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옥정'의 묘가 있는 서오릉.
사적 제198 호., 서오릉(西五陵)
경릉, 창릉, 익릉, 명릉, 홍릉.,5릉.
1457년(세조 3) 세자 장(추존 : 덕종)이 죽자 경릉에 안장.
1470년(성종 1) 덕종 아우 예종 & 계비 안순왕후 한씨.,창릉.
1681년(숙종 7) 숙종의 비인 인경왕후 김씨를 안장하였던.,익릉.
1721년(경종 1)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민씨, 2계비 인원왕후 김씨.,명릉.
1757년(영조 33) '영조의 비' 정성왕후 서씨의 홍릉이 들어서면서.,서오릉.
그밖에 명종의 큰아들인 순회세자의 순창원이 경내에 있으며,
1970년 숙종의 후궁 희빈장씨 대빈묘가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희빈장씨'가 처음 안장된 곳은.,경기도 양주 인장리.
그곳 '희빈장씨' 대빈묘에 물기가 있다는 상소가 있자
1719년(숙종 45)에 경기도 광주 진해촌으로 천장하였고,
1969년 묘소를 통과하는 도로가 생겨 서오릉으로 이전했다.
서오릉의 5릉은 각각
몇가지 특징들이 있다,
경릉은 몇가지 특징이 눈에 보인다.
일반적으로 왕릉은 왕의 것이 오른쪽에,
왕비의 것이 왼쪽에 조성되지만 이곳은 반대로
왕릉이 왼쪽에, 왕비릉이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다.
추존왕은 일반적인 왕릉과는 다르게
난간석, 망주석, 석수 등 호위가 없다.
반면, 왕비릉은 생전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므로
능 제도에 따라 구색을 갖추었으며, 난간석의 기둥은
창릉의 형식을 따랐으므로 일반적인 왕릉에 비해 특이하다.
창릉도 일반적인 왕릉과 몇 가지 다른 특색이 있다.
상석을 받친 석족은 일반적으로 4개의 양각 귀면인데
창릉은 문고리 모양을 조각했으므로 북과 흡사한 느낌.
또 난간석 기둥머리는 연잎과 연주문이 보편적이지만,
창릉의 큰 석주는 둥근머리 밑에 환상받침을 마련하고
그 무렵에 사각 석주로 변천되어가는 형식을 하고 있기에
그당시에 옛 고려 왕릉의 석주양식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명릉은 조선 능제의 분수령이 되는 릉.
첫째, 석물의 치수를 실물에 가깝게 하였으며
부장품의 수량도 감소한 점이 눈여겨볼만하다.
둘째, 문인석의 미소와 무인석의 늘어진 투구와
이마에 새긴 투구의 파상선 등은 1649년 장릉과 유사.
셋째, 8각의 장명등, 옥개를 4각형으로 제도화했다.
그리고 익릉은 기본적으로 '국조오례의' 제도를 따르고
부분적으로는 임진왜란 이후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는 점.
홍릉은 명릉보다 20일 늦게 조성했기에
상설 제도나 석물 양식은 거의 비슷하다.
가령, 문인석은 용모나 복식 상태 등에 있어서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 분수령 특징을 보여준다.
서오릉의 원찰은 수국사(은평구 갈현동 314 )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 조계사.,말사.
1459년(세조 5) 어린 나이로 죽은 세자
추존 덕종(德宗)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왕 명의로 창건하여 정인사(正因寺)라 하였다.
1457년 8월 세조는 세자가 죽자
이듬해 백성에게 부담을 주지 말고
최소한의 비용으로 검소하게 절을 지어
그 넋을 위로할 것을 명해, 착공 1년 만에 완공.
1471년(성종 2) 봄 인수대비가
이 절을 창건할 때 급히 지었기에
재목 쓰임새가 정밀하지 못함을 지적하고,
판내시부 이효지(李孝智)에게 중창할 것을 명.
그리고 궁중에서 절약한 물품을 쌀과 베로 계산해
내수사(內需司)에 주어 경비에 보태 쓰도록 하였다.
이 때 대왕대비도 협력하여 1471년 2월 공사를 시작.
국민을 부역시키지 말고 노역에 대한 삯을 주도록 명.
당시 한양은 흉년이 들었으므로
사람들이 다투어 공사에 참여하여
그해 10월 완공하였는데, 총 119 칸.
이 절의 설계는 화엄종의 고승 설준(雪峻)이 맡았는데,
법당에서부터 방앗간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단청의 아름다움 또한 빼어나서
그 아름다움이 봉선사(奉先寺)와 함께 쌍벽을 이루었다고 한다.
인수대비는 절을 운영하기 위해
특별히 미곡 100섬을 시주하였고,
사찰 집기 등을 별도로 마련해 주었다.
1472년 초파일 낙성법회를 크게 실시,
이때 여러 대승경전(大乘經典)을 간행.
이날 오색구름이 일고
향기가 절 주위에 가득했으며,
서기가 하늘로 뻗쳤다고 전한다.
성종도 또한 교지를 내려
인수대비가 시주한 전답과 노비 외에도
이 절 승려들의 여러 가지 부역을 면제시켜,
번뇌 없이 수행할 수 있도록 할 것을 명하였다.
