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부상서 석성이 목숨을 걸고 변호했다는 것은 증거가 미약합니다. 석성이 평양의 구원에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이것도 논란의 소지는 있습니다만..), 오직 석성으로 인해서 명나라의 지원이 결정된 것은 아닙니다.(자료 1)
또한 석성의 공은 과장된 면이 많습니다. 일단 3로의 진병은 석성의 공이 아니며, 양경리로부터 시작된 일입니다. (자료 8, 9,10)
<이것은 명나라조정에서 조선출병으로 인해 막대한 비용(은 900만냥)을 소모하여 재정적자에 허덕인 것에 대한 괘씸죄때문도 있었습니다. > 이 내용은 사실과 좀 다릅니다. 깜빡이님이 얘기하신 것은 조 각로(趙閣老) 와 석 상서 를 옹호하는 자들의 지론입니다. (자료7) 화의를 주장한 석성을 옹호하는 내용입니다.
특별히 왜적을 물리치려고 노력도 하지 않았고 명군에게만 의지한 주제 라는 것이 어떻게 성립되는지도 일단 근거를 가져와 주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석성은 자료 6에서 보듯이 강화를 방해한 의병들을 싫어하는 기색을 보일 정도였습니다. 조선이 끝까지 항전하였기 때문에 강화를 주장하는 석성이 실패했고, 오히려 원망했던 것입니다.
그가 왜적과 강화에 나섰다는 이유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그에 대해 관심을 표명했으며, 관련자료를 제출하기도 하였습니다.
(자료4,5)
자료11,12, 13 에서 보듯이 석성에 대해 제사를 지내는 것만해도 석성에 대해 많이 신경쓴 것입니다. 많은 신하들의 반대의견이 있었지만 단지 평양을 구원하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이유로 제사를 지낸 것입니다. 깜빡이님이 쓴 < 조선 조정은 위기에 처한 석성에 대해 나몰라라 했고 한마디 변호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라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자료 2,3은 석성의 잘못에 대한 내용입니다.
자료 1
다음은 조선왕조실록 기록입니다.
"... 내역(來役)3682) 이 구전(口傳)하기를 「육부(六部)와 구경(九卿) 아문(衙門)이 조정(朝庭)에서 회의하였는데, 병과(兵科) 서성초(徐成楚) 와 이과(吏科) 대사형(戴士衡) 이 면대(面對)하여 말하기를 『만약 조선 을 구제하고 일본 을 물리치고자 한다면 반드시 본병(本兵)을 보내야만 가능하다. 』고 하니, 모든 사람이 소대형(蕭大亨) 을 추천하여 승보(陞補)시키고 군사를 보내는 일절(一節)을 의논했다. 」 하는데, 그 일은 청정(淸正) 이 나온 뒤에 의논한 일이니 내역의 말이 적실한지는 알수 없다. 다시 4∼5일이 지나면 반드시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호응원 의 말로써 보건대 중국 조정에서 이미 군사를 출발시킨 듯하고, 석 상서(石尙書) 의 체직(遞職)은 신빙할 만한 문자(文字)가 없고 다만 구전하는 말뿐입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이처럼 알려주니 호응원 에게 치사(致謝)하는 것이 마땅하다. 살펴서 하도록 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54책 86권 1장 B면
【영인본】 23책 172면
【분류】 *군사(軍事) / *외교-명(明) / *외교-왜(倭)
석성관련 자료입니다.
자료2
선조 86권,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3월 9일(기해) 1번째기사
왕이 대신들에게 양포정·유원외의 일을 묻다
상이 이르기를,
“양사가 가지고 간 표문을 석성(石星) 이 위찬(僞撰)하다가 서성초(徐成楚) 에게 발각되었다고 하였다. 이 사람의 지론은 매우 올바르다.”
하니, 김응남 이 아뢰기를,
“ 주공교(周孔敎) 의 탄핵문(彈劾文)에서도 석성 의 다섯 가지 거짓과 여덟가지 그릇된 점을 지적하였으니, 비록 우리 나라 사람이 탄핵했다 하더라도 이 이상 더할 수 있었겠습니까?”
