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생님의 사진이 게재된 관계로 사진을 삭제하고 다시 올립니다.)
사제불이의 공전보(共戰譜)
소설 《신·인간혁명》과 함께 걷는다
제32회 이바라키(茨城)·도치기(栃木)
신시대에 떠오르는 태양으로 빛나는 이바라키.
세계광포 확대의 영예로운 원류인 도치기.
삼대(三代) 회장이 몇번이고 발걸음을 옮겨
개척혼을 새긴 기타칸토(北關東) 천지에서
동지들은 지금 거듭 분투하고 있다.
오로지 사제의 길을 달려가는 ‘상승의 이바라키’여!
정의의 대화에 나서는 ‘공세의 도치기’여!
승리의 결정타를 단호히 부탁한다!
히타치 지방 이바라키는
영원히 태양이 떠오르는 고장이다
미래를 창조하는 새로운 본보기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선생님은 ‘수필 신·인간혁명’에 이바라키라는 천지가 갖는 깊은 의의를 이렇게 썼다.
"히타치 지방 이바라키는 고대인이 불로장생(不老長生)의 ‘이상향’으로 동경하던 꿈의 고장이기도 하다. 대성인이 입멸하시기 전 마지막으로 ‘히타치 온천’ 여행을 하셨듯이 태양의 불법(佛法)과 연이 있는, 영원히 태양이 떠오르는 '히타치(日立)'라는 불가사의한 지방이다! 그리고 진실한 대백법(大白法)의 대도(大道)로 가는 직도라고 할 수 있는 ‘히타치(直通)’ 지방이다.”
아침 해가 찬란히 빛나는 이바라키를 스승은 '미래를 창조하는 새로운 본보기가 될 현(縣)’이라고 통찰하고, 동지를 끝까지 격려했다. 이바라키의 벗 또한 스승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지역에 신뢰의 유대를 넓히고 실증의 깃발을 세웠다.
소설 《신·인간혁명》에 그려진 이바라키 원점의 날들을 되돌아보고 그 사명에 빛을 비추고자 한다.
미토지부 결성대회
제2권 민중의 깃발에는 미토지부 결성대회에 관해 언급되어 있다.
1960년 11월 26일, 이바라키현립체육관에서 미토지부 결성대회가 열렸다. 참석자 약 8천명이 야마모토 신이치(山本伸一)와 함께 출발해 행복해지겠다는 결의로 가득했다.
결성대회가 끝난 뒤 신이치가 대기실로 돌아오자 한 부인부원이 찾아왔다. 가족과 함께 브라질 상파울루로 이주하는 멤버였다.
신이치는 10월에 브라질을 처음 방문해 현지의 벗들과 나눈 대화를 통해 그곳의 벗들이 얼마나 냉엄한 곳에서 사는지 실감했다. 그러므로 형식적으로 하는 격려가 아니라 일부러 강한 어조로 말했다.
“브라질에서 실제로 생활하기 시작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고생을 해야 할 것입니다. 낙원 같은 생활을 꿈꾼다면 실패하고 맙니다. 어디를 가도 치열한 생존 경쟁의 사회이며, 모두 자기 살기에도 벅찹니다. 누구도 응원 같은 것은 해주지 않습니다. 같은 일본인이니까 주위에서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오히려 속이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나는 진실을 말해 두는 것입니다.”
신이치의 말에 같이 있던 간부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상냥한 격려의 말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이치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결국 마지막으로 의지할 데라고는 자기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그런 자신의 힘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어본존에게 의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로 어본존을 부등켜안고 끝까지 신심을 관철해 가는 것입니다. 나의 환송 인사는 이것입니다."
긴장된 표정 속에서도 그 부인부의 눈에는 결의가 빛나고 있었다.
신이치는 호주머니에 꽂고 있던 만년필을 꺼내 부인에게 내밀며 “인생 승리의 '황금의 일기'를 적어 주십시오.” 하고 격려했다.
이바라키에서 해외로 여행을 떠나는 벗은 혼신의 힘을 다한 신이치의 격려로 새롭게 결의했다.
사제라는
신뢰의 연대로 맺어진 세계는 강하다
생명을 연마하는 지도
제3권 ‘불법서환’에서도 신이치는 미토의 여자부 리더를 힘차게 격려했다. 회장에 취임하고 첫 정월을 맞은 1961년, 신이치는 새로운 창가(割價)의 시대를 열기 위해 연초부터 청년들과 이야기할 기회를 자주 마련해 생명을 깎는 심정으로 육성에 임했다.
어느 간담회 때, 미토의 여자부 리더가 “제가 지부의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합니다.” 하고 고민스런 얼굴로 신이치에게 말했다. 그 리더는 오른발이 불편했다.
