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태균 80년대 한국에 이름도생소했던 극진가라데를 한국에 들여와 보급한 한국 극진가라데의 산증인
오늘 신태균사범을 알아본다!그는6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극진가라데를 알게된것은 태권도를 배우면서 타무도에 눈을돌리기시작할 무렵"바람의파이터 쵀배달" 최영의를 알고부터이다. 최영의 그에게는 하늘과 같은존재가 되어갈무렵 무작정 서울 반포에 극진가라데 간판을걸고 도장을시작한다(85년)
극진가라데를 무작정 시작하니 처음에는 일본과의 교류도 힘들고 한국에 그당시 이름도 생소한 극진가라데를 보급하기란 여간 힘든게 아니였다 그래서 그는87년 일본으로 넘어가 격투기 올림픽이라고 불리우는 제3회 극진가라데 세계선수권에 출전한다 그후 극진가라데의 우수성을 알고 한국으로 돌아와 더욱 극진보급에 전진한다
계속된 후배양성과 극진가라데 선수권출전 (전일본.세계선수권등)
극진의 강한힘에 예선탈락을 거듭한다 하지만 계속된 그의도전은 지금 그의 제자들과 후배들이 아직도 하고있다. 현재는 20년간 몸담고있던 극진회관을 탈퇴
극진회관 최고고문으로 계시던 노야마(노초웅) 관장 인솔하는 「극진 가라데 연맹 극진관」의 무도 이념에 찬동해 극진관의로 이적해 재)극진장학회 극진공수도연맹 극진관 한국본부장을 역임하고있다.
그는 80년도부터의 한국극진 보급으로 요즘은극진도장들이 속속생기고 있다. 80년도 그어려운 극진보급에 앞장서온 신본부장이 없어더라면 지금의 한국극진은 아직도 없었을수도 있다
선배에 대한 예의.존경 극진정신을 알려야할이때 요즘생기는 신생도장중 자기가 한국극진의 최초이다. 최영의총재의 극진제자라고 떠들고다니는 사범들이 나오고있어 신사범의 마음은 아프다 신사범은 그러는사범들이 그렇게해서라고 극진보급이 될수있다면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극진을 돈버는 수단이나 최강의 극진단증을 난무하는행위는 안했으면 한다고 말했다94년 최영의총재님서거후 분파된 극진4개문파중 3개문파(극진관.극진회관.신극진회)가 한국에 들어온 지금 극진은 하나라는 최영의총재님의 말씀대로 한국에서만이라도 싸우지 않안으면 한다 그래야 한국 극진이 발전할수있다고 말했다.
현재 신사범은 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 (석촌역 부근) 아직도 도복 띠을 질끈매고 땀흘리며 제자양성에 힘쓰고있다재단법인 극진장학회 극진공수도연맹 극진관 한국본부 02)2203-6643
@최영의총재님이 한국에 오실때마다 신사범에게 하시던말씀 "넌 내 막내동생이다"@라고 하시며 한국의동생으로 여기실 정도로 두분의친분은 각별했다. 그리고 그건 총재님의 고향의향수 이기도했다
극진관한국본부장(신태균) 감독패수여(최영의총재님)
현재 한국에서는 극진관 신태균 본부장님만이 유일하게 최영의 총재님
으로부터 감독패를 받으신 유일한 분이시며, 총재님께서도 신태균 본부
장님을 인정하셨습니다.
이렇게 총재님으로부터 직접 인정받은분은 신태균 본부장님이 국내유일
입니다.
****무도 미디어 기사*****
한국의 극진공수도는 80년대 부터 시작된다
한국이 낳은 최고의 무도가 故 최영의 총재님의 극진공수도가 요즘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한국에 보급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서야 극진공수도가 한국에서 활동하게 된것으 로 알고있으나 이미 극진공수도는 80년대부터 국내에 보급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최영의 총 재님의 국제공수도연맹 극진회관에서 박재근씨를 한국지부장으로 정식임명하여 국내에서 활 동하고 있었으나 사람들에게는 생소했던 극진공수도는 인식의 미흡으로 보급이 어려웠다.
[사진설명:최영의 총재와 신태균본부장]
"신태균 극진관 한국본부장은 누구인가?"
1961년생인 신태균 본부장은 태권도 선수출신으로 서울 서초구 반포동 대망체육관의 총관 장이자 현 극진관 한국본부 고문이신 "임광규"관장에게 합기도를 접하면서 태권도만이 강한 무도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다른 무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다 박재근 극진회관의 한국본부장을 만나게 되면서 극진공수도에 관심을 가지고 제4회 세계대회에 출전하여 한국 선수 최초로 1승을 거두었다.
