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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왜 가야를 지웠나 역사 속에 숨 쉬는 ‘빛벌’
이덕일의 산성기행 | 창녕 화왕산성
신라軍 막으려 쌓은 城… 임란 때는 곽재우가 지킨 철옹성
억새 태우기로 유명한 화왕산의 산성은 가야가 신라군을 막기 위해 쌓은 성이다. 이곳 인근에 진흥왕순수비가 세워진 것은 561년. 500여 년 동안 이 땅에는 가야가 고구려·백제·신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존재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시기를 삼국시대라고 부른다. 역사에서 철저히 지워진 옛 가야의 고성을 찾았다.
정월 대보름 ‘억새 태우기’로 일반에 잘 알려진 화왕산성은 신라와 각축을 벌이던 가야가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경남 창녕군의 군소재지인 창녕은 인구 6만5000명이 사는 작은 도시다. 이 작은 도시에 국보 2개, 보물 9개를 비롯해 무수한 사적지가 있다니 놀랄 일이다. ‘경남의 경주’로 불리는 창녕은 곳곳에 대형 고분이 산재해 흡사 경주를 둘러보는 듯하다.
창녕 땅에는 옛 가야제국의 하나인 ‘비화(比火)가야’가 있었다. 비화가야를 이곳 사람들은 굳이 ‘빛벌가야’라고 말한다. 가야의 실체를 전하는 역사기록은 거의 없다. 가야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은 일연의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가락국기’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대가야가 신라의 공격에 의해 멸망하면서 역사를 전하지 못했다.
가야는 백제·신라·왜의 틈바구니에 있었다. 신라는 기회만 있으면 서쪽으로 진출해 가야를 넘보았다. 대구-경산-창녕-청도-밀양-김해가 잇따라 신라에 정복되거나 자진 복속됐다. 창녕 화왕산에 쌓은 화왕산성도 신라와 각축을 벌이던 시기에 축조했으리라 추정한다.
창녕은 낙동강 중류 넓은 곡창지대 중심부, 서부 경남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이다. 화왕산성은 산세가 가파르고 창녕·영산·현풍을 품은 산성으로서 전략적 가치가 높아 임진왜란과 6·25전쟁 때도 전투가 치열했다.
화왕산성은 정월 대보름 ‘억새 태우기 축제’로 유명하다. 하지만 2009년 음력 정월 보름, 불의의 사고로 더 이상은 억새를 태우는 장관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억새 태우기 축제는 창녕의 옛 이름 비자화군(比自火郡)의 진산인 화왕산(火旺山)의 유래처럼 화왕산에 불기운이 들어야 풍년이 들고 재앙이 물러간다는 속설에 따라 세시풍속 재현의 하나로, 3년을 주기로 이어지던 민속놀이였다.
화왕산성과 홍의장군 곽재우
서울에서 화왕산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중부내륙고속국도를 타야 수월하다. 여주IC로 들어가 창녕IC까지 내처 달리는 길이다. 일행은 창녕에 도착하자마자 창녕여고 인근에 있는 자하곡매표소로 향했다. 이곳이 산성을 오르는 가장 빠른 코스기도 하려니와, 가을 억새밭을 보기 위한 정규 코스기 때문이다. 포장도로를 따라 한동안 오르다 완만한 삼림욕장을 만나 돌계단을 천천히 오른다. 여기까지는 쉬엄쉬엄 올라가는 산책 코스다. 마지막 지점에 이르러 갑자기 급경사가 나타난다. 숨이 깔딱깔딱 넘어간다 하여 ‘깔딱고개’ 혹은 ‘환장고개’라는 재미있는 이름이 붙었다.