인수대비의 중창 이후 이 절의 역사는 잘 알 수 없으나,
그 뒤 불탔으며 남은 건물도 퇴락하여 폐사 상태에 이르자,
1900년 초 월초거연(月初巨淵)이 고종의 도움을 받아 다시 중창
1995년 주지 한자용(韓慈容)이 법당 안팎에 황금보전을 신축하였다.
현재, 동양 최대의 황금사원으로 명성 높은.,수국사.
건물로는 황금보전과 대웅전, 관음전, 요사채 등이 있다.
유물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미륵불입상, 관세음보살입상.
대웅전 안에 봉안된 4점의 불화는 1907년 왕실에서 발원하여
태자와 태자비, 의친왕과 의친왕비, 영친왕의 안녕과 천수를 기원.
조선 후기 불화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이 절은 왕실의 비호를 받았다.
수국사는 한양과 가까운 경치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유명학자들과 문필가들이 이곳을 찾아 많은 글을 남겼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정인지(鄭麟趾)ㆍ최항(崔恒)ㆍ
서거정(徐居正)ㆍ노사신(盧思愼)ㆍ성임(成任) 등이
서오릉의 원찰인 수국사를 대상으로 지은 시들이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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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오릉에는 숙종과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
제1계비 인현왕후, 제2계비 인원왕후, 며느리이자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 희빈 장씨(장희빈)의 묘가 있다.
'희빈장씨'가 처음 안장된 곳은.,경기도 양주 인장리.
그후, 숙종 45년에 경기도 광주 진해촌으로 천장하였고,
1969년 묘소를 통과하는 도로가 생겨 대빈묘로 이전한 것.
사후에 숙종과 헤어진지 약 250년 만에
서오릉에서 숙종과 먼발치에서 재회한 것.
그러나, 그녀에게는 생전에 질투의 대상이었던
인경왕후가 서오릉 가장 높은 익릉에 안장되어 있고
제1계비 인현왕후는 숙종과 쌍분으로 명릉에 함께 안장
제2계비 인경왕후는 명릉 내에서 쌍분 곁으로 나란히 안장.
그녀는 우여곡절 끝에 기구하게
서오릉 대빈묘에 이장이 되었어도
그녀의 영혼은 편할 리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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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519년 역사 상 역대왕 27人 중에서
성군으로 추앙 받는.,세종대왕, 숙종, 영조, 정조.
숙종은 정조와 더불어 천재였던 왕으로도 유명하다.
'조선후기 부흥의 초석은
숙종이 모두 다져 놓았다.'
후대 사학자들의 공통된 평가.
성군이라도
치적이 많으면
과오도 따르는 법.
여기 서오릉에는 숙종의 비 4명이 함께 잠들어 있는데
장희빈 묘는 측은하게 가장 외진 곳에 홀로 위치해 있다.
희빈장씨는 훗날 경종으로 즉위한 왕세자 균의 어머니이다.
숙종의 정비인 인경왕후를 질투하여 죽음으로 몰고
속종의 계비 인현왕후를 모함해 폐비가 되게 하는 등
질투, 흉계, 미모로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하려 했던 여인.
결국, 사랑이 식어버린 숙종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세자의 어머니 신분이라 궁궐에서 쫓겨나지 않았고
숙종이 찾지 않는 취선당에서 독수공방 8년 끝에 사사.
장희빈은 당파싸움의 희생물로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장옥정은 남인 세력의 천거로 입궐한 궁녀로
남인들이 정권을 장악하는데 크게 기여했지만
그후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며 남인과 함께 몰락.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비운의 여인.
숙종은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다가
숙종 14년 왕자 균(경종)을 얻었다.
숙종과 장옥정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이듬해 숙종은 균을 세자로 책봉하고
소의인 장옥정을 희빈으로 봉하였다.
숙종은 그후 왕비 인형왕후 민씨를 폐비하고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하였으나 이를 후회하고
숙종 27년에 인형왕후를 복위하고 장희빈은 사사.
경기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서오릉에 있는 '대빈묘'
그 봉분 뒤편 7m 거리에는 둘레 3m 바위가 놓여있다.
장희빈의 음기를 누르기 위해 묘소 뒤에 가져다 놓은 바위.
그런데, 그 바위를 뚫고 참나무가 자라고 있어 화제거리.
일반적으로 묘역 주변은 원래 있던 바위도 치우는 게 상식.
1970년 경기 광주시에 있던 장희빈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면서
누군가 '바위로 묘역을 눌러야 장씨의 억센 기를 다스릴 수 있다'며
이곳 인근에서 커다란 바위를 대빈묘 뒤편으로 옮겨놓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천한 신분에서 국모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국정을 농단해 사약을 받는 기구한 삶을 산 여성이다.
'한 시대를 주름 잡았던 여걸' 또는 '기가 센 희대의 여성'
그녀의 묘는 당초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었고
광주군 오포면 문형리 야산에 방치되어 있었다.
1970년 대빈묘를 통과하는 도로가 만들어지며
숙종과 예종 등이 모셔진 서오릉으로 옮겨졌다.
