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첫머리와 영감
모든 창작예술의 경우, 제일로 고심하는 것은 첫머리를 어떻게 풀어 나가느냐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시와 같은 문자예술의 경우에는 오로지 단어가 갖는 의미만으로 독자와 마주 대하는 첫머리라서 더욱
힘이 든다. 무애 양주동은 언젠가 장편소설을 쓰고자 원하였으나, 첫머리의 중요성을 절감한 나머지 세계명작의 첫머리를 수집하다본즉 맥이 빠지고 말았다는 실토를 하고 있다. 계용묵과 김진섭은 그 점을 이
렇게 진술하고 있다.
나에겐 언제나 서두 1행 여하에 그 작품의 성불성(成不成)이 따르게 된다. 서두가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을 시일 관계로 그대로 되겠지 하고 진행을 시키다가는 번번이 실패를 본다. 실로 이 서두 1행에 내용을 살릴 작품 형식이 결정되는 것이니 서두에 소홀할 수 가 없다.
-桂鎔默 '沈默의 辯'에서
문장의 첫 구절-글 쓰는 이는 누구든지 경험하는 일이겠지만 글에 있어서 최초의 1구같이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최초의 1구, 이것을 얻기 위해서 말하자면 모든 문장가의 고심초사는 자고로 퍽 큰 듯 보이고, 그만큼 이 1구는 문장의 가치에 대해서도 결정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다...... 백 사람의 문장가를 붙들고 물어 본다면, 그 중에 여든은 가로되 이 최초의 1구가 얼마나 고난에 찬 최대 최시의 문장적 위기를 의미하는 동시에 그의 모든 준비를 발전시키는 가장 중요한 지도자임을 말하리라. 훌륭하게 만들어진 물건이 중간에서 혹은 말단에서 잘되기 시작할 리야 없겠고, 좋은 결과, 발전을 위해서 시작이 지난하다는 것은 또한 당연한 일이니, 문장이 매양 좋게 시작된다면, 그 다음은 거저먹기라 할까. 요컨대 다음 문제는 논리적으로 그 방향만, 그것이 가야 될 길만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문장의 도는 근본적으로 발단의 예술임을 주장할 수 있으니 모든 문장이 첫 대목을 가지고 자기의 내용과 형식을 암시할 뿐 아니라 자신의 본질적 가치까지 결정해 줌에 따라 독자에게도 그것이 자연 결정적인 작용을 주게 되는 것은 우리들이 일상 경험하는 일이다.
-金晋燮 '文章私談'에서
계용묵과 김진섭의 도입부에 관한 말은 모든 언어예술에 해당이 된다. 허나 시의 경우는 발단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하지만, 불과 몇 백자의 짧은 구조로 이루어지는 표현이므로 작품 전편의 성취도와 더욱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더구나 시는 영감 혹은 정신의 구체적 표현이므로 대개의 경우 첫머리의 시작은 초월적인 만남이기 일수이다. 발레리가 시의 첫줄은 신(神)에게서 온다고 한 것은 이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감이란 말처럼 초심자를 괴롭히는 걱정거리가 또 있을까. 나아가선 아예 영감이 오지 않아서 작품을 쓰지 못했다는 말도 한다. 그때마다 필자는 시인의 영감은 머리가 아니라 손끝에서 나오니
우선 펜을 들고 시작해 보라고 권한다. 영감이란 가만히 그것을 기다리고 있다 해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시인의 내부에 마련돼 있다. 시인에겐 다만 그것을 어떻게 빨리 불러내느냐는
문제만 남는다. 그렇다면 그것을 불러내는 시도를 해보야 할 게 아닌가.
