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틀바위 코스 산행로 입구에 있는
베틀바위 산성길
안내도
[신용석 레인저가떴다] 삐죽삐죽 솟구친 베틀바위…신선이 놀다간듯 무릉계곡
<30>두타산 베틀바위~마천루~무릉계곡 7.4㎞…'산반물반' 트래킹 핫플
육중한 바위 병풍 마천루…청옥산 물과 만난 쌍폭포 "우린 곧 동해로"
(서울=뉴스1) 신용석 기자 | 2022-08-05 09:00 송고
요즘 새로운 핫플레이스로 명성이 자자한 두타산과 무릉계곡을 간다. 두타(頭陀)는 인도의 고대언어(범어) ‘dhuta’를 한자로 옮긴 것으로, ‘머리를 때려, 번뇌를 털어버리는 불교의 수행’을 말한다. 웅장한 산세와 깊은 계곡이 ‘두타’하기에 알맞은 산이다. 무릉계곡은 중국에서 신선들이 노니는 이상향을 일컫던 ‘무릉도원(武陵桃源)’에서 따온 이름이다. 멋진 폭포와 너른 암반이 유명해 우리나라 제1호 국민관광지와 명승(名勝)으로 지정된 계곡이다.
삼척부사를 지낸 김효원은 1577년 “우리나라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은 금강산이고, 다음은 두타산이다. 골짜기가 그윽하고 수석(水石)이 기이하다.‘고 했다. 그런 신비한 경관들이 험한 산에 숨어있다가, 근래에 베틀바위와 마천루라 부르는 절경이 개방되면서, 늘 새로운 코스에 목말라 하는 여행자들이 꼭 한번 가보아야 하는 명소로 부각되었다. 소위 “뜨고 있는 산”이다.
두타산(1353m)은 4km 떨어진 청옥산(1404m)과 함께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이루어 영동과 영서를 가르며, 동해시와 삼척시의 경계를 긋는다. 두타산은 산세가 거칠고 청옥산은 부드러워 비교되지만, 물은 사이좋게 내려가, 두타산의 박달골과 청옥산의 바른골 물이 합쳐져 무릉계곡을 이루며 동해바다로 나아간다.
두타산과 청옥산의 정상, 그리고 무릉계곡을 두루 들리는 산행은 들머리에 따라 15~20km를 넘나드는 장거리라 상당한 체력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또한, 두 산이 품은 절경들의 위치가 서로 떨어져 있어서 종주 산행을 하면서 모든 명소를 다 들리기 어렵다. 그래서, 산 정상 대신에 핵심적인 명소를 다 둘러보는 순환코스를 간다. 산을 오르고 숲을 걷고 계곡도 타는 ‘산반물반(半山半水) 트래킹’이다.
◇ 매표소-베틀바위-마천루 4.1km “산속 깊이 숨겨진 신비하고 웅장한 암릉병풍”
주말 정오, 무릉계곡 주차장은 만차다. 해병대 복장을 입은 어르신들이 차량통제를 하니 운전자들이 고분고분하다. 음식점이 즐비한 상가를 지나, 매표소에 2000원을 내고, 베틀바위 1.5km로 쓰인 이정표를 따라 등산로를 오른다. 컴컴한 숲길이 시원하고, 소나무 장송들이 늠름하며, 이따금 나타나는 조망바위에서 산을 둘러본다. 벌써 이만큼 올라섰나? 높아진 고도에서, 건너편 산이 구름에 묻히며 폭포 세 개가 기다란 물줄기를 내리는 모습이 신비롭다.
1시간쯤 꾸준한 오르막 끝에, 마지막 깔딱계단 145단을 넘어서면, 해발 550m 지점에 베틀바위가 짱! 하고 나타난다. 다른 곳에서 본 적이 없는, 창검같이 길쭉하고 뾰족한 바위들이 들쑥날쑥 하늘로 솟구치듯 병풍을 이루어 쫘악 펼쳐져 있다. 내게는 검끼리 배틀(battle)하는 형상인데, 전설은 베틀이다. 선녀가 내려와 베틀처럼 생긴 저곳에서 비단을 짜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다.
“죽인다! 헌데 베틀이 뭐야?” 어떤 청년의 물음에 답하는 일행이 없다. 이 시대에 베틀을 본 사람은 매우 드물고, 베틀을 알고 있는 기자도 저 뾰족뾰족한 바위들을 베틀같다고 말하긴 어렵다. 모두가 공감하는 쉬운 이름을 붙였으면 좋겠다. 저 풍경이 중국의 장가계와 같다는 글이 많은데, 저런 암릉이 서너 줄기 더 있었으면 하는 욕심이 든다.
베틀바위에서 가파른 오르막을 10분쯤 올라서면 길쭉한 바위가 우뚝하다. 생김새가 부처의 얼굴이라 해서 미륵바위라 부르는데, 내가 보기엔 장군의 늠름한 얼굴이다. 밑에 있는 베틀바위를 이 장군의 창검으로 삼아 그럴듯한 스토리텔링을 하면 좋겠다는 발상을 해본다.
미륵바위 주변은 최고의 전망대다. 두타산과 청옥산의 웅장한 산세가 압도적이고, 세 개의 기다란 폭포가 명주실이 내려오듯 미끈하다. 하늘과 맛닿은 푸르른 동해바다를 바라보니 가슴이 뻥 뚫린다. 다만, 미륵바위를 뺑 둘러 오고 가는 발길에 꺾여지고 있는 야생 회양목들이 안쓰럽다. 100년 이상 비바람을 견뎠으나, 사람 발길에는 속수무책이다.
