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봄에 가고 싶었던 여수
여수는 서울을 제외하면 경주와 부산에 이어 내가 가장 많이 여행을 간 도시다. 2012년에 여수 엑스포가 열릴 당시 무려 세 번이나 방문했으며, 엑스포가 끝난 뒤에도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가거나 혼자 가기도 했다. 여수엑스포는 엄청난 인파 속에서 수많은 볼 거리가 있어 여러 번 방문했다고 하지만, 여수가 과연 여러 번 방문할 만한 도시인가라는 물음에 의문이 생길 것이다. 여수에서 신도시라 불리는 여천 지역은 딱히 볼 거리가 없으며 여수 구시가도 열심히 발품을 팔면 오동도・진남관・여수엑스포박람회장 등의 명소를 하루 만에 다 둘러보는 것도 가능하다.
여수의 상징인 오동도
여수를 여러 번 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여수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저 멀리 거문도에 가서 백도 유람선을 타려고 했는데, 설 명절이라 유람선이 운행하지 않아 거문도 본섬만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2월 말에 오동도가 동백으로 뒤덮인 모습을 보려 했지만 동백이 만개하는 건 3월 말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러한 연유로 여수를 여러 번 방문한 끝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고, 이번에 소개할 오동도 또한 세 번의 방문 끝에 섬의 상징인 동백을 마음껏 만끽할 수 있었다.
국립공원 이야기 20 - 여수 (麗水)
여수는 전라남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인구인 278,999명을 가진 도시다. 여수의 지명은 고려 태조 왕건이 삼국을 통일한 뒤 전국을 순행할 때, “여수가 인심이 좋고 여인들이 아름다운 이유가 무엇이냐?”라고 물었을 때 “물이 좋아서 인심이 좋고 여인들이 아름답습니다.”라고 답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원래 여수는 전라남도에서 가장 큰 도시였지만 광양에 포스코가 생기고 순천에도 산업단지가 생겼으며 육로의 발달로 인해 이웃한 두 도시가 점점 커지는 걸 가만히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현재도 여수는 전라남도 전체 수출액의 74.4%를 담당하고 있는 산업도시이며, 연간 1,316만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등 다시 옛 명성을 부활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
여수는 순천에서 좁은 목처럼 연결되어 있는 여수반도와 남해의 수많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서쪽으로는 고흥군, 북쪽으로는 순천시, 동쪽으로는 광양시와 경상남도 남해군, 그리고 남쪽에는 여수에 속해 있는 수많은 섬들이 떠 있는 남해가 있다. 구 여수시내 동쪽은 한려해상 국립공원에 속해있으며, 돌산도를 포함한 남부와 서부는 다도해해상 국립공원에 속해 있다. 두 국립공원에 여수가 걸쳐있다는 것은 여수 앞 바다와 여수의 섬들이 아름다운 절경을 자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수는 군산처럼 쇠락해가는 지방 산업도시였지만 2010년 열린 여수엑스포를 기점으로 급격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다도해해상 국립공원에 속한 돌산도의 개발이 가속화되었으며, 옛날의 조용했던 풍경은 점차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빈 집으로 가득차 있던 구도심은 관광객들의 방문으로 다시 활성화되었으며, 버스커버스커의 ‘여수 밤바다’라는 노래 덕분에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여수는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통영이 경상우수영이 있다면 여수에는 전라좌수영이 있었다. 부산에 있던 경상좌수영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왜군의 손아귀에 넘어가 제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충무공 이순신은 전라좌수영을 이끌던 장수로, 그의 활약으로 인해 임진왜란 초기에 전라도를 무사히 보전할 수 있었다. 1593년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고 여수에 통제사영을 설치해 여수는 삼도수군의 중심지가 되었다. 하지만 여수가 지리상으로 외딴 곳에 있어 왜군을 방어하는데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본영은 여수에 둔 채 한산도에서 수군을 이끌었다. 왜군이 남해안을 따라 진격하는데 여수를 거쳐갈 필요는 없지만 한산도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길목에 위치한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여수에서 전라좌수영을 이끈 이순신 장군
임진왜란 초기를 제외하고 여수가 주목받은 적은 없지만, 여수는 수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여 조선을 지킨 일등공신이 되었다. 낙안군수 신호(申浩), 흥양현감 배흥립(裵興立), 광양현감 어영담(魚泳潭), 보성군수 김득광(金得光), 녹도만호 정운(鄭運), 방답진첨사 이순신(李純信), 사도첨사 김완(金浣), 여도권관 김인영(金仁英) 등 여수 주변의 지방 관리들이 이순신과 힘을 합하여 왜적을 무찌르는 데 힘을 합친 것이다. 또한 지금도 수많은 보물을 가진 것으로 유명한 여수 흥국사는 의승수군 (義僧水軍)을 배출하여 이순신을 도왔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의승수군은 정규군으로 편제되어 흥국사에 주둔을 하게 된다. 흥국사가 숭유억불로 대표되는 조선 시대에도 폐사 (廢寺)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킨 건 여수 승려들의 힘이 컸던 것이다.
