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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일한국화화실 인물화 호남 의병장 치재 김영엽 의사 상01
1869년 전남 장흥군 관산읍 평촌리에서 태어난 김영엽 의사(金泳燁 義士)의 자(字)는 여회(汝晦)이고,호는 치재(痴齋)이다. 선조는 광산김씨(光山金氏) 사람으로 일찍이 관산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문벌있는 가문이었다. 특히 문학과 행실이 유명하였기에, 김 의사도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주변에 이름난 선비들은 죄다 찾아다니며 교육하고 담론하였다.
품성이 강직하고, 이목구비는 맑고 뚜렷하였으며, 천성이 용맹스러워 김 의사를 지켜본 마을 어른들은 한결같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을 정도였다."너의 기상은 자로(子路)와 비슷하니 반드시 나라의 큰 인물이 될 것이다." 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거나 등을 두드려 격려하는 등 모두들 잘난 제 아이 보는 듯 기뻐했다.
자로가 누구인가. 자로는 중국 춘추시대의 사람으로 공자의 제자 중에서도 공자를 가장 잘 섬겼던 사람이다. 효성이 지극했으며, 성질이 용맹하여 정치 방면에 뛰어났다고 한다. 이렇게 훌륭한 인물과 김의사가 닮았다고 하였으니 어린 나이지만 김 의사의 행실과 재질이 어떠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소석 김노현 선생에게 배울때도 선생은 늘 김 의사를 가까이 두고는,
"너의 뜻은 깊고 커서 범상하니 먼 훗날 네가 상취할 바를 헤아리기가 어렵구나."
라고 말하고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집안이 기울어 형편은 어려워졌고, 부모가 연로해서 학문을 다 이루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만 둘 김 의사가 아니었다. 김 의사는 스스로 분발하여 독서하였으며, 경전을 읽어 충효의 뜻을 더욱 깊이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도 정하였다.
친구들은 만나서는 시국에 대해 토론도 하고 나라의 장래를 염려하니 그 기상을 따를 사람이 없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통째로 삼키려 하는 데도 위정자들은 자기들의 욕심만 채우고 있어 민심은 오갈 곳이 없으니 도대체 이 나라가 어찌 될 것인지, 허참."
이렇게 한탄하는 김 의사의 모습은 어찌 보면 장군처럼 굳센 위엄이 서려 있기도 했다. 그런 모습으로 비관하는 친구들은 앞서서 격려했다.
"불에 타는 것은 구하고, 물에 빠진것은 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앉아서 한숨만 쉴게 아니라
힘을 길러야 하고, 만일의 사태를 준비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나라가 우리를 필요로 하면 언제든지 나가서 싸워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죠."
뿐만 아니라 김의사는 정당하지 않은 것은 참아 넘기지를 않았다.
한번은 사악한 어떤 교도가 바른 도덕을 경멸하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한 김의사가 그를 때렸다. 그런데 그가 뒤에 병으로 죽자, 혐의가 김 의사에게 씌워져 김의사가 기우만 선생 댁으로 피신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김의사를 발고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김 의사의 나이 36세 떄인 1905녀느 우리나라에 커다란 변고가 생겼으니 이완용을 앞세운 을사 오적이 이 나라를 일본에 팔아넘긴 국치가 발생한 것이다, 이제 일본은 우리의 외교 업무를 일체를 자기들 마음대로 처리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을미사변 때 우리의 국모가 일본인의 손에 무참히 살해되었다는 소식으로 온 나라가 들끓자 여기 저기서 의병들이 일어섰는데, 일제의 간악한 본성이 드러난 지금 세상이 그대로 있을리가 없었다. 분함을 참지 못한 의로운 사람들이 목숨을 버리거나 매국노 처단을 외치며 일어섰다. 그리고 강직한 선비들은 곳곳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제와 조정에 대항하였다.
