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 일상세계의 숲에서 ‘有’의 재발견
심은섭(시인·문학평론가·가톨릭관동대학교 교수)
1. 머리말
노벨상 문학상 수상의 영광은 밥 딜런Bob Dylan에게 돌아갔다. 그는 시인이며 가수다. 시인으로보다 가수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래서 자금의 논쟁이 심하다. 1941년 생으로 미국 미네소타 덜루스의 유대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올해 나이가 75세를 가리키는 노장이다. 수상 대상자가 의외의 인물로 많은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에게 다소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일반적인 시인과 다른 면을 지니고 있었다. 즉 음유시인이다. 그래서 그의 노래를 ‘귀를 위한 시’라고 스웨덴 한림원 사라 다니우스 총장은 그렇게 표현했다. 음유시가吟遊詩歌는 원래 고대로부터 중세 유럽에 이르기까지 직업적으로 자작시를 노래로 부르던 음악적 장르이다. 동시에 음유시인吟遊詩人은 음유시가를 음악적으로 즐기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그들은 시를 읊으며 각지로 떠돌아다니는 시인이다. 우리나라엔 김삿갓이 대표적인 음유시인이다. 그나마 밥 딜런이 음유시인이라는 점을 위안으로 삼기에는 충분하지는 않지만 퍽 다행스러운 일이다..
어느 누가 “어떤 대상에 대해 시를 쓰면 다 시가 될 수 있을까”라고 질문한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그러면 그 시들이 “모두 좋은 시가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는 ‘유보적’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시라는 것은 풍경·人事·사물에 관하여 일어난 감흥이나 상상 따위를 일종의 리듬을 갖는 형식에 의해 서술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를 쓰는 일이 눈에 띄는 대로, 또는 생각나는 대로 적는 행위가 아니다. 특히 시작詩作에서 유의해야할 일은 작가는 고정관념이나 관습적 사고에 사로잡혀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즉 창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시를 쓰는 시인에게만 적용되는 유의할 사항이 아니다. 어떤 예술인이든 모두에게 적용되는 사안이다.
고정관념과 관습적인 사고는 축어적이거나 또는 진부한cliche 표현으로 빠지기 쉽다는 데에서 시를 쓰는 사람들에게는 공공의 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또 다른 유의할 점은 기계적이거나 피상적인 표현으로부터 탈피해야 한다. 기계적이고 피상적인 표현도 역시 고정관념이나 고착화된 사고에 의해 일어나는 것으로 시작詩作을 할 때 반드시 피해야할 일이다. 사고의 고정화와 고착화는 절대적으로 미적 인식을 불러올 수 없다. 또한 시적 사유가 고착화 되었거나 틀에 갇혀 있다면 일상적인 현상을 설명적, 또는 진부한 표현으로 서술된다는 것 외에도 더욱 심하면 자칫 푸념으로 전락하는 위험에 빠지기 일쑤다.
시인은 어느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나 미지의 세계를 발견하는 예언자적 지성인이어야 한다. 기성시인들이 이미 표현했던 시적표현을 그대로 답습하거나 오래전에 읽었던 시의 한 구절이 생각나서 그것을 그대로 적는다면 이미 시인이 되기를 포기한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시인은 일반인과 다른 자유로운 사유를 가져야 한다. 시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독특한 체험 위에 상상력이 가미될 때 소위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일이다.
모두가 주지하듯이 ‘낯설게 하기’란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러시아의 빅토르 슈클로프스키이다. 그는 문학을 문학답게 하는 문학성은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과 관련된다고 생각했고 이때 ‘낯설게 하기’의 방식에 의해 문학적 특성이 드러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것은 시와 소설 등 그 장르적 특징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드러나지만 일반적으로 시에서는 일상 언어가 갖지 않거나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리듬, 비유, 역설 등의 규칙을 사용하여 일상 언어와 다른 결합 규칙을 드러내고, 소설에서는 사건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플롯을 통해 낯설게 하고 주의를 환기시키는 일이다. 특히 어떤 장르보다도 시는 일상화된 대상을 다른 양상으로 표현하거나 제시함으로써 새롭게 인식시키는 문학적 수법, 즉 ‘낯설게 하기’를 통해 시 쓰기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 ‘낯설게 하기’란 쉬우면서도 녹록치 않는 것만은 사실이다. 일상어에 폭력을 가하거나 비틀기를 시도하라고 형식주의자들은 우리들에게 간곡하게 주문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시는 과학을 상대하여 창조하는 문학 행위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앞에서 서술한 내용은 시 쓰기 장치의 일환으로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일이다. 시는 이런 것 외에 또 다른 조건을 요구한다. 그것이 정화catharsis라는 것이다. 이 정화는 사실 의학용어로써 교시적, 또는 쾌락적으로도 그 실현이 가능하다. 시에 대해 언어를 배설하는 문학이라고 한다면 정화는 ‘감정의 배설’이라는 점에서 같다. 심층적이고 거대한 예술가들의 모방은 청중의 가슴 한 가운데에 공포나 연민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그러한 감정을 추방하고, 한 발 더 나아가 관객들의 찌든 영혼까지 세척한다는 것이다. 즉 비극의 주인공처럼 관객들은 자신과 동일시함으로써 공감하고 삶의 대한 통찰력을 넓힌다는 것으로서의 설명이 가능하다.
서두에서 시작詩作에 관해서 장황하게 사족蛇足을 늘어놓는 것은 이런 기준점을 염두에 두고 홍경희 시인의 시작품을 살펴보고자 함이다. 어찌 보면 신인상에 응모하는 응모자의 당선작을 선정하는 기준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시작품의 평가기준은 평자에 따라 각각 조금씩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대부분 객관적 기준에 의해 동일하다. 따라서 홍경희 시인의 작품에 대한 시평 역시 일반적인 시작품의 평가기준에 따라 살펴본다.
