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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토릭, 기독교신자님들을 위한 예수님 초상화 / 터키여행 <3>
3 부를 들어가면서
저는 본래 불교신자이지만 터키여행에서 성소피아성당에서 예수님 벽화사진을 보면서
진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런 벽화는 한국에서 보기가 힘들기에
카토릭, 기독교신자님들을 위하여 사진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성당은 현재 카토릭성당으로 쓰이는것이 아니라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터키가 현재는 전국민의 98%가 이스람교를 믿기 때문이며, 이성당을
미국자본으로 본래의 성당으로 환원시키고자 복원사업을 하는중에
터키국민들의 강력한 반대로 좌절되였다고 합니다
내 생각으로 이제까지 세계역사는 기독교와 이스람교간의 전쟁의 연속입니다
십자군전쟁부터 수많은 혼란과 최근의 미국의 이라크침공도 큰틀에서 보면
종교간의 전쟁이라고 할수있습니다, 성 소피아 성당도 성당이 아닌
박물관으로 쓰여지고 있는데 대하여 안타까움을 금할수 없습니다 (개인생각임)
터키 여행지 : 이스탄불- 앙카라 - 갑바도기아 - 파묵깔래 - 에베소 - 아이발룩 - 트로이
이스탄불을 상징하는 건물 중 하나로 세계사 시간에 비잔틴 건축의 대표로
열심히 외웠던 바로 '성 소피아' 성당이다. 원래 명칭은 '하기야 소피아
(Hagia Sophia)'로 신성한 예지(銳智)를 뜻하며 그리스 정교의 총본산이다.
비잔틴제국(동로마)의 성당양식과 오스만제국의 이슬람양식이 섞여 있는
소피아 성당은 비잔틴 건축의 걸작으로 꼽히는 건축물로,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성 소피아 성당은
이스탄불이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불리고 있을 때인
서기325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도교의 대성당으로 지은 것을,
532년~537년에 걸쳐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에 의해 비잔틴 양식의
대성당이 완공되었다.
이 성당은 오랫동안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으로 이름을 알려오다가 1453년
오스만 터키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되고 동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이슬람의
모스크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또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성화(聖畵)와 이슬람의
상징물들이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내부는 길이 81m, 폭 70m
높이 53m 규모에 기둥도 없이 직경 33m의 거대한 원개(圓蓋, 돔 지붕)가 있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데, 935년 이후부터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성 소피아 성당의 ‘성(聖)’은 그리스어로 ‘아기아’이며 터키어로는 ‘아야’로 발음한다.
헌당식에 임한 황제는 성당의 아름다움에 감동한 나머지 "오 솔로몬이여! 나는
그대에게 이겼도다!"라고 외치며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그 후 오스만제국에 의해
비잔틴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그리스 정교회의 총본산이 되었다.
저돔의 높이가 50m가 넘는데, 엄청난 하중을 견뎌야 함에도 불구하고 가운데에 기둥
하나 없는데 사방에 나 있는 아치 창이 그 무게를 분산시켜 버티고 있는 거라고 한다.
그리스도와 성모마리아, 세례요한의 모자이크 벽화.. 이 그림은 최후의 심판에서
성모마리아와 세례요한이 탄원하고 있는 장면이다. 이 그림은 모나리자에서 보듯
어떤 방향에서 보아도 예수의 눈이 따라 다닌다.
오스만 제국이 이스탄불을 점령한 후 그리스도의 흔적을 없애기 위하여
이 그림 위에 회칠을 하였다. 후에 박물관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그 회칠을
벗겨내려 하자 그림들이 함께 떨어져 나간 것이다
예수님 벽화는 한국에서 결코 볼수없는 그림이기에 카토릭, 기독교 신자를 위하여 올립니다
그리스도와 성모마리아, 세례요한의 벽화
이 그림은 최후의 심판에서 성모마리아와 세례요한이 탄원하고 있는 장면이다.
