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배사 창원지회에서 신정역주 이충무공전서 읽기 8회차를 진행하였습니다.
■ 일시 : 2024. 4.16. 화요일 PM.6:30~8시
■ 장소 : 이순신리더십국제센터 노량관
■ 읽은 부분 : 이충무공전서 2권 138쪽 ~ 343쪽.( 이충무공전서 권7. 난중일기3 - 을미년(1595), 6월~병신년(1596)까지)
■ 참석자 : 내이포판옥선, 동자갑선, 손자병법, 진해현감, 웅천현감, 홍패, 미신불사 총 7명
■ 다음 모임 안내 : 2024. 5. 21 화요일 PM 6:30~8시
■ 장소 : 이순신리더십국제센터
■ 읽어올 분량 : 신정역주 이충무공전서 권8 (난중일기4-정유년, 무술년) 이충무공전서 2권 (346쪽~끝까지)
이번 모임에서는 각 개인들의 사정이 있어 참여율이 저조했습니다. 하지만 계획대로 학습은 이어졌지요.
을미년과 병신년 일기의 특징은 이순신의 일상이 잘 나타나 있다는 점입니다.
태풍 전야의 고요함, 정적, 마지막 여유, 이순신의 마지막 휴식 같은 시간으로 압축할 수 있다네요. 웅천현감님의 유려한 언어표현으로 을미년과 병신년의 분위기 전체를 한눈에 느껴볼 수 있지요.
정유년에 체포되고, 출옥 후 백의종군하며 수군재건을 하기 위한 충전?의 시간으로 봐야 할까요?
을미년과 병신년의 일기에는 활쏘기와 술을 마시는 장면이 가장 많이 나옵니다. 풍년이 들어 술을 많이 빚게 되고, 따라서 술을 많이 마시게 된 듯하다고 합니다. 몸이 안좋다는 표현이 많이 나와 건강이 많이 안 좋은 것이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했었는데 건강문제가 심각해 보이는 장면이 많이 보이는 것도 이유가 술 때문이라고 콕 짚어주셔서.."아하~~이래서 혼자 읽는 것과 방향을 잡아주는 것이 다르구나" 라고 생각했어요. ㅎㅎ
난중일기에는 망궐례를 하는 장면이 자주 나오죠. 주로 궁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근무하여 직접 왕을 배알할 수 없었던 관찰사·절도사·목사·부사 등의 관리들이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지방 관청이나, 왕과 궁궐의 상징인 궐패(闕牌)를 모신 객사 등에서 대궐을 향해 예를 올렸죠. 망궐례를 궁금해하는 회원이 있어 유튜브에서 망궐례 재현하는 동영상을 찾아 망궐례 부분만 잘라서 올립니다.
일기 내용을 짧게 정리하기 어려워 웅천현감님께서 강조하신 일기 부분과 설명 위주로 공유합니다. 부족한 부분의 보완(제가 확실하게 알아듣지 못한 부분을 명확히 하기 위해)을 위해 박종평,『난중일기』(파주:글항아리,2021) 책의 내용을 일부 옮겨 적은 부분도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난중일기(亂中日記) 3
을미년 1595년, 선조 28, 이순신51세
<6월> 강화가 결정되다
초1일(임인) 늦게 개었다. 권[권준] •박[박종남]·신[신호] 세 조방장과 웅천현감 [이운룡] ·거제현령[안위] 등과 함께 활 15순을 쏘았다. 선 수사[선거이]는 이질 때문에 쏘지 못했다. 새로 번을 드는 본영 아전이 들어왔다.
⇨ 세 조방장 : 이순신은 자신의 부하가 쫓겨나면 조방장으로 기용함. 해군은 과거나 현재나 패밀리 개념이 강한데 지휘관의 의도를 부하가 바로 파악해야 팀웤이 잘 되기 때문.
⇨ 선거이가 이질을 앓고 난 후 나중에는 중풍 증세를 보인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역병으로 가장 많이 죽었다고 한다.
■ 16세기 인물인 이문건의 『묵재일기』에서 정리한 통계에 따르면, 일기 속 사망자 129건 중 33건이 전염병인 역병, 16건이 천연두, 이질과 종기가 각각 13건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출처: 박종평,『난중일기』(파주:글항아리,2021),338쪽)
⇨ 번은 2개월에 한 번 교대함.
초9일(경술) ...저녁에 원수 군관 이희삼이 임금의 유지를 가지고 왔는데, 조형도가 거짓으로 장계하기를, "수군 1명에 하루 양식 5홉씩과 물 7홉씩을 준다."라고 하였다 하니, 세상일이란 참으로 놀랍다. 천지에 어찌 이같이 무망한 일이 있을 것인가. ㅇ 어두울 녘에 탐선이 들어왔는데, 어머님이 이질에 걸리셨다니 걱정이 되고 눈물이 났다.
⇨ 이날 일기와 관련한 내용이 『선조실록』 선조 28년(1595) 5월 19일에 나온다. 비변사 낭청 조형도가 영남을 다녀와 한산도에서 수군 상태를 보고하면서 이순신을 비판했다. 조형도는 수군 격군들에게 하루에 쌀 5홉과 물 7홉을 주고 있고, 군사들이 병들면 물에 밀어넣고, 굶주리면 산기슭에 버려 한산도 온 지역이 귀신 동네와 같은 상태다. 또 섬 안에 샘이 많지 않고 진영과 멀리 떨어져 물 긷기가 불편해 마음대로 쓰지 못해 얼굴을 씻거나 빨래도 하지 못해 더러운 상태라 서캐가 물고 역질이 생겨 죽는 것이라며, 이는 이순신이 군사를 돌보지 않고 동고동락하는 의리를 모르는 행동이라고 했다.