극진공수도 시합에 출전했던 한국선수들과는 달리 신태균 본부장의 1승은 최영의 총재님에게는 상당히 신선한 충격이었다. 항상 고국에서 뛰어난 인재를 원했던 최영의 총재님은 신태균 본부장의 물러섬이 없는 투지, 강하고 빠른 발차기와 정신력에 흡족해하셔서 신태균 본부장님을 따로 불러 식사를 대접하시며 많은 무도의 조언을 해 주시며 격려해 주시기까지 하였습니다. 신태균 본부장은 그때를 회고하며 "총재님은 항상 우리 선수단이 참석하면 방을 빌려 따로 불러모아놓고 " 잘 먹어야 힘을 쓴다"시며 식사대접을 해 주실 정도로 고국과 고국사람들에 넘치는 애정을 가지고 계셨다" 라고 말한다.
"제3의 무도인생 극진공수도"
제4회 세계대회 대회에서 한국선수 최초로 1승을 거둔 신태균 본부장은 최영의 총재님과 식 사를 겸한 대면 후 극진공수도라는 무도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게 되었다. 태권도 선수출신인 신태균 본부장은 대망체육관 "임광규" 총관장님으로부터 합기도의 강함을, 최영의 총재님으 로부터 극진공수도의 강함을 배웠고, 또한 어느하나 약한 무도는 없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 다. 최영의 총재님과 대면후 태권도의 기득권과 극진공수도에 대한 인식부족으로 인해 극진 공수도의 국내 보급이 미약한 실정을 안타까워하는 최영의 총재님의 마음을 알게된 신태균 본부장은 극진공수도의 국내 보급을 위해 최선을 다 할 것을 다짐하게 되었다.
"끊임없는 교류와 극진공수도에 대한 강한 애정"
신태균 본부장은 제4회 세계대회에서 한국인 최초로 첫승을 거두었지만 극진공수도에는 문 외한이었다. 그런 그에게 극진공수도를 보급을 위해서는 극진공수도를 먼저 알아야 했다. 하 지만 한국 극진의 선두자인 그가 한국에서는 극진공수를 배울 기회는 전혀없었기 때문에 신 태균 본부장은 시시때때로 한국과 일본을 오고가며 극진공수를 익히기 시작했다. 기본기부터 수련법 카타 등 한 가정의 가장인 그에게는 막대한 항공료 역시 부담이었지만 최영의 총재님 과 "한국의 극진 보급"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경제적 어려움에도 최선을 다했다. 이렇게 최영 의 총재님은 신태균 본부장이 일본에 방문할 때 마다 직접 또는 로야마사범(현 극진관 관장) 을 통해 극진공수도에대한 많은 도움을 주시며 신태균 본부장에 대한 강한 애정을 보이셨다.
<최영의 총재님께서 직접 한국 극진발전의 노고를 치하한 국내 유일의 극진인>
"로야마(노초웅) 사범과의 만남"
로야마 관장은 최영의 총재님의 생전에 오른팔과 같은 존재였다. 신태균 본부장이 일본에 갈 때 마다 극진을 지도하며 많은 조언과 충고를 해주던 분이었다. 같은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로야마 관장도 고국인 한국에 애정을 가지고 계셨던 터라 신태균 본부장의 극진에 대한 열정 과 노력을 인정하여 최영의 총재님과 함께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로야마 관장님 과의 만남으로 인해 한국 극진공수도는 로야마 관장님과의 교류를 통해 대회 출전, 내제자를 유학보내는 등 본격적인 교류를 하게된다.
(현재 극진관 총본부에는 신태균 본부장이 추천으로 내제자 두명(황승현, 김형준)이 극진회 시절부터 수련하고 있다.)
"본격적인 한국 극진공수도의 본격적인 보급 시작"
임광규 총관장으로부터 "대망체육관"을 이어받아 관장으로 취임하게된 신태균 본부장은 극 진공수도 이름을 걸고 본격적으로 극진공수도를 한국에 보급시키게 된다. 또한 일본에서 개 최되는 전일본대회나 세계대회에 코치로 한국선수단을 이끌고 참가하게 된다. 이때 신태균 본부장은 보급이 가장 용이한 자신의 대망체육관 관원들에게 먼저 극진 보급을 시작한다. 강용봉(전일본선수권대회 출전)관장, 현 강남도장 이승민 사범, 현 부천도장 엄재영 사범, 정경진, 박종석, 오국정, 김경환, 정하용 등 자신의 대망체육관 사범, 관원들에게 극진공수도를 지도하기 시작한다. 특히 미국의 극진인들이 신태균 본부장에게 발차기를 배우기 위해 한국으로 유학을 오는 경우가 잦았고, 주로 최영의 총재님 또는 로야마 관장님의 권유로 방문했다.