이 그림은 모나리자에서 보듯 어떤 방향에서 보아도 예수의 눈이 따라 다닌다.
오스만 제국이 이스탄불을 점령한 후 그리스도의 흔적을 없애기 위하여 이 그림 위에 회칠을 하였다.
후에 박물관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그 회칠을 벗겨내려 하자 그림들이 함께 떨어져 나간 것이다
회칠과 같이 떨어져 나가기 전엔 이런 그림이었다네요.
대형 돔 지붕 4곳에는 천사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얼굴이 모두 훼손되었다.
이 그림은 중앙의 성모마리아가 아기예수를 안고있는 모습..
이 그림은 중앙의 성모마리아가 아기예수를 안고있는 모습..
이그림은 요하네스 2세 황제와 이레네 황후의 모자이크 그림으로
각각 성금주머니와 봉납 명세서를 들고 있는모습..
천국의 문.. 예전엔 남자들만 드나들었다는데 좌우 양쪽으로 천당과 지옥이라는데 손으로 천당을
선택하면 죽어서 천당으로 간답니다.. 손때가 많이 묻어있네요.. 어느쪽이 천당인줄은 아무도 모릅니다..
중앙 정면 위쪽에 성모마리아가 아기예수를 앉고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 성당의 많은 성화들은 15세기 비잔틴예술이 최고에 이르렀을때의 작품으로 이성당이 회교사원으로
사용되던 500여년동안 석회칠로 덮혀있었던것을 1970년대에 이르러 복원하고있는중이랍니다. 터키 시내풍경, 터키에서는 시내, 관광지 모든곳에 저렇게 빵을 파는 곳이 많이 있었다. 도너츠 모양에 깨를 솔솔 뿌린 시미트 란 터키빵을 먹어 보니 담백하고 고소했다. 터키는 주식이 빵으로서 농가에서 재배면적도 상상을 초월했으며 시내 군데군데에 빵을 굽는 업소가 많았다 호텔앞에 가볍게 먹을수있는 술집이다 터키는 한국처럼 밤 문화가 발달되지 않아서 쓸쓸했다 한국의 만물상 가게 처럼 리어커에 진열하고 파는모습, 그리고 쇼핑장소, 길거리, 시장에서 상인들은 어느정도 한국말을 하며, 본인휴대폰도 삼성제품이라고 보여주고 물건을 권유하면서 " 우리는 형제국가다 " 라는것을 유난히 강조하였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는 터키국민들은 항상 밝은모습이고 친철했다, 미지막날에 터키 이수탄불의 최대 전통시장을 방문핶는데 역사는 1,000년이 넘었다고 하며 우리나라 남대문시장은 게임도 안되는 아주큰 규모였다 한국식당인 고려정에서,,,, 터키와 우리는 형제국인 역사적 배경 '터키'라는 국가를 말하면 우리는 이스탄불,지중해의 나라, 형제의 나라 등 여러 수식어를 떠올리지만정작 우리나라와 터키가 왜 '형제의 나라'라고 불리워지는 지그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아느냐 물으면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6.25 때 미국, 영국, 캐나다에 이어네 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견해서 군함으로 2 달동안 항해해서 부산에 도착하여 전투에 참가하여서 그런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파병 된 15,000명이 넘는 터키군 대부분이자원병이였으며그중 3,500명이 사망(미국 다음으로 많은 사상자)할 정도로그들이 열심히 싸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많은 병력을 파견했으며,'왜' 그렇게 목숨을 걸고 싸웠을까요.. 터키에 가면 관공서나 호텔의 국기대에터키국기와 태극기가 나란히 게양되어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그리고 대부분의 터키인들 역시 한국인에게 굉장히 우호적이며,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대한민국 '코리아'를 Brother's country 라 부릅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요..