숨이 턱에 차오를 무렵 눈앞에 갑자기 화왕산성 서문 입구가 나타난다. 서문은 지금 성곽의 흔적만 남아 있다. 서문에서 올라온 길을 돌아보면 멀리 창녕읍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화왕산 정상(해발 756.6m)은 서문에서도 북쪽으로 조금 더 올라간다. 화왕산성 안은 말안장과 같은 안부(鞍部) 형태의 능선이 완만한 구릉을 이룬다. 서쪽에서 바라보면 넓은 억새벌판 너머로 동문이 보이고, 성벽을 따라 산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사람들의 실루엣이 보인다. 남쪽으로는 성벽이 새로 복원한 남문을 지나 산줄기를 따라 이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창녕현 고적조’에 “화왕산 고성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5983척이더니 지금은 없어졌고, 성 가운데 샘 아홉 개와 못 세 개가 있다”고 기록돼 있다. 따라서 이 성은 가야시대 신라군을 막아내는 요새로 쌓았음이 분명하지만 조선 초기 들어 이미 폐성됐음을 알 수 있다. 아홉 개나 있었다는 샘은 지금 찾을 수 없으나 세 개가 있었다는 못의 형태는 완연하다. 그 가운데 하나는 새로 복원했는데, 이렇게 높은 산 위에 수량이 제법 넉넉한 못이 세 개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그 못에 얽힌 전설이 재미있다. 신라의 한림 벼슬을 하던 이광옥에게는 예향이라는 어여쁜 딸이 있었다. 오랫동안 병을 앓던 예향에게 어떤 이가 “화왕산 못이 영험하니 목욕재계하고 기도하면 효험을 볼 것”이라고 알려줬다. 예향이 화왕산에 올라 기도하는데 문득 구름과 안개가 앞을 가리더니 영험이 있었던지 과연 병이 나았다. 이후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았고, 그 아이의 겨드랑이 밑에는 ‘조(曺)’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어느 날 한 사나이가 나타나 자신이 아이의 아비인 신룡(神龍)이라고 한다. 이런 연유가 임금께 알려지자 임금은 예향의 아들에게 ‘조’씨 성을 하사했고, 아이는 자라서 진평왕의 사위가 된다. ‘창녕 조씨’가 성을 얻게 된 내력이 담긴 이야기인데, 지금은 연못에서 동문 방향으로 ‘창녕 조씨 득성비’를 세워놓아 전설을 뒷받침한다.
화왕산성은 임진왜란 때 다시 역사에 등장한다. 명(明)과 일본의 강화교섭이 진행되는 동안 잠시 뜸했던 전쟁은 교섭이 결렬되자 1597년 정유재란으로 이어졌다. 그동안 울산·부산포·거제 등지에서 장기 주둔하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왜군 5만 명을 이끌고 안의를 거쳐 전주로 향하면서 곳곳을 유린했다. 경상좌도 방어사로 있던 홍의장군 곽재우는 밀양·영산·창녕·현풍 네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화왕산성으로 들어와 왜적을 막았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제16권 ‘선조조’ ‘고사본말’에 는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정유년 가을 왜적이 두 번째 침범해왔다. 재우가 방어사로서 창녕의 화왕산성을 지키며 사수할 뜻을 보이니 온 군중이 적의 군사가 많음을 두려워하여 벌벌 떨었다. 적병이 이미 성에 다가왔는데도 재우는 조용히 웃으며 다만 굳게 지키라고 명령하여 말하기를 ‘제 놈들도 병법을 알 터이니 어찌 경솔하게 덤벼들 수 있겠는가’ 하더니 과연 하루 밤낮을 지나자 적이 싸우지 아니하고 강을 건너갔다. 적이 황석산성을 공격하고 남원을 함락해 각 진이 모두 무너지니 체찰사 이원익이 공에게 군사를 철수시킬 것을 명령했다. 공(곽재우)이 사람을 보내 보고하기를 ‘제(齊)나라의 72성 중 즉묵성만은 홀로 보전되었으며, 당나라의 군사가 100만 명이었으나 안시성은 능히 그들을 당해냈는데 어찌 모든 성이 파했더라도 홀로 지켜내지 못할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왜군이 경상우도를 침입했을 때 곽재우 홀로 화왕산성을 굳게 지키던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곽재우는 화왕산성으로 군사를 모은 후 자신이 머무르던 객사에 섶을 쌓아 죽기를 결심하고 지킬 뜻을 보인다.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어 군사들이 두려워할까 미리 취한 조치였다. 곽재우는 인근 성이 모두 무너질 때도 동요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물러나는 적의 배후를 기습해 전과를 올린다.
왜적은 마침내 낙동강을 건너 서쪽으로 가서 안음의 황석산성을 공략하고 전라도 남원성을 함락했다. 체찰사 이원익이 곽재우에게 적은 병력으로는 성을 지킬 수 없음을 지적하면서 그에게 피하라고 명령했으나, 곽재우는 혼자 힘으로 왜적에 대항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표명했다. 그의 탁월한 용기와 판단력으로 승리를 거둔 전투가 화왕산성전투였다. 가장 훌륭한 전술은 적과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것인데, 곽재우 장군은 화왕산성전투에서 그 모범을 보여줬다.