<2> 어떻게 첫행을 써야 하는가
시에 있어서 첫머리는 독자와 만나는 첫번째 고비이다. 첫머리에서 독자를 끌어당기는 힘이 없다면 그 작품을 도대체 누가 읽어줄 것인가. 더구나 시는 20행 내외, 길어야 50행 정도이다. 그런만큼 시 독자는 인내심이 없다. 소설이라면 어느 정도 읽어나간 다음에 그 작품에 대한 판별이 서기 시작하지만 시의 경우는 그야말로 짧은 한순간의 눈길로 그 작품을 판단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많은 시인들은 그 첫머리를 특징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온갖 테크닉을 개발하게 마련이다. 아래는 그 첫머리를 유형별로 분석해 본 것이다. 다소 도식적이지만 이러한 기초사항을 눈여겨 봄으로써 자기만의 독특한 첫머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1] 시간을 나타내는 시의 첫행은 매우 일반적이다. 특정한 시간대는 독자의 호기심을 유발한다.
흔히 4계절이나 하루 중 특정한 시간을 제시함으로써 첫행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계절 가운데는 봄이, 하루 중에는 밤이 첫행에서 압도적으로 나타나는 시간이다. 따라서 이런 류의 첫행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보다 복잡하거나 충격적인 어귀를 쓰게 마련이다. 덧붙이자면 단순한 시간대는 피하는 게 현명하다.
1> 봄이에요. 노랗게 목 메이는-이태수
한밤입니다. 자연의 밤-권달웅
2> 이즈막엔-한기팔
어느 새벽-조창환
집 한채를 몽땅 태우고 잠을 깼네 캄캄하리라 잠들 때였네-김정아
3> 6월 16일은-김영태
1>은 봄이나 밤을 묘사하는 상투적인 표현법에 변화를 가한 예라고 하겠다. 앞은 도치의 방법으로, 뒤는 점층의 방법으로 상투성을 벗어나고 있다. 2>는 불특정한 시간대를 설정함으로써 시간에 대한 상상
적인 해독이 가능하도록 한 예이다. 3>은 오히려 특정한 시간을 제시함으로써 유인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2]시의 첫행에서 시간을 제시하는 경우보다 공간을 설정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빈도수를 보여준다. 자연 공간 중에서도 산이나 강이 압도적이다. 들과 골짜기, 바닷가, 또는 뜰과 나뭇가지 등등 대체
로 시의 모티브가 작품 내부의 공간으로 설정되고 있다.
1> 어딘가에서-윤강로
2>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김주혜
3> 서울역에서 23시 5분에 나를 태울 때 너는 막차다-이화숙
서울 변두리 쌍문동 103의 175-신협
1>은 시간의 제시 방법에서 본 바와 같이 불특정한 공간을 설정함으로써 시의 융통성을 살린 예의 하나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첫머리는 다음의 두번째 행이 더 극적이어야 하는 부담을 준다. 또 한 시인이 여러 차례 반복 사용할 수 없다. 2>는 시의 주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제재(題材)로서 특수한 공간을 설정한 예가 된다. 허나 이 역시 자주 쓰면 상투적이고 도식적일 위험이 있다. 3>은 시적 감흥을 위해서 약점을 무릅쓰고 구체적인 사항을 제시함으로써 오히려 독자들에게 충격을 가하고 있는 예다.
[3] 시간과 공간이 첫 행에서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경우는 훨씬 효과적이다. 이러한 표현법은 그만큼 압축되고 간결한 어휘의 구사가 요구되지만 표현상 자연스럽게 보이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1> 지금 어드메쯤-조병화
2> 가을 햇볕 속에는-이수화
3> 겨울에도 비가 오는 城北洞 기슭-이명수
4> 기원전 5세기 해발 1,600미터의 올라간 강언덕 파지르크 2호분
에 묻힌 주인공은 전형적인 몽골의 특징을 지닌 건장한 체격의 60대
남자이다 가슴과 등, 두 팔은 스키토 시베리아 동물양식의 문신으로
완전히 덮여 있었다-지인
1>은 불특정한 시,공간을 제시함으로써 막연하고 애매한 기대감을 환기시킨다. 2>는 보다 구체적이다. 가을 햇볕에 대한 독자의 호기심을 유인한다. 3>은 '성북동 기슭'이라는, 작품 외부에도 실제로 존재
하는 공간이 겨울과 비와 함께 작품 내부의 새로운 공간을 형성한다. '겨울에도 비가 오는'이라는 관형어절이 주는 효과때문이다. 4>는 시간과 공간, 주인공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신문기사와 같은 한 대목을
도입부의 첫머리로 삼고 있어 특이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현대시가 서사적 구조를 대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예증이다.