신이치는 그 여자부 리더의 마음을 가슴이 미어질 만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단순한 감상(感傷)이나 동정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어떤 일에도 지지 않는 강인함을 길렀으면 하는 바람에서 일부러 나는 겁쟁이는 싫다.”고 엄하게 말했다.
신이치는 간담회가 끝난 뒤에도 여자부 리더의 일을 계속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한 지도의 의미를 이해하고 반드시 새로운 도전을 개시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의 엄함은 신뢰가 뒷받침되어 있었던 것이다.
회장을 불법과 인생의 스승으로 따르며 모여들었다. 그러므로 신이치는 청년들의 생명을 연마하여 무너지지 않는 행복경애로 이끌기 위해 때로는 엄하게 지도했다. 그것은 일념을 응축하여 상대방을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말한 엄애(嚴愛)의 지도였다. 말이 엄하면 엄할수록 그의 마음은 눈물로 가득했다.
청년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무리 꾸중을 들어도 그의 지도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매달리며 신이치에게 부딪쳐 갔다. 그것은 사제(師弟)라는 신뢰의 연대로 맺어진 세계의 강함이기도 하다.”(제3권 ‘불법서환’)
인생의 투쟁도 광포 활동도 강한 결의의 일념으로 결정된다.
결의의 일념
신이치는 이바라키를 담당해 온 간부에게 말했다.
“그녀는 결코 겁쟁이가 아니다. 정말로 잘하고 있다. 일보(一步)만 더 자신의 벽을 부수면 행복의 대도(大道)가 열린다. 지금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겠지만 곧 새로운 마음으로 현지에 돌아가 반드시 열심히 할 것이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숙명과 싸우며 노고를 거듭하고 있다. 그런 만큼 사람들의 괴로움을 잘 아는 훌륭한 리더가 될 것이다. 소중한 보배이다. 자네도 잘 격려해 주기 바란다.”
신이치의 말을 듣고 그 간부는 여자부 멤버에게 찾아가 격려하며 신이치가 한 말을 전해주었다. 그녀는 환희와 서원을 가슴에 품고 결연히 일어섰다.
“인생의 투쟁도 광포활동도 모든 것은 강한 결의의 일념으로 결정된다. 패배의 원인도 장해나 냉엄한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의 일념의 후퇴와 좌절에 있다.”(제3권 불법서환’)
이바라키현 스포츠축제
6·17 '이바라키의 날'의 연원은 제17권 ‘푸른 들판'에 소개되어 있다.
1973년 6월 17일, 신이치는 '이바라키현 스포츠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미토시의 현립스포츠센터를 방문했다. 여기에서는 약 6000명의 회원과 기념촬영도 예정되어 있었다.
‘푸른 들판’에는 이바라키의 벗에게 거는 기대가 씌어 있다.
"이 무렵 이바라키현은 크게 변하고 있었다. 도쿄에 가까운 현 남부의 도리데 등은 신흥 주택지로 개발이 진행되고 있어, 도쿄로 다니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났다. 또 쓰쿠바지구에는 국가의 시험연구기관이나 대학 등을 모아 놓은 쓰쿠바연구학원도시 건설이 진행돼 머지않아 쓰쿠바대학교도 개교할 예정이었다.
그것들은 현의 새로운 발전을 가져오는 반면, 종래의 지역적 연대가 분단돼 신구(新舊) 주민 사이에 마음의 틈을 만들지도 모른다고 신이치는 우려하고 있었다. 우리 지역에 인간공화 도시를 쌓아 올리는 일이 바로 불법자의 책무다. 신이치는 이바라키 회원이 그 사명을 자각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네가지 지침
신이치는 기념촬영을 할 때 이바라키의 새로운 전진을 위해 네가지 지침을 제시했다. 먼저 그는 ‘구도(求道)의 이바라키’를 제시했다. 이바라키 현민의 기질은 정의감이 강한 반면 고집이 세다고 지적받아 왔다. “어디까지나 겸허하게 한결같이 불법을 구도해야 자신도 성장할 수 있으며 광선유포도 크게 발전할 수 있다.”
둘째는 '단결의 이바라키'를 들었다. “우리의 단결은 광선유포라는 사람들의 행복과 향토의 번영을 바라는 마음의 결합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마음을 열고 주위 사람들을 존중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 정신이 지역에 퍼져야 미래를 만드는 새로운 인간 공동체를 건설할 수도 있다.”
셋째는 '행동의 이바라키'다. “행동은 벽을 부수고 자신의 경애를 여는 힘이다. 행동하는 사람에게 체념은 없다. 앞이 막힌 듯이 보여도 행동하는 속에서 항상 새로운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넷째는 '인재 육성의 이바라키'다. “사람을 키우는 속에 비로소 자신의 성장도 있는 법이다. 후배를 키우기 위해 선배는 솔선수범의 행동으로 촉발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신이치가 제시한 이 지침은 이바라키의 새로운 장과 마디를 여는 힘의 원천이 됐다.
