲이다.
해우소도 원행이 직접 지었다. 자연과 단순함을 추구하는 승려의 미적 감각이 반영돼 있다. 통나무 자갈 기와로 벽을 만들어 벽화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화장실 내부가 깨끗했고 맹종죽 숲의 댓잎 서걱이는 소리가 배경음악으로 들려왔다.
쉼터찻집에서는 절 부근에서 나는 야생차와 차밭에서 가꾼 차를 섞어 내방객과 신도들에게 대접한다. 찻집에는 원행스님이 제작한 나한상들이 전시돼 있다.
요사채의 지붕은 대나무와 산죽을 엮어 얹었다. 방바닥과 벽은 황토를 발랐다. 자연친화적 인테리어다.
원행이 급작스레 열반하고 나서 출가 전 사가(私家)의 동생인 선행(宣行) 스님이 와서 절을 맡고 있다. 절집에서 사가의 형제가 주지를 물려받고 ‘행’자 돌림 법명을 쓰는 것도 드문 일이다. 선행은 “큰스님이 형제간이니 법명에 항렬(돌림자)로 행(行)자를 쓰라”고 했다고 말했다. 원행이 주지일 때는 연동사의 소속 종단이 용화사와 같은 태고종이었으나 지금은 다른 종단으로 바뀌었다. 절 사정은 캐묻지 않았다.
노천법당으로 오르는 비탈에는 사람 키와 비슷한 오죽(烏竹) 숲이 있다. 오죽은 줄기가 검어서 조경용으로 식재한다. 원행 스님이 오죽 근경(根莖)을 구해다 심으면서 검은 대나무가 작은 숲을 이루었다. 동굴법당으로 오르는 언덕에는 조릿대가 자란다.
연동사라는 절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안개가 짙게 끼는 날이 많아 연동사라고 했다는 것이 첫째 설이다. 금성산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면서 연동사가 완전히 전소되고 주변 계곡을 시신이 뒤덮었다. 전쟁이 끝나고 유족들이 찾아와 원혼을 달래기 위해 향을 피웠는데 그 향이 골짜기에 가득 차 연동사라고 했다는 것이 두 번째 설이다. 고려시대부터 연동사로 불렸기 때문에 두 번째 설은 시제(時制)가 어긋난다. 연동사 옆 골자끼의 이름은 ‘이천골’. 정유재란 때 시신 2천구가 뒹굴어 이천골(骨)이라 불렸다고 한다.
연동사에서 세워놓은 동굴법당 안내판에는 전우치가 연동사에 업둥이로 들어와서 동굴법당에서 제세팔선주(濟世八仙酒)를 훔쳐먹던 여우를 잡아 용서해주고 살려 보내니 여우가 전우치에게 도술을 가르쳐주었다는 전설이 적혀 있다. 안내판에는 ‘전우치는 실존 인물이며 담양 전씨라고 한다’는 문구가 씌어 있다. 제세팔선주는 마시면 신선이 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연동사에서 스님들의 건강을 위해 빚어 마시던 곡차가 추성주로 비법이 내려온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절 아래로는 저수지가 있고 그 밑으로 산림청의 정원문화원이 올해 공사를 시작해 2024년 7만㎡ 부지에 산림박물관, 숲속의 동화미굴관, 전시정원이 들어선다. 위쪽으로 ‘7성급 전망’이라는 금성산성이 있고 아래로 연동사와 저수지가 이어진다. 등산을 다니다가 절을 찾는 ‘등산불교’ 신도들이 많으니 절의 위치도 명당인 셈이다. 담양군의회 이규현 의원은 "원행이 고향 마을 후배라서 가깝게 지냈다. 만트라 공부를 많이 했고 국제명상센터를 세우려는 계획도 갖고 있었다. 좀더 살았더라면 담양군과 연동사를 위해 의미 있는 불사를 많이 했을텐데 안타깝다"고 말했다.
황량한 폐사터로 남아 있던 연동사가 담양의 명찰로 다시 태어났다. 눈 밝은 사람들은 한 승려의 예술적 감각과 아름다움을 가꾸는 공력 그리고 법력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
후원=담양군(군수 최형식) 뉴파워프리즈마(회장 최대규)
참고문헌
<세종실록지리지> 《조선왕조실록》
연동사 자연석실 노천법당에 있는
연동사지 지장보살입상(좌)과 연동사지 삼층석탑(우)
[연동사지 지장보살입상과 연동사지 삼층석탑은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연동사 자연석실 노천법당에 있는
연동사지 지장보살입상(좌)과 연동사지 삼층석탑(우)
[ 연동사는
담양의 명주인
추성주의 제조 비법을 전수해준
절이기도 하다.]
