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근심하십니까? /요한복음14:1-4/P.172/2008.11.30/주일찬양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개역한글]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루에 1분 30초 정도를 웃습니다. 그렇다면 80 한 평생에 한 달 정도 30일을 웃는데 보냅니다. 반면에 하루 24시간 가운데 무려 3시간 6분 정도는 근심을 하며 보냅니다. 일 평생 10년을 걱정 근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인생 8분지 일을 근심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근심.... 한 번 뿐인 인생을 이렇게 걱정 근심하며 허비하는 우리에게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나님과 나를 믿는다면 근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시작해서 이 자리에 오시기까지 걱정이나 근심이 없이 오신 분이 한 분도 안 계실 것입니다. 모두 한 가지 이상의 걱정거리를 가지고 하루를 시작하셨을 것입니다. 요즘은 걱정 거리가 더 많아졌습니다. 세계적인 불경기로 인해 하루 하루 살아내기가 힘겨워 졋기 때문입니다.
시절이 어렵고 미래가 불투명해지면 질수록 사람들은 막연한 공포감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이 공포감을 없애기 위해 도박이나 술 또는 미신이나 이런데로 도피하려고 합니다. 요사이 점을 치거나 자신이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을 한다는 도사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미신적인 예언을 매우 좋아하는 국민들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런 세상에서 살려고 하니 근심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 고 하셨습니다. 이를 줄이면 ’근심하지 말고 나를 믿으라’ 이 말씀 아닙니까? 따라합시다. ‘근심하지 말고 나를 믿으라‘
그러니까 주님 입장에서는 근심의 이유가 어디 있는가 하면 너희들이 나를 믿지 못하니까 근심하는 것이 아니냐 이 말씀입니다. 곧 불신이 그 이유라는 것입니다. 믿지 않으니까 염려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시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배경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제자들이 매우 불안해 하고 근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오늘 우리와 같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주님께서 곧 자기들을 떠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부인에 대한 예언은 제자들에게 공포감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굉장한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래서 삶의 터전을 다 버리고 주님을 좇았습니다. 주님과 동고동락을 하면서 장밋빛 미래를 꿈꾸었습니다. 이 고생이 다 지나가고 곧 주님의 왕국이 실현될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주님의 능력이면 안 되는 것이 없음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날이 곧 다가올 줄 알았는데... 모든 꿈이 깨어졌습니다. 주님은 이제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에게 붙잡힐 것이고... 주님 만을 바라보고 좇아 살아온 우리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무얼 하며 살아야 하나? 걱정이 태산같았습니다. 모두가 절망하고 낙심했을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의 마음을 잘 알고 계신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근심하지 말고 나를 믿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들을 불러 제자 삼아 지금까지 가르치고 훈련을 시켰는데 그냥 무책임하게 버리지 아니할 것이다. 너희들을 그냥 방치하지 않겟다’는 말씀입니다. 그러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절을 봅시다.
(요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거할 아버지의 집이 있으니 근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집이란 천국을 말합니다. 천국이 예비되어 있으니 근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집 없는 사람에게 내 집을 갖는다는 것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습니다. 자기 집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소망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 세상에서 크고 아름다운 집이라 할지라도 천국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무주택자로 살더라도 천국에 집이 있다면 그보다 더 복된 일은 없습니다. 반대로 이 세상에서는 고대광실 집에 살았으나 천국에 자기 거처가 없다면 그보다 불행한 일은 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집이 너희를 위하여 마련 되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천국의 소망은 모든 근심을 물러가게 합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는 사람은 염려하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근심은 이 세상이 전부라는 사고방식에서 부터 시작이 됩니다.
또 주님은 우리가 근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3절에 나옵니다.