조선 '제19대 숙종의 빈(嬪).,장희빈.
제20대 경종(景宗)의 어머니.,희빈장씨.
숙종 임금보다는 2년 연상의 여인.,장옥정.
아버지는 역관 출신인 장형(張炯),
어머니는 장형의 후처인 윤씨이다.
역관(驛官) 장현(張炫)의 종질녀이다.
어머니 윤씨는 원래 조사석 집안 여종이었다.
종모법(從母法)에 따르면, 장옥정은 천인 신분.
조선시대 자식의 신분은 어머니를 따르는.,종모법.
장옥정은 남인 세력의 천거로 입궐하게 된 궁녀.
남인들이 정권장악 목적으로 궐에 심은.,비밀병기.
그리하여, 조선시대 3대 요부와도 비견되는.,장옥정.
조선시대 3대 요부.,장녹수 , 정난정 , 김개시.
옛날이나 지금이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패자의 진실은 왜곡되기 마련이다.
'장옥정은 과연 요부였던 것일까?'
희빈 장씨는 사역원 봉사(종8품)를 지냈던 장형(張烱)과
그의 후처인 파평 윤씨(1626~1698)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동기로는 아버지 장형의 전처였던 제주 고씨(?~1645) 소생인
이복 오빠 장희식과 윤씨 소생의 동복 언니, 동복 오빠 장희재.
숙부 장현은 조선 최고의 부자이자.,역관.
어릴 때, 장현의 집에서 유복하게 성장한.,장옥정.
궁녀로 입궐 후, 각고의 노력 끝에 성종의 성은을 입는다.
장옥정은 성종이 첫눈에 반했을 만큼.,빼어난 미모.
장현이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궁궐에 투입한 것.
장옥정은 숙부 장현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을 만큼 비밀병기.
장옥정은 궐내 조 대비전에 배치되었다.
그곳에서 두살 연하인 세자 숙종과 첫만남.
왕세자 시절의 숙종에게 첫사랑이 된.,장옥정.
숙종은 즉위후 첫왕비 인경왕후 김씨를 맞았지만
첫날밤부터 장옥정의 처소를 찾을만큼.,깊은 관계.
1679년(숙종5년)에 조 대비는 장옥정을 퇴궐시킨다.
이것이 장옥정의 첫번째 쫒겨남이다.
인경왕후 김씨는 20세에 만삭의 몸으로
장옥정의 질투와 모함 속에 운명하고 만다.
1681년(숙종7년) 숙종의 계비로 간택된 15세 민씨.
숙종은 2번째 왕비인 인현왕후에게도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중, 장옥정이 측근의 도움을 받아 입궐하게 된다.
숙종이 또 다시 지나치게 장옥정 만을 가까이 하자
이번에는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가 다시 쫒아낸다.
장옥정은 두번째 쫓겨난지 5년후 28세에 다시 입궐한다.
1686년(숙종12년) 숙종은 장옥정을 다시 불러들인 것.
1688년(숙종14년) 장옥정은 숙종의 첫왕자를 출산한다
1689년(숙종15년) 첫왕자 ‘균’(훗날 경종)을 원자로 책봉.
소의 장옥정은 내명부 정1품 희빈으로 승격.
2번째 왕비인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 시킨다.
1690년(숙종16년) 장옥정은 왕비로 책봉된다.
비원 옥류천으로 가는 길목에 연못과 정자.
'연꽃이 피는 연못’이라는 애련지(愛蓮池)는
창덕궁의 불로문(不老門)을 지나 왼쪽에 있고,
애련지 북쪽에 있는 간결한 정자.,애련정(愛蓮亭).
연꽃을 좋아했던 숙종이
애련(愛蓮)이란 이름을 붙여서
애련지(愛蓮池) & 애련정(愛蓮亭).
숙종 18년(1692년)에 만들어진 연못과 정자
'숙종과 장희빈이 사랑을 나눴다.'는 정자이다.
현재, 옥류천으로 가는 길에 만나는., 두번째 연못.
숙종이 불로문을 지나 연못 가운데
섬을 쌓고 정자를 세웠다."고 하는데
그 옛섬은 없어지고 정자도 사라졌다.
"내가 연꽃을 사랑함은 더러운 곳에 처하여 있더라도
맑고 깨끗하여 은은히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이다."- 숙종-
'경종의 생모' 폐비 윤씨 장희빈은 숙종으로부터 사약을 받고 운명.
취선당은 숙종이 장옥정을 위해 지은.,처소.
'나아갈 취, 착할 선, 집 당'.,취선당(就善堂).
그러나, 사랑이 식은 후 8년간 찾지 않은.,숙종.
그녀는 취선당에 신궁을 차려놓고
폐비가 되었다가 왕비로 다시 복귀한
병든 인현왕후를 운명할때까지 저주한다.
또 한편으로 숙종의 성은을 받은 궁녀는
누구를 막론하고 은밀히 취선당으로 불러들여
가둬두고 형벌을 가하며 질투심의 극치를 드러낸다.
아들인 세자 윤(昀)이 장차 즉위하는데
걸림돌을 시전에 방지할 목적이었으리라.
