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쓸모
삶이란 문제에
역사보다 완벽한 해설서는 없다
요즘 영화나 드라마에는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이 심심치 않게 등장합니다. 과거로도 갈 수 있고, 미래의 일도 알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 현명한 사람으로 그려지죠. 어떤 주인공은 몇 번이고 과거로 돌아가서 자신이 저질렀던 실수를 만회하기도 합니다. 극적인 설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모르고 한 선택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점이 무척 부럽더군요. 제게도 저런 능력이 있다면, 한발 양보해서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라도 알 수 있다면 삶이 조금은 덜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덧 검은 머리보다 흰 머리가 더 많은 나이가 되었지만 저 역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여전히 고민합니다. 하나의 생각이 사회전체를 지배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다양한 생각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맞았던 것이 지금은 틀리고, 내게 옳은 것이 누군가에게는 틀린 것이 될 수도 있죠. 그래서 가끔은 무엇을 긍정하고, 무엇을 부정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더군요. 삶의 방향을 정하고 저만의 가치관을 찾는 일에 더욱 매달리는 것은 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이 삶을 바로잡고 싶을 때마다 시간을 되돌렸다면, 그런 특별한 능력이 없는 저는 역사 속으로 시간여행을 떠났습니다. 놀랍게도 100년 전, 1000년 전에 살았던 사람도 저와 같은 고민을 하고 비슷함 위기를 겪고, 또 극복해내더군요. 역사는 제게 가야할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이 되어주고, 지친 마음을 위로하는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길을 걸었는지, 또 그들의 선택이 역사에 어떤 의미로 남아있는지를 생각해보면 비로소 제가 어떤 결정을 할 수 있었습니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만난 수많은 인물의 이야기가 제 인생에 더할 나위 없는 재산이 된 셈이죠. 길을 잃고 방황할 때마다 제가 역사에 몸을 기댔던 이유입니다.
어떤 사람은 역사가 단순히 사실의 기록이라고 말하지만, 저는 오히려 그것은 착각이고 역사는 사람을 만나는 인문학이라고 강조합니다. 역사는 나보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예요. 역사를 공부했음에도 살아가는데 어떠한 영감도 받지 못했다면 역사를 제대로 공부했다고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제가 모든 수업의 1강을 ‘역사는 왜 배우는가?’에 할애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시험을 앞두고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는 역사적 사실을 빨리, 많이 외우는 일이 가장 중요하죠. 그런데 문제는 시험이 끝나면 열심히 암기했던 사실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 역사 공부의 허망함을 토로하는 친구들이 있어요. 그러면 저는 다 잊어도 괜찮다고, 다만 역사를 배우면서 느꼈던 감정만 잊지 않으면 된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를 일본에 남긴 을사오적을 공부할 때 다들 엄청나게 분개해요. 그러면 저는 그 기분을 절대 잊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그 기분을 기억해두었다가 사회에 나가서 선택을 하거나 책임을 져야할 때 떠올리라고 말하죠. 역사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일깨워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장의 상황을 모면하려다가 삶을 망가뜨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역사를 공부하며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어요. ‘선생님 강의 듣고 시험에 합격했습니다!’라는 후기만큼이나 ‘선생님 강의를 듣기 전후의 삶의 모습이 달라졌어요.’ 라는 글이 반가운 까닭입니다.
굳이 시간을 되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무수히 많은 선택과 그 결과를 확인할 수 있어요. 세상에 이보다 더 쓸모 있는 학문이 있을까요? 제가 이 책에 ‘역사의 쓸모’라는 제목을 붙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역사의 실용적인 측면만 너무 강조하는 것 같아 조금은 조심스럽기도 합니다만, 역사 연구를 업으로 삼지 않은 일반인에게 역사를 학문적인 관점으로 대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역사의 ‘쓸모’보다 역사의 ‘실체’를 강조하는 접근은 역사로부터 대중을 멀어지게 할 뿐입니다. 흘러간 가요의 제목처럼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는 거죠.
역사를 연구하는 일은 역사학자에게 맡기고, 저는 학자들이 잠을 줄여가며 연구한 소중한 역사속의 ‘사람’에게 집중하려 합니다. 대중강연에서 인물 이야기를 주로 하는 것도 저에게 감동을 선사해준 그들의 삶을 더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하는 마음에서입니다. 이 책에서도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고 삶의 방향을 바로잡게 하는 인물을 여럿 다루었어요. 그들과 만나면서 제미와 감동이 있는 그들의 삶을 내 삶에 어떻게 적용할까 고민해보는 시간을 갖기를 권합니다. 역사 속 인물들에게 ‘왜’ 라고 묻고, 가슴으로 대화해보세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 여러분도 고민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 속 인물과 대화한다는 것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어요. 그래서 제가 존경하는 두 인물을 소개하려 합니다. 이육사 선생과 이순신 장군입니다.
이육사는 시인이지만, 일제강점기에 무려 17번이나 감옥에 갇힌 열혈독립운동가 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수인번호가 264를 필명으로 삼았죠.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의 단원으로 조국 해방을 위해 자신의 청춘을 온전히 바친 분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그렇게까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17번이라니요! 건강한 분도 아니었다는 이육사가 어떻게 그런 가혹한 시간을 버텨냈는지 의아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육사 선생은「꽃」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이순신 장군은 따로 설명할 필요 없을 정도로 온 국민이 좋아하는 인물입니다. 몇 년 전 영화로도 다루어졌던 명량대첩을 이끈 주인공이기도 하고요. 백의종군 이후로 조선 수군을 재건하려고 동분서주하던 이순신은 당시 임금이었던 선조의 명을 받았습니다. 수군을 해산할 테니 육군에 합류하라는 내용이었죠. 이순신이 파직당한 사이에 조선 해군이 일본에 참패하면서 배가 달랑 12척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이순신이 선조에게 올린 장계에 바로 그 유명한 말이 나옵니다.
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죽을힘을 다해 싸운다면 오히려 해 볼만 합니다.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사용한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오히려’입니다. 이육사는 일제강점기라는 극한의 환경에서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어나지 않느냐고 되물었습니다. 이순신은 누구나 싸움을 포기할 상황에서 ‘오히려’ 해볼 만하다며 의지를 다졌습니다. 얼마나 감동적인가요? 제 인생에 ‘오히려’라는 말이 이토록 울림 있게 다가온 적은 없었습니다. 이육사와 이순신을 만나면서 이 말이 제 삶을 지탱해줄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이 말은 제게 마법의 주문과도 같습니다. 위기의 상황에서도 ‘오히려’라는 무한 긍정의 낱말을 떠올리며 힘을 얻곤 하거든요.
역사는 삶의 해설서와 같습니다. 문제집을 풀다가 도저히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으면 우리는 해설을 찾아봅니다. 해설서를 보면 문제를 붙잡고 끙끙댈 때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해결의 실마리를 순식간에 발견할 수 있지요.
인생을 사는 동안 우리는 늘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알 수 없기에 그때마다 막막하고 불안하지요. 하지만 우리보다 앞서 살아간 역사 속 인물들은 이미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의 선택을 들여다보면 어떤 길이 나의 삶을 더욱 의미 있게 할 것인지 예측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가야할 길을 보여주는 역사.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그리고 ‘우리’라는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알려주는 역사. 그래서 궁극적으로 한번뿐인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끊임없이 자문하게 하는 역사. 과거를 통해 미래를 본다는 말은 결코 거짓이나 과장이 아닙니다.
이 책을 펼친 독자 여러분도 역사의 쓸모를 발견하고 역사의 도움을 받으며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1장]
숨겨진 보물을 찾아
떠나는 탐험
§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떤 지식을 습득한 경험을 기억하시나요? 걷는 법이나 말하는 법처럼 몸으로 배우는 일 말고 머리를 써야 하는 일 말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아마 대다수가 학교에서 수업을 받은 일을 떠올릴 겁니다. 그러면 자연스레 시험이 떠오르죠. 아무래도 우리는 시험을 잘 보려고 공부했지. 정말 재미있어서 공부한 경험은 별로 없을 것 같아요.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생활에 퍽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데 시험은 봐야하고 공부할 분량도 외워야할 것도 많으니 미움을 받기 십상입니다. 수학공식을 외우듯 ‘태정태세문단세’, ‘임오군란 1882년’ 하면서 달달 외우다보니 지겹기만 하고요.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선생님, 왜 이런 것까지 배워야 하는 거예요?” 수백 수천 년 전 일을 알아서 뭐 하냐는 겁니다. 한마디로 쓸데없다는 것이지요. 시험만 끝나면 별로 쓸모가 없을 것 같아요. 공부하기 힘들어서 한 말이겠지만, 아마 학생들만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닐 것입니다.
요즘처럼 경쟁과 효율을 강조하는 시대에 ‘쓸데없다’는 말은 치명적인 단점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식이든 물건이든 쓸모가 많아야 환영받거든요. 쓸모 있는 것을 남보다 얼마나 더 많이 가졌는가? 로 성공을 가늠하는 세상입니다. 돈 버는데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은 죄다 쓸데없는 것이 되어버려요. 그런 데에 관심을 가지면 “쓸데없는 짓 하지 마!” 하고 핀잔을 듣기 일쑤죠.
그런데 우리 역사 속에 이 ‘쓸데없다’는 것만 찾아 모은 분이 계셔요. 바로『삼국유사』를 쓴 일연 스님입니다. ‘유(遺)’라는 한자에는 ‘버리다. 유기하다’라는 뜻이 있어요. ‘유사(遺事)’라는 건 말 그대로 ‘버려진 것들을 모은 역사’입니다. 버려졌다는 말은 곧 이미 무언가를 취했다는 뜻이겠지요. 그렇다면 선택 된 것은 무엇이냐? 바로『삼국사기』입니다.
『삼국사기』는 고려시대 유학자 김부식이 인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 삼국시대 역사서입니다. 어느 연도에 무슨 일이 일어났고 어떤 인물이 있었는지를 쭉 정리한 책이지요. 나라가 주도하여 편찬한 정사(正史)이기 때문에 신비하고 기이한 일을 전하는 야사(野史)는 취급하지 않습니다. 사실 확인, 즉 팩트 체크가 된 사건만 담은 겁니다. 심지어 단군 이야기도 언급하지 않아요. 김부식은 유학자였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가 용납하지 않았던 거예요. ‘곰이 사람으로 변해서 결혼을 하고 단군을 낳았다고? 말도 안 돼!’ 그러고선 그냥 지워버렸을 테지요.
그렇게 버려진 이야기가『삼국유사』에 실렸습니다. 고려 후기에 살았던 일연 스님이 쓰레기통에 처박혀 꼬깃꼬깃해진, 한마디로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꺼내 하나하나 펴서 기록한 것입니다. 일연 스님은 이 책을 쓰기 위해 청년시절부터 사료를 모았다고 합니다. 단군신화를 비롯해서 전설, 민담 등 정식 역사로 인정받지 못한 이야기들을 모은 거예요. 그걸 다시 다듬고 정리해서 썼습니다. 그래서 참 재미있어요. 재미도 없는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전해질 이는 없으니까요.