2. ‘有’를 ‘有’로서 고찰
먼저 홍경희 시인은 2014년에 등단을 하였다. 2016년 올해가 등단한 지 2년째이다. 그리고 짧은 시작詩作 기간 동안에 적지 않은 작품을 쓰고 발표하여 지속적으로 시를 써온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또 작품의 완성도가 높고 낮음을 떠나 활동하는 시인으로 그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해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등단과 더불어 문단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시인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등단을 한낱 라이센스license로 생각하는 사람들로부터 벗어났다는 점에서 일단은 그를 믿어 볼만하다. 시인은 무릇 메말라가는 현실에 따뜻한 인간애와 자유로운 정신을 심어주는 역할을 하는 자이다. 전통과 권위에 저항하는 청춘 세대의 향수를 따뜻하면서도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시를 써야 한다. 시인은 예언자적 지성인이다. 단순히 감정을 여과 없이 쏟아내는 사람이 아니다. 적어도 자연이든 일상생활에서이든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의 발견하는 견자見者이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먼저 소재, 혹은 주제를 정하고 그 소재를 적절하게 구성하여 예술적인 표현으로 그 대상, 혹은 세계를 형상화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홍경희 시인은 시적 소재를 일상의 현장에서 찾아낸다. 그리고 그것을 미적 인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시상이 철학적이지도 않다. 일상에서 작고 보잘 것 없는 미미한 사건과 현상을 매끄럽게 시로 승화시킨다. 즉 삶의 체험을 재연하거나 재구성하는 차원의 놀이를 하고 있다. 그래서 홍경희 시인은 ‘유’의 본질을 찾아 원고 위에다 그 ‘유’의 특성을 시화(詩化) 한다.
없다 방이, 방이 보이면 방이 없고 이미 방이 아니다 빈 방이 속삭이는 소리는 소리가 아니다 침대는 아직 잠들어 있고 잠든 침대를 안고 빈 방이 침대에 눕는다 잠든 침대는 잠을 자지 않고 빈 방은 침대를 안고 빈 방을 깨운다 그 빈 방이 거울 앞에 눕고 그것은 방을 거부한다
-《빈 방》 일부(2016, 『시현실』 여름호)
홍경희 시인의 시는 대부분 지상에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질문이다. 다시 말해서 ‘有’를 ‘有’의 근거로서 존재 자체를 찾는다. 존재하지 않는 ‘빈 방은 침대를 안고 빈 방을 깨’우는 형식의 ‘유’에 대한 존재 근거를 찾기도 하며, 그 존재의 자아가 무엇인가를 묻기도 한다. 빈방은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한 ‘그 빈 방이 거울 앞에 눕고 그것은 방을 거부’하는 현상을 통해 ‘유’의 존재를 밝히려고 그는 ‘침대를 안고 빈 방이 침대에 눕는’ 아이러니를 독자들에게 제공한다. ‘빈 방’의 기원은 시적화자의 자아의 환상 속에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존재하고 있는 것과 존재하고 있지 않는 모든 만물의 척도는 인간”이라고 했던 프로타고라스Protagoras의 상대주의가 생겨났으며, “세계 전체는 환상”이라는 고르기아스Gorgias의 반反우주론적 현상론이 발생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기원 문제는 어떤 원인들이 사물들을 있게 하는 지의 문제였다. 따라서 홍경희 시인은 형이상학에서 말하는 모든 ‘유’(존재자)의 궁극적 존재 근거를 시작詩作을 통해 규명하려고 ‘입이 없는 빈 방이 빈 방을 밀어내는 시간’을 즐기는지도 모른다. 요약하자면 홍경희 시인의 시적 사유는 기실 실재는 감각이 도달치 못하고 이성만이 도달할 수 있는 유일유唯一有인 것이다.
홍경희 시인은 「아름다운 변사체」에서는 ‘유’의 궁극적 존재의 근거를 찾으려고 하는 흔적이 발견된다.
소양강 다리에서 죽음을 덮고 있는 그를,
칠성판이 된 몇 개의 자갈
두 눈은 하늘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저녁을 열고 있는 도시,
세상을 잊은 지 오래다
-「아름다운 변사체」 일부(2016, 『시현실』 여름호)
이 작품에서는 ‘유’의 존재, 즉 인간에 대한 ‘有’의 근거를 찾는다. 그 결과는 인간 삶의 시작은 ‘죽음’ 그 자체라고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결국 ‘有’의 존재는 ‘無’에서 찾아야 한다는 자기 고백적 주장이다. 결국 ‘무’는 ‘유’로 결론짓는다. 이것은 홍경희 시인만이 가지는 독특한 현실의 초월적 정신세계이며, 달관의 시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만으로 홍 시인의 시세계를 충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양강 다리에서 죽은 자가 죽음을 덮고 있다고 홍 시인은 진술한다. 이 싯귀를 등식으로 대입하며 ‘죽은 자 = 죽음’이라는 등가等價가 성립되며, 다시 ‘죽음 – 죽음’을 빼며, ‘無의 有’가 되고 ‘有’가 ‘無’다. 곧 ‘무=유’라는 증명이 홍경희 시인이 꿈꾸는 시세계다.