여기, 라디오방송에서 나온 이야기를 잠시 참고해보도록 하지요. --------------------------------------- 터키와 우리나라와의 관계 터키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투르크'라고 부른다. 우리가 코리아를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것처럼.역사를 배웠다면 과거 고구려와 동시대에 존재했던'돌궐'이라는 나라를 알고 있을 것이다. 투르크는 돌궐의 다른 발음이며같은 우랄 알타이 계통이었던 고구려와 돌궐은 동맹을 맺어 가깝게 지냈는데돌궐이 위구르에 멸망한 후,남아있던 이들이 서방으로 이동하여결국 후에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원래, 나라와 나라사이엔 영원한 우방도,영원한 적도 없는 법이지만 돌궐과 고구려는계속 우호적이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를 '형제의 나라'라 불렀고세월이 흘러지금의 터키에 자리잡은 그들은,고구려의 후예인 한국인들을 여전히,그리고 당연히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즉, 우리는아주 오랫동안 형제의 관계였던 것이다.6.25 때부터가 아니고... 그렇다면 의문점 하나.우리는 왜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까? 그리고 터키인들은왜 아직도 우리를 형제의 나라라고 부를까? 답은 간단하다.역사 교과서의 차이다.우리나라의 중,고 역사 교과서는 '돌궐'이란 나라에 대해단지 몇 줄만 할애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돌궐이 이동해 터키가 됐다느니 훈족이 이동해 헝가리가 됐다느니 하는 얘기는 전무하다.그러나 터키는 다르다.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경험했던 터키는그들의 역사를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에서 역사 과목의 비중이 아주 높은 편이며 돌궐 시절의 고구려라는우방국에 대한 설명 역시아주 상세하다. '형제의 나라'였다는 설명과 함께.그래서 대부분의 터키인들은 한국을 사랑한다.설령 한국이 그들을 몰라줄지라도..실제로 터키인들은 한국인들 역시도그들과 같은 생각을 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인들도 터키를 형제의 나라라 칭하며그들을 사랑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1988년 서울 올림픽 때 터키의 한 고위층 관계자가 한국을 방문했다. 자신을 터키인이라 소개하면한국인들에게서 큰 환영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으나그렇지 않은 데 대해 놀란 그는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었다.'터키라는 나라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돌아온 답은 대부분 '아니오'였다. 충격을 받고 터키로 돌아간 그는자국 신문에 이런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한다. '이제.. 짝사랑은 그만합시다..'이런 어색한 기류가 급반전된 계기는 바로 2002 월드컵이었다.'한국과 터키는 형제의 나라, 터키를 응원하자'라는 내용의 글이인터넷을 타고 여기저기 퍼져나갔고 터키 유학생들이터키인들의 따뜻한 한국사랑을 소개하면서 터키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이 증폭되게 되었다. 6.25 참전과 올림픽 등에서 나타난그들의 한국사랑을 알게 된 한국인들은 월드컵을 치르는 동안 터키의 홈구장과홈팬들이 되어 열정적으로 그들을 응원했다.하이라이트는 한국과 터키의 3,4위전.자국에서조차 본 적이 없는 대형 터키 국기가 관중석에 펼쳐지는 순간TV로 경기를 지켜보던 수많은 터키인들이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한다. 경기는 한국 선수들과 터키 선수들의살가운 어깨동무로 끝이 났고 터키인들은 승리보다도한국인들의 터키사랑에 더욱 감동했으며 그렇게..