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기념관~관수교] 구간
탐방로에서 바라본
관수교
종로구 관수동 129번지와 중구 수표동 122번지 사이 청계천에 있는 다리이다. 다리 이름은 인근의 동명인 관수동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이곳에 청계천 준설사업을 위한 준천사를 설치하고 청계천의 수위를 관측하였으므로 1918년 일제가 지금의 청계천3가 사거리에 다리를 놓고 관수교라고 하였다. 청계천 복개로 다리가 없어졌다가 2005년 9월 30일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전통 한옥의 대청양식을 도입한 아치교 형태로 새로 건설하였다. 폭 25.5m, 길이 22.5m로 대림산업(주)과 삼성건설(주)에 의해 준공되었다. 관수교는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7번째 다리이다.
[관수교~세운교] 구간
탐방로에서 바라본
세운교
종로구 장사동 182번지와 중구 산림동 200번지 사이 청계천에 있는 다리이다. 다리 옆에 세운상가가 있어 다리 이름을 세운교라고 하였다. 세운상가에 조명가게가 많아 이를 특성화하여 다리에 빛을 표현하였다.
조선시대 이 자리에는 효경교(孝經橋)란 다리가 있었다. 효경교는 1958년에 청계천이 복개되면서 사라졌다.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옛 효경교 자리에 다리를 새로 만들고 근처에 있는 세운상가의 이름을 따서 세운교라 이름 붙였다. 시공사는 대림산업이며 2005년 9월 30일에 완공했다. 폭은 25.5m이고, 길이는 23.4m이다. 세운교는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8번째 다리이다.
[세운교~배오개다리] 구간
탐방로에서 뒤돌아본
세운교
[세운교~배오개다리] 구간
탐방로에서 바라본
배오개다리
종로구 예지동 189번지와 중구 주교동 99번지 사이 청계천에 있는 다리이다. 다리 이름은 현 종로4가 네거리에 배오개[이현(梨峴)]라는 고개가 있던 데서 유래되었으며, 배오개교라고도 불린다. 다리 형상은 배오개길을 넘는 사람들의 만남을 상징화하였다. 폭 25.5m, 길이 23.4m로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2005년 9월 30일 대림산업(주)에 의해 준공되었다. 배오개다리는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9번째 다리이다.
[배오개다리~새벽다리] 구간
탐방로에서 바라본
새벽다리
광장시장과 방산종합시장 사이에 있는 다리이다. 다리 동북쪽에 광장시장의 남문이 있고, 서남쪽에 방산종합시장의 북문이 있다. 그래서 청계천의 다리들 중 가장 사람 사는 냄새가 나고 활기가 넘치는 곳 중 하나이다.
이름은 순우리말이며 서울특별시지명위원회에서 지었다. 주변에 큰 재래시장들이 있기에 새벽시장의 활기와 향수의 의미를 담아 지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는 없었고 2000년대에 청계천 복원공사를 하면서 새로 지은 다리이다. GS건설과 현대산업에서 시공했으며 2005년 9월 30일에 완공했다. 새벽다리는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10번째 다리이다. 길이 23.4m, 폭 6m 규모이다. 차량은 다닐 수 없고 오직 사람만 통행할 수 있다.
[새벽다리~마전교] 구간
탐방로에서 바라본
마전교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5가와 을지로(乙支路) 6가(방산동) 사이의 청계천(淸溪川)에 있던 조선시대의 다리이다. 조선 태종(太宗) 때는 창선방교(彰善坊橋)로 부르다 성종(成宗) 때부터는 태평교(太平橋)로 불렀다. 마전교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영조(英祖) 때로, 다리 옆 광장에서 마필을 매매하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말전다리라고도 한다. 2003년 7월부터 청계천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세워지는 22개 다리 가운데 마전교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다산교(茶山橋)와 함께 2004년 12월 12일 개통되었다. 중구 청계5가의 교차로 위에 있으며, 규모는 연장 21.6m, 너비는 40.5m이다. 왕복 7차로이며, 자동차와 사람이 모두 다닐 수 있다. 마전교는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11번째 다리이다.
[마전교~나래교] 구간
탐방로에서 바라본
나래교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5가 321번지와 중구 방산동 19번지를 연결하는 위치에 있다.
나래는 날개이다. 다리 주변에 있는 의류상권들이 세계 패션의 1번지로 힘껏 비상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는 없었고 2000년대에 청계천 복원공사를 하면서 새로 지은 다리이다. GS건설과 현대산업에서 시공했으며 2005년 9월 30일에 완공했다. 나래교는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12번째 다리이다.
길이 22.8m, 폭 6m 규모이다. 차량은 다닐 수 없고 오직 사람만 통행할 수 있다. 구조물이 나비 날개 모양이다.
[나래교~전태일다리(버들다리)] 구간
탐방로에서 뒤돌아본
나래교
[나래교~전태일다리(버들다리)] 구간
탐방로 옆 청계천에서
헤엄치고 있는
잉어 떼
[나래교~전태일다리(버들다리)] 구간
탐방로에서 바라본
전태일다리
종로구 종로5가 319번지와 중구 을지로6가 17번지 사이 청계천에 있는 다리이다. 보행자의 이동 편리를 위해 차도와 보도를 분리하여 퍼걸러를 설치함으로써 도심 속의 정원을 연출하였다. 다리 이름은 과거 오간수문 상류에 왕버들이 많았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버들다리는 전태일다리로도 불린다. 버들다리 가운데에는 노동운동가 전태일을 기리는 전태일 열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2005년 9월 30일 GS건설과 현대산업에 의해 폭 17m, 길이 23.3m의 다리로 준공되었다. 버들다리는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13번째 다리이다.