13일(경진) 13일(갑인) 흐림.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을 잡아오라는 명령이 이미 내려오고, 그를 대신하여 권준이 되었으며, 남해 기효근은 그대로 유임되었다고 하니 놀랄 일이다. 늦게 배 수사를 만나보고 돌아왔다....
⇨ 배설이 잡혀간 것은 『선조실록』 선조 28년 (1595)7월 14일 기록에 따르면, 도원수 권율의 명령을 위반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20일(신유) ...종일 수루에 앉았다가 충청수사가 말이 분명하지 못하다는 말을 듣고, ....
⇨ 중풍 증세를 보임
25일(병인) 맑음, 원수의 공문이 들어왔는데, 세 위장을 세 패로 나누어 보낸다고 했다. 그리고 소서행장이 일본으로부터 와서 화친할 것을 이미 결정했다고 했다. ...
<7월> 거제의 적이 철수하다
초1일(임신) .... 혼자 수루 위에 기대어 생각에 잠겼다. (내일은 바로 아버님의 생신일이다. 슬픔과 그리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초7일(무인) ... 경상우병사[김응서]에게 온 임금의 유지 내용에 ...... 김응서가 어떤 사람이기에 스스로 회개하여 힘쓴다는 말을 들을 수가 없는가. 만일 쓸개 있는 자라면 반드시 자결이라도 할 것이다.
☞ 상유님 질문 : 경상우병사가 선조에게 그렇게 질타를 당했고, 나중에도 고니시 요시라 간계도 김응서가 숙주가 되어 결국, 부산으로 원정 전 쫓겨 갔다가 기진하여 칠천량에서 피항하던 중, 기습당해 패폭 (조선 수군, 병선 전멸 수준, 조선 수군 조직 와해) 노량해전까지 영향을 받아서 이순신 전사까지 이어졌는데
1) 어떻게 김응서가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2)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
⇨ 김응서는 육군 의병장으로 출세한 사람이다. 그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통역으로 이중간첩이었던 요시라와 접촉하면서, 요시라의 주선으로 조정의 승인 없이 무단으로 고니시 유키나가와 강화 회담을 했다. 처벌 문제가 제기되었으나, 온건파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얻은 정보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 선조가 김응서를 오히려 높이 평가했고, 요시라를 활용하자는 김응서의 주장으로 조선에서는 요시라에게 정3품 절충장군과 은자 80냥까지 주면서 이중간첩으로 활용하려 했다. 요시라가 제공한 허위정보로 인해 1597년 이순신이 파직과 백의종군을 하게 된다.
다른 비슷한 예로 선조는 강화 얘기를 꺼내면 선참후계(군율을 어긴 자를 먼저 처형한 뒤에 임금에게 아뢰던 일)하겠다고 공언하였지만 강화를 해야 한다는 상소를 먼저 올린 이정암을 관찰사에서 파직시키고 전주 부윤으로 임명한다. 명나라가 강화할 기미를 보이니까 상황에 따라 자신의 말과 다르게 처리한 것이다. 이 사례처럼 김응서는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김응서는 항왜들을 통솔하는데 능력이 있었던 인물이다. 유명한 항왜 출신 장수인 사야가 김충선 역시도 김응서 휘하에서 종군을 하기도 했다.
김응서는 정묘호란 직전에 일어난 명•청 전쟁 때 광해군의 밀서를 가지고 강홍립과 함께 파병을 간다. 후금에 대한 조•명 연합군의 대규모 정벌전에서 조선군 부원수로서 종군하였으나, 후금군에게 대패하였고, 당시 도원수였던 강홍립과 함께 후금의 포로가 되었다. 후금쪽에서 조선과 내통한다는 이유로 처형했다.
김응서는 후에 이름을 김경서로 바꾸는데(계축년 1613년 광해군 5년) 그 이유는 역적과 이름이 같다는 점 때문이었다.
13일(갑신) 맑음. 가리포(이응표) 및 우수사(경상우수사 권준)가 함께 왔는데 가리포가 술을 바쳤다. 활 5순과 철전 2순을 쏘았다. 나는 몸이 몹시 불편했다.
21일(임진) ... 식후에 태구련(이충무공 장검 (보물 326호, 1594년 4월 제작)의 슴베에 각인된 이름은 '태귀련太'이다.)과 언복이 만든 환도를 충청수사[선거이]와 두 조방장[박종남·신호]에게 각각 한 자루씩 나누어 보냈다.
28일(기해) .... 미시[오후 1~3시]에 어사 신식이 진에 도착했다. 곧 대청으로 내려가 한참동안 대화했다. 각 수사 및 세 조방장[박종남·신호·정응운]을 청해서 함께 이야기했다.
29일 (경자) ... 어사가 좌도[전라좌도]에 소속된 다섯 포구의 부정사실을 일일이 조사하였다. 저녁에 이곳에 와서 조용히 이야기했다.
⇨ 신식 어사와 대화가 잘 됨을 의미함
<8월> 체찰사, 이원익과 만나다
15일(을묘)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우수사[이억기]와 가리포[이응표]•임치[홍견] 첨사 등 여러 장수들이 함께 왔다. 이날 삼도의 사부 및 군사와 본도 잡색군을 먹이고, 종일토록 여러 장수들과 함께 취했다....
⇨ ■ 잡색군 :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동원되는 정규 균역 의무를 진 사람들 이외의 추가 동원을 위한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로 구성 및 조직된 군대. 품관, 생원, 진사, 교생 등의 지방 유력자와 향리, 공사천인 등으로 구성된 군대다. 평상시에는 생업에 종사하고 유사시에 군대에 편입되었다.