[4] 시의 첫행이 하나의 단어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1> 그윽히-허영자
귀여운-김경희
2> 그늘-김현승
누님-서정주
어머니-신석정,양명문
촛불--황금찬
1>은 부사, 형용사 2>는 명사로 된 첫행의 예들이다. 1>은 다음 행에서 어떤 동작을 나타내는 동사의 출현이 예견되는 표현이다. 우리말의 부사나 형용사는 대체로 시의 첫행에서 자주 쓰이지 않는다. 다음에 수식해야 할 어구가 예견된다는 것은 그만큼 상식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2>는 다시 '누님,어머니'와 같은 인간 즉 유정물(有情物)과 '그늘,촛불'과 같은 무정물(無情物)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다만, '누
님,어머니'와 같은 경우는 호격조사가 생략되므로 청각적인 기능이 강화되고, '그늘,촛불'과 같은 경우는 회화적인 시적 구성이 예견된다.
[5] 시의 첫행이 하나의 단어를 중심으로 수식된다.
1>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김소월
너라고 불러보는 조국아-이은상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노천명
허리끈을 풀어놓고 누운 여자-박승미
이번 예는 한 단어의 예 가운데 '누님/어머니'와 같은 계열에 속하는 한 변형이라고 하겠다. '이름/조국'과 같은 추상명사를 의인화시킴으로써 상상력의 변주가 가능해진다. 또한 박승미와 같이 모과를 여
자로 보게 하고, 거기서 다시 허리끈을 연결시키는 식의 증폭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6] 시의 첫행이 하나의 문장으로 이루어진다.
1> 이쯤에서 그만 下直하고 싶다-박목월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유치환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김춘수
이번 예는 앞의 예들보다는 좀더 발전된 형태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첫행이 한 문장으로 되어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그 문장의 주어가 1인칭 즉 '나'로 되어 있거나 생략된 예들이다. 박목월과 유치환의 경우는 하직과 죽음이라는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박목월은 그 마지막 순간까지 관조하는 듯한 겸양에 찬 어법을, 유치환은 의지적인 어법을 사용함으로써 뚜렷한 개성을 보여주고 있다. 김춘수는 나와 짐승을 결합시킴으로써 새로운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2> 풀이 눕는다-김수영
관이 내렸다-박목월
길손이 말없이 떠나려 하고 있다-장만영
봉준이가 운다, 무식하게 무식하게-황동규
소 한 마리를 잡기로 하였다-송정란
[7] 2>의 예는 하나의 문장으로 첫행이 이루어졌으되, 그 주어가 명사어로 된 예들이다. 김수영의 예는 그 주어가 사물이고, 장만영과 황동규는 그 주어를 인간으로 하고 있는 점이 조금 다르다. 그러나 김
수영의 '풀'은 민족 또는 민중을 상징하고 박목월의 '관'도 한 인간의 죽음을 상징하고 있다. 송정란은 소를 통해 시를 상징화하고 있다. 장만영은 '길손'이라는 불특정한 주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황동규는 '전
봉준'이라는 역사상의 인물을 주어로 등장시키고 있다. 최근의 시에 가까울수록 특정한 시간,장소,인물이 시에 등장하는 것은 주목할 만한 현대시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예술의 독자적인 개성이 요구됨에 따
라 보다 사적인 소재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3> 가난이야 한낱 襤褸에 지나지 않는다-서정주
사랑은 항상 늦게 온다. 사랑은 生 뒤에 온다-정현종
[8] 3>의 예들은 3인칭의 주어가 추상 명사로 된 것들이다. '가난/사랑/목숨/산다는 것' 등등에 대한 정의(定義)에 가까운 수사법이 이러한 예들의 근간을 이룬다. 정현종의 경우 두 개의 문장으로서 첫행을 이루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현대시의 발생기에는 그 첫행이 비교적 간결한 경향이었으나, 최근에 와서는 두 개 및 두 개 이상의 복합 문장이 병치되거나 또는 병열문의 형태로 길어지는 경향을 볼 수 있다.
