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환애는 저 쪽 구석에서부터 비질을 하기 시작하였다. 먼지가 상정 없이 철호의 얼굴로 몰려 왔다.
철호는 어슬렁 일어섰다. 이 쪽 모서리 창가로 갔다. 바께쓰의 물을 대야에 따랐다. 두 손을 끝에서부터 가만히 물 속에 담갔다. 아직 이른봄이라 물이 꽤 손끝에 시렸다. 철호는 물 속에 잠긴 두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펜대에 시달린 오른손 장지 첫마디에 콩알만한 못이 박혔다. 그 못에서 파란 명주실 같은 것이 사르르 물 속으로 풀려났다. 잉크, 그것은 잠시 대야 밑바닥을 기다 말고 사뿐히 위로 떠올라 안개처럼 연하게 피어서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손가락 끝을 중심으로 하고 그 색의 농도가 점점 약해져 나갔다. 맑게 갠 가을 하늘색으로 대야 가장자리까지 번져 나간 그것은 다시 중심의 손끝을 향해 접어들며 약간 진한 파랑색으로 달무리 모양 둥글한 원을 그렸다.
피! 이건 분명히 피다!
철호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슬그머니 물 속에서 손을 빼내었다. 그러자 이번엔 대야 밑바닥의 한 사나이의 얼굴을 보았다. 철호의 눈을 마주 쳐다보는 그 사나이는 얼굴의 온 근육을 이상스레 히물히물 움직이며 입을 비죽거려 웃고 있었다.
이마에 길게 흐트러진 머리카락, 그 밑에 우뚝하니 파인 두 눈, 깎아진 볼, 날카롭게 여윈 턱, 송장처럼 꺼멓고 윤기 없는 얼굴, 그것은 까마득한 원시인(原始人)의 한 사나이였다.
몽둥이 끝에, 모난 돌을 하나 칡넝쿨로 아무렇게나 잡아매서 들고, 동굴 속에 남겨 두고 나온 식구들을 위하여 온종일 숲 속을 맨발로 헤매고 다니던 사나이.
곰? 그것은 용기가 부족하다.
멧돼지? 힘이 모자란다.
노루? 너무 날쌔어서.
꿩? 그놈은 하늘을 난다.
토끼? 토끼, 그래. 고놈쯤은 꽤 때려잡음직하다. 그런데 그것마저 요즈음은 몫에 잘 돌아오지 않는다. 사냥꾼이 너무 많다. 토기보다도 더 많다.
그래도 무어든 들고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사나이는 바위 잔등에 무릎을 꿇고 앉아 냇물에 손을 씻는다. 파란 물 속에 빨간 노을이 잠겼다. 끈적끈적하게 사나이의 손에 묻었던 피가 노을빛보다 더 진하게 우러난다.
무엇인가 때려잡은 모양이다. 곰? 멧돼지? 노루? 꿩? 토끼?
그런데 사나이가 들고 일어선 것은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보기에도 징그러운 내장, 그것이 무슨 짐승의 내장인지는 사나이 자신도 모른다. 사나이는 그 짐승의 머리도 꼬리도 못 보았다. 누군가가 숲 속에 끌어내어 버린 것을 주워 오는 것이었다.
철호는 옆에 놓인 비누를 집어들었다. 마구 두 손바닥으로 비볐다. 우구구 까닭 모를 울분이 끓어올랐다.
빈 도시락마저 들지 않은 손이 홀가분해 좋긴 하였지만, 해방촌 고개를 추어 오르기에는 뱃속이 너무 허전했다. 산비탈을 도려내고 무질서하게 주워 붙인 판잣집들이었다. 철호는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레이션 갑을 뜯어 덮은 처마가 어깨를 스칠 만치 비좁은 골목이었다. 부엌에서들 아무 데나 마구 버린 뜨물이 미끄러운 길에는 구공탄 재가 군데군데 헌 데 더뎅이 모양 깔렸다.