【태백산사고본】 54책 86권 6장 A면
【영인본】 23책 174면
자료3
선조 87권,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4월 11일(신미) 1번째기사
도사 호응원을 접견하여 손 경략 등의 일로 대화를 나누다
도사가 말하기를,
“황상께서 양사에게 화를 내며 묻기를 ‘그대가 어찌 함부로 적중에 들어갔으며, 들어간 뒤에는 또 어찌하여 봉사(封事)를 하지 않았는가?’ 하니, 양사가 공술하기를 ‘신이 처음에는 들어갈 뜻이 없었으나 석 상서 의 문서 때문에 들어갔을 뿐입니다.’ 하고, 이어 그 문서를 가지고 아뢰었습니다. 손 군문 은 한 간사한 사람이 내각(內閣)에 있음으로 해서 성지가 내려 이렇게 된 것인데 과도관이 지금 그대로 경략으로 둘 것을 논구(論救)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좌우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내각에서 성지를 내렸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하니, 어전 통사(御前通事) 심우승(沈友勝) 이 아뢰기를,
“각로(閣老) 조지고(趙志皐) 의 무리가 석 상서 를 구제하고자 하여 손 군문 을 함께 논박한 것을 가리킨 것인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도사에게 묻기를,
“ 석 상서 는 지금 병부(兵部)에 있습니까?.”
하니, 도사가 답하기를,
“ 석야(石爺) 는 3월 초에 이미 체직되었고 아직 그 대임자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랑(李侍郞) 이【 이정(李楨) . 】 우선 그 일을 대행하고 있습니다.”
【태백산사고본】 55책 87권 5장 B면
【영인본】 23책 189면
자료4
선조 87권,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4월 12일(임신) 5번째기사
비변사가 탄핵을 당한 석 상서와 손 군문, 그리고 자문의 일로 아뢰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 석 상서(石尙書) 가【 석성(石星) . 】 간계(奸計)에 빠져 끝마무리에 낭패가 있었으나 당초 우리 나라를 위한 계획은 성심에서 나온 것으로 우리 나라는 실로 잊기 어려운 은혜가 있습니다. 그가 장차 큰 죄에 빠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놀랐는데, 지금 하교(下敎)를 받드니 구제하여 주자는 뜻이 지극합니다. 그러나 석 상서 가 탄핵을 입게 된 곡절을 외국으로서 미리 안 듯이 감히 구제한다는 것은 형편상 어렵습니다. 심정은 구제하고 싶더라도 일은 실로 어려우니, 신들이 어떻게 조처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손 군문 의 경우는 청정(淸正) 이 전후 바다를 건넌 사실을 들어 병부(兵部)에 전보(轉報)한다면 손 군문 이 무고를 입은 일은 분변하기도 전에 저절로 밝혀질 것이니 어제의 계사(啓辭)대로 자문을 갖추어 호 도사(胡都司) 에게 부쳐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태백산사고본】 55책 87권 9장 B면
【영인본】 23책 191면
【분류】 *외교-명(明)
자료5
선조 87권,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4월 15일(을해) 3번째기사
고급사 행호군 권협이 중국의 구원군과 군량미 지원 시말을 치계하다
...
신이 즉시 주본(奏本)을 가져다 등사하여 보냈더니, 저녁 무렵에 다시 사람을 보내어 ‘당장 여러 통의 주본을 등사하여 보내라. 내가 과도관(科道官)에게 두루 보이고 나서야 그대가 주본을 올릴 수 있다.’ 하였는데, 이는 과도관들이 바야흐로 석 상서(石尙書) 가 강화를 주장하여 나라를 그르친 죄를 논하고 있으니 조선 은 그를 구원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에서였습니다. 제독이 과도관들이 함께 일하고 있는 제배(儕輩)이기 때문에 신들이 온 것을 매우 기뻐하였다고 하므로, 신이 즉시 두어 통을 등사하여 보냈습니다.
...
이날 신이 병부에 있다가 석성(石星) 을 혁직(革職)한다는 성지가 있다는 말을 듣고 결정되기를 기다렸습니다. 손광(孫鑛) 은 원적(原籍)으로 돌아가 평민이 되었고 양방형(楊方亨) 은 위주(衛州)로 돌아갔는데 영원히 서용되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는 석성 이 스스로를 발명하는 주본(奏本)에서 손광 이 청정 에게 뇌물을 받고 봉사(封事)를 파기시켰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
대개 신이 경사(京師)에 도착한 이래 과도관(科道官) 서성초(徐成楚) 등의 석성 에 대한 논핵(論劾)이 앞뒤로 잇달았었고 또 양방형(楊方亨) 도 석성 이 봉사를 논의하여 나라를 그르친 죄를 탄핵하였습니다. 석성 이 여러 차례 주본을 올려 해명하고 이어 양방형 이 보낸 게첩(揭帖) 열 다섯 장을 올리니, 황상(皇上)이 구경(九卿)과 과도관에게 명하여 다같이 보도록 하였습니다
【태백산사고본】 55책 87권 20장 B면
【영인본】 23책 197면
자료6
선조 95권,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12월 11일(정묘) 1번째기사
형 군문과 만나 적에게 투항한 자, 군량 등의 처리문제를 논의하다
이어 술을 두어 잔 돌린 뒤에 상이 말하기를,
“ 석 상서(石尙書) 가 소방(小邦)의 일 때문에 탄액을 받았으므로 과인은 늘 미안해하고 있었습니다. 감히 묻건대 그 대인은 지금 어느 곳에 있습니까?”
