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길을 떠나려 하고 있다.
극에 달한 화려함들이 바삭한 낙엽 되어 바닥을 뒹군다.
그 화려함의 주검조차 곁에서 사라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앙상한 겨울의 그림자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이미 떠난 가을에 질척거리는 내 모습이 보기 싫어 가을이 발걸음을 떼기 전에 다시 길 위에 선다.
토요일 오후부터 전국에 비가 내린단다.
가을날씨답잖게 천둥과 번개까지 동반한다는 예보다.
천둥 번개 공포증이 심한 마눌님께서 이런 날씨에도 답사 동행의 강한 의지를 표명하셨다.
분명 열흘 전쯤 받은 그 전화와 관련이 있으리라.
오랜만에 내리는 가을비다.
나는 따로 세차를 하지 않는다.
거의 매주 답사를 다니는터라, 세차의 개운함은 일주일을 채 넘기지 못하는 시한부 환자와 같다.
기우제 제사장처럼 나는 세차를 온전히 하늘의 뜻에 맡기는 편이다.
언제나 그렇듯 마눌님과 함께 하는 답사는 미감(美感)이 절대적 기준이 되는 미의 순례길이다.
답사예정지는 원주이지만, 가는 길에 천년 생일을 맞으신 옛님께 축하인사를 드리려 한다.
천년 생일 옛님께 가는 길에 옆으로 조금 샜다.
2017년 요맘때 우리 카페 답사에서 뵌 이후 처음이다.
이불병좌상은 한결같이 사이좋게 잘 계신다.
이불병좌상 앞 벤치에 이보살병좌상은 누구실꼬..
불상 좌우에 협시보살을 찾으려해도 잘 보이질 않는다.
내 눈이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일까..
협시보살이 시나브로 세월을 맞이한 것일까..
천년 생일 옛님께 가는 길,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돌꽃이 누운 해바라기처럼 가을 햇볕에 일광욕을 즐긴다.
돌꽃의 계절에는 가을이 없다.
돌꽃은 떨어지는 낙엽을 가지지 않았다.
어쩌면 돌꽃은 새겨질 때부터 늙지 않는 뱀파이어의 숙명을 타고 났을지도 모른다.
경주 보문사지에 비슷한 운명을 가진 당간지주가 생각난다.
거대한 거북이다.
어디로 가려는걸까..
바다로..피안으로..정한 곳 없이..
정처 없이 떠돈다는 건 어디로든 갈 수 있음이겠지.
무생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방법은 다양하다.
귀부의 얼굴이나 네 발, 꼬리 등을 극사실적으로 생동감 있게 표현하는 방법 등이 있다.
어미 등 위에서 쫄래쫄래거리는 새끼거북은 가장 정적이면서도 가장 동적인 표현이다.
조물주처럼 아주 작은 숨결로 아주 거대한 생명을 탄생시켰다.
안상귀꽃이 참 예쁜 석등이다.
안상은 표현의 한계일 뿐, 평면이 아니라 입체적 공간이다.
안상이 있는 간주석 속은 무한한 시공간이 펼쳐져 있는 또다른 세계이다.
저 너머 세계에 핀 예쁜 꽃이 안상이라는 창(窓)을 통해 나에게 보여진다.
석등은 비로자나불이다.
법(法)이 빛으로 두루 비치게 한다.
법(法)은 향기로운 연기로도 세상에 번진다.
당당한 체구와 달리 가녀린 찰주는 심하게 오수(午睡)에 빠졌다.
맞은편 산기슭에 계시는 덕주사 마애불이 생각난다.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면 원주 근처에도 못가겠지.
석굴과 석조여래입상을 보수하고 있다.
보수기간은 내년 5월까지이다.
출입은 통제되었고, 투명 벽면에 바싹 붙어 실루엣을 감상한다.
투명 벽면은 불투명 벽면으로 급속히 변해가고 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경주 쪽샘 44호분처럼 완전 개방형으로 보수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그 옛날 충주 이북 사람들이 경상도로 진입하려면 이곳에서 유숙하고 계립령로를 넘어야 했다.
이제는 너른 터와 돌무더기만이 옛이야기를 전한다.
싸움 좀 하는 모범생 같다.
