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 프로필 이미지
노블코아루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 좋은 글 스크랩 펌) 좋은 삶과 옳은 삶
그대 그리고 나/포항 추천 0 조회 13 14.09.28 12:5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Weekly BIZ 이 카테고리의 다른 기사보기

    [지식콘서트] "철학하는 삶? 내가 정말 무엇을 좋아하는지 고민하는 데서 출발"

  • 이위재 블로그
    산업부 차장
    E-mail : wjlee@chosun.com
    세상이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려고 기자라는..
    더보기

입력 : 2014.09.27 06:17

    이석재 서울대 철학과 교수의 '질문하는 힘'
    철학, 인문학은 질문의 연습
    인생이라는 망망대해 누구를 믿고, 어떻게 살까…
    답을 구하기 어려워도 물음의 긴장을 견뎌내야
    답을 내리기 힘든 상황 남에게 답을 달라고 하면 철학자의 길에서 낙오
플라톤 아카데미가 주관하는 인문학 강연 프로그램 '인문학 아고라 : 어떻게 살 것인가' 두 번째 시간이 지난 23일 저녁 고려대 인촌기념관에서 열렸다. 이날은 이석재 서울대 철학과 교수가 '질문하는 힘 : 철학자가 던지는 다섯 가지 물음'이란 주제로 강연했다.

오늘 강연 제목은 '질문하는 힘'이다. 인생이란 망망대해를 어떻게 항해할까? 누굴 믿고, 뭘 의지해 살아갈 것인가? 의지하고 믿을 수 있는 게 있는가?

그런데 묻기 시작하면 물음은 더 많아지고 답을 구하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질문을 견뎌야 한다. 질문이 중요할수록 답은 쉽지 않다. 손쉽게 답을 얻으려고 할 때 진정한 답은 나오지 않는다. 말하자면 질문을 견디는 힘이야말로 철학의 본질이자 세상을 주체로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덕목이다.

그럼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까? 오래전부터 철학자들이 던져왔던 질문은 크게 다섯 가지를 들 수 있다.

① 무엇이 정말로 존재하는가?

②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③ 좋은 논증(argument)이란 무엇인가?

④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⑤ 이전 철학자들은 어떻게 생각했는가?

이석재 서울대 철학과 교수가 23일 열린 인문학 아고라 강연에서 질문하는 힘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끊임없이 질문하는 연습이 철학, 나아가 인문학을 배우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이석재 서울대 철학과 교수가 23일 열린 인문학 아고라 강연에서 질문하는 힘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끊임없이 질문하는 연습이 철학, 나아가 인문학을 배우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 이태경 기자
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무얼 알 수 있는가

첫 번째 질문은 존재론이나 형이상학의 영역이다. 이 세상은 어떤 것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인가, 아니면 결정되어 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세상이 어떤지,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떤지에 따라 삶의 방식, 목표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주제인 인식론(Epistemology·Theory of Knowledge)은 앎이란 무엇인가를 따져본다. 우리가 과연 진짜로 아는 게 있는지 묻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 감각을 통해 받아들이는 사실, 예컨대 '내가 지금 고려대 인촌기념관 강당에 있다'는 사실은 참된 앎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영화 '매트릭스' 같은 상황을 가정해 보자. 어떤 외계인이 내 뇌에 조작된 전기 신호를 보내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사실은 울릉도 지하 땅굴에 눕힌 채 있는데 말이다. 논리적으로는 따지면 지금 내가 고려대에 있다는 게 확실하기 위해서는, 내가 지금 울릉도 지하 땅굴 욕조 속에 있지 않다는 게 확실해야 한다. 그런데 내가 지금 울릉도 지하 땅굴의 욕조 속에 있지 않다는 것이 확실치 않다. 그러므로 내가 고려대에 있다는 게 확실하지 않다.

무슨 소리냐고 코웃음을 칠 수도 있지만, 당신이 지금 울릉도 땅굴에 누워 있지 않다고 100% 확신할 수 있는가. 우리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늘 살아간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제대로 알고 있는가? 제대로 알 수 없다면, 제대로 살 수 있는가?

세 번째는 논리학이 던지는 질문이다. 좋은 '논증(argument)'이란 무엇인가. 논리학은 어떤 방식으로 논증을 제시하여야 논리적인 설득력이 있는지를 따지는 학문이다.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이 논증은 좋은 논증인가? 설득력이 있는가? 그렇다. 어떤 사람은 아침잠이 없다. 데카르트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데카르트는 아침잠이 없다. 논리적으로 이 논증은 설득력이 없다. 사람 중에 아침잠이 없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중에 꼭 데카르트가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삶이 좋은 것이고 옳은 삶인가

네 번째 질문이 이번 강연 핵심 주제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는 두 가지가 스며들어 있다. 첫째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가? 좋은 걸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면, 좋은 건 뭘까? 둘째는 어떻게 사는 게 옳은 삶인가? 옳은 건 뭔가? 윤리학과 가치론에서 이에 대한 대답을 추구한다.