하니, 군문이 말하기를,
“귀국의 의병들이 영세한 적을 섬멸하였기 때문에 강화에 방해가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귀국을 깊이 원망하였을 것입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1책 95권 9장 A면
【영인본】 23책 347면
자료7
선조 101권, 31년(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6월 18일(신미) 3번째기사
경리 도감이 중국의 조선 인식, 양 도야를 위해 조선이 진주해 줄 것을 요청하다
...
천조(天朝)의 의논이 둘로 나뉘어졌는데, 한편에서는 「 중국 이 외번(外藩)을 구원해 주기 위하여 근본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 왜노 는 필시 중국 을 침범할 수 없을 것인데, 조선 이 자신을 위할 계책으로 왜노 의 형세를 크게 과장하여 보고한 것이다. 그런데 중국 에서는 날로 군사와 군량을 증강하여 중국 본토로 하여금 소동이 일게 하고 있으니, 석 상서(石尙書) 의 처치가 옳았다. 」고 하는데, 이것은 조 각로(趙閣老) 와 석 상서 를 옹호하는 자들의 지론이다. 한편에서는 「 왜노 의 목적은 작은 데에 있지 않다. 조선 은 우리의 긴요한 속번(屬藩)이니, 반드시 일거에 적을 징계하여 방수(防守)를 도모한 뒤에야 후환이 적을 것이다. 」고 하는데, 이것은 장 각로(張閣老) 의 주장이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은 모두 일을 기피하고 있으니 이곳에 온 장수들을 한번 보라. 과연 외국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적을 죽이는 자가 몇 명이나 있는가.
...
【태백산사고본】 64책 101권 12장 B면
【영인본】 23책 449면
【분류】 *외교-명(明) / *군사(軍事) / *사법(司法)
자료8
선조 102권, 31년(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7월 6일(기축) 3번째기사
이덕형이 정응태가 양 경리를 모함한 실상을 적은 주본을 아뢰다
재차 올린 주본은, 정 주사 가 사람을 시켜 각 군영에 보낸 비밀 서찰을 찾아내어 그가 파당을 체결하여 모함한 실상을 자세히 진술하였으며, 심지어는 작년 평양 에 있을 때 정응태 가 소응궁(簫應宮) 에게 서찰을 보내어 심유경(沈惟敬) 을 왜곡 비호한 모든 내용과 조지고(趙志皐) · 석성(石星) 이 경리에게 서찰을 보내어 심유경 을 두둔한 내용, 정응태 가 주폐(周陛) 와 은밀히 내통한 비밀 서찰 등을 빠짐없이 기록하였으며,
..
【태백산사고본】 65책 102권 9장 A면
【영인본】 23책 462면
자료9
선조 108권, 32년(1599 기해 / 명 만력(萬曆) 27년) 1월 19일(경자) 9번째기사
비변사가 3로의 진병에 관한 일을 사실에 의거하여 추서토록 아뢰다
평양(平壤) 에서 정토한 것에 대한 공은 석 상서 를 진술하고, 지금 3로의 진병(進兵)에 관한 일은 당초 양 경리 에게서 시작된 것이니 사실에 의거하여 추서(追敍)한다면, 중국 조정의 사람들이 보고 본국을 충후하다고 할 것입니다.