[9] 이밖에도 시의 첫행에 있어서 '사랑이 오라 하면,먼후일 당신이 찾으시면,눈 감으면,이 비 그치면' 등 가정법이 사용되고 있다. 한때 여류 시인들에 의하여 애용되는 것 같았지만 최근에는 관념의 심화
에 두드러지게 사용되고 있다.
[10] 시의 첫머리를 산문형으로 시작한다
1> 길도 나지 않은, 竹山에서 사십 리도 넘는 산, 사람냄새라곤
풍기지도 않는 산죽숲을 헤치며 벼랑바위를 발끝으로 짚고 넘으면
아심아심 내려다보이던 대실리, 둥그머니 앉은 초가집, 커다란 안채 그
뒷뜰에 터를 잡았던 넉넉한 그늘-노혜봉
십미리미터 단단한 기억의 유리창을 향하여 절굿공이 하나를 던지
고 싶어진다. '차앙, 깨뜨려 버려' 검정색 충동이 더운 김을 내뿜으며
내 귓가에 와서 서성인다-이영신
70년대에 들어, 우리 시에 두드러지게 보이는 현상의 하나가 시에 대한 다양한 모색이다. 그 중에서도 강우식은 4행시를 보여주었고 그에 반해 산문시, 연작시가 시의 한 흐름을 형성하였다. 미당 서정주의
'질마재 신화'가 산문시와 연작시의 형태를 보여주었다면, 박제천의 '장자시'는 연작시이자 띄어쓰기를 무시한 의식의 흐름 기법을 도입했다. 그와 더불어 단위 작품에도 산문시가 빈번하게 나타났다. 정진규,
박제천 등 60년대 시인들이 자주 쓰는 산문형 흐름은 요즘의 신인들에게 그대로 이어져서 내용의 심화를 이루게 된다. 예시들이 보여주듯 첫줄을 아예 한 대목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3> 좋은 시의 구조
좋은 시는 역시 그 구조가 탄탄하다. 독자와 만나는 첫행이 우선 독자를 끌어당길 수 있는 흡인력을 가져야 한다. 그러한 흡인력은 놀라움에서 발생된다. 놀라움이란 한마디로 말해 독자의 의표를 찌르는
것이다. 독자가 전혀 예상치 못한, 그야말로 이럴 수가! 탄성이 나올 수 있는 첫머리라야 비로소 독자를 만날 수 있다.
상투적인 도입부, 뻔히 아는 사실, 개인적인 감상, 시덥잖은 현실비판, 관념적인 푸념 따위로 시작되는 작품은 그 구조상 도입부를 이어받아 증폭시킬 수 없는 취약점을 처음부터 부담으로 갖게 된다.
좋은 도입부로 시작되면 그다음의 본문 내용도 순탄하게 확장이 되고 마무리를 자연스럽게 전환시켜 내용의 증폭을 이루게 된다. 이 경우는 하나의 작품이 곧 그 제작자인 시인의 개성과 맞물려 있으므로 별다른 요령이 있을 수 없다. 예시작품을 통해 한편 한편 직접 독자가 음미하기를 바란다.
잠실 1단지에서 혜화동까지
나를 태운 69번 버스는
아파트 숲을 돌고 돌아
자동차 숲을 달리고
버스 뒷칸에 앉은 나는
나의 집
나의 직장
나의 통장
나의 입맛
온통 나의 숲에 빠진다
밤나무와 참나무
엉겅퀴와 칡넝쿨이 엉켜 있는 숲
그 건너편에
박 철수씨 이 준태씨
최 영자씨 김 정숙씨가 모여 사는
우리 동네가
있고
숲은
있는 그대로 그렇게
밤나무는 여기 참나무는 저기
이웃하며 사는데
나무만 바라보는 나는
허구헌날 이삿짐을 부린다
당신을 외면한다
내 언제 숲을 볼수 있겠나
내 언제 숲이 될 수 있겠나
-신술래 '숲'
신술래의 시는 일상의 경험을 교묘하게 시에 녹여넣고 있다. 도입부부터 89번 버스노선을 삽입함으로써 자동차와 숲이라는 이질적인 단어가 한데 어우러진다. 그것은 실로 충격적인 결합인데도 거부감을 주
지 않는다. 오히려 조그만 놀라움으로 우리 앞에 다가선다. 또한 시의 중반에 자연스럽게 이웃들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사람들마저 밤나무나 참나무로 만들어 버리는 원숙한 기교를 보여주고 있다.