미야데라 레이코 씨(제1 이바라키총현 여성부 주사)는 “이 네가지 지침에 이바라키의 사명이 그리고 이케다 선생님의 마음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
기념촬영 중간에 선생님은 대학회와 미래회, 여자부 벗을 격려했다. 스포츠축제에서도 선생님은 탁구대회에 출전했다. 그 모습은 일관되게 ‘진지함’ 그 자체였다.
이튿날 18일, 선생님은 미토회관(당시)에서 대표 멤버들과 간담했다. 한사람 한사람의 상황을 차분히 듣고 세심하게 지도와 격려를 거듭했다. 미야데라 씨는 “따뜻한 말도 엄한 지도도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이바라키에 거는 기대를 모두가 절실히 느꼈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말했다.
보내주신 네가지 지침을 비롯해 스승의 전혼을 담은 이바라키 지도는 이바라키가 영원히 발전하는 원점이 되었다.
자신의 지역을 상적광토로 바꾸는
진정한 사자가 되라
야외연수에서 간담
제24권 '등대'에는 1977년 2월, 창가문화회관 내에 있는 광선회관에서 개최된 제1회 농촌 단지부 근행회에서 신이치가 이바라키 벗과 쌓은 추억을 말한다. 그것은 신이치가 회장에 취임한 해인 1960년 7월, 지바현의 조시에서 ‘수호회(水許會)’의 야외연수를 열었을 때 달려간 지바와 이바라키의 동지들과 간담을 나눈 일이었다.
간담을 나누던 중에 어느 멤버가 어획량이 줄어들어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신이치는 이렇게 말했다. “불법(佛法)은 여러분 모두의 일념으로 국토세간(國士世間)마저 바꿀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근본은 제목입니다.”
근행회에서 신이치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나는, 17년 전에 조시의 땅으로 모여 온 지바와 이바라키 여러분의 일을 떠올릴 때마다 '지바와 이바라키의 동지가 자신의 지역을 상적광토(常寂光土)로 바꾸는 진정한 사자(師子)가 되었으면' 하고 기원하고 있습니다.”
'개가의 인생'
제29권 상락'에는 이바라키의 노래 개가의 인생'에 담긴 진심이 씌어 있다. 1978년 10월 21일, 도쿄 이타바시문화회관에서 열린 본부간부회에서 신이치가 작사한 '개가의 인생'의 가사가 발표됐다.
1. 오 찬바람에/ 매화 향기롭고
그대도 내 벗/ 견디고 이겨내라
자 노래하리/ 이바라키의
개가의 인생/ 만들자
개가의 인생/ 빛나노라
2. 붉은 태양/ 내 가슴에
고락의 여행에/ 제천 춤춰라
아 상락(常樂)에, 언덕길 있어도
어깨동무하고 나아가는/ 벗의 행렬
어깨동무하고 나아가는/ 행복의 행렬
3. 그대여 괴로워도/ 언젠가는
광선유포의/ 금빛 바람
환희의 개가/ 승리의 함성을
하늘 높이/ 외치자
아 이바라키/ 용자(勇者) 있노라
가사에는 ‘모든 것에 승리하는 이바라키가 되라!’는 신이치의 강한 기대가 담겨 있었다.
대부분의 현이 현청소재지 등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는 반면, 이바라키현은 다극화되어 있고 인구도 분산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현의 중앙부인 미토시(市)에는 현청이 있고, 현 북부의 히타치시를 비롯한 태평양 연안은 공업이 발달했으며 남동부에는 가시마항을 중심으로 임해공업지대가 펼쳐져 있다. 또 남부에 조성된 쓰쿠바연구학원도시에서는 최첨단 과학연구가 진행되고 있고, 쓰치우라 일대는 수도권 확대와 더불어 도쿄의 베드타운이 되었다.
그리고 현 서부를 비롯해 현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농업도 활발했다. 게다가 가스미가우라호(湖) 등 호수와 습지가 많고, 후쿠로다폭포나 수변도시 등의 관광자원도 풍부했다.
신이치는 다양성이 풍부한 이바라키현을 미래를 창조하는 새로운 모범이 될 곳이라고 통찰했다.
‘상락’에는 이러한 특징을 바탕으로 신이치의 기대가 씌어 있다.
“새로운 전진을 위해서는 각자가 자신의 틀을 깨고 경애혁명을 해야 한다. 마음을 크게 열어 사람들을 유연하게 포용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지지 않는 끈기와 인내력을 길러야 한다. 자신의 ‘아(我)’를 고집할수록 자신과 사람들 사이에 골은 깊어지고 세계는 좁아진다. 진취적 기상에 불타 모두 함께 넓은 마음으로 단결해야 비로소 지역이 번영하고 광선유포가 넓혀진다.