마천루 방향으로 100m를 오르면, 이후부터는 산허리를 도는 평탄한 길이다. 20분쯤 걸으면 산성 갈림길이 나오고, 직진해서 내리막 길을 15분쯤 내려서면 12폭포를 횡단하는 포인트가 나온다. 이 내리막길이 경사가 급하고 미끄러워 지그재그로 길을 냈지만, 성격 급한 사람들이 마구 직진하는 바람에 넓은 면적의 경사지가 다 짓밟히고 있어 안타깝다. 12굽이를 이루며 내려가는 12폭포 물줄기를 건너가는 지점에서 어떤 분들이 양치질을 하고 있다. 치약은 계곡에 사는 생물들을 아프게 할 화학물질이다.
짧은 오르막과 내리막에 이어, 거대한 암벽 옆으로 너덜길을 20분쯤 가면, 컴컴한 바위틈에서 떨어지는 석간수(石間水)다. 이어서 지붕이 멋진 거대한 바위모퉁이를 감고 돌아나가니, 건너편 산에서 떨어지는 폭포소리가 더욱 웅~웅~거려 작은 소리들을 삼킨다. 곧 마천루 전망대에 도착한다.
육중한 바위병풍들이 하늘 높이 걸려있어 마천루(摩天樓)라는 이름을 붙였다. 거대한 산이 기암괴석들을 품고, 협곡으로 기다란 폭포수가 내려오고, 사이사이에 팔 벌린 나무들이 꿈틀거리는 역동적인 경관이다. 마천루에서 내려가는 길은 절벽에 붙여 선반처럼 낸 잔도(棧道)다. 내려서며 스릴을 느끼고, 올려다보는 암릉이 하늘로 솟구치는 성(城)처럼 장관이다. 잔도 아래에 몇 그루의 소나무가 장군처럼 솟아나 아래 숲을 지휘하는 듯 기골이 장대하다.
◇ 마천루-쌍폭포-무릉계곡 3.3km “용이 솟구치듯 환상적인 폭포, 신선이 노닐만한 무릉계곡”
마천루를 내려서면 곧 무릉계곡이고, 웅~웅~하던 물 소리가 쿵!쿵!으로 커지며 쌍폭포가 등장한다. 눈 앞에 오직 두 개의 폭포만 존재하는 강렬한 풍경이다. 짧고 두껍고 강한 물폭탄이다. 두타산에서 내려온 왼쪽 폭포는 벼랑에 여러번 부딪치며 부서지고, 청옥산에서 내려온 오른쪽 폭포는 단번에 쏟아져, 각각 마지막 절경을 뽐내고 있다. 그리고 주저없이 한 몸으로 섞여, 동해바다를 향해 나아간다. 여정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용추(龍湫)폭포는 쌍폭포에서 불과 100m 위쪽에 있다. 이정표에 ‘2분’이라고 쓰여 있다. 꼭 보고 가라는 뜻이다. 그러나 쌍폭포를 본 사람들에게 ‘짧고 얌전한’ 용추폭포는 좀 심심한 모습이다. 그런데 왼쪽으로 암벽으로 올라가는 철계단이 있다. 그리 가라는 표지판은 없지만, 슬금슬금 170계단을 올라서니, 거기에 진짜 용추폭포가 있다.
기다란 3단 폭포에서, 맨 위 폭포가 짧은 S자를 그리며 휘어져 쏟아지고, 그 힘이 깎아낸 반원 형태의 바위에서 다시 내리 쏟는 기다란 두 번째 폭포가 하얗게 부서지며 시퍼런 웅덩이에 쏟아진다. 과연 용이 몸을 굽이치며 승천했을 ‘용오름 폭포’다. 야생적이면서 예술적인 풍경이다.
무릉계곡을 내려선다. 굉장한 암릉과 폭포를 즐긴 사람들이 소소한 풍경은 그냥 지나치며 슉슉 내려간다. 그러나 군데군데 하얀 암반과 분재같은 소나무와 급류가 어우러진 계곡 풍광을 그냥 지나치는 것은 너무 아깝다. 그렇게 바쁜 사람들도 걸음을 멈추는 곳이 있으니, 학이 머무를 정도로 경치가 뛰어난 학소대(鶴巢臺)다. 우뚝 선 높은 절벽과 경사진 암반 사이로 휘어져 쏟아지는 와폭(臥瀑/암반에 붙어서 내려가는 폭포)의 하얀 포말이 절경이다. 소풍객들이 떠날 줄을 모른다.
양탄자처럼 푹신한 황마매트길을 걸어 삼화사(三和寺)에 들린다. 신라 말에 창건된 고찰로, ‘삼국의 통합’을 의미하는 이름 뜻이다. 전쟁 때마다 불타서 다시 짓기를 반복했고, 본래 상가 아래에 있었으나 채광 구역에 포함되는 바람에 절을 이곳으로 이전했다고 한다. 그래서 천년 고찰의 흔적은 적다. “이래(여기로) 와서, (절을) 늘쾄어요.” 어떤 어르신의 말씀이다.
절을 내려가면 곧 무릉반석(武陵盤石)이다. 수 백명이 앉을 수 있는 평평한 암반의 한쪽에서 물놀이를 하는 아이들, 탁족을 즐기는 어른들, 햇빛에 달궈진 돌침대에 등어리를 지지는 사람들, 그저 멍 때리는 사람들…모두 신선이다. 여기는 정말 무릉도원인가 하노라. 기자도 오늘 다섯시간 가까이 걷고 있는 몸이 가볍고 상쾌하다. 계곡과 폭포에 음이온이 많아서 그렇다. 몸에 활력을 주고 신경을 안정시키는 물질이다.
암반의 아래쪽은 글씨 전시장이다. 한글세대는 알아보기 어려운 한문으로 수백 개의 이름이 바위에 새겨진 모습이 난장판이다. 조선시대 학자 남명은 “사람 이름은 역사에 기록되어 알려져야지, 돌에 새기는 것은 하찮은 사람들의 허영이다”라고 꾸짖었다.
이 낙서들을 다 지우더라도 하나의 글만 남긴다면 그것은 조선시대의 명필 양사언이 쓴, 날아갈듯한 초서체(草書體/흘려 쓴) 글씨다.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 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 신선이 노니는 곳, 절 앞에 물과 돌이 어우러지니, 번뇌를 일깨우는 절경이구나 !