저만치 골목 막다른 곳에, 누런 시멘트 부대 종이를 흰 실로 얼기설기 문살에 얽어 낸 철호네 집 방문이 보였다. 철호는 때에 절어서 마치 가죽끈처럼 된 헝겊이 달린 문걸쇠를 잡아 당겼다. 손가락이라도 드나들 만치 엉성한 문이면서 찌걱찌걱 집혀서 잘 열리지를 않았다. 아래가 잔뜩 접힌 채 비틀어진 문틈으로 그의 어머니의 소리가 새어나왔다.
"가자! 가자!"
미치면 목소리마저 변하는 모양이었다. 그것은 이미 그의 어머니의 조용하고 부드럽던 그 목소리가 아니고, 쨍쨍하고 간사한게 어떤 딴 사람의 목소리였다.
윗방 아랫목에는 딸애가 반듯이 누워서 잠이 들었다. 담요를 몸에다 돌돌 말고 반듯이 누운 것이 꼭 송장 같았다. 그 옆에 철호의 아내가 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꺼먼 헝겊과 회색 헝겊으로 기운 담요 바지 무릎 위에는 빨강색 유단으로 만든 조그만한 운동화가 한 켤레 놓여 있었다. 철호가 방안에 들어서자 아내는 그 어린애의 빨간 신발을 모두어 자기 손바닥에 올려놓아 철호에게 들어 보였다.
"삼촌이 사 왔어요."
유난히 속눈썹이 긴 아내의 눈이 가늘게 웃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보는 아내의 웃음이었다. 자기가 미인이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만지 오랜 아내처럼, 또 오래 보지 못하여 거의 잊어버려 가던 아내의 웃는 얼굴이었다.
철호는 등잔이 놓인 문턱 가까이 가서 앉으며 아내의 손에서 빨간 어린애의 신발을 받아 눈앞에서 아래위를 살펴보았다.
"산보 갔었소?"
거기 등잔불을 사이에 두고 윗방을 향해 앉은 철호의 동생 영호가 웃으며 철호를 쳐다보았다.
"언제 들어왔니?"
"지금 막 들어와 앉는 길입니다."
그러고 보니 영호는 아직 넥타이도 끄르지 않고 있었다.
"형님!"
새삼스레 부르는 동생의 소리에 철호는 손에 들었던 어린애 신발을 아내에게 돌리며 영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제 우리두 한번 살아봅시다. 제길, 남 다 사는데 우리라구 밤낮 이렇게만 살겠수? 근사한 양옥도 한 채 사구, 장기판 만한 문패에다 형님의 이름 석자를 ,제길 장님도 보게 써서 대못으로 땅땅 때려박구 한 번 살아 봅시다.
군대에서 나온 지 이년이 넘도록 아직도 직업을 못 잡은 영호가 언제나 술만 취하면 하는 수작이었다.
"그리고 이천만 환 짜리 세단차도 한 대 삽시다. 거기다 똥통이나 싣고 다니게. 모든 새끼들이 아니꼬워서, 일이야 있건 없건 종일 빵빵 울리면서 동리를 들락날락해야지. 제길, 하하하."
비스듬히 벽에 기대어 앉은 영호는 벌겋게 열에 든 얼굴을 하고 담배 연기를 푸 내뿜었다.
"또 술 마셨구나."
고학으로 고생고생 다니던 대학 삼 학년에서 군대에 들어갔다가 나온 영호로서는, 특별한 기술이 없어 직업을 잡지 못하는 것은 별도리도 없는 노릇이라 칠 수도 있었지만, 이건 어디서 어떻게 마시는 것인지 거의 저녁마다 이렇게 취해 들어오는 동생 영호가 몹시 못마땅한 철호의 말이었다.
"네, 조금했습니다. 친구들이 "
그것도 들으나 마나 늘 같은 대답이었다. 또 그것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도 철호는 알고 있었다.
"이제 술 좀 그만 마셔라."
"친구들과 어울리면 자연히 마시게 되는 걸요."
"글쎄 그러니까 그 어울리는 걸 좀 삼가란 말이다."
"이제 술 좀 그만 마셔라."
"친구들과 어울리면 자연히 마시게 되는 걸요."
"글쎄 그러니까 그 어울리는 걸 좀 삼가란 말이다."
"그럴 수도 없어요. 하하하."