단순히 비교하자면 정사로 인정받기 어려운 신화나 설화를 모았다는 점에서 서양의 ‘그리스·로마 신화’와 닮았어요. 그런데 그 관심의 정도는 꽤 큰 차이를 보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임에도 사람들은 그리스·로마 신화보다『삼국유사』의 이야기를 더 낯설어합니다. 그리스·로마 신화는 교양을 넘어 상식을 통할 정도인데 말이죠. 하는 일마다 성공하는 사람을 가리켜 ‘미다스의 손’이라고 하잖아요? 이 말도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나온 것으로, 어떤 물건이든 손만 대면 황금으로 변하게 만드는 미다스 왕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한데 이 미다스 왕이 비단 황금 손으로만 유명한 게 아니에요. 아주 긴 귀로도 유명했습니다. 당나귀 귀라고 하지요? 미다스 왕은 당나귀 귀를 왕관 속에 감추고 지냈어요. 하지만 숨길 수 없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이발사였습니다. 머리를 자를 때는 왕관을 벗어야 했으니까요. 미다스 왕은 이발사에게 비밀을 지킬 것을 신신당부합니다. 이발사는 자기 목숨이 왔다 갔다 하니까 비밀을 이야기하고 다닐 수가 없고, 그렇다고 혼자만 끌어안고 있기에는 너무나도 답답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끙끙 앓습니다. 그러다 갈대숲으로 갑니다. 그곳에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다 외치지요.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 얼마나 속이 시원했을까요? 제가 다 후련합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갈대숲에 바람이 불 때마다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 소리가 바람결을 타고 퍼져, 그 소문이 미다스 왕이 사는 궁전에까지 흘러들어가고 맙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삼국유사』에 똑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만 당나귀 귀를 가진 사람이 신라의 경문왕이지요. 경문왕은 왕관이 아닌 두건으로 귀를 가립니다. 두건을 만드는 기술자가 그 비밀을 알게 되고, 그 역시 대나무 숲에 가서 소리를 칩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 소리가 새어나와 경문왕의 비밀이 경주 도성에 쫙 퍼진다는 결말까지, 정말 소름이 돋을 만큼 똑같습니다.
저는『삼국유사』에도 그리스 신화, 로마 신화처럼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정말 많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요. 우리가 시험을 위한 공부로『삼국유사』를 접했기 때문에 몰랐을 뿐이죠.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 스님의『삼국유사』를 비교하며 차이점을 표로 그리면서 외우느라 이야기 자체의 재미를 놓진 것이지요.
『삼국유사』가 그리스나 로마의 신하라면, 혹은 안데르센의 동화라면 어땠을까요. 교과서나 시험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만화책으로 혹은 애니메이션으로 접했다면 그 이야기와 등장인물을 좀 더 매력적이고 낭만적으로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덴마크의 한 공원에는 인어공주가 돌 위에 앉아서 처연한 표정으로 바다를 바라보는 동상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 안데르센 동화를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한 번쯤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거예요. 또 핀란드에는 ‘무민’이라는 국민 캐릭터가 있습니다. 무민은 동물이 아니라 북유럽 동화에 등장하는 괴물 트롤이에요 사실 우리나라 설화에도 인어공주에 비견할만한 해녀 ‘아리’가 있고, 한국판 트롤이라고 할 수 있는 도깨비가 있습니다. 다만 그에 대한 인식이 좀 다를 뿐이지요.
저는 일연 스님이 안데르센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생각해요. 그야말로 우리나라 최고의 이야기꾼이거는요. 그런데 일연 스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지나치게 고전적입니다. 어쩌면『삼국유사』의 콘텐츠가 충분히 활용되지 않는 탓이기도 합니다. 사극영화를 보면서 많은 사람이 우리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고,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의 이야기나 전통의복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듯이『삼국유사』에 실린 이야기도 다양한 형태로 접할 수 있다면 더 친근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이 부분은 우리의 숙제이기도 합니다.
§
요즘 역사콘텐츠를 가장 잘 활용하는 곳은 각 지역 지자체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지역을 대표할 정체성으로 무엇을 내세울 수 있을까?’ 많은 지자체가 이 부분을 고민합니다. 그래서 자꾸 역사를 캐요. 그 대표적인 사례가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를 주제로 관광시설을 만든 포항입니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연오랑과 세오녀는 신라시대 동해 바닷가에 살았던 부부입니다. 어는 날 연오랑이 바닷가에서 해초를 따다가 한 바위 위에 올라갔는데, 갑자기 그 바위가 움직이더니 바다를 건너 일본 땅까지 갑니다. 거기에서 그는 왕이 되었지요. 그 지역 사람들이 연오랑을 보고 특별한 사람이라면서 왕으로 앉힌 거예요. 그럴 만도한 게, 바위를 타고 바닷물을 가르면서 나타났으니까요. 거의 바다의 신 수준 아니겠어요?
그런데 세오녀의 입장에서는 남편이 사라진 거잖아요. 당연히 남편을 찾아 나서겠지요. 그러다가 커다란 바위 옆에 있는 남편의 신발을 발견합니다. 세오녀가 그 바위 위에 올라갔더니 그 바위가 또 움직여서 연오랑 있는 곳으로 또 갑니다. 그래서 세오녀도 그곳의 왕비가 되었어요.
그 후에 신라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난데없이 해와 달이 뜨지 않는 거예요. 그러자 점괘를 보는 관리가 이런 말을 합니다. “해와 달의 정기가 일본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바로, 연오랑과 세오녀가 일본으로 갔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왕이 두 사람을 다시 데려오기 위해 일본에 사신을 보냅니다. 하지만 돌아올 리가 없지요. 그곳에서는 왕이잖아요. 대신 그들은 “왕비가 짠 비단을 줄 테니 그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라. 그러면 해결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 제사를 지낸 곳이 현재 포항의 영일만입니다.
‘연오랑세오녀테마공원’에 가보면 관련 전시관도 있는데요.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를 애니메이션으로 보여주고, 설화의 역사적 배경에 관한 설명이라든지 관련 콘텐츠도 잘 전시되어 있습니다. 시설도 무척 좋고요 전시관 1층에 있는 영사관 이름은 ‘일월영상관’이에요. 여기에도 다 의미가 있습니다. 해와 달에 관한 설화를 일월신화라고 하는데 ‘연오랑과 세오녀’가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일월신화거든요.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 사람들은 여행을 갑니다. 그보다 더 여유가 생기면 어떨까요? 그냥 놀고 즐기는 여행이 아니라 테마가 있는 여행을 갑니다. 해당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일본 같은 경우 진즉 이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마츠리(祭리)’라는 지역 축제가 유명하고, 그중 일부는 세계적인 축제가 됐지요.
저도 나중에 기회가 되면 덕수궁 옆에서 대한제국 빵을 한번 팔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덕수궁에 왔는데, 그 옆에서 특별한 의미를 담은 먹거리를 팔고 있다면 하나쯤 가져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겠어요? 일본이 이런 것을 기가 막히게 잘하더군요. 우리나라 지역축제들은 아직 과도기 상태라 여러 가지 면에서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리를 잡을 것입니다. 이 흐름 자체를 거스를 수는 없으니까요.
덴마크의 미래학자 롤프 엔셍(Rolf Jensen)은 이제 전 세계가 정보화사회를 넘어 꿈과 이야기 등의 감성요소가 중요하게 부각되는 ‘드림 소사이어티(dream society)’로 나아갈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기술의 발달로 오늘날 대부분의 상품은 일정수준을 갖추어 각기 다른 상품이지만 기능적인 측면에서는 거의 차이가 없어요. 그렇다면 무엇으로 승부를 봐야할까요? 바로 고유의 스토리입니다.
이 이로노가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국민 대부분이 먹을 게 없고 굶주릴 때는 나라에서도 역사나 문화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습니다. 심지어 파괴되어도 개의치 않습니다. 우선은 개발이 중요하니까요. 그러다가 경제적으로 좀 나아지면 역사와 문화에 가치를 두게 되고, 그것을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깁니다. 국가적으로도 그래요. 문화재를 관리하고 박물관을 세우는 일을 합니다. 정체성을 확립하고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싶기 때문이지요. 당연히 이 작업에는 역사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일연 스님도 점점 더 주목을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역사의 실용성을 말할 때『삼국유사』를 빼놓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쓸데없다고 버려진 이야기들이 사실은 참 ‘쓸데 있음’을 증명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삼국유사』는 지금까지도 명맥을 유지하며 지역문화 개발은 물론 국가 외교에도 활용되고 있어요. 계속해서 발굴 되고, 쓰이고 있습니다.
김부식은 쓸데없는 요상한 이야기라고 빼버린 단군신화를 일연스님이『삼국유사』에 실은 덕분에 일제강점기에 단군을 모시는 대종교가 창시되어 신자들이 독립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원나라 간섭기에 민족의 뿌리가 흔들리지 않기를 바랐던 일연 스님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이야기가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형성한 것은 물론, 괴로운 시대를 버틸 수 있는 힘과 에너지를 준 것이지요. 김부식은 쓸모없다고 버렸지만, 사실은 가치가 있던 것이 아니라 가치를 못 알아봤던 것입니다.
우리는 참 재미없게 역사를 배웠습니다. ‘어떻게 역사를 공부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좋은 점수를 받을 것인가’에 집중했죠. 그래서 연도별로 일어난 사건을 외우고, 그 사건을 일으킨 사람을 외우고… 이런 식으로 공부를 해왔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 기억에 남는 것도 없고, 역사를 다시 공부하고 싶어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저는 역사를 알리는 사람으로서 일연 스님과 같은 역할을 하고 싶어요. 일연 스님은 휴지조각처럼 버려진 이야기들을 주워 잘 펴서 우리에게 남겨준 분이잖아요. 저도 사람들이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역사, 잘 모르고 관심도 없는 역사를 재미있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생명력을 불어넣고, 이 시대에 맞는 의미를 찾아내서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이지요. “짠! 이것 봐! 휴지조각인 줄 알았는데 보물지도지? 역사가 그런 거야!” 이렇게 보여주렵니다.
이 시대에 왜 역사를 배워야 할까? 그게 무슨 쓸모가 있을까? 첫 질문으로 돌아와 답을 합니다. 역사는 아득한 시간 동안 싸인 무수한 사건과 인물의 기록입니다. 그야말로 무궁무진한 콘텐츠라고 할 수 있지요. 그 안에 는 수많은 사람의 삶과 그 과정에서 형성된 문화의 흥망성쇠가 담겨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느 새로운 대상을 접하든, 어떤 일을 벌이든 역사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없는 것은 거의 없어요. 음식도, 옷도, 우리 삶의 구성하는 주변의 모든 것이 역사 속에서 함께 발전해온 것이니까요.