그녀의 마지막 희망은 아들이 왕이 되는 것.
쌓을 저, 이을 승, 대궐 전.,저승전(儲承殿).
장희빈의 아들 세자(경종)의 동궁(東宮) 처소.
그러나, 저승전에서 사약을 마시고 숨진.,장희빈.
장희빈은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자진 형식을 취하여 사약을 마시고 운명.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 윤(昀)이 훗날 경종으로 등극.
세자가 왕위에 오르려면 죽어야 할 운명이었던.,장옥정.
그녀가 궐에서 쫓겨나면 희빈 신분이 아닌 죄인.,천민 신분.
이미 인현왕후 살해를 기도한.,대역죄인.
자진 하면, 사후에 희빈의 신분은 가능하고
고인이 된 그녀에게 대역죄를 물을 수 없는 일.
그녀가 저승전에서 사약을 마신 까닭은
자신이 죽음으로서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는
마지막 가는 길에 아들에게 사랑을 쏟은.,행위.
그당시 조선시대 종모법(從母法)에 따라
세자는 왕위에 오를 수 없는 천민으로 전락.
그래서, 숙종은 장희빈에게 자진을 명했던 것.
그러나, 장희빈이 왕명을 거역하자
자진의 형식을 취하여 사사했던 것.
조선역사 상, 궁녀 출신으로 왕비까지 되었던.,유일한 여성.
본명은 장옥정(張玉貞). 하지만 정사에는 그녀의 이름이 없다.
당시 애련정은 비원의 어수문 동쪽에 있었고
현재, 애련정 정자는 장희빈과는 관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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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동장씨 중인(中人)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어머니가 여종이었기 때문에 천인 신분이었다.
돈을 주고 속환을 받아 여종의 신세는 벗어났지만
종모법에 따라 천인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조선 왕조 역사상 유일하게
궁녀 출신으로 왕비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여인이기도 하였다.
.......................장옥정((張玉貞).....................
어려서 궁궐에 들어가 숙종의 총애를 받았던.,나인.
나인(內人)이란 임금, 왕비, 왕세자를 모시는.,궁녀.
1686년(숙종 12) 숙원(淑媛)이 되었으며,
1688년 소의(昭儀) 때 윤(경종)을 낳았다.
1689년 1월 윤이 원자로 책봉되며 정1품 희빈.
그해 2월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권하고 남인이 집권,
7월에는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가 폐위되었다.
1690년 윤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왕비로 책립되었다.
1694년 민비복위운동을 계기로 남인이 옥사를 일으켰으나
숙종이 오히려 남인을 제거하고 서인을 재집권시킨 갑술환국.
그해 4월 민비가 복위됨에 따라 다시 희빈으로 밀려났고,
오빠 장희재(張希載)와 함께 복위를 도모했으나 무산된다.
1701년 민비를 무고했다는 서인의 탄핵을 받고 사사되었다.
효종 10년(1659) 음력 9월 19일
은평구 불광1동 131번지에서 출생.
숙종27년 음력 10월 8일~10일
창경궁 취선당에서.,자진(사사).
숙종의 첫사랑이었던.,비운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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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의 가족 능과 같은.,서오능(사적 제198호.)
서오능의 다섯 릉은 경릉, 창릉, 익릉, 명릉, 홍릉.
1457년(세조 3) 세자 장(덕종으로 추존)이 죽자
안장(경릉)한 이래 1470년(성종 1) 덕종의 아우인
예종과 그 계비인 안순왕후, 1681년 익릉에 인경왕후,
1721년 명릉에 숙종과 정비 인현왕후와 계비 인원왕후,
1757년 홍릉에 정성왕후를 안장함으로써 서오릉이 되었다.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龍頭洞)에 있는.,서오능(西五陵).
그곳 5릉 중에서 하나인 명릉은 제19대 숙종(1661~1720)과
계비 인현왕후 민씨(1667~1701), 인원왕후 김씨(1687~1757)의 능.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은 동원쌍분으로 조영.
인원왕후의 능은 오른편 언덕에 단릉으로 모셔
쌍릉과 단릉, 동원이강 특이한 형식을 볼 수 있다.
숙종은 1674년 13세에 즉위 후 46년간 재위.
숙종은 전후 3차례에 걸쳐 왕비를 맞이했는데
원비 인경왕후, 둘째 인현왕후, 셋째 인원왕후.
그리고 또 한 명의 왕비가 있었는데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진 장희빈이다.
조선 역사상 집권 세력의 기복이 가장 극심하고
붕당정치의 정쟁도 심화되었던 숙종 재위시대의.,당쟁.
경신환국(숙종 6년), 기사환국(숙종 15년), 갑술환국(숙종 20년)
환국은 현종 때의 예송 논쟁을 통해 손상된 왕권과
왕실을 강화하려한 숙종의 정국 운영 방식의 결과.
숙종은 군주의 고유 권한인 인사권을 강력하게 행사,
환국을 사용해 정권교체로 붕당 내의 대립을 촉발하고
군주에 대한 충성심을 유도해 사회 체제전반을 정비 작업.
경신환국은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이 등용된 사건.