[우리 술 답사기] 천년의 술 명주 탄생, 담양 ‘추성주’
농민신문 기사 입력일 : 2022-01-26
[우리 술 답사기] (27) 전남 담양 ‘추성고을’
대한민국 식품명인 양대수 대표 4대째 운영 국가지정 민속주 ‘추성주’ 명품화에 공들여
멥쌀 덧술에 약재 10여가지 넣은 후 발효 첨가재·증류방식 따라 다양한 제품 선봬
젊은이 입맛에 맞춘 클럽·홈술용 전통주도
‘세한고절(歲寒孤節)’은 추운 계절에도 혼자 푸른 대나무를 뜻하는 사자성어다. 대나무는 사군자 중 하나로 변함없는 절개를 상징한다. 전남 담양은 대나무로 유명한데 이곳 용면 추성리에 가면 한결같이 곧은 마음으로 4대째 술을 빚는 양조장 ‘추성고을’이 있다. 2000년 대한민국 식품명인(제22호)에 선정된 양대수 대표(64)는 천년의 술, 1990년 국가지정 민속주로 인증받은 <추성주(秋成酒·25도)>의 명품화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양 대표가 처음부터 양조를 한 건 아니다. 그는 26년간 농협에서 일했다. 1대인 증조부 때부터 술을 빚었지만,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 시절을 거치면서 가업이 여러 번 중단됐기 때문이다. 그가 술을 빚기로 마음먹은 건 1993년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타결 소식을 듣고 나서다. 농산물 판로 고충으로 농민들이 시름하자 어떻게 하면 쌀 소비를 늘릴 수 있을지 고민한 끝에 선조로부터 남원 양씨 가문에 전래된 양조 비법을 꺼낸 것이다.
“아버지의 유언이 ‘가업을 이어라’였어요. 유지도 잇고 새롭게 다잡은 전통주 계승이란 소명 완수를 위해 술을 빚기 시작했죠. 퇴근하고 나서 혹은 잠까지 줄여가며 술을 공부했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전에 과감히 사표를 내고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사실 <추성주>는 고려 문종 때(1060년)부터 마셨던 곡차(穀茶)가 그 원형이다. 당시엔 ‘제세팔선주(濟世八仙酒)’라 불렸는데 양 대표가 추성군으로 불린 전남 담양의 옛 지명을 고려해 손수 붙인 이름이다. 금성면 금성산성의 천년고찰 연동사에서 스님들이 쌀과 함께 추월산 자생약초를 원료로 빚었던 셈이다. 1대인 양 대표의 증조부는 신실한 불교신자였는데, 주지스님이 술 빚는 비법을 알려주면서 지금의 술로 전해 내려오게 됐다. 역사가 오래된 만큼이나 얽힌 이야기도 많다. 늙은 살쾡이가 이를 훔쳐 먹고 사람이 됐다는 전설도 있고, 살쾡이가 훔쳐 먹는 모습을 모른 척해준 유생이 입신양명했다는 설도 있다. 또 가사문학의 대가인 송강 정철과 백호 임제, 면앙정 송순 선생 등이 3일 내내 숙취 없이 이 술을 즐겨 그 소문이 한양까지 퍼졌단 일화도 있다.
<추성주>는 시간이 흐르면서 맑은 약주 형태의 발효주, 이를 증류한 증류주로 진화했다. 멥쌀로 덧술을 만들고 10여가지 약재를 첨가해 20여일 발효한다. 발효가 끝난 후 대나무 추출물(죽력)을 첨가하면 <대잎술(12도)>이 된다. 이 술을 감압식 증류기로 2번 증류하면 <타미앙스(40도)>, 도수를 낮추면 <추성주>가 나온다. 제품 모두 1000년 전 술을 고스란히 재현한 걸작이란 평가를 듣는다.
“<추성주>도 시간이 흐르면서 변신을 거듭했어요. 증조부께선 한약재 20여가지를 넣고 만들었는데, 지금은 갈근·구기자·상심자·오미자·두충·육계 등 10여가지로 바뀌었죠. 전통을 지키고 보존하는 것만큼이나 소비자 입맛이나 트렌드에 맞춘 상품화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추성주>는 한약재 때문에 호불호가 갈린다. 한모금 넘기면 산뜻한 알코올 향과 함께 한약 맛이 기분 좋게 어우러진다. 쌍화탕이 떠오르기도 한다. 술 한잔에 언 몸이 절로 따뜻해진다. <타미앙스>는 <추성주>보다 도수도 높고 향도 더 진하다. 향긋한 약초향과 깔끔한 뒷맛은 ‘한국식 위스키’ 같다. 혀에 닿으면 달지 만도 않고, 쓰지만도 않은 다채로운 맛이 퍼진다. <대잎술>은 은은하고 순하다. 2020년 청와대가 선정한 추석 선물로도 유명하다. 더 특별한 술을 맛보고 싶다면 <대통대잎술>을 추천한다. 실제 대나무에 구멍을 뚫어 대잎술을 넣은 술인데, 마실 때는 상단에 구멍 두개를 뚫어서 마신다. 대신 보존이 어려워 하루라도 실온에 두면 술 맛이 변하므로 반드시 ‘냉장 보관’ 해 마셔야 제 맛을 즐길 수 있다.
양 대표는 젊은 입맛에 맞는 다양한 전통주를 선보일 계획이다. 이미 딸기 리큐어(혼성주)인 <티나(16도)>가 클럽과 홈술용으로 출시됐다. 앞으로 전통주의 혼은 기능전수자로 나선 5대 아들 재창씨(39)가 이어갈 예정이다.