김 의사도 통탄하여 의거할 뜻을 세우던 중 1906년 5월에 마침 거병한 의병장 정석면을 찾아가 함께 깊을 뜻을 나누었다
그래서 1909년 3월에는 여러 진과 합세하여 나주,남평,광주,화순 등
김영엽(1869.11.27.∼1910.2.13), 자는 여회(汝晦), 호는 치재(痴齋)로 김의현의
아들로 배는 수원백씨이다. 의적비가 장흥 예양산공원에서 세워져 있다. 독립유공자
공훈록40) 유공자정보 관리번호 3467, 성명 김영엽(金泳燁), 이명 金如晦 본적 全
南 長興 冠山 松村, 포상정보 :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80년, 훈격 애족장
- 공적개요 : 1906년 정석면(鄭錫冕)과 창의(倡義)를 모의(謀議)하고 1908 심남일
(沈南一) 의병진(義兵陣)에서 활동한 바 있으며, 1910 백양사에서 (우해)遇害된 사
실이 확인됨. - 공훈록 :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전남 장흥(長興) 사람이
다. 관산(冠山)에서 대대로 내려온 양반의 집으로 문학과 행실로 유명했다. 일찍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선비를 찾아다니다가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과 깊게 교제하였
다. 한 번은 '사교도(邪敎徒)가 바른 도덕(儒學)을 능멸히 여기는 것'을 보고 수판(手
板)으로 때렸는데 후에 그 사람이 병으로 죽었다. 이 일로 혐의를 받게 되어 송사에
게로 피신하여 몇 해를 산 일도 있었다.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통분함을 이기지 못
하고 1906년 의제 정석면(義齋 鄭錫冕)과 함께 의거하였으며, 각 의진을 출입하면
서 계책을 일러주고 협조하였다. 이 때 신창영(申昌榮 혹은 申昌學)이 복흥(福興) 산
중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군율이 엄정하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달려갔다. 신창영은
김영엽의 능력을 인정하고 군사 반을 선뜻 떼어 주어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1906년 성재 기삼연(省齋 奇參衍)이 적에게 체포되고, 다시 그의 의진이
김공삼(金公三)·박도경(朴道京)에 의해 수습되어 다른 의진과의 연합 전선을 도모한
다는 소식을 접하고 군사를 이끌고 가서 합진하여 적과 대전하였다. 그 후 전해산
(全海山)의 의진과 합진하여 대치(大峙)에서 적과 격전을 전개하였다. 대치 전투는
제 의진들과 연합하여 치른 것으로서, 이 전투에는 전해산·김영엽 의진뿐 아니라 홍
재도(洪在道)·신창학·심남일(沈南一)의 의진도 참가하였다. 그 후 자은촌(自隱村)에서
적과 교전하고 전해산 의진과 분진(分陣)하였다.
관송은 언어의 세계를 그리다가 잠깐 졸았는가. 관송의 대숲에는 검은 바람이 물결치듯 일렁이고 있다. 거친 비백이 거기에 있다. 한낮의 혼곤한 꿈들이 먹물로 거무스름하게 지워진 세계. 검게 나타난 대죽의 기세는 흰 여백을 하늘로 무작정 밀어내고 있다. 서슬 퍼런 청색이다. 어젯밤에 손자병법을 완독한 남자의 눈빛이 처연하다. 뼈대만 드러내는 필선은 검은 질감으로 공간의 영역을 확장하면서 계절이 쉭쉭 지나가는 소리를 담고 있다.
관송의 그림에서 적송과 청죽이 벽공을 뚫었고 속진은 사라졌다. 붓을 든 남자는 청죽나무 숲을 바라보고 있고 댓잎에는 낮달이 살짝 걸려있다. 육각정자는 연못의 백색 수련을 향해 두 다리를 내렸고 청죽나무에서 휘파람처럼 불어오는 바람이 그의 깨끗한 귀밑머리를 스쳤고 그는 어젯밤을 꼬박 새웠다. 새벽의 이슬방울은 간밤의 눈물방울처럼 수련 잎에 머물러있다.
햇빛이 서성이는 안방으로 남자는 걸어 들어간다. 네모진 서안. 서가의 책들. 창문으로 달아나는 햇빛 같은 여인. 격정이 없으면 붓을 들 수 없다. 청죽나무 숲을 돌아 나오는 바람에는 청색이 잔뜩 묻어있다. 한 여인을 깊이 사랑하지 못하는 남자는 임금을 사랑할 수 없다. 남자의 사랑이 온전하지 못하면 남자의 충정도 온전할 리가 없다.
소설가 류서재
산수화 사계 계절표현
봄 ;봄산은 웃는 듯이 아름답고 화사하다.
여름: 여름산은방을져 떨어질 듯 비취색으로 우겨져 있다.
가을: 가을산은 화장한듯 밝고 맑다.
겨울: 겨울산은 잠자는 듯 쓸쓸하고 담박하다.
East Wind. Korean Traditional. Paintings Academy.
한국의 한국화는 그 고졸한 멋에서 가히 한민족의 심성과 정신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창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도 잊고 있는 한국과 우리 문화의 본질을 외국인에게 소개한다는 것은 따라서 스스로의 자존을 위한 것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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