버들다리로도 불리는
전태일다리
전태일다리의
전태일 반신상
전태일 반신상 밑에 있는
표지석
전태일다리에 있는
전태일 소개문
[전태일다리(버들다리)~오간수교] 구간
탐방로에서 바라본
오간수교
청계천 물줄기가 도성을 빠져나가는 지점, 즉 동대문에서 을지로5가로 가는 청계천에 놓여 있던 다리이다. 조선시대 한성에 성곽을 쌓으면서 청계천 물이 원활하게 흘러갈 수 있도록 아치형으로 된 5개의 구멍을 만들어 홍예교라고도 하였다. 2003년 7월부터 청계천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청계천 역사유적을 발굴할 때 오간수문의 아래쪽 끝받침과 홍예(虹霓:무지개 모양의 구조물) 기초부, 돌거북 등이 발굴됨에 따라 2004년부터 복원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교통문제로 예전의 오간수문으로 복원하지 못했고 지금의 오간수교를 만들었다. 대신 오간수교 북측의 동쪽 벽면에 오간수문을 재현한 구조물을 설치했다. 오간수교는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14번째 다리이다.
서울 청계천 유적에 관한
안내문
청계천이 복원 이후 최고 수위인
4.72m를 기록한
2010년9월21일
조선 영조대왕이
청계천 바닥의 퇴적 모래를 준설했던 일을
기리기 위해
신하들이 지은
준천가
오간수교에는 오간수문이 없다
오마이뉴스 기사 입력일 : 2006. 8. 31.
[오마이뉴스 이정근 기자]
청계천이 복원된 지 1년이 가까워온다. 그동안 수많은 국내외 관람객이 다녀갔다. 심지어 지방에서 관광버스를 대절하여 찾을 만큼 서울의 관광명소로 등장했다. 하지만 흐르는 물만 구경할 뿐. 청계천에 살아 숨 쉬는 문화와 역사를 제대로 봤는지 의아스럽다. 청계천에 가면 역사가 살아있다.
조선왕국 5백년 도읍지의 숨결이 살아있는 청계천은 곳곳에 문화유적이 남아있다. 조선시대 제일 크고 넓었다는 광통교와 홍수를 예방하기 위한 조상들의 지혜가 담겨있는 수표교가 있다. 또한 조선개국이래 최대의 토목공사가 벌어진 오간수문이 있다. 하지만 청계천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제대로 원형을 살리지 못하여 안타깝다.
오간수교와 오간수문을 혼동하는데 오간수교와 오간수문은 분명히 다르다. 오간수문은 5칸의 아치형 수문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수문위에 성벽 따라 조그만 길이 있었지만 백성들의 통행을 위한 길이라기보다 수문을 관리하고 경비하는 군졸들의 순라길 이었다.
오간수문은 한양 성곽을 따라 흥인문과 광희문 사이를 연결하는 수문으로서 원형이 살아 있다면 당시의 건축술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인데 성벽과 함께 사라져 아쉽다.
오간수교는 1907년 수문과 성벽을 헐어내고 만든 다리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때부터 비로소 일반인들이 청계천 남북을 잇는 중요 교통로로서 편리하게 이용했다. 뿐만 아니라 바로 인근에 경성전력회사가 들어오고 지금 종합시장 자리에 전차 차고지가 생기면서 서울 장안의 교통 중심축으로 떠올랐다. 여기에서 출발한 전차가 종로와 을지로를 거쳐 마포, 용산, 영등포, 영천으로 연결되었다.
조선 초기. 한양을 도읍지로 택한 개국공신들은(그중에서 정도전은) 북악아래 조선의 법궁 경복궁을 짓고 좌청룡 우백호를 연결하는 성벽을 쌓기로 계획했다. 우백호에 해당하는 인왕산과 북악산 그리고 좌청룡 타락산(駝酪山, 지금의 낙산) 과 목멱산(남산)을 잇는 환상 형 성벽이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타락산과 목멱산을 연결하려는 데 청계천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계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지상과제가 떨어졌지만 그 당시 축성기술로는 커다란 난제였다. 당대의 엘리트들이 머리를 맞대고 몇날 며칠 궁리 끝에 생각해낸 것이 수문을 쌓고 그 위에 성벽을 쌓자는 안이었다. 총책임을 맡은 정도전은 무릎을 쳤다. 그 당시로는 굿 아이디어였고 신기술이었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 오간수문이다.
한양성곽을 쌓고 4대문과 4소문을 통제하니 도성은 철웅성이었다. 하지만 빈틈은 있는 법. 죄를 짓고 한양을 몰래 빠져나가려는 범죄자들이 야음을 틈타 오간수문을 이용했고 명종 때 탐관오리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임꺽정 무리가 도성에 들어와 전옥서를 부수고 달아날 때 오간수문을 통하여 유유히 한양을 빠져 나갔다.
또한, 조선시대 최대의 토목공사가 벌어졌던 곳이 청계천이며 핵심 포인트가 오간수문이다. 자유롭게 흐르던 물에 수문을 설치하고 그 수문에 경비 목적으로 쇠창살을 박아놓으니 부유물이 끼고 토사가 쌓여 조금만 비가와도 청계천이 범람하여 도성은 물에 잠기고 홍수 피해가 컸다. 세종 이후 준설은 하지 않은 채 300여년을 방치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조선실록을 살펴보면 효종 5년(1654년) 6월 8일. '큰비가 내려 궐내에 물이 넘치고 익사자가 있었다' 고 기록되어 있다. 궐내라 하면 창덕궁을 법궁으로 사용하고 동궐(창경궁)을 활용하고 있던 시절이므로 창덕궁보다 지대가 낮고 궐내에 옥류천이 흐르는 창경궁을 지칭하겠지만 청계천 수면과 창경궁 위치를 상상해보면 도성의 피해가 얼마나 컸는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이에 1760년 영조대왕은 대대적인 준설 공사를 펼친다. 그렇다고 요즘처럼 벼락치기 공사가 아니다. 백성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하여 준비기간만 8년이 걸렸다. 공사 중에도 신하들의 반대가 거세었다. 특히 유척기가 "퍼 올린 모래가 비가 오면 쓸려 내려가 개천이 다시 막히고 말 것입니다" 고 아뢰자 "100년은 안심할 것이다. 경은 수작하지 말고 물러가라"고 강한 의지를 표명했다.