“올 상반기엔 담양에서 자란 백향과(패션프루트)를 넣어 만든 리큐어나 일본 청주(사케)에 버금가는 맑은 청주를 만들 계획이에요. 전통주라고 고루하기만 하면 안되잖아요. 세대와 지역을 불문하고 우리 술을 사랑할 수 있도록 명주 계승은 물론 자부심을 갖고 전통과 품위를 지켜가겠습니다.”
가격은 <타미앙스> 500㎖ 4만원, <추성주> 350㎖ 2만5000원, <대잎술 도자기 선물세트> 500㎖ 3만3000원, <대통대잎술> 700㎖ 1만9000원이다. 인터넷 ‘추성고을(chusungju.co.kr)’과 전화 주문으로 구입할 수 있다.
담양=박준하 기자
연동사 자연석실 노천법당에 있는
연동사지 삼층석탑
[ 연동사는
수제차로
유명한 절이기도 하다.]
가마솥에서 덖고 비비고 말린 '야생본색'
[탐방] 야생의 찻잎 따서 수제차 만드는 담양 연동사
오마이뉴스 기사 등록일 : 2012.05.16.
깜짝 놀랐다. 차나무가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차나무는 파릇파릇 새순을 틔우며 하얗고 소담스런 차꽃까지 붙들고 있었다.
그뿐 아니었다. 사방에 차나무가 자라고 차밭이 펼쳐졌다. 요사채 앞도, 산비탈도, 계곡 주변도 온통 차밭이었다. 가지런히 정렬도 되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편안하게 뿌리를 내려놓고 있었다. 잡풀을 뽑아준 것 외에 부러 가꾸거나 꾸민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약수터 옆 비탈을 붙들고 있는 차나무의 뿌리는 감탄사를 연발케 만들었다. 뿌리가 무지 굵었다. 지나온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간직한 모양새였다.
그 사이 주지스님이 차 한 잔을 권했다. 절집 주변에서 맘대로 자란 찻잎을 채취해 덖은 차라고 했다. 비료 한 줌, 농약 한 방울은 차치하고 제대로 된 관리 한 번 받지 않은 야생이 키운 것이라 했다. 그 말에 믿음이 묻어났다. 전기도, 전화도 부러 들이지 않은 절집이었으니까.
차 한 모금 입에 물고 혀를 굴리니 담백한 맛이 입안에 맴돈다. 으레 첫맛은 떫고 쌉사레할 줄 알았는데, 그 느낌도 없었다. 차의 은은한 향과 맛이 깊었다. 표현하기 힘든 오묘한 맛 그 자체였다.
스님은 "연동사가 깊은 산중인데다 계곡을 끼고 있고, 그래서 일교차가 큰 지역의 특성이 차나무가 자라는데 최적"이라고 했다. 찻잎을 따고 차를 덖는 과정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건 그때였다.
며칠 전,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전통의 방식 그대로 찻잎을 덖어 수제차를 만들 것이라고. 모든 일 미루고 12일 절집으로 달려갔다.
절집 산비탈에서 찻잎 채취가 시작됐다. 그 일이 만만해 보이지 않았다. 산비탈에 짝발을 딛고 서야 하고, 한 잎 한 잎 따는 게 '뉘 나는(싫증나는)' 일처럼 보였다. 한참을 땄지만 큰 바구니의 밑바닥을 겨우 가릴 뿐이었다.
찻잎 채취는 찻잎을 씻어 비벼 먹은 점심공양 이후에도 한참동안 계속됐다. 오후 3시쯤 됐을까. 그때까지 딴 찻잎을 모아 차 만들기에 들어갔다. 찻잎 따는 일에 세 사람이 매달렸지만 겨우 큰 바구니 두 개밖에 안 됐다. 한나절 하고도 이렇게 힘든데, 날마다 찻잎을 따는 건 얼마나 힘들까 싶었다.
찻잎 덖기는 연동사 한켠에 자리한 가마솥에서 시작됐다. 먼저 가마솥의 온도를 430℃까지 끌어올렸다. 달궈진 가마솥에 찻잎을 넣고 몇 차례 저어 건져내 비볐다. 이번엔 가마솥 온도를 400℃로 낮춰 덖고 또 비볐다.
덖고 비비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가마솥의 온도도 조금씩 낮춰졌다. 380℃, 350℃…. 찻잎을 넣어 덖고 비빌수록 찻잎의 수분이 줄어들면서 색깔도 점점 변색됐다. 차의 형태로 짙어갔다.
찻잎이 타지 않도록 제때 넣었다 빼는 작업이 중요했다. 가열과 건조도 골고루 이뤄졌다. 모든 과정에서 차의 색과 향이 결정되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쳇말로 화장실 갈 새도 없었다.
자칫 찻잎의 일부라도 탄다면 그 냄새가 모든 찻잎으로 퍼져 몽땅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결코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과정이었다.