창녕 고을과 영산 사람
화왕산은 창녕의 진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창녕은 처음 비자화군 또는 비사벌(比斯伐)이라고 불렸다. ‘빛벌’ 또는 ‘빛불’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신라 진흥왕 16년(555) 하주(下州)라고 하다 경덕왕 때 화왕군(火王郡)으로 고친다. 고려 태조 때 창녕이라 하고 밀성군에 소속시킨다. 그 후 조선 태조 3년(1394) 창녕현과 영산현으로 나누었으나 영산현은 나중에 창녕군의 한 면이 되었다.
창녕 답사는 대부분 창녕읍 교상동의 ‘만옥정공원’에서 시작한다. 이 작은 공원에 우리나라 국보 제33호인 ‘신라진흥왕순수비’가 있다. 진흥왕은 신라의 영토를 개척해 넓히고 그 위업을 기리기 위해 곳곳에 순수비를 세웠다. 창녕 순수비를 비롯해 서울 북한산비, 함경남도 마운령비와 황초령비, 그리고 단양의 적성비가 그러한 순수비 성격을 띤다. 다만 창녕비는 순수비가 아닌 ‘척경비’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창녕비에는 다른 순수비에서 나타나는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구절이 없기 때문이다. 순수비든 척경비든, 회맹비든 비의 성격과 명칭에 대한 논란은 분분해도 이 창녕비가 신라사회의 관제·신분제·사회조직 등의 역사적 사실을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 비는 일제강점기인 1914년 창녕초등학교 학생이 화왕산 기슭에서 발견했다고 전한다. 당시 옛 가야지역에서 ‘임나일본부’의 흔적을 찾던 일본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에 의해 신라시대의 비석임이 확인되었다. 비는 1924년 현재의 자리인 만옥정공원으로 옮겨 세워졌다. 비문은 화강암 자연석의 한 면을 갈아 27행 643자를 새겼는데, 이 가운데 판독된 것은 400여 자로 맨눈으로 보아서는 자획을 판정하기 어렵다. 다행히 비문의 첫 부분에 ‘신사년(辛巳年)’이라는 간지(干支)가 선명하게 남아 있어, 이 비가 진흥왕 22년(561) 2월 1일 세워진 것임을 알려준다.
왕은 당시 42명의 신하를 거느리고 창녕 땅을 돌아보았다. 비문에는 이들의 관직·출신지·이름·직위가 순서대로 기록돼 있어 신라시대 관직과 직위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김유신 장군의 할아버지 김무력과 이사부 장군의 이름도 비문에 나타난다. 가야제국 중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대가야가 망한 때가 562년이다. 비사벌이라고 불리던 창녕에 그 전해인 561년 진흥왕의 순수비가 세워졌다는 사실은 이 땅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말해준다. 비문에는 ‘내가 어려서 나라를 이어받아’로 시작되는 문구가 있어 진흥왕이 7세에 왕위에 올랐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정확함을 다시 한번 입증한다.
화왕산성은 산세가 가파르고 전략적 가치가 높아 임진왜란과 6·25전쟁 때도 전투가 치열했다. 화왕산성 남문.
만옥정공원에는 창녕 진흥왕순수비 외에도 1866년 병인양요 후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과시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세웠던 척화비 하나가 옮겨져 있다. 또한 통일신라시대 석탑인 퇴천리3층석탑을 비롯해 한때 술정리 시장 건물로 가져다 썼던 창녕객사 건물도 옮겨져 있다.
창녕군 창녕읍 술정리에는 술정리 동·서 삼층석탑이 있다. 그런데 이 두 개의 석탑은 나란히 서 있는 탑이 아니고 족보도 서로 다르다. 절터 이름은 알 수 없고, 서 있는 방위에 따라 그저 동쪽과 서쪽에 각각 세워져 있어 그렇게 명명됐을 뿐이다. 시기적으로도 차이가 있어 별개의 사찰에 소속됐던 석탑으로 보인다. 우선 전문가에 의해 객관적으로 매겨진 타이틀을 보면 술정리 동삼층석탑은 국보 제34호, 서삼층석탑은 보물 제520호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동삼층석탑에 후한 점수를 주고, 또 많이 찾는다.