이 아름다운 무릉계곡에 슬픈 역사가 있었으니, 임진왜란 때 백성들의 피가 연못이 되어 ‘피쏘(沼)’를 이루고, 한국전쟁 때에도 참혹한 죽음이 있었다. 이에 대해 시인 김지하는 ‘아랫쏘’라는 시에서 “가거라 가거라/ 새처럼 높이 뜨고/ 여우처럼 빠르게/ 가거라 얘야/ 이 피바다에서”라고 썼다. 전쟁에서 죽어가는 어미가 아들에게 기원했던 말이다.
무릉반석을 지나면 곧 매표소와 상가가 나와, 7.4km 5시간의 트레킹을 마친다. 입장할 때 낸 2000원이 전혀 아깝지 않은 유람이었다. 하루에 여러 산을 다녀온 곳처럼, 제각각 특징이 다른 명소를 여러 군데 들렸다. 음식으로 치면 하루에 한식, 양식, 중식을 골고루 즐긴 셈이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두타산 자락에 붙은 쉰음산(688m)에 관심이 갔다. 정확하게 발음하기 어려운 ‘쉰음’은 암반에 쉬운 개의 움(웅덩이)이 패여 있다는 뜻이다. 암석의 풍화작용으로 패인 것이다. 오십 개의 돌우물이 있다 해서 오십정산(五十井山)으로 부르기도 한다. 기도하는 사람이 많이 찾는 곳이다.
두타산 자락의 동해와 삼척에는 명소가 많다. 무릉계곡 입구에 ‘무릉별유천지’라는 레포츠 테마파크가 있다. 동해안에 망상해수욕장과 맹방해수욕장 등 유명한 해변과 캠핑장이 즐비하고, 최고의 일출 명소로 꼽히는 추암이 있으며, 5억년의 신비를 지닌 환선동굴과 천곡동굴도 있다.
두타산을 속된 말로 골타산, ‘골 때리는 산’이라고 하는데, 이는 생각 외로 멋진 경관과 명소가 많기 때문이다. 정말 그렇다.
[무릉계곡 주차장~베틀바위 전망대] 구간
등산로 도중의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망군대, 고적대, 관음폭포, 학소대 폭포
[무릉계곡 주차장~베틀바위 전망대] 구간
등산로 도중의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학소대 폭포와
사진 우측 하단에 보이는 삼화사
[무릉계곡 주차장~베틀바위 전망대] 구간
등산로 도중의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무릉계곡 입구
[무릉계곡 주차장~베틀바위 전망대] 구간
등산로 도중의
전망바위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학소대 폭포
[무릉계곡 주차장~베틀바위 전망대] 구간
등산로 주변의
금강송
[무릉계곡 주차장~베틀바위 전망대] 구간
등산로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청옥산, 망군대, 고적대
[무릉계곡 주차장~베틀바위 전망대] 구간
등산로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망군대, 고적대, 관음폭포
[무릉계곡 주차장~베틀바위 전망대] 구간
등산로 도중의
회양목 군락지
[무릉계곡 주차장~베틀바위 전망대] 구간
등산로에서 바라본
베틀바위 전망대
베틀바위 전망대에서
이성수
베틀바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베틀바위
베틀바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베틀바위
베틀바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베틀바위
베틀바위 전망대
주변 풍경
베틀바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12폭포
베틀바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청옥산, 망군대, 고적대, 관음폭포, 학소대 폭포
베틀바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관음폭포(좌)와 학소대 폭포(우)
베틀바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베틀바위
베틀바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베틀바위
베틀바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베틀바위
베틀바위에 관한
안내문
베틀바위 전망대에서
이성수
베틀바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베틀바위
[베틀바위 전망대~두타산성터] 구간
산행로 도중의
미륵바위
미륵바위에 관한
안내문
미륵바위
미륵바위 앞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청옥산, 망군대, 고적대, 관음폭포
미륵바위 앞에서 바라본
관음폭포
미륵바위 옆에 있는
이정표
두타산성터
두타산성터에서 바라본
고적대 능선
12폭포
12폭포에서 바라본
고적대 능선
12폭포에서 바라본
고적대 능선
12폭포
12폭포
12폭포
12폭포에서
이성수
12폭포에서
이성수
[12폭포~마천루 전망대] 구간
산행로 주변의
고드름
[12폭포~마천루 전망대] 구간
산행로에서 바라본
12폭포 계곡
[12폭포~마천루 전망대] 구간
산행로에서 바라본
12폭포
[12폭포~마천루 전망대] 구간
산행로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12폭포
[12폭포~마천루 전망대] 구간
산행로 도중의
암굴
[12폭포~마천루 전망대] 구간
산행로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고적대(1,354m)
[12폭포~마천루 전망대] 구간
산행로 주변의
금강송
[12폭포~마천루 전망대] 구간
산행로에서 바라본
신선봉과
그 뒤로 보이는 고적대
[12폭포~마천루 전망대] 구간
산행로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청옥산, 망군대, 고적대, 관음폭포
두타산 마천루에 관한
안내문
마천루 전망대에서 바라본
신선봉과
그 뒤로 보이는 고적대
마천루 전망대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용추폭포
마천루 전망대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신선봉
마천루 전망대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고적대
[마천루 전망대~쌍폭포] 구간
산행로에서 바라본
마천루 전망대 주변 풍경
[마천루 전망대~쌍폭포] 구간
산행로에서 바라본
마천루 전망대
[마천루 전망대~쌍폭포] 구간
산행로 도중의
금강송
[마천루 전망대~쌍폭포] 구간
산행로
주변 풍경
[마천루 전망대~쌍폭포] 구간
산행로에서 바라본
마천루 전망대
[마천루 전망대~쌍폭포] 구간
산행로에서 바라본
마천루 전망대 주변 풍경
두타산에서 발원한 박달골의 계곡수와
청옥산에서 흘러내리는 바른골의 물이
합수되는
쌍폭포에서
이성수
쌍폭포
쌍폭포
쌍폭포와 용추폭포의
사진
쌍폭포의 2개의 물길 중
두타산 박달골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수
쌍폭포의 2개의 물길 중
청옥산 바른골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수
용추폭포 앞에 있는
용추폭포에 관한
안내문
3단폭포인
용추폭포의
최하단 폭포
[겸재 그림 길 (89) 두타산] 깨달음 얻는 두타산에 수줍게 이름 새긴 겸재
cnbnews 제712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1.11.29 10:47:26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이 가을 겸재를 찾아 떠나는 두 번째 두타행(頭陀行)이다. 도(道)를 구하는 이들은 마음의 두타행을 떠나겠지만 필자는 KTX를 타러 이른 새벽 역으로 향한다. 예전과는 달리 차를 가져가지 않아도 두타산 가는 길은 KTX로도 당일에 다녀올 수 있게 되었다. 강릉 지나 동해역에 도착하는 데는 2시간여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두타산행 시내버스도 탈 수 있고 시간이 안 맞으면 택시를 이용해도 큰 부담은 되지 않는다.