먼저 좋은 건 뭘까. 그 자체로 좋은 게 있고, 수단이기 때문에 좋은 게 있다. 예를 들어 돈은 그 자체로 좋은 게 아니라 그 자체로 좋은 걸 얻을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에 좋다. 궁극적으로 좋은 건 그 자체로 좋은 것으로, 많은 철학자는 행복을 꼽는다. 그런데 행복이 뭘까?

하버드대 철학과 로버트 노직 교수는 '쾌락 기계(Pleasure Machine)'라는 사고 실험을 제안한다. 그 기계 안에 들어가면 원하는 모든 행복한 경험을 마음껏 느낄 수 있다. 실제 벌어지지 않지만 마치 일어난 듯 느끼게 한다.

유명한 시인이 꿈이라면, 이 기계에 들어가면 그런 경험을 느낀다. 더구나 기계에 들어왔다는 사실도 모른다. 당신이라면 들어가겠는가.

들어가겠다고? 그럼 당신은 특정 심리 상태에 있느냐 마느냐를 기준으로 행복을 결정하는 부류다. 들어가지 않겠다면, 당신에게 행복은 원하는 바가 실제로 일어나는 게 중요하다.

가치 혹은 좋은 것도 다른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좋은 건 좋기 때문에 좋아하는가? 아니면 좋아하기 때문에 좋은 것인가? 곧 가치에 대한 객관주의와 주관주의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인종차별주의 태도를 가진 사람에 대해 주관주의는 잘못됐다는 얘기를 할 수 없다. 가치는 주체의 판단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반면 객관주의에서는 과연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가치는 뭐냐는 질문에 선뜻 답을 제시하기 어렵다. 개인마다, 문화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제 어떻게 사는 게 옳은 삶인가라는 질문을 보자. 옳은 행동의 기준은 뭔가. 서양철학에서는 두 가지 기준이 있다. 공리주의(功利主義·utilitarianism)와 도덕적 의무론(deontology)이다. 공리주의에 따르면, 옳은 행위는 도덕적으로 가장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는 행위다.

방금 멋진 새 차를 뽑은 청년이 길거리에 쓰러진 노인을 보고 지나친다. 차가 더러워지거나 귀찮아서 그럴 것이다. 그럼 이 청년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가. 아마 대부분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전 세계에 탈수증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이 매년 100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들을 살리는 탈수 방지약은 한 알 200원. 그걸 기부해 달라고 부탁하는 손길을 뿌리치면 그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행동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

다음을 생각해보자. 제동장치가 고장 난 전동차에 달리고 있다. 왼쪽으로 가면 수백 명이 다치고 오른쪽으로 가면 몇 명만 다친다. 그렇다면 오른쪽으로 고장 난 전동차를 몰아야 할까.

1894년 오스트리아에서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한 소년을 어떤 신부가 구출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소년이 나중에 커서 히틀러가 됐다. 그럼 그 신부는 소년을 구한 게 잘못한 일인가. 궁극적 결과를 모르는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한 의대생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이 의대생이 가진 장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심장은 남북통일을 이룰 정치인, 허파는 노벨물리학상 후보자, 간은 암을 완치할 의약품을 개발할 명의 등. 그럼 이 의대생은 더 나은 미래의 선을 위해 장기를 이식하도록 강요받아야 마땅한가. 공리주의에 따르면 이 의대생의 장기를 이식하지 않으면 옳지 않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공리주의의 한계는 여기서 드러난다.

그럼 도덕적 의무론의 입장을 생각해보자. 도덕적 의무론에 따르면 결과와 상관없이, 절대적으로 위배되어서는 안 되는 도덕 법칙이 있다. 그럼 "무고한 사람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원칙은 어떤가. 모두 위배해선 안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원칙에 과연 예외가 없는가. 만약 어마어마한 위력을 지닌 폭탄을 테러범이 인질을 잡고 자폭하려 한다고 하자. 이 인질과 테러범을 같이 사살해야 수만 명이 생명을 건질 수 있다고 해보자. 이 인질은 완전히 무고하다. 그럼 사살하면 안 되는가.

대답은 스스로 찾는 것

이 복잡하고 많은 문제에 대해 과거 철학자들은 어떤 답을 냈는가를 탐구하는 게 철학사이다. 과거 대답이라고 해서 물론 정답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답도 없는 질문을 던지는 의미는 뭔가?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답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임에도 우리는 매일 판단하고 답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누구나 특정 목표나 가치(돈, 자아성취, 권력, 사랑 등)를 좋은 것이라 가정하고 그걸 실현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오늘 따져 보니 어느 하나 정말 가치 있는지 분명하지 않은데, 분명한 것인 양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게 아닐까.

더구나 이를 찬찬히 스스로 잘 생각해서, 곰곰이 따져보고 선택한 건가? 아님 부모, 선배, 선생님, 아니면 주변에서 좋다고, 맞는다고 해서 받아들인 것인가?

그러나 답의 길은 쉽지 않다. 남에게 답을 달라고 하는 순간 철학자의 길에서 낙오된다. 스스로 물어보고, 답이 나오지 않을 때 물음의 긴장을 견뎌야 한다. 마지막으로, 누구나 자신에게 던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철학적 질문을 두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나는 정말로 무엇을 좋아하는가?" "나는 정말로 무엇을 잘 하는가?"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함으로써 철학하는 삶의 첫발을 내디디기 바란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