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름은 2달간 이어진 제주 여행의 주 콘텐츠이자 여행에 힘을 실어주는 주 원동력이었다. 모니터에 지도를 띄워놓고 오늘은 어디를 가볼까 하며 고민하는 재미도 있었다. 서귀포 쪽에서 갈 만한 오름 중엔 한창 뜨고 있던 넓고 옴폭한 분화구가 인상적인 금오름이 눈에 들어왔다.한림읍 중산간에 솟은 금오름은 차로 가면 쉽게 닿을 수 있지만, 대중교통으로는 하루에 몇 없는 지선 버스를 이용해야 하기에 미리 시간표를 파악하고 일정 계획을 짜는 것이 필요했다. 어렵게 시간을 맞춰 가야 하는 일정에 금오름만 다녀오기엔 아쉬워 같은 지선 버스 노선으로 다녀올 수 있는 정물오름도 함께 오르기로 했다.
정물오름
동광환승정류장에서 783-1번을 타고 정물오름에서 가까운 이시돌삼거리 정류장에 내렸다. 오름과 가장 가까운 곳은 이시돌하단지 정류장이지만, 783-2번만 정차한다. 두 정류장 간의 거리는 약 600m이고, 이시돌삼거리 정류장에서 오름 입구까지는 약 1.5km 정도이다. 몇 없는 버스 시간에 맞춰 계획을 세우다 보니 걷는 구간이 다소 늘어났다. 하지만 풀을 뜯으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말들의 모습에 그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이 일대에는 성 이시돌 목장이 조성되어 있는데, 1954년에 선교사로 제주에 온 맥그린치 신부가 황무지였던 목장 주변을 개간해 경작하고 새로운 농업 기술을 소개하며 생겨난 목장이다. 목장에서는 신선한 유제품을 구입할 수 있고, 이라크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인 독특한 테쉬폰은 국내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이라 이곳을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도 많다.
대중교통으로 정물오름에 간다면 갓길을 다소 걸어야 한다.
정물오름은 성 이시돌 단지를 살짝 지나친 곳에 자리한다. 표지판을 따라 억새가 핀 좁은 임도를 들어가니 차 몇 대 정도만 세울 수 있는 아담한 주차장이 나온다. 오름을 오르기 전 오름에 얽힌 이야기를 보려 안내판을 확인했지만, 남아 있는 글자가 몇 없을 정도로 다 헤져 있었다. 정물오름이라는 명칭은 오름 앞에 있는 정물샘에서 유래했다. 제주도는 강수량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마실 물이 귀했는데, 특히나 중산간 지역에서 마실 물을 구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워 귀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 마실 물이 나던 곳 중 한 곳이 정물샘이다.
가을에 가면 억새가 핀 풍경을 볼 수 있다.
멀끔한 금오름 안내문에 비해 다 헤진 정물오름 안내판은 안쓰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정물오름은 오르기에 까다롭지는 않았다. 조금 오래된 듯해 보이긴 했지만, 숲길에 나무 계단이 잘 깔려 있어 수월한 등반이 가능했다. 다만 오르는 사람이 거의 없어 호젓한 분위기가 들긴 했다. 정상에 다다르자 주변이 탁 트이며 제주의 전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360도 전체가 보이는 풍경은 살아있는 풍경화 같았다. 정물오름 정상에서 가장 눈에 띈 풍경은 금오름이다. 정상부에 굴곡진 분화구도 눈에 들어왔다. 그 너머엔 드넓게 펼쳐진 바다가 주변의 초원과 대조를 이뤘다. 다소 흐린 날씨였지만 바다는 푸르른 빛을 그대로 머금고 있었다. 크게 기대하지 않고 올랐기 때문일까, 정물오름에서 보는 풍경은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한적한 곳에서 이 멋진 풍경을 나 혼자 보고 있자니 대단한 호사를 누리는 것 같았다. 매섭고 차가운 칼바람만 불지 않았다면 한층 더 여유롭게 경치를 즐겼을 것이다.
정상에 오르면 가까이에 있는 금오름이 또렷하게 보인다.
정물오름 정상에서 보는 풍경은 여느 오름 부럽지 않을 정도이다.
금오름
정물오름에서 남은 여운을 뒤로하고 금오름으로 향했다. 이번엔 이시돌하단지 정류장으로 돌아가서 783-2번 버스를 느긋하게 기다렸다. 목장 안쪽까지 누비고 되돌아온 버스를 타고 금악마을로 이동했다. 금악리 정류장에서 금오름 입구까지는 또 1.5km를 걸어야 했다. 마을 주변이라 그런지 대로에 인도가 있어 정물오름에 갈 때와는 다르게 훨씬 안전하고 편하게 걸을 수 있었다. 인도가 끝나는 지점에 금오름 가는 길이라는 작은 이정표와 갈림길이 나오는데, 이 길로 쭉 가면 금오름에 닿는다. ‘금오름 가는 길’은 인근 펜션의 이름인데, 오름 이정표 역할도 하니 이름 한번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오름의 ‘금’은 신이라는 뜻을 가진 고어인 곰과 상통하는데, 예부터 신성시되어 온 오름 중 하나이다. 금오름은 인기 있는 오름답게 탐방객들로 활기찬 모습이었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도 숲길이 아니라 트럭이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임도이다. 역동적인 맛은 없지만, 등반 환경은 제주 내 모든 오름을 통틀어서 최고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비고도 178m라 10~20분 정도면 정상에 도달할 수 있다.
금오름 정상에 다다르자 분화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깊이가 52m인 분화구는 산정화구호로 과거에는 수량이 풍부했다. 하지만 현재는 비가 올 때만 연못이 형성되고, 평상시에는 물이 말라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분화구 주변으로는 탐방로가 잘 닦여 있어 정상을 한 바퀴 돌며 탐방할 수 있다. 하지만 돌아가는 버스 시간이 점점 임박해 둘레길은 걷지 못하고 올라온 지점 근처에서만 경치를 담았다. 정상에 서니 앞서 올랐던 정물오름도 보였다. 정상에서 보는 풍경은 정물오름이 멋있었지만, 오름의 자태는 금오름이 훨씬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금오름은 사진으로 흔히 보는 것과 같이 연못이 아름다운 풍경은 없었지만, 용눈이오름을 생각나게 할 만큼 아름다운 능선이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매력이 있는 곳이었다.
분화구에 물이 고인 풍경은 비가 온 후에만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