덖는 일뿐 아니라 비비는 과정도 심혈을 기울였다. 찻물이 잘 우러나고 그렇지 않고의 차이가 이 과정에서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밀 때는 직선으로 쭈욱 밀어주고, 당길 때는 살짝 돌리듯이 동그랗게 말아주었다.
파릇파릇하던 찻잎의 수분이 어느 정도 제거되면서 색상이 짙어지자 찻잎을 털어주는 일이 더해졌다. 찻잎을 따던 일이 고달프다 여겼는데, 덖고 비비고 털어내는 과정을 보니 차라리 찻잎 따는 일이 한결 수월해 보였다. 찻잎 하나하나가 아깝다는 생각이 든 것도 이때였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일곱 번, 여덟 번, 아홉 번 덖고 비비는 과정을 거쳤다. 그 사이 처음의 찻잎 모양은 사라지고 없었다. 전통의 수제차가 완성된 것이다.
이젠 직접 따서 덖은 수제차의 맛을 볼 차례. 찻물을 끓여 뜨거운 물에 바로 찻잎을 넣고 우려낸다. 쓴 맛이 없다. 고유의 차맛 그대로다.
"연동사 수제차는 높은 온도로 덖어서 만든 거잖아요. 그래서 끓는 물을 식혀서 마실 필요가 없어요. 높은 온도에도 잘 견뎌 맛이 중화됐으니까요. 떫은 맛도 없고, 뒷맛은 달고, 맑은 여운이 오래도록 지속되는 건 이 때문이죠."
수제차를 만든 김태경씨의 얘기다. 연동사 수제차가 귀한 대접을 받는 게 이 때문인 듯 했다. 야생에서 자란 찻잎을 하나하나 따서 사람의 손으로 정성껏 덖고 비볐다는 것. 자연 그대로의 야생에다 사람의 정성이 더해진 야생차의 맛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연동사~보국문] 구간
산행로 도중의
사랑바위
무주 적상산성과 장성 입암산성과 함께
호남의 3대 산성으로 꼽히는
금성산성의
외남문격인 보국문(輔國門)
무주 적상산성과 장성 입암산성과 함께
호남의 3대 산성으로 꼽히는
금성산성의
내남문인 충용문(忠勇門)
금성산성의
내남문인 충용문(忠勇門)
충용문(忠勇門) 옆에 있는
금성산성이
1908년
호남창의회맹소와 일본군경의
전투지였음을 알리는
안내문
호남창의회맹소는 1907년 10월 30일 전라남도 장성의 수연산(隨緣山) 석수암(石水庵)에서 의병장 기삼연을 중심으로 4∼5개 의병부대가 연합하여 결성한 부대다. 1908∼1909년 호남지역의 의병항쟁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다.
회맹소가 기세를 떨치는 지역에서는 조세를 거둘 수 없을 지경이었다. 1908년 기삼연 의병장이 이끄는 부대가 담양읍을 공격해 일제 침략기구인 우편소와 세무서, 군아 등을 점령해 각종 기물을 파괴했다. 그러고 나서 혹한을 피하고 설을 지내기 위해 천험(天險)의 요새인 금성산성으로 들어갔다. 이날 밤 날이 춥고 비가 쏟아져서 군사들의 의복이 젖어 얼고 굶주렸다. 미처 성을 지킬 준비도 하기 전에 뒤쫓아온 일본군의 탄환이 비 오듯 쏟아졌다. 회맹소 의병은 일본군경의 기습을 받아 6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기 의병장은 본진을 해산하면서 정월 보름 이후에 다시 모이기로 맹세하고 순창 구수동 친척 집에 잠적했다. 그런데 불시에 일본군이 20여 명이 이 집을 기습했다. 음력 설날이었다.
“내가 여기 있으니 주인은 해치지 말라." 기 의병장은 이렇게 말하고 걸어서 나와 광주읍 경찰서로 끌려갔다. 의병장을 탈옥시키려는 의병들이 뒤쫓아오는 데 불안해진 일본군은 기 의병장을 광주천변에서 총살했다. 회맹소의 마지막 전쟁터였던 금성산성은 기 의병장과 의병들의 항일 정신이 서려 있는 곳이다.
충용문(忠勇門) 옆에 있는
금성산성 안내도
충용문(忠勇門) 옆에 있는
금성산성 안내문
금성산성, 가파른 능선 위 천혜의 요새
이경하 기자
국방일보 기사 입력일 : 2021. 04. 12.
■ 호남의 가장 큰 규모의 3대 산성 중 하나
전라남도 담양의 금성산성은 장성의 입암산성, 무주의 적상산성과 함께 호남의 3대 산성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 중 가장 규모가 큰 금성산성은 깊은 절벽과 바위 등 자연의 산세를 활용해 쌓은 곳이 많아 천혜의 요새로 부족함이 없다.
금성산성은 능선을 따라 축조한 흔한 ‘포곡식’ 산성이지만 많은 부분에서 독특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계단식으로 쌓아 올라간 성벽이 있는가 하면 S자 형으로 구성된 특이한 옹성 형태, 두 개의 남문 등 기존 산성에는 보이지 않던 부분이 흥미를 자아낸다. 금성면의 너른 평야와 담양호가 또렷하게 들어오는 멋진 풍광을 감상할 수 있는 금성산성의 성곽길. 주말 등산의 산행코스로 추천한다.