'삼복의 변'으로 영의정 허적의 서자인 허견이 역모 건.
이는 남인과 종친이 연루된 사건으로 남인의 핵심 인물인
허적과 윤휴가 사사되었고 주요 관직은 서인으로 교체되었다.
또한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최상의 예우로 등용된다.
이런 상황은 10년 가까이 이어지는데 희빈 장 씨의 등장.
당시 숙종의 가장 큰 고민은 아직 후사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숙종 14년(1688) 소의 장씨가
마침내, 왕자(뒤의 경종)를 출산하자
숙종은 곧바로 왕자를 원자로 삼았고
장씨를 희빈에 책봉하며 정세는 급변.
서인은 숙종의 처사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국왕과 왕비가 아직 젊어
왕자를 충분히 생산할 수 있다는 이유였지만,
핵심적인 이유는 희빈이 남인과 가까웠기 때문.
서인의 영수 송시열은 이런 전례는
중국에도 없다며 숙종 의도에 반대했다.
그러자 숙종은 반대하는 신하들의 숙청을 단행.
서인 거두 송시열은 삭탈관직 후 유배
조정의 주요 관직을 남인으로 교체했다.
앞서 처벌된 주요 남인의 신원도 이뤄졌다.
허적, 윤휴, 유혁연 등은 관작이 회복.
기사환국은 서인에게 큰 파국이었는데,
서인을 상징하는 이이는 출향 송시열 사사.
더불어, 중전 민비를 서인으로 폐출해
사가로 내보낸뒤 장희빈을 왕비로 삼았다.
또한, 서인이 장악했던
조정은 남인으로 교체된다.
하지만 상황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남인은 기사환국으로 정권을 장악했지만,
집권 면모를 못 보여줘 갑술환국을 불러왔다.
이 당시 궁궐의 중요한 변화는 숙원 최씨
(뒤의 영조 어머니인 숙빈 최 씨)가 책봉되어
총애를 받기 시작하면서 중전의 입지가 좁아진 것.
상황은 급변해 중전의 오빠인 장희재가
숙의를 독살하려고 한다는 고변이 들어왔다.
그뒤 과정과 결과는 기사환국을 그대로 뒤집은 것.
김익훈, 김석주, 송시열 등이 복관.
이이, 성혼은 다시 문묘에 종사되고,
영의정 권대운을 비롯한 남인 세력은
주요 관직에서 쫓겨나거나 처벌되었다.
핵심 문제였던 중전의 교체도 즉각 이루어졌다.
장씨는 희빈으로 강등되고, 민씨는 중전으로 복귀.
권력을 둘러싼 궁중의 갈등은 비극적으로 종결되었다.
인현왕후가 사망한뒤 장씨와 그 일가가
자신의 거처에 신당을 짓고 왕후를 저주.
그 사실이 드러나자, 숙종은 장씨를 사사.
그뒤 숙종의 치세는 서인이 주도하면서 종결.
극심한 당쟁 속에서 일세를 살았지만
46년 동안 숙종의 업적이 없을 리 없다.
대동법을 경상도와 황해도까지 확대했으며,
당시 상평통보는 조선후기 대표적 화폐로 유통.
국방과 군역도 임진왜란 이후 추진된 군제로 개편.
또한 북한산성을 크게 개축해 도성 방어를 강화했다.
일본과도 활발하게 교류해 통신사를 파견하고
막부로부터 왜인의 울릉도 출입 금지를 보장받아
울릉도를 조선에 귀속시켜는 영토분쟁 문제를 해결.
또한 북쪽 변경에 무창과 자성 2진을 설치,
옛 땅의 회복 운동을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조선인의 압록강 출입이 잦아지며 인삼 채취사건
그 사건을 발단으로 청과 국경선 분쟁이 일어나자
1712년 청과 협의해 유명한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숙종은 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 세 왕비를 두었다.
그러나, 이들에게서는 왕자를 얻지 못했고 희빈 장 씨와
숙빈 최씨에게서 각각 경종과 영조가 되는 왕자를 낳았다.
'조선 왕실사를 화려하게 수놓은 장희빈' 대빈묘는
경릉에서 홍릉으로 들어가는 좌측 후미진 곳에 조성.
왕을 낳은 생모는 묘에서 원으로 격상하는 것이 일반적.
그러나, 희빈은 왕의 생모임에도
폐비가 된 관계로.,원이 아닌 묘(墓).
봉분 주위를 곡장이 둘러싸고 있으며,
장명등과 문인석 한 쌍만 배치되어 있다.
보통 후궁들의 묘소 중 원에는
문인석과 석마 등을 갖추었으나
대빈묘(大嬪墓에는 석마도 없다.
위치나 전체적인 꾸밈새, 작은 석물 등이
일반 사대부 묘보다 초라해 장희빈에 대한
후대 조선 역사가들의 평가를 짐작할 수 있다.
처음에는 '경기도 양주 인장리'에 안장
숙종때 '묘에 물기가 있다.'는 상소가 있자
1719년(숙종 45) 경기도 광주 진해촌으로 천장했고,
1969년 묘소를 통과하는 도로가 생겨 숙종 곁으로 이전했다.