한밤에 쫓기듯 빨래를 하다가
내가 왜 이 한밤에 빨래를 하는가-
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쫓기듯이
말이 말장난을 하다가 말을 놓치고
말을 타고
줄행랑을 놓는다.
나는 사면에 벽을 쌓아
하늘을 지붕 삼은 말의 집에 갇혀.
벌떡 드러눕는다
빨래가 밀리면 초조하다.
말이 밀리면 불안하다.
부걱부걱 거품내며 빨래를 하면
말이 거품 속에 녹아
물과 사귀고
거품이 물에 녹아.
달아난다
한밤에 쫓기듯 빨래를 하다가
내가 왜 이 밤중에 빨래를 하는가-
라고 생각한다.
말의 때국물은 누구 차지인가-
말의 깨끗한 입성은 정말
누구 차지인가─
-전영주 '한밤에 쫓기듯 빨래를 하다가'
전영주의 시는 앞의 신술래처럼 '빨래'라는 일상사를 한밤에 하는 것으로 바꾸어놓음으로써 호기심을 유발한다. 그러나 시인의 자문자답은 '말'이라는 관념으로 슬그머니 넘어간다. 독자의 기대를 끝까지 배
반함으로써 자신의 말을 전달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나는 오른 팔에 청색 안료를 깊게 찔러 넣었다 바늘구멍에 물
감 칠한 실을 꿰어 살을 떠 나갔다 내가 삶이라고 떠 나가는 곳에
괴로움이 있었다 내가 삶이라고 떠 나가는 곳에 미움이 있었다 내
가 삶이라고 떠 나가는 곳에 몸부림이 있었다
그것은 길 위에 길을 밟고 떠나는 순례자의 십자가 문신이었다
십자가 속의 눈물이었다 수증기가 되어 사닥다리를 타고 끝없이 위
로 올라가고 싶은 소망이었다
그것은 푸른 들판을 질주하는 뿔 달린 손 저주의 문신이었다
붉은 혓바닥 날름거리는 뱀이었다 어둠이었다 무엇이든 내던지고
싶은 초특급 태풍 미어리얼 제19호였다
스키타이 황금전 전시회 벽에 나란히 체중이 실려 걸려 있다
4세기 오른쪽 팔 옆 20세기 나의 오른쪽 팔
가랑잎 소소히 밟고 찾아온 박물관에서
흐물흐물 흐물어진 내가 다시 태어나는 찰나
아그배 열매는 더욱 붉어졌다
-한리나 '문신'
한리나는 문신이라는 조금은 낯선 소재를 도입하고 있다. 그 동기는 역으로 마무리에 보여주는 스키타이 전시회이다. 그럼으로써 문신에 관한 그의 상상력에 대해 타당성과 설득력을 얻는다. 다만 두번째 연의 십자가와 눈물의 대비가 약하다는 게 흠이다.
산 그늘에 숨어 살던 쑥부쟁이의 웃음소리
빙벽에 달라 붙어 있다
눈을 크게 뜬다
눈이 활짝 열린다
하반신이 썩어 시꺼멓게 흐르던 물줄기들
은빛으로 아름다이 갇혀 있다
상처 투성이의 위벽들도 비장하게 꿈틀댄다
(흰 빛은 모든 빛의 죄를 다 용서하는구나)
산비탈 저쪽에서 쫓겨온 바람들이
꽝꽝 꽝 못을 친다
못을 밟고 올라선다
새 숨소리 손끝에 묻어 난다.
물이면서 불, 불이면서 물인
이 우주의 먼지 사이로
빙벽에 달라붙는
더 이상 작아질 수 없는
미세한 가루가 된 내 물소리.