조선 개국 이래 최대의 토목공사, 청계천 준설
영조 36년. 청계천 준설을 목적으로 한 임시관청인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하고 총책임자에 호조판서 홍봉한을 임명했다. 홍봉한은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이며 사도세자(장조)의 장인이다. 이처럼 막중한 자리에 세자의 장인을 앉힌 것은 영조대왕이 청계천 준설을 얼마만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느냐를 알 수 있다.
연인원 21만5300명이 동원된 조선 최대 토목공사였다. 당시 한양 인구로 봐서 대단한 인력 동원이다. 장비라곤 삽과 소달구지 밖에 없던 그 시절에는 모든 것을 인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팔도에서 징발하듯이 인력을 동원했다. 예산도 막대했다. 궁에서 내려 보낸 3만5000냥의 현금과 2300석의 쌀이 투입되었다.
2월 8일부터 4월 15일까지 57일간 벌어진 공사 현장에서 퍼 올린 토사가 산을 이루었다. 그 때 만들어진 산이 가산(假山)이라는 이름으로 조선 말엽까지 오간수문과 마전교 사이에 있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에 만들어진 둔덕과 같은 인공 산이다. 마전은 떡을 파는 떡전, 쌀을 파는 싸전 하듯이 말(馬)을 거래하던 곳으로서 방산동 부근에 있었다.
또한 부실공사를 방지하고 후대의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공사를 위하여 공사에 실명제를 도입하고 모든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도록 어명을 내렸다. 그러한 연유로 <준천사실>과 <준첩도>가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온다. <준첩도>와 <준천사실>은 <조선왕조실록> <지봉유설> <열하일기> <성호사설> 등과 함께 조선시대 명저로 손꼽힌다.
영조 임금도 창덕궁에 앉아 보고만 받는 것이 아니라 직접 현장에 나가 공사를 독려했다. 그만큼 준설공사는 왕에게도 지대한 관심사항이었다. 공사 초창기 광통교를 참관한데 이어 공사가 마무리될 무렵, 4월 9일에는 오간수문을 직접 시찰하고 공사에 참여한 관원과 백성들을 치하했다. 그 당시를 묘사한 그림이 <준첩도>에 나와 있는 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다.
<준첩도>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짚고 넘어갈 이야기가 있다. 청계천 6가 오간수교 부근에 <준첩도>의 한 부분이 도자 타일로 재현되어 있다. 부산시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어전준천제명첩>에 있는 수문상친림관역도를 현대적인 기법으로 재현한 도자 그림이다.
청계천이 복원 개통된 이후 타일로 재현된 <준첩도>의 그림이 "틀렸다. 아니다. 맞다"라는 공방이 오고 간 적이 있다. 옛 기록과 고서화를 알면 우스운 얘기다. 현재까지 발굴된 <준첩도>는 8가지가 전해져 온다. 미공개 <준첩도>가 얼마나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가짓수도 많고 소장처도 다양한 준천첩
1.준천첩(濬川帖.호암미술관 소장) 2.준천계첩(濬川稧帖. 개인 이해철 소장) 3.준천계첩(濬川稧帖. 미국 버클리대 소장) 4.준천시사열무도(濬川時射閱武圖. 규장각 소장) 5.제신제진도첩(諸臣製進圖帖. 경남대박물관 소장) 6.어전준천제명첩(御前濬川題名帖. 부산시립박물관 소장) 7.어제준천제명첩(御製濬川題名帖. 서울 역사박물관 소장) 8.준천당랑시사연구첩(濬川堂郞試射聯句帖.고려대 박물관 소장)
왜 이렇게 가짓수도 많고 이름도 각각일까? 재질도 비단에 그린 것이 있고 종이에 그린 것이 있다. 헷갈리지만 그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해가 된다. 사진을 찍어서 여러 장 뽑듯이 복사한 것이 아니다. 궁중화원들이 하나의 그림을 맡아서 각각 그렸다. 그리고 그림을 받을 사람이 정해져 있었다.
임금님에게 바칠 그림. 공조판서에게 올릴 그림. 규장각에 보관 할 그림. 현장을 지휘했던 공사감독에게 전달할 그림. 하급 관리들이 보관할 그림 등등 심지어 오간수교에 재현된 영조대왕이 나오는 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가 있는 <준천첩>이 있는가 하면 아예 왕이 등장하지 않은 준천도가 있다.