(요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내가 다시 올 것이니 근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재림의 약속입니다. 역사상 가장 강하고 담대한 교회가 초대교회였습니다. 초대교회가 그 무서운 핍박과 박해를 이기고 믿음을 지킨 원동력이 바로 재림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도 성도들도 모두 이 약속을 붙들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말씀을 추호도 의심없이 믿고 기다렸습니다. 이런 그들에게서 세상의 염려나 근심은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은 오늘 미래에 대한 불안과 염려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 14:18)
성경은 우리에게 근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들에 대해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잠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잠15:13)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잠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근심을 하면 심령이 상하고 뼈가 마른다는 것입니다. 불치병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수명이 단축이 됩니다.
의학계의 보고에 의하면 심장병은 거의 근심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근심이 가득한 사람이 심장질환에 걸릴 확률이 많습니다. 우리가 뭔가 불안하면 심장이 두근 거립니다. 근심은 심장의 기능을 떨어뜨립니다.
미국에서 지진이 일어낫는데 지진으로 인한 외상으로 죽은 사람보다 지진의 두려움과 충격으로 사망한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도 나쁜 백해무익한 근심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찾아 봅시다.
눅12장 22절에 우리가 이 세상을 근심 걱정으로 살아가는 이유가 나옵니다.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고 하셨습니다. 결국 우리는 먹고 사는 문제로 인해 고민하고 걱정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걱정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잇습니까? 이 세상 살아가는 사람치고 생존의 문제로 걱정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 하는 것이 바로 이 생존의 문제 아닙니까? 뭘 해 먹고 사나? 앞으로 이 험난한 세월을 어덯게 보내야 하나?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런 현실을 극복하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주고 게십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하늘을 바라 보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눅12: 24)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삶을 책임져 주심을 까마귀를 예로 드셧는데 하필이면 왜 까마귀입니까? 레위기에 보면 까마귀는 부정한 새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제물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부정한 새 까마귀도 내치지 아니하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재수 없다고 돌을 던지고 쫓아내는 까마귀 조차도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돌보아 주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뭡니까? 먹고 사는 것으로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근심해서 될 일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구절입니다.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눅12:25.26)고 하셧습니다.
여기서 ‘키’라는 말은 우리의 외형적인 신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 또는 생애’를 말합니다. 그래서 관주에 보면 ‘목숨을 한 시간이라도 연장할 수 있느냐’ 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건강을 염려하고 위해서 산다고 해도 반드시 오래 산다는 보장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그렇습니다. 염려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충실하게 산 인물이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이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1-2)
그는 목동 출신 답게 하나님을 목자로 표현하였습니다. 그 목자는 누구입니까? 양을 알되 너무도 잘 알고 양을 지키고 보호하는 자입니다. 양을 굶주리게 하는 목자는 없습니다. 항상 풍성한 꼴을 마련해 줍니다. 병든 양을 그냥 방치하는 목자는 없습니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양의 건강을 회복시켜 줍니다. 목이 마르면 물가로 인도하여 마음껏 마시게 합니다. 목자의 관심은 오직 양에게 있습니다. 양이 행복하면 따라서 행복하고 양이 불행하면 같이 불행해 합니다. 이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라고 다윗은 우리에게 소개해 주었습니다. 목자이신 우리 하나님.. 그리하여 부족함이 없이 살도록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
그런데 오늘 주님은 목자이신 하나님을 우리에게 더욱 친밀하신 분으로 소개해 주고 계십니다. 어떤 분이십니까? 아버지입니다. 아버지... 아무리 목자가 좋은들 아버지보다 못합니다. 주님은 그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대해주시는지를 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눅12장 28절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는 자녀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애를 씁니다. 이게 아버지의 역할입니다. 이런 아버지에 대해 어느 성도님이 쓴 글이 소개해 드립니다.
제목은 아버지의 선물입니다.
따르릉~~ 집사람에게 아버지의 호출 명령이 떨어졌다.
이번 주 토요일에 새벽을 도와 내려오란다. 김장을 하신단다.
아침 일찍 서산에 있는 집으로 향했다.
왼 종일~~ 삼백여 포기의 절인 배추로 김장을 담근다.
저녁상은 겉절이와 보쌈으로 풍성하고
트렁크와 뒷자리에 아버지의 선물이 그득하게 담긴다.