"그렇다고 언제까지 그저 답답하니까 만나는 거구, 만나면 어찌 어찌하다 한잔씩하며 이야기나 하는 거죠 뭐."
"글쎄 그게 맹랑한 일이란 말이다."
"그렇지만 형님. 그런 친구들이라도 있다는 게 좋지 않수. 그게 시시한 친구들이라 해도. 정말이지 그놈들마저 없었더리면 어떻게 살 뻔했나 하고 생각할 때가 많아요. 외팔이, 절름발이 그런 놈들. 무식한 놈들. 참 시시한 놈들이야요. 죽다 남은 놈들. 최소한 남을 속이지는 않거든요. 공갈을 때릴 망정. 하하하하 전우. 전우."
영호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천장을 향해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철호는 그저 물끄러미 영호의 모습을 쳐다 볼 뿐 아무 말도 없었다. 영호는 여전히 천정을 향한 채 피어오르는 연기를 바라보며 한 손으로 목의 넥타이를 앞으로 잡아당겨 반쯤 끌러 늦추어 놓았다.
"가자!"
아랫목에서 어머니가 소리를 질렀다.
영호는 슬그머니 아랫목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참이나 그렇게 어머니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영호는 아무 말도 없이 눈만 껌뻑껌뻑 하고 있었다.
철호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앞에 놓인 등잔불이 거물거물 춤을 추었다. 철호는 저고리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었다. 바삭바삭 마른 담배는 양끝이 반쯤 빠져나갔다. 철호는 그, 양끝은 비벼 말았다. 흡사 비과 모양으로 되었다. 철호는 그 비과 모양의 담배 한 끝을 입에다 물었다.
"이걸 피슈. 형님."
영호가 자기 앞에 놓였던 담배갑을 집어서 철호의 앞으로 내어 밀었다. 빨간색 양담배 갑을 한 번 힐끔 쳐다보았을 뿐 아무 소리도 없이 등잔불로 입에 문 파랑새 끝을 가져갔다. 영호는 등잔불 위에 꾸부린 형 철호의 어깨를 넌지시 바라보고 있었다. 지지지 소리가 났다. 앞 이마에 흐트러져 내렸던 철호의 머리카락이 등잔불에 타며 또르르 말려 올랐다. 철호는 얼굴을 들었다. 한 모금 빨자 벌써 손끝이 따갑게 되어 꽁초가 되어버린 담배를 입에서 떼었다. 천천히 연기를 내뿜는 철호의 미간에는 세로 석 줄의 깊은 주름이 패어졌다. 영호는 들었던 담배갑을 도루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조용히 등잔불로 시선을 떨구었다. 그의 입가에서 야릇한 웃음이 - 애달픈 아니 그 누군가를 비웃는 듯한, 그런 미소가 천천히 흘러지나갔다.
"그렇게나 살자면 이 형도 벌써 잘 살 수 있었다." 철호의 목소리는 떨고 있었다.
"그렇게라니요?"
"양심을 버리고 윤리와 관습을 무시하고 법률까지도 범하고!" 흥분한 철호의 큰 목소리에 영호는 지금까지 철호의 얼굴에 주었던 시선을 앞으로 쭉 뻗치고 앉은 자기의 발끝으로 떨구었다.
"저도 형님을 존경하고 있어요. 고생하시는 형님을. 용케 이 고생을 참고 견디는 형님을. 그렇지만 형님은 약한 사람이야요. 용기가 없는 거지요. 너무 양심이 강해요. 아니 어쩌면 사람이 약하면 약함 만치, 그만치 반대로 양심이란 가시는 여물고 굳어지는 것인지도 모르죠."
"양심이란 가시?"
"네 가시지요, 양심이란 손 끝의 가십니다. 빼어 버리면 아무렇지도 않은데 공연히 그냥 두고 건드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 거야요, 윤리요? 윤리, 그건 나이롱 뺀쓰 같은 것이지요, 입으나 마나 속살이 비쳐 보이기는 매한가지죠. 관습이요? 그건 소녀의 머리 위에 달린 리봉이라고나 할까요? 있으면 예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없대서 뭐 별 일도 없어요. 법률?그건 마치 허수아비 같은 것입니다. 허수아비. 덜 굳은 바가지에다 되는 대로 눈과 코를, 그리고 수염만 크게 그린 허수아비. 누더기를 걸치고 팔을 쩍 벌리고 서 있는 허수아비. 참새들을 향해서는 그것이 제법 공갈이 되지요. 그러나 까마귀쯤만 돼도 벌써 무서워하지 않아요. 아니 무서워하기는커녕 그 놈의 상투 끝에 턱 올라앉아서 썩은 흙을 쑤시던 더러운 주둥이를 쓱쓱 문질러도 별일 없거든요, 흥."