한가정의 가장이었고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서도 신태균 본부장은 이들을 몇개월씩 숙식제공 을 해 주면서 지도하였다.
"총재님 서거 후 한국 극진"
1994년 최영의 총재님은 신태균 본부장에게 그해 8월부터 신태균 본부장의 추천을 받은 자에 한하여 6개월의 일본 극진연수를 계획하고 있었다. 이에 신태균 본부장을 이 극진 연수를 한국 극진보급의 좋은 기회로 생각하여 많은 준비를 하던 중 충격적인 최영의 총재의 서거 소식을 듣게되었고, 이와 동시에 연수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하지만 한국 극진은 극진회관의 최고고문이 되신 로야마 사범의 끊임없는 애정과 관심으로 지속적인 활동이 계속되었다.
"일본 극진관의 설립과 극진관 한국본부 설립"
2003년 극진회의 로야마, 히로시게 최고고문이 극진공수도연맹 극진관을 설립하면서 과거 부터 한국 극진공수도에서 활동하던 거의 모든 지부가 극진관으로 소속을 옮겼다. 로야마사 범이 관장으로 히로시게 사범이 부관장으로 임명되었고, 최영의 총재님 생전에 이루어놓으신 재단법인 극진장학회 역시 극진회관에서 극진관으로 소속을 옮겼다. 로야마 관장님과 십수년간 교류를 했던 한국 지부 역시 한명의 사범으로 인해 가짜(사이비) 또는 유사 극진이라는 얼토당토 않은 말을 들으며 감정이 고조되어있었고, 로야마 관장님의 제의에 그간의 교류와 의리로 극진관이라는 한 배를 타기로 결정 정식으로 한국본부를 설립하고, 출범하게된다. 이때 "극진공수도의 모국은 한국이다" 라는 로야마 관장님이 한국말로 하신 말씀은 출범 당시 참석한 많은 내 외빈의 마음을 뿌듯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날 신태균 본부장은 재단법인 극진장학회 극진공수도연맹 극진관의 한국본부장으로 정식 임명되었다.
"재단법인 극진장학회 극진공수도연맹 극진관 한국본부장이 된 지금 신태균 본부장"
이미 일본 법원에서도 판결이 났듯이 지금의 극진공수도는 한 단체의, 한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 지금에도 국내의 타 유파에서 아직도 자신들의 유파만이 진짜이고, 나머지는 가짜 또는 사이비라는 말들이 나와 신본부장의 마음은 아프다. 그리고 그런 내용들을 볼때마다 최영의 총재님을 떠올리고 지금의 이런 국내 현실을 총재님이 아신다면 과연 어떤 말씀들을 하실지 또 어떤 감정들을 가지실지.....모든것이 신태균 본부장 자신의 노력 부족인것 같이 느껴져 괴로울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신태균 본부장의 마음을 다시 강하게 만드는 것은 생전의 최영의 총재님의 말씀과 그분의 인생이었다.
신태균 본부장은 다른 것보다 한국에 극진공수도가 광범위하게 알려지고 수련인구가 늘어 가는 것에는 총재님의 바램대로 되고 있어 매우 기쁘지만 극진공수도를 돈버는 수단으로 사 용하여 소위 단증 장사를 하는 것은 안했으면 한다고 바란다.
이런 행위들은 극진공수도를 모욕하는 것이고, 총재님의 극진공수도를 비하시키는 것으로 한국의 극진선배들은 물론이고 일본의 극진 대 선배들 나아가 최영의 총재님을 모욕하는 행 동으로 극진관 만큼은 이런 행위는 하지 않을 것이라 힘있게 주장한다. 또 나아가 각기 다른 문파가 서로의 극진이념으로 활동하는 만큼 잘 지도하여 극진이 올바 르게 보급되길 바란다고 또한 극진공수도는 한국인이 이루어낸 업적인 만큼 어느 파에서건 한국에서 수련한 한국인 챔피언이 등장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금도 신태균 본부장은 극진관 한국 본부도장에서 수련생들을 직접 지도하고 있다.
첫댓글 벽돌 깨는거 봣-0-헉
대단하시지만;; 저아래벽돌없이 깬다면;;
저거 말이 쉽지 ..... 아무리 틈새돌을 채워 넣어서 깼다 하더라도 무시 못함. 한장한장.. 조차 깨트기 어려움... 일단 물기가 없는 상태에서 모든 힘을 집중시켜야 가능함..대단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