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에는 어젯밤 이야기를 이런 말로 시작했던 것 같다.
“고대 목사님이 나를 소개하면서 말하기를, 오랫동안 기다린 끝에 이현주 목사를 모시고 신앙강좌를 갖게 되었다고 하셨는데, 여러분이 이 자리에서 진정으로 모셔야 할 분은 이현주 목사가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그분 한 분뿐이십니다. 이 점을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주인이시오. 목적이십니다….”
사회자의 말을 꼬투리잡는 것 같아 미안했지만, 사실은 그렇게 별 생각 없이 주고받는 ‘말’ 속에 무서운 함정이 도사려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점을 늘 경계해야 한다. 깨어 있는 자만이 그런 함정을 피할 수 있다.
이현주는 어디서고 누구한테서고 ‘모심’을 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다. 이 말은 절대 겸사(謙辭)가 아니다. 사실이 그러하다.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1967년 8월 어느 날, 해가 질 무렵이었다. 그때 나는 부산에 있는 육군 제3후송병원 11병동(전염병동) 서쪽 문밖 잔디밭에 앉아 무슨 책인지 읽고 있었다.
의사들이 병명을 밝히지 못한 이상한 증세로 입원하여 한 달 가까이 혼수상태에 이어서, 한 달 가까운 벙어리상태를 겨우 벗어나, 전역(轉役)할 날을 기다리면 9개월 남짓한 병원생활을 마감할 준비로 지루한 세월을 보내던 나는, 제대한 뒤 전개될 내 인생에서 대한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중략.
그날 책을 읽으면서도 내 마음은 장래에 대한 불안과 염려의 검은 안개속을 헤매고 있었다.
그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읽고 있던 책갈피 여백이 잘 익은 홍시 색으로 바알갛게 물드는 것이었다. 책장을 넘겨보니 모든 갈피의 여백마다 붉게 물들여져 있었다.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는 순간, 내 입에서는 감탄사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누가 물감이라도 들인 듯 온 세상이 붉은 노을에 흠뻑 젖어 있었던 것이다. 내 평생 처음 겪어보는 굉장한 노을이었다. 하늘에서 아래로 드리우는 그 노을 빛을 피하여 숨을 곳은 어디에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문득 내 가슴 아주 깊은 데서 들려오는 가느다란 음성을 듣게 되었다.
“이현주, 네가 네 것이냐? 네가 왜 걱정하느냐?”
순간, 무거운 짐이 어깨에서 부려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억지로 이름을 붙인다면 ‘황홀한 해방감’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등과 팔뚝과 가슴과 배와 발등까지 눈길 닿는 내 온몸이 붉은 노을에 젖어 있었다. 문득 노을강(江)에서 세례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 따위가 노을과 함께 사라져버린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얼마 뒤 다시 자신에 대하여 걱정하고 근심하기 시작했지만, 노을 경험 이전 상태와는 많이 달랐다.
“이현주, 네가 네 것이냐?”
이 한마디는 어려운 고비를 만날 때마다, 자신의 초라한 무능을 실감하고 낙심할 적마다, 나를 위로하고 건져준 복음 바로 그것이었다. (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네 56-58쪽)
관옥선생님의 노을강 세례이야기는 몇 번을 직접 들었던 이야기였지만 책을 통한 감동은 또다른 느낌이었네요. 내가 그곳에서 지켜보는 한 사람이 된 것 같았어요.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스승에 대한 믿음.
‘네가 네 것이냐?’
자신을 스승에 온전히 내어 맡기는 삶.
선생님을 뵐 때마다 그런 모습을 확인하게 되고 스승을 만나는 일에 대한 질문이 생겨납니다.
선생님 ‘한발짝’ 이란 노래를 좋아합니다.
한발짝씩 걸었더라
쌓인눈위에 도장찍힌 내 발자국
되밝으면 산을 내려 오다보니까
한발짝씩만 걸었더라
한발또한발 그렇게 내몸 옮겨졌더라 한걸을씩
한발또한발 그렇게 옮겨졌더라 한발또한발
인생도 결국 한박짝 이라는 생각
번쩍 들더라.
호흡이 네를 네 몸속으로 데려가게 하라
내면의 몸에 닿는 것이 어려울 때면 본인의 호흡에 우선 집중토록 하라. 효과적인 호흡-명상법이 차츰 네 몸에 가서 닿도록 너를 도와줄 것이다.
숨이 들어오고 나갈 때 네 몸의 움직임에 마음을 모아라.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 아랫배가 부풀었다가 꺼지는 것을 섬세하게 느껴라.
이미지가 쉽게 떠오르는 기질이면, 눈을 감고서, 환한 빛에 감싸여있는 또는 빛나는 물질에 잠겨있는 네 모습을 그려보라. 그 빛 속에서 숨을 쉬어라. 빛나는 물질이 네 몸을 가득 채우고 그래서 네 몸을 빛나게 하고 있음을 느껴라.
몸의 느낌에 더욱 더 의식을 집중하라. 이제 너는 네 몸속으로 들어가 있다. 바야흐로 지금의 힘에 사로잡힌 것이다.
몇 년전 이석증으로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 내 체력으로는 활동량에 한계가 온 것이지요. 운동을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서는 항상 영양제를 잘 챙겨줬는데.... 이제는 저도 고박꼬박 챙겨 먹고 있답니다. 그러다가 좀 소홀해지는 날이면 입술에 헤르페스균이 올라오고를 반복하더라구요.