장희빈은 역관 출신에서 대부호가 된 장경의 딸.
조선 왕조 최초로 역관 집안에서 왕비가 된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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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양반과 상인(常人)의 중간 신분층.,중인.
중인(中人)이란 말은 대체로 17세기 이후부터 썼다.
초기에는 고급 기술관원을 지칭했으나
차츰 그 의미가 한산방외(閑散方外)를 포함한
반·상(常)의 중간신분층을 총칭하는 용어로 쓰였다.
기술관원을 뜻하는 중인은 역관(譯官)·의관(醫官)·산관(算官)·
율관(律官)·음양관(陰陽官)·사자관(寫字官)·역관(曆官) 등을 총칭
"중인" 이란 명칭은 그들의 거주지가
한양 중심부(중구) 인데서 생겼다는 견해.
당론에 가담하지 않는 중립분자들이라는 견해.
조선 초 기술관원들은
법규상으로나, 실제에서나
현관서용(顯官敍用)에 제한받지 않았다.
성종대 이후 사림세력이 정계 진출.
기술학을 천시하는 경향이 강해졌고,
이에 따라 기술관원 지위도 낮아졌다.
16세기 중엽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에서
서얼(서자, 얼자)의 잡과 응시가 허용되면서
유림은 기술관원을 더욱 천시하는 풍조가 생겼다.
17세기 이후 고급 기술관원을 지칭하던
중인 세력의 세습화 경향은 뚜렷해졌다.
중인에는 기술관과 서얼을 비롯하여
문관의 하급인 서리(胥吏), 무관의 하급인 군교,
지방의 향리(鄕吏)와 토관(土官) 등 신분도 포함된다.
실용 기술이나 행정 실무를 맡은 이들은
관직에 진출해도 승진에 제한을 받았으며
이러한 법적 제도가 한품서용(限品敍用)이다.
그들의 기술직은 점차 세습되는 등
양반에 비해서는 차별대우를 받았으나
상인보다는 상위에 위치한 하급 지배신분층.
정약용(丁若鏞)의 가좌표(家坐表)에 의하면
‘중(中)’으로 표기된 신분을 ‘향(鄕)’의 아래이고
‘양(良)’의 위라 하고, ‘향’은 ‘토관의 무리’라 하며,
‘양’은 ‘낮으나 천하지 않은 자’라 했으니 중인은
향족과 양인 사이에 있던 중간층임을 알 수 있다.
≪균역사목 均役事目≫에서는 유족한 양인으로서
"교생(校生) 선무군관(選武軍官)는 스스로 중인이다."
자칭 중인이란 이들은 양인에서 중인으로 상승한 부류.
이러한 산발적인 중인 신분 개념은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와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 속에
중인에 관하여 종합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조선시대 잡과(雜科) 합격자는 모두 6122명. 역과 2976, 의과 1548, 음양과 865, 율과 733. '하급관리 등용문'이었던.,잡과 응시 시험제도. 조선시대 통역관을 선발하는 잡과 시험.,역과. 역과에는 한학(漢學:中國語)·몽학(蒙學:몽골어)· 여진학(女眞學:女眞語)·왜학(倭學:日本語) 등 4종류. 이 가운데 대명외교(對明外交) 중요성 때문에 한학이 가장 중시. 역관(譯官)과 의관(醫官)만 기술관의 한품(限品)인 정3품 당하관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잡과 가운데 역과는 의과와 함께 가장 중요한 과목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잡과 중에서 역과(譯科)를 수위에 두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음양과가 수위였다. ......................음양과( 陰陽科)................... 천문학·지리학·명과학을 공부한 사람을 대상으로 천문·지리·기후·점복 등 일을 담당하는 잡과 中 하나. ...................................................................... 산학(算學)은 정조 즉위년(1756)부터 주학(籌學)이라고 했는데, 잡과에서 제외. 취재(取才)를 통하여 1627명 이상 선발했다. ....................산학(算學)................... 국자감에 설치되었던 고려시대와는 달리 재화·회계 경제 업무를 담당하는 호조에 소속 즉 호조에서 재정·회계를 담당하는 기술관료인 산사 양성을 위해서 설치하고 이들의 교육을 위해 종6품 산학교수 1명과 종9품 산학훈도 1명을 두었다. 교육대상은 중인 계층으로 정원은 15명이었다. 이들은 교육을 마치고 시험을 통해 기술관으로 발탁. 중인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어 취재를 통해 기술관리로 선발. 이때 시험과목은 상명산법(詳明算法) 산학계몽(算學啓蒙)· 양휘산(楊輝算) 등. 조선 후기 영조대에는 산학 규모를 확대하여 정원을 61명으로 늘렸다. ................................ 역과가 가장 많은 합격자를 냈는데, 인조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에 항복한 후 역관의 업무가 중요해진 때문. 조정에서는 사신들의 여비를 공식적으로 지급하지 않고, 1인당 인삼 여덟자루(80근)를 중국에 가져다 팔아 쓰게 했다. 돌아올 때 골동품이나 사치품을 사다 팔면 몇배 장사가 되었다. 인조 때는 인삼이 귀해지자, 인삼 1근에 은 25냥으로 쳐서 2000냥을 가져다 무역하게 하였다. 사신들은 중국 장사꾼과 만날 수 없어 사신들의 몫까지 역관들이 대신 무역했다. 하여, 역관들이 무역을 통해 막대한 재산을 축적.