세월의 생채기에도 단정함을 잃지 않았다.
모던한 느낌이다.
수평적 간결함에 애잔함이 스며있다.
낙엽 융단을 밟아 보았다.
바스락 소리에 가을이 부스러질까 망설여진다.
겨울은 참 담대한 놈 같다.
낙엽의 주검을 거침없이 밟고 개선장군처럼 찾아든다.
올해 딱 1,000번째 생신을 맞으신 옛님이다.
1022년 4월 어느날, 그때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명문 맨왼쪽 줄에 생일이 적혀 있다.
大平 二年 四月
대평은 거란의 연호로 대평 2년은 1022년이다.
이제사 원래 답사예정지인 원주로 향한다.
바닷가에 살고 있지만 바다와 호수는 느낌이 다르다.
땅의 품에 안긴 호수의 물이 더 보드랍고 편안해 보인다.
원주 거돈사지 앞쪽 어느 폐교에 '원주 거돈사지 전시관'이 있다.
마눌님께서 친히 문을 두드렸으나 금세 되돌아왔다.
어수선한 것이 아직 제대로 개관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 뜰에 당간지주 1기가 있다.
안내문에는 당간지주라고 되어 있으나 명확하지 않다.
누워 있어서인지 간구나 간공의 흔적을 확인할 수 없다.
대충 발걸음으로 잰 치수로는 6미터가 넘는 것 같다.
그러면 강릉 굴산사지 당간지주보다 더 크다는 것인데..
여튼 미완성 당간지주이거나 아니거나다.
귀부를 보자마자 마눌님의 첫마디가 원숭이 상이란다.
혹 원공국사가 원숭이 띠라면 진짜 대박인데..
띠를 계산하려는 생각이 일었다가 금세 사그러들었다.
진짜 원숭이 띠로 확인되면 신들린 점집보살과는 겁나서 함께 못살 것 같다.
개인적으로 발찌귀부라고 부른다.
이 탑비가 1025년에 세워졌으니, 997년째 발찌를 차고 계신다.
3년만 있으면 천년발찌가 된다.
청춘들의 천일 커플링은 명함도 못내민다.
육각문 안에 '王'과 '卍' 그리고 '꽃'이 연속교차한다.
상징을 푸는 한조각 단초가 된다.
용 닮은 원숭이..
원숭이 닮은 용..
배례석의 돌꽃,
상징 해석에선 꽃잎보다 꽃의 중심이 중요하다.
연꽃이든 모란이든 꽃잎에 현혹되어 씨방을 놓친다.
토단(土壇)을 왜 쌓았을까..
떠오르는 여러가지 가설 중에 과연 정답이 있을까..
탑과 불상의 위계문제, 탑 기단부 높이와 불상 대좌 높이의 상관관계에 대한 논문을 본 기억이 있다.
그 논문에서 언급한 곳이 거돈사지였다.
주차된 차가 많다.
출입문으로 걸어가는 중에 글씨가 보이기 시작한다.
고..ㅇ..ㅅ..ㅏ..주..ㅇ..
세상에서 제일 못된 중은 공사중이다.
주위가 깨끗하게 정비되었다.
다시 과거의 기억 위에 현재의 기억을 덮어야 한다.
기억도 낙엽처럼 쌓이고 쌓이다가 그렇게 사라지겠지.
기가 막힌다.
언제봐도 예술성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벌어진 입 사이로 옅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한바퀴를 돈다.
돈다. 또 돈다.
조형미뿐만 아니라 최고난이도의 조각술을 보여준다.
왼 앞발에 여의주를 쥐고 있다.
'王'자와 연주문의 향연이다.
작은 연주문은 왼앞발의 여의주와 등가의 상징이다.
꽃이 있는 자리가 지광국사탑의 원래 자리이다.
지광국사탑의 삶은 파란만장 그 자체이다.
1911년 서울로 반출된 후, 일본 오사카까지 강제이송되는 등 10차례 이상 이리저리 옮겨졌다.
한국전쟁 때는 유탄으로 12,000조각이 나서 방치되었다가, 1957년에야 복원되었다.
2015년 해체되어 국립문화재연구원으로 옮겨져 보존처리 작업에 들어갔다.