이것 때문에 "이본이다","그림이 틀렸다" 논쟁하는 것은 난센스다. 동명 이본도 아니고 틀린 그림도 아니다. 모두가 맞는 그림이다. 하나같이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다만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 중이던 어본(御本)을 프랑스 함대가 약탈해가 아직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은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조선 영조대왕이
청계천 바닥의 퇴적 모래를 준설했던 일에
종사한 사람들을
치하한 글에 관한
안내문
조선 영조대왕이
청계천 바닥의 퇴적 모래를 준설했던 일에
종사한 사람들을
치하한
어필
오간수교가 없어지기 전의
사진
원래 자리가 아닌
청계천변의 벽에 재현해 놓은
오간수교
오간수교 옆에서 바라본
두타 타워
2022년 12월 10일(토요일) 서울 [ 청계천&전태일 기념관&동대문 디자인 프라자(DDP)&청계천 기념관 ] 탐방기 탐방지 : 서울 [ 청계천&전태일 기념관&동대문 디자인 프라자(DDP)&청계천 기념관 ] [1760년 영조의 준천 당시에 청계천 본류에는 모전교, 광통교, 장통교, 수표교, 하랑교, 효경교, 마전교, 오간수문, 영도교 등 9개의 다리가 있었다.] 탐방코스 : [ 5호선 광화문역 5번 출구~모전교~광통교~광교~장통교~삼일교~수표교~전태일 기념관~관수교~세운교~ 배오개다리~새벽다리~마전교~나래교~전태일다리(버들다리)~오간수교~DDP~맑은내다리~다산교~영도교~황학교~비우당교~무학교~두물다리~청계천 박물관~고산자교~신답철교~제2마장교~ 용답동과 사근동을 연결하는 인도교인 용답나들목교~송정동과 사근동을 연결하는 인도교인 세월교(洗越橋)~청계천과 중랑천의 합수지점~살곶이다리~성동교~한양대역 3번 출구 ] (10km) 탐방일 : 2022년 12월 10일(토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종로구 관수동 : 최저기온 영하 1도C, 최고기온 7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 4시간16분) 07:45~08:16 연신내역에서 3호선 지하철을 타고 종로3가역으로 가서 5호선으로 환승하여 광화문역으로 이동 [31분 소요] 08:16~08:25 서울 5호선 광화문역에서 탐방 출발하여 종로구 세종로 1-68 번지에 있는 광화문역 5번 출구로 나와서 청계광장을 지나 청계천의 첫번째 다리인 모전교(毛廛橋)로 이동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종로구 서린동 11번지와 중구 무교동 14번지 사이 청계천 무교동길에 다리를 만들고 옛 이름을 따서 모전교라고 하였다. 다리 이름은 이 근처에 과일을 팔던 모전(隅廛)이 형성되어 있던 데서 유래하였다. 폭 23m, 길이 19.5m로 대림산업(주)과 삼성건설(주)에 의해 2005년 9월 30일 준공되었다.] 08:25~08:28 사진촬영 08:28~08:30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2번째 다리인 광통교(廣通橋)로 이동 [조선시대 도성 내에서 가장 큰 다리로 길이 약 12m, 폭 15m로 길이보다 폭이 넓은 다리였다. 1958년에 청계천 복개공사가 시작되면서 광통교의 난간만 창경궁·창덕궁 등으로 이전되었고 다리 본체는 그대로 다시 묻히게 되었다. 이후 2005년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었다. 광통교는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두번째 다리이다. 광통교에 놓여진 석물인 신장석과 우석(隅石) 등에 새겨진 세련되고 정교한 조각은 당대 최고의 석공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예술적 가치가 높다.] 08:30~08:33 사진촬영 08:33~08:35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3번째 다리인 광교(廣橋)로 이동 [2003년 7월 시작된 청계천 복원공사의 일원으로 조선시대의 대광통교가 원래 있던 자리에 광교가 새롭게 놓였다. 광교는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세번째 다리이다. 광교에서 청계천 상류 쪽으로 155m쯤에 대광통교를 복원한 광통교가 놓여 있다.] 08:35~08:41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4번째 다리인 장통교(長通橋)로 이동 [서울특별시 중구 장교동(長橋洞) 51번지와 종로구 관철동(貫鐵洞) 11번지 사이의 청계천(淸溪川)에 있던 조선시대의 다리로 조선시대 5부 52방 가운데 하나인 장통방(長通坊)이 있던 자리라 하여 장통교라는 이름이 붙었다. 청계천을 복개할 때 없어졌는데, 2003년 7월부터 추진된 청계천복원사업의 일환으로 2005년 새롭게 건설되었다. 장통교는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네번째 다리이다.] 08:41~08:46 사진촬영 08:46~08:49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5번째 다리인 삼일교(三一橋)로 이동 [종로구 관철동 85번지와 중구 장교동 86번지 사이 청계천 삼일로에 있는 다리이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한 뒤 전국에서 일제의 탄압에 항거하는 시위운동을 벌였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도로 이름을 삼일로라 하였고 다리 이름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다리 인근의 인사동과 명동성당 등을 연계한 근대 건축의 이미지를 반영하고 있다. 2005년 9월 30일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폭 43.5m, 연장 22.6m로 대림산업(주)과 삼성건설(주)에 의해 준공되었다. 삼일교는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5번째 다리이다.] 08:49~08:53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6번째 다리인 수표교(水標橋)로 이동 [1420년(세종2)에 만들어졌다. 당시 이곳에 마전(馬廛)이 있어서 마전교라 불렀으나, 1441년(세종 23)에 다리 옆에 개천의 수위를 측정 하기 위해서 수표석(水標石)을 세운 이후 수표교라고 하였다. 2005년 9월 30일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기존의 수표교를 청계천으로 옮겨오지 못해 임시로 종로구 관수동 105번지와 중구 수표동 54번지 사이 청계천에 다리를 가설하고 수표교라고 부르고 있다. 이 다리는 폭 8m, 길이 23.3m로 대림산업(주)과 삼성건설(주)에 의해 준공되었다. 