역사를 골치 아픈 암기과목이 아니라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면 역사의 품으로 첫발을 디딘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제 보물이 가득 쌓여있는 그 지도를 신나게 펼쳐보기만 하면 됩니다.
(구멍 문, 사진)
기록이 아닌
사람을 만나는 일
§
강연에 나가면 저는 먼저 청중에게 퀴즈를 냅니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웃으면서 함께 긴장을 풀어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죠. 제가 평소에 자주 내는 문제 중 하나를 여기서 소개할까 합니다.
요즘 고급스포츠라고 하면 아마 골프를 떠올릴 겁니다. 고려시대 귀족들이 즐겨하던 고급스포츠는 매사냥이었어요. 매를 날려 보내면 이 매가 토끼나 꿩 같은 작은 짐승들을 탁 잡아채오거든요. 저마다 자기 매를 가지고 모여서 내기를 하는 거죠. 귀족들에게 인기 만점인 스포츠였는데, 사냥용 매가 굉장히 비쌌어요. 야생에 있는 매를 그냥 날려 보낼 수는 없잖아요. 새끼일 때부터 훈련하며 길러야 합니다. 오랫동안 길을 들여야 하는 만큼 귀할 수밖에 없죠. 그래서 매 주인은 자신의 매에 ‘하얀 깃털’을 매달아뒀습니다. 자기 이름을 써서 달아둔 거예요. 한마디로 이름표였던 거죠. 이걸 떼면 도둑질입니다. 이 이름표를 뭐라고 불렀을까요? 이데 제가 자주 내는 퀴즈입니다.
(매사냥 사진)
아는 분도 있을 거예요. 정답은 ‘시치미’입니다. 매가 비싸니까 어떤 사람들은 시치미를 떼어내고 마치 그 매가 자기 것인 양했습니다. 시치미를 떼고도 모른 척했어요. 여기에서 시치미 떼지 말라는 말이 유래된 겁니다. 요즘도 많이 쓰는 말이죠.
이렇게 들으면 역사가 참 재미있어요. 옛날에도 사람 사는 모습은 비슷했구나 싶기도 하고요. 한국사에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현재 우리 일상에 역사의 흔적이 얼마나 많이 남아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역사는 연도나 사건, 사람 이름을 외워야 하는 학문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참 고통스럽죠. 재미없는 것은 당연하고요. 저는 접근법을 바꿔 과거 그 시대 사람들을 만나보기를 권합니다. 그 시대에 나랑 비슷한 나이의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어떤 절망이 있고 어떤 희망이 있었을까? 한번 생각해보는 거예요. 과거의 인물에게 감정이입을 해보는 거죠.
앞서 얘기했듯 사람 사는 세상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고려의 천재라 불리는『동국이상국집』의 이규보는 쉽게 말해 대입 사수생이었습니다. 너무 괴로운 나머지 자신의 이름까지 바꾸면서 도전하죠. 그때 만든 이름이 이규보입니다. 우리가 지금 취업이나 승진, 결혼, 자녀교육, 노후문제로 고민하듯이 그 시대 사람들에게도 고민이 있었습니다. 우리만큼 자신의,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실망하고 좌절했을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더 좋은 세상을 꿈꾸듯 그들에게도 변화를 갈망하는 마음이 있었을 거예요. 역사를 찬찬히 살펴보면요, 그 갈망의 힘으로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한 시대의 꿈이 이루어져서 다음 시대가 와요. 이걸 알게 되면 굉장히 설렙니다. 그렇다면 우리시대의 꿈은 뭘까?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언제 오게 될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역사학자 E.H. 카의 유명한 말처럼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미리 벽을 세워버려요. 역사 속 인물은 과거의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이름을 외우는 게 끝이죠. 하지만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면 과거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됩니다.
길을 걸어 다니다 카페 유리창 너머로 이야기 나누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더라고요. 시간이 없어서 카페에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습니다. 과거의 인물들과 대화하는 것도 카페에 앉아 누군가와 조곤조곤 이야기 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수다를 떨 듯 역사에 말을 걸어보면 어떨까요? 검은 글자에 불과했던 이야기가 생명력을 얻고 재미와 의미를 전해줄 것입니다.
인물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좀 낯설게 느껴질 테죠? 말하자면 1597년 원균의 칠천량해전 대패, 이순신의 명량해전 대승, 원균은 나쁜 놈, 이순신은 영웅, 이런 평면적인 시선으로 보지 말자는 것입니다. 당시 이순신의 능력이 너무 뛰어나서 일본은 이순신이 지키고 있는 바다에는 침투할 수가 없다는 판단을 내립니다. 그래서 이순신을 내쫓기 위해 조선 조정에 거짓 정보를 흘려요. 일본 선봉장 가토가 오고 있다는 정보였습니다. 조정에서는 이걸 고급정보라고 믿고 이순신에게 나가서 가토를 잡아오라고 명령합니다.
이순신은 싸워서 이기는 장수가 아니에요. 이겨놓고 싸우는 장수입니다. 빈틈없이 전략전술을 세워놓고 백퍼센트 확신이 들어야 움직이는 완벽주의자예요. 23전 23승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조정에서 하라는 싸움은 답이 안 나오는 거예요. 이순신은 조정에서 입수했다는 정보가 거짓임을 눈치 채고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맞고 틀리고를 떠나 이순신은 군인이에요. 조정의 입장에서 보면 이순신의 행동은 명령불복종이 되는 겁니다. 당연히 쫓겨나게 되지요.
이순신의 자리를 대신하는 사람이 원균입니다. 원균도 사실은 알고 있었어요. 이순신이 왜 그랬는지 말입니다. 일본의 정보가 거짓인 것도 알고 패배도 예감했어요. 심지어 처음에는 이순신처럼 좀 버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칠천량으로 갑니다. 군인이니까 명령을 받았으면 가야 한다고 생각했겠죠. 그리고 일본에 대패합니다. 그때까지 남아있던 조선 수군이 완전히 궤멸해요.
원균을 옹호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다만 역사 속 인물의 선택에도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뜻이죠. 우리는 역사를 공부할 때 눈앞에 보이는 글자만 읽고 말아요. 죽어있는 텍스트로만 접합니다. 그러지 말고 역사 속에 들어가서 인물들과 만나보면 좋겠어요. 그들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져보세요. 꿈이 뭐예요? 왜 그런 일을 했어요? 그 선택에 후회는 없나요? 꿈이 이뤄진 것 같나요? 이렇게 물어보고 답을 상상해보는 겁니다. 나라면 어땠을까 하고 내 삶에 대입시켜서 답해보는 거죠. 그러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얻지 못했던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지금은 역사를 공부하기에 참 좋은 세상입니다. 역사에 관한 재미있는 책과 만화, 드라마, 영화가 쏟아져 나오고 있어요. 특히 영상매체에서 역사 콘텐츠를 활발하게 활용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다큐멘터리가 대부분이었거든요. 요즘처럼 다양한 매체로 역사를 접할 수 있는 게 참 복인 것 같아요.
책을 많이 안 읽는다고 하지만 소설『칼의 노래』는 100만 부가 넘게 팔렸어요. 사람들은 그 소설을 통해 영웅 이순신이 아니라 인간 이순신을 만나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1700만 명의 관객을 모은 영화〈명량〉도 이순신 장군의 인간적 고뇌에 초점을 맞췄죠.
최근에는 영화를 해설해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습니다. 제 나름대로 열심히 해설을 하는데, 그런 콘텐츠를 많은 분이 좋아하시더라고요. 아무래도 역사적 배경을 알고 나면 콘텐츠를 더욱 풍요롭게 즐길 수 있기 때문이겠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잖아요.
역사 콘텐츠를 활용하는 범위도 굉장히 넓어졌습니다. 그냥 사극이 아니라 상상력이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배경은 조선시대인데 왕부터 시작해서 모든 인물이 허구인 경우도 있고요. 반대로 사실을 기반으로 하되 스토리의 재미를 위해 가상의 인물이나 사건을 끼워 넣은 경우도 있습니다. 팩션(faction-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작가가 상상력을 더하여 쓴 창작물)이라고 하죠.
일례로 2008년에 방영됐던 드라마〈바람의 화원〉은 이정명 작가의 소설을 각색한 것입니다. 이 드라마에는 조선시대 화가 김홍도와 신윤복이 등장하는데, 그 외의 사건은 모두 허구예요. 신윤복이 여성이라는 설정도 실제와는 다르죠. 그래서 논란도 많았습니다. 왜곡된 역사 인식을 심어준다는 이유에서 말이죠. 걱정 되는 부분이 없는 건 아닙니다. 미디어의 힘이라는 게 워낙 대단해서 특정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기도 하거든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장점도 큽니다. 그런 점이 궁금해서 진짜 역사는 어땠는지 찾아보고 관심을 갖게 되니까요. 공부라는 건 호기심이 있어야 시작할 수 있어요. 역사 드라마나 영화를 즐겨 보다가 역사에 빠진 분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이름 없는 의병들을 다룬 드라마〈미스터 션샤인〉도 있었죠.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은 참 많아요. 하지만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역사의 흐름에 몸을 던진 사람은 그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미스터 션샤인〉은 그 아무개들의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였어요. 이 드라마의 메인 포스터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습니다.
저물어가는 조선에 그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저 아무개다.
그 아무개들 모두의 이름이,
의병이다.
원컨대 조선이 훗날까지 살아남아 유구히 흐른다면,
역사에 그 이름 한 줄이면 된다.
위인 중심으로 돌아가는 역사에서 아무개들의 역사는 놓치기 쉬워요.〈미스터 션샤인〉에 등장하는 의병을 볼 때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요. ‘나도 저 시대에 태어났다면 저 위치에 있을 수도 있겠구나.’ 솔직히 광개토대왕, 이순신, 김구 같은 위인에게 나를 빗대기는 어렵더라고요. 그런데 그 주변 인물, 열심히 살아가지만 이름을 남기지 못한 사람들의 일생을 볼 때면 가슴이 더 찡합니다.〈미스터 션샤인〉을 보면서 감동이 물밀 듯 밀려온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이 시대의 아무개일 테니까요.
역사 관련 드라마나 영화를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건 좋은 현상이에요. 특히 역사가 지루하다는 분들은 대중매체를 적극 활용하면 좋을 것 같아요. 즐기다보면 자연스럽게 조금 더 알고 싶은 마음이 들 겁니다. 그때는 관심이 가는 인물의 평전을 읽어보기를 추천합니다. 평전에는 한 사람의 인생 전부가 담겨있기 때문에 좀 더 생각할 거리가 많아요. 평전이 너무 부담스러우면 인물의 생애에 주목한 다큐멘터리도 좋고요. 어떤 식으로든 생애를 쫓다보면 주인공의 인생에 나의 인생이 겹치면서 내 삶을 돌아보고 미래를 그려보게 되거든요.