시가 형성되는 과정은 시인의 ‘개인적인 창조활동’이다. 어떤 삶의 태도로 살아왔는가에 따라 그 시인의 시적 가치가 평가된다. 따라서 몰톤R. G. Moulton, 1849∼1924의 제의적 기원설에 따르지 않더라도 문학은 인간의 삶을 떠나서 창조될 수 없다. 그러므로 문학의 하위 범주에 속하는 시詩 또한 인간의 삶과 단절된 상태에서는 설명될 수 없는 특성을 지닌다. 그래서 일상의 삶 속에서 시적 소재를 찾아내는 홍경희 시인이 선택하는 시의 소재가 그래서 매우 보편적이다. 이렇게 일상의 주변에서 얻어오는 시의 소재로 재연된 작품들이 갖는 특징은 친근하다. 「아름다운 변사체」에서 ‘죽음’은 인간과 가장 가까운 생의 일부분이며, 인간의 개개인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이면서 필연적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런 ‘죽음’과 늘 함께 살아왔고 일반 보편화화 되어 왔다.
홍경희 시인이 선택하는 시적 소재가 일반 보편적이라고 해서 결코 가볍다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서 일반 보편적인 것이라고 하여 ‘흔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흔한 것이 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상에서 가장 흔한 것이 있다면 그 중에서 ‘공기’와 ‘햇살’이다. 이런 것을 그렇게 보편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우리들은 정작 귀한 것으로 자각하지 못하며 살아간다. 따라서 더 이상의 예를 들어 설명하지 않더라도 홍경희 시인의 시적 소재의 귀천을 논의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다음의 작품에서도 일상의 삶속에서 얻어낸 소재임을 알 수 있다.
명품신발들이 집으로 몰려온다
헐거워진 늦은 저녁, 그는
의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신음소리를 낸다
그의 등허리로
국적 불명의 소한이 찾아오고
신경 한 올 끊어지는 소리 들린다
-「신용카드」 중반부
제시된 「신용카드」 작품의 ‘신용카드’ 역시 현대인의 일상의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도구인 동시에 수단 중에 하나이다. 이렇게 홍경희 시인은 일상의 생활 패턴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문제점을 비판하거나 혜안을 제시한다. 그는 ‘명품신발들이 집으로 몰려오’고 ‘의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신음소리를 낸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현대인들의 그날 저녁은 ‘헐거워진 저녁’이 될 수밖에 없고 ‘국적 불명의 소한이 찾아오고/신경 한 올 끊어지는 소리 들’려 온다. 이런 일들은 충분히 어느 누구에게나 개연성을 갖는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일반 독자들에게 이런 종류의 시작품은 쉽게 다가가고 친숙함을 갖는다. 동시에 교시적인 기능으로서의 시는 사회적 역할이라는 영역까지 그 지평을 홍경희 시인은 넓혀가고 있다.
인간들에게 어떤 사안에 대해 반성의 기회를 갖기가 그리 쉽지 않다. 이 세상에서 머리를 하늘에 두고 사는 인간들 모두가 제 잘난 멋에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적화자는 문제를 제시하고, 그 문제에 대해 깊은 성찰을 보여준다. 이 점이 홍경희 시인의 가장 돋보이는 시세계이며, 시작詩作을 하는 동안엔 반드시 보여 주어야할 의식의 문제이다. 어떤 세계의 문제점을 던져놓고 그 문제점에 대해 일체 성찰하지 않는 시인은 소위 반쪽 시인과 같다.
독촉장들이 우편함에 군락을 이룬다
검정구두 한 켤레,
흰 등뼈를 드러낸 채 신발장에 갇혀있다
-「신용카드」 후반부
성찰과 반성은 진실이라는 반석 위에서만 세워진다. 그래서 쉬운 행동이 아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태도가 아니다. 성숙된 내면세계라는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는 자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독촉장들이 우편함에 군락을 이룬다/검정구두 한 켤레,/흰 등뼈를 드러낸 채 신발장에 갇혀있다’는 진술은 ‘검정구두 한 켤레’와 대립되는 자에게 대한 경고 메시지나 다름이 아니다.
홍경희 시인은 오랜 기간 동안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왔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에게 그 진실을 전달해야 하는 가르침의 숙련공이다. 이외에도 성립된 선천적 인성의 일면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서두에서 내세운 이유만으로도 왜 그가 성찰의 시를 써온 것인지에 대해 해명이 충분한 것으로 사료된다.
문학의 기원설은 여러 가설 혹은 정설이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몰톤의 제의적 기원설을 통설로 삼는다. 그것은 인간의 삶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원시농경사회의 풍년을 비는 제례의식에서 읊었던 주문(呪文)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또 인간의 탄생이나 죽음, 구애나 혼인 같은 강렬한 감동이나 기도 등에서도 특별한 언어활동이 필요했던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된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농사 등의 집단작업에서 그 리듬을 외쳐 끊임없이 공동체 의식을 확인하기 위해 불렸던 노동요에서도 유래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우리들이 홍경희 시인의 시작품들을 살펴보면서 판단되는 것은 그의 시의식은 제의적 기원설과 관련되어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특히 제의적 기원설에 근거한 시작품 활동은 이성과 감성의 양면성을 동시에 수용해야 한다. 그것은 이성과 감성 속에는 진실이 깊숙이 은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작가의 순간적인 느낌이나 깨달음에서 얻은 진실이 시작품의 완성도를 높여 주는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따라서 홍경희 시인의 시작의 일차적 목표는 ‘진실’을 전하는데 있다. 즉 그는 어느 시인보다 작품의 중심 사상이라 할 수 있는 주제의 명료화를 시도하기 위함이다. 주제는 예술작품 행위의 근본적 의도인 동시에 본질적 개념을 의미한다. 따라서 홍 시인의 시작(詩作) 의도는 명료한 주제 전달에 있으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독자들의 작품 내용이 의도하는 행동을 이끌어내려는 데에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사주를 보면, 너는 누더기 정신을 입고 있어