술정리 동삼층석탑을 보는 순간 어딘가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든다. 찬찬히 살펴보면 불국사 삼층석탑, 즉 통일신라 전성기의 석탑인 석가탑의 모습을 많이 닮았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낯선 것은 석가탑에 있는 상륜부가 술정리 동삼층석탑에는 없다. 어쨌든 술정리 동삼층석탑은 세련되고 우아하다. 적절한 비례, 균형과 조화…. 그래서 이 탑은 홀로 있어도 당당하다.
반면 서삼층석탑은 항상 동삼층석탑과 비교된다. 마치 영원한 주연과 조연인 것처럼…. 각기 다른 운명으로 태어난 석탑에 함부로 동·서라는 명칭을 붙이고, 사사건건 비교하는 것은 사람들의 횡포다.
동삼층석탑은 1965년 해체수리할 때 3층 탑신 중앙 사리공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됐다. 이곳에서 청동 잔 모양의 사리용기와 흰색 사리 7과를 봉안한 사리병, 그리고 작은 유리구슬 등의 사리장엄구를 수습했다. 사리는 탑을 맞출 때 새 용기에 넣어 제자리에 안치했다고 한다.
동삼층석탑에는 문화재지킴이 혜일 스님의 이야기가 있다. 스님은 국보 제34호인 동삼층석탑을 보호하기 위해 동탑관리소를 만들고 문화재지킴이를 자청했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혜일이 네가 동탑을 잘 지켜라” 하는 부처님의 현몽에 따라 동탑을 찾아왔던 것이다. 1998년의 일이다. 그런데 당시 동삼층석탑은 인근 주민의 휴식처요, 놀이터가 돼 있었다. 탑 위에는 함부로 담요와 시래기를 널어 말리고, 취객들이 버린 쓰레기며 오물로 주변은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혜일 스님은 매일 청소하고 잔디를 심어 관리하게 되었고, 이 탑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마침내 국립중앙박물관 지하 수장고에 방치돼 있던 관련 자료를 확인하고 행정당국에 문화재 보호를 촉구했다. 매년 11월 7일 입동 때는 동탑제를 개최한다고 한다. 지금도 차량 등의 무분별한 출입과 관리 미흡으로 탑이 한쪽으로 기울고 있다며 안타까워한다.
동삼층석탑을 답사한 독자들께 전통 초가인 ‘하병수가옥’을 함께 찾을 것을 권한다. 바로 동탑 뒤에 있기 때문이다. 예쁘고 사랑스럽게 잘 가꾼 소박한 초가다. 볏짚 대신 억새풀로 이엉을 얹었기에 정확한 명칭은 초가집이 아니라 샛집이다. 볏짚은 매년 바꾸어줘야 하지만 억새풀로 이엉을 얹으면 20~30년은 거뜬히 간다고 하니 놀랄 일이다.
이 집은 지은 지 200년이 넘었다고 하는데 후손들이 잘 가꾸고 있다. 울 안으로 푸성귀를 심은 텃밭이 있고, 작은 마당에는 철마다 다른 꽃이 피게 만들어 감탄을 자아낸다. 국화·수국·원추리·모란·맨드라미·능소화·영산홍, 그리고 감·은행·대추나무 외에도 이름을 알 수 없는 꽃이며 나무가 작은 마당을 빈틈없이 채우고 있다. 아무런 욕심 없이 오래 살고픈 집이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창녕현과 영산현은 조선시대 내내 이웃 고을로 어깨를 나란히 하며 살아왔다. 지금은 영산이 창녕군의 일개 면이 되었지만, 영산현은 신라 때 서화현(西火縣)으로 창녕 못지않게 번성했던 고을이다. 현재 남아 있는 영산읍성지·영산만년교·영산석빙고·영산신씨고가 등이 흥성했던 영산현 시절의 일면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영산 사람들의 고을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흔히 영산 사람은 기질이 강하다고 한다. 기질이 강하고 지역세가 세기에 일제강점기에도 일본인이 이곳에 발을 붙이기 어려웠다고 한다. 영산에서는 3·1운동 때 구중회·장진수 등 청년 24명이 중심이 되어 영산결사대를 조직하고 경남에서 가장 먼저 격렬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고 한다. 지금도 3·1절을 기념해 ‘3·1 민속문화제’가 열리는데, 이때는 ‘쇠머리대기’와 ‘줄다리기’ 등 영산 고유의 전통 민속놀이를 구경하기 위해 전국에서 많은 사람이 이 마을로 모여든다.