넓은 마음도 인내가 뒷받침되어야 가능하다. 인내는 모든 승리의 길로 이어진다. 신이치는 이바라키가 참고 이겨내는 정신을 생명에 새겨 크게 비약하기를 바랐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동지와 만나
새로운 세기를 향해 출발하고 싶다
혹한의 이바라키지도
‘개가의 인생’은 이바라키 벗에게 한없는 용기와 희망을 보냈다. 당시 이바라키의 각지에 제1차 종문사건의 폭풍우가 휘몰아쳤다.
1982년 2월 7일부터 12일까지 스승은 이바라키를 방문했다. 혹한의 이바라키지도다. 그 모습은 제30권(하) ‘승리의 함성’에 상세히 씌어 있다.
7일 오후, 미토부인회관을 시찰한 야마모토 신이치는 미토 시내에 있는 이바라키문화회관을 방문해, 낙성을 축하하는 현대표자 모임에 참석했다. '이번 방문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동지와 만나 희망의 목표를 제시하고, 새로운 세기를 향해 출발하고 싶다.'는 심정을 말했다.
이튿날 8일에는 이바라키문화회관 낙성기념 현간부회에 참석해 지도하고, 9일에도 낙성기념 근행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10일에는 히타치시로 발걸음을 옮겨, 히타치회관 낙성 5주년 기념근행회에서 참석자들을 격려했다.
11일에는 이바라키문화회관에서 성대하게 개최된 현청년부총회 참석자 3500명과 함께 회관 정원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당시 현여자부장을 맡은 스기야마 히데코 씨(제1 이바라키총현 부총합여성부장)는 “기념촬영의 원점이 있었기에 한사람 한사람이 어떤 일이 있어도 지지 않고 분발할 수 있었습니다.” 하고 감사의 마음을 말했다.
사실 이 청년부총회에는 이케다 선생님이 참석할 예정은 없었다. 청년들은 스승에게 응석부리는 제자가 아니라 스승의 '분신'으로서 투쟁할 수 있는 제자가 되자고 서원하고 총회에 임했다.
11일, 이바라키의 청년들은 난무(亂舞)했다. 총회는 대성공이었다. 회합 중에 선생님의 전언이 도착했다.
‘기념촬영을 하자.’ - 기쁨의 함성과 박수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모두 정원으로 뛰어 나갔다. 그곳에 선생님이 모습을 나타냈다. 멤버들은 맹세와 결의로 눈동자를 빛내면서 스승과 함께 카메라 렌즈를 응시했다.
이 멤버들로 ‘이바라키 2000년회’(현재 이바라키신세기대성회)를 결성했다. 그 후 선생님의 제안으로 해마다 모여 사진을 찍고 앨범을 만들어 선생님에게 보냈다. 그 구도(求道)의 실천은 38년간 거듭됐다. 그리고 2020년 2월 11일이 '이바라키 청년부의 날'로 제정되었다.
고난의 길을 걸어 온 동지를
평생 잊지 않는다.
참고 견딘 가시마로
1982년 2월 11일, 청년부와 기념촬영을 위해 카메라 앞에 선 신이치는 이날 가시마회관을 처음 방문했다. 가시마회관을 에워싸고 있는 가시마지역본부에는 비열한 종문의 학회 공격이 거센 바람처럼 휘몰아쳤다.
가시마지역본부의 남자부장을 맡고 있던 야마구치 오사무 씨(제2 이바라키총현부총현장)는 이렇게 말했다.
종문 승려들의 비열한 처사를 견뎌온 가시마 동지는 '그대여 괴로워도 언젠가는 광선유포의 금빛 바람'이라는 가사의 개가의 인생을 부르면서 오로지 참고 견뎠습니다. 그러던 중에 이케다 선생님이 현에 오셨습니다. '가시마에 와주셨으면 합니다.' - 이것이 모두의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가시마 방문은 방해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7일부터 시작된 이바라키지도에서 야마구치 씨는 행사요원을 맡았다. 가시마 방문에 대한 언급은 없었지만 선생님은 가시마의 리더들에게 격려를 보냈다. 야마구치 씨는 '민중을/ 지켜라 정의의/ 그대가 지휘'라고 금문자로 씌어진 휘호를 받았다. 11일, 이바라키문화회관에서 청년부와 기념촬영이 끝난 직후 한 청년이 큰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가시마에 와 주십시오!" 선생님은 즉시 대답했다.
"갑니다. 지금 갑니다!"
청년은 눈물을 글썽였다.
가시마회관으로 이동해 대강당에 들어선 선생님은 “가시마는 승리했습니다!” 하고 선언했다. 그리고 만세삼창, 근행에 이어 간담을 하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왔으니, 이제 괜찮습니다. 안심하십시오.” “고난의 길을 걸어온 가시마의 동지를 나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한마디 한마디가 벗의 생명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가시마지역본부를 가시마권(圈)으로, 가시마회관을 가시마문화회관으로 명칭을 변경하자고 제안했다. 또 2월 11일을 '가시마의 날'로 하자고 제안하자 찬동과 기쁨의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날, 선생님은 시를 읊었다.