365일 술잔 속에서 허우적거려
-「명태의 변천사」전반부
시적화자는 「명태의 변천사」에서 ‘명태’를 전면에 내세워 일상의 고단함을 형상하고 있다. 소재는 인간의 삶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명태’를 앞세워 인간의 애환을 진술하거나 묘사하는 이중적 구조로 작품을 끌고 가고 있다. 가난이라는 것은 결코 부끄러움이 아니라 작은 불편함이라고 하지만 홍경희 시인은 「명태의 변천사」에서 정영 가난은 부끄러운 것도 아니며, 불편함이 맞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며 독자들에게 그 해답을 보여주고 있다. 한 개인의 당사주는 ‘결정된 운명’을 말한다. 1연에서는 주인공이 결정된 운명에 의해 삶의 고통을 다스리지 못한 채 방황하지만 2연에서는 ‘색소폰의 울음’과 ‘-25°의 밥덩어리를 넘기는 노점상 촌로’라는 두 사건이 결정된 운명을 개척하는 건전성을 담고 있다. 특히 2연 전반부에서는 ‘죽음’, ‘사형수’, ‘뒷골목’, ‘부도난 수표’, ‘척추 분리증’, ‘알콜’, ‘만취’, ‘혼절’과 같은 부정어로 현대의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제시한다. 이것은 소극적 비판, 또는 우회적인 비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홍 시인은 「명태의 변천사」의 제목에서 이미 복선을 깔고 있듯이 전체적인 시의 흐름은 매우 밝은 쪽으로 끌고 가고 있다. 요컨대 1연은 ‘결정된 운명’을 노래했고, 2연은 결정된 운명을 개척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었으며, 3연에선 결정된 운명이 긍정적인 상황으로 변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이 「명태의 변천사」의 압권은 당연히 3연의 ‘대관령 덕장,/손에 대못을 박고 부활하는 황태를 보았어’이다. 결정된 자신의 운명에 이끌려가는 나약한 자에게 운명도 개척될 수 있다는 의지를 불어넣어 준다. 이 작품은 교시적 기능을 가진 시로 읽힐 수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성공적인 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시의 무게도 적당히 지니고 있다.
인간이 인간 외에 아닌 다른 것과 구별되는 것은 특별하고 다양한 조건이 있지만 그 중에서 시작詩作이 오직 인간에게만 주어진 정신행위이라는 점이다. 시작詩作의 행위자도 인간이며, 그 작품의 내용이 적용되는 대상 또한 인간이다. 따라서 시인은 그 대상자로부터 시인 자신이 요구하는 행동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를 필요로 한다. 이렇게 홍경희 시인은 구조의 복잡성과 고양된 정신세계를 구현하는 시인의 사회적 역할을 그 어느 시인보다 충실하게 이행하며, 또 행동지향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매슈 아놀드의 주장을 인용해 보면 “시는 기본적으로 인생의 비평이다. 시인의 위대성은 그의 인생에 대한 강력하고 아름다운 사상의 적용”이라는 말을 음미하면 그의 시적 경향이 쉽게 파악된다.
행정길 59호에 구두를 신은 대나무가 산다
그 곁에 웃고 있는 백일홍 한 그루
달맞이꽃은 출산을 서두른다
-「03시, 대나무의 한낮」전반부(월간지 2016, 『모던포엠』 1월호)
위의 시 역시 일상적인 삶의 장면들을 재구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시에서 ‘대나무’는 구두를 신은 것으로 보아 ‘행정길 59호’의 한 가장이며, ‘그 곁에서 웃고 있는 백일홍 한 구루’는 생의 동반자이며, ‘달맞이꽃’은 슬하의 결혼을 한 여식이라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에서 이해를 할 수 있듯이 홍경희 시인은 사소한 생활의 현상을 크로키croquis 하듯 순간적으로 스케치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난 시인이다. 시적 대상의 균형·동세·특징 등을 역동적인 찰나刹那로 신속하게 포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포착 능력은 시인에게 있어 필수부가결한 조건이다. 동시에 화가처럼 붓으로, 아니면 목탄으로 스케치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선천적 감각이다. 이것을 두고 ‘이야기 형식의 모형’에 속하는 시상전개를 취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소설이나 드라마의 플롯과 같은 원리에 의해서 쓰이는 모형을 뜻한다.
앞에서 예시를 삼은 「03시, 대나무의 한낮」도 서사적 구조를 지닌 ‘이야기 형식의 모형’에 해당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홍경희 시인은 ‘대나무’의 근면성을 스토리형식, 즉 이야기꾼이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주제를 노래하고 있다. 홍 시인을 더욱 두 눈을 뜨고 관찰해야 하는 부분이 시의 내용을 보편화하는데 성공적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시는 매우 주관적이다. 따라서 작품을 보편화하는 데 많은 시인들이 실패하는 하는 사례를 많이 보아왔고, 그런 유類의 시는 독자들로부터 외면당한다는 안타까움을 지니고 있다.