임진왜란 때 홍의장군 곽재우는 철수하라는 상관의 명령에도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성을 사수했다.
이 고을에 전하는 문호장 전설은 영산 사람의 굽힐 줄 모르는 반골기질을 말해준다. 반골기질은 창녕과 영산, 이 두 고을에서 일어난 역모사건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창녕현은 조선 인조 때 ‘지도역변(至道逆變)’이라는 역모사건으로 고을이 강등돼 일시적이나마 영산현에 속했던 적이 있다.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패륜을 일삼던 광해군은 강화도로 유배됐으나 정국은 이괄의 난, 병자호란 등 난리가 연이어 터지면서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이때 서인의 정사에 불만을 품은 유림세력을 규합해 광해군 복위를 꾀하던 모의가 있었다. 창녕 사람인 성지도(成至道)가 주동이 되어 전국적으로 동조세력을 규합하고 1000명의 군사를 모아 거사할 것을 모의한 것이다. 거사 직전 공주 사람 한설과 옥천 사람 조흥빈의 밀고로 발각됐다. <인조실조>에 따르면 주동인물인 성지도·양사태 등 30여 명이 처형당하고, 고문으로 죽은 자가 10여 명, 유배된 자가 50여 명에 달하는 대규모 역모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창녕현은 역신의 고을이라 하여 현을 혁파당하고 영산현에 합속됐다 6년 만에 겨우 회복되었다.
영산현은 이보다 먼저 역모사건에 휘말렸다. 고려 말 요승으로 낙인찍힌 신돈은 창녕 옥천리 옥천사 여종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신돈이 역적으로 몰려 주살된 후 옥천사는 허물어지고 지금은 옛 절터에 초석만 남아 있다. 신돈은 고려 말 공민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왕권을 강화하려던 개혁가였다. 그러나 고려왕조를 멸망시킨 세력이 사실과 다르게 많은 누명을 씌워 처형했으므로 나라를 어지럽힌 요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신돈은 바로 영산현의 본성인 ‘영산 신(辛)씨’다. 이 고장 사람들은 영산의 진산인 영축산의 험한 산세가 사람들의 반골기질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영산 사람이 영축산의 불기운을 다스리기 위해 인공연못인 벼루 모양의 연지(硯池)를 스스로 조성했다는 이야기도 예사로 들리지 않는다.
창녕박물관과 창녕고분군
창녕 조씨가 성을 얻게 된 내력이 전하는 연못. 근처에 ‘창녕 조씨 득성비’가 서 있다.
역사 답사의 1번지는 역시 박물관이다. 창녕에는 역사의 고장답게 작은 군소재지이지만 역사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으로 들어서자 먼저 보이는 것이 송현동7호분에서 출토된 배 모양의 녹나무관 모형이다. 녹나무는 중국 남부와 일본 규슈(九州), 간사이(關西)지방에서 자라는 수목이다. 이번에 송현동에서 출토된 녹나무관도 일본에서 자란 녹나무를 쓴 것으로 추정한다. 녹나무는 잘 썩지 않고 벌레가 쉽게 생기지 않으며 보존성이 높아 예부터 배를 만들거나 왕 귀족의 관재(棺材)로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전시된 녹나무관은 애초에는 배로 사용하다 관으로 용도 변경했기에 배 모양을 그대로 갖게 됐다고 한다.
그동안 녹나무는 한반도에서는 자라지 않는다고 알려졌다. 한국에서 출토되는 녹나무의 원재료는 일본산이며 이것이 한·일 간 문화교류품인 것으로 주장되었다. 그러나 최근 녹나무가 예부터 제주도에서 자생하던 식물이라는 것이 관련 학계에 의해 판명되었다.
마침 창녕박물관에서는 순장(殉葬)인골의 복원전시전이 열리고 있었다. 2007년 12월 송현동15호분에서 출토된 여성 순장인골의 인체를 복원해 그 모형을 공개한 것이다. 1500년 전 순장당한 가야의 여성이 다시 태어난 것이다. 16세로 추정되는 여성의 이름은 ‘송현이’로 명명되었는데, 이 여성은 무덤 주인공인 권력자의 시녀였고 그가 죽자 순장당한 것으로 추정했다.