-하영 '빙벽 혹은 화엄'
하영의 빙벽은 처연하면서도 아름다운 시다. 하반신이 썩은 물줄기라는 섬뜩한 표현과 상처투성이의 위벽들을 대비시킴으로써 그의 영혼이 겪고 있는 고통을 극대화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흰 빛은 모든 빛의 죄를 용서하는구나'라는 잠언투를 활용함으로써 고통을 순명으로 바꾸는 화엄을 이루어내고 있다. 시예술이란 이래서 묘미가 있는 것이리라.
마음 하나 바꾸면 되는 일이다. 베보자기 펼쳐 놓고 약탕관 옆
에 놓고 다짐한다. 평생 허덕이는 몸살이는 네 탓도 아닌 일. 탕약
을 밤낮으로 달여 보아도 마음 스스로 졸이는 일.
내 지닌 것은 죄다 내어 주마. 그렇게 맛배기로 순하게 진국만
술술 빼어주면 될 일. 허전한 껍데기. 히나리같이 가벼운 찌끼를
아무 데나 뿌렸다. 고단히 썩어지면 될 일을 웬지 바둥댔다. 뭔지
버텼다. 부둥켜 안고 뒹굴었다.
(죄다 거두어 들이시지요. 흙의 색깔을 삭혀 새김질하시지요.
짙은 유록색 푸성귀의 마른 열매도, 익모초의 쓰디쓴 원뿌리 저 싱
싱함도 은행빛의 투명함 쌉쌀함도, 몹쓸 것 그 안에 죄다 우려져
보이는데요.
노여움의 빛 서러움의 빛깔을 진하게 거두고 저 깊은 속내 이
야기 아구리를 봉한 채 뜨거운 옹관 속 거뜬히 건너 가시지요.)
물기란 물기는 물에게 자리를 비워주는 일(베보자기를 뒤집어
썼다.) 잣대로 목 질끈 동여매었다. 목줄을 조였다. 비틀었다.
평생 얽히고 설킨 그물줄기를 갈가리 찢어 던졌다. 감탕을 쳤
다. 텁텁한 떫은 삶이라니 어둠의 진흙떼기 그 바닥을 한 입에 한
치씩 떼어내 꿀걱 받아 삼킨다.
-노혜봉 '더늠'
노혜봉은 '더늠'이라는 판소리 용어를 제목으로 차용함으로써 시의 오브제로 삼은 탕약이 실은 삶 그 자체임을 시사하고 있다. 따라서 독자는 시인의 의도대로 시를 읽을 수밖에 없는 자력에 끌리게 된다.
시의 제목이 충분한 효과를 거둔 예이기도 하다. 하나의 오브제가 갖고 있는 정보는 대단히 많다. 그 중에서 필요한 것만 골라 쓰는 노혜봉의 기교는 범상한 것이 아니다.
사랑니가 쑤셔올 땐 매운탕을 끓인다
찬바람에 제 살을 다독이며 꼼지락대는 가을게를 사다
얼큰하고 구수한 매운탕을 끓인다
날씨가 추워지면 사랑니는 아려오고
가을게는 살이 찌고
뼛속 깊이
관절 마디마디 샛바람소리 들리고
방풍막이를 못한 가슴에선 창틀이 흔들리고
닫아 걸고 잠그어도 걷잡을 수 없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는 흙바람 모래바람
흐린 하늘은 눈발을 준비하고
난
펄펄 끓는 뜨거운 국물로 뚫린 가슴을 달래고 채우고
덥혀준다
-이섬 '가을게 사랑니'
이섬의 시는 미소를 띄게 한다. 가을게로 끓이는 맛있는 매운탕도 시로 쓸 수 있다니...... 그리고 그것을 좋은 작품으로 매만져내다니 참으로 훌륭한 솜씨가 아닐 수 없다. 시란 것은 따지고 보면 따질수록
어렵고 우리와 전혀 무관한 괴물로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러나 이섬의 이런 시를 읽다보면 그런 우리의 무섬증은 괜한 현학이 아닐까.