배추김치 10여 상자 / 총각김치 두 봉지/ 큰 호박 2개/ 양배추 열두 통
넓게 썰은 무우김치 한 봉지/ 유기농 쌀 40킬로그램/무우 한 포대/갈은 마늘 한 봉지
호박김치 한 봉지 / 고구마 2박스/ 서리태 콩 한 자루/ 고추 간장 장아찌 한박스
무릎 수술로 거동이 불편하신 어머니는 오늘의 총 감독!
"여보. 애들 차에 이것 좀 실어줘요!"
아버지는 어머니의 명령대로 (신이 나신 듯) 트렁크에 채곡 채곡 선물들을 쌓으신다.
밥맛 좋으니 잡숴보라고 이웃에서 선사한 유기농 쌀 한 포대를
주둥이를 다시 단단히 여미고 뒷 자리에 실어주신다.
"이 쌀은 그냥 두분이 드세요!" 지금 생각하니 이 말을 했어야 했는데,
아무 말도 못하고 넙죽 받아온 나는 분명 철없는 아들이다.
서울 오는 차안에서 아버지의 선물을 생각한다. 세상의 아버지도 이렇게 좋은 것으로 나를 먹이시는구나! 차안 가득한 땅의 소산들이 우둔한 나를 깨우친다.
그렇다면 하늘 아버지는 오늘 내게 무엇을 먹이실까?
(주님께서 친히 말씀으로 깨우쳐 주신다.)
여러분, 이분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예비하시고 주시기를 좋아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믿는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가?
여러분은 지금 김장을 해 놓았기에 근심이 없으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아버지시기 때문에 걱정이 없으십니까?
은행에 잔고가 많아서 든든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염려가 없으십니까?
여러분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근심하지 말고 아버지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우리 아버지께서 반드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 가운데 가장 귀하고 큰 선물은 무엇보다도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기도를 우리는 너무나 가치없는 것으로 여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성경에 수 없이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기도하기를 귀찮아 합니다. 점점 기도하는 것을 포기합니다. 그 이유는 기도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나 계산적입니다. 잘 나갈 때는 기도하지 않다가 어려울 때는 기도합니다. 진정 하나님의 사람들은 잘 나갈 때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한 번 넘어지고 회복하려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릅니다. 엄청난 시간과 정력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미리 넘어지지 않기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고전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그리스도인에게 항상 강조하고 강조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명령이요 우리의 의무와 책임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청와대 대통령을 아무 때나 만나 대화할 수 있다면 대단한 특권입니다. 그런데 아무 때나 전능하신 하나님께 나아가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놀라운 특권이요,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대화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이처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직접 대화할 수 있고, 언제든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해야 할 이유는?
기도는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따로 초청장이나 만남을 신청해 놓고 기다리지 않아도 언제든지 내가 원하면 만날 수 있는 분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놀라운 특권을 가지고 계신 분들입니다. 요일5:14=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엡6:18=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하는데 어떤 의식이나 절차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디서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 하고 부르고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말씀드리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직접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마리아나 어느 제자를 통할 필요도 없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특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에게 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요14:6=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날마다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여러분의 모든 것을 아뢰는 성도가 되십시요. 기도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이 말은 기도를 통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일에 동참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어느 곳에서나 어느 때나 어떤 필요를 위해서든지 하나님의 협력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기도를 통하여 영혼과 육신이 굶주린 수백만 사람들을 먹일 수 있고, 고통당하는 어린이들을 위로할 수가 있습니다. 병원에서 신음하는 많은 환자들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중보기도는 하늘의 권능을 끌어내리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응답을 많이 하시는 기도가 바로 중보 기도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 만큼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는 기도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기도입니다. 자신을 위해, 가족을 위해, 교회를 위해 나라와 민족, 더 나아가 세계를 위해 여러분의 기도의 범위를 점점 더 넓혀가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않으면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기도의 용사가 되십시요, 기도의 승리자가 되십시요, 기도하므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과 승리를 누리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근심하지 말고 아버지를 믿어드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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