여수 봄바다를 대표하는 오동도!
오동도는 여수 구시가에서 도보로 10분이면 도착하는 작은 섬이다. 멀리서 보면 오동도는 단지 숲으로 뒤덮인 자그마한 섬에 지나지 않는다. 오동도로 가는 길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되었으며, 방파제를 따라 걸으면 여수의 아름다운 바다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오동도에서 바라보는 바다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워 사계절 내내 수많은 사람들이 오동도를 찾곤 한다. 하지만 오동도가 가장 아름다운 계절은 바로 봄이다. 1월부터 꽃이 피기 시작하는 동백나무가 오동도 전역에 심어져 있으며, 3월 말이 되면 바닥에 떨어진 동백꽃이 길을 아름답게 수놓는다.
오동도의 시누대와 동백나무
오동도에 동백나무가 심긴 전설 하나가 내려온다. 아리따운 한 여인이 도적떼로부터 정절을 지키기 위해 벼랑 창파에 몸을 던졌고, 뒤늦게 이를 안 남편이 오동도 기슭에 무덤을 지었는데 북풍한설이 내리는 그 해 겨울부터 하얀 눈이 쌓인 무덤가에 동백꽃이 피어나고 푸른 정절을 상징하는 시누대가 돋아났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동백꽃을 ‘여심화’라 부른다는 전설이 있다.
오동도의 기암절벽
오동도의 중앙광장에서 언덕으로 올라가면 오동도의 애달픈 전설비가 나오고 시누대로 무성한 길을 따라 걸으면 오동도를 순환하는 산책로가 나온다. 오동도는 동백꽃과 함께 시누대가 곳곳에 자라 있다. 옛날 이순신이 군사를 조련하고 시누대를 잘라 화살로 사용했다고 한다. 동백나무 군락지를 지나면 오동도 꼭대기 위에 우뚝 서 있는 하얀 등대가 나온다. 등대 주변은 후박나무와 동백나무로 뒤덮인 숲길이다. 3월 말에 찾은 오동도는 멀리서 볼 때는 연두색으로 칠한 수채화 같은 모습이지만, 섬 안으로 들어가면 붉은 색 카페트가 깔린 듯한 전혀 다른 모습이다.
오동도 동백열차
중앙광장에서 오동도 동백열차를 타면 방파제를 편하게 건너갈 수 있으며, 유람선을 타고 오동도와 금오열도를 멀리서 바라볼 수도 있다. 체력이 넉넉한 사람들은 오동도 해안가로 내려가 병풍바위・소라바위・코끼리바위 등 기암절벽을 감상하는 것도 좋다.