"당당히/ 마침내 승리한/ 가시마로구나"
시련의 봉우리를 타고넘어
이튿날 12일, 신이치는 이시오카를 경유해 쓰치우라문화회관 개관 3주년을 기념하는 근행회에 참석해, 회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참석자들과도 기념촬영을 했다.
이렇게 해서 5박 6일 동안 혹한의 이바라키지도에서 수많은 만남을 맺었다.
이 유대 하나하나가 사제승리의 영예로운 증거로 지금도 이바라키 천지에 빛나고 있다.
창가의 반전공세에 관한 역사를 써서 남긴 '승리의 함성'은 이 이바라키지도로 끝난다. ‘승리의 함성’ 마지막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동지들은 승리했다. 또 하나의 시련의 봉우리를 타고넘은 것이다. 희망의 드넓은 하늘로 상쾌한 개가가 울려 퍼졌다.”
신세기를 향한 광포의 길은
도치기에서 시작됐다.
지방절복
도치기는 전쟁이 끝나고 도다 선생님이 첫 지방절복을 떠난 천지다. 1946년 9월, 도다 선생님은 동지 6명과 함께 도치기현 나스군 료고무라(당시)를 방문했다. 그곳에서는 현지의 회원을 격려하고 그들이 준비한 강연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좌담회에도 참석해 인생의 목적을 알기 쉽게 말했다.
“신세기를 향한 광선유포의 길은 도치기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그 도치기의 광명과 평화 원점의 의의는 학회역사와 함께 영원히 새겨질 것이다.” (수필 ‘신·인간혁명’)
5년 후 1951년 5월 3일, 도다 선생님은 제2대 회장에 취임했다. 약 3주 뒤인 27일, 이케다 선생님이 첫 지방절복을 떠난 곳도 또한 도치기였다.
‘수필 신·인간혁명’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출발 전날 밤에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 나의 지방투쟁을 위한 첫 출진이다. 기쁘구나.’ 이것이 도치기 방면이었다. 나도 은사와 똑같이 민중의 대지 도치기에서 새로운 광선유포를 개시했다.”
심상소학교 은사와
1973년 11월 6일, 우쓰노미야시 도치기현체육관에서 제1회 도치기현 간부총회가 열렸다. 이것이 11·6 ‘도치기의 날’의 연원이다.
제18권 ‘사은’에는 이 원점을 소개하면서 신이치가 하네다 제2 심상소학교 5, 6학년 때 담임이던 히야마 고헤이 선생님과 만나는 모습이 씌어 있다.
11월 6일, 6년 7개월 만에 도치기를 방문한 신이치는 오후 6시가 지나 행사장에 도착했다. 로비에 들어서자 초로의 신사와 부인이 서 있었다. 심상소학교 시절의 은사인 히야마 고헤이와 부인이었다. 신이치는 히야마가 도치기현 소학교 교장을 끝으로 정년을 맞았다는 소식을 듣고, 가능하다면 한번 만나 뵙고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고 생각해 도치기현 간부총회에 초대한 것이다.
신이치는 히야마 부부를 정중히 대기실로 안내해 대화를 나눴다. 히야마는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훌륭하게 되시다니. 크게 활약하는 모습을 보니 기쁘고 자랑스럽군요. 선생님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 토인비 박사와도 대담을 하셨더군요."
“예. 인류의 미래를 위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눴습니다. 히야마 선생님께서 저에 대해 그렇게까지 알고 계시다니 감동했습니다.
제자를 언제까지나 늘 생각하며 소중히 대하시는 선생님의 다정함에 감격할 뿐입니다.”
‘히야마 선생님’에 대한 신이치의 추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지만, 절대로 잊지 못할 일이 있었다. 그것은 소학교 6학년 수학여행 때의 일이었다.
- 신이치는 어머니가 애써 마련해 쥐어준 용돈을 첫날에 다 쓰고 말았다. 여행이 기뻐서일까, 동급생에게 선심 좋게 과자 등을 사서 나눠주었다. 히야마는 여관 계단으로 신이치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야마모토, 너의 형들은 전쟁터에 나가 있지. 그러니까 너는 적어도 아버지와 어머니께 선물을 사가야 하는 거야. 조금이라도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려야지.”
그리고 풀이 죽어 있는 신이치를 계단 뒤로 데리고 가서 1엔 짜리 지폐 두장을 손에 살짝 쥐어주었다. 어린이에게는 꽤 큰 돈이었다. 히야마는 제자들을 절대로 차별하지 않고 대하는 교사였다. 그러나 그는 친구에게 과자를 사준 신이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가정형편도 잘 알고 있어 깊이 배려한 것이다.