새벽 3시, 서걱거리는 대나무,
그의 심장에선 탱크 엔진소리가 들린다
성황당 상수리나무들이 일제히 깨어난다
-「03시, 대나무의 한낮」 후반부
일단은 「03시, 대나무의 한낮」이 보편적으로 상황을 전개하고 있다는 정황은 후반부의 표현에서 증명된다. 분명한 것은 ‘대나무’가 시적화자와 특수한 관계라는 것은 이 시의 정서상 그렇게 통념될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시의 작품이 일반 보편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대나무’를 개인화를 하지 아니하고 주변을 대표하는 ‘성황당 상수리나무들이 일제히 깨어난다’고 표현한 점이다. 이 시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대나무’를 시적화자 자신과 결부시키지 아니하고 주변의 자연물과 결부시킨 부분이 이 시를 성공적인 시로 만들 수 있었던 까닭이다. 따라서 시가 주관성을 띤다고 하여 시작품을 자기화하고, 그것은 일종의 신변잡기로 변질시키는 현상을 많은 시인들에게서 흔히 보아왔다. 이런 점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좀 더 상세하게 「03시, 대나무의 한낮」을 분석해보면 ‘대나무’는 자신의 가족을 위해 03시에 일어나 쟁기질 소리로 ‘행정길’ 주변에 거주하는 서민들의 단잠을 깨우고 있다. 여기서 단잠은 단순한 단잠이 아니다. 곧 그들의 의식을 깨우는 일이다. 또한 ‘대나무’는 ‘태양’, ‘해바라기’, ‘실개천’, ‘행정교’, ‘두더지’, ‘고라니’들과 함께 어울리며 공동체 생활의 면면을 보여주고 있다. ‘대나무’가 함께 동행하는 대상들이 모두가 사람이 아닌 ‘자연물’ 또는 ‘물상’들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03시, 대나무의 한낮」은 우연히 아닌 필연적으로 따뜻한 시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나무의 발자국 소리에 ‘일찍 잠든 파출소는 생쥐처럼 눈을 뜬다’고 부조리한 이 사회의 제도를 비판하는 의식도 보여준다.
한 편의 시는 곧 그 시인이다. 그런 관계로 「03시, 대나무의 한낮」은 곧 홍경희 시인이다. 그래서 시인에게는 독특한 색깔을 가진 그의 시세계가 있다. 다시 그 시세계는 그 시인의 내면세계이며 사유의 결과로 발생된 세계관이다. 또한 시어의 선택도 시인의 사유에 의해 결정 된다. 시어는 표현의 수단이며 시작詩作의 도구로서 시가 성립되는 요소가 된다. 동시에 시는 시인의 사유의 결정체이다.
고압볼트의 그리움, 클릭하려고
유년의 플러그에 기억을 꽂는다
기억들이 재생되지 않는다
한 낮이 탄다 저녁이 가라앉고 여자가
탄다
뒷골목을 배회하던 바람이 내일의
신앙을 태우고
길은 어둠을 태운다 탄다
열 손가락의 신음소리에 여자가
탄다 생의 한파에 몸 속 찌든 언어가 탄다
-「맨살 타는 여자」중반부(웹진 2016,『시인광장』, 7월호)
어떤 사람이든 상처 난 영혼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마는 홍경희 시인도 시인이기 전에 하나의 인간이며 여자다. 따라서 그도 흔들리는 날도 있었으리라. 그 흔들리는 아픔을 고스란히 언어로 형상화한 것이 「맨살 타는 여자」다. 무엇이 그토록 시적화자를 ‘고압볼트의 그리움, 클릭하려고/유년의 플러그에 기억을 꽂’아도 무수한 그 ‘기억들이 재생되지 않’을까. 그런 탓에 ‘청춘이 회수되지 않는 오후’에 그는 붉은 여자가 되고 한 여자로서 영혼을 태우고 있다.
일상의 삶속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세계를 발견하던 서정자아는 어느 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를 가져본다. 이것은 일상의 현상들을 탐구하던 시적태도가 갑자기 자신의 한 쪽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이다. ‘난파선을 예인하지 못한 등대가/어둠을 태우지 못하듯/내 정신의 언덕을 태우지 못하는 밤’에 퍼소나persona는 자신의 ‘운명과 운명이 극렬하게 싸우며 타’는 광경을 목격한다. 자신이 자신의 속을 들여다볼 줄 안다는 것은 곧 ‘타자가 되는 것’이다. 내가 나로부터 벗어날 때 비로소 ‘타인’이 되는 것이다. 내가 내 자신을 뒤돌아 볼 줄 모를 때 ‘나’는 ‘나’ 속에 머물러 있고, ‘나’ 자신이 ‘나’를 들여다 볼 때 비로소 ‘나’라는 존재는 ‘타인’이 되며, 그때에 완전한 ‘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완전한 ‘나’로 탄생될 때 새로운 세계와 미지의 세계를 발견할 수 있고, 그때를 견자로서 시인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다.
홍경희 시인은 지금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면 ‘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잃어버린 정체성 찾기에 혈안이 되어있다. 결코 「맨살 타는 여자」를 자칫 한 여자의 생의 울음소리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이해한다면 우리들은 홍경희 시인의 시세계를 훼손하는 공모자가 될 뿐이다. 다시 말하면 ‘한 낮이 탄다 저녁이 가라앉고 여자가/탄다/뒷골목을 배회하던 바람이 내일의/신앙을 태우고/길은 어둠을 태운다’는 것은 홍 시인이 자신을 해체하고 있는 것이다. 이 해체는 결코 파괴destruction가 아니라 새로운 건설construction의 의미하는 시작詩作이다.
해체를 통해 새롭게 탄생하려는 홍 시인의 몸부림은 ‘언어가 탄다’는 의미이고. 이 의미는 시인으로서 언어를 조탁하는 연금술사가 되고자 하는 뼈를 깎는 와신상담의 행동적 양상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다음 시에서 홍경희 시인은 또 다른 사유로 건설의 의미를 지닌 자신을 해체하고 있다.
목이 달아났어 내가 시가 되고 싶을 때
-「네가 나를 분열시켜」 1연(2015, 『시인정신』, 가을호)
위의 시를 면밀히 살펴보자. 홍 시인은 ‘목이 달아났어 내가 시가 되고 싶을 때’라고 했다. 자신이 시가 되고 싶을 때 자신의 목이 달아났다는 얘기다. ‘목이 달아났다’는 표현은 현실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현상들이다. 즉 쉬르레알리즘surrealism의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결국 「맨살 타는 여자」에서 「네가 나를 분열시켜」 목이 달아나는 현실을 초월하고 있다.