"형님 자신만 해도 그렇죠. 밤낮 쑤시는 충치 하나 처치 못하시고, 이가 쑤시면 치과에 가서 치료를 하거나 빼 버리거나 해야 할 거 아니야요? 그런데 형님은 그것을 참고 있어요. 낯을 잔뜩 찌푸리고 참는단 말입니다. 물론 치료비가 없으니까 그러는 수밖에 없겠지요. 그겁니다. 바로 그겁니다. 그 돈을 어떻게든가 구해야죠. 이가 쑤시는데 그럼 어떻게 해요? 그걸, 형님처럼 마치 이 쑤시는 것을 참고 견디는 그것이 돈을-치료비를-버는 것이기나 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 안 쓰는 것은 혹 버는 셈이 된다고 할 수도 있을 거야요. 그렇지만 꼭 써야 할 데 못 스는 것이 버는 셈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아요? 세상에는 이런 계층의 사람들이 있다고 봅니다.즉 돈을 모으기 위해서만으로 필요 이상의 돈을 버는 사람과, 필요하니까 그 필요한 만큼의 돈을 버는 사람과, 또 하나는 이건 꼭 필요한 돈도 채 못 벌고서 그 대신 생활을 졸이는 사람들, 신발에다 발을 맞추는 격으로,형님은 아마 맨 끝의 층에 속하겠지요. 필요한 돈도 미쳐 벌지 못하는 사람, 깨끗이 살자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시겠지요. 그래요, 그것은 깨끗하기는 할지 모르죠. 그렇지만 그저 그것뿐이죠. 언제까지나 충치가 쏘아 부은 볼을 싸쥐고 울상일 수밖에 없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아니야 S병원으로 가."
철호는 갑자기 아내의 죽음을 생각했던 것이다. 운전수는 다시 홱 핸들을 이쪽으로 틀었다. 운전수 옆에 앉았던 조수 애가 한번 철호를 돌아보았다. 철호는 뒷자리 한 구석에 가서 몸을 틀어박은 채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때에 또 뒤에서 소리를 질렀다.
"아니야 X경찰서로 가."
눈을 감고 있는 철호는 생각하는 것이었다. 아내는 이미 죽었는데 하고 이번에는 다행히 차의 방향을 바꿀 필요가 없었다. 그냥 달렸다.
"X경찰서입니다. 손님."
조수 애가 뒤로 몸을 틀어 돌리며 말했다.
"가자."
철호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어디로 갑니까?"
"글쎄, 가."
"하, 참 딱한 아저씨네."
"……"
"취했나?" 운전수가 조수 애를 쳐다보았다.
"그런가 봐요."
"어쩌다 오발탄 같은 손님이 걸렸어. 자기 갈 곳도 모르게."
운전수는 기어를 넣으며 중얼거렸다. 철호는 "까무룩히 잠이 들어가는 것 같은 속에서 운전수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멀리 듣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혼자 생각하는 것이었다. -아들 구실, 남편 구실, 애비 구실, 형 구실, 오빠 구실, 또 계리사 사무실 서기 구실, 해야 할 구실이 너무 많구나. 너무 많구나. 그래, 난 네 말대로 아마도 조물주의 오발탄인지도 모른다. 정말 갈 곳도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 나는 어디건 가긴 가야 한다.
차가 네거리에 다다랐다. 앞에 교통 신호에 발간 불이 켜졌다. 차가 섰다. 또 한 번 조수 애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디로 가시죠?"