수표교는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6번째 다리이다.] 08:53~08:56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계천로 105(관수동) 번지에 있는 전태일(全泰壹) 기념관으로 이동 [노동운동가 청년 전태일의 일대기를 담아 그를 기념하기 위해 설립한 기념 공간으로, 청년 전태일이 활동했고 분신 항거로 했던 장소인 종로구 청계천로 105(관수동) 번지에 있다. 전태일 및 노동 운동과 관련된 상설 기획 전시, 공연, 교육 등을 하고 있다. 1981년에 전태일 기념관건립 추진위원회가 발족하면서 기념관 건립 사업이 추진되었고, 2019년 4월 30일에 정식 개관했다. 건물은 기존에 있던 청계천 앞 건물을 리모델링하였으며 건물 외관에 1969년 당시 정부 앞으로 보낸 서면의 내용을 입체적으로 표현하였고 건물 아래에 전태일 조형상이 있다. 전태일은 1965년부터 서울 평화시장에서 시다, 재단사 등으로 일하면서, 시다를 비롯한 여공의 열악한 노동조건과 인권 침해를 체험하였다. 1969년 평화시장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를 조직하고 열악한 노동조건과 근로기준법 위반에 관한 설문조사를 하여 노동청에 진정을 하였지만, 노동자들의 호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69년 9월부터 1970년 4월까지 건축 노동자로 일하다가, 1970년 9월 평화시장으로 돌아와 ‘삼동친목회’를 조직하였다. 그와 동료들은 평화시장의 노동조건 실태 설문 조사를 하여 정부, 언론 등에 개선을 요구하였으나, 노동조건은 개선되지 않았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에서 전태일을 비롯한 삼동회 회원들이 피켓시위를 벌이려다 경찰에 의해 강제해산 당하게 되자 전태일은 휘발유로 자신의 몸을 적시고 불을 붙여 분신 항거하였다. 그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쓰러졌다. 한 회원이 불길 속에 근로기준법 책을 집어 던져 예정했던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완수하였다. 그의 분신 항거는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가족과 동료 노동자들 모르게 준비한 것이었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언론은 노동문제를 특집 기사로 다루고, 종교계, 대학생을 비롯한 시민사회의 추모집회, 철야농성이 이어졌다.] 08:56~09:11 전태일(全泰壹) 기념관 관람 09:11~09:14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7번째 다리인 관수교(觀水橋)로 이동 [종로구 관수동 129번지와 중구 수표동 122번지 사이 청계천에 있는 다리이다. 다리 이름은 인근의 동명인 관수동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이곳에 청계천 준설사업을 위한 준천사를 설치하고 청계천의 수위를 관측하였으므로 1918년 일제가 지금의 청계천3가 사거리에 다리를 놓고 관수교라고 하였다. 청계천 복개로 다리가 없어졌다가 2005년 9월 30일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전통 한옥의 대청양식을 도입한 아치교 형태로 새로 건설하였다. 폭 25.5m, 길이 22.5m로 대림산업(주)과 삼성건설(주)에 의해 준공되었다. 관수교는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7번째 다리이다.] 09:14~09:17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8번째 다리인 세운교(世運橋)로 이동 [종로구 장사동 182번지와 중구 산림동 200번지 사이 청계천에 있는 다리이다. 다리 옆에 세운상가가 있어 다리 이름을 세운교라고 하였다. 세운상가에 조명가게가 많아 이를 특성화하여 다리에 빛을 표현하였다. 조선시대 이 자리에는 효경교(孝經橋)란 다리가 있었다. 효경교는 1958년에 청계천이 복개되면서 사라졌다.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옛 효경교 자리에 다리를 새로 만들고 근처에 있는 세운상가의 이름을 따서 세운교라 이름 붙였다. 시공사는 대림산업이며 2005년 9월 30일에 완공했다. 폭은 25.5m이고, 길이는 23.4m이다. 세운교는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8번째 다리이다.] 09:17~09:20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9번째 다리인 배오개다리로 이동 [종로구 예지동 189번지와 중구 주교동 99번지 사이 청계천에 있는 다리이다. 다리 이름은 현 종로4가 네거리에 배오개[이현(梨峴)]라는 고개가 있던 데서 유래되었으며, 배오개교라고도 불린다. 다리 형상은 배오개길을 넘는 사람들의 만남을 상징화하였다. 폭 25.5m, 길이 23.4m로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2005년 9월 30일 대림산업(주)에 의해 준공되었다. 배오개다리는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9번째 다리이다.] 09:20~09:23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10번째 다리인 새벽다리로 이동 [광장시장과 방산종합시장 사이에 있는 다리이다. 다리 동북쪽에 광장시장의 남문이 있고, 서남쪽에 방산종합시장의 북문이 있다. 그래서 청계천의 다리들 중 가장 사람 사는 냄새가 나고 활기가 넘치는 곳 중 하나이다. 이름은 순우리말이며 서울특별시지명위원회에서 지었다. 주변에 큰 재래시장들이 있기에 새벽시장의 활기와 향수의 의미를 담아 지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는 없었고 2000년대에 청계천 복원공사를 하면서 새로 지은 다리이다. GS건설과 현대산업에서 시공했으며 2005년 9월 30일에 완공했다. 새벽다리는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10번째 다리이다. 길이 23.4m, 폭 6m 규모이다. 차량은 다닐 수 없고 오직 사람만 통행할 수 있다.] 09:23~09:26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11번째 다리인 마전교(馬廛橋)로 이동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5가와 을지로(乙支路) 6가(방산동) 사이의 청계천(淸溪川)에 있던 조선시대의 다리이다. 조선 태종(太宗) 때는 창선방교(彰善坊橋)로 부르다 성종(成宗) 때부터는 태평교(太平橋)로 불렀다. 