집에 돌아온 신이치는 그 일을 이야기했다. 어머니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고마운 일이구나. 히야마 선생님의 은혜는 결코 잊어선 안 된다.”
인간으로서 은혜를 잊지 마라. 그것이 어머니의 가르침이었다. 신이치는 히야마 선생님의 그 배려를 잊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자주 근황을 편지로 전하는 등 소식을 주고받았다.
히야마에게는 ‘평화를 위해 진력하는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 교육’이라는 신념이 있었다. 그 심정은 어린이들 마음에도 강하게 전해졌다. 그것은 신이치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간부총회가 시작되기 전, 끝으로 신이치는 히야마에게 말했다.
"히야마 선생님, 오늘은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날의 제가 있는 것도 선생님 덕분입니다. 선생님의 제자로서 긍지를 갖고 사회를 위해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선생님의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광선유포의 위대한 스승에게
보은감사하는 삶을!
스승의 은혜
제18권 ‘사은’에는 ‘사은(師恩)’이 언급되어 있다.
니치렌(日蓮) 대성인은 《보은초》에서 인간으로서 은혜에 보답하는 것의 중요성을 말씀하시며 “하물며 불교를 배우는 자가 어찌 부모 사장(師匠)·국은(國恩)을 잊을쏘냐.”(어서 293쪽)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말씀하신 사은은 대성인이 열두살 때 아와(지바현 남부)에 있는 세이초사(寺)로 들어가 수학하셨을 시기의 스승인 도젠보에 대한 은혜다.
도젠보는 염불자인 지두(地頭) 도조 가게노부의 박해가 두려워 염불을 떠나지 못했다. 그래도 대성인은 불법을 가르쳐준 스승이기에 그 은혜에 보답하신 것이다.
하물며 정법정의를 위해 순교하신 마키구치(牧口)선생님 그리고 일본 광선유포의 기반을 구축하신 나의 은사 도다(戶田) 선생님의 은혜는 그 얼마나 깊고 또 깊은가.
신이치는 생각했다. '도다 선생님은 내게 구원(久遠)의 사명을 가르치셨고 심혈을 기울여 불법의 지도자로 키워주셨다. 선생님 없이는 지금의 자신도, 창가학회도 그리고 지금의 광선유포 확대도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나는 한평생 광선유포의 위대한 스승에게 보은 감사하는 삶을 살겠다!"
도치기현 간부총회
야마모토 신이치는 도치기현 간부총회에서 새로이 지역사회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인간정신의 총체적 개발이 급선무이며 여기에 불법자의 사명이 있음을 역설했다.
신이치는 간부총회가 끝난 뒤에 또다시 마이크를 들고 말했다.
“오늘은 제 소학교 시절의 소중한 은사이신 히야마 선생님 내외분께서 오셨습니다. 선생님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며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이 자리에서 만세삼창을 하겠습니다.”
큰 박수가 일고 다같이 만세를 외쳤다. 히야마는 눈물을 글썽이며 가만히 바라보았다.
“신이치는 광선유포의 스승인 도다 조세이도 또한 미소 지으며 자신이 어떻게 분투하는지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고 느꼈다.”(제18권 ‘사은’)
히라야마 에이코 씨(총도치기 여성부총주사)는 “히야마 선생님에 대한 이케다 선생님의 깊은 마음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스승에게 보은하고자 정성을 다하시는 이케다 선생님의 모습에서 인간의 도리를 배웠습니다.” 하고 말했다.
이날 선생님은 스피치 첫머리에 먼저 실시되는 교학시험에 마음껏 분발하기 바라는 염원을 말하고 교학의 의의에 대해 언급했다. 불법은 실천을 바탕으로 한 이해가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어의구전>의 한 구절을 배독했다.
"문구의 일에 가로되, 여시(如是)란 소문(所聞)의 법체를 들고, 아문(我聞)이란 능지(能持)의 사람이다. (중략) 여시란 신순(信順)의 말이다. 신(信)은 즉 소문의 이(理)를 터득하고 순(順)은 즉 사자(師資)의 도(道)를 성취한다.”(어서 709쪽)
그리고 불법은 어디까지나 색심불이(色心不二)의 실천도라고 강조. 불법의 도리를 믿는다면 머리로 이해할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인생, 활동, 생활에서 자신의 행동 속에 저절로 나타나게 되며 그래야 비로소 사제의 길이 성립된다고 역설했다.
교학의 진수는 '사자(師資)의 도(道)' ‘사제의 길’에 있다. 도치기의 동지는 이 영예로운 대도를 끝까지 걸어 더욱더 비약할 것을 서원했다.
그리고 선생님은 이렇게 스피치했다.