그러나 머리를 푹 앞으로 수그린 철호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따르릉 벨이 울렸다. 긴 자동차의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철호가 탄 차도 목적지를 모르는 대로 행렬에 끼어서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철호의 입에서 흘러내린 선지피가 흥건히 그의 와이셔쓰 가슴을 적시고 있는 것은 아무도 모르는 채 교통 신호대의 파란 불 밑으로 차는 네거리를 지나갔다.
-끝-
이범선(李範宣)
: 평안남도 신안주(新安州) 출생. 평양에서 은행원으로 근무하다가 광복 후 월남하여 1952년 동국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대광(大光)·숙명(淑明)·휘문(徽文) 등 중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고 1960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전임강사, 1977년 교수가 되었다. 그동안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소설가협회 부대표위원에 선임되었고 한국문인협희 부이사장에 선출되었다.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하고, 작품으로 창작집 《학마을 사람들》 《오발탄》 《피해자》 《분수령》 등이 있다.
[요점정리]
갈래 : 단편소설 배경 : 6.25 직후 해방촌 일대 시점 : 3인칭 관찰자 시점 의의 : ① 전후(戰後) 한국 사회의 암담한 현실 고발 ② 전쟁으로 인해 파멸해 가는 인간상과 내면의 허무를 표출. 주제 : 전후(戰後)의 비참한 사회 속에서 정신적 지주를 잃은 불행한 인간의 비극. (부조리한 사회 구 조 속에서 패배하는 양심적 인간의 비애)
구성 : 발단 - 철호의 무기력한 일상 생활. 혼란과 무질서가 횡행하는 해방촌 일대의 주변 환경. 전개 - 철호 일가의 비참한 삶의 모습. 위기 - 영호의 권총 강도 행각과 아내의 죽음. 절정 - 가족의 비극적 삶으로 인한 극도의 방황. 결말 - 방향 감각을 잃은 철호. 피를 흘린다.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철호' 일가의 삶을 통해서 전후의 비참하고 혼란된 상황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 '철호'는 정상적으로 건강하게 살아가고자 하지만, 세상은 그가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놓아 두지 않는다. 전쟁 통에 어머니는 정신 이상자가 되고, 제대를 하고도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던 동생 '영호'는 권총 강도 행각을 벌이며, 음악도였던 아내는 가난한 삶에 찌들어 죽어 간다. 여동생 '명숙' 역시 양공주가 되어 버린다. 이러한 가족의 비극적인 삶은 결국 '철호'의 정신을 혼란으로 몰아넣으며 방향 감각을 잃은 '오발탄'과 같은 존재로 만들고 만다. 이렇게 일가의 비극을 통해서 전후(戰後) 상황의 부적응성과 혼란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 이 작품의 일차적인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참뜻은 전후(戰後)의 비참하고 불행한 면을 제시했다는 점보다는, 그처럼 비참하고 불행한 상황 속에서 인간의 양심은 어떻게 지켜질 수 있는가를 모색했다는 점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철호'는 월남(越南) 후에 옛날의 행복을 잃고 혼란스럽게 되어 버린 가족의 가장(家長)이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볼 때 그는 계리사 사무실 서기로서 남편 구실, 자식 구실, 가장의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무능력자이다.
그가 그러한 무능력자가 된 이유는 무엇인가? 작가는 '영호'의 입을 빌려 그것을 '철호'의 양심 때문이라고 본다. '손끝의 가시'에 불과한 양심만 빼어 버리면 남들처럼 잘 살 수 있는데도 '철호'는 '전차 값도 안 되는 월급'을 위하여 몇 십 리를 걸어 다닌다. 밤낮 쑤시는 충치를 뽑을 돈이 없어서 참고 견디면서도, 시장한 창자를 보리차로 달래곤 하면서도 '손끝의 가시'를 뽑지 못한다. 이미 양심도 도덕도 사라진 지 오래인 현실 상황과 타협하지 못하는 것이다.
작가는, 현실과 화해하지 못하고 양심이라는 '가시'를 빼어 버리지 못한 채 가족들의 비극적인 삶을 바라보게 되는 송철호를 통해서, 전후(戰後) 현실에서 양심을 가진 인간의 나아갈 바를 묻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소설 속에 그 해답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다만,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 송철호의 모습이 결말에 자리잡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