겸재 그림 어디에도 두타산을 그린 그림은 찾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겸재는 두 점의 두타산 그림은 그렸을 것이라는 생각이 필자의 희망사항이다. 오늘도 소설을 쓴다. 소설의 근거는 이런 것이다. 여러 해 전 투타산(頭陀山) 용추폭포(龍湫瀑布)에 겸재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여름 산행길 댓재에서 두타산에 올라 아슬아슬 산길을 내려와 용추폭포를 찾아갔다. 폭포 주변 글자로 보이는 글자는 모두 보려 했지만 끝내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아니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요즈음 겸재 그림을 찾아다니던 참에 마침 지인으로부터 사진 한 장을 받았다. 흐릿하기는 하지만 용추폭포에 남긴 정선, 이병연의 이름을 새긴 각자(刻字)였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초가을 용추폭포를 찾았다. 찾기는 했지만 마침 날도 구름끼고 시각대도 적절치 않아 선명하지가 않았다. 단풍 깊이 든 철 오전시간에 다시 오리라. 마침 두타산 베틀바위 멋진 트레킹 코스도 개방된 즈음이라 최고의 답사가 되리라 기대하며 이 가을 두 번째 두타행에 나섰다. 예상대로 청추(淸秋)의 용추폭(龍湫瀑)에서 겸재와 사천 두 분은 기다리고 계셨다.
용추폭포의 정선, 이병연 각자 위치.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정선과 이병연의 각자(붉은 점으로 표시).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정선과 이병연의 각자가 잘 보이도록 특수촬영한 자료사진.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은 1732년 윤 5월 척주(삼척)부사로 발령받고 1736년 4월 삼척을 떠났다. 5년 가까운 시간을 삼척에서 지낸 것이다. 이 시기 겸재(謙齋) 정선(鄭歚)은 포항 북쪽 청하(淸河) 현감으로 제수되니 1733년 6월부터 모친이 세상을 떠난 1735년 5월까지 약 2년을 삼척의 지척 동해안에서 근무한 것이다. 이 2년 사이 겸재와 사천은 잦은 교유(交遊)가 있었을 것인데 그 기록들이 전하지 못하니 그 흔적들을 찾을 수 없는 아쉬움이 크다. 다행히 이 시기에 함께 한 흔적이 두타산 용추폭포에 나란히 이름을 적은 각자로 남았으니 겸재와 사천을 아끼는 이들에게는 큰 선물이 된 셈이다.
두 분의 이름자는 용추폭포 좌측 바위 틈에 작고 흐릿한 글자로 남아 있다. 이 시기나 전후 시기에 삼척부사를 했던 이들의 이름이 큰 각자로 남은 것에 비하면 참으로 초라하고 보잘 것 없다. 어쩌면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잘 보이지도 않게 이름을 적었으니 다녀간 흔적은 기록하되 당사자 두 사람만 알게 적어 놓은 정표이리라.
이병연의 사천시초(槎川詩抄 卷上)에는 아마도 이 폭포를 모티브로 쓴 시가 아닐까 여겨지는 시 한 수가 전한다. 제목은 “서쪽 골짜기 두(타산) 원천에 우뚝 높은 폭포가 있는데 아직도 이름이 없네.”
구름 잦아진 곳 한 마디로 기이한데 골짜기도 끊겨 바람 돌고 폭포 떨어지네.
습기진 새는 날아 내려올 줄 모르고 푸른 솔은 바람소리 서로를 아우르네.
저 하늘 기색은 빛을 끊었는데 지는 해는 스스로 가득해 소리로 들리는 듯.
둔사, 탈속승은 空이라 탄식하고 산은 깊어 세상사람 알음알이 일 없다네.
西澗源頭。有瀑布絶高。而尙無名之者。
雲梯盡處一呼奇。峽拆風回急澗垂。濕鳥飜飜飛不下。寒松颯颯倒相吹。
中天氣色眞橫絶。落日聲容盛自持。遁士幽僧空歎息。山深不許世人知。
이 시가 용추폭포를 읊은 것일 것이라 추측하는 이유는 전체 모습이 현재 우리가 보는 용추폭포와 상이점이 없다는 점이다. 은둔한 이들 둔사(遁士)나 깊은 곳에 든 승려를 읊은 점도 삼척부사를 지낸 미수 허목 선생의 두타산기(頭陀山記)와 궤를 같이한다. 그 기록에는 미륵봉, 지조암(持祖庵) 산승, 삼화사, 굴에서 살았다는 마의노인(麻衣老人), 고려적 이승휴의 산장 등이 등장하는데 둔사(遁士), 유승(幽僧)을 읊은 사천의 시와 부합한다.