가야계 유물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북방 유목민족과 연관되는 유물이다. 가야지역에서는 철제 갑옷과 투구, 기마용 마구가 다량 출토됐는데 이들 마구의 원류는 북방계인 것으로 알려졌다. 창녕박물관의 전시품 가운데도 상당량의 기마용 마구가 전시돼 기마민족과 관계가 주목된다. 안타까운 것은 일찍부터 고분이 훼손돼 그 많던 유물의 실체를 접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현재 창녕읍내의 교동·송현동고분군은 24번 국도를 중심으로 둘로 나뉘어 있다. 복구를 완료한 서쪽 고분군이 22기, 동쪽 고분군은 대형무덤이 8기다. 일제강점기 초기만 해도 고분이 적어도 150기 이상 있었다고 하는데, 그 많던 무덤이 1910년대부터 시작된 도굴과 개간으로 이 땅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1918~1919년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발굴한 몇 기의 고분에서만 마차 20대, 화차 2량이 넘는 엄청난 유물이 출토됐다고 전한다. 그러나 발굴보고서 한 장 없이 출토유물은 대부분 일본으로 반출되고 말았다. 금은세공품이 쏟아지자 도굴꾼이 극성을 떨었고, 창녕 일대의 고분은 도굴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현재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이 소장한 가야유물 가운데 출토지가 창녕으로 알려진 것이 적지 않다. 금동관·금동관모·금은장식환두대도 등은 모두 왕이나 그에 준하는 지배자를 상징하는 위세품이다. 따라서 창녕지역에는 상당한 힘과 권력을 가진 지배자가 통치하던 국가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화왕산성을 올라야 하고 볼거리도 많은 바쁜 일정이지만, 창녕까지 와서 빼놓을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가 고인돌이다. 고인돌이야 우리나라 어디인들 없을까마는 장마면 유리에 있는 고인돌은 그 기세가 자못 당당하다. 창녕지역에는 400여 기의 고인돌이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창녕읍 영산 계성면지역에 집중 분포한다. 이 가운데 유리마을의 고인돌은 배열이 특이한 까닭에 일찍부터 주목받았다. 이 고인돌은 계성천변 얕은 구릉 정상에 위치한다. 원래 7기가 북두칠성처럼 배열돼 이곳 사람들은 이를 ‘칠성바위’ 또는 ‘치성바위’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과거 보러 가는 선비들이 이 고인돌에 절하면 합격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1912년 조선총독부가 도로를 낸다며 6기를 깨부수었다고 한다. 2000년 넘게 자리를 지켜왔을 고인돌이 한순간에 예리한 정에 맞아 산산조각난 채 도로를 닦는 데 사용되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은 홀로 한 기의 고인돌만 남았다. 그 무게가 자그마치 50t이다. 굳이 평지가 아닌 구릉 정상까지 거대한 돌을 끌어올려 조성한 옛사람들의 정성은 과연 무엇일까?
창녕까지 와서 못 보고 간다면 서운한 것 중 하나가 관룡사 용선대의 석불좌상이다. ‘창녕의 금강산’이라고 불릴 정도로 절경인 관룡산 기암절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절이 관룡사다. 조촐하고 고졸한 관룡사는 원효대사가 제자 1000명을 데리고 화엄경을 설법한 곳이라고 전한다.
이런 관룡사를 뒤로하고 명부전과 요사채 사이로 난 길을 따라 한참을 오르면 커다란 바위산 마루인 용선대를 만난다. 누군가 그 모양이 마치 ‘반야용선(般若龍船)’을 닮았다 하여 용선대라고 불렀다던가? 반야용선은 어지러운 세상 너머 피안의 극락정토로 들어갈 때 탄다는 배를 말한다. 그 끝자락에 동쪽을 바라보고 결가부좌한 석조석가여래좌상이 있다. 단아한 자세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모습은 석굴암 본존불을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용선대 석가여래는 석굴 속에 갇힌 본존불이 아니라 탁 트여 거칠 것 없는 땅 위, 하늘 아래 마치 반야용선에 올라앉은 모습을 하고 있다. 아하! 아침햇살을 받은 석가여래의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 한이다.
글출처 월간중앙: 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286709 (20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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