한양 돈줄은 역관의 손에 달려 있었다. 연암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에서 허생이 돈을 빌린 갑부 변씨도 역관. 역관들은 막대한 재산과 해박한 국제정세 이를 바탕으로 정권의 핵심에까지 다가갔다. 역관의 딸로 왕비에까지 오른 장희빈이 대표적. 인동 장씨는 역과 합격자가 22명뿐이라 조선시대 역관 전체의 1%도 채 안되지만, 1등 합격자가 많았고 정치적, 경제적 수완이 뛰어난 인물들이 나와서 역관 명문을 이루었다. 원래 양반 가문인 인동 장씨 집안에서는 20대 경인과 응인 대에 처음 역관이 되었다. 장경인은 1628년 명나라에 진향사(進香使) 역관으로 갔다가 사신이 재촉해 시세에 맞게 팔 수 없게 되자 중국인 앞에서 서장관을 욕해 나중에 심문을 당했다. 장경인은 당시 경험이 없어 첫 장사에 실패한 것이다. 그의 맏아들 장현(張炫)이 1639년 역과 1등으로 합격해 사역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고, 40년간 30차례 북경을 왕래.
다른 역관들도 인삼 무역을 통해 부자가 되었지만, 장현은 딸을 효종의 궁녀로 넣어, 왕을 후견인 삼았다. 효종 4년(1653) 7월에 대사간 홍명하가 자신의 벼슬을 바꿔달라고 아뢰었다. 사신들이 압록강을 건널 때에 화물 50여 바리에 내패(內牌)가 꽂혀 있어 물의를 일으킨데다, 불법무역을 심문 당하던 역관 김귀인이 동료 이름을 끌어대자 형관이 말린 탓. 제대로 조사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는 뜻이었다. 내패(內牌)는 내수사(內需司)의 짐이라는 꼬리표였으니, 역관 장현의 짐이란 것을 알았지만 아무도 손댈 수 없었다. 효종은 “풍문이 사실과 다르다.”면서 장현을 감싼 뒤에, 도강 초기에 50바리라는 것을 알았으면 그때 조사하지 않고 왜 지금에 와서 시끄럽게 구느냐고 오히려 내수사를 나무랐다. 이날 실록 기사에는 장현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사관은 이 기사 끝에 “성명을 끌어댄 자는 역관 장현인데, 궁인(宮人)의 아버지이다.”라고 붙였다.
대사간이나 효종의 입에서는 장현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지만,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던 것.
이 한번의 무역만으로도 엄청난 이익을 남겼는데, 무역량과 그 이익은 해가 가고 직급이 높아질수록 눈덩이처럼 커졌다. 심지어는 화포(火砲)까지 밀수입하다 청나라 관원에게 적발되기까지 했다. 염초(焰硝)나 유황(硫黃), 화포 등의 무기류는 금수품(禁輸品)이다. 선양에서 모욕적인 인질생활을 겪었던 효종은 복수를 다짐하며 북벌책(北伐策)을 강구했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무기를 사들였다. 현종 7년 최선일이 염초와 유황을 밀수하다 걸려 청 사신에게 문책을 당하고 몇천금 뇌물을 썼다. 숙종 17년(1691) 6월 장현의 밀수건이 문서로 넘어왔다. 청 화포 25대를 구해오다가 봉황성장(鳳凰城將)에게 적발. 조정은 할 수 없이 “장현을 2급 강등시키겠다.”고 청에 알렸다. 그가 역모를 꾸미지 않았다면, 화포는 당연히 나라에서 쓸 물건.
적어도 화포 밀수입 건은 왕의 묵인하에 저지른 사건. 장현의 신임이 그만큼 두터웠고, 그에 따른 경제적인 이익도 막대. 응인은 경인과 사촌 간 선조 16년(1583년) 의주에 역학훈도(譯學訓導)로 있었다. 목사와 통군정에 올라 시를 짓는데, 술을 따르고 운을 띄자 술잔이 식기 전에 시를 지을 정도로 문학적인 재능이 뛰어났다. 그의 아들 장형(張炯)도 취재를 거쳐 사역원 봉사를 지냈다. 그의 장인 윤성립은 밀양 변씨 역관 집안의 사위. 장형의 맏아들 장희식은 효종 8년(1657) 역과에 장원. 한학직장(漢學直長)이 되었으며, 작은아들 장희재는 총융사까지 올랐다. 딸이 장희빈이니, 장희빈의 외할머니는 조선 최고갑부 역관 변승업의 큰할아버지 딸. 역관명문 인동장씨는 안밖으로 역관 집안들과 혼맥을 이루면서, 명문역관 가문들의 핵심이 되었다. 장희빈이 처음 종4품 후궁인 숙원(淑媛)에 봉해지던 숙종 12년(1686) 12월10일에 사관은 이렇게 기록했다.