“모든 것은 창제를 중심으로 하여 무슨 일이 있으면 제목이라는 기개로 힘써야 합니다. 이 세상에 무엇도 제목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당시 참석자는 일제히 말했다. “이 지도는 생명에 깊이 와 닿았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제목이라는 말을 버팀목으로 지금까지 달려올 수 있었습니다.”
사제, 교학, 창제라는 신심의 근간을 배운 이날의 원점을 가슴에 품고 도치기는 용기를 갖고 계속 전진하고 있다.
도치기의 한사람 한사람을
개인지도로 연마해 가자
도치기연수원
《신·인간혁명》 제27권 ‘구도’에서는 1978년 5월, 신이치가 나스에 있는 도치기연수원을 방문한다.
신이치는 30일에 현최고협의회에 참석, 이튿날인 31일에도 협의회가 열려 현총회 개최 등이 결정됐다. 당시, 연수원 직원이던 오마메우다 마사카쓰 씨(총도치기 주사)는 스승의 격려투쟁을 떠올리며 말했다.
"이케다 선생님은 최고협의회에서 잇달아 희망찬 제안을 해주셨습니다. 또 머무는 동안에는 그 자리에 있던 동지들과 오랜 시간 간담하거나 행사요원에게 말을 건네며 결코 행동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선생님은 도치기 방문으로 미래를 향한 지침이 될 지도를 거듭했다.
"도치기의 한사람 한사람을 개인지도로 연마해야 한다. 열배로 연마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양도 자연히 늘어난다."
“도치기의 전통을 만들어야 한다. 파동을 만들고 리듬을 만들어야 한다.”
“신심이 순수한 사람은 행복이 오래 지속된다.”
“‘어서(御書)’와 좌담회로 반석 같은 도치기를 부탁합니다."
“간부는 얼굴을 보면 안심이 되고 용기가 솟는다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성장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감사해야 합니다."
“진정한 인재는 제목을 부릅니다. 착실함 속에서 진정한 신심의 힘이 나옵니다.” 또 청년부에게도 힘차게 호소했다.
"노고를 아끼지 말고 실력을 기르자. 실력에 더하여 복운이 있어야 인간으로서 최고의 매력을 발산할 수 있습니다.”
“후배 한사람 한사람을 남동생처럼, 여동생처럼 소중히 해주세요. 한 인간의 전인격을 최대한 존중하는 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신심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매사에 예의 바르고 도리에 맞게 행동하는 인격자가 되기 바랍니다. 그것이 신뢰를 깊게 하는 제일보이기 때문입니다."
청년들은 인생의 지표가 되는 스승의 말씀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또 선생님은 연수원에 있던 현지의 벗을 불러 간담했다. 멤버 20명 정도가 선생님을 둘러쌌다. 한사람 한사람의 상황에 귀를 기울이면서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신심을 해서 이렇게 아름다운 가정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번성한다고는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학회 역직도 마찬가지입니다. 리더는 회원 속으로 뛰어들어갈수록 공덕을 받습니다.”
어느 지부장에게는 “학회활동을 스포츠처럼 즐기면서 하십시오.” 하고 성원을 보냈다.
한 남자부원이 난치병과 싸우고 있다고 보고했다.
“반드시 좋아집니다. 열심히 하세요. 자기 안에 불계가 있다. 그것을 어본존에게 창제하여 용현하면 됩니다. 제목입니다.”
스승의 격려를 받은 그 멤버는 새로운 결의로 맹렬히 기원하기 시작했다.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지만 멋지게 소생해 갱사수명(更賜壽命)의 실증을 보였다.
선생님이 연수원에서 새긴 원점은 많다.
1975년 12월 25일, 낙성기념근행회에서 도치기 인재학교(현재 도치기이케다대학교)의 결성을 발표했다. 1977년 3월에는 좌담회의 비(碑)'를 견학하고 기원했다. 이 방문 때 정원을 둘러본 선생님은 여러 장소에 이름을 붙였다. 스승의 정신은 연수원 곳곳에 빛나고 있다.
도치기 천지에서 나오라!
후계의 사자들이여!
‘서원의 벗’
도치기의 노래 ‘서원의 벗’이 탄생한 역사는 제29권 ‘상락’에 씌어 있다.
1978년 신이치는 각 부와 각 그룹을 비롯해 전국의 방면과 현에 희망을 보내고 싶다는 마음으로 노래를 만들었다. 도치기에서는 11월 3일에 11.6 ‘도치기의 날’을 기념하는 총회가 개최될 예정이었다. 신이치는 몇가지 중요행사가 있어 도저히 참석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도치기의 노래’를 만들어 함께 새롭게 출발하고 싶다고 생각해 작사에 몰두했다.
도치기는 은사 도다 선생님이 전쟁이 끝나고 첫 지방지도를 나선 천지다.