뒷모습을 설거지 하며, 나는
각을 감춘 접시들과 함께 노래를 불러
청소기가 「오, 솔레미오」를 부를 때
나의 두 다리는 균형을 잃어
폐를 통과한 숨소리 멈춘 먼지들도
햇살을 씹으며 춤을 추고 있어, 그 시간
한 여자는 원고지 위를 걸으며
오래 된 오토바이 엔진소리를 내고 있어
-「네가 나를 분열시켜」 2연
시적화자는 ‘나’를 해체하고, 이 해체는 새로운 건설이고 새로운 건설은 ‘네가 나를 분열시’키는 일이다. 다시 ‘네가 나를 분열시’키는 일은 ‘한 여자는 원고지 위를 걸으며/오래 된 오토바이 엔진소리를 내’는 일이다. ‘나를 분열시’키는 ‘너’는 누구인가. 이것은 시인이 동경하는 세계이고, 이 동경하는 세계를 담을 ‘詩’이라는 괴물이다. 오토바이 엔진소리를 내며 원고지를 걷던 한 여자는 3연에 와서 또 다른 분열을 시도한다. 그것은 ‘믹스커피’이고 ‘89.1FM방송’이고, ‘클라리넷 목소리의 DJ이며, 끝내 그 모든 것들은 목가牧歌이다. 그것은 홍 시인이 동경하는 세계이며, 즉 대상들을 동일화하려는 노력이며 증언이다. 그 방법은 가을을 사냥하는 활이 되는 일이며, ’네가 나를 분열시‘킬 때 가능한 것이다. 새로운 건설을 위해 화자는 분열을 시도한다. 이것은 자신을 해체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홍경희 시인은 자기 해체를 통해 끝임 없는 변신과 사유를 수정하려고 노력한다. 이럴 때만이 ‘네가 나의 목을 조르는 시간’으로부터 탈피가 가능하다는 이유다.
내 몸은 주인 없는 빈 수레가 된다
허공을 배회하는 폐비닐 같은 정신, 가끔
눈이 충혈 된 석양처럼 걸었다
나사못 끝에 서 있는, 지금
지붕이 사라지고 하얀 절벽이 걸어온다
허공을 닮은 허공이다,
-「나사못 끝에 서서」 2연(2016, 월간지「모던포엠」, 6월호)
예시로 삼은 시를 외연적으로 분석할 것인가, 아니면 내재적으로 분석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작품이다. 외연적으로 바라본다면 시어나 형식 등과 같은 것을 주로 문제 삼아야 한다. 그러나 내재적으로 비평의 지평을 열어갈 때는 정작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또는 독자들에게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려고 하는가를 규명해야한다. 따라서 「나사못 끝에 서서」를 내재적 분석 방법을 선택하여 비평을 하고자 한다. 그것은 외재적 분석 방법으로 비평을 할 때 자칫 주정시主情詩, 즉 협의적인 공간으로서만 비평을 할 수밖에 없는 제한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작품을 주정시로 비평을 한다고 해서 어떠한 문제가 발생하거니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떠한 작품이든 그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이 모두 다르다는 이유를 염두에 두고 미리 밝혀 두는 까닭이다.
3. 가능태現實態를 현실태可能態로 변화
홍경희 시인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시의 색깔을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환원하면 등단의 시기로 보아 완전한 시의 색깔이 나올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점이다. 지금은 자신의 색깔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나사못 끝에 서서」를 주정시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 시는 정작 성찰의 시에 가깝다. 2연에서 주정시로 빠질 듯한 정서를 표출하다가 3연에 와서 자신이 의도했던 모습을 드러낸다. ‘석양이 석양으로 가는 시간들이, 나를/성경책 속으로 걷게 했’으며, ‘바람 한 점 없어도 나의 풍차는 돌았다’는 것이다. ‘삭풍에 입술이 얼어도 웃는 코스모스/두들겨도 어머니의 목소리를 내는 범종이었다’고 술회한다.
2연에서 홍경희 시인은 불완전한 자신의 모습을 규정하다가 3연에 와서 완성되어 가는 자신의 모습을 환기하고 있다. 이것이 낭만적 아이러니의 기법을 시적 장치로 활용하고 있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즉 낭만적 아이러니는 전반부에서 환상을 보여 오다가 갑자기 그 환상을 깨는 일종의 수사법을 말한다. 이런 시는 독자들에게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흡입하는 매력을 가진 시작품이다. 그래서 앞에서 언급했듯이 「나사못 끝에 서서」를 주정시로 단정 짓는 일에 염려를 했던 것이다. 이런 종류의 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서정적 주지시主知詩로 명명함이 옳을 것이다. 따라서 홍경희 시인이 앞으로 해결할 과제는 자신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가져야 한다. 이것이 가장 시급하게 요구되는 필요성이며, 그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홍경희 시인이 진술한 것처럼 ‘납덩이 얼굴의 두루마기, 핏기가 돌았다/함박꽃도 피었다/내 몸속으로/살이 통통 오른 봄이 저벅저벅 걸어’오는 날을 우리들은 기대한다.