【태백산사고본】 68책 108권 18장 A면
【영인본】 23책 561면
자료10
선조 108권, 32년(1599 기해 / 명 만력(萬曆) 27년) 1월 8일(기축) 3번째기사
비망기로 주본 내용의 진실성을 살피라고 이르다
비망기로 이르기를,
“주본 안에 있는 봉왜(封倭)한다는 말은 아마도 석 상서(石尙書) 의 입장을 위해서 넣은 것 같다. 그러나 그 조목을 어찌 왜적을 물리친 것에 대해 사례하는 주문 속에 아울러 언급할 수 있단 말인가. 중국 장수를 열서(列書)하는 것에 관한 일은 관계가 중한 것이다. 만일 불참하여 공이 없는 자까지 뒤섞어 열서한다면 이는 기망(欺罔)의 잘못에 빠지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는 열서하고 누구는 열서하지 않는다면 마침내 중국 장수들이 항의하거나 원망하는 사단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나의 생각으로는 모두 삭제하고 세 제독과 총병 한 명의 이름만을 거론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대략을 십분 상세히 살펴 허실을 조사하고 고하(高下)를 평가하여 조정을 속이지 않는 것이 옳겠다.
...
【태백산사고본】 68책 108권 7장 A면
【영인본】 23책 555면
자료11
선조 118권, 32년(1599 기해 / 명 만력(萬曆) 27년) 10월 21일(정유) 2번째기사
간원이 석성에 대한 제사가 부당함을 아뢰다
간원이 아뢰기를,
“ 석성 이 옥중에서 죽고 심유경 을 참형하도록 논하였으니 중국 조종의 기율이 대단히 엄격하다고 할 만합니다. 석성 은 애당초 우리 나라를 위하여 힘을 쓴 공이 있다고는 하지만 끝내 화의(和議)를 주장하여 천하 만세에 죄를 졌기 때문에 결단코 용납될 수 없어 마침내 옥주에서 죽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지 않았다면 당당한 대의(大義)를 장차 어떻게 부식시키겠습니까. 상께서는 특별히 중국 조정의 대관(大官)이 우리 나라의 일로 인해서 갇혔다가 죽었다고 해서 관원을 파견하여 치제하려고 하셨으니, 그 긍휼히 여기는 뜻이 지극하기는 합니다. 다만 황상께서 이미 대의로 처벌하였는데 우리 나라에서 어떻게 감히 구구한 사정(私情)으로 천하 만세에 죄를 지은 사람을 치제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중국 장수가 성(城)에 가득한데 혹시라도 이 일을 듣는다면 틀림없이 중국 조정에 전파될 것이니, 뒷날 이를 꼬투리 잡으면 장차 어떻게 변명하겠습니까. 평양 에 치제하는 공사(公事)는 거행하지 마소서.”
하니, 예관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게 하라고 답하였다.
【태백산사고본】 72책 118권 25장 B면
【영인본】 23책 697면
【분류】 *외교-명(明) / *풍속-예속(禮俗)
자료12
선조 118권, 32년(1599 기해 / 명 만력(萬曆) 27년) 10월 21일(정유) 3번째기사
예조가 석성에 대한 제사 문제로 아뢰다
예조가 아뢰기를,
“ 평양 에 치제하는 공사를 거행하지 말라는 일에 대하여 예조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게 하라고 전교하셨습니다. 상서 석성 이 끝내 천하 후세에 죄를 짓기는 하였으나 처음에는 우리 나라에 대하여 공이 없지 않기에 성상의 하교대로 관원을 보내어 치계할 일로 입계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간원의 의논이 매우 곧으니 감히 달리 의논하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처음에 이미 대신들에게 의논하였으니 이번에도 대신에게 의논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태백산사고본】 72책 118권 26장 A면
【영인본】 23책 697면
【분류】 *외교-명(明) / *풍속-예속(禮俗)
자료13
선조 118권, 32년(1599 기해 / 명 만력(萬曆) 27년) 10월 21일(정유) 4번째기사
예조가 석성의 일에 대한 대신의 의견들을 아뢰다
예조가 아뢰기를,
“대신에게 의논하니 영의정 이원익(李元翼) 은 말하기를 ‘대간의 의논과 해조의 아룀이 모두 의견이 있으니 오직 성상께서 채택하시기에 달려 있다. 신은 당초에 이미 해조와 함께 의논하여 아뢰었으므로 지금 별다른 의견이 없다. 상께서 재결하기에 달렸다.’ 하고, 우의정 이헌국(李憲國) 은 말하기를 ‘상서 석성 이 당초에 우리 나라의 일 때문에 옥중에서 죽었으므로 상께서 측은히 여기시어 치제하고자 하셨으므로 신들도 감격하여 순종하였던 것이다. 이제 해조가 아뢴 것을 보건대, 간관의 아뢴 바가 매우 곧아서 달리 의논하지 못하겠다고 하였으니 해조의 의견도 또한 상께서 채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였으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화의(和議)를 공격하는 한 맥락은 만고에 걸쳐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석성 은 대신으로 화의를 극력 주장하였다가 마침내 엄한 처벌을 받아 옥중에서 죽었으니, 이는 당당한 대의가 오늘날에도 없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 어떻게 구구한 은혜로 천하 후세에 죄를 지은 자에게 치제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72책 118권 26장 A면