“그 도치기가 지역광포의 선구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신이치의 바람이자 진심 어린 기원이었다. 신이치는 닛코(日光)의 아름다운 자연과 나스의 산들 그리고 산골길을 걷는 은사의 모습을 떠올리며 작사했다.
“그날 도다 선생님은, 도치기 산천에 언젠가 지용보살이 속속 출현하기를 기원하고 바라면서 한발 한발 힘주어 걸으셨으리라. 도치기 동지는 은사의 그 마음과 긍지를 언제까지나 이어받아 많은 인재를 육성했으면 한다. 나오라! 나오라! 후계의 사자(師子)들이여!”
도치기의 노래 서원의 벗은 기념총회 하루 전인 11월 2일 밤에 도치기현 간부에게 전달되었다.
이튿날 3일, 총회 장소인 아시카가시민체육관에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1. 아 고원(高原)의/ 향토에
일어서서 맹세하노라/ 벗과 함께
삼세(三世)의 길은/ 여기 있노라
도치기의 개가에/ 행복의 강
2. 그날 맹세한/ 장엄한
긍지 드높은 역사를/ 만들겠노라며
아 수많은 산하를/ 늠름하게도
도치기의 승리에/ 눈물 있노라
3. 도치기의 벗은/ 두려움 없다
광포의 발걸음도/ 명랑하게
자 나아간다/ 자비의 검
도치기 깃발 아래/ 모여라
그대와 한 맹세/ 잊지 않으리
도치기 동지는 곡명이나 가사에 나오는 ‘맹세’의 의미를 마음속 깊이 음미했다.
“신이치에게는 이번에 현의 노래를 증정한 것 자체가 멤버들과 공전(共戰)하겠다는 맹세를 반드시 이루겠다는 결의의 증명이었다.
또 도치기 동지는 신이치와 함께 도전하겠노라는 각자의 맹세를 떠올리며 가슴속에서 투혼을 불태웠다.”
고난도 시련도 어본존에 대한
절대적인 '신(信)'으로 변독위약할 수 있다.
아시카가회관을 첫 방문
기념총회가 개최된 아시카가에서 당시 지역장 난니치 구니노부 씨(총도치기 주사)는 당시 ‘서원의 벗’을 감개에 잠겨 부른 한 사람이다.
난니치 씨의 ‘맹세의 원점’은 1963년 7월 1일, 도쿄 다이토체육관에서 열린 남자부간부회다. 부대장에 임명된 이날, 이케다 선생님에게 직접 부대기를 받았다.
“그때 선생님은 '열심히 하십시오.' 하고 말을 건네셨습니다. 힘찬 그 목소리는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로부터 15년 후, ‘서원의 벗’을 다같이 합창하면서 다시 한번 ‘사제의 맹세’에 끝까지 살아가자고 마음을 정했습니다.”
기념총회 다음달인 12월, 선생님은 처음으로 아시카가회관(훗날 아시카가문화회관)을 방문했다(26일), 오후 3시가 지나 도착하자마자 앞뜰에서 기념식수를 하고 행사진행요원과 미래부원 그리고 현지 멤버들과 잇따라 기념촬영했다.
축하 떡을 만들 때는 직접 떡메를 손에 들고 “이영차, 이영차” 하는 동지의 목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몇번이나 떡밥을 내리쳤다. 사제의 호흡이 딱 맞아 희고 아름다운 떡이 만들어졌다.
또 도치기미래회 제1기 결성식에서 멤버들을 격려했다. 이어서 아시카가지부 결성 17주년, 아시카가회관 낙성 2주년을 기념하는 근행회에 참석했다.(제29권 ‘역주’)
선생님은 직접 사회를 자처해 즐겁게 회합을 진행했다. 온화한 분위기가 장내에 감돌았다.
지도에서는 “어느 현이든 부러워하는 모범적인 아름다운 도치기가 되기 바란다.”는 바람을 말하고 다시 호소했다.
“인생의 어떤 고난도 시련도 어본존에 대한 절대적인 신에 의해서만 변독위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심만은 더욱더 강성하게 관철하는 신념의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그리고 “어본존 슬하에서는 모두가 평등합니다. 그러므로 신심의 향상을 위해 서로 격려하고 도와야 합니다.” 하고 아름다운 이체동심(異體同心)의 단결을 강조했다. 이어서 선생님은 피아노를 연주했다. 한음 한음이 모인 벗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제1차 종문사건의 폭풍우 속에 선생님은 몸이 가루가 되도록 도치기, 아시카가의 동지들을 격려했다.
동지도 또한 ‘도치기의 벗은 두려움 없다 광포의 발걸음도 명랑하게’ 하고 노래하면서 사제 서원에 끝까지 살았다.
‘공세의 도치기’는 지금 정의와 진실을 확대하는 대화에 도전하며 광포의 스승에게 맹세한 신념의 대도를 당당히 전진하고 있다. - 끝 -
- 법련, 2022년 1월호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