하현달이 반복적으로 떠오른다는 것에 대한, 낙엽이 시월에만 죽어간다는 것에 대한, 퇴적암처럼 쌓인 붉은 말들이 식도를 넘지 못하는, 파도를 거부하는 방파제에 대한 교만함, 정신의 뜰에 핀 꽃들이 향기가 없는 것에 대한, 사랑에 대해 인내심을 강요하는 분노, 홧뼝火病을 경매에 붙이지 못하는 나와, 웃음이 따스한 호수와, 천연덕스러운 갯바람과, 국적 없는 뭉게구름의 자유에 대한(‧‧‧‧‧‧)
-「기억의 반란」2연(2015, 『시산맥』가을호)
홍경희 시인의 「기억의 반란」 중에 2연을 예시例示로 삼는 것은 그의 시적의식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유’는 시인 ‘자신’이다. 앞에서 언급하기를 시인은 ‘타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타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먼저 찾아야 한다. 즉 가능태現實態를 현실태可能態로 변화시켜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랭보의 견자론의 입장에서 ‘나는 타자다’라는 의미가 성립될 수 있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이와 같은 유의 내적 구조에서는 유의 다수성과 변화가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시인 자신이 ‘존재’의 다수성과 변화하는 에너지는 유동하는 사유에서 비롯된다. 이것이 상상력이며, 상상력은 막강한 작품생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또 상상력은 시작詩作의 근본원리가 비논리라는 주장에 바탕이 된다는 사실이다. 실로 상상력이 없는 시작활동은 있을 수가 없다. 물론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는 것을 전제로 할 때의 조건이다. 이러한 명제들을 놓고 「기억의 반란」을 살펴보자. 이 작품의 특징은 시인의 사유가 머물지 않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저기로, 저기에서 여기로 이동한다. 그가 사유하는 이동의 형태가 직선이 아니라 횡적, 혹은 횡단의 이동을 필수 조건으로 전제로 한다. 즉 유목nomad적 사유다.
홍경희 시인의 노마드적 사유는 새로운 것을 생산하거나 확산시킨다. 이 새로운 것, 다시 말해서 낯선 것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대한 관심을 불러온다. 그는 새롭고 낯선 것만을 고집하는 것 외에도 다원주의 정신에 푹 절여져 있다. 이런 사유를 가진 그는 무산계급이며 평등의 원칙을 고수한다. 또한 수목적 체제를 비판하며 그것의 반대편에 서 있다.
예문의 「기억의 반란」은 리좀rhizome이론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다. 홍경희 시인의 시적 사유는 정형화되지 않고 근원에 집착하지 않으며, 새로운 연결과 무한한 창조와 가능성을 우선으로 한다. 그리고 이분법적, 혹은 서열위주에 비유되는 나무형arborescence과 구분된다. 즉 영토화에서 탈영토화의 시도이다. ‘하현달이 ~ 대한, 낙엽이 ~ 대한, 퇴적암처럼 ~ 하는, 파도를 ~ 대한 교만함, 정신의 ~ 대한, 사랑에 ~ 대한’에서 노마드적 사유를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열린 사고는 경색된 시적 표현을 줄이고 독자들에게 전달한 의미망의 구축을 촘촘하게 만든다.
시인들은 왜 이토록 노마드적 사유 쪽으로 뿌리를 내릴까? 그것은 모두가 불안에서 오는 것이며, 무거움에서 벗어나려는 가벼움의 추구이며, ‘인간-형식’ 또는 ‘주체-형식’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다. 인간은 형식에 갇혀 있는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행동이며, 주체 역시 형식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위대한 긍정적 사유로 정의하는 까닭이다. 이 일에 홍경희 시인도 예외일 수 없다. 주체의 예속화와 주체의 영토화로 인한 불안의 상승은 유목적 사유를 불러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사유로 인하여 어떠한 대상과도 다양한 연결접속에 의한 계급타파라는 다원주의적 결과를 기대하는 환원주의적 사고방식의 무한한 진행형이다. 환원하면 홍 시인은 수목적 사유의 기본 도식이라 할 수 있는 전통적인 내용과 형식의 이분법,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형식과 질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중분절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홍경희 시인의 시 열편 중에 마지막으로 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작품이 「그녀의 실루엣」이다. 「그녀의 실루엣」이라는 작품이 곧 홍경희 시인 ‘그녀의 실루엣’이기 때문이다.
창문들이 서늘한 요양원 휠체어에 앉아 천사나팔꽃처럼 웃고 있다 비문이 없는 무덤 쪽으로 그녀의 긴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그녀의 실루엣」 후반부(2015, 『시인정신』 봄호)
시인이 시를 쓰는 이유가 무엇일까. 매 순간들이 사물이나 현상, 그리고 시인의 심성의 운율에 끊임없이 다가오면서 어떤 해답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시인은 자신의 한계 바깥으로 촉수를 이동시키려는 습성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일반적인 사람의 입장에서 시를 써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하면 광기狂氣가 접신接神된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시인은 사람이 아닌 특별한 사유의 얼굴을 가져야 한다.
시 작품 속의 ‘그녀’는 홍경희 시인에게 평등하지 못한 이 사회의 자화상을 그려달라는 요구를 시작품이라는 수단으로 그 해답을 내놓은 것이다. ‘그녀’는 홍 시인에게 직접으로 그 해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 불평등함을 시인이 직접 찾아내는 일이 ‘그녀’가 필요로 하는 해답과 또한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유용한 것’, 곧 반드시 필요한 정신의 선물이다. 이 유용한 정신의 선물이라는 것은 자아와 세계, 현대와 과거, 보수와 진보 등의 갈등을 해소하는 일이다. 비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비참한 운명을 보고 간접 경험을 함으로써, 자신의 두려움과 슬픔이 해소되고 마음이 깨끗해진다는 과거의 전통적인 카타리시스catharsis는 이미 죽은 정화의 방법에서 새로운 정화의 방법을 찾아나서야 하는 것이 시인이다. 그럴 때 비로소 ‘창문들이 서늘한 요양원 휠체어에 앉아 천사나팔꽃처럼 웃’을 수 있으며, 비문의 긴 그림자가 드리워진 쪽으로 머리를 둘 수 있게 된다.