마전교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영조(英祖) 때로, 다리 옆 광장에서 마필을 매매하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말전다리라고도 한다. 2003년 7월부터 청계천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세워지는 22개 다리 가운데 마전교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다산교(茶山橋)와 함께 2004년 12월 12일 개통되었다. 중구 청계5가의 교차로 위에 있으며, 규모는 연장 21.6m, 너비는 40.5m이다. 왕복 7차로이며, 자동차와 사람이 모두 다닐 수 있다. 마전교는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11번째 다리이다.] 09:26~09:29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12번째 다리인 나래교로 이동 [청계천의 다리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5가 321번지와 중구 방산동 19번지를 연결하는 위치에 있다. 나래는 날개이다. 다리 주변에 있는 의류상권들이 세계 패션의 1번지로 힘껏 비상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는 없었고 2000년대에 청계천 복원공사를 하면서 새로 지은 다리이다. GS건설과 현대산업에서 시공했으며 2005년 9월 30일에 완공했다. 나래교는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12번째 다리이다. 길이 22.8m, 폭 6m 규모이다. 차량은 다닐 수 없고 오직 사람만 통행할 수 있다. 구조물이 나비 날개 모양이다.] 09:29~09:32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13번째 다리인 버들다리(전태일 다리)로 이동 [종로구 종로5가 319번지와 중구 을지로6가 17번지 사이 청계천에 있는 다리이다. 보행자의 이동 편리를 위해 차도와 보도를 분리하여 퍼걸러를 설치함으로써 도심 속의 정원을 연출하였다. 다리 이름은 과거 오간수문 상류에 왕버들이 많았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버들다리는 전태일다리로도 불린다. 버들다리 가운데에는 노동운동가 전태일을 기리는 전태일 열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2005년 9월 30일 GS건설과 현대산업에 의해 폭 17m, 길이 23.3m의 다리로 준공되었다. 버들다리는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13번째 다리이다.] 09:32~09:36 사진촬영 09:36~09:39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14번째 다리인 오간수교(五間水橋)로 이동 [청계천 물줄기가 도성을 빠져나가는 지점, 즉 동대문에서 을지로5가로 가는 청계천에 놓여 있던 다리이다. 조선시대 한성에 성곽을 쌓으면서 청계천 물이 원활하게 흘러갈 수 있도록 아치형으로 된 5개의 구멍을 만들어 홍예교라고도 하였다. 2003년 7월부터 청계천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청계천 역사유적을 발굴할 때 오간수문의 아래쪽 끝받침과 홍예(虹霓:무지개 모양의 구조물) 기초부, 돌거북 등이 발굴됨에 따라 2004년부터 복원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교통문제로 예전의 오간수문으로 복원하지 못했고 지금의 오간수교를 만들었다. 대신 오간수교 북측의 동쪽 벽면에 오간수문을 재현한 구조물을 설치했다. 오간수교는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14번째 다리이다.] 09:39~09:46 사진촬영 09:46~09:50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로 이동 09:50~10:13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탐방 [◇ 세계 최대 규모 3차원 비정형 건축물, ‘환유의 풍경’ 담은 이색 구조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의 ‘DDP’에는 ‘꿈꾸고(Dream), 만들고(Design), 누리는(Play)’ 의미도 담겨있다. 세계 최대 규모의 3차원 비정형 건축물이기도 한 DDP는 삼성물산 건설부문에 의해 시공됐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는 서울특별시 중구에 있는 복합 문화공간으로 2007년 12월 철거된 옛 동대문운동장 자리에 조성됐으며, 2009년에 착공해 2014년 3월에 개관했다. 동대문운동장의 공원화와 지하공간 개발에 따른 상업 문화활동 추진, 디자인 산업 지원시설 건립 등 복합 문화공간 건립을 목적으로 추진됐다. 동대문운동장의 공원화는 2000년부터 언론을 통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고, 2005년 서울시에서 동대문운동장의 기능대체 기본계획을 수립했다. 2006년 9월 공원화사업 계획을 수립했고, 2007년 8월 국제 지명초청 현상설계경기 방식을 통해 설계 작품을 선정한 뒤 10월에 건립 및 운영기본계획을 수립했다. 이후 2009년 4월에 착공, 10월에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을 먼저 개장한 뒤 2013년 11월 전체 공사를 준공하고 2014년 3월 21일에 개관했다. 삼성물산 건설부문은 공사 과정에서 발견된 조선시대 훈련도감·이간수문 등 문화유산들을 유구전시장에 복원해 두는 등 문화유산 보호에도 힘썼다. DDP의 설계는 이라크 태생의 여성 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가 맡았으며, 건축 콘셉트는 '환유의 풍경(Metonymic Landscape)'이다. 환유(換喩)는 특정 사물을 간접적으로 묘사하는 수사학적 표현으로, 역사적·문화적·도시적·사회적·경제적 요소들을 환유적으로 통합해 하나의 풍경을 창조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4만5133장의 알루미늄 패널을 제각기 다른 곡률, 다른 크기, 다른 형태로 설계해 건축물 외부와 내부에 직선이나 벽이 없이 액체의 흐름을 연상시키는 공간적 유연성이 특징이다. 최첨단 BIM(Building Information Modeling) 설계기법, 메가트러스(Mega-Truss·초대형 지붕트러스)와 3차원 배열의 스페이스 프레임(Space Frame) 구조 등을 통해 최소한의 실내 기둥으로 안전하면서도 우주공간처럼 느껴지는 대규모 공간감을 구현했다. 내부 마감 역시 외장 판넬과 같이 모든 면이 각기 다른 곡률과 형태로 설계된 3차원 비정형 형태로 곡면 구현이 가능하고 내화성이 있는 우수한 친환경 마감자재인 천연석고보드, G.R.G보드(Glassfiber Reinforced Gypsum Board), 코튼흡음재, 인조대리석 등으로 시공됐다. 