25일(을축) 맑음. 일찍 식사를 한 후에 체찰사와 부사, 종사관이 모두 내가 탄 배에 함께 탔다. 진시 [오전 7~9시]에 출발할 때 배에 같이 들어가 모두 서서 크고 작은 섬들과 여러 진을 합병할 곳과 접전하던 곳 등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종일 의논했다. 곡포는 평산에 합하고, 상주포는 미조항에 합하고, 적량은 삼천에 합하고, 소비포는 사량에 합하고, 가배량은 당포에 합하고, 지세포는 조라포에 합하고, 제포는 웅천에 합하고, 율포는 옥포에 합하고, 안골은 가덕에 합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 일종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일정기간 동안 개편된 상태가 유지됨
27일(정묘) 맑음. 군사 5,480 명에게 음식을 먹였다.
⇨ 당시 이순신이 지휘하던 전라 좌수영 부대의 전체 수군인 듯하다. 『왜적의 정황을 임금님에게 보고하는 장계』(1593년 8월 19일)에는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본래 6,200여 명이었는데, 1592년과 1593년에 전사하고, 병들어 죽은 수가 600명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6월 6일에 따르면 우도 통제사 원균은 4600명, 좌도 수사 이운룡은 500명을 거느린 것으로 나온다. (출처: 『난중일기』 박종평 역, 글항아리, 363쪽)
<9월>
초9일(무인) 맑음. 우수사[이억기] 및 여러 장수들이 모두 모였는데, 진영의 군사들에게 떡 한 섬을 나눠 주고... ⇨ 중양절
14일(계미) .... 우수사[이억기] 및 경상우수사[권준]가 함께 와서 작별하는 술잔을 같이 나누고 밤이 깊어서 헤어졌다. 작별하면서 선 수사(선거이)에게 준 짧은 시 한 구절은,
북쪽에 갔을 때도 같이 고생하고 | 北去同勤苦 |
남쪽에 와서도 생사를 함께하네 | 南來共死生 |
오늘 밤이 달 아래 잔을 나누면 | 一杯今夜月 |
내일은 서로 이별을 아쉬워하리 | 明日別離情 |
17일(병술) 맑음. 식후에 서울에 편지를 써 보냈다. 김희번이 계본을 가지고 나갔다. 유자 30개를 영의정[유성룡]에게 보냈다.
25일(갑오) 맑음. 미시[오후 1~3시]에 녹도 하인이 실수로 불을 내서 대청과 수루방이 연이어 모조리 타 버렸다. 군량, 화약, 군기 등 곳간에는 불이 미치지 않았으나 수루 아래 두었던 장•편전 200여 부部(화살대 30개 묶음, 임진왜란 때 1부는 30개였으나, 조선 후기에는 1부가 100개로 나옴)가 다 타버려서 한탄스러웠다. (새벽 2시에 배에서 내렸다. 동틀 무렵에 목욕탕에 도착했다. 식사를 한 뒤 목욕을 하고 배에 올랐다. 음식을 만들 때, 해는 미시[오후 1~3시]를 가리키고 있었는데, 녹도 하인이 불을 내서 대청과 누방[수루방]까지 불길이 길게 번져 모두 타 버렸다.)
<10월> 불타 버린 수루방을 새로 만들다
초8일(정미) 맑음. 조카 완이 들어왔다. 진원과 조카 해의 편지도 왔다.
초9일(무신) 맑음. 대청을 짓는 공사를 다 마쳤다.
11일(경술) 맑음. 일찍 수루방에 올라가 종일 일하는 것을 돌보았다.
12일(신해) 맑음. 일찍 수루 위로 올라가 일하는 것을 돌보았다. 서쪽 행랑을 만들어 세웠다.
16일(을묘) 맑음. 새벽에 새로 지은 수루방으로 올라갔다. ....그대로 새 수루방에서 잤다.
21일(경신) ... (사립 [정사립]에게서 들으니, "경 수백[경상수사 권준]이 거짓으로 죄를 씌워 궁지에 빠뜨리는 말을 지어내, 지시에 따라 공문을 작성하게 하였다. 그 공문이 문서로 작성되면 절대로 알려지지 않게 했다."라고 한다. 놀랍고도 놀랄 일이다. 권 수[수사 권준]는 사람이 되어 어찌 이처럼 거짓된 말로 남을 속일 수 있는가. 늦게 미조항첨사 성윤문이 왔다. 권수[수사권준]의 제멋대로이고 엉망인 모습을 많이 말했다.)
⇨ 이전에 이순신은 권준을 신뢰했는데 경상수사가 된 이후부터는 권준에 대해 부정적인 표현을 많이 한다.
<11월>
초1일(기사) ...김희번이 서울에서 내려왔는데, 조보와 수상[유성룡]의 편지를 가져왔다. 항복한 왜인들에게 술을 먹였다.
초8일(병자) 맑음. 새벽에 완[조카]과 종 경이 본영으로 돌아갔다.
⇨ 10월 8일에 도착한 한 달 후 돌아감.
13일(신사) 맑음. 도양장에서 추수한 벼와 콩이 820석이었다.
21일(기축) 맑음. 북풍이 종일 불었다. 새벽에 송희립을 내보내서 견내량 적선을 조사했다. 이날 저녁 청어 1만3,240 두름을 곡식과 바꾸는 일로 이종호가 받아갔다.
■ 두름 : 물고기 20마리를 엮은 것
■ 청어 : 과메기(관목어). 꽁치보다 살이 두껍다.
⇨ 과메기의 시초는 충무공 이순신이다???
<12월> 다시 체찰사를 만나다
초4일(임인) 맑음. 순천 2선과 낙안 1선의 군사를 점검하고 내보냈으나 바람이 순조롭지 않아 떠나지 못했다. 분해가 본영으로 갔다. 황득중과 오수 등이 청어 7천여 두름을 싣고 왔으므로, 김희방의 '곡식 사러가는 배'에 세어 주었다.
초8일(병오) 체찰사의 전령이 왔는데, "근일 소비포에서 만나자." 하였다.