【영인본】 23책 697면
【분류】 *외교-명(明) / *군사(軍事) / *풍속-예속(禮俗) / *역사-사학(史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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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14
선조 38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5월 3일(병진) 4번째기사
유성룡 등이 이 제독과 왜적의 추격, 왕자 구출 등을 의논하고 치계하다
신들이 나갔다가 한강 에서 성중으로 돌아오는 조 총병(祖摠兵) 을 길에서 만났는데, 제독이 돌아오라고 명령했다고 말하였습니다. 신들이 진실로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강가에 이르러 이여백(李如栢) 에게 문안하니, 이여백 은 발병[足病]이 나서 찌르는 듯이 아프다고 하면서 강가의 나무 그늘에 누워 있었고, 장 대장(張大將) 은 이미 성중으로 돌아갔습니다. 날이 저물자 이 대장(李大將) 역시 병이 심하다고 칭하면서 가마를 타고 되돌아갔습니다. 저물녘에 다시 제독의 문 밖에 나아가 그 일을 물으니, 얼마 후에 제독이 연방(椽房) 을 시켜 ‘송 경략의 별첩(別帖)이 왔는데 절대로 왜적을 추격하지 말라고 금하니 나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또 들으니 왜적이 우리 사신과 두 왕자를 후미에 두고 행군한다 하니, 만약 그대 나라의 군사가 적을 섬멸한다면 우리 사신은 해를 당하더라도 괜찮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경우엔 우리 사신과 왕자를 다치게 할 뿐이니 그대로 나라에 실로 유익한 것이 없을 것이고 경략이 이 말을 들으면 반드시 우리가 지휘를 잘못했다고 꾸짖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말이 하도 많아서 다 기록할 수 없으나 대개는 모두가 진격하려는 뜻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이 답하기를 ‘왜구는 교만하고 사나와서 왕자와 포로로 잡아간 백성들을 돌려보내지 않고 가버릴 것이니 마땅히 대군으로 그 뒤를 추격하여 저들에게 두려운 마음이 들게 해야만 왕자와 백성들이 돌아올 희망이 있다. 지금 군대를 거두고 진격하지 않는다면 적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꺼리겠는가. 또 필시 영남 지방에 주둔해 있어 그 흉악한 계책을 헤아리기 어려울 것이니 그 때는 중국군이 추격하려고 해도 너무 늦어 따라 잡기 어렵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 번 말을 주고 받다가 밤이 깊어서야 물러나왔습니다.
밤 삼경에 야불수(夜不收) 2인이 전라 감사 권율 을 압송하여 제독이 있는 곳에 이르러서는 함부로 강을 건너간 뜻을 따져 물었습니다. 또 순변사(巡邊使) 이빈(李?) 과 방어사(防禦使) 고언백(高彦伯) 등이 급히 보고한 바에 의하면 중국군이 강변에 늘어서서 군사를 진격하지 못하도록 하고 이빈 의 중위 선봉장(中衛先鋒將)인 변양준(邊良俊) 을 목에 칼을 씌워 끌고 갔기 때문에 상처가 심해 피까지 토했다고 했으며 이빈 역시 강가에 억류시켜 떠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또 고언백 의 군대는 21일 진격하여 도중에 있었는데 사 총병(査摠兵)의 하인 20여 명이 길 앞에 줄지어 서서 전진하지 못하게 하고 고언백 을 불러 성을 내며 힐책하니, 고언백 이 부득이 군사를 정돈하고 대기하겠다는 것으로 핑계대었으나 사장군(査將軍)은 전혀 듣지 않고 억류시킨 채 놓아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제독이 추격병을 발송하여 강을 건너게 한 것은 신들의 강력한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워 짐짓 추격한다는 정상을 보이려는 것에 불과할 따름이고 실제는 군사를 진격시키려는 뜻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장세작(張世爵) 은 사고를 핑계대어 돌아갔고 이여백(李如栢) 은 병을 핑계대어 진격하지 않는 등 중국 장병들 모두가 싸우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최후에는 경략의 첩문을 꺼내 보이면서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드러내어 말하는 등 이랬다 저랬다 사리에 맞지도 않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경략과 제독 및 제장(諸將)들이 계책을 정해 놓은 지가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이니 말로 논쟁하기는 어렵습니다.”