더욱 분명한 것은 서간(西澗: 서쪽 골짜기)이다. 옛 지도에서 보듯이 두타 용추는 삼척읍치에서 보면 서방(西方)에 있다. 또 하나, 폭포(瀑布)가 아직도 이름이 없다(尙無名之者) 하였다. 일찍이 1575년(선조 8)부터 1578년까지 척주부사를 지낸 김효원(金孝元)의 1577년 두타산 유람기인 두타산일기(頭陀山日記)나 앞에 언급한 미수의 두타산기에도 폭포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물론 사천의 척주 시절에도 이름은 없었다.
물가 바위에 ‘용추’라고 폭포 이름을 지은 유한준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겸재는 이 별유천지에서 이름만 새겼을까
이름 없던 그 폭포는 언제 용추폭포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일까? 그 답은 폭포 물가 바위 각자에 있다. 각자(刻字)에는 “兪漢雋 龍湫”(유한준 용추)가 선명하다. 유한준은 누구였을까? 인명사전을 찾으면 1796년 7월에서 1798년 12월까지 척주부사를 지낸 인물이다. 사천보다는 60여 년 뒤인 셈이다. 1797년(정조 21년) 가뭄이 심했는데 이때 새긴 글씨라 한다. 이때 비로소 이 폭포가 용추란 이름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龍湫(용추)보다 더 크게 자신의 이름자(字)를 새긴 그 바위가 왠지 불편하구나. 저 아래 무릉반석에 더 크게 쓴 이 이의 이름자도 그렇고, 죽서루 절벽에 쓴 이 이의 이름자도 요즈음 우리 기준으로 보면 불편하다. 보이지도 않는 곳에 보이지도 않게 이름자를 남긴 선대(先代)의 사천과 겸재가 마음으로 다가오는 날이다.
별유천지 각자.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용추폭포 우측 입구 쪽 바위에 용이 날 듯 흘겨 쓴 초서(草書)인 “別有天地”]
[삼척부사 이최중(李最中)이 1758년 무인년(영조 34년)에 암각한 글씨]]
용추폭포에서 만나는 많은 이름자는 그렇다 하고, 폭포 우측 입구 쪽 바위에 용이 날 듯 흘겨 쓴 초서(草書)가 이곳을 찾는 이들을 당황케 한다. 일반인은 좀처럼 읽기 어려운 세체(書體)인데 분명한 것은 잘 썼다는 점이다. 무어라 쓴 것일까? 옛 삼척 땅(현 삼척시, 동해시)에 남아 있는 각석(刻石)의 글씨를 읽고 설명한 이 지역에서 발행한 책 ‘삼척도호부 암각문연구’의 도움을 받아 읽어 보자. “別有天地” ‘廣陵歸客 戊寅暮春’(별유천지 광릉귀객 무인모춘)이라 한다. 삼척부사 이최중(李最中)이 1758년 무인년(영조 34년)에 여기에 와서 “別有天地(별유천지)” 즉 인간세상이 아닌 세상(仙界)라고 쓴 것이다. 당나라 시인 이태백은 산중문답(山中問答)이라는 시를 남겼다.
묻노니, 그대 왜 푸른 산에 사시는가 問余何事棲碧山
웃을 뿐 답 않으니 마음 절로 한가롭다 笑而不答心自閑
복사꽃 물에 흘러 아득히 떠가는데 桃花流水杳然去
(여긴) 별천지 인간 세상 아니지 別有天地非人間
그런데 여기에서 의문점이 생긴다. 과연 겸재는 이 별유천지에 와서 폭포 그림 한 점 안 그렸을까? 사천은 시(詩)를 쓰고 겸재는 그림을 그려 시화(詩畵)가 앙상블을 이루지 않았을까? 가칭하여 무릉폭(武陵瀑)이거나 두타유폭(頭陀幽瀑)쯤 되는 그림 한 폭 나타났으면 좋겠다.
또 한 수(首) 사천의 시를 따라가자. 역시나 사천시초(槎川詩抄 卷下)에 겸재의 그림 제화시들과 같이 있는 시(詩)이다. 두타산 무릉계곡을 대표하는 무릉반석을 읊은 것이다.
무릉계곡 반석
숲끝 다가오자 하얀 색, 골짜기는 한가지로 펼쳐지고 떨어지네
평평하게 펼쳐진 흠결없는 옥인데, 끝없이 간 바닥 일렁임도 끝 없군
까마귀 지나가니 더욱더 희고, 사람들이 비춰 봐야 본래 희고 희었던 걸
詩 쓰려는 마음 내려놓으려 해도 이 물길에서는 쓰고픈 맘 어이 해?
武陵溪盤石
林端來皓色。洞府一盤陀。平展無瑕玉。長磨不盡波。
鳥過增鶴鶴。人照本皤皤。縱欲題詩去。於渠點染何
사천은 무릉반석, 희고도 넓은 너럭바위에서 풍광에 취해 시를 내려놓으려 해도 그 마음 누를 수 없었다. 곁에 있던 겸재는 어땠을까? 절로 붓을 들어 점염(點染: 화선지를 물들임)하지 않았을까? 단원도 이곳 무릉계(武陵溪)에 와서 무릉반석을 바라보며 그 너머 펼쳐진 두타산을 그렸거늘 겸재인들 무심히 풍광만 즐기다 돌아갔을까? 어느 날 겸재의 무릉반석도(武陵盤石圖)가 세상에 나타나기를 기원하며, 그 그림에는 넓게 펼쳐진 흰 너럭바위와 그 곁으로 흘러 떨어지는 무릉계류(武陵溪流), 그 뒤로 우뚝 솟은 두타(頭陀)와 청옥(靑玉)이 멀리 동해를 바라보는 당당한 위용으로 나타나기를….
무릉계를 그린 단원의 ‘금강사군첩’.