15일(계축) 맑음. 체찰사 처소로 나갔던 진무가 들어와서 18일에 삼천포에서 만나자 한다고 하므로 달려가기로 했다. 초경[오후 7~9시]에 경상수사가 보러 왔다.
18일(병진) 맑음. 아침 식사 후에 삼천진으로 나아갔다. 오시[오전 11시~오후 1시]에 체찰사가 보에 들어와서 함께 조용히 의논했다. 초저녁에 체찰사가 또 함께 이야기하자고 요청하므로 사경[오전 1~3시]까지 이야기하고 헤어졌다.
⇨ 체찰사 이원익은 서인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남인과 친함. 광해군 때 외지로 보냄.
이순신은 청백리, 백성 사랑 등을 이원익에게 많이 배웠다.
囗21일부터 30일까지는 빠졌음.
병신년 1596년, 선조 29, 이순신52세
병신년은 이순신이 보낸 7년 중 가장 여유 있고 행복한 기간이었다.
1596년 드디어 왜적이 철수하다
전쟁은 소강상태가 계속되고 이순신은 왜적의 동향을 살피며 공무를 처리하고 군량을 확보하는 데에도 신경을 썼다. 4월 들어 왜적이 철수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다. 이순신은 군졸들의 사기를 앙양시키고 훈련을 계속하는 한편, 전라 일대를 꼼꼼히 순시하며 대비하였다.
(*) 친필 일기의 『일기 외 기사』
...정월 초3일, 배 위에서 환도 4개, 왜도 2개를 이와 같이 만들었는데, 회[아들]가 가지고 가는 중이다....
<1월> 왜적이 나올지 점을 치다
초1일(무진) 맑음. 사경[오전 1~3시] 초에 어머님 앞에 들어가 뵈었다.....ㅇ 저녁에 어머님께 하직하고 본영으로 돌아왔다.
초6일(유) 비가 계속 내렸다. (오수가 청어 1천 310두름을, 박춘양이 787두름을 바쳤는데, 하천수가 받아다가 말리기로 했다. 황득중은 202두름을 바쳤다. 종일 비가 내렸다. 사도첨사가 술을 가지고 왔다. 군량 5백여 석을 마련했다고 한다.
⇨ 사도첨사가 군량 5백여 석을 마련한 것이 문제가 되어 파직을 당함. 장부상에 있는 곡식보다 많으면 남의 것을 중간에서 가로챈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
초10일(정축) .... 이른 아침에 적이 다시 나올지 안 나올지를 점쳤더니, "수레에 바퀴가 없는 것 같다는 괘가 나왔다. 다시 또 치니 "임금을 보고 모두 기뻐하는 것 같다는 괘가 나왔다. 좋은 괘였다.)
12일(기묘) 맑음. (맑았으나 서풍이 세게 불어 추위가 갑절이나 더했다. 사경[오전 1~3시] 무렵, 꿈에 한 곳에 이르러 영의정[유성룡]과 함께 이야기했다...... 글자점을 던져 보았더니, "바람이 물결을 일으키는 것 같다"라는 괘가 나왔다. 또 오늘 중으로 길흉 간에 무슨 소식을 들을지 점을 쳐보니, "가난한 사람이 보배를 얻은 것 같다“라는 괘가 나왔다. 이 괘는 참 좋다.
15일(임오) 맑음. 새벽에 망궐례를 드렸다. (아침에 낙안군수[선의문]와 홍양현감을 불러 식사를 함께 했다. 늦게) 대청에 나가서 공문을 처결하여 보낸 다음 투항한 왜인들에게 술과 음식을 먹였다. 낙안과 흥양의 전선, 병기, 부속물 및 사부와 격군을 점검하니, 낙안이 아주 엉성했다고 한다...... 풍년이 들 징조라고 했다.
19일(병술) 맑음. 곤양군수도 와서 술을 바치므로 조용히 이야기했다. 부산에 잠입해 들어갔던 사람 4명이 와서 전하기를, "심유경이 행장, 현소, 사택정성, 이소서비 등과 함께 정월 16일 새벽에 바다를 건너갔다."라고 했다.
24일(신묘) 맑음. 북풍이 크게 일고 눈보라가 치면서 모래까지 날려 사람들이 걸어 다닐 수 없었고 배도 움직일 수 없었다.
⇨당시에도 황사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월> 둔전에서 수확을 거두다/ 술에 취하다
초2일(기해) 저녁에 사도첨사[김완]가 와서 전하기를, "어사의 장계로 인해 파면되었다."라고 한다. 그래서 곧 계초를 작성했다.
초6일(계묘) 흐림. 새벽에 목수 10 명을 거제로 보내어 배를 만들었다.
초8일(을사) 저녁 때 군량에 대한 장부를 만들었다. 흥양 둔전에서 추수한 벼 352석을 받아들였다. ⇨ 풍년이 들었다.
15일(임자) 순천 둔전에서 추수한 벼를 내가 직접 보는 데서 받아들였다.
16일(계축) (요전번에 진 군관들 편에서 한턱을 내어서 모두 술이 몹시 취해서 흩어졌다. 이날 밤에 너무 취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어났다 누웠다 하면서 밤을 밝혔다. 봄철의 피곤한 기운이 이렇게 왔구나.)
17일(갑인) ....어제 취한 것 때문에 몸이 몹시 편안치 못했다.....봄기운이 사람을 괴롭혀 몹시 노곤했다.
22일(기미) ... 우우후[이정충], 장흥부사[배홍립], 낙안군수[선의문], 남도포만호[강응표], 가리포첨사[이응표], 여도만호[김인영], 녹도만호 [송여종] 등이 활을 쏘기에 나도 쏘았다. 손현평도 왔다. 몹시 취해서 헤어졌다. 이날 밤에 땀을 흘렸다. 봄기운이 사람을 노곤케 했다. ...