4. 맺음말
지금까지 홍경희 시인의 시 열편을 골라 살펴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들이 모든 ‘시’를 ‘시’라고 부를 이유와 모든 ‘시’를 ‘시’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를 깨닫게 해주었다. 먼저 시인은 시작詩作을 할 때 정념情念을 거부하고 감정의 유출을 철저히 차단시켜야 한다. 대신 일상 속에 있던 것들로부터 발견한 독특하고 새롭고, 미지의 세계를 형상화해야 한다. 이것은 시를 쓰는데 있어서 창의성을 제 1원칙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 흔히들 시를 쓰는 일이 영혼을 닦는 일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합리화에 불과한 해답이다.
시 쓰는 일은 적어도 시작詩作에 사회가 반영되는 것에 목적을 두어야 한다. 한용운 선생님이나 윤동주 시인같이 지사적 정신은 지금 시대에서는 나올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부조리한 사회의 비판, 다원주의의 추구, 불평등에 대한 저항 등과 같은 사건에 대해 침묵해서는 안 된다. 이에 홍경희 시인의 시세계는 다양성에 있다는 해석을 무리 없이 내놓을 수가 있다. 시적 화자가 가지고 있는 심상의 구체적 제시를 통해 우리들의 생각을 행동 지향적으로 이끄는 그 무엇인가를 품고 있었다. 「아름다운 변사체」에서는 일반적인 죽음이 아니라 피지배계층의 죽음이 곧 지배층에 의한 것으로 보는 비판적 시적태도를 보여주었고, 「신용카드」에서는 인간의 삶 속에서 필요 이상의 욕망의 대가가 무엇인가를 일침 했다. 비판적 사고에 의한 부도덕한 사회의 정화라는 의미를 가진 시세계도 보여주었지만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시인의 입장에서 성찰하는 시적태도를 찾아볼 수 있었다.
한 인간이 성찰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성찰은 성찰하는 자의 회의懷疑에서 출발한다. 「명태의 변천사」와 「나사못 끝에 서서」, 「아름다운 변사체」와 같은 작품에서 주변의 대상과 함께 성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 매우 인상 깊다. 어찌 보면 홍경희 시인의 시적토대는 일상의 현상과 제도, 그리고 자연에 대한 성찰에 근거하는지도 모른다. 그 만큼 시인의 관점에서 의심나는 것은 철저하게 의심한다는 말이다. 「맨살 타는 여자」, 「네가 나를 분열시켜」, 「빈방」은 자아탐구의 시 쓰기이다. 우리들은 가끔 자아를 잃어버린 시간을 가질 때가 있다. 곧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순간이 있다. 한번 나의 정체성을 뒤돌아보는 시간이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이처럼 홍경희 시인은 작품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묻기도 하고 가끔 잃어버린 것에 대한 동경과 치유의 방법을 찾기도 한다. ‘자아’는 바쁘게 사는 현대인에게 특히 시급하게 주목을 요하는 주제이다. 이렇게 시대적 요구를 차치하더라도 개인의 입장에서도 중요한 문제이다. 따라서 홍경희 시인은 이런 문제들을 일상의 현상에 비유하여 자연스럽게 자아 찾기를 시도한다. 자아 찾기를 달리 말하면 자아실현이며, 완성된 자아 만들기이다. 즉 그가 탐구하는 의미는 “나는 누구인가Who am I?“를 묻는 것이 아니라 “나는 무엇인가What am I?”를 찾는 것이다. 그래서 자아찾기, 혹은 자아탐구는 대상이 없고 오직 주관만이 존재한다. 특히 「빈방」은 순전히 자아탐구의 대표적인 시이다. 그가 자아탐구에 열중하는 이유는 ‘타자는 지옥이다.L'enfer, c'est les Autres’라는 장폴 사르트르의 말을 이미 이해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생을 영위함에 있어 타인의 시선視線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홍경희 시인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 외로운 푯대 끝에서 소리 없이 아우성치는 유치환 시인의 말했던 ‘깃발’처럼 흔들릴지라도 오로지 자신만의 시선으로 시를 쓴다. 이것에 대표적인 작품이 「03시, 대나무의 한낮」이다. 가령 수영장에서 수영복을 입고 타인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는 것과 같다. 예술의 창작에 있어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일이 곧 창의성을 떨어뜨리는 원인이다. 자신의 시세계를 완성하기 위해 우직하게 외로운 한 길의 시선을 가져야 한다.
문학의 경향을 일반적으로 두 부류로 분류한다. 하나는 순수문학이고 또 다른 하나는 참여문학이다. 전자와 후자를 놓고 진정한 문학의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논쟁은 아직까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 진위 여부를 가리는 일이 이 지구의 역사가 이어지는 한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문제를 놓고 홍경희 시인에게 이 시대가 진정 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해 ‘쓴다는 것은 무엇’이며 ‘누구를 위해 쓰며’, ‘무엇을 위해 쓰는가’를 작가들에게 물었던 장폴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저서에서 찾는다.
장폴 사르트르는 그 저서에서 글쓰기는 전투를 벌이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것은 적들을 정확하게 조준하여 방아쇠를 잡아당기는 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무엇인가를 ‘위하여’ 싸우는 전투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의미를 수용할 때 글쓰기는 하나의 기도(企圖, 의도된 기획, une entreprise)라고 할 수 있다. 사르트르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분명한 의도를 가지는 행위이라고 했듯이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시를 써야 한다. 그러므로 홍경희 시인도 분명한 시작詩作의 목적을 가지고 시를 썼으면 하는 주문과 함께 지금까지 시 열편에서 얻은 결론은 한 편의 시로 우리들을 행복한 정신의 요람으로 초대하고 있다. 또한 홍경희 시인은 육체 가운데서 시로 산다.
벌써 단풍객들이 물려오고 몰려가는 시월이다. 또 한 순간이 떠나가고 우리들의 손아귀에 들어 있는 것은 해독되지 않는 2016년의 생의 암호 몇 줄만 불안하게 놓여 있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