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물화, 사과
정해송
식탁 위 흰 접시에 사과 한 알 붉게 타고
저만치 파란 날 선 과도果刀가 놓인 것을
창에 든 가을 햇살이 극사실로 그려준다
사과와 칼날 빛이 긴장하는 거리 사이
내 안에 또 내가 있어 이 국면을 응시할 제
자장이 서린 시간 딛고 과도를 집어 든다
존재를 싸고 있는 껍질을 깎아들면
사각사각 과육 말은 씨앗으로 돌아가고
극사실 해체가 되고 추상으로 뜨는 사원
모니터에 관한 발화
오랫동안 글을 쓰고 컴퓨터를 끄고 나면
눈앞에 내가 끼고 초점이 흐릿해져
전원을 끈 뒤 검정 화면에 내 시선을 모은다
온갖 색을 빚어내던 모니터는 칠흑이다
그 어둠 깊이 들면 무한으로 이어지는
마음도 쉼을 얻으면 눈동자가 맑아온다
어둠을 갈라내어 빛을 여는 손길 따라
빛은 다시 어둠으로 보색대비 되는 존재
물고 문 명암의 양극을 너는 품에 안고 있다
오드리 헵번은 살아있다
손녀가 휴대전화 배경화면 보여준다
물결치는 긴 치마에 잘록한 허리곡선
상아의 목을 지나서 맑은 눈에 고인 미소
초등학교 4학년이 소유한 작은 정원
흑백으로 뜬 영상은 청순한 계절이고
스카프 맨 흰 셔츠가 바람 따라 숨을 쉰다
이 스타가 출연한 영화제목, 뭔지 아니?
내 요정이 '로마의 휴일' 추억 같은 답을 하자
명랑한 소녀 감성 곁에 상큼하게 나선 헵번
가을 교실
- 시간 여행 1
을숙도가 보이는 국어시간 교실에는
방과 후 수업으로 예상 문제 가려내어
입시에 맞춘 답안 따라 해체되는 시 한 편
살은 죄다 발라내고 뼈만 그린 칠판에는
오수에 바랜 생선마냥 생기 잃은 표정들이
이 가을 지침서 행간을 강물처럼 흘러간다
머리칼 푼 바람이 갈대밭을 지나갈 때
은빛 시간들이 손 흔드는 원경 한 폭
석양이 창에 물들자 시가 숨을 찾아 쉰다
초량동, 시절
- 시간 여행 4
중앙극장 뒷길 따라 명절 같은 장을 보면
골목 안 우물가에 대추나무 서 있는 집
내 친구 눈 맑은 누이가 그린 듯이 살고 있지
별이 필 녘 돌아올 때 건네주던 봉지 안에
잘 영근 대추알은 뺨이 달은 너랑 닮아
봉긋한 수줍음 안고 달빛 속을 걸어온 길
입영통지 날아온 날 우리 셋은 극장에서
무기여 잘 있거라*, 그 시간에 젖었다가
손으로 햇살 가리고 가을 속을 걸어간 너...
초로初老에 든 옛 친구와 대추차를 하던 여일
누이는 전방부대 아들 면회 갔다 와선
비로소 그 가을을 딛고, 무기는 잘 있더라네
* 무기여 잘 있거라 : 1957년 제작된 미국 영화.
(록 허드슨, 제니퍼 존스 출연/헤밍웨이 원작)
고향이발관
- 시간 여행 11
반세기가 흐른 지금 그 이발관 보고 싶다
주인이 어린 시절 아버지가 피난 올 때
말아온 고향산천을 배접해서 걸어둔 곳
정자 좋은 산 그리메 흘러가는 냇가에서
여인네들 하늘 물로 빨래하는 유정세월
방망이 울림소리는 우리 맘에 그려놨지
지형 변한 중심가를 그날의 시간대時間帶로
향수에 바랜 그림 기억 찾아 가는 봄날
대 물린 '고향이발관' 빌딩숲에 창을 냈다
도시문명 그늘 속에 등을 든 산수화는
빨랫돌 맑은 운에 정자가 시를 짓고
겨우내 묵은 때 빨아 환한 봄을 널고 있다
홍제동 시편
- 시간 여행 14
민들레 꽃씨처럼 바람 따라 떠도시며
뿌리를 못 내리신 그 만년이 마음 아파
옷깃을 여미고 앉아 한 생각에 젖습니다
시인은 모름지기 오늘 속에 승부 걸고
풀잎에 이슬 같은 아침 율을 닦아야지,
당신의 얼음 시법이 푸른 칼로 스밉니다
겨울바람 살을 에도 결기서린 70년대
봄을 피울 불씨들이 한데 모여 펜촉 갈아
한 시대 시조정신을 곧은 뼈로 깎던 그날!
오리지날* 해법
강술 같은 깡이 서린 거친 말이 대내릴 때
먹구름 낀 하늘 아래 파란 눈을 치켜뜨고
날이 선 격문을 닦아 이 난세의 살煞을 풀자
비손으로 기氣를 받아 피갈이한 혼이 되어
묵혀둔 금기어도 주술 속에 한껏 빚어
외통수 막힌 시절 귀를 신대 들고 뚫어야 해
집오리도 신들리면 날 수 있단 신탁 품고
우리 모두 추락하는 날개 접은 세월 속을
이 시대 작두날 딛고 춤을 추다 얼쑤, 날자!
* '오리도 지랄하면 날 수 있다.' 는 희언의 압축어.
가을, 난제難題
꽃을 가만 두고 보며 향기를 읽어내듯
집착을 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기까진
얼마나 영혼을 맑혀야 그런 마음 경계 들까
오늘도 생각 하나 산마루에 안고 서면
수평선 돛배 가듯 멀어가는 세월 곁에
흰 낮달 가녀린 미소가 손톱 밑에 아리누나
순례 길을 걸어가며 영성을 닦는 그대
도라지 꽃빛 같은 청초한 삶이지만
뒤태엔 보랏빛 슬픔이 묻어가는 이 가을
낮술, 봄날
젊은 날 구신이란 별호 붙은 내 단짝이
팔도 소식 싣고 와서 물금역에 부려놓고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는 어서 오라한다
벚나무집 주막 뜨락 평상 위에 정을 펴니
술잔엔 멀건 낮달 옛 술맛이 돌아오고
흰 터럭 귀밑머리가 벚꽃 아래 따가워라
낙화유수 흐르는 봄은 이 강산을 붓질해도
시절 공기 수상하고 역진하는 바퀴들을
보고도 말 삼켰더니 두드러기 피더라고...
초록을 지운 벌에 신도시를 그린 원경
한산한 상가 길로 봄바람이 배회할 즘
세월도 낮술에 취해 '희망가'를 부른다
ㅡㅡㅡㅡㅡ약력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945년 경남 고성 출생
<동아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76년 <동아일보>신춘문예 입상
*1978년 <현대시학>추천
*1989년 제6회 성파시조문학상 수상
*1989년 <부산시조>편집 주간 역임(~96년)
*1993년 제3회 한국시조 작품상 수상
*1998년 부산문인협회 부회장
*현재 / *부산가야고등학교 교장 역임
*부산시조시인협회장
*시조집/겨울 달빛 속에는/제철 공장에 핀 장미는
*평론집/우리시의 현주소
- 정해송 시조집 『보수동 책방골목』 (2021. 세종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