23일(경신) ....둔전에서 받아들인 벼를 다시 되질해서 새로 지은 창고에 들여 쌓은 것이 167섬이다. (*줄어든 것이 48섬이다.)
24일 (신유) 맑음. 식후에 나가서 공무를 보았다. (*둔전에서 받아들인 벼를 다시 되질하는 것을 감독했다. 둔전에서 받아들인 벼를 다시 되질하여 170섬을 창고에 들였다. (*줄어든 것이 30섬이다.)
26일(계해) 맑음. *둔전에서 받아들인 벼 230섬을 다시 되질한 수량이 198섬으로 줄어든 것이 32섬이라고 한다. ...
28일(을축) ....체찰사 종사관의 보고로 인해 전령이 발동되어 장흥부사를 잡아가려는 일 때문에 왔다고 한다. 또 전라도 수군 중 우도수군은 좌도와 우도로 왔다 갔다 하면서 (*제주와 진도를) 성원하라는 명령도 있다고 한다.(가소롭다. 조정의 계책이 이럴 수 있는가. 체찰사로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이렇게 무의미할 수 있는가. 나랏일이 이렇고 보니 어찌하랴, 어찌하랴)
⇨ 『선조실록』 선조 29년(1596) 3월 25일에는 사헌부가 장흥부사 배흥립에 대해 거칠고 천박하다고 파직을 건의했다.
⇨ ■ 이순신이 비판한 이 전략은 『선조실록』선조29년 1월22일에 비변사에서 건의한 내용에도 그대로 나온다. 즉 일본군이 한산도에 주둔한 조선 수군을 유인한 뒤에 조선 수군 뒤로 이동해 서해로 침범할 가능성이 있으니, 전라 우수사 이억기 부대로 하여금 전라 좌도와 우도를 오가며 진도와 거제 양쪽을 지원케 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실록 기록 이전에 류성룡이 쓴 장계(1595. 11. 26.) 에는 규성룡이 스스로 “신이 헤아려보니 제주가 걱정이 됩니다. 왜적이 제주에 침을 흘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개 제주는 우리나라 서남해에 있고, 명나라와도 가까워 만일 제주가 왜적에게 점령당하면 비록 하늘과 땅의 힘으로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제주는 아주 외롭고 홀로 있어 군대의 양식도 다 떨어졌고, 여역(전염병)가 굶주림이 다른 지역보다 심해 군사를 보충해 단단히 지킬 계책을 반드시 충분히 강구하여 급히 시행해야 합니다.”라고 건의했다. 그 결과가 이날 일기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 3월> 술을 과하게 마셔 건강이 좋지 못하다
3월에는 거의 매일 술을 마시고 권한 이야기가 등장
초2일(기사) 맑음. 아침에 계초를 수정했다. 보성군수[안홍국]가 들어왔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공무를 보지 않았다. (*몸이 노곤하고 땀이 옷을 적시니 이것이 병의 뿌리이다.)
초3일(경오) 맑음. 이날은 명절이라 방답첨사[장린]와 여도 [김인영]·녹도[송여종]·남도포[강응표]만호 등을 불러 술과 떡을 먹였다. ⇨ 삼월 삼짇날
초5일(임신) ...식후에 우수사를 만나 보았다. (*다시 잘못된 처사를 말하니 우수사[이억기]는 모든 것을 사과했다. 이어서 술을 내어서 잔뜩 취해 돌아왔다.)...그대로 이정충의 장막 아래로 들어가서 조용히 이야기하였다.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또 술을 마셨다.)
초9일(병자) 아침에 맑았다가 저물녘에 비가 내렸다. 우우후와 강진현감이 돌아간다고 고하기에 술을 먹였더니 잔뜩 취했다. 우후는 너무 취해서 쓰러져 돌아가지 못했다. ㅇ 저녁에 좌수사[이운룡]가 왔기에 작별 술잔을 나누고 보냈으나 취해서 쓰러져 대청에서 잤다.
12일(기묘) .... 저녁에 소국진이 체찰사(이원익)에게서 돌아왔는데, 그 회답에, 우도 수군을 본도로 모두 보내라는 것은 본의가 아니었다고 하였다. (*가소로웠다. 또한 들으니 원흉[원균은 장杖 40대를 맞고, 장흥부사[배흥립]는 20대를 맞았다고 한다.)
16일(계미) 비가 퍼붓듯이 종일 그치지 않았다. 진시[오전 7~9시]에 동남풍이 몹시 불어 지붕의 띠가 걷힌 데가 많고, 창문의 종이가 찢어져 비가 방 안으로 들이쳐 사람이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오시[오전 11시~오후 1시]에 바람이 그쳤다. ㅇ 저녁에 군관들을 불러서 술을 먹였다. ...땀을 어제처럼 흘렸다.
17일(갑신) .... 늦게 나주판관이 보러 왔기에 술을 취하도록 먹여 보냈다. ㅇ 저물녘에 박자방이 들어왔다. 이날 밤에 식은땀이 등을 적시고 옷 두 겹이 다 젖었다. (*또 이부자리까지 젖었다. 몸이 불편했다.)
21일(무자) 큰비가 종일 쏟아졌다. [오후 7~9시]에 곽란으로 한참이나 구토를 하고 삼경[오후 11시~오전 1시]에 조금 가라앉았다....ㅇ이날(너무 심심해서) 군관 송희립·김대복•오철등을 불러서 종정도 놀이를 하였다.