■ 편집 = 이경하 기자
■ 남문과 북문 등 3곳 누각까지 복원
금성산성은 연대봉, 운대봉, 시루봉, 노적봉, 철마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내성과 외성으로 성벽을 쌓은, 길이 7,345m의 포곡식 산성이다. 산행으로 한 바퀴 도는 데만 4~5시간이 걸린다. 이 중 내성은 859m로 주 출입문인 남문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성곽의 높이는 3~5m 이내로 그리 높지 않지만, 경사면이나 깎아지른 듯한 절벽, 거대한 바위 등 천혜의 자연을 이용한 곳이 많아 상당히 높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금성산성이 축조된 것은 언제일까. 산성 초입에 세워진 푯말에서는 “1895년에 제작된 금성진도(金城鎭圖)를 보면 내성에는 동헌, 대장청, 내아 등 관청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며 “산성의 축조 시기는 고려 우왕 6년(1380)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언급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적어도 고려 말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주변이 절벽이라 접근이 어려운 지리적 특성 때문에 임진왜란 때는 의병의 거점이 되었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혈전이 벌어져 각종 시설이 불타고 동·서·남·북문의 터만 남아 있다”며 “6·25전쟁 시에는 성 안에 있던 보국사(輔國寺)가 불에 타 현재는 주춧돌만 확인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를 알리듯 금성산성 내에는 동학농민혁명군 전적지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으며 1908년 호남창의회맹소 본진이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전투를 치른 곳이라는 것을 알리는 푯말도 볼 수 있다. 터만 남아 있던 금성산성에 대한 복원은 1995년부터 시작, 동·서·남·북 모든 문과 허물어진 성곽 등 많은 부분을 복원했다.
이 중 외남문인 보국문(輔國門)과 남문인 충용문(忠勇門), 북문 등 3곳은 누각까지 복원했다.
■ 각종 건물이 있었던 내성
금성산성은 외남문이자 주 출입문으로 쓰이고 있는 보국문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금성산성 입구 주차장에서 40분 정도 산등성이를 오르다 보면 만날 수 있는 보국문은 금성산성의 남문인 충용문에서 길게 뻗어 나와 있어 출입문과 망루, 전초기지와 치성을 겸하는 복합적인 기능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산세를 잘 활용한 이 같은 모습은 다른 산성에서는 잘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다. 이어 보국문을 지나 조금만 오르면 본격적인 성으로 진입하는 충용문이 보인다. 이곳에서는 보국문이 손에 잡힐 듯 내려다보여 그 옛날 치열했던 격전의 당시 전투상황을 한눈에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충용문 또한 보국문과 마찬가지로 문루까지 잘 복원돼 있을 뿐만 아니라 주변 경관이 일품이어서 금성산성을 대표하는 장소라 할 수 있다. 이곳 충용문에서 성 안쪽으로 가다 왼쪽 산길로 오르다 보면 내성을 만날 수 있다. 내성은 동쪽 외곽성과 붙어 축조돼 있는데 이곳에는 조선 후기 당시의 문헌에 동헌과 관사인 내아, 화약고 등 각종 건물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건물들은 1900년도 초 일본군에 의해 모두 불타고 없어져 터만 남아 있다.
■ 서문지, 이국적이고 독특한 성곽 모습 감탄
내성을 지나 산길을 오르면 동문지를 만날 수 있다. 복원된 동문은 길고 좁게 휘어진 옹성뿐만 아니라 몇 개의 단으로 쌓인 보축성벽 등 독특한 성문 형태를 갖췄다.
옹성 끝부분에는 긴 네모꼴의 망대를 갖추고 있는데 다른 문지의 성벽에 비해 높은 편이다. 문루까지 복원된 북문지는 금성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급한 경사길인 성문의 좌우는 유사시 성 내부의 관군 퇴로로 이용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북문은 서문과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지만 급경사가 심해 오르내리기는 그리 쉽지 않다.
서문은 금성산성의 서쪽 계곡 바로 옆에 있는데 주변 경관이 흡사 남미의 오래된 성곽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만큼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이곳 축단 위쪽에 주초석이 일부 드러나 있어 다른 문과 같이 정면 3칸 측면 1칸의 문루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남문 쪽에서 가장 산행하기 힘들고 어려운 쪽에 위치해 산행하며 접하기 힘들지만, 이국적이고 독특하며 멋진 형태의 성곽을 감상하고 싶다면 꼭 들리기를 권한다.
이와 함께 충용문에서 노적봉과 철마봉을 지나 서문에 이르는 성곽길도 멋진 경관을 자랑한다.
동자암으로 가는 길
동자암 입구
동자암
금성산성 안 유일한 집이자 암자인 동자암은 전기도 수도도 없어 약수터에서 물을 길어다가 쓴다. 불편이 많은 곳이지만 사람들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이곳에 찾아든다.
보리 스님은 그들을 위해 제철의 토란을 캐서 탕을 끓이고 토란 반죽에 국화를 올려 화전을 만들어낸다.