이렇게 소설을 쓰며 두타산 트레킹 길에 오른다. 두타산 베틀바위라 해서 근래에 지자체가 개설한 코스인데 트레킹을 즐기는 이들에게 매력있는 코스로 부상했다. 사실 두타산은 명승 37호로 지정된 승경이 빼어난 곳이기는 한데 일반인이 산행에 나서기에는 무리가 있는 산(山)이다. 두타산이 1353m, 이어지는 청옥산이 1403m, 승경이 빼어난 고적대가 1354m의 고도를 가지고 있으니 일반인이 당일에 올랐다 내려오기는 지나치게 힘든 산이었다. 이들 산들은 또한 백두대간을 구성하는 명산인데 댓재 ~ 두타산 ~ 청옥산 ~ 백복령까지 거리가 무려 30km 가까이 되는 산길이다. 1300m, 1400m 고도를 내려왔다가 다시 오를 수 없어 30km 여를 한 코스로 가야 하니 백두대간 종주길에서 마(魔)의 구간이 두타 ~ 청옥이다. 백두대간 종주 산행에 나섰던 이들은 두타 ~ 청옥 하면 머리를 흔든다. 무릉계곡에서 당일에 오르기도 어렵지, 종주하기는 더욱 끔찍한 산이었기에 계곡 따라 용추폭포까지 다녀가는 관광객 코스가 일반적이었는데 이번에 베틀바위 코스가 개설되니 두타를 사랑하는 온 나라 산꾼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두타산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명산이 화강암인데 비해 석회암산이다. 중국의 기암절벽을 가진 명산들이 대부분 석회암 산이기에 기암절벽을 이루었듯이, 두타산의 속살은 석회암이 오랜 세월 비바람에 녹아내려 기암절벽을 이룬 곳들에 그 진수가 있다. 트레킹길은 베틀바위, 마천루 등 이러한 지형을 가진 산길로 이어진다. 스릴을 느낄 잔도도 만들고 전망대도 만들어 흥미로운 코스로 길을 뚫었다. 코스는 무릉계곡 입구에서 출발하여 산길로 접어들어 베틀바위를 지나는 방향과, 계곡을 지나 용추폭포에서 산길로 드는 역방향 코스가 있는데 어느 방향으로 가든 원점회귀하게 된다.
예전에도 삼척에 오는 이들은 두타산을 가 보고자 했다. 조선조 문인이자 화가 김득신(金得臣, 1604~1684)도 어느 날 두타산을 찾았다.
두타산을 향해 가다가 말 위에서 얻은 시(向頭陀馬上有得)
가도 가도 끝없는 길 行行路不盡
일만 물줄기에 일천 산 봉우리 萬水更千峰
문득 가까이 절 있음 알겠으니 忽覺招堤近
저 숲 끝에 저녁 종소리 林端有暮鍾
앞에서 언급한 미수 허목 선생도 이곳 부사 시절 두타산을 찾고 기록을 남겼다.
두타산기(頭陀山記)
6월에 두타산으로 들어갔다. 삼화사(三花寺)는 두타산에 있는 옛 절로 지금은 폐사(廢寺)가 되어 연대를 알 수 없는데, 가시덩굴이 우거진 속에 허물어진 옛 탑과 철불(鐵佛)만 남아 있다. 산속으로 들어가 보니 내(川) 위로는 온통 무성한 소나무와 거대한 바위이다. 바위가 긴 여울을 굽어보며 서로 마주하여 층대(層臺)를 이루고 있으니, 이 바위를 ‘범바위(虎巖)’라고 한다. 층대 위를 따라 서쪽으로 가서 바위벼랑을 오르면, 그곳이 ‘사자목(獅子項)’이다. 내 위의 작은 고개와 바위벼랑 아래는 물이 맑고 바위가 희니, 그 너럭바위를 ‘마당바위(石場)’라고 한다. 바위 동굴이 넓게 확 트여 물이 바위 위로 흐르는데, 맑고 얕아 건널 만하였다. 날이 저물자 소나무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마당바위를 어떤 사람은 ‘신선이 바가지를 버린 바위(山人棄匏巖)’라고 하였다.
북쪽 벼랑의 석대(石臺)를 ‘반학대(伴鶴臺)’라고 한다. 이곳을 지나면 산이 온통 바위이다. 높고 거대한 바위가 깎아 놓은 듯하고, 앞에 있는 미륵봉(彌勒峯)은 더욱 진기하였다. 마당바위를 지나 서북쪽으로 올라가면 중대사(中臺寺)가 있다. 지난해에 산불이 나서 다 타 버린 것을 산승(山僧)이 삼화사로 옮겨지었다. 삼화사가 가장 아래에 있고, 중대사는 산 중턱의 내와 바위가 엇갈리는 지점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절이다. 그 앞의 계곡을 ‘무릉계(武陵溪)’라고 한다. 산속의 내와 바위 이름은 모두 옛날에 부사를 지낸 김후 효원(金侯孝元)이 명명한 것이다. 김후의 덕화(德化)는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으며, 부내에 ‘김 사군 사당(金使君祠)’이 있다.
북쪽 폭포는 중대사 뒤에 있어 바위 동굴이 가파르고 험하나, 그 아래는 산의 바위가 평탄하고 점차 아래로 내려갈수록 위험한 바위가 없어 사람들이 올라가 노닐 만하였으니, 산의 물이 흘러내리고 바위 위는 100보가 넘었다. 중대사를 지나서는 암벽을 더위잡고 기어올랐는데, 두 발을 함께 디디고 갈 수 없을 정도이다. 학소대(鶴巢臺)에서 쉬었다. 이곳에 이르자 산의 운기(雲氣)가 더욱 성하여 해가 높이 떴는데도 아침 노을이 걷히지 않았다. 이끼 낀 바위에 앉아 폭포를 구경하였는데, 이 바위를 ‘천주암(濺珠巖)’이라고 한다. 앞 봉우리에는 옛날에 학의 둥지가 있었다. 지금은 학이 날아들지 않은 지 60년이 되었다고 한다.
