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하와이 주 오아후 섬 남단 진주만에는 애리조나 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이 기념관은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되새기는 뜻에서 1962년 건립되었다. 1941년 침몰한 애리조나호를 인양하지 않은 채 선체(船體) 바로 위의 수상에 기념관을 세워 당시의 피해를 알리고 있는 것이다.
12월8일은 일본이 진주만 기습을 강행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비극적인 날이다. 일본의 해군 항공대는 선전 포고도 없이 진주만에 정박해 있던 미국 해군 함대를 기습 공격했다. 태평양 전쟁의 발발을 알리는 이 사건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방심이 불러온 패배
1941년 12월8일 오전 6시45분쯤 하와이 진주만에서 레이더를 관측하고 있던 병사들은 수상한 비행 물체들이 접근하는 것을 확인한다. 그러나 병사들로부터 보고받은 타일러 중위는 “걱정할 것 없다”며 상황을 일축했다. 미군의 훈련 상황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1시간쯤 지난 후 군항에 정박해 있던 6척의 군함에서 동시에 폭발이 일어났고 조용하던 진주만은 폭음과 비명의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1시간 45분 동안의 일방적인 기습 공격으로 일본군은 미군기 188대를 파괴하고 159대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다.
또 18척의 군함을 침몰시키거나 사용 불능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미군의 전사자는 무려 2403명이었고 부상자는 1178명에 달했다. 한 군인의 방심이 불러온 처참한 패배였다.
그러나 진주만에서의 치명적인 패배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즉각 전열을 재정비했다. 진주만 공습에 따른 패배의식을 타파하기 위해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회 특별 연설을 통해 “진주만을 기억하라!”며 미국인들의 애국심을 자극했다.
미국인들은 일치단결, 전쟁에 필요한 군수 물자 생산에 참여했고 군인들은 빠르게 반격에 나섰다. 이에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을 비롯해 아시아·태평양 곳곳에서 전세를 역전시켰다. 결국 1945년 8월15일 미군은 미주리호 함상에서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기에 이른다.
시련의 역사를 썼다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된 4년여의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일본의 식민 지배 하에 있던 우리 민족의 고통은 더욱 가중되었다. 일본은 장기간의 침략 전쟁에 필요한 전쟁 물자를 우리나라에서 동원했다. 식량과 지하 자원뿐만 아니라 금속제 그릇까지도 수탈했고 부족한 병사를 채우기 위해 우리나라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1938년 17세 이상의 청년들을 대상으로 강제성을 띤 지원병 제도를 실시했고 태평양 전쟁 도발 후에는 징병제를 도입, 1944년부터 강제 징집했다. 이렇게 해서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죽음의 전쟁터로 끌려간 조선인은 무려 36만3000명에 달했으며 이 중 20만4000명은 사망 혹은 생사 불명으로 광복 이후 조국의 땅을 밟지 못했다.
10대, 20대의 젊은 여성들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 이들은 하루에 10명 이상, 심지어 최대 100여 명의 일본 군인을 상대하다가 죽어 갔다. 지독한 성병과 구타, 굶주림 속에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해야 했던 종군 위안부는 10만∼2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어 나라를 빼앗겼기에 이런 만행에 어떠한 대응도 못하고 분루(忿淚)를 삼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하여
미군이 일본군 해군기를 처음 인지했을 때 즉각 초동 조치에 들어갔다면 진주만의 비극이 발생했을까. ‘방심은 금물’이라는 정신 자세와 불굴의 의지, 견고한 국력으로 무장한 국가는 어떤 어려움에서도 다시금 일어날 수 있다.
926년 거란의 침입으로 망국의 위기에 처한 발해를 배경으로 한 영화 ‘무영검’(無影劍). 발해의 마지막 왕자를 구하기 위한 당대 최고의 여무사(女武士) 연소하는 거란군과의 대결 중에 이런 대사를 남긴다.
“검은 죽이기 위해 드는 것이 아니라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드는 것입니다.”
각자에게 소중한 것들을 떠올려 보자. 그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