< 4월> 왜가 철수한다는 소문이 돈다
초7일(계묘) 맑음. 부찰사가 나가서 상을 나누어 주었다. ㅇ (*새벽에) 부산 사람이 들어왔는데, 명나라 수석 사신 이종성이 달아났다고 하니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이종성"이 도망한 이유는 여러 기록에서 언급하고 있으나, 대체로 일본의 히데요시가 강화 조건을 알면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사신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는 주변의 언급에 겁을 내고 도망했다고 한다. 또한 심유경이나 주변 다른 인사들의 영향도 있었다. 결국 도주했던 이종성은 외교적 물의를 일으킨 책임에 따른 처벌을 받았고, 명은 임시로 부사 양방형을 정사로 심유경을 부사로 삼아 일본에 건너가 책봉을 통한 강화를 추진하였으나 결국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9일(을묘) ... 이날 (아침에) 남여문을 통하여 수길이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으나 믿을 말이 못 된다. (*이 소문이 진작부터 퍼졌었는데 아직 확실한 기별은 오지 않았다.)
⇨풍신수길(토요토미 히데요시)이 실제 사망한 날은 1598년 양력 8월 18일인데 벌써 죽었다는 소문이 도는 걸 보면 그의 죽음을 바라는 사람이 많다는 뜻인가?
30일(병인) ... 부산의 허내만[허내은만]고목에 행장이 군사를 거두어 가지고 갈 의사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김경록이 돌아갔다. 어머님이 평안하시다는 편지가 왔다.
⇨ 허내은만은 이순신이 적지 부산에 심어놓은 정보망이었다. 부산에 머물며 보름에 한 번씩 이순신에게 와서 정보를 제공했으므로 이순신은 왜군의 동태를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다.
< 5월>
초5일(신미) 맑음. (*이날 새벽에 여제를 지냈다. )
⇨ 단오날 일찍 죽은 떠돌이 귀신에게 제사 지냄
12일(무인) ... 김해부사[백사림]의 긴급 보고 및 부산에서 적에게 붙었던 사람인 김필동이 보낸 고목도 왔는데, "수길의 생각은 비록 정사[이종성]는 없을지라도, 부사[양방형(명나라에서 파견한 부사)]가 아직 그대로 있으니 곧 강화하고 철병하려고 한다."라고 하였다.
13일(기묘) 맑음. 부산 허내만의 고목에 “청정 도적(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이 이미 초10일에 자기 군대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갔고, 각 진영에 있는 왜들도 장차 물러갈 것이고, 부산 왜들은 명나라 사신을 모시고 건너가려고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24일(경인) ... 부산 내만[허내은만]의 고목이 왔는데, "좌도[경상좌도] 각 진의 왜군이 이미 모두 철수해 가고 다만 부산만 머물고 있다."라고 했다. (*명나라 수석 사신이 갈려서 새로 된 사람이 온다고 하는 기별이 22일 부사에게 왔다고 한다. 허내은만에게 술과 쌀 10말, 소금 1곡을 보내 주고서 마음을 다하여 탐지해서 보고하라고 했다.
30일(병신) ... 영의정[유성룡]과 (*상장사재) 정 영부사(판부사의 잘못으로 정탁을 가리킴), 지사 윤자신, 조사척, 신식, 남이공의 편지가 왔다.
⇨ 4월 15일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이 한 달 반 만에 온 것
< 6월> 더위 속에서 활 연습을 하다
초2일(무술) 늦게 나가서 공무를 보고 활 10순을 쏘았다.
초6일(임인) 맑음. 사도의 여러 장수들이 모두 모여 활을 쏘았다. 술과 음식을 먹이고 다시 또 활을 쏘아 승부를 겨루고서 헤어졌다.
초7일(계묘) 충청우후 등과 활 10순을 쏘았다.
초9일(을사) 일찍 나가서 충청우후, 당포만호, 여도 만호, 녹도만호 등과 활을 쏘는데, 경상수사가 와서 함께 20순을 쏘았다.
12일(무신) 맑음. 무더위가 찌는 듯했다. 충청우후 등을 불러 활 15순을 쏘았다.
13일(기유) 경상수사가 술병을 들고 와서 활 15순을 쏘았다.
15일 (신해) ...늦게 나가서 공무를 보고, 충청우후와 조방장 김완 등 여러 장수를 불러서 활 15순을 쏘았다. 이날 부산 허내만이 와서 왜적의 정보를 전하기에 식량을 주어 돌려보냈다.
⇨ 이순신은 정보를 제공한 사람에게 보상을 함
< 7월> 적은 도망가고 괴수를 잡아들이는 꿈을 꾸다
초3일(무진) ... (아침 나절 체찰사(이원익)에게서 공문이 왔다.)
초7일(임신) 맑음. 경상수사와 우수사가 여러 장수들을 데리고 와서 세 가지 화살[철전·편전·후전]로 활쏘기 연습을 하였다.
초10일(을해) 맑음. (새벽꿈에 어떤 사람이 화살을 멀리 쏘았고, 또 어떤 사람이 갓을 발로 차서 부수었다. 스스로 점을 쳐 보니, 화살을 멀리 쏘는 것은 적들이 멀리 도망하는 것이요, 또 갓을 발로 차서 부수는 것은 머리 위에 있는 갓이 발길에 걷어차인 것으로서, 이것은 적의 괴수에 대한 것인데, 왜적을 모조리 무찌를 징조라 하겠다. 늦게)
13일(무인) 맑음. 명나라 사신을 따라가는 우리나라 신하들이 탈 배 3척을 정비하여 (*사시[오전 9~11시]에) 떠나보냈다. ㅇ늦게 활 13순을 쏘았다. (*저물녘에 항복한 왜인들이 광대놀이를 차렸다. 장수된 자로서 그대로 둘 것이 아니었지만, 항복한 왜인들이 놀음한번 놀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에 금하지 않았다.)
⇨ 통신사가 갈 때 탈 배는 통제영에서 준비했다.