구름사다리를 몇 층 올라 지조암(持祖庵)을 유람하였다. 이곳은 산의 바위가 다한 곳으로 옆에 석굴이 있고, 석굴 안에는 마의노인(麻衣老人)이 쓰던 토상(土床)이 있다. 남쪽으로 옛 산성이 바라다보인다. 북쪽은 산봉우리가 가장 높은데 길이 끊겨 올라갈 수 없고, 동쪽 기슭의 석봉(石峯)은 깊은 못까지 와서 멈추었다. 동북쪽의 다음 봉우리는 동쪽으로 뻗다가 남쪽으로 내려가 석록(石麓)이 되어 흑악(黑嶽)의 북쪽 벼랑과 마주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로 냇물이 흘러나온다. 또 서쪽의 세 개 석봉은 못 위의 석봉과 나란히 솟았는데, 가장 서쪽에 있는 석봉이 가장 높다. 위에 움푹 파인 돌이 있어 이끼가 고색창연하고 물이 맑으며, 높이가 한 자가량 되는 노송(老松)이 있다. 그 봉우리들은 각각 세 발짝이면 올라가는데, 아슬아슬하여 굽어볼 수가 없으며, 또한 나란히 설 수도 없다. 그 가운데 봉우리는 큰 바위 세 개가 겹쳐진 것으로 한 발짝만 움직여도 흔들렸다. 그래서 이름을 ‘흔들바위(動石)’라고 한다. 그 밑에는 냇물이 고여 있다. 넘어진 항아리같이 생긴 바위가 넓게 골짜기를 독차지하고 있고, 물이 그 가운데에 고여 있는데, 매우 깊어 굽어보아도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이다. 가뭄이 들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낸다. 그 물줄기의 근원에 옛날 상원사(上院寺)의 폐허가 있는데, 어떤 사람은 여기가 고려 때 이승휴(李承休)가 머물던 산장이라고 하였다.
산에서 내려온 뒤에 기억을 더듬어 기록하였기 때문에 저녁때 본 마당바위와 아침에 본 학소대를 거꾸로 기록하였다. 미수는 기록한다. 6월 3일.
頭陁山記
入頭陁山。三花寺者。頭陁古伽藍。今廢不知年代。叢棘中。唯有古塔,鐵佛敗壞。入山中。川上皆深松巨石。石臨脩瀨。相對爲層臺。謂之虎巖云。從臺上西行。登石崖曰獅子項。川上小嶺石崖下。水淸石白。其盤石曰石場。巖洞開豁。水流石上。淸淺可涉。日夕松影毿毿。石場。或曰山人棄匏巖云。北崖石臺曰伴鶴臺。過此則山皆石。危石如削。前有彌勒峯。尤奇。過石場。西北上中臺。前年山火燒盡。山僧移作二花寺。三花最下。中臺在山中川石之衢。最佳寺。其前溪曰武a098_215c陵溪。山中川石之名。皆舊使君金侯孝元名之。金侯之化至今傳之。府內有金使君祠。北瀑在中臺後。石洞嶄巖。其下則山石平。而漸下無亂石。人可躋而遊山。水流瀉。石上過百步過中臺。攀傅巖壁。不得竝足而行。憩鶴巢臺。至此。山氣益嵯峨。日高朝霞未斂。坐石苔。觀瀑布。謂之濺珠巖。前峯舊有鶴巢。今不至六十年云。躡雲梯數層。遊指祖。此山石窮處。傍有石窟。中有麻衣老人土床。南望古城。其北嶺最高。路絶不可登。其東麓石峯。臨淵水而止。其東北次峯。東而南下。爲石麓。與黑嶽北壁相對。其中川水出焉。又西三石峯。與淵上石峯竝峙。而其最西者最極。上有石圩。苔老水淸。有老松高尺許。峯各三。躡足而上。危不可俯。亦不可竝立。其中峯危石三重。躡一足則搖。故名曰動石云。其下川水積焉。石如踣瓮。其廣專壑。水積其中。水深黑。不可俯而窺。旱則禱雨於此。水窮源。有古上院廢墟。或曰。此高麗李承休山居云。旣下山。追記。故石場夕而鶴臺朝。逆記之。眉叟。記。六月三日。(기존 번역 전재)
정하언의 초서체 글을 재현해 놓은 각자.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무릉계곡의 대표적인 석각인
‘무릉선원武陵仙源’, ‘중대천석中臺泉石’, ‘두타동천頭陀洞天’이다.
그 아래에 ‘옥호거사서신미중춘玉壺居士書辛未仲春’이 있다.
옥호거사가 신미년 봄에 글을 남겼다는 의미다.
무릉선원은 도교 신선사상을, 중대천석은 유교사상을, 두타동천은 불교사상을
나타낸다고 한다.]
트레킹 코스를 돌아내려 오면 앞서 언급한 너럭바위 무릉반석을 만난다. 무릉계는 여기에서 시작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온갖 이름 각자(刻字)와 시문(詩文)이 1500여 평 너럭바위를 덮었다. 눈에 띄는 것은 금란계원들 명단이다. 일제강점기 향교 폐지에 대항하여 유생들이 만든 조직이라 한다. 북평에 세웠던 정자 금란정이 1958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대단한 이들의 이름이나 싯구가 바위를 덮었지만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각자는 1750년 10월에서 1752년 11월까지 삼척부사를 지낸 옥호거사 정하언(鄭夏彦)이 1751년 신미년에 쓴 큰 초서 글씨이다. 반석 길 옆에 재현한 글씨판도 세워 놓았다.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 무릉 신선 노니는 곳, 가운데 대에 샘솟는 돌들 두타의 신선경)’.