【태백산사고본】 20책 38권 4장 B면
【영인본】 21책 701면
첫댓글 어익후~! 이걸 다 읽을려면.... 아무튼.... 모든 일은 단독으로 하는것은 불가능이지요. (단독으로 하면 영웅임.. 영웅도 단독은 불가능하지만요..)
님의 자료는 잘 읽었고, 저 역시 찾아본 것입니다. 님이 내놓으신 부분 어디에 조선조정에서 직접 명조정에 석성을 변호한 대목이 있는지요? 선조가 생판 관심도 없었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저도 그렇게 말한 적은 없습니다.) 실제로 아무것도 한게 없다는 것을 비판하는 겁니다.
자료 5 에서 나온 고급사 행호군 권협이 주본을 준 것은 조선 조정이 명조정에 석성을 변호한 내용이 아닌가요?
"특별히 왜적을 물리치려고 노력도 하지 않았고 명군에게만 의지한 주제"라는 것도 곡해를 하시는데, 목숨 바쳐 싸운 수많은 장병들의 노고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비판하는 것은 선조와 대다수 조정대신들입니다. 실록을 보시면 선조는 우리 장병들은 아무짝에 쓸모없고 오로지 명의 군대의 힘으로 전란을 극복했다라고 노골적으로 말합니다. 조선을 배제한 명과 일본간의 강화를 입으론 비난하지만, 막상 군대를 재정비하고 무기를 갖추어 독자적으로 반격할 힘을 키우려는 노력을 하기보다 권력투쟁만을 벌이고 김덕령등 많은 의병장들을 역모로 몰아 죽였습니다.
조선을 배제한 그 강화회담을 하면서 군대 재정비와 독자적 반격을 명이 막아 섰다는 사실은 아시나요? 한강 철수 때 일본군의 철군을 도왔던 것이 명이며, 그것을 추격하여 일본군을 죽이자 징계한 것도 강화회담을 하던 그 명군입니다.
석성이 강화를 방해한 의병을 욕했다, 라고 하셨는데 명의 입장에서는 남의 나라 전쟁에 결판도 내지 못한채 질질 전쟁만 끄는 것보다 강화해서 발빼고 싶은게 당연하지요. 우리가 독자적으로 일본을 무찌를 힘을 키울 생각도 하지 않고, 석성은 단지 욕만 했지만 이순신을 비롯한 많은 명장, 의병장들을 역모로 몰아 가두고 죽이기까지 한 것은 우리의 왕인 선조입니다. 감히 비교가 됩니까?
그걸 왜 비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강화회담 이야기는 전쟁이 오래 지속된 이후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명군이 참전한지 1년도 안 되어서 나온 이야기죠. 그리고 독자적으로 일본을 무찌르는 것을 방해한 것이 강화회담을 주재하던 바로 님이 옹호하시는 명쪽 관리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그저 강화회담을 해서 욕을 먹은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성호사설을 적은 실학자 이익이 탄식한 것도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명조정에서 조선을 의심했을때 변호했고, 양분할 것을 말했을때도 반대했으며 구원군 파견에 지대한 역할을 한 사람을 왜 직접 사신을 보내 우리가 할 최소한의 의리를 보이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올린 성호사설의 내용을 찬찬히 읽어보십시오. 님이 말씀하시는 뜻은 잘 알겠으나 솔직히 저는 선조에 대해서는 욕밖에 안 나옵니다. 님이 올리신 실록에서 적힌 "화의를 주장해 죽은 죄인"이라는 말이 얼마나 뻔뻔한 소리인가 이익은 탄식하고 있습니다.
선조는 화의를 주장해 죽은 죄인이라고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다른 신하들이 한 소리이지요. 선조는 실록 내내 석성을 옹호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으로서는 명쪽에 주본을 주고 자문을 갖추어 보내는 등 석성의 구명을 위해 할 것은 다했다고 보입니다. 도대체 조선이 더이상 무엇을 해야 석성을 구할 수 있나요? 석성을 구하기 위해 명에 구출대라도 보내라는 말씀인가요..
님의 의견은 잘 알았습니다. 서로간의 표현이 격해지는군요. 더 얘기하면 서로 괜한 감정대립이 될 것같으니 그만하도록 하지요.
이게 결론 인가요?? 으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