제가 학교에서 교사로 일할 때 인터넷 강의도 하고, 방송에도 출연하니 여러 학원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한번은 한 학원에서 내민 계약서를 봤는데 정말 헉 소리가 나는 액수가 적혀 있었습니다. 일반 교사인 저는 상상조차 못할 금액이었죠. 좋은 교사로 마무리한다는 것이 제 인생의 계획이었지만, 흔들리게 되더군요.
‘학원으로 가는 게 나쁜 일도 아닌데 이 돈까지 받을 수 있다면 가야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과 ‘아직 내가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 돈 때문에 옮기는 건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충돌했습니다. 일주일간 정말 많이 고민했어요. 얼마나 갈등이 심했는지 원형탈모증까지 생기더군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저 역시 ‘사람’을 만났습니다.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의 일생을 다룬 다큐프로그램을 본 거죠. 그 영상 말미에 이런 문구가 나오더군요.
서른 살 청년 이회영이 물었다.
“한 번의 젊은 나이를 어찌할 것인가”
눈을 감는 순간 예순여섯 노인 이회영이 답했다.
예순여섯의 ‘일생’으로 답했다.
눈물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나보다 앞서 살았던 사람의 삶에서 좋은 영향과 자극을 받은 것이지요. 결국 저는 그 자리에서 계약서를 찢는 것으로 고민을 끝냈습니다.
역사는 무엇보다 사람을 만나는 공부입니다. 고대부터 근현대까지의 긴 시간 안에 엄청나게 많은 삶의 이야기가 녹아있어요. 그 이야기를 읽다보면 절로 가슴이 뜁니다. 가슴 뛰는 삶을 살았던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고민과 선택과 행동에 깊이 감정을 이입했기 때문이지요. 그런 사람들을 계속 만나다보면 좀 더 의미 있게 살기 위한 고민, 역사의 구경꾼으로 남지 않기 위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아무리 힘든 세상에서도 자신의 삶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법을 배우게 될 테죠. 그게 바로 역사의 힘입니다. 사람을 만나는 일, 저는 여러 분이 역사를 그렇게 대했으면 좋겠습니다.
새날을 꿈꾸게 만드는
실체 있는 희망
§
앞에서 역사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라고 말씀 드렸는데요. 그러면 많은 분이 제게 다시 질문을 던집니다. 어떤 사람을 마나야 하냐고요. 인물마다 가지고 있는 이야기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도 모두 다릅니다. 질문하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저의 대답 역시 달라지지만, 일반적으로 제가 가장 많이 하는 대답은 새날에 대한 ‘희망’을 품게 하는 인물들입니다.
이 시대에 희망은 빛바랜 단어 같아요. 오늘날 우리 사회가 무기력의 늪에 빠진 까닭도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희망이 보여야 힘을 내는데 도무지 그걸 찾기가 어렵거든요. 희망을 갖기에는 당장 닥친 현실이 팍팍하고, 실패하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 도처에 널려있습니다. 젊은 세대는 노력의 가치를 부정하고, 미래를 의심합니다. 희망을 포기해야 한다는 건 참 잔인한 일입니다. 희망이 없다면 대체 어디에서 삶의 원동력을 찾을 수 있을까요?
저는 역사를 공부하고 알리는 사람이다 보니 항상 과거를 살펴봅니다. 예전에는 어땠는지, 과거 사람들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어떻게 극복했는지 찾아보지요. 그 과정에서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얻기도 합니다.
우리 역사상 희망을 향해 가장 저돌적으로 달려간 사람은 누굴까 곰곰이 생각해보았어요. 그랬더니 갑신정변을 일으킨 급진개화파가 떠올랐습니다. 갑신정변은 조선 고종 때에 개화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급진 개화파가 일으킨 정변입니다. 이들은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모표로 청나라에 대한 사대와 조공 허례, 그리고 신분제 폐지 등을 주장합니다. 김옥균, 박영호, 서재필, 홍영식, 서광범 등이 중심인물인데 모두 상류층 집안의 엘리트였습니다. 사실 신분제의 혜택을 잘 누린 사람들이었지요. 그런데도 그런 특권을 없애고자 했어요. 자신들의 기득권을 내려놓으려 했던 겁니다.
그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합니다. 다른 세상을 꿈꿨기 때문입니다.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면 죽을 때까지 무시당해야 하고, 양반이라고 하면 어린 아이도 떵떵거리는 세상을 바꿔보고 싶었던 겁니다. 양반 상인 차별 없이 다 같은 사람으로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만들자는 꿈이었죠.
1884년 12월 4일 급진개화파는 자신들의 계획대로 궁을 장악하고 청나라에 사대하던 세력과 왕실의 민씨 친족 세력을 처단합니다. 조선에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었음을 알리는 한편, 조정 관료들도 새로 임명했습니다. 그리고 개혁정강 14조를 발표합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청나라로 압송되었던 흥선대원군을 귀국시켜 일국의 위상을 회복하고, 자주국으로서 청나라의 간섭을 받지 말아야 하고, 신분제를 폐지하여 모두 평등하게 살고, 본래 취지와 달리 악용되고 있는 정부기관을 없애는 등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모두 맞는 말이고 필요한 내용을 주장합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납니다. 개혁의 희망은 단 3일 만에 물거품으로 돌아갔습니다. 일본으로 도망친 후 10년간 떠돌아다니던 김옥균은 결국 자객의 총에 맞아죽었고, 홍영식은 고종의 곁을 지키다가 칼에 맞아 죽었습니다. 박영효, 서재필 등 몇몇 사람들은 외국으로 망명했고요.
갑신정변에 대한 평가는 엇갈립니다. 온건개화파를 비롯해 함께 개혁을 펼쳐나가야 할 세력을 끌어안지 못했고, 일반 백성의 지지도 얻지 못했다는 것 등 부족하거나 잘못된 점도 있지요. 갑신정변은 누가 뭐래도 실패한 혁명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고 한들 14개의 개혁정강으로 정리된 그들의 이상은 비난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들이 아니었더라도 또 다른 누군가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품고, 그 꿈을 실현하고자 노력했을 거예요.
§
급진개화파가 뿌린 희망의 씨앗은 10년 뒤 동학농민운동으로 이어집니다. 동학은 최제우가 창시한 종교로 단순한 종교차원이 아니라 시대의 모순을 해결하는 동력으로 사용됩니다. 동학농민운동은 정치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어요. 그들이 요구했던 개혁안을 살펴보면 탐관오리와 횡포한 부자를 벌하고 노비문서를 없애며 토지를 고루 나누어 농사를 짓게 하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신분에 귀천 없는 세상을 목표로 한 것은 갑신정변과 같은데, 그 내용은 훨씬 구체적이지요. 실제로 농사짓고 사는 백성이 개혁의 주체임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갑신정변이 일어날 때만해도 백성들에게 급진개화파의 주장은 얼토당토않은 말이었지만, 1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일반 백성도 세상이 어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거예요. 천하게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다고 여기던 일이 사실은 부조리한 일이자 타파해야할 문제임을 알아차렸죠. 그래서 자신의 부모가 받아들였던 숙명과 모난 돌이 정 맞으니 가만히 있으라는 가르침을 거부하기도 합니다. 봉건제에 맞설 준비가 된 거죠.
동학농민운동은 그야말로 아무개들의 이야기입니다. 전봉준, 김개남, 손병희 등 지도자는 있었지만, 그런 대표인물 몇몇을 제외하고는 이름을 모르잖아요.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던 대부분은 이름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그들의 힘은 강력했습니다.
농민군이 관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듭하며 하루가 다르게 세력이 커지자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 도움을 청합니다. 무서운 기세의 농민군을 최대한 빨리 진압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겠지만,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던 청과 일본에 군사를 보낼 명분을 제공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결국 두 나라의 얼씨구나 하고 군대를 보내죠.
농민군은 이런 사실을 알아차리고 조정에 자치적 개혁을 하겠으니 싸움을 멈추자고 제안하고 자진 해산합니다. 이들은 급진개화파와 달리 반외세의 성격을 띠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다른 나라가 개입하는 상황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막상 청군과 일본군이 밀어닥치자 아차 싶었던 조정도 농민군과 화약을 맺고 청과 일본에 군대를 물릴 것을 청합니다. 하지만 일본군은 돌아가려고 하질 않습니다. 오히려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군과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 땅에서 청일전쟁이 발발하게 된 것이지요.
이제 농민군은 조정뿐 아니라 일본을 상대로 싸우기 위해 다시 결집합니다. 관군과 일본군도 연합하여 전투를 준비하죠. 그들이 맞붙은 곳이 바로 우금치입니다. ‘치(峙)’는 고개를 뜻하는 말로 우금치는 부여에서 공주로 가는 골목에 있는 고개입니다. 농민군 입장에서는 이 고개를 넘으면 서울로 진격하는 거예요. 전략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곳이죠. 관군과 일본군 입장에서는 농민군이 우금치만은 넘지 못하게 막아야 했습니다.
(우금치)
농민군이 우금치에 도착해서 본 것은 고개 위에 걸려있는 총들이었어요. 농민군에게는 총이 없었습니다. 그들을 지휘하며 전투를 이끄는 사람들이나 총을 사용하죠. 농민군은 대부분 말 그대로 농민으로 이루어져 있었어요. 농사짓고 사는 백성입니다. 총은커녕 죽창 하나만 들고 싸운 사삼이 훨씬 많았어요. 그러니 잔뜩 걸려있는 총을 보고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농민군은 옷 속에 부적을 붙였다고 해요. 그 부적을 붙이면 총알이 피해간다고 믿었대요. 정말로 그렇게 믿었을까요? 아니요. 당연히 믿지 않았을 겁니다. 너무 무서우니까, 무서워서 한 발짝 떼기도 힘드니까 붙였던 거예요. 종잇조각 하나지만, 아무 소용도 없는 걸 알지만, 그거라도 붙여야 한 발짝이라도 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래서 붙인 것 아닐까요? 부적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참 짠하더라고요. 이 아무개들은 용감하게 싸운 거 아니에요. 두려워하며 싸웠어요.
우금치 전투의 결과는 농민군의 대패였습니다. 무기부터 상대가 되지 않잖아요. 잘 훈련된 일본군과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죠. 그들도 우금치를 바라보며 아마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을 겁니다. 그런데 왜,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그 고개를 넘으려 했을까요? 아마도 그들에게 희망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 양반, 상놈 할 것 없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세상을 자식에게 물려주겠다는 희망, 그 희망 하나로 죽창을 들고 언덕 위로 뛰어올랐습니다.