2021년 보존처리 작업은 마쳤으나 이전위치를 정하지 못해 아직도 국립문화재연구원에 계신다.
원래 자리냐 유적전시관이냐로 전문가의 의견이 갈리는 모양이다.
원래 자리면 보호각을 두느냐 마느냐로 또 갈리고.
110년 넘은 타향살이의 끝이 머지 않았다.
내년에는 금의환향하는 모습을 뉴스로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올해 8월 노마드 님 덕분에 우리 카페 회원들과 지광국사탑 보존처리 현장을 살펴볼 수 있었다.
주초석 중에 제일 예쁠 것이다.
가장자리까지 공들여 문양을 베풀었다.
이 위에 올려졌을 기둥과 건축은 또 어떠했을까..
가장 최근 기억이 탑 주변에서 땀 흘리며 밭일을 하시던 농부 아낙이다.
탑과 귀부를 살피는 내내 눈길조차 주지 않던 그 아낙.
철저한 외면 탓에 한마디 말길조차 콱 막혔었다.
밭은 그대로인데 농부 아낙은 없다.
밭이 정연한 것을 보니 그 아낙도 건강할 것이다.
마눌님이 전화를 받는다.
아직 답사 중이다.. 내일은 진짜로 답사 안한다..
열흘 전쯤 마눌님에게 전화를 했던 그 사람이지 싶다.
이제 어둑어둑하다.
이번 답사에서 뒤돌 귀부 3기를 보려고 계획했었는데, 끝내 1기 밖에 보지를 못한다.
예정에도 없던 괴산 원풍리 마애불과 충주 미륵대원지가 2기의 뒤돌 귀부를 대신한 셈이다.
고개가 뒤로 돌아간 뒤돌 귀부이다.
이곳 김제남 신도비 인근에 원주 비두리 귀부, 여주 구암 한백겸 신도비도 뒤돌 귀부이다.
콧구멍으로 연신 영기(靈氣)를 뿜어댄다.
표정이 다시 찾아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것 같다.
잠깐의 눈맞춤으로 답인사를 건넨다.
어느새 어두워졌다.
오늘 답사는 여기까지이고 내일은 횡성이다.
아침 6시 40분, 원주 속소를 나와 횡성으로 향한다.
7시 20분 어느 한적한 장소에 도착해서 차 안에 있다.
잠시 후 철책문 너머로 한 건장한 남자가 나타났다.
키도 좀 커진 것 같고, 살도 좀 붙은 것 같다.
봄의 끝자락에 논산에서 떠나보낸 그놈을 가을의 끝자락에 횡성에서 다시 만났다.
열흘 전 마눌님과 통화하여 원주 답사를 잉태하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또한 어제 흥법사지에서 마눌님과 통화하여 내일도 답사할거냐고 묻던 바로 그놈이다.
작은아들놈은 우리 부부를 이렇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6개월만에 처음 얼굴 보는 자식을, 6개월만에 첫휴가 나오는 군인을 납치하여 답사를 강제하는 나쁜 부모..
셋이 갔다가 둘로 되돌아온 쓰라린 기억이 6개월만에 둘로 갔다가 셋으로 되돌아가는 행복한 기억으로 변했다.
집으로 향하는 길,
마눌님과 작은아들놈은 쉬지 않고 수많은 말들을 섞어제낀다.
말같은 말과 말같지 않은 말들이 차안에서 충돌한다.
군대에서 전투력은 안키우고 수다력만 증강시킨 모양이다.
1시간 30분 후 차안에 고요가 찾아왔다.
수다력도 수면력 앞에서는 고양이 앞에 쥐다.
극락은 사후세계가 아니다.
바로 지금 바로 여기가 극락이다.
나는 반야용선을 몰고 극락으로 가는 인로왕보살이다.
아들아, 잘 쉬다가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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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1. 12.~13.
길 떠나는 답사객, 무애
첫댓글 어디로 나서도 답사생각 밖에 없는 답사객..나 같으면 군대휴가나온 아들 태우러 가는 길이라는 그 한마디를 썼을텐데..참 맛깔나게 쓸 수 있는 그 능력이 부럽소이다..
어디를 가든 근처 옛님이 떠올라서 그냥 지나치기 쉽지 않습니다.