동일한 모양이 하나도 없는 3차원 비정형 형태인 내부 마감공사도 일반적인 설계기법으로는 구현이 어려워 외장판넬 시공과 마찬가지로 최첨단 설계기법인 BIM을 도입했는데, 삼성물산은 본공사 시공에 앞서 비정형 내부 마감 형상의 실물 크기 모형(Visual Mock-up)을 수차례 제작함으로써 시공성 및 품질 향상방법을 모색해 높은 수준의 시공품질을 확보하기도 했다. DDP가 완공된 후 설계자인 자하 하디드(Zaha Hadid) 또한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당시 언론과 시민 모두가 찬사를 보냈으며, 현재까지 학계와 동종타사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다. ◇ 상업시설은 물론 동대문역사문화공원까지 지닌 복합문화공간 DDP의 규모는 대지면적 6만2962㎡, 건축면적 2만5008㎡, 연면적 8만6574㎡에 지하 3층, 지상 4층이다. 주요 시설은 알림터·배움터·살림터·어울림광장·동대문역사문화공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알림터(art hall)는 알림1관·알림2관·국제회의장으로 구성되며, 컨벤션·신제품 발표회·전시회·패션쇼·콘서트·공연·시사회 등의 장소로 활용된다. 새로운 생각, 신제품, 새로운 퍼포먼스 등을 발표하는 곳이다. 배움터(museum)는 디자인박물관·둘레길쉼터·디자인전시관·디자인둘레길과 어린이·청소년 및 가족 단위로 디자인 콘텐츠를 체험할 수 있는 디자인놀이터로 구성돼 있다. 지하 2층 디자인전시관에서는 세계적으로 이름 난 예술가들의 기획전시가 주로 열린다. 지상 2층 디자인박물관에서는 한국 전통문화 콘텐츠를 비롯해 다양한 디자인 기획전이 열리는 전시 공간이다. 4층에는 '디자인놀이터'가 반긴다. 디자인전시관과 디자인박물관이 아이들에게 교육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예술이라면, 디자인놀이터는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예술 놀이터다. 디자인의 개념과 원리를 활용한 창의적인 놀이형 체험 전시물이 모여 재미와 유익함을 더한다. 디자인놀이터에는 콩주머니를 던지면 새로운 영상이 열리는 '상상의 벽', 여러 개의 거울이 반사하며 다채로운 형상을 만드는 '거울숲' 등 흥미로운 체험거리가 가득하다. '소리별'은 확성기에 대고 노래를 하면 커다란 흰 공에 색색의 별이 등장하는 체험물이다. 음의 높낮이에 따라 별의 색깔이 변하고, 성량에 따라 별의 크기도 달라진다. 소리의 파장을 시각화한 예술로 아이들은 자신의 목소리가 어떤 색으로 변하는지 흥미롭게 지켜본다. '나는 자동차'도 아이들에게 인기가 높다. 손잡이를 돌리면 바퀴 하나가 돌아가고 순식간에 여러 개의 바퀴들이 톱니처럼 서로 맞물려 돌아가면서 환상적인 무늬를 만든다. 우리네 전통 팽이의 원리와 비슷하다. '꿈꾸는 집'에서는 블록판으로 집, 나비 등의 다양한 모양을 3차원으로 조립할 수 있다. 전시 체험 해설도 진행한다. 시간에 맞춰가면 30분가량 설명을 들은 후 놀이터를 이용할 수 있다. 별도의 체험 프로그램은 '상상발전소'에서 이용 가능하다. 상상발전소는 '공방프로젝트', '디자인워크숍', '디자이너스쿨' 등 다채로운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살림터(design lab)는 살림1관·살림2관·잔디사랑방·디자인나눔관으로 구성되며, 디자인 비즈니스가 이루어지는 플랫폼으로 활용된다. 살림터는 40여 개의 매장에서 디자인 관련 제품들을 전시하고 판매한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의 앞마당 격인 어울림광장은 24시간 개방되는 복합 편집매장인 디자인장터(design market)와 종합안내실, 유구(遺構) 전시장으로 구성돼 있다. DDP건물의 특징과 동대문 주변의 도시 풍경을 조망하며 다양한 광장 문화와 휴식, 만남을 즐길 수 있는 DDP의 앞마당이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은 동대문역사관, 동대문운동장기념관, 한양도성 성곽, 디자인 전용 전시 공간인 갤러리문, 이간수전시장, 예술 프로그램 공간인 이간수마당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밖에 주차장과 의무실, 여성휴게실, 수유실, 물품보관소와 카페 공간 등 다양한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10:13~10:17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15번째 다리인 맑은내다리로 이동 [동대문구 창신동 430번지와 청계천7가 신당동 213번지 사이 청계천에 있는 다리이다. 청계천을 순 우리말로 바꾼 이름이다. 나비의 힘찬 비상을 아치구조와 크로스 케이블로 조화시켜 힘찬 도약을 연출함으로써 패션 중심의 상징성을 부여하였다. 폭 13.5m, 길이 26.3m로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2005년 9월 30일 GS건설과 현대산업에 의해 준공되었다. 맑은내다리는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15번째 다리이다.] 10:17~10:20 사진촬영 10:20~10:23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16번째 다리인 다산교(茶山橋)로 이동 [성동구 흥인동 1번지와 종로구 창신제1동 401번지 사이 청계천에 있는 다리이다. 다산 정약용의 호를 따서 붙인 다산로로 이어지는 다리인 데서 다산교라고 하였다. 폭 44.4 m, 길이 29.5m로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2005년 9월 30일 GS건설과 현대산업에 의해 준공되었다. 다산교는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16번째 다리이다.] 10:23~10:37 집에서 준비해 간 음식으로 간식 10:37~10:43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17번째 다리인 영도교(永渡橋)로 이동 [청계천7가와 8가 중간, 즉 황학동에서 숭인동 숭신초등학교와 동묘로 나가는 교차로에 있는 다리이다. 조선 초에는 왕심평대교(旺尋坪大橋)라고도 하였다. 이 다리에는 단종에 얽힌 슬픈 이야기가 전한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귀양갈 때 단종비 정순왕후가 이 다리까지 배웅 나와 이별하였는데 이후 다시는 만나지 못하고 영영 이별하였다고 하여 영이별다리, 영영건넌다리라고 불렀다. 2005년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새로 영도교가 가설되었다. 영도교는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17번째 다리이다.] 10:43~10:50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18번째 다리인 황학교(黃鶴橋)로 이동 [중구 황학동과 성동구 상왕십리동 사이 청계천로에 있는 다리이다. 옛날 이곳 논밭에 黃鶴이 날아왔었다는 전설에 따라 동명이 黃鶴洞이 되었는데 다리 이름은 동명에서 비롯되었다. 