100년 전 희망을 꿈꾼 사람들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당시에는 갑신정변을 경거망동이라 하고, 동학농민군을 폭도이자 반란군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때 제가 살아있었다면 갑신정변과 동학농민운동을 어떻게 바라봤을지 생각해봅니다. 어쩌면 저 역시도 그들을 경거망동한자들, 비적들이라고 불렀을지 몰라요. 설사 그들과 뜻이 같았더라도 냉소적으로 반응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겠어?’ 이렇게 생각했겠죠.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그런 건 없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바라던 시대가 찾아왔어요. 신분제 폐지라니 말이 돼?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이야기가 지금은 너무도 당연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두려움 속에서도 먼 미래를 보며 나아갔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희망을 품은 사람이 있었고, 그들이 도전했고, 그 덕분에 지금의 우리가 당연한 것을 누리고 사는 건지 모릅니다.
역사적 사건을 볼 때 기본적으로 원인, 전개, 결과 그리고 의의를 다룹니다. 갑신정변의 엘리트 청년, 동학농민운동의 농민 모두 목숨을 걸고 자신의 목소리를 높였지만 결과적으로 는 실패했어요. 그렇다고 이들의 운동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갑신정변과 동학농민운동의 주장은 1차 갑오개혁에 상당부분 반영됩니다. 조정 역시 역사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던 까닭이죠. 갑오개혁이 추진되면서 신분제와 반상(班常)의 구별도 사라집니다. 비록 당대에는 그들의 노력이 결실을 보지 못했지만, 역사는 그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합니다.
역사가 흘러가는 것을 보면 희망이라는 말이 조금은 다르게 다가와요. 말하자면 역사는 실체가 있는 희망입니다. 아무런 근거 없이 조금 더 살아보자고, 버텨보자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단지 조금만 더 멀리 봤으면 좋겠어요. 지금 당장은 두렵겠지만 나의 삶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잖아요. 세상도 변하는데 나의 인생이라고 늘 지금과 같을까요? 힘든 세상에서 희망마저 없다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동력을 잃어버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두려움은 희망 없이 있을 수 없고, 희망은 두려움 없이 있을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따르면 두려움을 느끼는 우리는 모두 어떤 형태의 희망을 품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인생이라는 항로에서 방향키를 놓지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나의 노력도 역사의 수레바퀴와 맞물려 순풍이 불어오듯 결실을 맺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저 역시 그런 희망을 품고 두려움을 껴안은 채 오늘도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려 합니다.
역사의 구경꾼으로
남지 않기 위하여
§
조선의 성군이라고 꼽으라고 하면 보통 세종(世宗)과 정조(正祖)를 말합니다. 세종은 조선시대 전기(前期)를, 정조는 조선시대 후기(後期)를 대표하는 임금이죠. 정조는 참 힘들게 왕이 되었습니다. 겨우 열한 살의 나이에 자기 아버지(사도세자)가 죽었는데 자기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 다름 아닌 할아버지 영조예요. 어린 나이에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이뿐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죽음에 관여한 신하들이 이번엔 자신이 왕이 될까봐 갖은 음모를 꾸몄습니다. 목숨을 부지하느라 고생했던 정조는 왕이 되자마자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정치개혁을 위해 애씁니다. 신하들이 호시탐탐(虎視眈眈)자신을 노리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세력을 키우려면 가장 먼저 자기를 따르는 사람이 있어야겠지요. 그래서 세운 것이 규장각(奎章閣)입니다. 왕실도서관인 규장각은 사실 정조가 자기사람을 키우기 위해 만든 기관이었습니다. 정조는 당파나 신분에 관계없이 젊고 똑똑한 관료들을 뽑아서 규장각에 배치했는데, 이것이 바로 초계문신(抄啟文臣=규장각에서 특별교육과 연구과정을 밟던 문신)제도입니다. 이미 과거에 합격한 사람 중 37세 이하의 인재를 뽑아 3년 정도 특별교육을 하는 거예요. 개혁정치를 함께 하기 위해 재교육을 하는 것이지요. 그중에는 박제가, 유득공 같은 서얼(庶孽≒庶子)출신도 많았습니다. 많았습니다. 정조는 신분보다 실력을 중시했기 때문에 별로 개의치 않았어요.
소위 ‘정조라인’이 된 학자들은 규장각에서 역대 왕의 자료를 정리하며 개혁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저마다 중요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지요. 초계문신의 대표인물이 바로 다산 정약용입니다.
정약용은 정조가 키운 학자입니다. 그에게 정조는 스승이자 멘토(mentor)였어요. 정조 또한 정약용을 총애했습니다. 정약용이 워낙 훌륭했기 때문이죠. 능력 면에서 이야기하자면 정약용 같은 위인을 또 찾기가 어려웠을 거예요. 흔히 만능인이라고 하면 레오나드 다빈치를 꼽잖아요. 그런데 다산 선생이야말로 다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한 조선의 르네상스인이었습니다. 실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 바탕은 유학에 있어 관련서적을 여러 권 집필하였고, 정치와 법, 의학과 지리학, 언어학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거중기(擧重機)와 녹로(轆轤)를 발명해 수원 화성 건설에 혁혁한 공을 세웠고, 시인으로서 여러 작품을 남기기도 했지요. 또 500여권이 넘는 책을 썼으니 뛰어난 작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다양한 내기를 하며 함께 시간을 보낼 정도로 무척 가까웠습니다. 애주가인 정조가 술을 잘 못하는 정약용에게 일부러 술을 내리거나 활솜씨가 없는 것을 알고 문무를 갖추게 한다며 활쏘기 연습을 시키는 등 짓궂은 장난도 서슴지 않았죠. 두 사람의 일화를 보고 있자면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넘어 정말 마음을 나눈 벗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다재다능한 정약용에게도 약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종교가 그의 아킬레스건이었어요.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인데 정약용의 집안은 천주교를 믿었거든요. 한마디로 난리가 날 일인 것이죠. 정조는 그 사실을 모른 척했지만, 계속해서 올라오는 탄핵상소를 외면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정약용을 내치기로 합니다. 너무나 아끼는 신하이지만 계속 붙잡고 있으면 오히려 정약용에게 독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거죠. 그래서 정약용에게 미리 언질을 줍니다. 내가 내일 호통을 치면서 너를 자를 거다. 그럼 우선 잘못했다고 해라. 물러나서 기다리면 내가 너를 다시 부를 것이다.
정조는 뼛속까지 정치인입니다. 치밀하고, 때로는 냉혹하기도 합니다. 가까운 신하들과 자주 편지를 주고받으며 다양한 지시를 내렸는데, 당시 노론 변파의 수장이었던 심환지와 주고받은 편지는 무려 30통이 넘습니다. 그중 한 편지를 보면 정조가 심환지에게 이런 지시를 내려요. 내일 나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면서 네 죄를 벌해달라고 말하라는 지시예요. 예를 들어 그 편지에 적힌 날자가 3월 6일이라면 다음 날인 3월 7일자 실록에 정확히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심환지가 정조 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절을 하더니 “저의 죄를 벌하여 주십시오!”라고 했다는 것이죠. 이처럼 정조는 자신이 직접 사람과 상황을 조정하고 통제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정약용은 정조와 함께 일하는 걸 정말 좋아했거든요. 하지만 상황이 워낙 안 좋으니 어쩔 수가 없었지요. 관직에서 물러난 정약용은 왕이 다시 자신을 불러줄 날만 기다리며 지냈습니다.
그가 조정에서 물러난 뒤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 추측할 수가 있는 증거가 있어요. 자신의 생가에 걸어놓은 현판이죠. ‘여유당(與猶堂)’이라고 쓰인 현판인데, 얼핏 들으면 ‘이제 좀 여유를 갖고 편하게 살겠다는 뜻인가?’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어요. 실은 노자의『도덕경』에 나오는 글귀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여(與)함이여, 겨울 냇물을 거너듯이
유(猶)함이여, 너의 이웃을 두려워하듯이.”
이 글귀는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고,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처럼 두려워하며 경계하라는 의미예요. 안 그래도 눈엣가시인데 무엇 하나라도 트집을 잡아보려는 무리가 눈에 불을 켜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사방을 경계하고 신중하게 하루를 보내라는 의미로 그런 글자를 써둔 거예요. 정약용은 매일 현판을 쳐다보면서 ‘오늘 하루도 행동거지 하나하나 조심해야지’ 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단속하며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는데, 드디어 조정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보름 뒤에 너를 부를 테니 준비하고 있으라는 내용이었어요. 얼마나 좋았겠어요. 청운의 뜻을 품고 약속한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렸겠죠.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정조가 세상을 떠난 거예요. 약속한 날을 딱 하루 앞두고요. 정조가 승하한 날이 정약용을 다시 부르기로 한 날의 바로 전날입니다.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에 정약용은 충격에 빠집니다. 얼마나 허탈하고, 슬펐을까요. 뒤이어 찾아온 감정은 바로 ‘공포’였을 것입니다. 정약용을 지켜주던 존재가 사라진 셈이잖아요.
아니나 다를까 정조 승하 이후 신유박해로 수많은 천주교인이 처형당하고, 정약용 또한 유배를 갑니다. 자신은 이미 천주교와 인연을 끊었다는 간곡한 호소가 받아들여져 겨우 사형을 면한 것이었어요. 후에 맏형인 정약현의 사위가 일으킨 역모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강진으로 유배지를 다시 옮기게 됩니다. 가문은 폐족이 되었지요. 자그마치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고, 그 뒤에 여유당으로 돌아와 다시는 조정에 발을 들이지 못한 채 그곳에서 일생을 마칩니다.
정약용은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었으나 능력을 펼칠 기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외척이 날뛰고 탐관오리들의 횡포가 판치는 세상, 인재를 알아주기는커녕 짓밟는 세상이 원망스럽진 않았을까요? 저는 그게 평범한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억울해요. 다산의 인생을 보면 제가 다 안타까워요. 정조가 조금 더 오래 살고 정약용이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실제로 펼쳤다면 조선의 향방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은 거죠. 행정, 토지 등 여러 제도가 개선되었을지도 모르니까요.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는 하지만, ‘만약’ 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거든요. 그 정도로 뛰어난 분입니다.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나라를 탓하고 운명을 탓하며 남은 인생을 보냈다고 하더라도, 누구도 쉽게 손가락질을 하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정약용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일을 했어요. 바로 책을 쓰는 일이었습니다. 18년 동안 무려 500여 권의 책을 씁니다. 저는 한 권 쓰는 일도 힘에 부치는데 말이죠.