한국과 터키의 '형제애'는 더욱 굳건해졌다. ------------------------------------------- 6,25 전쟁에 참가하게된 배경 유럽으로 남진하려하는 러시아의 힘을 얻어루마니아와 세르비아가 독립을 하게되고오스만터키의 아르메니아 영토 대부분을러시아가 차지하는 셈이 되자이에 분노한 투르크인들이 러시아와 붙어먹은 아르메인들을 표적으로인종청소라는 대학살을 감행한거죠. 1차 대학살 20년후또 다시 오스만터키 정부의 도움을 받은 투르크 이슬람교도들은아르메니아인 5만명에 대학살을 자행합니다. (2차대학살)게다가 정부는 학살된 아르메니아인 외175만명을 추가로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로 추방하고그 추방하는 과정에 60만명이 사막에서 목숨을 잃게 됩니다.(1894년~1915년까지 250만명의 아르메니아인은겨우 30만명만이 살아남게 됩니다.) 그후 1912년 발칸전쟁 때몬테니그로, 불가리아, 그리스가오스만터키에서 독립할 때도 알게모르게 러시아가개입하여 아르메니아인을 도와줍니다. 따라서 러시아가 북한을 지원하기 때문에 당연히터키는 그 반대 쪽인 남한에만 병력을 파견한 거지요. 물론 혹자는당시 터키가 미국과의 우방적 연계로 말미암은 국제적 이득을 노린 선택일 뿐이였다고 말하기도 하는데역사의 흐름이라는 큰 범주에서 바라본다면,터키가 2차 세계대전 때우리의 동맹국 중의 하나였던 이유가 필연적으로 러시아와 적대 관계일 수 밖에 없는 과거사 때문이였다고 보는게 타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형제의 나라..한국의 경제성장을자기일처럼 기뻐하고 자부심을 갖는 나라, 2002년 월드컵 터키전이 있던 날한국인에게는 식사비와 호텔비를 안받던 나라.. 월드컵 때 우리가 흔든 터키 국기(國旗)가터키에 폭발적인 한국 바람을 일으켜 그후 터키 수출이2003년 59%, 2004년 71%나 늘어났다는 KOTRA 통계가 있습니다.이런 관계를 지닌, 자기 나라로부터 수백만리 떨어진 곳에서 보내는 의리와 애정을 받는 나라가 세상에 몇이나 되겠습니까. 세계 역사를 좌지우지하는 대부분의 위인들은평생 독서를 즐겼으며, 그들이 가장 즐겨 읽었던 분야는 역사라고 합니다.우린 세계사를 떠나 국사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관심이나 있을까요.. 아니, 제대로 된 우리의 국사나 현대사를과연 배운 적이나 있었나요.. 내 나라 역사조차 바로 알지 못하면서남의 역사를 논했던 제 모습에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낌니다 피를 나눈 형제국가 터키 여행후기를 마치면서,,,, 지난 20 여년간 거의 빠지지 않고 여행을 다녔는데 그때도 즐겁고 신기했지만 이번만큼 큰 감동을 받지는 못했는데 이번여행은 진한감동 그 자체였다 그러나 음식이 맞지 않아서 엄청 고생 했다 한국식당이 없어서 전부 현지식으로 했는데 왜 그리고 짠지 먹지를 못해서 오이, 도마토, 우유, 빵 으로만 오기로 버티고 매 끼니마다 소주로 배를 채웠다,,,, 또한 비행기를 11시간을 타보면 그 고통을 알것이고 터키여행은 버스로 보통 7시간 많케는 10시간 여행을 해보면 저녁에 소주한잔할시간도 없다, 한국과는 시차가 6시간나는데 그놈의 배꼽시계때문에 새벽 2~3시에 깨어서 헤멜때의 고통이란 ㅋ ㅎㅎ 그래도 저는 모든분들에게 시간을 내서 다녀오시라고 권하고 싶으며 특히나 기독교인들은 성모마리아, 요한, 바올이 생활한 장소이기에 성지순례 보다는 가벼운마음으로 여행하는것이 좋을것 같습니다,,,, 끝으로 제가 올린 터키여행후기는 속된말로 코끼리발톱 정도 만져보고 쓴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터키는 내가 돌아본 나라중에서 가장 재미있었고 볼거리가 많았다고 생각하여 기분이 매우 좋습니다~~~~ 후기를 끝까지 읽어주신데 대하여 감사 드립니다 / 꾸 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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