청계천 복원공사와 함께 가설되었는데 폭 30.6m, 길이 45.1m로 (주)(주)현대건설 외 1개사가 함께 시공하여 2005년 9월 30일 준공되었다. 황학교를 통과하는 도로는 난계로이다. 황학교는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18번째 다리이다.] 10:50~10:52 사진촬영 10:52~10:58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19번째 다리인 비우당교(庇雨堂橋)로 이동 [동대문구 신설동 100번지와 성동구 상왕십리동 12번지 사이 청계천에 있는 다리이다. 종로구 숭인동에 조선 초기 정승을 지낸 柳寬이 장마철에 日傘을 펴고 비를 근근히 가리며 살 정도로 청빈하였는데, 조선 후기 실학자인 芝峰 李晬光이 이곳에 작은 집을 짓고 당호를 庇雨堂이라고 하여 청빈한 삶의 중요성을 알렸다고 한다. 이에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청빈의 정신을 살려 다리 이름을 비우당교라고 하였다. 폭 26.5m, 길이 44.6m로 2005년 9월 30일 (주)현대건설(주)에 의해 준공되었다. 비우당교는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19번째 다리이다.] 10:58~11:03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20번째 다리인 무학교(無學橋)로 이동 [동대문구 용두제2동 255번지와 성동구 하왕십리동 596번지 사이 청계천 무학로에 있는 다리이다. 조선시대 無學大師가 도읍을 정하기 위해 지리를 살피던 중 왕십리지역까지 왔으므로 도로명을 무학로라 하였고, 여기서 다리 이름이 유래되었다. 2005년 9월 30일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폭 34.8m, 길이 43.6m로 (주)현대건설(주)에 의해 준공되었다. 무학교를 통과하는 도로는 무학로이다. 무학교는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20번째 다리이다.] 11:03~11:08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21번째 다리인 두물다리로 이동 [성동구 마장동 527번지와 동대문구 용두제2동 129번지 사이 청계천에 있는 보도교 다리이다. 다리 바로 아래쪽에서 청계천과 정릉천 두 물줄기가 합해지므로 두물다리라고 하였다. 폭 3~8m, 길이 43.8m로 도보교로 2005년 9월 30일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주)현대건설에 의해 준공되었다. 두물다리는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21번째 다리이다.] 11:08~11:13 서울 성동구 청계천로 530 번지에 있는 청계천 박물관으로 이동 [긴 유리형태의 청계천박물관 건물 전경은 2005년 10월 새로운 물길로 우리곁에 돌아온 청계천의 물길을 상징합니다. 청계천박물관은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 문화공연을 위한 소강당, 교육실을 갖춘 박물관으로서 청계천의 역사적 여정과 복원공사과정, 이후 도시변화 모습과 비전을 상설전시하고 있습니다. 개관 10주년을 맞아 지난 10년간의 축척된 청계천 자료들을 총망라한 상설전시 리모델링을 마치고 2015년 10월 1일 재개관하였다. 청계천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 서울의 역사에 대한 이해를 더욱 넓힐 수 있는 새로운 지평을 열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11:13~11:35 청계천 박물관 관람 11:35~11:38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22번째 다리인 고산자교(古山子橋)로 이동 [동대문구 용두동 34번지와 성동구 마장동 470번지 사이 청계천에 있는 다리이다. 다리 이름은 이 다리를 지나는 가로명이 1984년 조선시대 지도 제작에 힘써 <대동여지도>를 만든 古山子 金正浩의 호를 따서 고산자로라고 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폭 43.2m, 길이 88m로 2005년 9월 30일 (주)현대건설(주)에 의해 준공되었다. 고산자교를 통과하는 도로는 고산자로이다. 고산자교는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22번째 다리이다.] 11:38~11:44 청계천변의 수크령길을 따라서 서울 성동구 용답동에 있는 신답철교로 이동 (고산자교~신답철교 : 400m) [신답철교는 경의중앙선과 수인분당선이 통과하는 철교이다.] 11:44~11:52 청계천변의 수크령길을 따라서 서울 성동구 용답동에 있는 제2마장교로 이동 (신답철교~제2마장교 : 723m) 11:52~12:04 용답동과 사근동을 연결하는 인도교인 용답나들목교로 이동 12:04~12:16 송정동과 사근동을 연결하는 인도교인 세월교(洗越橋: 흄관(Hume pipe)과 시멘트를 이용하여 간이적으로 만든 소규모의 교량을 뜻함)로 이동 [이 세월교(洗越橋)는 청계천을 가로지르는 마지막 다리다.] 12:16~12:20 청계천이 중랑천과 만나는 합수지점으로 이동 12:20~12:26 중랑천 위에 놓인 다리인 살곶이 다리로 이동 [성동구 사근동 102번지 남쪽 현재 성동교 동쪽에 위치해 있는 돌다리로서 중랑천에 놓여 있다. 살곶이 앞에 있다 하여 살곶이다리, 또는 살꽂이다리라고 하였고 한자명으로 전관교(箭串橋)라고 한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거쳐 태종으로 등극하자 함흥으로 내려가 한양으로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이방원의 등극을 부정하였다. 그후 신하들의 간곡한 청으로 함흥에서 돌아오는 태조를 태종이 이곳 중랑천 하류 한강가에서 천막을 치고 아버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때 태조가 태종을 향해 활을 쏘았으나 맞히지 못하고 화살이 땅에 꽂혀 이 지역을 화살이 꽂힌 곳이라 하여 살꽂이 혹은 살곶이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다리는 조선시대 다리로는 가장 길었으며 濟盤橋라고도 불렀다. 현재는 중간 부분이 훼손된 채 양쪽 가장자리만이 원형을 보존하고 있으며 사적 제160호로 지정되어 있다.] 12:26~12:30 중랑천을 통과하는 다리인 성동교로 이동 12:30~12:32 서울 성동구 행당동 17-2 번지에 있는 한양대역 3번 출구로 이동하여 청계천 탐방 완료 12:32~12:34 한양대역에서 합정역으로 가는 2호선 전철 승차 대기 12:34~13:26 한양대역에서 2호선 전철을 타고 합정역으로 가서 6호선으로 환승하여 역촌역으로 이동 [52분 소요] 청계천 다리 개념도 [오간수교~살곶이 체육공원] 구간 청계천 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