장씨를 책봉하여 숙원으로 삼았다. 전에 역관 장현은 온나라의 큰 부자로 복창군 이정과 복선군 이남의 심복이었다가 경신년(1680) 옥사에 형을 받고 멀리 유배되었는데, 숙원 장씨는 바로 인동장씨 장현의 종질녀(從姪女)이다. 나인(內人)으로 뽑혀 궁중으로 들어왔는데, 얼굴이 아주 아름다웠다. 경신년(1680)에 인경왕후 승하 후 비로소 은총을 받았다.
왕실과 가까이 했던 장현은 경신대출척으로 한때 밀려났지만, 바로 그해 오촌 조카딸 장희빈이 숙종의 눈에 들면서 기사회생. 장현이 딸을 궁녀로 들였던 것처럼, 장형도 딸을 궁녀로 들였다. 인경왕후는 노론 김만기의 딸이니, <구운몽>의 작가 김만중의 조카딸.
숙종 14년(1688) 10월에 장씨가 아들을 낳자 숙종은 노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원자로 정하고 소의(昭儀 : 정2품) 장씨를 희빈(정1품)에 봉했다.
노론을 견제하려던 왕실 종친과 남인들이 장희재 주변에 모여들자,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상소. “원자로 정하는 것이 너무 이르다.”- 송시열 - 결국, 남인의 공격을 받고 삭탈관직을 당했다. 노론의 등쌀이 지겨웠던 숙종 장희빈에게 마음이 기울면서 남인을 편들어준 결과이다. 그 다음날로부터 목내선을 좌의정에, 김덕원을 우의정에, 심재를 우의정에 임명. 그후 정국은 뒤바뀌었다. 이것이 바로 기사환국이다. 그로부터 장희빈의 아버지 장형은 영의정, 장수는 좌의정, 할아버지 장경인은 우의정 추증. 인동장씨 역관 집안이 정국의 핵심에 들게 되었다. “역관 장현이 청나라 내각의 기밀문서를 얻어온 공로를 표창." “장현이 600금이나 비용을 쓴 점을 감안해 그 자손에게라도 벼슬을 수여하여 주십사...” 이미 품계가 숭록대부(종1품)까지 올라 더 이상 오를 벼슬이 없었던.,역관 장현. “그 자손에게라도 한 급을 올리라.” -숙종 -.
장희빈이 왕비로 책봉되자, 오빠 장희재도 포도대장을 거쳐 총융사에 올라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숙종실록 18년 10월24일............... 왕이 주강(晝講)에 나오자, 무신 장희재가 아뢰었다. “신이 주관하고 있는 총융청은 군수(軍需)가 피폐하므로, 병조판서 민종도와 상의하였습니다. 병조의 은 1만냥을 꿔다가 장차 교련관에게 주고, 사신이 북경에 갈 적에 같이 가서 잘 처리하여 그 이득을 가지고 동(銅)을 수입해 주전(鑄錢) 재료로 삼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때 민종도와 장희재가 서로 안팎이 되어 마구 뇌물 주기를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했었다. .................................................................
숙종이 기사환국을 통해 당쟁으로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려고 하자, 남인들은 그 기회를 이용해 집권하고 서인에게 복수하려 했다.
장희재는 국고를 이용해 역관의 무역방식으로 재산을 불렸다. 후대의 사관은 군수(軍需)를 빙자한 무역의 이익이 결국은 두 사람의 뇌물로 쓰였을 것이라 판단했다. 수출과 수입을 통해 몇배를 벌어들인 뒤에 그 구리로 동전까지 찍어 시중에 주전(鑄錢)을 풀었으니, 얼마가 남는 장사였는지 계산하기 힘들다. ...................인동장씨(仁同張氏)................. 인동장씨 시조.,삼중대광공(三重大匡公) 장금용. 고려 초 인동에 정착하여 이로부터 1천여 년 동안 현재 그 자손이 38대(代)까지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역사적으로 많은 명현석학(名賢碩學)과 충신열사(忠臣烈士)를 배출한.,인동장씨. 천여년 인동에 세거하는 동안 숱한 전란(戰亂)을 겪으면서도 종가(宗家)와 유지(遺址)를 보존.
4·19혁명 이후 민주당 정권에서 총리.,장면(張勉). 한국은행 부총재, 조선일보·한국일보 사장.,장기영. 이 외에도 독립운동가 명문 가문가.,장병상씨 4형제. 둘째 장충식 후지필름 대표, 셋째 장재식(전 국회의원) 넷째가 뉴욕대 교수와 한전 사장을 지낸 장영식씨이다. 그 손자들 중에선 장하진 전 여성부 장관. 장하성(고대 교수), 장하준(케임브리지대 교수), 장하석(옥스포드대 교수), 장하상(전 보잉사 이사) 등. 장기욱, 장성만, 장충식, 장동식(전 국회의원), 장덕진(전 국회의원, 농수산부 장관), 등이 있다. 학계와 언론계에는 장충식(단국대 총장), 장왕록(서울대 교수), 장강재(한국일보 사장), 장두성(언론인), 장명수(전 전북대 총장) 등이 있다.
또 배우 장동건, 가수 장우혁, 역도선수 장미란 등.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