양만 많은 것이 아니라 분야도 방대합니다. 지방의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서인『목민심서(牧民心書)』제도의 개혁 원리와 방안을 다룬『경세유표(經世遺表)』형벌의 운영에 관한『흠흠신서(欽欽新書)』고조선부터 발해까지 역대 왕조의 영토를 연구한『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등이 대표적인 저서입니다. 이 외에도 의학서, 어원연구서, 시집, 풍수를 분석하거나 아이들을 위해 한자를 쉽게 가르쳐주는 책 등 몇 가지로 설명하기 힘들만큼 다양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정약용은 복숭아뼈에 세 번 구멍이 났다고 해요. 양반다리를 하면 복숭아뼈가 눌리잖아요. 책상 앞에서 그 자세로 움직이지도 않고 밤낮으로 글만 쓴 겁니다. 나중에는 복숭아뼈가 너무 아프니까 일어서서 선반 위에 책을 올려두고 공부하며 글을 썼대요.
대체 왜 그랬을까요? 정약용이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궁금했습니다. 마치 기록에 미쳐있는 사람처럼 글을 썼으니까요. 이 질문에 대한 정약용의 답변이 있습니다.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 적혀있어요.
마치 기계로 찍어내듯 책을 쓰는 와중에도 정약용은 두 아들에게 틈틈이 편지를 썼습니다. 귀양살이 중이니 자식과 함께 생활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편지로 자녀를 교육하고 애정을 전했어요. 공부의 중요성부터 사대부 예법, 일상의 지혜 등 세세한 내용이 담겨있어요. 독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친구를 사귈 때나 시를 쓸 때, 벼슬살이를 할 때, 심지어 술을 마실 때의 법도에 관해서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자식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어요. 둘째형인 정약전과의 일을 추억하거나 막내아들의 죽음을 슬퍼하고, 물려줄 재산이 없어 미안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중에는 폐족(廢族)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편지도 있습니다. 조상이 큰 죄를 지어서 그 자손들이 벼슬을 할 수 없게 된 집안을 폐족이라고 해요. 정약용은 자식들에게 가문이 몰락한 상황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금방 나아질 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관직에 나갈 수 없는 폐족일지라도 선비의 기상을 유지하는 길을 끊임없이 알려주고 있습니다.
폐족끼리 무리를 짓지 말 것. 과일과 채소를 키우고 뽕나무를 심어 가난에서 벗어날 것, 벼슬을 하지 못하더라도 벼슬하는 사람처럼 나라와 세상을 위해 살 것……. 그중에서도 핵심은 책을 읽는 것이었습니다. 벼슬길에 오르지는 못해도 책을 읽을 수는 있으니까요. “폐족에서 벗어나 청족(淸族)이 되려면 오직 독서 한 가지 일뿐이다.”라고 했지요. 청족은 대대로 절개와 의리를 숭상해온 집안을 뜻하는 말입니다.
또한 정약용은 자신이 계속해서 읽고 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 이유도 밝히고 있습니다. 만일 자신이 지금 이 생각을 남기지 않는다면 후세 사람들은 사헌부의 재판기록만 보고 자신을 죄인 정약용으로 기억할 것이라는 거죠. 그래서 끊임없이 기록하겠다는 것입니다.
출세의 길이 막혔고, 죄인이 되었다고, 폐족이 되었다고 자포자기(自暴自棄)하여 손 놓고 있지 않았습니다. 정약용은 형조에 기록된 몇 줄짜리 글로 평가받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글을 남겨 후세의 평가를 받으려했습니다.
저는 정약용의 편지글을 보고 팔에 소름이 쫙 돋았습니다. ‘아, 정약용은 역사가 무엇인지 알았구나.’라는 깨달음과 함께 감탄이 터졌습니다. 능력이나 성품도 그러하지만, 저는 정약용의 역사의식이 정말 존경스러워요. 정약용은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죄인의 입장이지만 역사는 자신을 그렇게 기억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쓰고, 또 썼던 것입니다.
교과서를 한번 펼쳐보세요. 정약용이 어떤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까? 죄인 정약용? 아닙니다.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정약용이 남긴 수많은 저서는 현대에도 활발히 연구되며, 학자는 물론 일반인에게도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정약용이 200년 전에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지요.
저는 인생의 고비를 만날 때마다 정약용의 남양주 생가로 가곤 합니다. 여유당 현판 아래에 앉아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요. 역사 속 인물과 소통하면 지금 당장 닥친 문제를 조금 더 멀리서 바라볼 수 있게 되거든요. 역사라는 흐름 속에서 현재를 보게 되니까요. 마찬가지로 내 인생 전체에서 이 문제는 수많은 고비 중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 고난이 인생의 끝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면 조급한 마음을 약간은 덜어낼 수 있어요.
(정약용 생가 )
정약용의 고민과 제 고민의 내용이 완전히 같지는 않겠지만, 핵심은 비슷한 거예요. 왜 이렇게 일이 잘 풀리지 않을까?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가야 할까?
그 답은 정약용의 삶에 있습니다. 정약용은 18년간 귀양살이를 했고, 고행으로 돌아와 다시 18년을 보낸 뒤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때로는 비참하고 암담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폐족이 되었음을 한탄하거나 힘든 세월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읽고 쓰는 일을 꾸준히 해나갔습니다. 그의 여생은 평화로워 보일지 모르나 어쩌면 삶의 마지막 투쟁이었을 겁니다. 역사를 알았기에 고난을 버티며 투쟁해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정약용의 자식들은 아버지의 당부대로 살았습니다. 둘째 아들 정학유는「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라는 유명한 가사를 지어 그 시대의 풍속이 담긴 귀한 자료를 남겼습니다. 큰아들 정학연은 70세가 되어 벼슬을 얻었습니다. 그러자면 정약용의 집안은 드디어 폐족을 면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정약용이 자식들에게 당부했던 말을 전하며 이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진실로 너희들에게 바라노니, 항상 심기를 화평하게 가져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다름없이 하라. 하늘의 이치는 돌고 도는 것이라서, 한번 쓰러졌다하여 결코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약소국인 신라가
삼국통일의 주인공이 되기까지
§
혁신
스포츠 좋아하시나요? 저는 열렬한 야구팬인데요. 야구를 보다보면 스포츠가 한편의 드라마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을뿐더러 때로는 의외라고 할 만한 반전이 일어나기도 하니까요.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는 말이 딱 맞죠. 그런데 스포츠만큼 반전의 묘미를 주는 것이 또 있습니다. 그 어떤 것보다 극적인 반전으로 가득한 역사입니다.
우리나라 삼국시대만 봐도 그렇습니다. 고구려는 드넓은 영토와 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던 나라였고, 백제는 일찍이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곡창지대에 위치한 덕분에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융성한 나라였어요. 일본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죠. 두 나라에 비하면 신라는 영토도 작고 발전도 늦었습니다. 하지만 삼국을 통일한 건 신라입니다. 가장 힘이 약했던 나라가 어떻게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당나라의 힘을 빌렸기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이 반전을 서명할 수는 없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차례로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4세기 백제 근초고왕, 5세기 고구려 광개토대왕, 6세기 신라 진흥왕 이렇게 배웠던 기억이 있을 겁니다. 돌아가며 강세를 떨쳤던 삼국은 7세기에 마지막으로 자웅을 겨룹니다. 특히 642년은 아주 대단한 해였어요.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해였죠.
우선 641년에 왕위에 오른 백제의 의자왕이 신라를 거칠게 몰아붙였습니다. 642년에 벌어진 대야성 전투에서 신라는 무릎 꿇었죠. 대야성이 어디냐 하면 백제와 신라 사이의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당시 백제의 수도가 부여였고, 신라의 수도가 경주였는데, 대야성은 그 중간 관문이었어요. 지금의 합천 자리입니다. 대야성을 빼앗긴 신라는 치명타를 입은 거나 다름없었죠. 그냥 내달리면 경주에 도착하거든요. 신라로선 엄청난 위기였습니다.
백제는 기세를 몰아 40여 개의 신라 성을 추가로 함락시켰습니다. 안으로는 가뭄과 지진 등 자연재해가 연이어 일어났습니다. 한마디로 나라가 위태로운 시기였죠. 고민하던 신라는 200여 년 전에 자신들을 도와 준 적이 있는 고구려에 도움을 청하기로 합니다. 400년에 왜가 신라에 쳐들어와 경주가 거의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을 때 고구려가 군대를 보내주었기 때문입니다. 도와달라는 신라의 요청에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은 무려 5만여 명의 군대를 보내서 왜군을 다 쓸어버리고, 왜와 연합했던 가야도 초토화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고구려에 도움을 청해보자 했던 것이죠. 당시 신라의 왕이었던 선덕여왕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는데, 그 사신이 바로 훗날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입니다.
642년 신라뿐만 아니라 삼국 여기저기에서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해입니다.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은 사건이 벌어졌죠. 사신으로 간 김춘추는 연개소문에게 상황을 전하고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예전에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빼앗은 한강유역의 땅을 돌려주면 군사를 보내겠다고 합니다. 신라 입장에서 이것은 고려해볼 것도 없는 제안이었어요. 결국 신라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즉위과정부터 순탄하지 않았던 선덕여왕은 위기를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냥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해묵은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접근법을 바꿔서 이 위기를 타개합니다. 말 그대로 혁신한 것이지요.
우선 선덕여왕은 다음 해에 탑을 짓습니다. 그러한 위기상황에서 황룡사 9층 목탑을 지어 올리라고 명령을 내린 거예요. 선덕여왕에게는 무척 과감한 정치적 결단이었습니다. 많은 왕이 왕권 강화를 위해 토목사업을 벌이지만 그때마다 원성도 자자했거든요. 나라 사정도 안 좋은 마당에 탑을 지었으니 선덕여왕도 어느 정도 부담을 안고 있었을 거예요. 게다가 황룡사 9층 목탑은 높이가 80미터 정도 되는 어마어마한 탑이었습니다. 80미터면 아파트 30층에 달하는 높이입니다. 그 규모를 상상하면 굉장하죠? 몽골 침입 때 황룡사가 불에 타지 않았다면 황룡사 9층 목탑은 현재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건축물이 되었을 겁니다.
완성된 9층 목탑에는 층마다 신라를 괴롭힌 주변국들의 이름이 새겨졌다고 합니다. 1층부터 차례로 일본, 당, 오월, 탐라, 백제, 말갈, 거란, 여진 고구려의 이름을 넣었어요. 탐라는 제주도의 옛 이름입니다. 정말 작은 나라였는데 그런 나라까지도 신라를 괴롭혔으니 당시 신라의 입지가 얼마나 좁았는지 알 수 있지요.
왜 주변나라의 이름을 탑에 새겼을까요? 한마디로 언젠가는 신라의 발아래 두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신라가 작은 나라지만 힘 있는 나라가 되겠다는 것이었죠. 현대에는 고층 빌딩이 많지만 그때는 그런 게 없었잖아요. 황룡사 9층 목탑만 눈에 띄었겠죠. 경주 전역 어디에서나 불 수 있었을 겁니다. 경주 사람들이 아침에 눈 뜨고 일어나 농사를 지으러 나가면 무엇이 가장 먼저 보였을까요? 황룡사 9층 목탑이었겠죠. 이것이 선덕여왕의 바람이었어요. 신라인들의 마음을 모으는 것. 우리도강해질 수 있다는 비전을 신라인과 공유하는 것이죠.