동자암 정문의
불경 구절
[동자암은 청산스님(2014년 52세에 입적)과 보리스님(여), 황룡 스님(남), 청룡 스님(남), 구봉 스님(여) 일가가 일군 암자다. 청산, 보리스님은 부부, 나머지는 이들의 자녀들이다. 이들은 보국문과 충용문을 대문 삼아 산성산의 청풍명월을 벗삼아 골짜기 샘물을 길어다 밥을 짓고 장작으로 불을 때는 소박한 삶을 살았다. 빡빡 민 머리에 가슴까지 내려온 수염, 허리 춤엔 장검을 차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소림사 고수와 같은 청산스님은 자타가 인정한 금성산성 지킴이이자 전통무예가였다. 스님과 가족들은 꼭두새벽부터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칠흑같은 밤까지 금성산성을 쓸고 닦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무술을 연마했었다.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스님 가족들은 새벽 예불을 마치고 성곽을 한바퀴 도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심신 단련과 주변 청소가 이들 가족의 첫 일과였다. 청산 스님이 입적하신 후 2022년 현재 동자암을 지키는 유일한 사람은 보리 스님이다.]
동자암 요사채
[충용문~노적봉] 구간
금성산성
[충용문~노적봉] 구간
금성산성에서 바라본
담양의 병풍산
금성산성의 노적봉(405m)에서 바라본
한반도 모양의 담양호와
그 뒤로 보이는 추월산
금성산성의 노적봉(405m)에서 바라본
추월산(좌)과 철마봉(우)
금성산성의 노적봉(405m)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추월산(좌)과 철마봉(우)
금성산성의 노적봉(405m)에서 내려다본
보국문
금성산성의 노적봉(405m)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금성산성의 철마봉
[노적봉~철마봉] 구간
금성산성에서 바라본
추월산(좌)과 철마봉(우)
[노적봉~철마봉] 구간
금성산성에서 바라본
철마봉(485m)
[노적봉~철마봉] 구간
금성산성에서 바라본
추월산(좌)과 철마봉(우)
[노적봉~철마봉] 구간
금성산성에서 바라본
한반도 모양의 담양호와
그 뒤로 보이는 추월산
금성산성의 철마봉(485m) 정상에서
담양호를 배경으로 이성수
금성산성의 철마봉(485m) 정상에서 바라본
산성산의 최고봉인 연대봉(603m)
[ 위 사진부터 이어지는 8장의 사진은
금성산성의 철마봉(485m) 정상에서
시계바늘 방향으로
360도 파노라마 조망하면서
촬영한 사진들이다. ]
금성산성의 철마봉(485m) 정상에서 바라본
노적봉과
그 왼쪽에 보이는 시루봉
금성산성의 철마봉(485m) 정상에서 바라본
담양평야(좌)와 담양호(우)와
담양호 뒤로 보이는 병풍산
금성산성의 철마봉(485m) 정상에서 바라본
병풍산(좌)과 추월산(우)
금성산성의 철마봉(485m) 정상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추월산, 담양호, 강천산의 서향 능선
금성산성의 철마봉(485m) 정상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추월산, 담양호, 강천산의 서향 능선, 산성산의 서향 능선
금성산성의 철마봉(485m) 정상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담양호, 강천산의 서향 능선, 산성산의 서향 능선
금성산성의 철마봉(485m) 정상에서 바라본
산성산의 최고봉인 연대봉(603m)
[ 이상으로 파노라마 조망 끝 ! ]
금성산성의 철마봉(485m) 정상에서 바라본
노적봉(405m)
철마봉(485m) 정상에서
이성수 등산 배낭
[철마봉~서문터] 구간
금성산성에서 바라본
산성산의 서향 능선
[철마봉~서문터] 구간
금성산성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추월산, 담양호, 강천산의 서향 능선
[철마봉~서문터] 구간 금성산성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추월산 정상부와
그 오른쪽에 보이는 보리암
[철마봉~서문터] 구간 금성산성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강천산의 서향 능선
[철마봉~서문터] 구간
금성산성 탐방로 도중의
소나무
[철마봉~서문터] 구간
금성산성 탐방로에서 바라본
산성산의 최고봉인 연대봉(603m)
[철마봉~서문터] 구간
금성산성 탐방로에서 내려다본
금성산성의 서문터
[철마봉~서문터] 구간
금성산성 탐방로
주변 풍경
금성산성의 안쪽에서 바라본
금성산성의 서문터
금성산성의 바깥쪽에서 바라본
금성산성의 서문터
[금성산성의 서문터는 계곡에 위치하고 있다.]