오동도 주변의 바다를 색다르게 감상하고 싶다면 여수 해상 케이블카를 타야 한다. 여수 시내와 돌산도를 연결하는 이순신대교 옆에 세워진 여수 해상 케이블카를 타면 항공사진으로만 볼 수 있었던 여수시내와 오동도, 여수 바다의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 대낮에 가면 영롱한 푸른 빛의 여수 바다를, 해가 지는 노을에 타면 붉게 물든 바다를, 밤에 가면 버스커버스커가 말한 ‘여수 밤바다’를 감상할 수 있다. 바다를 가로질러 가는 돌산도로 가는 케이블카라 산 능선을 따라 올라가는 통영 케이블카와 전혀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인근의 돌산 공원을 한바퀴 돌며 여수의 아름다운 바다 절경을 감상해도 좋다.
여수 역사의 중심은 구시가를 웅장하게 지키고 서 있는 진남관 (鎭南館)이다.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이었던 진해루는 정유재란 때 불타게 된다. 이순신의 후임으로 온 전라좌수사 이시언이 1599년에 75칸의 대규모 객사를 세우고, 남쪽의 왜구를 진압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진남관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진남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수군 중심 기지로서의 역사성과 함께 정면 15칸, 측면 5칸, 건물면적 240평으로 현존하는 지방관아 건물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왕실이 기거하던 궁궐이나 유교 사상의 중심이었던 종묘 정전을 제외하면 이만한 규모의 목조 건물은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과 진남관 단 두 곳 뿐이다. 진남관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1년 보물에서 국보 제301호로 승격되었다.
고소동 벽화마을
여수 봄바다를 감상할 수 있는 또 다른 장소는 고소동 벽화마을이다. 바다를 마주보고 있는 언덕 위에 세워진 마을의 골목길을 따라 걸으면 어디서든 여수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원래 아는 사람만 가던 숨겨진 장소였던 벽화마을에는 현재 수많은 카페가 들어서 커피를 마시며 여수 바다 경관을 감상할 수도 있다.
여수 산업단지의 야경
여수 밤바다도 멋있지만 여수에는 또 다른 야경 명소도 있다. 발품을 팔아야 하며 밤에 사람들이 다니지도 않는 산길을 올라야 한다는 단점도 있지만 언덕에 올라서서 바라보는 풍경은 여수 밤바다 못지 않게 멋있다. 여수에서 순천으로 가는 화치동에 대규모의 여수 산업단지가 들어서 있는데, 이 곳이 바로 여수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장소다. 낮에는 공장으로 뒤덮여 삭막한 풍경이지만, 밤에 이 곳에 방문하면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여수 산업의 중심지를 두 눈으로 만끽할 수 있다.
한려해상 국립공원의 끝이자 다도해해상 국립공원의 시작점인 여수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한려해상 국립공원에 속한 오동도와 여수 해상 케이블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진남관을 비롯해 만성리굴과 흥국사, 애양원 등 여수는 역사적인 명소도 많아 시간을 내어 먼 곳까지 가 보는 것도 좋다. 이순신대교를 통해 돌산도로 넘어가 남쪽 끝에 있는 향일암은 다도해해상 국립공원의 시작점이다. 향일암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암자의 이름답게 환상적인 경관을 선사한다. 향일암에서 서쪽으로 펼쳐지는 바다에는 한려해상 못지않게 아름다운 섬들이 수놓아져 있다. 거문도・청산도・금오도・보길도・흑산도・홍도 등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섬들이 모두 다도해해상 국립공원에 속해 있는 것이다.
사천 케이블카를 타고 본 삼천포 대교
다도해해상 국립공원의 섬들은 전라남도 남쪽 끝에 있어 찾기가 쉽지 않다. 그 때문인지 머나 먼 이 곳 섬들까지 가기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려해상 국립공원의 아름다움을 머리 속에 간직한 터라 다도해해상 국립공원도 방문하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다. 다음 여행기에 이어서 소개하기엔 한려해상 국립공원이 너무나 길었던 탓에 대한민국의 다른 아름다운 국립공원 몇 군데를 더 소개한 뒤 다도해에 대해 쓰고자 한다. 한려해상 국립공원 여행기의 끝도 여수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비록 크기는 작지만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사천 지구를 끝으로 한려해상 국립공원 여행기를 마치고자 한다.