노마드 님도 저랑 비슷한 병을 앓고 계신 걸로 아는데..
못된 중...공사중 때찌때찌~ㅋ
새차로 온동네 도장깨기 하는 무애님의 가열찬 행보가 매우 마니 엄청 무지~ 기대됩니다
이번 답사길에도 미륵대원지, 거돈사지, 법천사지가 못된 중이었지요.
10년 전부터 못된 중이이 부쩍 늘었습니다.
최고의 답사기 임니다
며년전에 법천사지 학예사에게
주춧돌 을 보고 우리신라 라고
우겼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 추억들이 쌓여 가는 것을 보니 챤스 님께서도 천상 답사꾼이십니다.
중 못된중 공사중 히트작 활용도가 높은 말 생동감이 넘쳐 마치 내가 답사객이 된것 같은 김제남신도비는 보호각시설을 했군요 늘 보아도 가고 싶은현장들 입니다.
몇 년만에 옛님을 뵙게 되면 뭔가가 바뀌어 있더라구요.
꽃미남 김 박사도 조금씩 바뀌었으니..
못된 중 글에 빵 터졌습니다ㅎ
답사기가 맛깔납니다
먼 발걸음에 순간 기대가 무너지니 그런 표현이 나왔나 봅니다.
어쨌든 공사 중, 보수 중은 못된 중이에요.
재밌고 유익한 답사가 잘 보고 갑니다.
좋게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도 법안 님이 나눠주시는 답사 행적들은 감사히 잘 보고 있습니다.
ㅋㅋㅋ 못된중! 저도 써먹을래요!! ㅎㅎㅎ 이 가을 떠나기 전에... 저도 법천사지 함 가보고 싶습니다.
법천사지는 옛 모습이 그립기도 하지만, 유구들이 드러난 진짜 옛 모습이 좋기도 합니다.
지광국사현묘탑이 돌아오시면 한 번 행차하시죠.
법천사지 전시관이 아직 공사중이가요? 거돈사지 전시관도 오픈한다던데....간만에 아들봐서 좋아하는 얼굴이 선합니다~~
법천사지 전시관은 공사 중이고, 거돈사지 전시관은 현재 여러가지 문제로 상시 개관을 못하는 상황 같더라구요.
휴가 나온 아들은 얼굴 보기 힘듭니다. 갓난아기 때처럼 자는 모습만 보고 있습니다.
못된 중 ☞ 공사 중
잘된 중 ☞ 답사 중
최고 중 ☞ 무애 중
착한 중 -> 마애 중
웃긴 중 -> 마애 중
잘 생긴 중 -> 마애 중
당간지주 한 짝
멀지 않은 채석장에 있습니다
거돈사지 문화해설사님도 존재는 알고 계셨지만, 정확한 위치는 모르시더라구요.
역시 선과 주인장님~!!
ㅋㅋ저도 아들 첫 100일 휴가때 중국 상하이 계림 여행이 잡혀서 ... 누나한테 김치찌개라도 해주라하고 갔는데
입국때 거수경례하며 아들이 날 기다리더라고요 아빠가 엄마 마중 하라고 보냈다고 차를 끌고 나왔어요
약간 미안했지요 .... 아무튼 못 말리는 엄마였어요!!
내가 남편과 다녔던 답사 코스네요!
몇년후엔 또 둘이되고 언젠가는 혼자 남고 ...그리고 ...
스노우 님 대단하신데요~
저는 아들 마중이라도 했는데, 스노우 님은 아들 마중을 받으셨네요.
답사가 아들들 잡네요ㅎ
법천사지 한참 발굴중인 제작년인가 갔던것 같은데 많이 정비되었군요.
오늘도 공부 잘 하였습니다.
이제 정비도 거의 막바지더라구요.
곧 공식적인 개방을 하지 싶습니다.
아마 그때쯤 지광국사탑도 오시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오늘 정말 배우고 갑니다...
세상에 나쁜 중은 공사중이란걸~~ㅎㅎㅎㅎ
캬아....
중은 미워하되, 공사 작업자는 미워하지 맙세다ㅎ
@무애 그랍세다~~ㅎㅎㅎㅎ
재미있는 답사기 잘봤습니다.
재밌게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