나이 50이 되니 몸이 이곳저곳을 살피라는 신호가 오나 봅니다. 어디 몸 뿐이겠습니까? 정신도 오락가락 흩어질 때가 있습니다. 외출할 때 휴대폰을 두고 나가고, 아이들 이름이 바로 불려지지 않고, 수영장에 갔는데 수영복을 가져 오지 않아 그냥 온 적도 많답니다.
몸도 정신도 뒤죽박죽 되어가는 것이 참 슬픕니다.
그러던 어느날 너무 피곤해서 10분 정도 명상하고 맑아지는 느김을 받고는 이 짧은 시간으로도 정신이 차려지는구나를 알았습니다. 늘 피곤함을 잠으로 달래던 습관이 이제는 잠시 앉아 있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운전하다가, 요리하다가, 움직이는 동안에는 호흡에 집중합니다. 의도적으로 배를 부풀렸다 꺼지기를 반복합니다. 이렇게 지금을 사는 연습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중독中毒에서 밝아진 인간관계로
네가 독신으로 살든지 파트너와 함께 살든지 아무튼 간에 열쇠는 이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현존하라. 지금에 깊이 집중함으로써 너의 현존을 지켜라
네 삶에 사랑이 꽃으로 피어나게 하려면 더 이상 생각하는 자 또는 고통-체에 사로잡혀서 그것들이 너인 줄로 착각하지 않을 만큼 강렬한 현존의 빛이 필요하다.
생각하는 자 밑에 있는 존재, 시끄러운 마음들 밑에있는 고요, 아픔 밑에 있는 사랑과 기쁨이 너 자신임을 아는, 이것이 곧 자유고 구원이고 깨달음이다.
먼저, 너 자신에 대한 판단을 멈추어라. 그런 다음, 네 파트너에 대한 판단도 멈추어라. 인간관계를 가장 잘 맺어주는 열쇠는 상대방을 이렇게 저렇게 판단하거나 다른 사람으로 바꾸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것이다.
그것이 너를 곧장 에고 너머로 데려간다. 그때 온갖 마음의 장난들과 중독성 집착이 끝장난다. 더 이상 피해자도 가해자도 없고, 누르는 자도 눌리는 자도 없다.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고요 속에서, 네 몸의 꼴을 살아있게 해 주는 너 자신의 모양-없고 시간-없는 실재를 느낄 수 있다. 그때 너는 다른 모든 사람과 다른 모든 피조물 안에 깊이 있는 동일한 생명을 느낀다. 꼴과 동떨어짐의 착각 너머를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옹근 ‘하나’(oneness)에 대한 깨달음(실현,realization)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네가 평화롭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그 사실을 받아들일 대 바로 그 ‘앎’이 평화롭지 않은 네 상황을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품으로 감싸주는 ‘고요한 공간’을 마련해주고 그 안에서 너의 불안함을 평안함으로 바꿔놓는다.
너의 내적 변화에 관련하여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너는 너 자신을 바꿔 놓을 수 없고 네 파트너나 다른 누구도 바꿔 놓을 수 없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은총과 사랑이 그 속으로 들어와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도록 빈 공간을 마련해드리는 것이 전부다.
순간마다 그 순간을, 특히 너 자신의 내면상태를, 알아차려라. 네 속에 분노가 있으면 분노가 있는 걸 알아차려라. 질투가 있으면, 방어심리나 말다툼하려는 충동이나 제가 옳다는 것을 중면하려는 욕구가 있으면, 저한테 눈길을 주고 저를 사랑해달라고 칭얼거리는 아이가 있으면, 그게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거기에 있는 것을 알고 그 ‘앎’을 붙잡아라.
누구도 원망하지 않으면서 네가 느낀 대로 표현하는 법을 배워라. 너를 방어하지 않는 열린 마음으로 파트너의 말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워라.
맘 놓고 자기를 표현할 여지를 파트너한테 마련해주어라. 비난, 자기방어, 공격따위, 에고를 강화하거나 방어하는 또는 에고의 요구를 들어주려는 온갖 패턴들이 쓸모없어질 것이다. 남들에게, 그리고 너 자신에게, 빈 공간을 마련해주는 것이 치명적으로 중요하다. 그것 없이는 사랑이 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너에게 진정 필요한 일은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전부다. 그때 너는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편안하고 너 자신과도 편안하다.( 지금살기연습 80-90쪽)
괜찮아~. 괜찮아~. 선생님의 목소리를 떠올리면 따뜻하게 보듬어지는 느낌이들어요.
그런데 정작 저는 못마땅한것 투성이로 씨름하면서 사는 나를보며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괜찮다"는것이 무엇인지 알고싶은 발심을 가지게되었어요.
지금 이순간 호흡하며 이대로 괜찮음을 확인하고 확인하면서 힘이 생겼지요.
이런저런 꼴의 내가 내가 아님을 알고 내가 괜찮으니 모두가 괜찮구요.
개별의 존재감으로 반응되던 존재들이 옅어지고존재로서의 존재감으로 하나됨을 느끼고 사랑과 연민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판단, 분별, 생각, 느낌으로 나를 어쩌지못해서, 괴롭고 못마땅해서 미칠것 같이 힘들던 제게 어떤 가르침보다 괜찮아~.그 말씀 한마디로 통~했습니다. 마치 어린아기에게 부드럽게 씹어서 먹여주시듯 양육해주시는 선생님께, 살아있는 예수의 말씀을 듣게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