서문터에서
간식으로 먹은 떡
서문터에 관한
안내문
서문터
[서문터~북문] 구간
금성산성
[서문터~북문] 구간
금성산성에서 뒤돌아본
철마봉
[서문터~북문] 구간
금성산성
[서문터~북문] 구간
금성산성
[서문터~북문] 구간
금성산성에서 뒤돌아본
추월산
[서문터~북문] 구간
금성산성에서 뒤돌아본
추월산
북문
북문터에 관한
안내문
북문에서 바라본
추월산
북문과
그 우측에 멀리 보이는
담양의 병풍산
금성산성의 북문에서 바라본
추월산
금성산성의 북문에서 바라본
강천산
금성산성의 북문에서 바라본
강천산(좌)과 산성산 연대봉(우)
북문
[북문~산성산 연대봉] 구간
금성산성 도중의
송낙바위에 있는
이정표
[송낙바위~산성산 연대봉] 구간
금성산성에서 바라본
광덕산(좌)과 운대봉(우)
[송낙바위~산성산 연대봉] 구간
금성산성에서 바라본
강천산
[송낙바위~산성산 연대봉] 구간
금성산성에서 바라본
비봉계곡과
사진 우측에 보이는
호남정맥의 광덕산
산성산의 최고봉인
연대봉(603m)에서
이성수 등산 배낭
산성산의 최고봉인
연대봉(603m)에서 바라본
광덕산(좌)과 북바위(우)
산성산의 최고봉인
연대봉(603m)에서 바라본
운대봉으로 연결되는 금성산성
산성산의 최고봉인
연대봉(603m)에서 바라본
노적봉(좌)과 철마봉(우)
산성산의 최고봉인
연대봉(603m)에서 바라본
강천산(좌)과 광덕산(우)
[연대봉~운대봉] 구간
금성산성에서 뒤돌아본
산성산 연대봉
[연대봉~운대봉] 구간
금성산성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광덕산, 운대봉, 시루봉
[연대봉~운대봉] 구간
금성산성에서 바라본
시루봉(좌)과 노적봉(우)
산성산 운대봉(586m) 정상에서 바라본
산성산 최고봉인 연대봉(603m)
[ 위 사진부터 이어지는 7장의 사진은
산성산 운대봉(586m) 정상에서
시계바늘 방향으로
360도 파노라마 조망하면서
촬영한 사진들이다.]
산성산 운대봉(586m) 정상에서 바라본
강천산
산성산 운대봉(586m) 정상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강천산, 비봉계곡, 광덕산, 북바위
산성산 운대봉(586m) 정상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광덕산, 북바위, 시루봉
산성산 운대봉(586m) 정상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시루봉, 노적봉, 철마봉
산성산 운대봉(586m) 정상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노적봉, 철마봉, 추월산, 산성산 연대봉
산성산 운대봉(586m) 정상에서 바라본
산성산 최고봉인 연대봉(603m)
[ 이상으로 파노라마 조망 끝 ! ]
운대봉 정상에서
산성산 최고봉인
연대봉을 배경으로
이성수 등산 배낭
[운대봉~북바위] 구간
금성산성에서 바라본
북바위
[북바위~구장군폭포] 구간
하산로 도중의
대나무 숲길
[북바위~구장군폭포] 구간
하산로
주변 풍경
[북바위~구장군폭포] 구간
하산로 도중의
석간수
[북바위~구장군폭포] 구간
하산로
주변 풍경
2022년11월26일(토요일) (담양군&순창군) [ 금성산성 & 산성산 & 강천사 ] 산행기 산 : (담양군&순창군) [ 금성산성 & 산성산 & 강천사 ] 산행코스: [ 금성산성 주차장~연동사~외남문(輔國門)~내남문(忠勇門)~동자암~내남문(忠勇門)~노적봉~철마봉~서문터~북문~송낙바위~산성산 최고봉인 연대봉~운대봉~북바위~구장군폭포~산수정~수좌굴~삼인대&삼인당~강천사~병풍폭포~ 강천산군립공원 주차장 ] (약 12km) 일시 : 2022년 11월 26일(토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11월26일 : 최저기온 7도C, 최고기온 15도C] 산행코스 및 산행 구간별 산행 소요시간 (총 산행시간 5시간32분 소요) 07:06~11:28 "좋은사람들" 버스로 서울 양재역 12번 출구 전방 국립외교원 앞에서 출발하여 전남 담양군 금성면 금성리 1030-1 번지에 있는 금성산성 주차장으로 이동 (271km) [4시간22분 소요] 11:28~11:53 전남 담양군 금성면 금성리 1030-1 번지에 있는 금성산성 주차장에서 산행 출발하여 자연석실 노천법당인 연동사로 이동 11:53~12:00 사진촬영 12:00~12:20 무주 적상산성과 장성 입암산성과 함께 호남의 3대 산성으로 꼽히는 금성산성의 외남문격인 보국문(輔國門)으로 이동 12:20~12:25 무주 적상산성과 장성 입암산성과 함께 호남의 3대 산성으로 꼽히는 금성산성의 내남문격인 충용문(忠勇門)으로 이동 12:25~12:29 금성산성 안에 있는 유일한 집이자 암자인 동자암으로 이동 [동자암은 청산스님(2014년 52세에 입적)과 보리스님(여), 황룡 스님(남), 청룡 스님(남), 구봉 스님(여) 일가가 일군 암자다. 청산, 보리스님은 부부, 나머지는 이들의 자녀들이다. 이들은 보국문과 충용문을 대문 삼아 산성산의 청풍명월을 벗삼아 골짜기 샘물을 길어다 밥을 짓고 장작으로 불을 때는 소박한 삶을 살았다. 