⇨ 왜인들의 광대놀이 – 일본 전통 연극인 “노카쿠라고도 불리는 가면극 노오”로 보임
17일(임오) 비가 뿌렸다. 충청도 홍산에서 큰 도적들이 몰래 일어나 홍산현감 윤영현이 붙잡히고, 서천군수 박진국도 끌려갔다고 한다. 바깥 도적을 아직 없애지 못했는데, 안의 도적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놀랍고 통탄할 일이다.
⇨ 이몽학의 난 : 이몽학은 임진왜란 후 불만에 찬 민심을 선동하여 충청도 일대에서 난을 일으킨 인물. 서울 출생의 왕족 서얼 출신으로 의병을 모집해 훈련시키고, 동갑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해 반란을 준비했다가 1596년 7월 승려와 노비 등을 모아 홍산을 습격했다. 임천, 정산, 청양, 대흥을 함락시키고, 홍주(홍성)을 점령했다가 홍주목사 홍가신과 이시발 등에 의해 진압되었다.
20일(을유) ...들으니 충청도 지방도적[이몽학]이 포수 이시발의 총에 맞아서 즉사했다고 한다. 다행이다.
<8월> 체찰사, 이원익을 만나다
13일(무신) 맑았다가 흐림. 동풍이 크게 불었다. 충청우후와 함께 활을 쏘았다. 이날 밤에 땀이 흘러 등을 적셨다. (*아침에 들으니 우가 곤장을 맞아 죽었다고 한다. 장사지낼 물건을 약간 보내 주었다.)
⇨ 여기서 ‘우’는 동생 ‘우신’같다. ‘우’는 자녀 없이 죽는다.
20일(을묘) 동풍이 크게 불었다. 새벽에 전선 만들 재목을 끌어 내리기 위해 우도군사 300명, 경상도 100명, 충청도 300명, 좌도 390명을 송희립이 거느리고 갔다. ㅇ 늦은 아침에 봉· 해· 회 ·면·완과 최대성·윤덕종·정선 등이 들어왔다.
21일(병진) 맑음. 식후에 활터 정자에 앉아 아들들에게 활쏘기를 익히고, 또 말달리며 활 쏘는 것도 연습시켰다.
27일(임술) 맑음. 일찍 떠나서 사천에 이르렀다. 오후에 그대로 진성[진주]으로 향하여 체찰사[이원익]를 뵙고 종일 의논하며 이야기하였다.
< 윤8월> 전라 일대를 돌아보다
(8/14~9/27, 체찰사와 육지와 바다를 순찰함)
8/14 두치(전남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 섬진마을) ⇒ 광양 고을 ⇒ 8/15 순천 ⇒ 8/17 낙안군(순천시 낙안면) ⇒ 8/18 양강역(고흥군 남양면 남양리) ⇒ 남양리 산성 ⇒ 흥양(고흥읍) ⇒ 8/19 도양(고흥군 도양읍) ⇒ 8/20 백사정(전남 장흥군 안양면 수문리로 추정) ⇒ 장흥부 ⇒ 8/22 병영(전남 강진군 병영면 성동리) ⇒ 8/24 가리포(전남 완도군 완도읍 군내리) ⇒ 8/25 이진(전남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 ⇒ 해남 ⇒ 8/26 우수영(전남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서상리•동외리) ⇒ 8/29 남리역(전남 해남군 황산면 남리리) ⇒ 해남현 ⇒ 9/1 석제원(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평리) ⇒ 영암 ⇒ 9/3 나주 신원(나주목 남쪽 35리에 있는 신안원, 지금의 위치는 전남 나주시 왕곡면 신원리) ⇒ 나주 별관 ⇒9/6 고기원(지금의 함평군 하교면 고막리) ⇒ 무안 ⇒ 9/7 다경포(전남 무안군 운남면 성내리)⇒ 9/8 동산원(무안군 현경면 동산리) ⇒ 임치진(무안군 해제면 임수리) ⇒ 9/9 동산원 ⇒ 함평현 ⇒ 9/11 영광 ⇒ 9/12 무장현 ⇒ 9/16 장성 ⇒9/17 진원현(전남 장성군 진원면 진원리) ⇒ 9/18 광주 ⇒ 9/21 능성 ⇒ 9/22 이양원(전남 화순군 이양면 이양리에 있던 조선시대 역원) ⇒ 보성군 ⇒ 9/24 낙안 ⇒ 9/25 순천 ⇒ 9/27 어머님의 임시거처 ⇒ 9/28 본영
초5일(기사) 맑음. 사청[사정]으로 나가서 아이들 [아들들]이 말달리고 활 쏘는 것을 구경했다.
초7일(신미) 맑음. (*아침에 아산 종 향시가 들어왔다. (가을보리는 소출이 43섬이요, 봄보리는 소출이 35섬이요, 어미[생선과 바꾼 쌀]은 전부 12섬 4말이요, 또 7섬 10말이 나고 또 4섬이 났다고 한다.
⇨ 이순신 집안이 형편이 좋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쌀 10말이 모이면 한 섬이라고 한다. 한 섬의 무게는 160kg이다. 위의 곡식을 다 합치면 100섬이 넘는 많은 양이다.
『권수』에 보면 ‘변’ 바로 위 할아버지인 6대 이공진은 ‘수사재시사’란 직책으로 나온다(신정역주 이충무공전서 1권, 권수 (275쪽). ‘수사재시사’는 해산물과 하천을 관리하던 부서의 장교를 의미하며 궁궐에 어류를 대는 부서에 근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보면 이순신의 선조 때부터 배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순신이 셋째 아들이므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아니라 장인에게 물려받았을 수도 있다.(추정)
초10일(갑술) 맑음. (*새벽에 무과 초시를 시작하였다. 면이 쏜 것은 모두 55보, 봉이 쏜 것은 모두 35보, 해가 쏜 것은 모두 30보, 회가 쏜 것은 모두 35보, 완이 쏜 것은 모두 25보라고 했다. 진무성이 쏜 것은 모두 55보로 합격되었다.