혼자만의 비전은 몽상이나 망상으로 그칠 수 있지만,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됩니다. 조직이 움직이려면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분명한 상을 보여주고 그곳을 향해 같이 가자고 설득해야 해요. 선덕여왕은 그 비전과 꿈의 상징으로 황룡사 9층 목탑을 지은 겁니다. 실제로 선덕여왕은 이 탑을 완공한 뒤에 이렇게 선언합니다. “우리가 삼국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이 꿈은 결국 이뤄지지요. 신라는 660년에 백제를 제압하고, 668년에 고구려까지 물리칩니다. 가장 작고 힘없던 나라가 삼국의 주인공으로 우뚝 서게 된 겁니다.
저는 신라의 삼국통일, 그 발칙한 상상이 황룡사 9층 목탑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선덕여왕은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가슴에 품고, 황룡사 9층 목탑을 지었어요. 그렇게 꿈을 향해 한 발 내디딘 것이죠. 어디로 나아가야할지 분명한 비전이 있었기에 혁신도 가능했습니다. 그저 지금 당장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급급했더라면, 또는 강국이 되어야겠다는 막연한 생각만 있었다면 혁신은 이루어지지 않을 겁니다.
비전을 세웠으면 그 비전을 실행할 인재가 필요했겠죠? 신라의 삼국통일에 가장 큰 공을 세운 두 사람이 있어요. 김춘추와 김유신입니다. 이들은 원래 신라 조정의 비주류였습니다. 아웃사이더죠.
김춘추는 왕족이긴 했지만 할아버지가 폐위를 당해 어찌 보면 폐족이라고 할 수 있었어요. 게다가 앞에서 언급한 대야성 성주가 김품석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이 김춘추의 사위였습니다. 요충지를 빼앗긴 것만으로도 질타의 대상이 될 텐데, 사실 대야성 전투는 김품석 때문에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김품석이 부하의 부인을 탐했고, 이를 원망하던 부하가 백제군과 내통한 것이 패전의 원인이 되었거든요. 김춘추도 그 전투로 딸을 잃은 슬픈 상황이었지만 사위의 잘못으로 중요한 성을 잃었으니 김춘추를 행한 반대파들의 정치공세가 적지 않았습니다.
김유신은 사실 신라 출신이 아니라 가야 출신이었습니다. 금관가야 왕족의 후손이었어요. 광개토왕이 신라의 요청으로 군대를 보냈을 때 왜와 손잡고 있던 금관가야도 크게 약화되었다고 했지요. 그 뒤에 결국 신라에 흡수되거든요. 김유신은 지배층으로 편입되기는 했지만 신라 사회에서는 차별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덕여왕은 이처럼 비주류인 김춘추와 김유신을 등용합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타고난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기 어려운 폐쇄적인 골품제 나라에서는 무척 놀랄만한 사건이었습니다. 선덕여왕의 그런 행동이 이미 혁신이었어요. 김춘추와 김유신 같은 사람을 등용했기에 신라와 이웃하지 않은 나라인 당나라와 손을 잡는다는 새로운 발상도 가능했을 겁니다. 기존의 주류세력이었다면 그런 생각을 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물론 당나라와 손잡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는 당태종 집권기였는데, 그 많은 업적으로 지금도 중국인의 존경을 받고 있지만 작은 나라의 신라를 우습게 봤습니다. 선덕여왕에 대해서도 어떻게 여자 따위가 왕을 하냐며 모욕적인 말을 하고, 내가 여기 있는 당나라 남자 중에 똑똑한 사람을 뽑아서 보내줄 테니 그자를 왕으로 삼으라고 할 만큼 굉장히 무시했습니다. 신라와 손을 잡을 생각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645년에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에 큰 싸움이 납니다. 당태종이 642년 연개소문이 일으킨 쿠데타를 핑계로 고구려에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간 거예요. 고구려의 성을 차례로 함락시키던 당나라군은 마침내 안시성을 공격합니다. 안시성 전투는 3개월간 이어졌는데 안시성 성주와 백성들은 끝내 성문을 열지 않고 막강으로 유명했던 당나라 대군을 물리칩니다. 그토록 칭송받던 당태종도 안시성 앞에서 와르르 무너져버렸습니다. 아주 혼비백산해서 도망을 갔거든요. 당태종 본인도 아마 큰 충격에 빠졌을 겁니다. 그만큼 당나라 입장에서는 쓰라린 패배였죠.
신라는 고구려와 당나라의 싸움을 지켜보았습니다. ‘우리를 그렇게 무시하더니 고구려한테 졌네?’ 하면서 당나라의 패배 원인이 뭘까 살펴보니 보급로 때문이었습니다. 제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수십만이나 되는 대군이 먹을 식량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제대로 싸우기는커녕 떼로 굶어죽는 거잖아요. 전쟁을 하려면 우선 보급로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쓰디쓴 패배의 원인인 보급로 문제를 신라가 해결해주겠다고 나서자 그 뻣뻣했던 당나라가 드디어 제안을 바다들입니다. 이렇게 나당연합이 시작된 것이죠. 신라는 무시당하면서도 매의 눈으로 틈을 엿보다 기회를 낚아챘습니다.
660년에 당나라가 대군을 파견했고, 같은 해에 김춘추는 의자왕의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갑자기 밀려드는 나당연합군을 막지 못한 백제는 멸망합니다. 김춘추는 다음해에 죽고 말지만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삼국통일의 주인공은 신라가 됩니다. 선덕여왕이 세웠던 비전대로 가장 약하고 힘없는 나라인 신라가 최후의 승리자가 된 것이죠.
내가 학교에 있을 때 느낀 것 중 하나가 본인이 속한 집단 안으로 시야를 좁히면 쉽게 불행해진다는 것입니다. 학창시절을 떠올려보세요. 학교라는 공간에서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 주목을 받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고등학교가 대학입시 위주로 운영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성적이 좋지 않은 학생들은 스스로가 못났다며 자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생에게는 학교가 세상의 전부니까요. 거기서 빛을 보지 못하면 영영 패배자가 될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죠.
하지만 어디 인생이 그렇습니까? 야구경기에서 한 이닝이 종료하면 다음 회가 시작하듯 인생의 다음단계로 넘어갈 때마다 매번 게임은 다시 시작됩니다. 사회에서는 학교와 다른 기준이 적용되죠. 혼자 똑똑한 사람보다는 소통을 잘하고 협력을 잘하는 사회생활을 하고, 성과를 내죠. 저 역시 제자들을 통해서 그런 경우를 참 많이 보았습니다.
비단 학생들만 그런 것은 아닐 겁니다. 직장인도 조직에서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하면 불안하고 초조해지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지금 내가 처한 현실이 삶의 전부라고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인생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니까 말이죠.
앞이 보이지 않는 위기에 부딪친다면 642년의 신라를 떠올려봅시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과 흐름을 따라가는 거예요. 가장 먼저 비전을 세워야겠죠? 위기를 극복하는 것뿐만 아니라 최종적으로 자신이 무엇을 보고 나가야할지 그 목표를 정해보는 겁니다. 선덕여왕이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듯이 말이죠. 어쩌면 지금이 혁신의 적기일지 모릅니다. 새로운 시선으로 나와 내 주위를 바라보고, 새로운 첫걸음을 떼야하는 때가 온 것이죠.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발상의 전환이 우리가 써내려가는 인생 드라마에 최고의 반전이 되어줄 것입니다.
- 중 략 -
바다 너머를
상상하는 힘
§
장보고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은 대부분 지배층입니다. 근대 이후를 제외하면 죄다 왕이나 고위공직자, 아니면 장군들이죠. 정도전처럼 양반가문이어도 어머니의 신분이 미천하면 주홍글씨가 새겨지는 신분사회였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면 역사에 이름을 떨칠 기회조차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평민임에도 고대 중국과 한국, 일본 역사에 모두 이름을 올린 사람이 한 명 있어요. 조선도, 고려도 아니고 신라시대 사람, 우리에게는 바다의 신 해상왕으로 유명한 장보고입니다.
통일신라는 골품제 사회였어요. 지배층은 성골과 진골, 6두품에서 1두품까지 여덟 개의 신분으로 나뉘어있었습니다. 굉장히 견고한 질서라 관직에 있는 사람조차 차별을 받았어요. 6두품이면 아무리 일을 잘해도 어느 선 이상 승진이 안 되는 거예요. 제가 대표적인 6두품 학자 최치원이 후손인데요,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았던 그분도 생전에는 6두품이라는 이유로 설움을 받았습니다. 너무하다싶어 신라 말기에 개혁안을 내놓기도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요.
이런 상황이니 평민들의 삶은 어땠겠어요? 그야말로 흙수저 중의 흙수저인 거죠. 장보고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한, 중, 일 삼국의 역사서에 모두 등장할 정도로 이름을 떨쳤는데도 출생과 부모에 대한 기록은 없어요.『삼국유사』에 출신이 미천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입니다. 완도 근처에서 태어난 평민이었을 거라고 추측할 뿐이죠. 전라도의 바닷가에서 태어났다는 출신 지역으로 인한 차별도 심했을 거예요. 당시 신라는 수도인 경주, 즉 서라벌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나라였습니다. 서라벌에 살지 않는 것도 큰 단점이었던 거예요.
장보고
(완도 , 장보고 동상)
심지어 장보고는 이름조차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평민들은 성도 없고 이름도 정식으로 짓지 않았으니까요. 그냥 어린 시절부터 활을 잘 쏜다고 활보라고 불렸대요. 밥 잘 먹는 사람을 먹보라고 하듯이 주변에서 그냥 그렇게 부른 거죠. 좀 더 자란 후에는 활궁(弓)자를 써서 궁보라 이름을 썼습니다.
그 시대에 신분이란 건 운명과도 같았습니다. 신분의 벽은 감히 뛰어넘을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장보고 같은 사람에게 관직은 말도 안 되죠. 농촌에서 태어나면 농사짓고, 어촌에서 태어나면 물고기를 잡으며 살아야 했던 겁니다. 이 시기 평민들은 절대로 꿈을 가져서는 안 됐어요. 왜? 백 퍼센트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꿈을 갖는 순간 비극과 고통이 시작 될 것이 불 보듯 뻔했어요. 그런데 다 자란 장보고는 그만 꿈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바다를 건너 당나라로 갔어요.