일제강점기 때 향교 폐지에 대항한 조직인 ‘금란계원’ 유생들 명단.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이런 신선 세계 옆에는 불타(佛陀)의 세계 삼화사(三和寺)가 있다. 본래 1.5km 쯤 하류에 있었는데 쌍용시멘트가 세워지면서 옛 절터로 옮겨 왔다 한다. 신라적부터 법등을 밝힌 절이라 하는데 적광전(寂光殿)에는 보물 1292호로 지정된 미남 철조노사나불(鐵造盧舍那佛)이 지긋이 내려다보시고 그 앞마당에는 보물 1277호 3층 석탑이 두타행(頭陀行: 깨우침의 길)에 들어가 계신다.
겸재의 그림을 만나지 못한 아쉬움에 자꾸 뒤가 돌아다보이는 날이다.
이제 사하촌(寺下村)으로 내려온다. 신선 세계와 부처님 세상에서 우리 세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타령이나 하나 읊어봐야겠다.
頭陀行을 하오리까
武陵谷에 가오리까
온다던 가을은 코끝도 뵈지 않고
성급한 내 마음만 저만치 앞서 간 날
山은 안 잡아도 폼이 나고
물은 비우지 않아도 무심한데
그게 물맘(水心)인지 無心인지 당최 알 수 없는 길
높을수록 깊은 길
龍湫瀑 금간 바위
겸재와 사천은 영원하자 깐부하자 이름字 새겼지만
눈비비고 물뿌려도 알아보기 어렵구나
두 분 선생님
살아 보셨으니 아시겠구려
남는 게 뭐 있습니까
時間 넘어 뭐 좀 남습니까
에라 모르겠다.
오늘 여기 잘 살아 보자
眞하게는 못하겠고
착하게는 살아 볼까
예쁘게나 살아 볼까
밤바다 바라보며 폼도 잡고
살아 볼까
頭陀 가던 날.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용추폭포 앞에 있는
발바닥 바위에 관한
안내문
용추폭포 앞에서 바라본
발바닥 바위
3단 폭포인
용추폭포의
최상단폭포와 중단 폭포
2022년12월04일 동해시 두타산 [베틀바위&12폭포&마천루 전망대&쌍폭포&용추폭포&학소대&관음암&삼화사&금란정] 산행기
산 : 동해시 두타산 [베틀바위&12폭포&마천루 전망대&쌍폭포&용추폭포&학소대&관음암&삼화사&금란정]
산행코스 : [ 무릉계곡 주차장-베틀바위 산행로 입구-베틀바위 전망대-미륵바위-두타산성터 왕복(600m)-12폭포-마천루 전망대-쌍폭포-용추폭포-학소대-관음암-삼화사-금란정-무릉계곡 주차장 ] (약 12km)
일시 : 2022년 12월 04일(일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동해시 삼화동 : 최저기온 0도C, 최고기온 6도C]
산행코스 및 산행 구간별 산행 소요시간 (총 산행시간 5시간9분 소요)
07:01~11:49 “좋은사람들” 버스로 서울 지하철 양재역 12번 출구 전방 국립외교원 앞에서 출발하여 삼척시 하장면 두타로 680 번지에 있는 댓재 휴게소를 경유하여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 858-3 번지에 있는 무릉계곡 주차장으로 이동
(287km) [4시간48분 소요]
[무릉계곡 입장요금 : 2천원]
11:49~12:45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 858-3 번지에 있는 무릉계곡 주차장에서 산행 출발하여 베틀바위 전망대로 이동
12:45~12:56 사진촬영 후 휴식
12:56~13:04 미륵바위로 이동
13:04~13:07 사진촬영
13:07~13:27 두타산성터로 이동
13:27~13:42 12폭포로 이동
13:42~13:48 사진촬영
13:48~14:25 마천루 전망대로 이동
[육중한 바위병풍들이 하늘 높이 걸려있어 마천루(摩天樓)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마천루 전망대에서 신선봉과 용추폭포를 조망할 수 있다.]
14:25~14:30 사진촬영
14:30~14:48 두타산에서 발원한 박달골의 계곡수와 청옥산에서 흘러내리는 바른골의 물이 합수되는 쌍폭포로 이동
[정면에서 바라볼 때 쌍폭포의 왼쪽 폭포수는 두타산 박달골에서 흘러내리는 물이고, 오른쪽 폭포수는 청옥산 바른골에서 낙하하는 물이다.]
14:48~14:51 사진촬영
14:51~14:55 청옥산에서 발원한 바른골의 계곡수가 용이 승천하는 모양으로 상탕, 중탕, 하탕 등 삼단으로 떨어지는 용추폭포로 이동
[무릉계곡 최상류에 있는 용추폭포는 마치 용이 승천하는 듯한 모양을 지닌 폭포로 상탕, 중탕은 옹기 항아리 같은 형태로, 하탕은 진옥색의 큰 용소로 이뤄져 있다. 폭포 한쪽에는 어느 묵객이 새겨 놓은 ‘별유천지別有天地’라는 대형석각이 용추폭포의 자연경관을 적확하게 대변해 준다. 1796년 7월에서 1798년 12월까지 척주부사를 지낸 유한준이 용추폭포 하단의 물가 바위에 각자로 ‘용추龍湫’라 새겨 놓았다.]
14:55~15:03 사진촬영 후 휴식
15:03~15:35 학소대로 이동
[우뚝 선 높은 절벽과 경사진 암반 사이로 휘어져 쏟아지는 와폭(臥瀑: 암반에 붙어서 내려가는 폭포)의 하얀 포말이 절경이다.]
15:35~16:10 관음암으로 이동
16:10~16:14 사진촬영
16:14~16:45 삼화사로 이동
16:45~16:51 무릉반석 옆에 있는 금란정으로 이동
16:51~16:58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 858-3 번지에 있는 무릉계곡 주차장으로 원점회귀하여 산행 완료
16:58~17:24 간식 후 휴식
17:24~20:44 “좋은사람들” 버스로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 858-3 번지에 있는 무릉계곡 주차장을 출발하여 서울 지하철 양재역으로 귀경 (254km) [3시간20분 소요]
동해시 두타산 [베틀바위 전망대&마천루 전망대&쌍폭&용추폭포]
산행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