오늘도 봉은사 대웅전 뒤 몇 개의 계단을 오르면 주목숲 속 단
정히 앉은 북극보전北極寶殿, 저녁 예불을 드리고 백팔 참회로 찬
숨을 돌리며 나를 찬찬히 꺼내 보는 곳, 추녀 끝에 매달린 풍경소
리를 즐겨 듣는 곳, 더러 치밀어 오르는 홧덩이를 슬그머니 꺼내놓
고 오는 곳, 오늘 이 곳에서 다른 날은 몰랐던 풍경 속에 매달린
물고기, 산 속에 있다는 생각도 버리고 공중에 매달려 있다는 생각
도 없이 그저 무심히 흔들릴 뿐 그 맑은 소리를 들으면 더더욱 날
수 없는 물고기 몸이라는 생각마저 없이 무심히 매달려 있다 유정
有情한 삶 속에 말 한마디 눈짓 하나에도 태산이 하나 왔다갔다하
는 내 가슴속을 생각했다 나를 버리지 못하는 그 나를 한동안 세워
놓고.
-안정환 '北極寶殿'
안정환은 절과 절 중에서도 북극보전이라는 특정한 장소를 제시함으로써 기대감을 갖게 한 다음 절의 풍경에 매달려 있는 물고기를 오브제로 불러들임으로써 시의 효과를 높였다. 시에 소도구로 사용하는
오브제란 이렇듯 간단한 것이면서도 의미를 확대할 수 있는 것이 좋다. 시란 사실 시인의 관념이 아닌가. 그러나 그 원관념을 그대로 제시한다면 푸념으로 그칠 공산이 크다. 안정환은 불교적인 오브제를 갖
다 씀으로써 자연스럽게 삶에 대한 그의 견해에 힘을 불어넣는다.
물이 되어 떠나자면
노래도 할 줄 알아야지
춤도 출 줄 알아야지
강이 되어 흐르자면
모래성 허물 줄도 알아야지
어지간한 자갈쯤 둥글릴 줄 알아야지
기슭에 잔뜩 자라 있는 잔가지 덩굴 밑둥 베어내고
하늘에서 땅으로
땅에서 하늘로 길을 내며
바다에 닿아
칼을 버리는 빗줄기들
바다가 되어 지축을 떠받치자면
기암절벽, 무수한 섬을 품을 줄 알아야지
발이 푹푹 빠지는 땅끝 뻘밭에
철썩, 끊임없이 끓는 혀를 올릴 줄 알아야지
다가가 건드려 보면
한때의 모래성
하나의 섬으로 벗어 놓고
단단해져만 가는 긴 잠의 껍질 속을
빠져나가는 물방울 몇 개 보인다
-곽정례 '새우'
곽정례는 퍼스나를 숨겨놓은 채 새우를 오브제로 설정함으로써 새우와 관련된 분위기를 마음대로 갖다 쓸 수 있는 자유와 새우를 통해 하고 싶은 말, 새우에게 하려는 말이라는 이중적인 구조를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따라서 세밀하게 보면 자칫 차질이 일어날 것같은 과장된 상상력이 오히려 작품을 흥겹게 읽을 수 있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먼 바다 파도 싱싱한 날
파도는 절지도 않아
간이 잘 밴 물고기들은 살이 단단해 물에 풀리지 않아
죽어도 썩지 않아
섬들의 뿌리는 소금기둥일까
어느 날 흩어져 섬들이 둥둥 떠다니지 않을까
물좋은 배추 한 접 칼집 꽂아
바다 한자락에 담그면
밤새 출렁이머 골고루 절여 짐.
바다가 들어박힌 배추김치는 어떤 맛일까
뭍으로 처음 올라온 생명체는 제 몸이 마르자
두 눈을 뜰 수 있었다.
짭짤한 눈물. 눈물주머니는 바다로 향한
마지막 그리움
-고옥주 '즐거운 상상'
고옥주의 시는 단아하면서도 그 깊이에 치열한 시정신을 갈무리하고 있다. 예컨대 '파도는 절지도 않아/간이 잘 밴 물고기들은 살이 단단해/물에 풀리지 않아'와 같은 시귀에서 보여주듯 사물의 정수를 한
눈에 꿰뚫어 보는 직관과 그것을 동시에 담담하게 연출해내는 능력이야말로 비범한 것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