⇨ 한효순을 파견해 한산도에서 무과시험을 실시했고 급제자를 선발했다.
15일 (기묘) (저녁에 들으니 아들들이 초시에 뽑혔다고 한다.)
⇨ 경국대전에 보면 해당 절도사 자녀는 과거시험을 보지 못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전쟁 중이라 예외로 가능했을 것이라고 본다.
19일(계미) 맑음. 떠나서 녹도로 가는 길에 도양의 둔전을 살펴보았다. 체찰사의 얼굴에 기뻐하는 기색이 많았다.
⇨ 풍년이 들었으므로 체찰사가 기뻐했을 것이다.
24일(무자) 나는 부사[한효순]와 함께 가리포로 갔더니 우우후 이정충이 먼저 와 있었다. 함께 남쪽 망대로 오르니, 좌우로 적들이 다니는 길과 여러 섬을 역력히 헤아릴 수 있었다. 참으로 한 도의 요충지이다. 그렇지만 형세가 매우 외롭고 위태로워 부득이 이진으로 옮겨 합친 것이다. (병영으로 돌아왔다. 원 공의 흉악한 행동은 기록하지 않는다.)
< 9월> 순시를 계속하다
12일(을사) 비바람이 크게 일었다. 늦게 출발하여 길을 나서서 10리쯤 되는 냇가에 오니 이광보와 한여경이 술을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말에서 내려 함께 이야기하였다. ("비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안세희도 왔다. 날이 저물어서 무장 [현감이람]에 도착했다. (여진女眞)
14일(정미) 맑음. 하루 또 묵었다. (여진 20)
15일(무신) 맑음. 체찰사가 고을에 도착했으므로 들어가 인사하고 대책을 의논하였다. (*여진 30)
⇨ 여진女眞은 '비밀스런 사항이나 중요한 특이 사항을 이순신 자신만 알 수 있도록 기록해 놓은 문구'라는 견해가 있다. (김주식, 「이순신의 여인들과 관련된 견해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해양담론」 제2호, 도서출판 문현, 2015, 48쪽.)
19일(임자) 광주목사는 체찰사가 파직시켰다고 한다. (*최[최철견]의 딸 귀지가 와서 잤다.(⇨숙박을 했다는 의미)
27일(경신) 맑음. 일찍 떠나서 [어머님의] 임시 거처에 도착하여 어머님을 뵈었다.
<10월> 어머니를 모시고 즐겁게 지내다
초10일(계유) (...정오에) 어머님께 하직 인사를 드리고, 미시[오후1~3시]에 배를 탔다. 바람 따라 돛을 달고서 밤새도록 노를 재촉해 진[한산도]으로 돌아왔다.
■10월 12일부터 다음해 3월까지는 빠져있음
* 난중일기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지만 웅천현감님께서 재밌다고 추천하는 영화가 있어요.
"마스터 앤드 커맨더: 위대한 정복자"
이 영화는 2003년에 개봉한 작품으로, 1806년 나폴레옹시대 함포 28문에 선원 197명이 탑승한 대영제국의 서프라이즈호와 태평양에서 전쟁을 일삼은 프랑스함 아케론호 두 배의 전략적인 전투와 정복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간단 소개 유튜브 영상 링크합니다.
https://youtu.be/vC6j_-cTeX4?si=AvgMw_4UrfeXmzlA
첫댓글 지회장님 깊은 밤 올리셨네요~감사해요^^
이충무공전서 함께 읽기 대항해 15회 중 8회차! 반환점을 찍었네요
을미년 1595년, 병신년 1596년 일기
정유년 1597년을 앞둔 진중 여러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교수님 강의 덕분에 난중일기 내용이 입체적으로 풍성하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네에
이제 딱 중간 지점까지 왔습니다.
웅천현감님 덕분에 전체를 보는 눈이 생긴 것 같아 참 좋아요.
숲을 보고...나무를 보고...
동행하는 분들이 계서서 더 좋은 시간입니다.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요~ㅎ
감사합니다.
망궐례 동영상의 장소가 전주 풍패지관이네요! 망궐례는.. 그냥 절만 하는게 아니라 풍악에 맞춰 춤?도 추는군요.
올려주신 자료 덕분에 쉽게 배워갑니다😊
저도 풍악에 맞춰 하는 몸동작이 신기했답니다. 상황에 따라, 대상에 따라, 절을 하는 행위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구나 라는 생각을 했어요. ~ㅎㅎ
벌써 반 을 달리시는군요
우리도 힘내겠습니다~~~
시작이 반이라 했지요.
일단 시작하면 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여수지회도 화이팅!!
집에서 읽으면 읽기에만 급급하지 전체의 파악은 감히 엄두도 못 내는데?
웅천현감님의 전체적으로 보는 시각에 다시한번 느껴보는 시간이었습니다.ㅎ
그렇죠? 아무래도 가이드 해주시는 분이 계시니 놓쳤던 부분도 짚게 되고, 몰랐던 부분도 알게 되어 좋지요. 그 혜택에 감사할 뿐이지요~~😊
게으른 농부 밭 고랑만 센다더니.... 아이고~, 언제 따라갈꼬....
내용이 방대하군요. 나중에 또 참고하겠습니다.
우리는 얕고 넓게,
부산지회는 깊게 공부하는 거죠~~ㅎㅎ^^
긴글
한번 읽고 안될듯~^^♡
시간있을때 마다 들어와
또 읽어 봐야겠어요.
덕분에 편하게 공부를 덤으로 하네요~^^
많을걸 알고 갑니다.
망궐례 ㅋ
부끄럽지만 처음 알게 됬네옴
고맙습니다 🙇
편하게 공부가 된다니 감사하네요. 열심히 하는 모습이 아름다워요.저도 배우며 조금씩 알아가는 기쁨이 크답니다. 함께 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