빡빡 민 머리에 가슴까지 내려온 수염, 허리 춤엔 장검을 차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소림사 고수와 같은 청산스님은 자타가 인정한 금성산성 지킴이이자 전통무예가였다. 스님과 가족들은 꼭두새벽부터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칠흑같은 밤까지 금성산성을 쓸고 닦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무술을 연마했었다.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스님 가족들은 새벽 예불을 마치고 성곽을 한바퀴 도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심신 단련과 주변 청소가 이들 가족의 첫 일과였다. 2022년 현재 동자암을 지키는 유일한 사람은 보리 스님이다.] 12:29~12:39 사진촬영 후 휴식 12:39~12:42 금성산성의 내남문격인 충용문(忠勇門)으로 회귀 12:42~12:52 금성산성을 시계바늘 방향으로 진행하여 노적봉(405m)으로 이동 [노적봉 정상에 서면 한반도 모양의 담양호와 그 뒤로 추월산과 그 우측으로 철마봉을 조망할 수 있다.] [담양호는 영산강유역 종합개발 1단계사업의 일환으로 1976년 9월 높이 46m, 길이 306m의 코어형 필댐(fill dam)이 건설됨으로써 생기게 된 영산강 최상류의 저수지이다.] 12:52~13:11 금성산성을 시계바늘 방향으로 진행하여 철마봉(485m)으로 이동 13:11~13:17 사진촬영 13:17~13:45 금성산성 서문터(295m)로 이동 [서문터는 계곡에 자리잡고 있고, 산성산의 물이 이 계곡을 거쳐서 담양호로 흘러 들어간다.] 13:45~13:55 간식 13:55~14:26 금성산성을 시계바늘 방향으로 진행하여 북문(525m)으로 이동 14:26~14:30 사진촬영 14:30~14:40 송낙바위로 이동 14:40~14:45 산성산의 최고봉인 연대봉(603m) 정상으로 이동 [산성산 연대봉을 기준으로 북동쪽으로는 강천산과 강천사가, 동쪽으로는 광덕산이, 동남쪽으로는 금성산성 동문이, 남쪽으로는 금성산성 남문이, 남서쪽으로는 담양 리조트가, 서쪽에서 북서쪽까지 담양호가, 북쪽으로는 강천산의 서향능선이 위치하고 있다.] 14:45~14:50 사진촬영 14:50~15:00 산성산 운대봉(586m)으로 이동 15:00~15:02 사진촬영 15:02~15:06 북바위로 이동 15:06~15:46 구장군폭포로 이동 [군립공원 강천산 입구에서 강천사, 현수교를 지나 강천 제2저수지 조금 못 미치면 120여m 높이의 웅장한 구장군 폭포가 나타나 관광객들에게 좋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풍수객들에 의하면 음양의 조화를 이룬 명소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2005년 조성된 인공 폭포이다. 전설에는 마한시대 혈맹으로 맺어진 아홉 명의 장수가 전장에서 패한 후 이곳에 이르러 자결하려는 순간 차라리 죽기 전에 한 번 더 싸워보자는 비장한 결의로 마음을 다지고 전장에 나가 승리를 얻었다는 아홉 장군의 전설이 담긴 폭포이다.] 15:46~15:50 사진촬영 15:50~15:57 산수정을 거쳐서 수좌굴로 이동 15:57~16:00 사진촬영 16:00~16:16 삼인대와 삼인당이 있는 곳으로 이동 [삼인대는 조선 중종 10년(151년)에 폐비 신씨의 복원을 주창하는 순창군수 김정, 담양부사 박상, 무안현감 류옥의 행적을 기념하기 위한 비석과 비석을 보호하기 위한 작은 건물이다. 폐위된 연산군의 처남으로 중종반정 때 피살된 좌의정 신수근의 딸인 폐비 신씨는 후환을 염려한 반정공신 박원종 등에 의하여 폐출되었다. 그 후 새 왕비가 된 장경왕후 윤씨가 사망하자 이 세 사람은 각자의 직인을 소나무 가지에 걸고, 관직에서 물러남은 물론 죽음을 각오하고, 신씨의 복위 상소를 올렸다. 후에 유림들은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비와 함께 비각을 세우고 삼인대라고 불렀다. 삼인(三印)이란 세 개의 인장이라는 뜻이다.] 16:16~16:18 강천사로 이동 [강천사는 강천산(剛泉山)에 있는 통일신라의 승려 도선이 창건한 사찰이다.] 16:18~16:21 사진촬영 16:21~16:39 병풍폭포로 이동 16:39~16:52 사진촬영 후 간식 16:52~17:00 전북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 926 번지에 있는 강천산군립공원 주차장으로 하산하여 산행 완료 17:00~17:03 휴식 17:03~20:39 "좋은사람들" 버스로 전북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 926 번지에 있는 강천산군립공원 주차장을 출발하여 서울 양재역으로 이동 (265km) [3시간36분 소요] (담양군&순창군) [강천산&산성산] 산행지도 금성산성 개념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