(장보고 유적지)
장보고가 왜 바다를 건너가기로 결심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바닷가에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어린 시절부터 푸른 바다를 보며 자랐잖아요. 등 뒤의 육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땅이에요. 어차피 이 땅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눈앞의 바다를 건너가면 어떨까? 장보고는 그런 생각을 했을 것 같아요. 잘 아는 안전한 세계에서 주어진 대로 사는 것보다 조금 무섭지만 미지의 세계로 가보자. 저 바다 건너로 가면 무언가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는 당나라 오가는 배에 올랐을 겁니다.
당시 신라는 진공 귀족들이 왕위를 놓고 다투느라 바빴습니다. 사회는 혼란하고 경제는 어려운 게 당연한 결과겠죠. 그래서 난민이 많았어요. 더욱이 지방은 통제가 잘 안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몰래 배를 타고 당나라로 갔습니다. 장보고도 신라가 아닌 낯선 땅에서 인생 2막을 시작하게 됩니다.
당은 대제국으로 불리는 나라였습니다. 중원은 물론 서역까지 영토를 넓혀 실크로드를 통해 여러 나라와 교역했어요. 그런데 사방으로 땅을 넓히다보니 중앙의 힘이 곳곳에 미치지 못했고, 여기저기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당나라는 병역제도를 모병제로 바꾸고 이민족 용병을 고용해 반란을 진압하려 합니다.
당나라로 건너간 장보고도 이 용병모집 광고를 보고 외인부대에 들어갔습니다. 월급을 받는 군인이 된 거죠. 장보고라는 이름도 이때 정했어요. 월급을 받으려면 이름을 등록해야하니까 말이에요. 보니까 주변에 장씨가 참 많은 거예요. 중국은 장삼이사(張三李四)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성은 중국에서 가장 흔한 장씨로 정하고 활보를 한자로 바꾼 궁보(弓)이라는 이름에서 ‘보’자를 따서 이름을 만든 거예요.
군 생활이 잘 맞았는지 장보고는 승승장구(乘勝長驅)합니다. 중국 역사서에 그 활략이 기록되어 있어요. 활을 쏘고 창을 휘두르며 싸우는 장보고의 모습은 마치 영웅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연이어 큰 공을 세운 장보고는 병사들을 지휘하는 관직까지 얻어요. 가진 것 하나 없이 낯선 땅에 와서 외국인 용병으로 시작해 장교가 된 거니까 엄청나게 성공한 거죠. 아메리칸 드림에 버금가는 당나라 드림을 이룬 셈이죠. 하지만 반란군이 다 진압되자 장보고는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할 일이 없어진 거잖아요. 게다가 외국인이니 언제 해고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고민하던 장보고는 어린 시절에 그랬듯이 또 푸른 바다를 바라봅니다. 당나라와 신라를 오가는 무역선들을 보고 실마리를 얻었는지 이번에는 장사를 시작해요. 국제무역업을 합니다. 당나라에 오래 살았으니까 현지 사정이 빠삭하잖아요. 인맥도 많이 쌓았을 거고요. 장보고는 어디에 가야 물건을 싸게 살 수 있는지, 어느 곳에서 누구와 교역하고 어디에 팔아야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는지 알았습니다. 장사 수완도 좋아 점점 많은 돈을 벌게 되지요.
당시 중국 동해안에는 신라방이라는 마을이 있었어요. 당나라에 온 신라 사람이 하도 많으니까 코리아타운처럼 집단 거주지역이 생긴 거죠. 신라방에는 신라원이라는 사찰도 있었습니다. 이민자들이 한인 교회를 중심으로 교류하듯이 신라 사람들도 절에서 정보를 나누고 친분을 쌓았습니다. 이 네트워크를 활용해야 하겠다고 생각한 장보고는 산둥반도의 적산에 법화원이라는 큰 절을 세웠습니다. 자연히 많은 사람들이 이 절에 드나들게 되었어요. 예불을 드릴 때면 200~300명이 족히 모였고, 신라어로 진행하였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법화원을 통해 정보를 수집한 장보고는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습니다. 중국에서도 이름이 날정도로 재산이 많았다고 하니 거의 재벌이었던 거죠. 중국 적산에 가면 적산명신이라는 거대한 동산이 있어요. 앞면은 스님의 모습이고, 뒷면은 장보고의 모습을 본떠 만든 것입니다. 이 적산명신은 앉은 채로 오른 손을 펴서 아래를 살짝 누르는 듯한 모습이에요. 이 손이 파도를 잔잔하게 해 준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중국 사람들은 적산명신을 재물을 관장하는 신이자 바다를 지키는 해신으로 생각합니다. 그 상징이 장보고니까 장보고가 얼마나 유명한 인물인지 알 수 있죠.
일본에서는 아예 장보고의 이름을 원래와 다른 한자로 써요. 보배 보(寶)자에 높을 고(高)자를 써요. 외국의 귀한 물건을 가져다주는 장보고를 아예 재물의 신으로 섬겼습니다. 적산명신을 모시는 절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절에는 교토와 오사카의 상인들이 찾아와 장보고를 참배합니다. 그렇게 하면 돈을 잘 번다는 속설이 있다고 해요.
§
군인으로서 능력도 입증하고, 장사를 통해 재력까지 얻은 장보고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벌어놓은 돈으로 여생을 편안하게 살아도 됐을 텐데 그는 안주보다 도전을 선택합니다. 바다를 건너 다시 신라에 가기로 했던 것이죠.
저는 장보고가 바다를 바라보며 꿈을 키웠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바다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람이거든요. 바다를 보며 살던 어린아이가 낯선 땅으로 행하고, 바다를 보며 고민하던 청년이 장사라는 길을 떠올렸던 거예요.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만큼 큰 성공을 거두고 바다를 바라보니 이제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왔어요. 해적들에게 끌려가 노예로 팔리는 신라 사람들이 보였던 거죠. 장보고에게 해적을 소탕해야겠다는 새로운 꿈이 생긴 겁니다.
신라로 돌아온 장보고는 서라벌로 가서 신라의 왕, 흥덕왕을 만납니다. 바닷가 마을에 살던 흙수저가 해외에서 출세해 금의환향한 거예요. 정말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죠? 장보고는 흥덕왕에게 이렇게 제안합니다. “나에게는 경제력도 있고 군사력도 있다. 나에게 권한을 준다면 해적들을 소탕해보겠다.” 흥덕왕은 듣자마자 이를 허락하였습니다. 장보고는 완도 앞바다에 청해진을 건설했어요. 청해진이 세워진 후로는 해적들이 난동을 부렸다는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장보고는 그야말로 바다를 장악했습니다. 강력한 병력이 있었고, 무역업으로 돈도 꾸준히 벌었습니다. 청해진 일대는 거의 장보고가 다스리는 왕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어요. 세력이 커지니 조정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어요. 돈도 있고 군사력도 있어요. 그러면 다음에는 뭘 갖고 싶을까요? 장보고는 명예를 얻고 싶었을 겁니다. 신라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신분이 바뀌지 않는 폐쇄적인 사회였지만, 자신이 배경을 바꿔보고 싶었을 거예요. 그때 기회가 찾아옵니다.
당시 신라는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진골 귀족들의 다툼이 심한 상황이었습니다. 그 다툼에서 밀려난 김우징이라는 사람이 장보고를 찾아옵니다. 왕위에 오르고 싶은 자는 당연히 장보고에게 손을 내밀 수밖에 없어요. 강력한 경제력과 군사력까지 가진 장보고가 밀어줘야 왕이 델 수 있을 테니까요. 두 사람은 일종의 거래를 합니다. 장보고가 김우징을 밀어주는 대신 김우징이 왕이 되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을 것을 약속한 거죠.
혼란이 가득했던 왕실에서는 마침 반란이 일어났고, 장보고는 군사를 보내 그 반란을 진압합니다. 김우징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죠.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습니다. 김우징은 금방 세상을 떠났고, 그 아들이 왕이 되었어요. 장보고는 새로운 왕에게 아버지가 한 약속을 대신 지키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신하들의 반대가 장난이 아니었어요. 중국과 일본에까지 이름을 떨치고 있는 세력가라 하더라도 신라의 진골들이 봤을 때는 그냥 평민입니다. 그런 미천한 집안의 딸을 왕비에 앉힐 수 없다는 거죠. 아비인 장보고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결혼도 못하고 있는 딸을 보면서 속이 문드러지고 이가 갈렸겠죠.
『삼국사기』에는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나오지만, 장보고의 위협이 두려웠던 신라 조정에서 누명을 씌운 거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실제로 신라 조정에서는 염장이라는 자를 장보고에게 보내죠. 장보고는 염장을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염장은 술에 취해 잠든 장보고를 칼로 찔러 죽입니다. 염장을 지른다는 표현이 이 사건으로부터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죠. 바다를 호령하던 해상왕은 이렇게 삶을 마쳤습니다.
한 사람의 성공 스토리만으로 다른 사람에게 똑같은 사고와 행동을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장보고처럼 산다고 해도 장보고만큼 성공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는 장보고의 성공신화보다 그가 본 삶의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싶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을 운명으로 받아들였어요. 노비에게서 태어나면 노비로 살고, 육두품이면 끝까지 육두품인 거예요. 그런데 장보고는 달랐습니다. 어려서부터 타고난 한계를 뛰어넘고자 바다를 건넜고, 나이가 들어서는 단단한 신분제 사회의 벽을 두드렸어요.
장보고 자신의 굴레를 탈피하길 원했던 겁니다. 비록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지만, 그런 시도를 했기 때문에 한중일 삼국에 이름을 남길 만큼 큰 인물이 될 수 있었죠. 저는 장보고가 스스로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장보고는 다른 사람보다 부족한 단점을 메꾸려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장점을 효과적으로 발휘하는 방법을 찾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최대무기가 활쏘기라고 생각했고, 이를 내세워 한계를 돌파하는 기회를 마련했습니다.
삶의 가능성이라고 하면 굉장히 거대한 말 같지만, 사실은 몹시 연약한 말이기도 해요. 다른 사람의 가능성과 비교하면 상처 입기 쉽거든요. ‘저 사람에게는 있는데 나는 없네.’ 라는 시각으로 보면 삶은 쉽게 초라해지고 가능성은 희박해집니다. 그래서 비교는 오로지 나 자신과만 해야 합니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낫기를, 또 오늘의 나보다 내일의 내가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거죠.
우리 모두의 앞에는 푸른 바다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누군가는 그저 바라만 보고, 누군가는 기꺼이 그 바다를 건널 것입니다. 삶의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합니다. 우리의 삶은 어떤 계기로든 변할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꼭 말하고 싶습니다. 삶의 모든 것이 이미 결정나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어도 가능성을 불신하지 말라고. 그러니 우리 쫄지 맙시다. 이미 엉망이라면 바다에 발 한번 담근다고 무슨 일이 일어나겠어요. 그저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한 걸음 내딛어보자고요. 어린 활보가 그랬듯이.
- 이하 생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